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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가 천국건설

‘사랑’으로 세상을 바꿔야 ‘진리’가 바로 선다:

작성시간06.12.14|조회수58 목록 댓글 0

 ‘고된’ 사랑과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1) 증산은 사랑에 대해 아주 특이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랑이라 하는 것은 고된 것이니, 가족을 사랑함에도 그 많은 괴로움을 참아야 되고 천하를 사랑함에 있어서도 그 많은 괴로움을 참은 연후에 선명히 신기로운 진리가 드러나느니라.”(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280)

 

 도대체 왜 증산은 ‘사랑=고통’이라고 이야기했을까요? 단순한 감정의 기복이나 감성의 부풀어오름이 아니라 ‘사랑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단’이라고 본 것은 아닐까요? 혹자는 ‘나를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너무 애매모호한 말 같습니다. ‘내가 나를 잘 모르는데’ 어떻게 ‘사랑’이라는 그 고차원적인 말을 ‘나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증산은 분명 보다 복잡미묘한 내면을 바라보고 말한 것입니다. 우선 ‘대상’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감정을 제대로 잘 전달해야 합니다. 상대가 내 사랑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지도 의문입니다. 다들 다른 방향으로 서서 저마다의 관심사항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새로운 상대가 끼어들면 그 자체가 대단한 혼란이고 번민입니다.

 

 증산은 아마도 감정이나 감성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책임과 실천이 뒤따르는 ‘윤리적인 사랑’을 말하고 싶었을 겁니다. 상대의 짐을 대신 져주는 것, 상대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 내 길을 잠시 접어두고 상대가 가자는 대로 먼 길을 끝까지 동행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겁니다.

 

 ‘고되다’는 말은 참으로 모호하고 함축적입니다. 하다 보면 자연히 피로증이 쌓여 지속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지게 된다는 의미도 곁들여 있습니다. 기계로 말하면 효능이 차츰 떨어져 나중에는 오작동이 생기다가 슬금슬금 주저앉게 되어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증산은 인류구원, 민족구원의 길을 스스로 찾아나선 구도자였습니다. 자신과 함께 그 구도의 길에 나섰던 이들이 수도 없이 죽어가고 망해가고 흩어져 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경주 최씨 집안의 수운(水雲) 최제우는 구도자의 이상을 실현하다 ‘사도난정(邪道亂正)’으로 몰려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해몽(海夢) 전봉준은 외세를 몰아내고 탐관오리를 없애 동학이념으로 새 국가를 세워보자고 폭력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었지만 얄궂게도 일본군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2대 대도주(大道主) 해월(海月) 최시형은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삼경(三敬) 이념을 설파하다가 동학농민운동 실패 후 4년 뒤에 교도 송경인(宋敬仁)의 밀고로 붙들려 교수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이래 저래 ‘공경할 경(敬) 자’와 아주 밀접한 인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최제우는 증산이 태어나기 7년 전에 40세로 목숨을 버렸습니다. 전봉준(全琫準)은 증산보다 17세 연상으로 동학 창시자 수운(水雲)처럼 40세로 이승을 마감했습니다. 최시형(崔時亨)은 증산보다 44세 연상으로 67세에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증산은 23세의 열혈청년으로 조선반도가 요동치는 대변란을 직접 체험했던 겁니다. 증산은 자신을 구도의 길로 이끌어주고 민족과 국가의 운명에 대한 깊은 시름을 일깨워 준 동학을 통해 청년기를 가파르게 보내야 했던 겁니다.

 

 동학의 3대 대도주(大道主)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1861-1922)는 증산보다 10세 연상이고 제 4대 대도주 박인호(朴寅浩: 1855-1940)는 증산보다 16세 연상이었습니다. 2대 대도주 해월(수운이 죽기 한 해 전인 1863년)과 3대 대도주 의암(해월이 죽기 한 해 전인 1897년)은 다같이 36세에 대도주를 승계했습니다. 반면에 4대 대도주 박인호는 28세(1883년)에 동학에 입문하여 53세(1908년)에 동학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증산은 수운과 해월이 1907년에 고종황제의 특지(特旨)로 신원(伸寃)되고 나서 1909년에 38세로 이승을 마감했습니다. 동학이념이 한 차례의 대변란으로 쑥대밭이 되는 것도 보았고 4대 대도주로 이어져 내려가는 것도 목격했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시대의 중심축을 이뤘던 ‘동학’이라는 초월적 이념을 붙들고 원하건 원하지 않던 간에 격변과 격돌의 한 가운데 서 있어야 했습니다. 1906년에는 동학이 ‘천도교’로 그 이름을 바꿔 다는 것도 목도했습니다. 출판과 교육사업을 통해 민족을 계몽하며 후일을 기약하는 변화된 동학의 세계도 보았습니다.

