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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라는 단어에 대해서 가장 오래된 기억,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한, 최초의 기억은 내가 10살쯤 되었을 때였던 것 같다.
그 이전에도 있었을 수도, 없었을 수도 있지만 생각나지 않기 때문에 크게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 시절은 학교를 다녀오면 딱히 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집에 도착하면 가방을 벗어두 고는 곧장 옆집의 문을 두드렸다.
그 집의 아이는 나보다 두 세 살 어렸는데, 가지고 있는 놀거리도 많았고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방법도 더 많이 알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나는 나이가 많아서 형 행세를 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그 아이에게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어서 그리고 새로운 무언가를 할 수 있어서 그 아이와 어떻게 든 함께 있으려고 했다.
우리는 색종이를 손바닥을 이용해서 넘어뜨리는 놀이, 그 아이의 조이스틱 게임기로 (나 의 부모님은 사주 질 않았다) 게임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하였는데, 내 기억에 가장 즐거웠던 것은 둘이서 자전거를 타며 탐험하고 우리만의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학교가 끝난 후 각자의 집에 가방을 두고 나와서 그 아이의 집에서 만나서 오 늘은 어떻게 하루를 보낼 지, 어디로 탐험을 떠날지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 다.
2,3층의 주택들이 큰길들을 사이에 두고 줄지어 있는 곳이라 아파트 단지보다는 더욱 탐 험심을 자극시킬 동기가 충분한 곳이었다.
집에서 출발하여 자전거를 타고 새로운 거리나 어떤 지점(주로 놀이터나 공원 같은 곳 이다)을 발견하거나 하면 발견한 사람에게 그 지역의 대장이 된다 던지 하는 규칙들이 있었고 그런 곳들은 자신만의 아지트로 마음속 깊이 새겨 넣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 우리들의 어머니가 우리들을 찾기 전까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게임 속 세계에서 용사가 마왕을 퇴치하고 고향의 마을에 도착하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 아버 지들이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것처럼, 우리들에게 아주 뿌듯한 일과처럼 생각되었다.
그런 나날들이 어느정도 익숙해졌을 무렵, 우리들의 이웃에는 우리보다 6~7살 정도 더 어린 여자아이가 옆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그 여자아이의 어머니는 우리에게 과 자를 쥐어 주며 딸아이와 잘 어울려 달라고 당부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 또래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우리들의 관심사는 그 여자아이가 감당 하기엔 너무도 큰 거리감이 있었고 우리에게 다가와 그 조그마 한 입으로 우리를 부르며 같이 놀자고 보채는 작은 손을 우리들은 번번히 놓아버리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자전거로 탐험을 떠나려고 했는 데 아직 어려서 자전거도 타지 못하는 그 여자아이는 그날만큼은 우리를 따라오겠다며 떼를 쓰며 고집을 부리는 데에는 난감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천천히 페달을 밟으며 여자아이가 뒤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며 탐험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여자아이는 우리들과 같이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즐거 운 것 같이 싱글생글 웃으며 따라오고 있었다)
어떤 심경이었는지 갑자기 우리는 페달을 빠르게 밟으며 그 여자아이가 따라오지 못하 는 속도로 그 장소에서 도망치듯 벗어나 버렸다.
우리와 같은 영역, 같은 능력을 가지지 않았으면서 우리와 같이 하고 싶어하는 것에 심 술이 났었던 것 같기도 하고, 다시는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넘보지 못하도록) 본보기 를 보여준 것일까, 어떤 마음에서 그렇게 행동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들이 그곳을 크게 우회하여 집에 도착했을 때에도 (길을 기억한다면 돌아왔을 시간 이었다)여자아이는 도착하지 않았고, 아마도 나는 여자아이의 어머니에게 오는 길에 잃어 버렸다 라고 거짓말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선 나는 집으로 돌아가 밥을 먹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 잘못은 아무 것도 없다고 자위하며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순간, 내가 페달을 힘껏 밟아 뿌리치려던 그 순간 뒤를 돌아봤을 때 나를 부르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2
내가 중학교를 들어 갔을 때에는 전처럼 매일 만나는 친구들이 부쩍 없어졌는데, 그것은 문명의 발달로 인한 자연스러운 것일수도 있고(만화를 본다 거나 게임 같은 것들) 그저 사춘기가 찾아와 그저 혼자가 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루종일 수업 중이거나 아닐 때에도 소설책 따위를 읽고 있었다.
