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1장 난 N, 넌 완전 S 그래서 끌리지
2장 내가 애쓰면 넌 나의 N이 되어줘
3장 나의 친애하는 S에게
4장 Your little S-toe
제 1장 난 N, 넌 완전 S 그래서 끌리지
코로나 시기 방구석에 격리된 갓반인들은 달고나를 휘젓는데 넘치는 시간과 노동력을 갈아 넣었고, 나 같은 오타쿠들은 엠비티아이라는 군침이 싹 도는 콘텐츠에 기꺼이 과몰입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이 유사과학이 유행하기 전부터 나는 사람들 사이에 좁혀지지 않는 괴리를 어 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티발놈과 F-미안하다 티발놈 반대말이 생각이 안 난다-사이가 가장 밈화되어 유명하지만, 정말 맞닿을 수 없는 세계는 N과 S다. 이 둘은 사는 세상의 코드가 달 라서 겉으로는 멀쩡히 함께 살아가지만, 실제론 마치 버츄얼 아이돌 콘서트의 홀로그램 미쿠 와 그를 바라보는 관객처럼 맞닿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나는 17살 무렵부터 반대편의 존재들에게 이끌리고 있었다.
친할 친親에 옛 구舊. 친구가 예부터 친밀히 사귀어 온 사람을 뜻한다면, 나에게 오래도록 깊이 박혀있는 친구는 17살 봄, 기숙사 고등학교에 입학해 만난 수진이다. 하얀 얼굴에 아담 한 키, 웃으면 접히는 긴 눈꼬리의 그녀는 우리가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귀여운 옆집 여동생 타입의 소녀였다. 우리 학교는 남녀공학이었으나 분반이라서 사실상 여고나 다를 바 없었는데 겪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춘기 때의 여고생들에게 3월은 1년의 학교생활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모교는 야만적인 반 배정을 했다. 전 교생이 입학시험을 쳐서 여자 1등부터 40등까지를 ‘우반’-스파르타식보다는 히틀러식에 가까 울 수 있겠다-으로 조성해 몰아넣었다. 수진이는 내 바로 뒤 등수였다. 그 당시 나는 아직 사 회화가 덜 된 INTP-이 타입이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소신 발언은 절대 아니다- 투명드래곤이 었기 때문에 갖은 숙고를 통해서 첫 친구가 되기 알맞은 소녀를 신중히 골랐으나 그녀에게 건 넨 첫마디는 참으로 처참했다.
“안녕, 수진아. 나는 유나라고 해. 너 되게 우파루파 닮았다. 하하..”
참고로 나는 지금도 우파루파를 좋아한다. 드래곤 길들이기의 투슬리스가 최애 캐릭터이고 인스타 돋보기에는 쿠키와 크림이라는 게코도마뱀이 도배되어있다. 이러한 나의 순도 100% 진심을 알 턱이 없는 수진이는 그 자리에서 바로 우파루파를 검색해 보더니 하찮은 역정을 냈 다. 그러나 그녀는 타고난 ESFP 관종-이 타입이 관종이라는 소신 발언 또한 절대 아니다-답 게 자신이 놀려지는 상황을 은근히 즐겼으므로 나의 미숙한 관심 표현이 의외로 먹혔다. 그 이후로도 나는 현시대엔 굉장한 실례라 어디 가서 용납될 수 없는 것들로 그녀를 놀렸는데 예 를 들면 그녀의 통통한 팔다리, 도라에몽 주먹, 그리고 가장 내가 꽂혔던 건 간신히 발 가장 자리에 붙어 있는 게 고작인 돌기 같은 그녀의 새끼발가락이었다-의외로 이 지점에서 그녀는 진심으로 삐졌다. 떨어지는 사회성으로 친구의 기분을 풀어주는데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모 른다-. 그렇게 우리는 일방적으로 놀리고 놀려지는 관계의 단짝이 되었다.