 

 증산은 당연히 ‘사랑은 고된 일’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한데 ‘그 고된 괴로움을 다 견디고 이기고 나면 신비하기 만한 진리의 새 지평이 활짝 펼쳐지게 된다’고 확언한 부분에서 증산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통의 바다를 다 건넌 후에야 사랑으로 진리의 세계를 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는 비범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겁니다. 최소한 민족과 인류를 향해 날개를 활짝 편 ‘한없이 크고 새로운 차원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천하 사랑’이라는 대목에서는 다시 한번 눈 앞이 캄캄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자신이 어떤 걸 바라는 지도 잘 모르는 마당에 어떻게 천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다 두고 가고 버리고 갈 것들 때문에 죽고 죽이는 피붙이들끼리의 쟁투를 보면 너무도 아뜩하기만 합니다.


(2) 예수는 늘 백성의 삶에 에워싸여 살아야 했습니다. 물고기 잡던 어부들을 첫 제자들로 불러모았지만 왠지 그렇게 시원하거나 신통하지 못했습니다. 엉뚱한 질문으로 곧잘 예수의 고단함을 더했습니다. 예수의 생각과 영 딴판이라 몸소 꾸짖고 넘어가야 할 때도 많았습니다.

 

 예수의 공생애 3년은 백성구원이 전부였습니다. 예수의 공생애 3년간은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많은 병자들을 낫게 해 주었습니다. 많은 불구자들을 ‘보통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볼 수 있게 해주고 들을 수 있게 해주고 일어서서 걷거나 마음대로 뛸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귀신에 붙들려 허우적거리는 가엾은 인생들을 멀쩡히 낫게 해주었습니다. 굶주린 백성들에게 풍성한 먹거리로 잔치를 열어주었습니다. 배불리 먹고도 아주 많이 남는 진정한 풍요, 진정한 잔치를 보여주었습니다.

 

 바람과 파도를 꾸짖어 잠잠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악취 나는 피부병을 깨끗이 고쳐주었습니다. 잃어버린 가족을 위해 울부짖는 이들에게 죽은 피붙이를 다시 살려 주었습니다. 장사한 지 이미 오래 되어 부패한 시체를 다시 살려 많은 백성이 깜짝 놀라 눈을 뜨게 했습니다.

 

 맨발로 소리치며 달려오는 병자들, 앉은 채로 고함치는 불구자들, 옷깃이라도 만져보고자 소리 없이 다가서는 고질병 환자들이 바로 예수의 단골손님이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팔자 한번 되게 사나운 여인(요한복음 4.18), 일곱 귀신에 붙들려 이미 사람이기를 포기한 여인(마가복음 16.9; 누가복음 8.2), 간통하다 현장에서 붙들려 와 돌에 맞아 죽게 된 여인(요한복음 8.4), 18년간 귀신들려 허리를 전혀 못 펴던 여인(누가복음 13.11)이 곧 예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고 벗이었습니다.

 

 유대교 성전(synagogue)의 헌금함 옆에 앉아서 한 동안 지켜보다가 우연히 부자의 모양새와 한 과부의 모양새를 눈여겨보게 되었습니다. 부자의 거들먹거리는 모양과 한 과부의 쩔쩔매는 모습에서 갑자기 측은한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엽전이니 당연히 ‘찰랑’ 소리가 났을 겁니다. 부자가 거드름피우며 던진 엽전은 둔탁한 쇠 소리를 내며 건물 안 공기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을 겁니다. 과부는 겨우 두 ‘렙돈’(히브리 화폐단위로 로마의 최소화폐단위인 한 ‘고드란트’에 해당됨; 마가복음 12.42; 누가복음 12.59에서는 ‘렙돈’을 ‘호리’로 불렀음) 밖에 못 넣었기 때문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무척 부끄러워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모든 사람보다도 헌금함에 더 많이 넣었다.”(마가복음 12.43; “This poor widow has put in more than all those who have given to the treasury.”)

 

 예수는 참으로 색다른 측면에서 사물을 진단하고 관찰했던 겁니다.

 

“다른 이들은 풍족한 가운데서 헌금했지만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바쳤다.”(마가복음 12.44; “They all put in out of their abundance, but she out of her poverty put in all that she had, her whole livelihood.”)

 

 단순한 발상의 전환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역설적인 화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지배계층의 최상위 계층을 이루고 종교적 데이터를 독점하고 있던 서기관(scribe) 중 한 사람이 불쑥 찾아와 예수에게 대뜸 아주 난해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서 첫째가 과연 무엇입니까?”(마태복음 22.36; 마가복음 12.28; “Which is the first commandment of all?”)

