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전2
SoftMax. 이제는 한국의 게임, 그 중에서도 특히 RPG 분야에 그야말로 커다란, 가장 크다고 해도 무방할 만한 획을 그은 이 회사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분은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창세기전 시리즈의 모든 스토리를 평가하는 마당에 본인의 주관적인 평가를 가능한 배제하겠지만 완벽하게 배제한 채 평가할 수도 없는 미묘한 것이 스토리에 관한 평가라 생각한다.
어쩌면 작은, 한 편으로 당시로선 열악한 한국 게임 시장 규모에 비한다면 그래도 이름 있는 이 회사가 단숨에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만든 이 게임은 창세기전이란 이름으로 소위 디스켓 게임으로 널리 알려졌었다.(아마 8장이었던 것으로 안다. 본인은 정품 CD로 했음)
순수하게 스토리라는 틀 안에서만 평가했을 때, 이 작품에 마이너스를 줄 사람은 몇이나 되었을까? 일본에 컴퓨터 게임 중 RPG 분야의 유명한 파랜드 택티스조차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연령에 구애받지 않는 밝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현 바로크 멤버진의 스토리 성향이 전체적으로 그런 면이 가장 컸지만, 그보다 이전에 RPG 스토리로서, 그것도 자본적 면으로 보나 기술적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열악한 상태에서의 게임 스토리를 이 정도로까지 방대하면서도 어느 한 부분 빠지지 않게 탄탄하게 만든 것에는 칭찬을 아끼고 싶지 않다.
창세기전2의 전반적인 스토리는 한 마디로 축약하여 전체적으로 멜랑꼴릭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어설프게 코믹한 장면을 조금 삽입했지만 표가 나지 않을 만큼 선을 그었고 그것에는 순정 만화가 김 진(으음… 아는 사람들은 나의 이 한숨에 대한 의미를 알 것이다)의 일러스트와 당시로서는 화려했던 우울한 도스 그래픽도 한 몫을 했다.
캐릭터 성격 역시 그 설정이 너무나도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인간인 주인공 스타이너, 그리고 또 다른 인격인 차분하고 냉정한, 그러면서도 깊은 인격을 갖춘 스케빈져. 여자로서의 감정마저 묻어버린 채 망국의 왕녀로서 자신의 모습을 고쳐야만 했던 이올린. 전시엔 뛰어난 지휘관이지만 실제론 한없이 착한 전형적인 성왕의 모티브 라시드. 이 모든 것이 겹쳐져서 마지막까지 스토리의 모든 호흡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이끈 근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초기설정부터 완벽한 소프트맥스의 스토리 라인은 절대적인 선한 쪽도, 악한 쪽도 없다는 다소 드문 설정을 자아낸다. 물론 이것도 게임인 이상, 궁극적인 적이 존재하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면 처음엔 착한 팬드레건을 박살 낸 죽일 놈인 흑태자가 중반엔 스케빈저의 진짜 모습으로서 등장하고, 그리고 플레이어는 그 흑태자를 움직여 제국으로 스토리를 진행해야 한다.(필자는 흑태자가 나온 시점부터 빌빌거리던 GS에 비해 너무나도 강력해진 모습에 반해 너무 행복했다) 또한, 착하기만 한 라시드는 후반에 이올린이 지휘하던 연합군과 대조적일 정도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내며 흑태자에게 도전하는 나쁜 놈이 되어버린다.
너무 표현이 극단적으로 치닫는 듯한 느낌이 있지만 어쨌든 바로 어제 저장했을 때만 해도 적이었던 유닛을 이젠 자신의 군단으로 조종하는 게임 스토리는 지금도 드물 정도이다. 그것은 자칫 유치한 중세의 영웅 스토리로 전락해버릴 수 있는 RPG 스토리를 너무나도 심플한, 슬프리라만치 애절하게 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시나리오의 마지막은 결국 스케빈저와 이올린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이야기로 장식하게 되지만 이젠 나라간의 전시와 그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중세 RPG이건, 일본의 변종(?)판타지의 시초인 스퀘어의 메카닉한 파이널 판타지이건 전쟁, 혹은 갈등과 싸움은 빠질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혹시 나중에 싸움의 요소를 완전히 없애고도 대 히트를 치는 혁명적인 소프트가 나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러나, 그 전쟁의 상황을 이끌어 내는 초기 라인은 작가들에게 매우 어려운 과제임에 틀림없다.