딱히 친구가 있어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한가지, 점심시간에 밥을 먹을 때나 하교를 할 때에는 다른 아이들이 삼삼오오 무 리지어 다니는 것이 부러워 보였고 상대적으로 혼자있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특별한 대화를 하지 않아도 옆에 있어줄 만한 녀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 다. 그 애는 동급생이었는데 하루종일 책을 보느라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나보다도 더욱 말 이 없고 (심지어 책을 보지 않는데도) 부끄러움도 많이 타는 아이였다. 어떤 기회로 나는 말을 걸었고 우리는 밥도 같이 먹고 하교도 같이 하게 되었다.
주로 내가 말을 걸면 한두마디의 말이 돌아오는 식이었다. 대답이 한두마디 이상이 돌 아오지 않는 것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재미가 없었다. 내가 보던 소설에서 우정 을 나누던 친구들 사이에서 나누던 멋진 대화들이 아니었다고 생각되었고 내가 처음 이 후로는 말 거는 것을 포기하자 우리는 그저 식사시간이 되면 급식을 같이 먹고 하교 시 간이 되면 하교를 하는 그런 관계가 되었다. 아무런 특별한 대화는 없었다.
이런 관계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이런 관계라도, 같은 시간을 공유한 친구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관계도 어느 날을 기점으로 끝이 났다.
나는 태생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에 곧 다른 친구들이랑 친해질 기회가 있었고 그리고 그 친구들이랑 어울리기 위해서는 이 답답하고 착하고 소심한 친구는 정 리를 해야 했다.
그것이 이 학교라는 사회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집단마다 영역이 있었고 새로운 집단 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전에 있었던 낡은 집단은 버린다. 그러지 않으면 새로운 집단은 받아 주질 않았다.
서로 영역을 나누고 누군가를 배척하고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어쩌면 전쟁은 줄곧 우리의 삶에서, 곁에서 계속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이 친구가 나에게 평소처럼 다가오고 말을 걸었지만 나는 무시 하거나 지나가 버렸던 것 같다.
그 뒤로 그는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생각했을 때 내가 잔인했다고 가혹한 처사였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이때 의 나에게는 아이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곤충의 날개를 쥐어 뜯어버리듯 아무런 미안한 감정도 들지 않았었다.
그리고 집단의 친구들과 교실 뒤에서 있을 때, 그 친구가 자기 책상에서 한번씩 뒤돌 아 나를 볼 때가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눈을 외면했고 내가 다시금 그를 쳐다보았을 때, 그는 나에게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전에도 작았던 그의 체구는 그날따라 어쩐지 어린아이처럼 왜소해보였고 그런 그를 볼 때마다 내 안에서는 어떤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의 그는 어떤 마음으로 나를 돌아본 것일까.
어떤 마음으로 하루들을 보냈을까.
나 는 어떤 마음으로 그를 외면했을까.
3
성인이 된 후의 인간관계는 그 전과는 아주 많이 달라졌다. 나는 집단에서 살아남는 것에 대해 지쳤고 그들에게 나를 양보한다거나 배려를 한다는 것이 나에게 어떠한 이득으로서 다가온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주어진 환경내에서 최선을 다해서 생존한다거나 그러기 위해서 관계가 이루어져 가는 것이 이전의 관계라고 한다면, 어른들의 관계라는 것은 적어도 자신이 그 환경을 선택한 다거나 그 환경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을 직접 선별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커다란 차이였고 나는 그것을 십분 활용했다. 사람들과 최대한 만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만 하며 살았다. 혼자가 되는 것은 이렇게 자유로운 거였구나, 그 누구도 신경쓸 필요가 없는 거였어 라 며. 나는 우물속으로 깊숙히 들어가 오랫동안 그 벽을 기어오르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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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건 내가 알던 세상 밖의 세상이 있다는 걸 알 게 되고 그것에 대해 환상을 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해외생활이라는 건 일종의 일탈이라고 부를수도 있고 도피라고 생각해도 된 다. 나는 그곳의 생활에서 기존 세상의 규칙들이라던가 규범들을 잠시나마 벗어둘 수 있었고 나아가 그곳에서 마땅히 지켜야할 것 들조차 외국인이라는 신분을 핑계삼아 회피하고 있 었다. 그것을 자유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첫 이국의 땅으로서 밟은 그곳은 여름이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 곳이며, 무엇을 해도 품어 줄 것 같은 어머니같은 곳이었다.