 

 당시 유대인들은 자그마치 613개의 세분된 계명(365개는 ‘하지 말라’는 것이고 248개는 ‘하라’는 것)을 신주단지처럼 고이 모시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시험하려 질문을 던진 그 서기관은 계명 지키기를 목숨처럼 여기며 백성들을 혹독하게 다루던 바리새파(Pharisees)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계명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둘째 계명이다. 이 두 계명이 바로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마태복음 22.37-40; 마가복음 12.30-31;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This is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i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On these two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얼마나 명쾌한 답변입니까? 육백여 개가 넘는 율법의 질곡에서 신음하던 백성에게 구약시대의 기본계명이던 ‘하나님 사랑’(신명기 6.5 참조)과 ‘이웃사랑’(레위기 19.18 참조) 단 두 개를 꼬집어 내어 ‘이것 둘만 잘 지키면 나머지는 저절로 다 지킨 게 된다.’고 했으니 그 얼마나 대단한 짐 덜어내기, 부담 줄이기 입니까?  

 

 용서에 대한 예수의 기준도 무척이나 달랐습니다. 한번은 수제자였던 베드로(Simon Peter)가 엉뚱한 질문을 던져 스승의 고단한 몸을 성가시게 했습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줘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족합니까?”(마태복음 18.21; “Lord, how often shall my brother sin against me, and I forgive him? Up to seven times?”)

 

 예수의 대답은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라!”(마태복음 18.22; “I do not say to you, up to seven times, but up to seventy times seven.”)

 

 베드로는 7을 최대수로 들먹였지만 예수는 70에 7을 곱한 490을 필요충분 조건으로 꼽았습니다.

 

 유대교 최고위 지도자들로부터 ‘신성모독’과 ‘백성기만’ 그리고 ‘대중선동과 체제전복기도’로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집단으로 고발되어 재판을 받고 십자가형으로 ‘잠시’ 생애를 마감한 예수는 ‘네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장 내려와 봐라. 네가 메시아라면 하늘의 위력으로 너 자신을 구원해 봐라.’며 조롱하고 핍박하는 이들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내가 만일 잠시 괴롭고 치욕스럽다고 십자가를 외면한다면 모세를 비롯한 그 많은 선지자들과 옛 기록들을 다 거짓으로 만들게 된다. ‘메시아는 사람들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일단 죽어야 하지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멸망과 죽음을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줄 것이다.’라고 여러 곳에서 여러 예언가들이 똑 같은 메시지를 전했지 않느냐? 하는 수 없다. 참을 거짓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죽어야 한다. 내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 이전에 정해놓으신 계획인데 누가 감히 어길 수 있겠느냐?”

 

 그러면서 자신이 보여주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히 견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 옆에서 배우고 바라본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하늘나라에 불려 올라가면 하나님 오른 편에 앉아서 항상 너희를 위해 변호하고 간청하겠다. 즉, ‘성령(the Holy Spirit)을 저희들에게 보내셔서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백성들을 흔들리지 않게 잘 보호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겠다.”

 

 예수의 일생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우리와 동떨어진 딴 세상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신(神)과 사람 사이의 뗄래야 뗄 수 없는 ‘영적인 관계’를 전 생애를 통해 치밀한 영상자료처럼 또렷하고 아름답게 펼쳐 보이고 있는 겁니다. 

 

 전 생애가 바로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처절하고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마지막 모습이 곧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부활 후 40일 동안 이런 저런 모양으로 ‘살아있음’을 보이며 잔혹한 박해 앞에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맡겨진 사명에 대해 다시 한번 간곡하고도 엄격하게 당부했습니다. 의사 누가(Doctor Luke)는 사도들의 행적을 적은 사도행전(Acts 1.3)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해(害) 받으신 후에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To whom He also presented Himself alive after His suffering by many infallible proofs, being seen by them during forty days and speaking of the things pertaining the kingdom of God)

 

 예수는 손바닥과 발목에 큰 못이 박혀 고통스럽게 죽어가면서도 용서와 사랑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여 주소서. 저희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23.34;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do not know what they do.”)

 

 예수의 사랑과 용서는 함께 사형을 당한 살인강도와의 짧지만 무척이나 ‘뜨거운’ 대화에서 아주 잘 드러납니다. 한 강도는 엄청난 고통으로 온 몸을 뒤틀면서도 예수를 조롱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냐? 어디 한번 너와 우리를 구원해 보라.”(누가복음 23.39; “If You are the Christ, save Yourself and us.”) 

