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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수를 아시나요?

70년대 미남 가수, 고 최병걸 님을 아시나요?

작성자포청천|작성시간15.01.03|조회수5,772 목록 댓글 0

 

 

 

최병걸(1950 ~ 1988)씨는 원로 기타주자인 아버지 최용익씨의 영향을 받아서 어릴 때부터 항상 음악과 접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고교와 대학시절 아이스하키 선수생활을 하면서도 아버지한테 틈틈이 배운 기타 솜씨로 노래를 즐기곤 하다가, 72년에 아마추어 자격으로 명동 코스모스 살롱에 나가 통기타를 치며 노래한 것이 가수로 진출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72년에 같은 건물에 있던 오비스 캐빈에서 그룹 <메신저스>를 이끌던 정성조씨에게 싱어로 픽업되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당시에 조경수씨도 같이 일하고 있었는데, 정성조씨가 <메신저스>를 조경수씨에게 인계하고 작곡자로 본격 나서자, 최병걸씨도 <최병걸과 매직스>를 결성하고 독립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로 고고클럽에서 활동한 탓에 일반인들에게는 무명의 존재였습니다.

 

75년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가 크게 성공하자 엇비슷한 영화들이 마구 쏟아졌는데, 최병걸씨가 이런 아류의 영화 주제가를 거의 도맡다시피 했습니다. 그 중에는 <영자의 전성시대> <어제 내린 비> <초연> <왕십리> <성난 능금> <춘자의 전성시대>가 있고, <영자의 전성시대>에서는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비록 흥행에는 참패했지만 이유섭 감독이 만든 <춘자의 전성시대> 주제가인 《찬비》로 정식 가수로 데뷔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밤무대만을 떠도는 무명가수에 불과했으며, <최병걸과 매직스> 멤버 대부분은 대마초 혐의로 붙잡혀갔습니다.

 

77년에 같은 레코드사 소속인 송창식 (예명: 송결)씨가 작곡한 <가위 바위 보>를 간신히 녹음해서 발표했지만 디스크를 발매한 직후에 송창식씨가 자격정지를 당해서 노래를 부르지도 못하는 불운을 당하자 가수를 그만두려고도 했습니다. 이 노래는 나중에 송창식씨 본인이 직접 불러서 좋은 반응을 얻었지요. 영화 주제가였던 이 노래의 가사 내용은 일찍 부모님을 여읜 세 남매가 살길이 막막하자 맏딸이 동생들을 입양시키는 슬픈 내용입니다.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아무나 이겨라. 활짝 핀 그 손을 멀리 멀리 뻗어라. 잃었던 것 다시 찾아서 ….. 머나먼 인생 길 갈래길도 많단다. 망설이지 말아라. 정한 길 그 한 손 주저 말고 뻗어라. 가위 바위 보 ….” 다른 형제에게 먼저 해외로 입양가라고 서로 양보하던 남매들은 결국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하기로 했는데, 맏딸이 일부러 지는 것을 내어 동생들을 먼저 입양시킨다는 눈물겨운 이야기입니다.

 

 

 

 

최헌씨의 《앵두》와 윤수일씨의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경합하던 78년에 아직 히트곡 하나 없던 최병걸씨는 단독 앨범도 아니고 5명의 가수와 옴니버스 음반을 냈습니다. 여기에는 《난 정말 몰랐었네》 《사랑했기 때문에》 《찬비》 정소녀씨와 듀엣으로 부른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그 사람》 그리고 지금은 SM 엔터테인먼트 대표인 이수만씨의 《다시 만날 때까지》 등이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난 정말 몰랐었네》가 순식간에 뜨거운 반응을 보이면서 무명의 설움을 한 방에 날려버렸습니다. 그런데 출반된 지 3개월 만에 공연윤리위원회는 이 노래의 전주(前奏)가 일본 노래인 <旅笠道中> 16소절을 표절한 왜색조라는 이유로 방송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러자 전주를 부리나케 고쳐서 재취입한 것이 지금의 노래입니다.