물론, 그저 단순하게 이끌어 낸다면 어려울 것이야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숲 속에 사는 마왕이 몬스터를 풀어놓아 주인공이 동료를 모아 모험을 한다, 라고 설정을 해버리고 그대로 진행된다면 이야기는 쉬울 것이다. 그리고 등급은 전체 연령으로 판정이 나고 게임의 흥행 여부는 그래픽과 사운드, 프로그램 시스템 쪽으로만 흘러갈 것이다. 그러나, 아주 조금만 틀어서 사실, 마왕은 잘못이 없고, 다른 어떤 누군가가 흉계를 꾸미고 그것을 마왕이 막으려다 오해를 산다, 라는 설정으로 나간다면 스토리는 보다 복잡해지고 흥미를 끌게 마련이다.
창세기전2는 바로 이 스토리의 복잡함과 흥미도를 극상까지 끌어올린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난해한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복잡하게 얽히되 유저가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은 거의 잃어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전쟁의 방향은 흑태자의 등장 이전엔 어느 한쪽이 완벽하게 굴복하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게다가 그 방대한 세계관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대륙 전역에서 넓게 포진한다. 플레이어는 어느 한 순간에도 전쟁의 방향에 대해 잠시라도 필름이 끊길 수가 없다.
바로 이 점이 가장 극찬을 하고 싶은 점이다. 창세기전2의 시나리오는 전투의 전략, 그리고 그 실패에 따른 여파까지도 자세하게 담고 있다. 전쟁은 일방적인 흐름 없이 변수가 쉴 틈 없이 발생하고 거기에 어울려 스케빈져와 이올린의 갈등도 전쟁의 흐름에 따라 바뀌며 플레이어들의 애간장을 태운다.(필자는 이올린의 블리자트 스톰에 실망해 그녀에게 큰 호감이 없었다)
너무 스포트라이트가 바뀌어도 식상한 법. 후반, 시나리오는 결국 스케빈져 하나에게 조명을 맞춘 채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이 시점에서는 흑태자와 베라모드 사이에서 갈등하던 제국의 다른 모든 인물들의 갈등도 어느 정도 해소시킨 상태에서 스케빈져라는 하나의 인간이 고뇌만이 주가 된다.
제국의 황제로서의 의무도,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쌓아올린 팬드레건에서의 우정과 사랑, 어느 쪽도 배신할 수 없었던 가장 완벽한 인간. 그것은 결국 그가 처음 꿈꿔왔던 대륙통일을 접고 양쪽이 평화를 지키는 현실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평화로운 길을 택하게 한다. 그리고 그는 흑태자 스타이너와 레인저 스케빈져로서 이중적인 삶을 연출해 냄으로서 스토리는 절정에 치닫게 된다.(그러나 소프트맥스는 후반, PART2에서 베라모드의 애절한 독백모드와 함께 흑태자의 모티브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악역으로 보이게 하는 치명적인, 정말 아주, 극히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된다)정말 소프트맥스가 만들어낸 가장 훌륭한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그 누가 흑태자의 인기를 올라설 수 있을까? 희끄므레한 좀비 시라노가? 양아치처럼 다니다가 후반에 모든 걸 망쳐 논 클라우제비츠가? 아님 잘나가다 갑자기 성격 개조에 임무 망각의 살라딘이?
잠시 흑태자 예찬론에 빠졌지만 어쨌든 창세기전2의 시나리오는 이처럼 완벽이라는 말이 허용될 수 있는 수준의 것이라 평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평가한 것을 종합해보면 창세기전2의 시나리오는 너무나도 완벽하게 준비해 놓은 전쟁이란 무대 위에 선별된 캐릭터들을 잘 배치한 것에 만점을 줄 수 있다. 이와 같은 결과에는 그만큼 소프트맥스 시나리오의 초기설정이 잘 되어 있다고 예상할 수 있게 한다. 다만 이와 같은 모습을 그 이후의 작품에도 계속해 보여주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할까? 그 이후의 작품도 그 퀄러티의 수준이 결코 낮은 것은 아니지만 전작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을 벗기 어렵게 한다. 그리고 모든 창세기전 시리즈의 전체적인 시나리오가 탄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창세기전2의 스토리가 워낙에 잘 되어있던 탓이었고, 때문에 아직도 많은 유저들이 도스 시절의 이 게임을 그리워하게 하는 건 아닌 지 조심스럽게 해석해 본다.
하여간... 멜랑꼴릭하게...
평점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