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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정복한 자(진흙속의연꽃님 글)

작성자milkyway|작성시간26.06.07|조회수4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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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의연꽃
시간을 정복한 자


 담마다사 이병욱 ・ 2026. 5. 17. 11:48


시간을 정복한 자

 

 

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오후 쏟아지는 햇살은 폭포수 같다. 이런 것을 바랬다. 

 

차분한 일요일 아침이다. 일체 소음은 없다. 창문이 두껍기 때문일 것이다. 베란다 창문과 방 창문은 그 어떤 소음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것을 바랬다. 

 

이른 아침 왕방산을 향했다. 아침 산행이다. 산책이기도 하다. 삼십여분 걷는다.

 

매일 컨디션은 다르다. 어떤 날은 발걸음이 가볍다. 어떤 날은 무겁다. 어떤 날은 정신이 몽롱하다. 하루도 같은 때가 없다.

 

무엇이든지 처음 하기가 어렵다. 어렵게 발걸음을 떼서 올라간다. 내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명색이 오른다’라고 여긴다. 정신과 물질이 걸어 간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한걸음한걸음 올라가다 보면 몸이 풀린다. 

 




사람들이 인사한다. 산에서 인사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가벼운 목례로서 답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인사말 건네는 일은 없다.

 

혼자가 되었다. 그것도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다. 모든 모임은 끊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둔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페이스북 하나는 열어 놓았다.

 

세상과 격리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TV가 없어야 한다. 산중에 살아도 TV가 있으면 시장바닥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도심에 살아도 TV가 없으면 산중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요즘 유튜브를 보고 있다. 유튜브 보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면서도 보는 것이다. 이제 두 주 되어 간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하며 살 수 없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알아야 한다. 극단적으로 은둔한다면 독방과 같은 곳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유튜브는 필요악이다. TV못지 않게 정신을 혼란하게 하는 것이지만 선택권이 있다. 이는 선택권이 없는 TV와 대조적이다. 

 

유튜브에서 찰리 멍거의 영상을 보았다. 주식투자자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워렌 버핏과 함께 투자한 사람이다. 주로 주식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인생의 지혜에 대한 이야기로도 가득하다.

 

찰리 멍거는 99살에 죽었다. 오랜 세월 살면서 삶의 지혜가 녹아 난 영상을 보았다. 음성으로만 들은 것이다. AI가 우리말로 전해주는 것이다.

 

노인들의 말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먼저 살다 간 사람은 삶의 지혜가 있다. 먼저 겪어 보았기에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노인은 지혜가 있다. 특히 농경시대 때 노인의 말은 진리의 말씀이나 다름없었다. 언제 파종해야 할지 언제 어떤 작물을 수확해야 할지 아는 것이다. 

 

주식투자를 하고 있다. 주식을 손절한지 이십년만에 재개한 것이다.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고 난 다음부터 시작했다. 아직까지 팔지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찰리 멍거의 말과 일치한다.

 

찰리 멍거는 명언을 남겼다. 주식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노인의 지혜로 가득하다. 그 가운데 하나 남는 말은 시간에 대한 것이다. 돈은 대체 가능한 것이지만 시간은 대체불가능하다는 말이 강렬했다.

 

나이를 들수록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앞으로 살날이 줄어드는 것이다. 마치 시간의 총량이 줄어드는 것 같다. 이런 때, 특히 나이 칠십 이상이 되면 남아 있는 시간을 잘 활용하라는 것이다.

 

시간은 대체불가능이라는 말에 공감했다. 돈은 언제든지 벌 수 있는 것이지만 한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불러 내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더구나 노인이 되어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시간은 금 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찰리 멍거는 말한다. 나이가 칠십이상이 되면 돈 버는데 시간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나이가 칠십 이상 되면 남아 있는 시간을 관리하라고 말한다. 돈은 언제든지 벌 수 있어서 대체 가능한 것이지만, 시간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대체불가품이라고 했다.

 

아침 산책을 하고 있다. 산행을 하다 보면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잡아야 한다. 지나가면 끝이다.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다. 메모앱에 기록해 둔다.

 

시간과 관련하여 경전적 지식이 떠 올랐다. 그것은 감각적 욕망을 위해서 시간을 쫓지 않는다는 말이다.

 

젊은 나이에 출가한 수행승이 있다. 수행승 앞에 한 천신이 나타났다. 천신은 젊은 나이에 출가한 수행승이 측은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수행승이여, 향락 없이 걸식하니. 그대는 향락을 누리고 걸식하지 않는다. 수행승이여, 시절이 지나치지 않도록 그대는 향락을 누리고 걸식하시오.”(S1.20)라고 말했다.

