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김종찬
김종찬(1960년 4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 겸 종교인이다.
그는 1986년 <꿈>이 담긴 데뷔 앨범 「꿈/혼자는 싫어」(1986)를 발표했으나 실패한다. 당시에 신인급이던 하광훈, 지예, 함경문, 이호준 등의 음악인들이 힘을 모아 만든 앨범이었으나 대중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들이 다시 뭉쳐 2집 「김종찬 Vol. 2」(1987)를 발표하자 상황은 바뀌었다. 타이틀 곡인 <사랑이 저만치 가네>가 각종 차트에서 넘버 원으로 올라서며 김종찬이라는 이름을 알렸고 이후 <당신도 울고 있네요>가 히트하며 성인층의 애창곡 리스트 중 하나가 되었다. 같은 앨범에 수록된 <토요일은 밤이 좋아>는 가요계를 석권하며 그에게 연말 시상식의 주요 부문의 트로피를 안겨 주었다.
이문세, 최성수 등과 함께 최고의 인기를 누린 김종찬은 2집의 히트 공식을 대부분 그대로 답습한 3집 앨범을 내놓는다. <아름다워라 그대>가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2집의 <토요일은 밤이 좋아>를 겨냥해 쓰여진 <토요일은 밤이 좋아 2>와 <오늘밤은 너무 좋아> 등은 기대에는 못미치는 반응을 얻었다. 이미 전성기가 지난 김종찬은 1991년과 1993년에 두 장의 앨범을 더 발표하고, 이후 보다 성인취향에 가까워진 음악을 선보이기도 했으나 대중들의 관심에는 미치지 못했다.
한 앨범에 4곡의 히트넘버를 배출한 김종찬 2집
요즘 가수들은 앨범을 싱글이나 미니앨범 형식으로 발표하는 경우가 많고, 정규 앨범을 낸다 해도 타이틀곡-후속곡 개념이 아니라 ‘정식판’,‘리패키지’라는 형식으로 발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한 앨범에서 두 곡 정도의 히트곡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아이돌 그룹 HOT도 2집 앨범에서 <늑대와 양>,<행복>,<위아더퓨처>를 차례로 히트시킨 바 있다.
그러나 김종찬은 2집 앨범에서 무려 4곡의 히트넘버를 배출해 내며 '쌍팔년도'(1988년이라는 의미일뿐, 특별히 비하의 의도는 없습니다)의 가요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타이틀곡은 <사랑이 저만치 가네>. “사랑이 떠나간다네 이 밤이 다 지나가면 우리의 마지막 시간은 붙잡을 수는 없겠지 사랑이 울고 간다네 이별을 앞에 두고서 다시는 볼 수 없음에 가슴은 찢어지는데”라는 애절한 가사가 돋보이는 곡이다.
사랑이 떠나갔으면 다른 사랑을 찾는 것이 인지상정. 김종찬은 후속곡 <토요일은 밤이 좋아>를 통해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난다. 안무라고 부르기엔 다소 민망하지만 김종찬은 이 곡을 통해 약간의 율동(?)을 선보이기도 했다.
<토요일은 밤이 좋아>는 홍보 당시에는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 현철의 <봉선화 연정>에 밀려 ‘만년 2위곡’이란 말을 듣기도 했지만, 밤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곡이다.
하지만 아무리 토요일의 밤을 즐겨 보려 해도 옛사랑에 대한 그리움은 어떨 수 없는 법. 김종찬은 다시 옛사랑을 찾아 낸다. 그의 세 번째 히트곡 <당신도 울고 있네요>다.
<사랑이 저만치 가네>와는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부르는 이 곡 덕분에 그 시절 헤어진 연인들이 많이 재회를 하게 됐다는 확인할 수 없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 떠난 사랑은 두 번도 떠날 수 있는 법. 김종찬은 네 번째 곡 <떠나는 길목에서>를 통해 처절했던 자신의 사랑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 곡은 앞선 세 곡에 비하면 크게 히트하진 못했지만, 숨겨진 명곡으로 꼽히며 라디오를 중심으로 잔잔하게 사랑받았다.
김종찬의 2집이 대박을 치면서 김종찬을 향한 매스컴의 차가운 시선도 변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이수만,이문세, 유열에 김종찬을 더 해 ‘마사트리오’라 불렀고, 또 다른 누군가는 김종찬을 거대한 ‘마삼트리오’에 홀로 맞서는 달타냥에 비유하기도 했다.
사업 실패 후 종교인으로 새 삶을 걷고 있는 김종찬
하지만
김종찬의 전성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1989년에 발표한 3집 <아름다워라, 그대>가 변진섭, 박남정, 이지연 같은 젊은 가수들의
등장 속에서 기대만큼 히트하지 못한 것이다.
이후 몇 장의 앨범이 차례로 실패한 김종찬은 90년대 후반 사업에 손을 댔다가 IMF
사태에 휩쓸려 사기 혐의로 구속 수감돼 실형을 살기도 했다.
