서동요의 배경설화
무왕(武王 : ? ~ 641 )
백제 제30대 왕(600∼641). 이름 장.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다. 관륵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지리·역법 등에 대한 서적과 불교를 전달하게 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향가인 <서동요>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작품 전문>
<감상>
善花公主主隱
선화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남 몰래 짝 맞추어 두고
薯童房乙
맛둥방을
夜矣卵乙抱遣去如
밤에 알을 안고 간다.
백제의 서동(薯童: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 지었다는 한국 최초의 4구체 향가. 민요 형식의 이 노래는 이두로 표기된 원문과 함께 그 설화가 《삼국유사》 권2 무왕조에 실려 전한다. 즉, 무왕이 어릴 때 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사모하던 끝에 머리를 깎고 중처럼 차려 신라 서울에 와서 마를 가지고 성 안의 아이들에게 선심을 쓰며 이 노래를 지어 그들에게 부르도록 하였다.
내용은 선화공주가 밤마다 몰래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는 것이었는데, 이 노래가 대궐 안에까지 퍼지자 왕은 마침내 공주를 귀양보내게 되었다. 이에 서동이 길목에 나와 기다리다가 함께 백제로 돌아가서 그는 임금이 되고 선화는 왕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백제 두 나라의 관계로 보아 이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부정하는 설이 있다.
가장 타당한 설은 익산 미륵사의 창건 설화로서, 백제의 멸망 후 미륵사 승려들이 절을 구하고자 신라와 미륵사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지어낸 설화라는 것이다.
<배경설화>
백제 제 30대 무왕의 어머니는 홀몸이 되어 서울 남지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지용과 통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무왕인데, 어렸을 때의 이름은 서동이었다.
기량이 측량키 어렵고, 늘 감자를 캐어 팔아서 가계를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신라 진평왕의 제 삼 공주인 선화가 재색이 무쌍하다는 소문을 그가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 서울로 와서 아이들에게 감자를 주어 어울리면서 낮이 익어진 뒤에는 스스로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하였다.
이 노래가 삽시간에 서울에 펴져서 대궐에까지 들어갔다. 대신들은 왕께 극히 간하여 공주를 멀리 정배보내기로 하였다. 공주가 귀양살이로 떠나려 할 때 왕후는 순금 한말을 주어 보냈다 한다.
공주가 배소로 가다 도중에 서동이 나와 절하고 侍衛하여 가니까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는 모르나, 흡족히 여겨서 그냥 두었다. 이리하여 함께 가는 도중에, 드디어 소동의 소원이 성취되었는데, 공주는 서동의 이름을 듣고 "동요가 맞았다" 하였다 한다. <삼국유사 권2 무왕 조>
무왕(武王 : ? ~ 641 )
백제 제30대 왕(600∼641). 이름 장.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다. 관륵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지리·역법 등에 대한 서적과 불교를 전달하게 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향가인 <서동요>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작품 전문>
<감상>
善花公主主隱
선화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남 몰래 짝 맞추어 두고
薯童房乙
맛둥방을
夜矣卵乙抱遣去如
밤에 알을 안고 간다.
백제의 서동(薯童: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 지었다는 한국 최초의 4구체 향가. 민요 형식의 이 노래는 이두로 표기된 원문과 함께 그 설화가 《삼국유사》 권2 무왕조에 실려 전한다. 즉, 무왕이 어릴 때 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사모하던 끝에 머리를 깎고 중처럼 차려 신라 서울에 와서 마를 가지고 성 안의 아이들에게 선심을 쓰며 이 노래를 지어 그들에게 부르도록 하였다.
내용은 선화공주가 밤마다 몰래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는 것이었는데, 이 노래가 대궐 안에까지 퍼지자 왕은 마침내 공주를 귀양보내게 되었다. 이에 서동이 길목에 나와 기다리다가 함께 백제로 돌아가서 그는 임금이 되고 선화는 왕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백제 두 나라의 관계로 보아 이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부정하는 설이 있다.
가장 타당한 설은 익산 미륵사의 창건 설화로서, 백제의 멸망 후 미륵사 승려들이 절을 구하고자 신라와 미륵사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지어낸 설화라는 것이다.
<배경설화>
백제 제 30대 무왕의 어머니는 홀몸이 되어 서울 남지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지용과 통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무왕인데, 어렸을 때의 이름은 서동이었다.
기량이 측량키 어렵고, 늘 감자를 캐어 팔아서 가계를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신라 진평왕의 제 삼 공주인 선화가 재색이 무쌍하다는 소문을 그가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 서울로 와서 아이들에게 감자를 주어 어울리면서 낮이 익어진 뒤에는 스스로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하였다.
이 노래가 삽시간에 서울에 펴져서 대궐에까지 들어갔다. 대신들은 왕께 극히 간하여 공주를 멀리 정배보내기로 하였다. 공주가 귀양살이로 떠나려 할 때 왕후는 순금 한말을 주어 보냈다 한다.
공주가 배소로 가다 도중에 서동이 나와 절하고 侍衛하여 가니까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는 모르나, 흡족히 여겨서 그냥 두었다. 이리하여 함께 가는 도중에, 드디어 소동의 소원이 성취되었는데, 공주는 서동의 이름을 듣고 "동요가 맞았다" 하였다 한다. <삼국유사 권2 무왕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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