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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수를 아시나요?

맑고 청아한 목소리의 가수, 정훈희를 아시나요?

작성자포청천|작성시간19.03.11|조회수931 목록 댓글 0





정훈희(鄭薰姬, 1952 5 11 ~ )는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대표곡으로서 〈안개〉, 〈너〉, 〈그 사람 바보야〉, 〈무인도〉, 〈꽃밭에서〉 등이 있다.


 

정훈희는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 정근수와 밴드 마스터였던 작은 아버지, 기타리스트인 큰 오빠 정희택 등 음악과 인연이 깊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수 김태화의 부인이고 가수 J의 고모다. 이후 당대 최고 작곡가 이봉조와 인연으로 그로부터 곡 〈안개〉를 받아 1967년 가수로 데뷔하였다.[2] 그녀는 1970년 제1회 도쿄국제가요제에서 가수상을 받았고 이듬해 아테네국제가요제에서는 곡 〈너〉로써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수상했다. 1975년 칠레가요제에서는 곡 〈무인도〉로서 3위 상과 최고가수상을 동시에 받았다. 1975,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방송 출현을 정지당했다. 81년 규제가 풀렸지만 재기 무대도 순탄하지 못했으나 곡 〈꽃밭에서〉로 말미암아 제2 전성기를 맞이하였다.[3] 한창 대한민국 대표급 가수로서 거듭나던 가수 김태화와 혼인하고서 임신한 상태로 앨범 《우리는 하나》를 남편과 녹음하기도 했고 약 30여 년만인 2008년에 독집 앨범 《40th Anniversary Celebrations》을 발매하였다.


 

가수 정훈희는 1952년생으로 올해 나이는 68세이며 방학을 맞아 밴드마스터인 삼촌을 따라 서울에 올라가 한 호텔 클럽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데요. 그대 우연히 작곡가 이봉조씨가 정훈의의 노래를 들어 '안개'라는 곡을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고 합니다이후 정훈희는 국제가요제에서 6회나 입상한 최고의 디바로 불렸으며  1970년 도쿄 국제가요제에서 세계적인 그룹 아바를 제치고 가수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렇게 좋은 날엔','꽃밭에서','무인도'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으며 '한국의 다이애나 로스;,'원조디바'라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정훈희는 1979년 인기 록커 김태화와 결혼해 화제를 모았는데요.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기전 혼전동거를 하며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보수적인 사회분위기로 인해 결혼전 동거와 아들 출산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면서 주목을 받았다고 합니다.

 

정훈희가 데뷔한 1967년은 대중음악계에서는 뜻있는 해로 꼽힌다. 핑크 플로이드, 도어스, 지미 헨드릭스, 벨벳 언더라운드 등 걸출한 가수들이 등장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나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로 시작되는 ‘안개’의 운치있는 노랫말과 곡조는 정훈희의 비음섞인 고운 음색과 절묘하게 어우러졌고, 17세 소녀는 일약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안개’는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소재로 한 영화 ‘안개’의 삽입곡이 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거장 김수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신성일, 윤정희 두 남녀 스타배우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에서 ‘안개’는 정훈희의 노래와 재즈풍의 편곡으로 흐른다.

 

현대인의 물신주의와 도시인의 소외와 고독과 같은 관념적인 주제를 아름다운 흑백영상에 담은 이 영화를 통해 신성일은 단순한 미남스타에서 배우로 거듭났고, 윤정희 또한 연기력을 인정받게 됐다. 영화 ‘안개’의 성공으로 “소설도 걸작” “영화도 걸작” “노래도 걸작”이라는 ‘3걸작’의 신화를 남겼다.

정훈희-이봉조 콤비는 수많은 국제가요제에서 상을 휩쓸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1970년 도쿄 국제가요제에서 정훈희는 ‘안개’로 가수상을 받았는데 당시 ‘댄싱 퀸’으로 유명했던 스웨덴 최고의 그룹 아바도 상을 받지 못하고 빈 손으로 돌아갔던 터였다.


 

1972년 그리스 아테네 국제가요제, 1975 1979년의 칠레 국제가요제 등에서도 정-이 콤비는 빠짐없이 상을 탔다. 국제가요제에서 무려 6번이나 입상한 정훈희에게는 자연스레 ‘국가대표 가수’라는 별명이 붙었다.