하지만 김종찬은 지난 날의 과오를 씻고 종교인으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늦은 나이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고, CCM 앨범도 5장이나 발표하며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종교가 없는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왕년의 인기가수 김종찬이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는 소식은 반갑기 그지
없다.
아래는 김종찬 씨가 기독교 목회자가 된 후 간증 내용이다.
김 전도사에게 위기감이 엄습했다. 사그라진 인기를 만회할만한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노래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생겼다. 김 전도사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전직 코미디언인 주병진 씨가 사업에 성공한 것도 그에게 용기를 줬다. 1년 동안 사업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했다. 처음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구상을 할 수 있었느냐’며 놀랐다.
그러나 잘 될 것 같았던 사업은 시간이 지나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1년이 되는 해에는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 들어갔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IMF가 터졌다.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기는커녕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김 전도사는 사업실패로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게 된다. 결국 그로 인해 김 전도사는 감옥에 가서 실형을 살게 됐다.
“감옥에서 이 세상에 어떤 추위보다 강한 추위와 어떤 더위보다도 강한 더위를 피부로 느끼며 생활했어요. 그런 환경에서 유죄다, 무죄다, 합의한다, 안한다라는 지리한 공방을 하며 저의 영혼은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습니다. 감방안에 있는 10명의 재소자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재소자 중에 3명은 남들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어요.
그들 3명은 일정한 시간을 정해 감방 안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찬송가를 불렀다. 그 찬송가들이 김 전도사의 기억 속에 묻혀있던 향수를 끄집어냈다. 어렸을 때 눈깔사탕 먹으러 다녔던 교회에서 불렀던 찬송가였다. 찬송하는 자리에 자신도 껴 달라고 해서 같이 찬송을 했다. 이 모습을 마침 지나가던 교도관이 목격했다.
어느날 교도관이 김 전도사를 지목해서 불렀다. “당신 찬송가를 부르던데 크리스천인가요?”
김 전도사는 “뭘요, 옛날 생각나서 그냥 같이 부른 거지 크리스천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교도관은 “그러면 내가 이곳에 3일에 한 번씩 오는데 그 때마다 당신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찬송가도 가르쳐 주고 싶소”라고 말했다. 김 전도사는 그 제의를 마다할 수가 없었다. 성경읽기와 찬송가는 둘째 문제고 교도관을 만나면 난방도 안 되는 감방을 잠깐이라도 벗어나 불을 쬘 수 있는 다른 특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교도관을 만나기 시작했다. 만날 때마다 교도관은 성경을 읽어줬고 찬송가도 가르쳐줬다. 신앙서적도 건네주며 읽고 나서 함께 얘기해 보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이렇게 12일째 되는 날이었다. 교도관은 평소와 다름없이 김 전도사에게 로마서를 읽어줬다. 성경본문이 로마서 10장 17절에 이르렀을 때였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는 구절을 들었을 때 머릿속이 하얗게 바뀌는 거 같았다. 마음에서는 뭔가 뜨거운 감동이 치밀고 올라왔다. 감격이 복받쳐 올라와 눈을 감았는데 지난 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기 시작했다.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추악한 죄들이었다. 낱낱이 죄를 자백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교도관이 찬송가 209장을 불러줬다.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늘 깨어서 기도하고 늘 기쁘게 살아가리.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자신이 지었던 모든 죄를 하나님께서 사해주셨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찬송이었다. 그 날 이후로 김 전도사는 성경을 읽었다. 감방안에서 시련의 세월을 보내는 그에게 말씀은 무척이나 달았다. 이 때 김 전도사는 38년간 해왔던 잘못된 생활을 청산하고 목회자가 되겠다고 하나님 앞에 약속한다. 이후로 그는 교도소 안에서 성가대 지휘로 봉사하며 변화된 삶을 살았다.
만기가 돼서 출소했을 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미사리 카페’, ‘나이트 클럽’, ‘중년들을 위한 콘서트’ 등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일에 나서면 어렵지 않게 돈을 긁어 모아 다시 한번 재기할 수 있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그런 것들은 김 전도사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감방에 들어오기 전에 벤츠, 캐딜락을 몰며 100평이 넘는 빌라에서 살 때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 많은 돈이 있었음에도 남을 위해서라면 단 돈 10원도 쓴 적이 없던 이기적인 자신이었다. 그러나 신학을 하며 적은 돈을 벌더라도 암환자를 돕고, 교회와 교도소를 방문해서 찬송가를 부르며 주님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에게는 더욱 가치있는 삶이었다.
김 전도사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비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만족이다”며 “성령님의 인도로 부족한 가운데도 자족하는 삶을 살며 다른 데로 눈을 돌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실제로 김 전도사는 출소 후 '학대받은 아동을 위한 사랑의 음악회' 등 각종 건전한 음악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단 한 사람의 학대받은 아동'를 위해서도 찬양하겠다는 마음이다. 김 전도사는 작년 연말에 결성한 연예인선교단 ‘사랑으로’를 통해 찬양사역을 활발하게 펼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