 

수행승은 왜 젊어서 출가했을까? 남들처럼 왜 청춘을 누리지 않았을까? 천신의 질문에 수행승은 "그대가 말하는 시절을 나는 모른다. 그 시간은 감춰져 있고 볼 수도 없으니, 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나는 향락을 여의고 걸식하며 지낸다.”(S1.20)라고 말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젊음을 즐기는 것이라고 여긴다. TV광고에서도 젊음과 즐기는 것은 동의어나 다름 없다. 감각을 즐기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럼에도 청년은 출가했다. 

 

천신은 젊은 수행승을 계속 유혹한다. 천신은 “수행승이여, 그대는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 수행승이여,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쫓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S1.20)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수행은 나이 들어서 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그 대신 젊었을 때는 마음껏 감각적 욕망의 쾌락을 즐기라는 것이다. 천신도 이렇게 말했다. 이는 다름 아닌 바라문인생사주기에 기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 주류 종교는 브라만교였다. 그런데 브라만교에 인생사주기가 있다는 것이다. 학습기, 가주기, 임서기, 유행기를 말한다.

 

바라문인생사주기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해당되는 학습기 때는 공부하는 것이다. 이를 범행기라고 한다. 빠알리어로는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라고 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청정한 삶’으로 번역했다.

 

학습기가 지나면 가주기가 된다. 남자가 결혼을 해서 가업을 잇는 기간을 말한다. 가주기가 지나면 숲으로 들어간다. 자식이 결혼해서 손자를 낳으면 자신의 역할은 다 끝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행기가 된다. 숲에서 나와 떠돌아다니다 인생을 마치는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유행기의 바라문을 볼 수 있다. 젊은 수행승을 보고서 천신이 말한 것과 똑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바라문인생사주기가 가장 이상적인 삶인 것을 말한다. 공부가 다 되었으면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학습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과 같은 출가수행승을 보았을 때 바라문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불교에서 출가는 학습기의 연장이나 다름 없다. 학습기에서 가주기로 넘어가지 않고 평생 학습기로 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출가수행승의 삶을 ‘청정한 삶’, 브라흐마짜리야라고 한다.

 

청정한 삶을 사는 자는 유혹의 대상이 된다. 자꾸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다. 초기경전 니까야를 보면 기녀도 무너뜨리려 한다. 테라가타에서도 발견된다. 

 

기녀는 젊은 수행승을 유혹했다. 기녀는 “젊어서 그대는 출가했다. 나의 가르침을 따르시오.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시오. 내가 재산을 주겠소. 정말 그대에게 약속하겠소. 아니면, 내가 불을 가져오겠소.” (Thag.461)라고 말한 것이다.

 

기녀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기녀는 불의 맹세를 했다. 더구나 “우리가 늙어서 둘이서 지팡이에 의지하게 될 때, 둘이서 함께 출가하면, 두 곳에서 행운의 주사위가 던져지는 것입니다.” (Thag.462)라고 말한 것이다. 수행은 늙어서 해도 된다는 것이다. 지금 젊을 때는 청춘의 젊음을 마음껏 즐길 때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녀의 유혹에 넘어가면 끝이다. 기녀의 목적은 청정한 수행자를 무너뜨리려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사실을 간파한 수행승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천신은 젊은 수행승을 유혹한다. 늙은 바라문도 젊은 수행승을 유혹한다. 기녀도 유혹한다. 수행은 나중에 노년에 해도 된다는 것이다. 젊었을 때는 청춘의 젊을 마음껏 즐기라는 것이다. 이는 학습기가 끝나면 가주기의 삶을 살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젊은 수행승은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젊은 수행승은 이렇게 말한다.

 

 

“벗이여,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벗이여, 우리는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벗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큰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S1.20)

 

 

초기경전 니까야에서 이런 가르침을 접하면 충만된다. 젊어서 출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특히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왜 젊어서 출가할까? 초기경전 니까야를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천신처럼 수명이 보장된 것이 아니다. 내일 죽을 수 있다. 그래서일까 자타카에서는 “오늘이야말로 나는 출가하겠다. 내일 죽을지 누가 알겠는가? 나는 까마귀처럼 어리석게 애욕의 손아귀에 놓이지 않으리.”(Jat.529)라는 게송이 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겸손해진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자만에 가득 찬 자도 죽음이 찾아왔을 때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자만에 가득 찬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세 가지 자만이 있다. 건강의 자만, 젊음의 자만, 삶의 자만을 말한다. 