제 2장 내가 애쓰면 넌 나의 N이 되어줘
2학년 반 배정 날, 모태 무신론자로서의 신념을 버리고 내가 아는 모든 유일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제발 수진이랑 같은 반이 되게 해주세요.’ 전방위로 무작위 기도를 하다 보니 누가 들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나는 수진이랑 같은 반이 되었다. 그간 그녀 곁에서 보고 배운 바로 나는 좀 더 쾌활한 사람이 되었고, 처치 곤란한 곱슬머리를 피고, 살을 빼고, 렌즈 를 꼈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정도의 동급생들은 동일 인물임을 못 알아볼 정도로 나의 모습과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수진이 말고는 인간을 배척하던 나는 장족의 발전을 통해 수진이와 함 께 다른 반 남자애들과 태양열 에너지 발명대회에 나가게 되었다-물론 태양열 에너지에 대해 조금도 아는 바는 없다-.
여기서 나의 ‘친구’ 관계에 큰 격변을 준 계기가 탄생했다. 난생처음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애가 생긴 것이다. 멀대 같은 키에 허연 얼굴을 한 걔는 알고 보니 서로 본가가 가까웠는 데, 엄친아 네트워크를 타고 우리 엄마에게 자기가 다니는 수학학원을 열심히 PR했다. 한창 천방지축 기숙사 생활에 적응해 어떤 사교육과도 멀던 나는 그렇게 학원가로 끌려갔다. 방에 갇혀 레벨 테스트를 하던 중 난데없이 맞닥뜨린 수학 문제가 어려워서 그랬는지 갑자기 심한 두통이 일었다. 혹시 뜬금없지만 어릴 때 예방주사는 다 맞았는지? 우리 집이 안아키는 결코 아니라 나도 왼쪽 어깨에 멀쩡히 불주사 자국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나는 정말 난데없이222 창 창한 18살에 수두에 걸리고 말았다. 일주일간 고열과 발진에 시달리다 학교에 컴백했을 땐 나 를 전염병 구렁텅이에 빠뜨린 그 자식은 그새 수진이에게 집적대고 있었다.
대회 준비 기간 내내 그들의 일방적으로 집적대고 피하는 모습을 옆에서 봐야 했지만, 다행 히 수진이는 걔를 그다지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서로에게 친절히 미루는 조별 과제를 하다 포기하고 교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혼자 앞서가던 차에 수진이가 없어 뒤를 돌 아보는 순간, 그 자식이 기껏해야 많이 봐줘도 20대 초까지만 허용할 수 있는 남자 여우짓을 시전했다. 걔의 큰 손이 수진이의 결 좋은 머리 위로 안착해 귀여워서 못 견디겠다는 바이브 로 파닥파닥 움직이고 있었다. 수진이는 또 하찮게 역정 내며 잽싸게 피했지만, 키 차이가 크 게 나 얼핏 잘 어울려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혼자 교실로 달려갔 다.
친할 친親에 입 구口. 숭상하고 존경하는 대상에 대하여 경의와 복종을 표하기 위해 입을 맞 춤. 나는 대체 누구에게 그렇게 마음이 끓었을까? 스파르타식 학교답게 야자가 끝나고 12시가 되자 전교생이 기숙사로 돌아가 열을 맞춰 점호하고 일괄 소등했다-덧붙여 아침 6시가 되면 운동장에 모여 전교생이 일렬로 구보를 뛰었다-. 불이 꺼진 뒤 나는 순찰을 도는 야간 담임의 눈을 피해 수진이를 공용 샤워실로 불렀다. 우리는 차가운 타일 벽에 나란히 기대어 앉았다. 수진이는 영문을 모르고 끌려 나온 얼굴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간 얼굴과 우리의 우정에 대해 아무런 고뇌도 담겨 있지 않은 머리통이 야속했다. 그간 그녀를 따라 하려 부단히 노력했으나 본투비 깊생 유전자를 타고난 나는 덜 자란 사회성으로 속에 담긴 말들을 모조리 뱉어냈다.
“너는 왜 나한테 비밀이나 생각 같은 걸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 나한텐 너가 제일 가까운데 너는 아니잖아. 나만 너 생각하고 나는 너가 다른 애들이랑 얘기만 해도 신경 쓰여서 공부에 집중도 못 하겠어. 너 누구랑 제일 친해? 수정이? 민희? 그 새끼?”
“아니.. 나 별생각 없어.. 없어서 말 안한거야.. 유나 너랑 제일 친하지 그럼 그럼....”
