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실은 1950년 전북 군산에서 4남2녀중 차녀로 태어난다
군산대학교 교수였던 아버지와 유복한 가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가수 이연실은 군산여고를 졸업하고 홍익대 미대에 입학한다.
1970년 <가수 팔도대항전>이란 가요제 프로에서 전북대표로 출전하여 입선 홍대 미대에 재학중이던 이연실은 아르바이트로 소공동 조선호텔뒤 라이브 클럽인 <포시즌>에서 노래를 시작하게 된다. 이때 서울대 철학과 출신으로 배호의 "누가울어" "안녕" 박경희의 "저꽃속에 찬란한 빛이" 그리고 예비군가를 작사한 60년대 최고의 작사가 전우씨의 눈에 띄여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참고로 전우씨는 1978년 간경화로 42세란 짧은 생을 마감한다.)
1971년 9월 제5회 <MBC 팝콘서트>에서 자작곡 "조용한 여자"로 데뷔 리사이틀을 갖고 또한 딕훼밀리의 "또 만나요"를 만든 오세은과 조인트 콘서트를 열며 활발한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해 11월 데뷔앨범인 <새색시 시집가네>에서 "새색시 시집가네" "둘이서 걸어요" "비둘기집" "하얀눈길"을 발표한다.
1972년 7월 송창식,윤형주,김세환,어은경과 함께 국내 최초의 포크 컴필레이션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이 앨범에서 이연실은 "그이 지금 어디에"와 자신이 작사한 "찔레꽃"을 발표한다. 또한 홍익대 재학시절 음악과 인생을 알기위해 휴학까지 하고 대구로 내려가 다방 레지생활까지 하던 열정적이고 당찼던 이연실은 그해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위해 대학생활을 중단하고 홍익대를 자퇴하게 된다.
1973년 3월 3집앨범에서 "시악시 마음" "잃어버린 전설" "기다리는 아이" "별리" 발표 12월 이연실과 최헌의 스플릿 앨범에서 "이밤" "소낙비" "나의 길" 발표.
1975년 11월 이연실과 박인희의 스플릿 앨범에서 "한자 두자 일곱치" "먼 나라" 발표. 그해 12월11일 일명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동료가수인 정훈희 이수미 이현과 함께 자수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연실은 사안이 경미하다고 하여 훈방조치 된다.
1976년 5월 <고운노래 모음집>에서 "조용한 여자" "이제는"를 발표하며 재기 한다.
1981년 5월 이연실의 최대의 히트곡인 "목로주점"이 담긴 앨범을 발표한다.
1983년 2월 양병집의 "오늘 같은날"과 이태원의 "솔개"를 만든 작곡가 윤명환과 손을 잡고 10번째 앨범에서 "그이" "문을 닫고" "겨울"등을 발표한다.
1985년 5월 남편인 김영균과 함께 12번째 앨범에서 "잠실 야구장" "어떤 약속" 발표.
1989년 4월 그녀의 18년 음악인생을 결산하는 마지막 앨범인 13번째 앨범에서 "역" "찔레꽃" "비"등을 발표하고 "민들레"란 노래를 머리에 둔 14번째 앨범인 <새노래
모음집>등 결산과 출발을 의미하는 2장의 앨범을 4월에 동시에 발표하게
된다. (참고로 14번째 앨범에 수록된 "노란
민들레"는 [겨울공화국]의 민중서정시인이자 평민당 국회의원을
지낸 양성우씨의 서정시에 이연실이 곡을 만든 것으로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희생된 넋들을 기리는 일종의 진혼곡이다)
1993년 민주당 임채정의원의 후원회에 전유성,엄용수와 함께 참여한다.
1994년 한돌의 <내나라는 공사중>이란 3번째 독집음반 작업에 동참한다. 90년대 중반에 들어 이연실은 가수 활동을 그만 두면서 이후 이연실의 근황이 전혀 알려지지 않게 되었으며 더욱이 한때 건강마저 좋지 않다는 소문마저 떠돌던 터라 그의 오랜 펜들을 더욱더 궁금하게 그리고 안타갑게 하고 있다.
찔레꽃... 가을밤... 엄마엄마... (1972 이연실)
엄마 일 가는길엔 하얀 찔레꽃
| 이연실 (1950년 8월 6일 ~ )은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태어났으며 군산대학교 교수였던 아버지와 유복한 가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가수 이연실은 군산여고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미대에 입학하고 '새색시 시집가네'로 데뷔를 하였다. |
▲ 가수 이연실 (1950 ~ )
이연실의 음악은 당시로서는 생소하다면 생소하다고 할 수있는 여자 통키타 가수로서 박인희 등과 함께 당시의 통키타 음악을 이끌어가던 여자가수들의 선두 주자였다. 그녀의 음악은 서정적이면서도 호소력 넘치는 가창력과 그의 조용하고 차분한 이미지와 향토성 짙은 가사로서 많은 음악 팬들을 매료 시켰다.