 

건강을 잃기 전에는 건강의 자만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건강은 질병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이럴 때 건강의 자만은 무너진다. 노년이 되기 전에는 젊음의 자만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장기가 하나 둘 망가져 가며 병이 들었을 때 젊음은 늙음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이럴 때 젊음의 자만은 무너진다. 언제나 천년만년 살 것 같다. 그러나 죽음의 침상에 누웠을 때 삶은 죽음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이럴 때 삶의 자만은 무너진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면 지혜가 생겨난다. 마치 노인의 지혜 같은 것이다. 이미 수천년 전에 살았던 삶의 지혜가 녹아 있는 것이다. 그것도 진리의 말씀이다. 이런 지혜를 젊었을 때 안다면 인생의 시행착오를 겪지 않을 것이다. 젊은 수행승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큰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S1.20)라고 말한 것이다.

 

통찰이 일어날 때가 있다. 오늘 아침 산행에서도 그랬다. 찰리 멍거의 영상을 보고 생각난 것이다. 그것은 시간에 대한 것이다. 시간은 대체불가능한 것이라는 말이 크게 다가왔다. 

 

돈은 언제든지 벌 수 있다. 그래서 돈은 대체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한번 지나가면 끝이기 때문에 시간은 대체불가능하다. 이런 말이 떠 올랐을 때 ‘사밋디의 경’에서 "벗이여, 나는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S1.20)라는 말이 강하게 다가왔다.

 

젊은 수행승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매우 난해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구를 보면 이해가 간다. 이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감각을 즐기면 시간이 잘 간다. 이는 명상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5분이라도 눈을 감고 앉아 있다 보면 5분이 매우 긴 시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눈, 귀, 몸으로 감각을 즐기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감각을 즐기면 시간을 잡아 먹는다.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춤추면 새벽이 밝아 올 것이다. 참으로 허무한 것이다. 아침에 술집을 나섰을 때 찬란한 해를 바라보기 미안할 것이다. 

 

사람들은 젊어서 즐기기 바쁘다. 눈과 귀 등 감각기관은 사용하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래서 감각을 즐기는데 잘못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눈은 보라고 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고 귀는 들으라고 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감각을 즐기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는 시간을 잡아먹는 것이 된다. 젊었을 때 감각을 즐기면 앞으로 시간이 많이 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노년이 되어서도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면 어떻게 될까? 귀중한 시간을 잡아먹는 것이 된다.

 

시간은 대체불가능한 것이다. 돈은 언제든지 벌 수 있는 것이지만 한번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이런 귀중한 시간을 감각을 즐기는데 사용한다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 출가수행승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S1.20)라고 말했다. 이는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다.”(S1.20)라고 한 것이다. 이를 돈과 관련지어 말한다면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돈에 대한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 행복에는 행복총량이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고통에는 고통총량이 있을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행복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범부들은 감각적 즐거움을 행복으로 보기 때문에 행복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감각적을 추구하면 할수록 행복의 총량은 줄어 들 것이다. 고통은 어떠할까? 고통의 총량이 있다면 고통에 시달리는 자는 언젠가 고통이 사라질 것이다. 시간은 어떠할까?

 

시간의 총량이 있다. 사람의 수명을 말한다. 사람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지만 임종에 이르면 시간의 총량이 다하는 것이다. 이런 시간은 귀중한 것이다. 마치 금보다 더 귀한 자산이라 볼 수 있다.

 

언젠가 TV에서 영화를 보았다. 시간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손목에 남은 시간이 표시되어 있다. 시간이 많은 사람이 부자이고 시간이 많은 사람이 권력자인 것이다. 시간이 적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요즘 AI시대이다. 검색창에 ‘영화 시간 손목’이렇게 세 가지 키워드를 집어넣으니 바로 알게 되었다. 그때 본 것은 ‘인타임(In Time)’이다. 개요에 따르면 “손목에 남은 시간을 화폐처럼 사용하며 살아가는 SF 스릴러 영화는 '인 타임(In Time)'입니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영화 인타임은 어떤 것인가? AI개요에 따르면, “이 작품은 모든 인간이 25세가 되면 성장을 멈추고, 왼팔에 새겨진 '카운트 바디 시계'에 1년의 유예 시간을 기본으로 제공받는 설정에서 출발합니다. 이 시간 자체가 돈이 되어 커피 한 잔은 4분, 버스 요금은 2시간 등으로 계산되며, 남은 시간이 0이 되면 즉시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됩니다. 시간을 훔치거나 벌어서 영생을 누리려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나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인간은 수명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시간을 헛되이 보낸다. 특히 감각을 즐기는데 보낸다. 분명한 사실은 감각을 즐기면 시간을 갉아먹는 다는 것이다. 그것도 허무하게 사라진다. 마치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춤춘 자가 아침에 술집 문을 열었을 때 찬란한 햇빛에 부끄러워하는 것과 같다.