그 당시 나는 이정도 대답으로 만족할 정병이 아니었다. 밤새도록 전기 고문 여친이 되어 수 진이를 지졌다. 생각도, 꼬인 감정도, 꺼내 줄 만한 비밀도 없는 안정형 수진이는 비록 내 말 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꾸벅꾸벅 졸음을 참으며 끝까지 들어줬다. 컴컴했던 샤워실이 어느덧 어스름해졌다. 불쌍하게 쪼그려 앉아 잠에 든 수진이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나도 수진이 보단 키 큰데. 나도 너보단 손도 크고 네 갈색 머리칼을 예전부터 좋아했는데. 나는 가슴이 답답한 나머지 그녀의 머리에 코를 박고 숨을 쉬었다. 익숙한 향이 진하게 났다.
제 3장 나의 친애하는 S에게
3학년 반 배정 날, 나는 일 년 만에 또다시 잊고지내던 모든 유일신을 찾았다. ‘제발 수진이 랑 다른 반이 되게 해주세요. 아니라면 걔가 나만 보게 해주세요. 아냐 그냥 눈앞에서 안 보 이게 해주세요.’ 간절히 전방위로 기도했건만 전능한 신도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고민이 됐는지, 혹은 필요할 때만 찾는 중생-동시에 어린 양-이 괘씸했는지 그 무엇도 들어주지 않았 다. 수진이와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 되었다. 그러나 수능이 다가올수록 내 쪽에 서 의도적으로 그녀를 피했다. 그렇지 않으면 밤마다 수진이를 샤워실로 불러 걔 무릎에 뺨을 비빌 것 같았다. 그때쯤엔 나도 여러 명의 깔깔메이트들을 만들 정도의 사회성은 있었다. 다 른 애들과 급식을 먹고 자습실을 갈 때면 수진이는 몇 번 장난스레 눈을 흘겼으나 역시 별말 없이 반을 휩쓸고 다니며 즐거이 수험 생활을 했다. 우리는 그렇게 은근히 멀어졌다.
둘 다 원하던 대학에 무사히 입학했다. 새로운 사람들, 오티, 엠티, 술, 동아리, 댄스 신고식 여전히 야만의 시대다-, 한참이 지나서 나는 수진이에게 연락했다. “요즘 뭐 하고 지내? 시간 되면 내가 너 알바하는 곳 앞으로 놀러 갈게. 얼굴 보자.” 오랜만에 본 수진이는 쌍수를 하고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나타났다. 나는 내가 외모지상주의임에 감사했다. 전날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오로지 ‘오래된 친밀한 관계’의 친구로서 그녀를 대할 수 있었다. 당연히 수진이도 3 년 내내 미저리 같았던 나의 흑역사는 기억에서 싹 지운 채 여전히 살갑게 대해줬다.
돌아온 신입생 환영회에서 내가 잃어버렸던 수진이의 긴 눈꼬리를 가진 A군을 발견했다. A 군은 돌멩이 내지 생긴 대로 흐르는 강 같은 사람이었다. 희로애락의 감정 스펙트럼이 나의 반의반 토막도 안 되는 인물. 그런 무생물적 매력에 끌려-혹은 접히는 눈꼬리에- 그와 나는 5 년을 만났다. 5년 내내 나는 그의 마음을 의심했다. 내가 만나자고 하니까 만나고, 좋다고 하 니까 사귀는 건지, 이게 사랑이 맞는 건지. 사랑이 이렇게 가볍나? 좀 더 숙고와 고뇌와 깊생 이 가미되어야 하지 않나? 성격유형별 검사를 하면 상품권을 준다길래 A군을 끌고 가 받았던 결과지엔 아니나 다를까, 정반대의 ISTJ와 ENFP-나도 이때쯤엔 사회성이 잘 탑재되었다. 대 신 정신머리는 좀 없었다.-가 찍혀있었다. 결국 A군과의 연애는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 야. 네가 진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 나는 아니야.”라는 일방적 통보로 종결됐다.
