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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수를 아시나요?

잊을 수 없는 "너의 목소리", 가수 이종용을 아시나요?

작성자포청천|작성시간15.06.28|조회수701 목록 댓글 0

 



 


음악이라는, 아니 좀 더 협의의 의미로서 노래란 단어는 추억을 관통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 추억의 영속성은 기억력의 쇠잔이나 시대의 변화등에 따라 잔존가치가 떨어지는데, 유독 그 잔존가치가 높거나 중독성을 계속 유지하는 노래들이 있다. 그게 바로 대중적 의미에서의 '명곡名曲'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너"라는 노래가 내겐 그런 의미로 존재하고 있다. 이 불후의 명곡이 터졌을 때 난 초등학교 6학년이었지만, 장발의 청년들이나 까까머리 중고등학교 형들과 꺼리낌없이 같이 이 노래를 불렀다. 지금도 이 곡을 턴테이블에 돌리면 마치 켜켜히 쌓여있는 시간의 거미줄을 걷어내면서 지고지순한 추억의 판도라 상자를 벽장속에서 꺼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종용은 우리가 잘 알고있는 노래모임 청개구리의 창단멤버였다. 군 입대 전 임용재와 에코스란 팀으로 활동을 하다가 군에 입대하여, 창원에 소재한 39사단에서 (아주 부러운 주특기인)군종 사병으로 근무하면서도 계속 음악의 끈을 놓지않고 고등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반주도 하였고, 마산mbc 합창단을 만들어 지휘를 맡았다고 한다. 

전역 후 서울로 다시 돌아온 이종용은 명동과 근처의 통기타 업소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세상과 정면으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노래들을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뛰어난 가창력의 소유자인지 알 수 있는데, 특유의 가녀린듯하면서 그만이 가진 순간적 폭발력에 놀라고,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음역대와 고음에 두 손 들고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1975년 드디어 "너"를 수록한 데뷔음반을 발표한다. 


"이종용(너)/유심초(너와의 석별)", 1975. 지구

재미있는 것은 이 LP에 두 개의 "너" 버전이 실려있다는 것인데, 앞면에 이종용의 버전이, 뒷면에는 유심초의  버전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종용의 버전이 공전의 힛트를 기록하며 15주 연속 최고 인기가요의 신기록을 수립하는데, 당시 "너"의 인기는 비교는 뭣하지만 최근에 터진 국내판 "강남스타일" 정도의 인기 정도는 있었던 것 같다. 

 

 

SIDE 1 - 이종용

1. 너 

2. 아름다운 사랑 

3. 그리움 

4. 조국의 숨결 

5. 추억 

 

SIDE 2 

1. 너와의 석별(유심초) 

2. 너(유심초) 

3. 사랑이여(이종용/윤형주) 

4. 강가에 앉아서(이종용/윤형주) 

5. 사랑은 당신처럼(이종용)

 

 

 

하지만, 생애 최초이자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이종용은 1975년 12월 2일 대마초 흡연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 "너"라는 한 곡으로 가요계를 평정했던 그에겐 아마 청천벽력같은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후 4년 동안 방송활동 금지령에 묶여 공식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1980년 금지가 풀린 후 발표한 앨범들에서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와 "겨울아이"등이 힛트를 쳤고, "너" 시절만큼은 아니더라도 다시 가요계의 정상권에 근접했다. 

 


"내영혼/겨울아이", 1980. 지구

 

이 앨범에서는 "겨울아이"도 좋아하지만 "내영혼(나)"을 너무 좋아한다. "너"에 대한 "나"의 화답이어서 그런걸까? "......난 너를 위해 시를 쓰리니 넌 날위해 노래를 부를래?......." 

