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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자교리반

11. 성경의 역사적 배경 5(마카베오 반란, 하스모네아 왕조, 로마시대)

작성자본당신부|작성시간20.05.22|조회수1,036 목록 댓글 0

성경의 역사적 배경 (5)

 

1. 마카베오기 상하권의 내용과 배경이 됩니다.

2. 교리 시간에 나눠드린 이스라엘 역사 연대표를 참조하시면 좋습니다.

3. 성경에 기록된 내용보다 훨씬 복잡한 이름과 연대가 등장합니다. 이민족의 지배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살아왔었고, 구약의 시대가 마무리되고 이제 신약의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1. 마카베오의 반란(기원전 175-135)

 

그리스 제국의 헬레니즘화를 진행하면서 많은 유다인들은 극심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모든 유다인이 헬레니즘화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각기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다르게 반응하였다. 유다인 중에서도 상당히 많은 사람이 겁에 질리거나 금전 때문에 혹은 출세욕이나 다른 동기로 인해 자기 신앙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에는 사제단에 속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의 나쁜 표양은 주민 상당수를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통적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은 숨어 살거나 멀리 떠나야만 했다. 마카베오 상권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그리스 문명을 강제로 주입시키려는 셀류코스 왕조의 노력에 맞선 유다인의 저항의 역사를 담고 있다.

 

기원전 169년에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을 점령하고 그곳에서 여러 보물들을 약탈한 사건은 예루살렘에서 이교예배가 시작된 발단이 되었고, 종교박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야만적인 행위와 예루살렘 성전모독 사건은 하느님 백성의 신앙과 영웅심을 드러내는 저항 운동을 불러일이키는 계기가 되었다.

 

기원전 167년 모데인 마을의 제관이었던마타티아스가 다섯 아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일으킨 것이다(1마카 2). 그는 모데인 읍내에 세워진 이교도 제단을 헐어버리고 이교신들에게 공공연하게 분향을 올리던 배교자 유다인들을 죽여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읍내의 이교제사를 감독하러 온 안티오쿠스 임금의 사신까지 죽여버렸다. 마타티아스는 이 일을 저지른 후 온 가족을 거느리고 산으로 피해갔다. 그의 용기와 사제로서의 권위 때문에, 억압에 시달리며 지도자를 찾고 있던 유다인들은 그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그때 헬레니즘에 반대하고 조상의 전례와 신앙을 고집하는 경건주의자들(하시딤)이 마타티아스의 독립운동에 많이 가담하였다.

 

그리하여 유격대가 조직되었고, 이들은 촌락들을 휩쓸고 돌아다니며 이교 제단을 헐어버리고 유다인을 핍박하는 이방인들과 그들의 앞잡이가 된 동포들을 처형하였다. 고된 지하운동 생활로 마타티아스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는 눈을 감기 전에 아들들과 동지들에게 끝까지 승리하라고 독려하였다.

 

1마카 2,15-30를 읽으십시오


 

2. 하스모네아 가문

 

마타티아스가 죽은 뒤, 그의 셋째 아들 유다가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힘이 장사인데다가 매우 유능한 지휘관이으로서, 별명이 망치란 뜻의 마카베오라고도 불렸다. 국제적 정세의 혼란을 틈타 종교적 독립을 쟁취한 유다 마카베오는 이방인에 의해 더렵혀진 성전을 정화하고 성전에서의 예배를 다시 부활시켰다.

 

유다 마카베오가 전사한 뒤에는 넷째 아들인 요나탄이 새로운 영도자가 되었다(기원전 160-142). 요나탄은 탁월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당대에는 종교적 자유를 의미했던 정치적 독립을 성취했을 뿐만 아니라, 사제가문이 아닌데도 대사제의 직위까지 겸했다. 그러나 요나탄이 사제가문이 아니었음에도 대사제의 직위에 오르자 지금까지 독립군에서 활약하던 경건주의자들(하시딤) 가운데에 요나탄을 계속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은 바리사이파를 만들었고, 요나탄을 배척하는 제관들은 에세네파를 만들게 된다. 그러나 요나탄은 무모하게도 적의 계략에 빠져 트리폰이라는 시리아 장수에게 사로잡혀 결국에는 피살되고 말았다.

 

그 뒤에는 같은 형제였던 시몬이 뒤를 이었다. 시몬은 기원전 142년에 통치자가 되었고, 그 해가 새로운 독립 국가의 원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도 그의 다른 형제들처럼 반역으로 살해당했고, 그의 아들인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뒤를 잇게 되었다.