 

 하지만 다른 쪽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는 죄수는 오히려 그 강도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대로 상응한 대가를 받는 것이지만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누가복음 23.40-41; “Do you not even fear God, seeing you are under the same condemnation? We indeed justly, for we receive the due reward of our deeds; but this Man has done nothing wrong.”)

 

 그러면서 고통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는 예수에게 간청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저를 생각해 주소서.”(누가복음 23.42; “Lord,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

 

 임종이 가까운 예수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그 죄수에게 정말 기쁘기 한량없는 언약을 공표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말한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누가복음 23.43; “Assuredly, I say to you,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있는 흉악범의 진솔한 신앙고백을 듣고 그 즉시 죄사함과 구원을 약속한 겁니다. 창조자, 절대자가 자신의 죄 많은 창조물에게 ‘하늘나라 가는 길에 동행자로 초대한다’고 공표한 겁니다.

 

 예수가 3년간의 공생애를 통해 한결같이 설파했던 것들이 골고다 언덕 그 참혹하고 흉측한 사형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겁니다. ‘그 누구라도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고 구세주인 것을 믿기만 하면 하늘나라에 당당히 초대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 겁니다. 구차한 변명이나 어지러운 단계도 없습니다. 그저 단순히 ‘말 한마디로’ 창조와 구원을 이룬 겁니다. 죽음 앞에서 영생을 보여주고 멸망으로의 급한 내리막길에서 햇빛보다 더 밝은 하늘나라의 빛을 비쳐준 겁니다.

 

(3) 증산은 ‘고된 사랑 끝에 진리에 속함’을 설파했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존재와 메시아의 사명에 대해 영적인 믿음만 가지면 그 누구라도 무조건 천국에 초대받을 수 있음’을 설파했습니다. 예수는 그런 간단한 절차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바꿔 말했습니다.

 

 증산은 우리도 마땅히 ‘한울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사람도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에 번쩍 눈이 떠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연속극이나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보여주기 위한 제스처’가 절대 아닙니다. 우리의 구차한 현실과 우리의 보잘것없는 쇼맨십은 아예 아랑곳하지 않습니
다. 하늘만큼 엄청나게 큰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하늘보다 더 높은 ‘놀라운’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한민족의 뇌리에 그런 사랑이 깃들여 있다면 얼마다 좋겠습니까? 한민족의 유전인자 속에 증산과 예수가 말하는 그 놀랍고 엄청난 사랑이 비밀스럽게 꽂혀 있고 새겨져 있다면 그 얼마나 뜨겁고 빛나겠습니까? 

 

 몇 푼의 복지, 몇 잎의 도움에 기댈 필요가 뭐 있습니까? 여러 모양의 선각자들과 마술사들과 말쟁이들의 꽁무니를 좇아 다니며 속 눈 한번 화끈하게 뜨기를 바라지 않아도 됩니다. 지구 위 여러 곳에서 들려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보와 지식과 소식에 껄떡거리며 목말라하지 않아도 됩니다.  

 

 더욱이나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놓고 공연히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증산이 말한 ‘고된 사랑’을 제대로 알아 제대로 실행하면 앞 일은 저절로 술술 풀려가게 되어있습니다. 예수가 말하고 몸소 보여준 ‘하나님 사랑’을 진심으로 믿고 받아들여 마음과 영혼에 깊숙이 자국내 놓으면 그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하나님 손에 맡겨져 멋지게 풀려나갈 겁니다.

 

 상생(相生)이니 해원(解寃)이니 하는 말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증산의 ‘천하 사랑’이 한민족을 ‘뜨거운 한 덩어리’로 만들 것입니다. 예수의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 한민족을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되게 하고 모든 걸 녹여 하나되게 하는 기적의 용광로로 만들어 놓을 것입니다.

 

 ‘사랑의 깊이’가 민족의 우수성을 결정합니다. ‘사랑의 농도’가 한 나라의 미래를 엿보게 합니다. 사랑이 바로 감동을 주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증산의 ‘고되고 어렵지만 진리를 세우고 살리기 위한 천하사랑’이 한 세기 가까이 우리 몸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그 누구라도 결코 버려둘 수 없는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 무수한 순교자들의 선홍 빛 피 위에서 새빨간 진달래로 두 세기 가까이 신비롭게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툭 건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진실과 정열로 슬며시 잡아 빼면 됩니다. 누군가가 첫 닭 울음으로 외치고 누군가가 허허벌판 송아지 울음으로 소리를 내면 됩니다. ‘외치는 자, 남은 자’가 먼저 일어나서 목을 길게 빼고 살금살금 나발을 불고 슬금슬금 북을 울리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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