  


 

SIDE A
1.내 영혼(나)
2.어느 작은 사랑
3.혼자 되어도
4.사랑
5.마지막 순간까지

SIDE B
1.겨울아이
2.기다리겠오
3.우리
4.지켜주소서
5.너  

 

 


"록 오페라-수퍼스타 예수 그리스도", 2LP, 1980. 한국음반

 

이미 너무나도 유명했던 록 뮤지컬을 한국어로 공연한 본 앨범을 들어보면 이종용의 고음역대에 입이 쩍 벌어지게되는데, 당시까지 한 번도 연기를 해본 적이 없었던 이종용이 예수님 역을 맡 이유는 단 한가지, 가성을 쓰지않고 이종용만큼 고음을 낼 수 있는 남자가수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군대 생활도 군종 사병으로 근무했고, YWCA에서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는등 청년기까지의 삶도 기독교인 그 자체이었다. 뮤지컬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는 총 249회 공연되었는데, 마지막 공연이 끝난 뒤 그는 목회자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어찌보면 당연지사이다. 비록 뮤지컬이지만 249번이나 십자가에 못박혀죽고 249번이나 부활을 했으니. 어쨌튼 대중들의 입장에선 정말 뛰어난 가수를 하나 잃은 셈이고,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귀한 주님의 종을 하나 얻은 셈이다. 1982년 1월, 신학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그렇게 그는 그를 사랑했던 대중들을 뒤로 한 채 미련없이 떠나버렸다. 

   

 

좌로부터 후라이보이 곽규석, 이종용, 유인촌, 김도향, 윤복희 

 

 

 

이종용은 원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팔자 탓에 가수가 되었고, 예정된대로 귀한 주님의 종이 되어 현재 미국 L.A.에서 목회자의 길을 열심히 걷고 있다. 작아서 하도 작아서, 조용해서 하도 조용해서 눈에 띄지 않지만, 속이 하도 꽉차서 함부로 그를 넘볼 수도 없었고, 그를 만나고 있으면 그를 감싸고 있는 巨人 예수를 만나게 된다고 친구들은 말하고 있다. 

그에게는 목소리로 들려주는 바이브레이션이 아닌, 순수하고 깊은 영혼에서 울려나오는 바이브레이션이 있다. 난 아직까지 이런 가수를 본 적이 없다. 앞으로 내 나이가 더 들고 기억력이 혼미해질 때면 그의 LP를 꺼내 기필코 나의 푸르렀던 1970년중반 그 시절로 꼭 돌아갈 것이다.

(FULL ALBUM)너/이종용

 

 

 

1975.08.20 스튜디오 정규 앨범(이종용/너, 유심초/너와의 석별)

 

SIDE 1

1. 너 : 작사/서세건 작곡/서세건 노래/이종용

2. 아름다운 사랑 : 작사/윤형주 작곡/외국곡 노래/이종용,이종용

3. 그리움 : 작사/윤형주 작곡/윤형주 노래/이종용

4. 조국의 숨결 : 작사/윤형주 작곡/윤형주 노래/이종용

5. 추억 : 작사/윤형주 작곡/윤형주 노래/이종용

 

SIDE 2

1. 너와의 석별 : 작사/서세건 작곡/서세건 노래/유심초

2. 너 : 작사/서세건 작곡/서세건 노래/유심초

3. 사랑이여 : 작사/윤형주 작곡/외국곡 노래/이종용,윤형주

4. 강가에 앉아서 : 작사/윤형주 작곡/외국곡 노래/이종용,윤형주

5. 사랑은 당신처럼 : 작사/윤형주 작곡/외국곡 노래/이종용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흑백TV를 통해 들었던 '너'라는 노래가 있었다. '낙옆 지던 그 숲속에 ∼파란 바닷가에 ∼떨리는 손 잡아주던 너∼' 1975년 5월부터 12월까지 이 노래는 그 시절의 인기프로였던 '금주의 인기가요'에서 연속 1등을 차지했다. 당시 27세의 가수 이종용은 이 노래로 특급 스타가 됐다. 그야말로 자고 일어나 보니 유명해졌다. 33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이 노래는 지금도 올드 팬들의 뇌리 속에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종용의 추락은 그의 눈부신 비상만큼이나 극적이었다. '너'의 1등 행진이 거침없었던 75년 12월 초의 어느날, 그는 방송국에 들이닥친 경찰에 이끌려 어디론가로 떠났다. 당시의 사회면과 연예면에 대서특필된 이른바 '대마초 사건'의 주역으로 지목된 그는 140일 동안을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동료 가수였던 윤형주와 이장희도 함께 구속됐다. 그때 이종용의 인생은 끝난 것으로 보였다.