 

3. 하스모네아 왕조 (기원전 134-63)

 

요한 히리카누스 1세부터 마카베오의 왕자들은 그 가문의 조상인 하쉬몬을 따라 하스모네아인으로 알려졌다. 히르카누스 1세는 과거 유다 왕국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 곳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마카베오 왕조가 추구했던 순수한 종교적 목적에서 멀어지자 하시딤에서 파생한 집단인 바리사이파가 그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반면 히르카누스에게 정치적으로 협력하는 종교적인 원칙을 갖고 있던 사람들(대사제, 귀족)사두가이파가 되었다. 히르카누스는 당연히 사두가이들을 지지하였다.

 

히르카누스가 죽자 그의 아들인 아리스토불루스 1세가 왕권을 잡았다. 그러나 그의 왕권은 그의 어머니의 권위 아래서 다른 네 형제들과 함께 나누도록 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토불루스는 자신의 어머니를 감옥에 보내 굶어 죽게 하고, 형제인 안티고누스를 죽였으며, 다른 세 명의 형제들은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그는 고작 1년밖에 다스리지 못했다.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아내는 감옥에 갇혀 있던 세 명의 형제들을 모두 풀어주고, 그 가운데 큰 형인 알렉산도 요나단을 왕으로 임명하고 그와 결혼하였다.

 

알렉산더 요나단은 많은 전쟁을 통해 트란스요르단과 사마리아 지역을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헬레니즘화 되어 있던 도시들을 다시 유다화하였고, 그 결과 과거 솔로몬 임금 시절의 영토와 거의 맞먹는 땅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정복민들을 강제로 유다인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추방시키는 일로 휴식을 취할 겨를이 없었다. 언제나 반대자들을 진압하거나 반란을 방지하기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도 과거 마타티아스의 넷째 아들이었던 요나탄처럼 대사제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러자 그 역시도 바리사이파의 공개적인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고,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바리사이파들이 무장투쟁을 선동하였을 때, 그들 중의 수백 명을 십자가 형에 처했다고 한다.

 

알렉산더 요나단이 죽은 뒤에 그의 미방인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기원전 76). 그녀는 물려받은 정부를 사려 깊고 지혜롭게 다스렸다. 그녀는 바리사이들과 화해하여 그들의 지지와 동의를 얻어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녀는 군사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금하여 그녀의 치세동안에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죽은 후에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기원전 67).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인 히르카누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동생인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형을 쫓아내고 왕위를 빼앗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르시토불루스에게서 등을 돌리고 그의 형이었던 히르카누스에게로 몰려갔다. 그리고 이두매아의 지도자인 안티파테르와 나밧의 지도자 아레타스 2가 히르카누스를 지원해 주려고 예루살렘으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처럼 예루살렘에서는 형제들의 왕권쟁탈로 어지러울 때,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등장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이제 하스모니아 왕조의 왕권을 둘러싼 갈등은 폼페이우스의 결정에 따라 결정될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가 즉각적으로 사태를 해결하지 않자 아리수토불루스는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군사조직을 정비하였고, 이에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3년에 강제로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아리스토불루스는 로마로 압송되었고, 유다인들의 독립국가도 끝이 나고 말았다.



4. 로마제국

 

폼페이우스는 아리스토불루스와 그의 아들 안티고누스를 로마로 압송해 갔다.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누스 2세를 대사제로 임명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으나, 실제 권력은 이두매아의 지도자로서 내란 당시 예루살렘에 군대를 파견한 안티파테르에게 있었다.


기원전 49, 로마의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시민전쟁을 벌였고, 카이사르가 승리하였고, 히르카누스 2세는 충성의 상대를 카이사르로 바꾸게 된다. 히르카누스 2세는 안티파테르에게 지휘권을 주어 몇몇 전쟁에서 카이사이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던 것이다. 이에 카이사르는 히르카누스 2세의 도움에 보답고자 한 민족의 통치자라는 직함을 주어 그의 대사제직을 승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안티파테르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주고 유다의 행정관이라는 영향력있는 지위를 주어 보답하였다. 안티파테르의 두 아들 중에서 파사엘은 예루살렘의 통치자로, 헤로데는 갈릴래아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되었다. 카이사를 암살한 이들 가운데 한 명(카시우스)이 시리아로 도망쳤는데, 안티파테르와 그의 아들 헤로데가 이들을 도와주었다. 안티파테르가 히르카누스 2세의 시종에 의해서 암살당하자 그의 아들 헤로데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히르카누스 2세는 헤로데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손녀였던 미라암네와 결혼할 것을 제의한다.