'찔레꽃' 역시 어머니와의 추억을 노래하면서 향토색 짙은 추억을 노래하고 있으며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새색시 시집가네'는 더욱 향토적인 요소가 물씬피어나는 음악이기도 하다. 이연실은 우리와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고 있는 가수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이연실의 근황은 인터넷 어느 구석을 뒤져도 알수가 없어 궁금한 점이 많다.
(글: 박병익 기자@대한신보) 박병익 기자 '이연실' 추가정보기사: '찔레꽃'을 부른 이연실은...
소박한 '서민'의 꽃, 찔레 그리고 이연실의 노래들
찔레(Rosa multiflora)도 장미(Rosa)과에 속하는 관목이다. 장미(薔薇)는 그보다 훨씬 포괄적인 범위, 즉 장미과 장미속의 총칭이다. 비슷한 시기에 꽃이 피지만 찔레의 원산지가 동북아시아 지역인데 비해 야생의 장미는 주로 북반구의 온대와 한대 지방에 분포한다.
장미는 영국 왕가의 문장(紋章)으로도 쓰였는데 붉은 장미와 흰 장미 문장을 각각 쓴 왕가끼리의 왕위쟁탈전은 장미전쟁(薔薇戰爭: 1455∼14858)으로 불리었다. 장미는 그 화려함에다 향으로도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장미 '향수'와 장미 '목욕'은 클레오파트라뿐 아니라 네로도 즐겼다고 한다.
이렇듯 화려한 자태와 향기로 유명한 장미가 서구의 귀족 같은 꽃이라면 찔레는 그야말로 소박한 서민의 꽃이다. 개량되어 여염집 담장이나 건물의 울타리에 심어놓은 장미와 달리 찔레는 양지 바른 산기슭, 골짜기, 냇가 등지에 자생하는 꽃이다. 애당초 굳이 개량해 관상용으로 쓸 만한 꽃이 못되었던 것일까.
동시 <찔레꽃>은 <고향의 봄>을 쓴 이원수가 1930년에 잡지 <신소년>에 발표한 노래다. 찔레꽃은 ‘누나가 일가는 광산 길’에 하얗게 핀 꽃이다. 소년은 누나를 맞으러 ‘저무는 산길에 나왔다가’ 하얀 찔레꽃을 따먹는다. 글쎄, 찔레 순은 몰라도 찔레꽃을 따먹는 건 낯설다.
찔레꽃의 '슬픔과 눈물'
누나가 일가고, 돌 깨는 광산은 어디였을까. 장성한 처녀가 험한 광산에 일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 일제 강점기의 어둡고 우울한 풍경은 누나를 기다리며 찔레꽃을 따 먹는 허기진 남동생의 모습과 겹치면서 슬픔으로 물든다.
1920년대에 이태선이 쓰고 박태준이 곡을 붙인 동시 <가을밤>을 원곡으로 하고 이 <찔레꽃>의 노랫말을 고쳐 써서 만들어진 노래가 가수 이연실의 <찔레꽃>(1972)이다. 이 노래에는 누나 대신 엄마가 등장하는데 노래 중간에 미국 민요 <클레멘타인(Clementine)>을 번안한 양희은의 <엄마 엄마>도 들어간다.
광산에 일 간 누나 대신 이 노래에도 일 간 엄마가 있다. 그 엄마를 기다리며 아이는 엄마를 부르며 찔레꽃을 따먹으면서 허기를 달랜다.
엄마가 돌아오는 밤길, 저 멀리서 다가오는 엄마의 하얀 버선발, 밤마다 꾸는 엄마의 꿈……. 노래엔 엄마에 대한 아이의 그리움과 슬픔이 애틋하다.
<클레멘타인>도 만만찮은 애조를 띤 노래지만, 이 노래를 부른 이연실의 음색에도 가슴을 저미고 시나브로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구석이 있다.
70년대에 ‘새색시 시집가네’로 데뷔한 통기타 가수 이연실의 향토색이 짙은 노래에는 이처럼 독특한 울림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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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절대빈곤 시대의 기억'
그러고 보면 찔레꽃은 서민들의 고단한 삶과 가난을 증언하는 꽃이다. 찔레꽃은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던 시절의 어린이들 곁을 지켰던 꽃인 것이다. 아이들의 허기와 무료를 달랬던 찔레 순과 그 하얀 꽃은 절대빈곤의 시대에 대한 원초적 기억이다.
▲ 가수 이연실 (1950 ~ )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쓸쓸히 피어나지만, 찔레꽃은 아름답다. 순백의 하얀 잎도 맑고, 금빛의 노랑 꽃술도 밝다. 단지 장미처럼 사람들의 시야에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을 뿐, 그것은 이 늦봄, 여름의 어귀를 수놓으며 소박한 아름다움을 환기해 주는 것이다.
이연실의 <찔레꽃>을 들으며 어제와 그제 찍어온 사진을 뒤적인다. 그러고 보니 1950년생인 이연실은 이제 예순여섯이 되었다. 90년대 중반 이후 활동을 중단한 이후 그이의 근황은 알려진 게 없다고 한다. 1973년에 그녀가 발표한 노래 <소낙비>를 따라 부르며 거리를 헤매던 스무 살 시절을 문득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