징역 1년6개월,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고 구치소에서 나온 이종용은 이후 4년간 연예활동을 할 수 없었다. 연예활동 금지처분을 받은 것이다. 모두가 끝났다고 보았던 그의 인생이 터닝포인트를 맞게 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구치소 생활을 통해서였다. 또한 출소 후 다시 다니게 된 교회 생활을 통해서 그의 삶은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을 맞게 됐다.

구치소 안에서의 단절된 생활 동안 그는 수없이 자신이 추구했던 성공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인생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헛되고, 헛되다. 해 아래의 모든 수고가 헛되다"를 연발했던 전도서의 저자와 같이 그는 이 땅에서의 성공이 물거품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성공이 아니었다. '금주의 인기가요'의 1등이 아니었다. 생명의 주님이었다. 주님을 받아들이면서 희망이 생겼다. 모두가 "이제, 이종용은 끝났다"고 말했지만 구치소 안에서 그는 알았다. 주님 안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출소 후 그는 연예계로 돌아가지 않고 '예수'가 되었다. 현대극단의 '지저스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예수역을 맡아 2년간 249회를 공연했다. 당시 마리아역의 윤복희, 빌라도역의 유인촌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33세이던 82년 초 신학을 공부하러 미국으로 건너갔다. 신학교를 졸업한 뒤 텍사스에서 목회를 하다 93년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코너스톤교회를 개척했다. 목사 이종용은 지금 59세의 나이가 됐다. 가수 이종용이 아니라 26년 동안 주님의 심정으로 목회한 이종용 목사를 지난달 20일 레노바레 세미나가 열린 미국 팰로스버디스의 구세군수련회관에서 만났다. 그는 세미나를 위해 한국에서 온 30여명의 목회자들 앞에서 자신의 또 다른 히트곡인 '겨울아이'와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불렀다.

그와 2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먼저 구치소에 있었던 느낌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었다. "처음에 절망했어요. '이대로 끝나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포기했어요. 제게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지요. 그런데 이상해요. 포기하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잡고 있을 때는 고통스러웠는데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오는 이상한 편안함이 있었어요. 성공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를 수없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목사는 가수로서 톱스타의 반열에까지 올랐었지만 그 생활에서 어떠한 행복도 누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혀 짜릿하지 않았습니다. 외롭고 허전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방송국에서도 너무 힘들었어요. 반말은 물론이고 욕지거리와 음담패설이 난무하던 곳, 의미 없는 이야기들이 오가는 곳이 그 당시의 방송국이었어요. 힘들었어요. 그 생활이 싫었어요. 물론 목사가 된 뒤에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오는 기쁨이 있어요. 세상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느낍니다. 세상에서 최고를 맛보았기 때문에 무엇이 함정인지를 알아요. 목회하면서도 그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그가 말하는 함정은 무엇인가? "주님의 이름으로 나의 뜻을 이뤄나가는 것이지요. 내 목적을 갖고 주님을 이용하는 거예요. 목회에서도 성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목회 가운데 제가 깨달은 성공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방법대로만 하고, 주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어요. 이렇게 하면 부흥이 오게 마련이에요. 물론 이 평범한 사실을 무시하는 목회자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은…."

목회자로 이종용은 사실 성공한 목사의 반열에 들 수 있다. 코너스톤교회는 지금 주일 출석 인원이 800여명에 이른다. 이민교회로서는 큰 규모인 셈이다. 활력 있는 예배로도 유명하다.