 

 

 

 

그 후 《회전목마》 《이 몸은 바람이 아니오》 《아낌 없이 주련다》 《눈물 같은 비》 《축제》 등 60여 곡을 발표했으며, 중앙대 예술대학 무용과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한 탤런트 겸 CF 모델인 한계순씨와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80년대 들어서 다시 대중의 무관심 속에 잊혀지다가 88 11월에 간암이 전신에 퍼져 수술도 받지 못한 채 아깝디 아까운 39살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최근에는 우스개로 《나는 어떡하라구》 《울고 싶어라》와 함께 명퇴자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라고도 합니다만, 떠나간 사랑이 이처럼 깊은 상처를 남길 줄 몰랐다는 가사를 함께 따라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노래/작곡: 최병걸 (작사: 김중순)

 

난 정말 몰랐었네, 최병걸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돌아서지 않는 것은
미련인가 아쉬움인가
가슴에 이 가슴에
심어준 그 사랑이
이다지도 깊은 줄은
난 정말 몰랐었네
~ 진정 난 몰랐었네

 

가슴에 이 가슴에
심어준 그 사랑이
이다지도 깊은 줄은
난 정말 몰랐었네
~ 진정 난 몰랐었네

 

1978년에 발표된 이 곡은 77년 가을에 노래까지 불러보겠다고 최병걸씨를 찾아온 탤런트 정소녀씨 ㅡ (236)번 《이름 모를 소녀》의 해설 편 참조 ㅡ 에게 노래를 가르쳐주던 무렵에 최병걸씨가 직접 작곡했던 2곡 중 하나입니다. 다른 한 곡은 정소녀씨와 듀엣으로 부른 《그 사람》인데, 정소녀씨가 당시에 짝사랑하던 어떤 남자를 마음으로 그리면서 쓴 가사라고 합니다. 《난 정말 몰랐었네》는 무명 가수였던 최병걸씨를 단숨에 인기가수로 만들어준 결정적인 곡으로써, 그는 이 곡으로 78년에 MBC TV <금주의 인기가요> 프로그램에서 5주 연속으로 정상을 차지했고 TBC TV <가요 베스트 7>에서도 톱을 차지하면서 KBS/MBC 10대 가수와 TBC 7대 가수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이 노래가 발표된 70년대 말은 한국 가요계의 암흑기였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음악인들이 75년 대마초파동과 연이은 가요계 정화운동의 박해를 받아서 자의나 타의로 음악을 중단하거나 해외로 떠났고, 그나마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남은 음악인들조차 위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무렵에 밴드 출신 가수들도 살길을 모색하기 위해 트롯으로 영역을 넓혔는데, 조용필/윤수일/최병걸/들고양이들이 대표적인 가수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주도했던 음악 장르가 바로 <트로트 고고>였습니다. 그러니까 젊은이들이 즐겨 듣던 고고 리듬에 기성세대가 즐겨 부르던 트롯이 덧씌워진 형태로써, 드럼과 베이스 및 기타가 흥겨운 멜로디를 연주하는 신종 트롯이었습니다. 가수들도 ΟΟΟ와 △△△” (예를 들면, “윤수일과 솜사탕”)처럼 밴드와 함께 활동하는 것이 유행이었죠. 그 결과 젊은 층에서도 새로운 감각의 트롯을 좋아하기 시작했으며, 《난 정말 몰랐었네》도 그런 곡 중 하나입니다.

 

 

 

 

 

1970년대 말은 한국 가요계에 있어 암흑기였다. 아니 1975년 대마초파동으로부터 1984년 들국화의 데뷔까지 한국 대중음악은 권위주의 정권 아래 압살당하고 있었다.

 

대마초파동과 뒤이은 가요계정화운동의 여파로 많은 음악인들이 자의 혹은 타의로 음악을 등지게 되었다. 신중현은 활동을 금지당하고, 이장희는 이민을 떠나고, 그나마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음악인들조차 활력을 잃고 위축되어 있었다.

 

 

 

 

 

그 여파는 특히 언더그라운드에서 더 컸다. 막 락이 주류무대로 올라오려던 시점이었다. 밤무대를 떠돌던 락이 신중현을 필두로 점차 대중들에 알려지며 주류무대로, 포크와 더불어 한국 대중음악의 전면에 나서려던 딱 그 무렵이었다. 그만한 역량이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축적되어 있었다. 참고로 언더그라운드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조동익으로부터였다. 당시는 그냥 밤무대였다. 무명가수였고.

 

아무튼 가요계정화라는 미명 아래 권력에 의한 간섭과 검열이 심해지자 특히 대마초라고 하는 낙인이 찍혀 버린 락음악인들은 더욱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다른 대안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영원히 무명으로 밤무대를 떠돌 것이 아니라면 성공을 향한 다른 길을 찾아야만 했다.