정훈희는 “내가 상을 휩쓸었던 것은 반드시 가창력이나 노래 자체의 작품성 때문만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국제사회에서 ‘사우스 코리아’의 위상이 변변찮았던 1970년대 당시의 상황은 국제가요제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그래서 이봉조는 가요제 전야제 등의 행사에서 심사위원을 ‘친한파’로 만들기 위해 특유의 유머를 마음껏 발휘했다고 한다.

 

정훈희는 “선생님이 브로큰 잉글리시로 야한 농담을 할 때마다 심사위원들이 배를 움켜쥐고 떼굴떼굴 굴렀다”면서 “이렇게 친분을 쌓고 인맥을 구축한 것들이 도움이 됐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봉조의 음악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정훈희는 “내가 어떻게 감히 그 분의 음악을 놓고 평가 운운 할 수 있겠느냐”면서 “한마디로 위대하고 탁월한 재능의 작곡가”라고 스승에 대한 끝없는 존경심을 나타냈다.

국제가요제 입상 배경에다 발표하는 노래마다 히트곡이 되자 정훈희는 ‘가창력이 뛰어나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가수’에게 붙여지는 ‘디바’의 칭호를 얻게 됐다. 그러나 1975년 위기가 왔다. 이른바 공연정화법 규제라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횡포에 따라 가수의 80% 이상이 잡혀 들어간 대마초 파동에 그도 끼게 됐던 것이다.

 

정훈희는 “당시에는 시골에서 대마초를 진통제로 사용하기도 하고 담배처럼 아무 스스럼 없이 피울 때였는데 느닷없이 대대적인 규제를 가해 아까운 가수들이 무더기로 무대에서 사라졌다”고 안타까워했다. 자신은 대마초를 피운 사실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유일하게 훈방으로 나왔지만 ‘대마초 가수’라는 낙인으로 인해 더 이상 활동하기가 어려웠다.




81
년 규제가 풀렸지만 노래는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죽기 살기로 노래해도 사소한 것으로 버림받는다는 좌절감과 섭섭함” 때문이었다. 그 뒤 가스펠과 골든 히트 음반, 남편 김태화와 함께 낸 ‘우리는 하나’를 빼고는 정규음반은 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맑고 고운 목소리는 대중들의 기억 속에 꿈틀거리는 생명으로 살아있었다
.

정훈희가 같은 가수로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가수는 미국의 다이애나 로스, 바버라 스트라이샌드 두 사람이다.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더이상 잘 할 수 없을 정도로 노래를 잘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훈희에게 ‘한국의 다이애나 로스’라는 칭호가 붙어있다는 사실이 문득 생각나서 “다이애나 로스의 데뷔 연도가 1970년인데 그렇다면 그를 ‘미국의 정훈희’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썰렁한 아부를 했다. 정훈희는 웃으면서 “다이애나는 솔로로 나오기전 1960년대 초반부터 슈프림스라는 그룹활동을 했기 때문에 그것은 당치 않다”고 말했다.

정훈희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정근수·작고)의 노래를 들으면서 자랐다. 아버지는 만주와 일본 등지에서 공연을 가졌고, 일본 빅터 레코드에서 취입까지 한 알려진 가수였다. 삼촌도 가수였고, 네 살 터울의 오빠(정희택)도 왕년의 인기 그룹 히식스의 보컬이었다.

 

평생의 반려인 남편 김태화는 한국 록의 1세대 가수이고, 조카 제이도 활발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그야말로 노래 가족이라고 할 만하다. 정훈희는 “우리 가족들이 영원히 음악에 대한 열정을 품에 안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훈희는 “잘 부르도록 가르쳐진” 요즘 가수들이 당연히 노래를 잘 하지만 잘 불러서만은 안된다고 말했다. 자신만의 색깔과 목소리를 갖고 있어야 하며 노래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우러나는 감정 또한 풍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목소리에 진심을 담아 듣는 이와 소통하는 것이 바로 노래의 힘이라고 그는 거듭 힘주어 말했다. 역시 핵심은 소통이다.


[출처 : 인터넷 검색을 통한 짜깁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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