인기 가수였던 사실이 과연 목회에 득이 됐는지가 궁금했다.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목회하기 너무 힘들었습니다. 우리 한국인은 연예인들은 머릿속이 텅 비었을 것이란 선입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연예인이 좋아서 교회에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말씀이 좋아야 성도들이 오는 것이지요. 저는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빈 머리, 세상 것으로 가득찼던 머리를 성경으로 채우자고 결심했습니다. 엄청나게 읽었어요. 지금까지 성경을 80독 한 것 같습니다. 100독 하는 게 목표예요. 또한 82년부터 지금까지 매일 큐티를 하고 있습니다. 26년간 매일 큐티한 내용이 저의 목회 자산입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 성도들이 저를 신뢰하게 됐습니다."

그와 함께 지저스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공연했던 유인촌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됐다. 형으로 절친하게 지냈던 조영남은 여전히 연예활동을 왕성히 하고 있다. 온누리교회 장로인 윤형주는 기획사 사장으로 있다. "평범해진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습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공연에서 예수역을 맡은 나는 목사가 됐고, 빌라도역을 맡은 유인촌은 장관이 됐네요.(그는 이 말을 하면서 크게 웃었다) 아쉬움은 전혀 없습니다. 유 장관이 당시에 '형, 나는 돈을 많이 벌거야'라고 했었어요. 아무튼 유 장관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유 장관이 만일 힘들어지면 찾아가서 기도해 줄 겁니다. 잘될 때는 굳이 만날 필요는 없지만…."

이 목사에 따르면 이장희씨는 미국에 있을 때 코너스톤교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실히 신앙생활을 했다.

"조영남씨는 어떻습니까?" 여기에서 이 목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했다. 상념에 잠기는 듯했다. 조씨와 이 목사는 같은 고향 출신이다. 조씨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삽교리에서 태어났다. 이 목사는 덕산면 복당리 출신이다. 조씨가 이 목사보다 3년 위다. "지저스크라이스트 슈퍼스타 공연을 249회로 마치고 미국으로 가기 전 윤형주 장로님 댁에서 영남이형과 만났습니다. 이장희씨도 있었지요. 우리는 그날 저녁 8시부터 다음날 아침 10시까지 신앙과 관련한 대논쟁을 벌였습니다. 당시 나는 미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한 영남이형에게 신앙생활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형이 내게 '종용아, 나 예수님 믿을 수 있도록 도와줘'라고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충격적이었습니다. 신앙적으로 뜨거웠던 나는 그때 열심히 복음에 대해서 영남이 형에게 말했던 것 같아요. 그는 나에게 '너 믿음이 정상이 아니구나. 꼭 무당 믿음을 지닌 사람 같다'고 질타했습니다."

그 순간에 이 목사를 도와준 사람이 윤 장로였다. 윤 장로는 조씨에게 "종용이의 믿음이 건강해. 종용이는 복음에 무지하지 않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조씨는 당시 이 목사에게 하나님을 진짜로 믿고 싶다면서 "하나님을 가슴으로 믿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지금도 조씨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면서 신문지상을 통해서라도 한마디 하겠다고 말했다. "영남이 형, 나는 형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형을 택했어요. 형의 목소리는 내가 들었던 최상의 목소리예요. 과찬하자면 신의 목소리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 목소리를 주님을 위해 쓰지 않으면 저주의 목소리가 될 수 있어요. 나는 영남이 형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니, 우리 주님이 형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단풍이 마지막 자태를 뽐내고 낙엽이 되듯, 형이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위해 그 목소리를 쓰기 바라요. 형을 사랑합니다. 마음 깊이."

이 목사는 지난 2005년 자신의 이야기를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누가출판사) 라는 제목의 책으로 냈다.

마지막으로 성공을 추구하는 고국의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성공한다고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주님을 만날 때 옵니다. 유명 가수 이종용이 아니라 비록 무명일지라도 목사 이종용, 아니 주님의 자녀인 이종용으로서가 훨씬 행복합니다. 이것이 내 삶을 통한 고백입니다." 

 

http://blog.daum.net/dfgiyo/5265649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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