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하고도 달콤한 배신에 관해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저는 어벤져스의 일원, 캡틴 아메리카입니다. 토르, 아이언맨과 어깨를 맞대고 세상을 구하고 있었지요. 타노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최후의 전쟁 중, 타노스는 제게 달콤한 제안을 했습니다. 딱 3분의 시간과 함께. 핑거 스냅에서 지구를 제외해 주겠다는 것. 다만 토르와 토니 스타크를 제거하는 데 협조하라는 조건이었습니다. 인피니티 스톤을 걸고 하는, 반드시 지켜지는 ʻ우주적 언약’이라 그는 거듭 강조했습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계속된다면 되찾은 형제 바키도, 오랜 연인 페기도 끝내 잃겠지요. 그리고 토니 스타크. 사사건건 부딪쳤으나, 내 등을 끝까지 믿고 맡길 수 있던 단 한 사람.
저는 영웅이기에 앞서 인간입니다. 우주는 참 넓습니다. 지킬 수 있는 것만 지키기에도 너무나 광활한 곳이지요.
선택의 시간은 3분. 그러나 사실, 그의 제안을 듣는 순간 저는 이미 배신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심각한 척 고민하던 3분이, 오늘 하루 중 가장 쓸데없는 시간이었지요. 고민하는 저를 보며 타노스는 씨익 웃었습니다. 고결해 보이던 캡틴도 죽음과 욕망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것을, 이미 안다는 듯이.
“콰앙!”
토르가 건네주었던 신의 망치, 묠니르가 제 손에서 떨어졌습니다. 욕망으로 고결함을 잃은 저를, 묠니르는 더 이상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다시 잡아 보았으나 천근의 무게로 짓누를 뿐, 손끝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제 얼굴을 누가 보았다면, 상실에 빠진 영웅으로 보였을까요. 아니면 평온을 찾은 인간으로 보였을까요.
저벅, 저벅. 타노스가 산보다 거대한 덩치를 끌고 다가왔습니다. 범부가 되어 버린 저는 참으로 작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묠니르를 손쉽게 집어 들더니, 제 손에 맞는 무기를 찾았다는 듯 휘둘러 보았습니다.
전장은 이미 기울어 있었습니다. 스파이더맨도, 블랙팬서도 끝없이 일어나는 적들에 난도질당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둘. 벼락을 내리꽂는 토르와, 지치지 않고 레이저를 쏘는 아이언맨만이 빛났습니다. 그러나 여유로운 타노스의 눈을 보니, 두 영웅의 항거조차 그에게는 작은 생채기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함을 알았습니다. 지구를 위해, 내 사람들을 위해—아니, 나를 위해.
타노스는 고뇌하는 저를 스쳐 걸어갔습니다. 제 침묵을 동의로 간주하겠다는 뜻이었지요. 저는 부정하지 못했습니다. 내심, 그들의 고통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요.
“캡틴. 나의 강력하고도 위대한 적이여. 적으로서 그대의 쓰임은 다했다. 더 할 말은 있나?”
“…토르와 아이언맨. 그들이 고통 없게 해 다오.”
타노스는 짙은 미소를 띠며 토르에게 달려가 묠니르를 휘둘렀습니다. 토르는 망치가 제 손이 아닌 타노스에게 있음을 보고 당황하며 맞붙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토르는 잦은 곁눈질로 저를 찾고 있었습니다. 죽음이 가까운 순간조차 제 안위를 걱정하던 그 눈을, 차마 마주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저는 가진 힘을 다해 토르에게 달려갔습니다. 토르가 저를 보았습니다. 제 생존을 확인한 그의 눈에 기쁨이 가득 찼습니다. 강력한 방패가 타노스를 내리치리라 믿었겠지요.
저는.
달려가던 추진력 그대로.
토르의 명치에.
정권을.
내질렀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에게.
위대한 오딘의 아들인 토르는 입에서 순혈을 왈칵 쏟았습니다. 그 틈을 타노스는 놓치지 않고, 묠니르로 토르의 머리를 으깼습니다.
전장이 고요해졌습니다. 세계가 멈췄습니다.
저는 제 배신을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다시 악귀 같은 얼굴로 아이언맨에게 달려갔습니다. 토르를 멈춰 세웠던 그 주먹을, 토니에게 쉼 없이 퍼부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혼이 나간 채였지만, 자비스가 자동전투를 개시했습니다. 의지는 빠져나간 채, 기계의 의지만으로 몸이 움직였습니다.
그러더니 돌연, 아이언맨의 표정이 고요해졌습니다. 눈이 잔잔해졌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이해했음을, 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습니다. 타노스가 가세했고, 토니는 저와 타노스의 협공을 견뎌야 했습니다. 갑주가 깨져 나갔지만, 토니는 잔잔한 눈으로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눈이 너무도 두려웠습니다. 두려워서, 어서 이 전투를 끝내고 싶었습니다.
“푹.”
끝내 타노스의 손이 아이언맨의 아크 리액터를 꿰뚫었습니다. 토니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으나, 그 눈은 여전히 저를 따뜻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다 이해한다는 듯이. 그 다정함이,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습니다.
이윽고 전투가 끝나고, 우리 진영은 물러갔습니다. 오직 발키리와 아스가르드의 군세만이, 이미 숨진 제 신(神)의 곁을 차마 떠나지 못한 채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때, 가부좌를 튼 채 허공에 떠 있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제 곁에 다가왔습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시게, 캡틴. 자네의 동료들은 이해할 걸세. 허나 그 이해가 자네를 위로하리라 기대하진 말게. 이해란, 그저 벌어진 일에 사람이 붙이는 이름일 뿐이니.” 그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방정식의 해를 읽듯 무심히 말했습니다. 그리고 초록빛 타임 스톤을 너무도 손쉽게 타노스에게 넘긴 뒤, 제겐 끝내 닿지 않을 말 한마디를 중얼거리며 스스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저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스트레인지는 저를 이해했습니다. 칠판 위의 숫자를 읽듯, 차갑게. 그러나 토니는 달랐습니다. 깨져 가는 갑주 너머, 그 눈에는 온기가 있었습니다. 끝까지 저를 미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벤져스에 동료는 많았으나, 제가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자는 토니 하나였습니다. 증오는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지만, 따뜻한 이해는 평생 심장에 박혀 빠지지 않는 못이 됩니다.
여섯 스톤을 모두 모은 타노스가, 건틀렛을 낀 오른손을 들어 올렸습니다.
나는 약속받은 평온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바키도, 페기도 살겠지요. 다만 매일 아침, 나를 미워하지 않은 그 눈이 떠오를 것입니다. 나를 이해한 단 하나의 친구는 이미 이 세상에 없고, 그를 죽인 것은 나이므로.
“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