 

한편,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는 카이사르의 암살자였던 부르투스와 카시우스를 패배시키고 자기들끼리 제국을 나누어 다스리는 이른바 삼두정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옥타비아누스가 레피두스의 군대와 영토를 차지해 버려 로마제국은 두 개로 갈라지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제국의 서쪽을, 안토니오스는 제국의 동쪽을 가졌다. 헤로데와 그의 형제인 파사엘은 팔레스티나가 동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안토니우스를 지지하였다.

 

한편 하스모네아 왕조의 마지막 왕자로서 아버지 아리스토불르스와 함께 로마로 압송되었던 안티고누스가 로마에서 도주하였다. 그는 파르티안(과거 페르시아 제국의 후손들)의 도움으로 히르카누스 2, 파사엘, 그리고 헤로데를 공격하여 히르카누스 2세를 사로잡아 사제직에 부적격자가 되도록 그의 손과발을 잘라버렸다. 헤로데는 로마로 도망을 쳤고, 파사엘은 자살하고 만다.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로마로 도망쳐 온 헤로데를 유다인의 왕으로 선언해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유다 왕국을 되찾을 과업을 맡기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헤로데는 로마 군대로 보강하여 유다땅으로 돌아왔다. 안티고누스와의 3년에 걸친 전쟁 끝에 헤로데가 승리하였고 안티고누스는 사형에 처해졌디(기원전 37). 안티고누스의 죽음으로 하스모네아 가문은 끝이 났다.

 

이제 헤로데 대왕(대 헤로데)으로 불리게 된 헤로데가 그의 왕국을 시작했다. 그는 그의 권좌에 위험이 될 만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모두 잔인하게 처형하면서 그의 통치를 시작하였다. 그는 심지어 하스모네아 가문 출신의 아내인 미라암네와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까지도 죽였다.

 

몇 년 뒤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시민 전쟁(기원전 31)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자살하였고, 그래서 옥타비아누스가 저절로 전()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유다인의 왕 헤로데는 즉시 그에게 경의를 표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유다인의 왕으로서 그의 위치를 더욱 견고하게 해주었다. 나자렛 예수가 태어난 때가 바로 자칭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로 불리던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에서, 헤로데 대왕(대 헤로데)가 유다인 땅(팔레스타인)을 다스리던 때였다. 그래서 이들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에 나오게 되는 것이다.

 

루카 복음 21-7절까지 읽으십시오

 

 

5. 결론

 

우리가 어떤 사람의 가족 상황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성경의 역사적 배경을 알면 성경 내용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역사에서 광개토대왕, 이성계, 이순신, 김구와 같은 많은 인물의 이야기가 중요한 배경 역할을 하는 것처럼, 몇천 년간 계속되어 온 이스라엘의 역사도 성경의 많은 인물을 더욱 잘 알게 해주는 배경 역학을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널리 알려진 삼손과 들릴라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선택된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가 군대도 없이 외국의 침략에서 자신을 방어해야 했던 느슨한 열두 지파 시대였음을 안다면 그 이야기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군대도 없던 자신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 개별적인 인간들을 도구로 불렀던 것이다. 바로 삼손은 블레셋족의 공격에서 그의 짚들을 지키기 위하여 하느님이 선택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에서, 블레셋과 다시 싸우던 때의 이스라엘은 더 이상 지파 연맹이 아니라 군주제의 시작단계로 비록 미비하기는 하나 군대와 임금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배경으로 블레셋족의 도전 앞에서 두려워하던 이스라엘 민족의 마지막 구원자로서 젊은 다윗을 고용하는 첫 번째 임금인 사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의 부, 업적, 명예 등에 둘러싸인 왕- 그의 선친 다윗이 정비한 군사적 안정과 정치·경제적 배경으로 거슬러올라가서 그 내용을 읽어야 한다.

 

부유했던 솔로몬 왕국은 점차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빠져들어가 급기야는 내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을 배경으로 1열왕 17장에서 아합 임금의 재위시에 가뭄을 예고했던 예언자 엘리야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보아야 한다. 엘리야 예언자는 선택된 백성이 그들의 불충실 때문에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인물인 다윗과 아합을 연결하면, 우리는 그 시대가 이스라엘이 정치적·도덕적으로 절정에 이른 시대였기 때문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런 모든 예들은 역사적 배경을 아는 것이 성경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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