 

히식스와 검은나비를 거치며 흑인음악의 정서가 강한 브라스락으로 인기를 모으던 최헌이 그 첫 테이프를 끊었다. 예전 최헌더러 몇 년 째 히트곡 하나로 욹워먹는다며 놀리곤 하던 그의 초히트곡 "오동잎"이었다.

 

"오동잎"은 전형적인 성인가요였다. 한 마디로 흔히 말하는 뽕삘 짙은 트로트였다. 흑인음악의 소울이 짙게 느껴지던 최헌의 목소리는 트로트와 어우러지며 강한 호소력으로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10만 장 이상의 앨범이 판매되는 일약 대박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가요계가 그러하듯 한 번의 성공이 있으면 그것을 답습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게 되었다. 최병걸도 그런 한 예였다.

 

 

 

 

 

최병걸의 "난 정말 몰랐었네",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 윤수일의 "사랑만은 않겠어요"... 공통점이라면 하나같이 밤무대에서 활동하던 밴드보컬 출신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트로트라는 것이었고, 그러면서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스타일의 트로트였다. 고고리듬에 실려 밴드스타일의 연주로 들려지는. 실제 조용필의 경우 "위대한 탄생"이라고 하는, 윤수일의 경우는 윤수일밴도 이전 "윤수일과 솜사탕"이라고 하는 밴드와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밴드와 트로트의 만남. 들고양이는 그 정점에 있었다. 1970년대 후반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당시의 음악을 특정하여 부르던 이름이 트로트고고였다. 젊은 층에서 즐겨 듣던 락과 고고리듬과 기성세대가 여전히 즐겨 듣고 부르던 트로트가 더해진 장르란 뜻이다. 당장 듣기에도 끊임없이 둥둥거리며 울리는 드럼과 베이스, 그리고 중간의 멜로디컬한 기타의 애드립은 밴드의 그것이다. 단지 밴드음악에 트로트가 덧씌워졌달까? 춤곡의 흥겨움과 더불어. 트로트의 새로운 작은 혁명이었다.

 

 

 

 

 

아마 일본에서 엔카가 쇠퇴하는 사이 한국에서 여전히 트로트가 주류음악의 한 장르로서 발전해 올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젊은 층에서도 트로트를 듣기 시작했다. 젊은 층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트로트 문화의 시작이었다. 80년대로부터 지금으로 이어지는 트로트의 양식화와 기교화는 바로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해도 좋았다.

 

아무튼 참 어렵던 시절이었다. 참 힘들던 시절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밴드는 벌이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주류무대로 진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던 75년 이전과는 달리 대마초파동은 그 길 자체를 막아버렸다.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밤무대라는 공간 자체가 성인을 대상으로 하기에 트로트에 익숙해 있었다는 점이랄까.

 

하지만 그런 어려운 여건은 음악인들로 하여금 기존의 성인음악을 수용하면서도 그들이 그동안 구축한 음악세계를 그 안에 담아내는 새로운 시도를 하게끔 만들었다. 사양세를 걷던 트로트도 그렇게 살아나게 되었고, 아예 고사해버리는가 싶던 락은 조용필과 윤수일을 통해 보다 대중적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이어지는 8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의 르네상스. 암흑시대인 중세의 끝에 르네상스가 있었듯 1980년대 중반은 70년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시대상황에 해외 팝의 영향까지 더해지며 일대 폭발을 일으킨 한국 대중음악의 전기였다.

 

 

 

 

 

사실 오동잎을 이야기해야 했는데. 그러나 나는 오동잎의 경우는 가사도 다 외우지 못한다. 내 노래가 아닌 까닭이다. 말했듯 나는 너무 어렸고 최병걸의 "난 정말 몰랐었네"부터나 겨우 듣고 기억할 수 있었다. 최헌과 오동잎은... 더구나 오랜만에 최병걸과 그의 노래가 떠오르기도 했고.

 

어쨌거나 70년대의 최헌과 윤수일과 조용필, 최병걸 등에 이어, 80년대에는 현철, 김정수, 그리고 유현상... 락과 트로트의 10년이 넘는 교류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겠다. 대개는 먹고 살기 힘들어진 락음악인들이 살 길을 찾아 일방적으로 트로트로 넘어가는 것이었지만.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그럼에도 여전히 기억에 새롭다. 아버지도 나 만큼이나 그리 노래를 잘 하지 못하시는데. 익숙한 노래가 정겹다. 시간이 흘러도, 사람이 흘러가도,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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