사회 초년생이 되었을 무렵 수진이가 좋은 사람이 있다며 B군을 소개해 줬다-수진이와 이런 걸스토크를 할 날이 오다니!-.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바로 알 수 있었다. B군은 내가 좋아했던 수진이의 따뜻하고 착하고 산뜻한 성격을 빼닮은 사람이었다. 한창 소개팅 국룰 대화 주제가 엠비티아이였던 시절이라 그는 자신이 대문자 ESFJ라 밝혔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B군과의 연애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애정이었다. 감도 높은 취향에 자부심이 있었던 그는 요즘 핫한 데이트 장소, 줄 서서 먹는 맛집, 붐업 되는 가십거 리 등 내가 잘 모르는 세계에 발을 들이게 해줬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할 때면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텅 빈 구석이 있었다. 나는 늘 그가 보여주는 세상이 새롭고 즐거웠으 나, 내가 느끼고 차곡차곡 쌓아가는 세계관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대망의 수진이의 결혼식날, B군과 나는 함께 참석했다. 수진이 옆에는 우파루파를 닮은 남성 분이 서 계셨다. 그 애를 두 번째 의미의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날 이었다. 그런데 버진로드를 걷는 수진이의 비즈 드레스가 너무 눈부셨는지 순간 막을 새도 없 이 눈물이 흘렀다. 아마 신부 측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우파루파 신랑님의 수상한 여사 친으로 의심받았을 것이다. 결혼식이 끝나자 수진이는 아주 행복한 얼굴로 쌩하니 몰디브로 떠났다. 그날 밤 꿈에는 교복을 입은 수진이가 나왔다. 몇 차례 반복해서 꿨던 익숙한 레퍼토 리였다. 나는 그녀 앞에 꿇어앉아 그녀의 다리를 붙들곤 울분을 토했다. ‘나 좀 봐줘. 나만 좋 아해 주면 안 돼? 제발 나를 이해해 줘.’ 그녀는 늘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나를 내려다볼 뿐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은 좀 달랐다. 수진이가 천천히 무릎을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 췄다. 나는 당황했지만 실은 무엇이 뒤따를지 알고 있었다. 우리는 데미안과 싱클레어처럼 가 벼이 입 맞췄다.
제 4장 Your little S-toe
그 이후론 수진이는 내 꿈에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혹시나 말하자면, 나도 현실에서 꾸준 히 남성들과 연애했다. 내가 남자를 밝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밝았다. S 곁에서 온갖 외로움, 몰이해를 겪은 뒤 핸들을 급격히 반대로 틀어 N을 만나면 피곤함, 동족 혐오를 겪었다. 그러 면 다음번엔 또다시 핸들을 반대로 틀길 수차례, 양쪽 범퍼와 사이드미러쯤은 애당초 날아간 지 오래다. 현재는 나보다 S이긴 하되 서로 취향은 공유하는 정도로 레이더를 조정해 두긴 했 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요즘은 나 스스로가 두텁게 입고 있던 추구미를 벗는 중이다. 쾌활하고, 다정하고, 산뜻한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누군가를 따라 했던 가면은 늘 끝이 텁텁 하고 거추장스러웠다. 그렇지 못한 내가 되게 멋없지만 어쩌겠어. 나는 나로 살아야 하는데. 거기다 사람은 모두가 자기만의 세상을 산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어느 관계이든 不이해가 디 폴트라면, 불가능을 인정하고서 그럼에도 닿아보려 하는 낭만이 사랑-억지를 부리자면 Sㅏ랑-이 아닐까, 그런 망상을 한다.
아 참고로, 수진이는 우파루파를 낳았다. 물론 시우라는 예쁜 이름도 있다. 백일해 예방접종 을 맞기가 두려워서 그동안엔 랜선으로만 아기를 볼 수 있었다. 예민한 구석이 없는 효자 중 효자로, 밥만 배불리 먹으면 울지도 않고 잠도 잘 잔다. 얼마 전 피드에 꼼질거리는 아기의 발이 올라왔다. 거기엔 내가 좋아하던 그 흔적기관 같은 돌기가 간신히 붙어 있었다. 아기가 슬슬 능숙하게 뒤집는 모습을 보니 다음 달쯤 찾아가 봐도 좋으리라. 그 작은 생명체를 만난 다면 숭상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새끼발가락에 입을 맞춰줄 것이다.
*본 글에 등장하는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이 글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허구의 소설입니다.
***<데미안>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모티브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