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전통교실

朱子家禮는 (朱子가 살았던 당시) 中國의 俗禮일 뿐이다.

작성자蘭石齋주인|작성시간26.06.22|조회수27 목록 댓글 0

朱子家禮는 (朱子가 살았던 당시) 中國의 俗禮일 뿐이다.

 

후인들은 주자가례 떠받들기를 자못 三禮와 같이 하여 심지어 가례가 생긴 이후에는 삼례 같은 것은 잊어도 될 수 있다고까지 한다. 그러나 가례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주자는 30년이 넘도록 살아 있었다. 大全과 語類가 있는데, 서로 대조하면 틀리는 말이 매우 많으니, 모두 나중에 결정한 의론을 따라야 타당할 것이다. 가례만 꼭 지키고 변동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가례란 주자가 寒泉에서 居憂(居喪)할 때 잠시 동안에 지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완성되기도 전에 어떤 아이가 훔쳐갔다가 나중에 장사지내던 날에야 비로소 나타났다. 이로 본다면 그 중에 반드시 없애야 할 것도 있고 더 보태야 할 것도 있었을 것이며, 또는 나중에 결정한 의론과 같지 않은 것도 여러 곳 지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후에 주자가 친구 혹은 문생과 더불어 문답할 때도 이 家禮라는 두 글자에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을 금석처럼 귀하게 여기지 않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遺書와 語類속에 두루 相考해 보아도 다만 세 가지로 이른 것뿐이다.

 

그는 “내가 일찍이 祭儀를 만들 때 다만 중간 行禮하는 데에만 5~6단계로 나눠 놓았다. 이는 매우 행하기도 간략하고 깨닫기도 쉬웠는데, 나중에 어떤 이가 훔쳐가서 없어졌다.” 하고 또, “나는 祭禮에 대해서 책을 만들지 못하고 다만 司馬公이 말한 것을 가지고 몇 곳은 줄여 없앴으나 修正해서 고친 것은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가례를 가리킨 것인 듯하나 역시 책은 만들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 行狀에는, “가례는 세상에서 많이들 사용한 다음에 덜기도 하고 보태기도 한 것이 많으나 다시 정해서 만들 겨를이 없다.” 하였으니, 만약 이 가례가 일찍 발견되었더라면 주자가 반드시 수정해 고쳐서 완전하게 만들었을 것인데, 그렇게 못한 것이 千古에 恨스러운 일이다. 그 중 時宜에 알맞고 옛 뜻에 위배되지 않는 것만 뽑아서 典禮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의심이 없게 한 다음, 다시 허다한 세대를 지나면 세상 풍속도 또 같지 않아진다.

 

그리고 또 經禮와 어긋나는 곳을 나중에 와서 다시 결정한 말이 있어도 오히려 取捨할 수 없다면 守株와 刻劍에 가깝지 않겠는가? 과연 가례가 하나하나 다 따를 만한 것이라면 주자는 더 생각해서 더할 것은 더하고 없앨 것은 없애서 대략 수정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뭐 어려운 일이기에, 매양 늙고 병들어서 해낼 수 없다고만 하였으니 왜 그랬을까? 長房에 대한 한 가지 일로 말하더라도 大全에 보이는 李堯卿과 胡伯量에게 답한 편지와 語類에 보이는 沈僴에게 답한 편지와 뜻이 똑같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한 때의 말로서 그 遷奉에 대해서는 결코 인정하지 않은 듯하다. 語類의 목록을 상고해 보니, 심한의 기록이란 모두 무오년(고려 神宗 1년. 1198) 이후에 들은 말이었다. 이 후 두 해 만에 주자가 세상을 버렸으니 이것이 모두 나중의 定論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타 장방의 말은 어류에 보이는 것 한 조항뿐인데 다만, “지금 세상에는 大宗法이 세워지지 않은 까닭에 바야흐로 小宗法만 이야기한다.” 하였다.

 

더구나 오늘날은 이미 立宗하고, 不祧廟(遞遷하지 않는 祠堂)가 있게 된다. 그런데 장방이라는 예가 대종법과 함께 행해지니 무슨 이유일까? 이는 마땅히 禮를 아는 자와 더불어 의논해 보아야겠다.

 

[주];

守株 : 변통성이 없이 고집만 한다는 비유. 韓非子 五蠹편의 “춘추 시대 宋나라 어떤 농부가 나무에 토끼가 부딪친 것을 잡은 후, 또 토끼가 오면 잡을까 하여 일도 않고 나무만 지키고 있었다.”는 고사.

 

刻劍 : 物情에 어둡다는 비유. 呂氏春秋 察今편에, “楚나라 어떤 사람이 강을 건너가다가 배 안에서 칼을 물에 떨어뜨린 후, 뱃전에다 칼을 새겨 놓고 물속으로 들어가 찾으려고 했으나 배는 벌써 떠내려가 버려 칼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는 故事.

 

[星湖僿說 제24권 經史門 家禮]

後人遵奉朱子家禮殆與三禮並至云家禮以後三禮可㤀也然家禮成後朱子享壽三十餘年有大全有語類兩相較勘異說甚多其義冝従後㝎之論猶守家禮而不動何哉家禮不過居憂寒泉一時所著未及完成而旋爲童行所偷至葬日偶出者必有可刪可補其與後来㝎論不同者亦可指數其後朱子與朋友門生問荅更無一言及家禮二字者何也其非把作金石看可以推知遍考遺書語類中只有三條云某甞修祭儀只就中間行禮處分作五六段甚簡易曉後被人竊去亾之矣又云某之祭禮不成書只將司馬公者减去幾處無修改處此似指此書而既云不成書行狀云家禮世多用之然後多損益未暇更㝎若使早出則朱子之修改完成必矣此千古之恨也其合扵時宜不違扵古義者㝎作典禮無可疑者然復歴許多時世俗尚不同又或與經禮乖别處及更有後㝎之說而猶不容取舍則不幾扵守株刻劒之歸耶若果以家禮爲一一可遵則朱子追憶而略加增刪何難而毎云衰病不能何耶以長房一事言之大全之荅李堯卿胡伯量語類之荅沈僴恰與相符恐皆一時之言而㫁㫁然不許遷奉按語類目錄則沈錄乃戊午以後所聞後二年先生易簀其爲後㝎之論無疑其他長房之說見扵語類者只一條而只云今世大宗法不立故方言小宗法云云况今日既許立宗而有不祧之廟然而長房之禮與大宗法並行何也此當與知禮者論.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