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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

작성자양세현|작성시간26.06.19|조회수71 목록 댓글 0

1장 푸를 청(靑)

 

어렸을 적, 키가 작은 나는 항상 자신감이 부족했다. 학교에 가도, 학원에 가도, 심지어 집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나에게 언제나 웃으며 다가와 주던 강아지가 있었다. 갈색의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안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어 주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하지만 고학년 형들 눈에는 그저 장난감처럼 보였나 보다. 나처럼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는 복슬이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체구는 작아도 고학년 형들에게 항상 당차게 짖어대던 복슬이는 나보다 훨씬 멋진 존재 같았다. 나도 그런 복슬이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것이 바로 복싱이었다.

 

간결한 스텝, 짧고 강한 잽, 그리고 피니시 어퍼컷. 복싱의 매력에 빠져들기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전 6시, 강변으로 러닝을 나선다. 보슬보슬 피어오른 안개 사이로 윤슬이 비치는 강을 보며 뛰다 보면, 밤새 무거워졌던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아침 시간의 강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 사이에 녹아들어 달리고 있으면, 솔직히 '갓생 사는 청년'이 된 것 같아 뿌듯해진다. 집에 돌아와 간단히 아침을 먹고 다시 밖으로 나선다. 문을 열고 마주한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은 가슴을 벅차게 만든다.

 

"삑-"

 

지하철 개찰구에 교통카드를 갖다 대는 순간 울리는 소리. 짧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강한 인상을 남기는 소리다.

 

경전철에 몸을 싣고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리듬을 맡긴 채, 고등학교 때부터 링 위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던 그 상대를 떠올려 본다. 안으로 파고들어 코너로 몰려고 하면 언제나 가볍게 링을 벗어나고, 잽을 뻗어도 유연하게 피해 버린다. 바짝 붙어 주먹을 날려도 탄탄한 가드로 쉽게 흘려버리는 상대. 덕분에 나의 스텝과 잽, 가드 실력도 점점 늘어난 게 사실이지만, 정말 대단한 녀석임은 틀림없다.

 

"팡-"

 

미트에 주먹이 꽂히는 순간 터져 나오는 소리. 짧지만 강렬한 이 소리는 누구라도 귀를 기울이게 만들 것이다.

 

체육관 건물 계단에서부터 이 소리가 들려오면 벌써 마음이 들뜬다. 미트 치는 소리가 경쾌할수록 몸에 리듬감이 생기며 나만의 스텝이 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미트를 잡아주는 코치님과 함께 수없이 연습했던 콤비네이션, 바디훅과 어퍼컷.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어 주먹을 꽂아 넣는 인파이터야말로 복싱의 꽃이 아니겠는가. (사실 키가 작고 힘이 좋은 나에게는 인파이터 스타일이 제격이었다.)

 

운동을 끝내고 체육관을 나섰을 때, 낮 동안 푸르스름했던 하늘은 어느새 붉스름한 저녁노을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2장 붉을 홍(紅)

 

"삑-"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소리. 찍히는 포스기의 바코드들이 내 존재를 무력하게 만드는 기분이다.

 

오전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체육관으로 향하는 길은 나름의 낭만이 있다. 강변 옆을 터벅터벅 걸으며 붉게 타오르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으면, 무기력했던 마음이 조금은 달래지는 것 같다.

 

처음에는 그저 친구를 따라 시작한 복싱이었다. 체육관 관장님이 나에게 재능이 있다고 칭찬해 줄 때만 해도, 그저 관원을 모으기 위한 입에 발린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어리석은 생각도 잠시, 스파링을 거듭하며 확실히 느꼈다. 내게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것을.

 

'복싱으로 성공하면 돈 많이 벌 수 있겠지?'

 

그 솔직한 욕심이 내 복싱의 시작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어린 동생 두 명을 혼자 책임지기에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다. 친척도, 가까운 지인들도 우리를 모두 외면했다.

 

팔이 길고 키가 큰 나에게 '원-투'로 빠졌다가 다시 '원-투'로 꽂아 넣는 스트레이트는 완벽한 무기였다. 샌드백을 치며 늘 머릿속으로 그 녀석을 떠올리며 수없이 섀도복싱을 했다. 밀어내도 끈질기게 달라붙고, 몇 번을 쳐도 악착같이 막아내며 다시 일어나는 대단한 녀석. 이번 대회는 상금이 커서 꼭 이겨야만 한다. 하필 결승전에서 그 녀석을 만나 마음이 무겁지만, 상금이 간절한 만큼 더 집중해서 반드시 이겨낼 것이다.

 

체육관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 불빛들이 내가 걸어갈 어두운 길을 밝혀준다.

 

"띠익, 띠익, 띠익, 띠익"

 

도어록이 열리자마자 동생들이 와락 반겨준다. 나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3장 자색(紫色)

 

관중들이 보기에 경기 내용은 그리 특별할 게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링 위의 두 선수는 오묘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비록 사적으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기분. 거친 호흡과 몸에 밴 습관만으로도 서로의 다음 생각을 읽어내고 있었다.

 

말 한마디 섞어보지 않았어도, 수많은 경기에서 부딪히며 다져진 시간들이 있었다. 서로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살아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복싱에 있어서만큼은 서로를 누구보다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

 

'언제 봐도 멋진 리치로 나를 조여오는 이 녀석이 정말 멋지다.'

 

'아무리 밀어내도 끈질기게 파고드는 이 녀석이 정말 대단하다.'

 

링 위에서 격렬하게 섞이는 청(靑)과 홍(紅). 이 두 청년은 서로에게 가장 치열한 라이벌이자,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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