공부라는 면목으로 간 그곳에서 항상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었고, 그리 고 그것도 곧 여러문제들(예를들면 향수병인데,한국이 싫어서 다른 나라로 갔는데 아이러 니 하다고 말 하지 않을 수 없다)으로 인하여 싫증이 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지인을 통해 테니스 동호회에 들었는 데 거기서 한 친구를 알게 되었다.
그는 동향인이었고 나보다 먼저 이 이국의 땅에 왔다. 그는 나랑 비슷한 점이 많 았는 데, 그도 나처럼 조국이 마음에 들지 않고 자유롭고 싶다고 했다. 무언가에 얽매이 는 걸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는 주로 외국인들을 상대로 머리를 잘라주는 미용사였는 데, 나도 언젠가 골목사이에 있는 그의 미용실에서 머리를 부탁해봤지만 그 결과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는 나보다 10살정도 연상이었는데 나에게 형이라고 부르라고 하거나 반말을 하지 않 았고, 서로 존대말을 하는 것이 편하다고 하였다. 가끔 테니스를 치고 시내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거나 맥주를 곁들인 저녁식사를 하기도 했다.
조국의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피하기도 하였지만 그도 그런 과거의 이야기보다는 현지의 이야기들, 그러니까 앞으로 있을 이야기들을 해주는 것이 맘에 들었다.
그는 2층짜리 단독주택을 렌트하여 1층은 주차장으로 쓰고 2층에서 외국인 여자친구와 동거를 하고 있었는 데, 나를 그곳에 초대하여 저녁식사를 하거나 하룻밤 자고 가라고 권유하기도 해주었다. 먼 첫 이국의 땅에서 그리고 조국의 정을 느낄 수 없는 나라에서 그의 마음은 은은하게 나의 마음을 밝혀주고 있었다.
그 후 내가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나의 도시로 찾아와 주었고 이런저런 얘기 를 나눌 때 그때 동거하고 있었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야기를 할 때에는 눈물을 흘렸 다.
그리고 그 후로 몇 번 더 연락을 하다가 연락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15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마음 한 편이 따듯해진다. 언젠가 다시 그 이국의 땅으로 간다면 그에게 가장 먼저 달려갈 것이라고, 아직도 나의 마음의 친구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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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친구라고 부른다면 그렇고 아니라고 하면 아닌 사람들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의 뇌리 깊숙한 곳에 있었던 사람이 많지는 않다. 그리고 어느 날 전신이 늪에 잠겨드는 듯한 고독이 다가올 때쯤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던 빚바랜 사진들을 정리하며 보기 시작했다. 사진들을 보았을 때 처음엔, 과거의 찬란했던 영광들이 떠오르고 그 다음엔 그 사람들과 의 울고 웃었던 추억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회귀성이 나를 덮쳐왔다.
그런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나는 다시 돌아갈 것인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뒤늦게 찾아가 사죄를 하고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미안하다고 나는 이런 인간이라고 말하며
제대로 된 끝을 고할 수 있었을까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마음속의 벗의 흔들리는 어깨를 두드려주고 그 가느다란 끈자락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까
이런 저런 후회와 미련들이 범람하는 둑에서 나온 급류처럼 넘쳐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추억은 섬세한 유리조각같아서 손을 대면 댈 수록 얼룩진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그들을 온전하게 간직하기 위해서 그들과 나의 시계를 멈추고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두기로 했다.
그러다 가끔은 궁금해진다. 그리고 상상해본다.
어디선가 우연히 만난다면 여전히 너는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