 

젊었을 때는 젊음을 즐긴다. 그러나 젊음은 질병에 종속되고 만다. 그런데 젊은 사람은 이 젊음이, 이 건강이 천년만년 갈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껏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산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아는 수행승은 젊은 날에 출가한다. 왜 그럴까?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타카에 실려 있는 “오늘이야말로 나는 출가하겠다. 내일 죽을지 누가 알겠는가? 나는 까마귀처럼 어리석게 애욕의 손아귀에 놓이지 않으리.”(Jat.529)라는 게송은 매우 타당하다. 이것은 어쩌면 젊어서 출가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함부로 살 수 없다. 시간을 갉아먹는 감각적 즐거움으로 살 수 없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서 돈벌기 선수로도 살 수 없다. 대체불가능한 시간을 갉아먹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다.

 

시간과의 싸움이다. 남아 있는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할까? 내일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된다면 감각을 즐길 여유가 없다. 돈 버는 일에 올인하는 삶을 살 수 없다. 부처님 가르침이 정답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잘 말해준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이 없도록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대군을 거느린 죽음의 신 

그에게 결코 굴복하지 말라.”(M131)

 

 

맛지마니까야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이 게송은 여러 개의 경에서 수 없이 나온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게송에서는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라고 말했다. 이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면 감각을 즐길 수 없을 것이다. 돈 버는 일에 올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게송의 가르침에 답이 있다. 그것은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paccuppannañca yo dhammaṃ, tattha tattha vipassati)”(M131)라는 말이다.

 

부처님은 현재의 법을 잘 관찰하라고 했다. 이는 “땃따 땃따 비빳사띠 (tattha tattha vipassati)”라는 말로 나타난다. 주석에서는 “각각의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바로 일어나는 곳에서 통찰을 통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관찰해야 한다.”(Pps.V.1)라고 설명되어 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나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인지 알 수 없다. 내일 죽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나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만약에 지금 이 순간 죽음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 산행에서 5분명상을 했다. 삼십여분 산행에서 벤치에 앉아 타이머를 켜 놓은 것이다. 타이머에서 소리가 나면 죽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수행은 절박하게 해야 한다. 시간이 무한정 남았다고 여기면 게으르기 쉽다. 5분후에 임종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명상해 보았다. 그러나 실패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것으로 본 것이다.

 

하루를 일생처럼 살아야 한다. 오늘 밤 죽을 것으로 살아야 한다. 이런 마음 가짐으로 산다면 눈과 귀 등으로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 수 없다. 감각을 즐기다 보면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 수행승은 “벗이여, 나는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na khvāhaṃ, āvuso, sandiṭṭhikaṃ hitvā kālikaṃ anudhāvāmi.)”(S1.20)라고 말했다. 이런 가르침은 돈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벗이여, 나는 돈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시간 부자가 되었다. 포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감이 있으면 일을 하는 것이다. 일을 함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에 도움이 되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삶을 사는 것이다. 

 

시간부자는 오래 되었다. 사십대 중반에 더 이상 직장을 잡을 수 없을 때 시간부자가 되었다. 남은 것은 시간밖에 없었기 때문에 글을 썼다. 2006년 이후 20년동안 매일 글을 썼다. 그 결과 글은 엄청나게 축적되었다. 쓴 글은 책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2018년부터 만든 책은 현재 184권이 되었다. 모두 시간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돈이 많지 않다. 돈을 벌기 위해서 시간을 저당 잡히지 않는다. 돈은 언제든지 벌 수 있지만 시간은 한번 지나가면 끝이기 때문에 돈벌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면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5분 후에 최후의 순간을 맞이할 것으로 생각하여 5분명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절박한 심정은 아니다. 아직도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이 있는 것이다. 

 

나는 시간부자이다. 직장을 그만 둔 이후 시간이 무한정 남아 돌아 시간부자로 산 것이다. 그 결과 수많은 글을 쓰게 되었다. 만약에 내가 그 기간동안 돈 버는 일에 올인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20년 동안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감각을 추구하는 삶만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만 낭비한 것이 된다. 그러나 글은 남았다. 매일 오전이 녹아 들어가 있는 글은 남아 귀중한 자산이 된 것이다.

 

시간부자로 그쳐서는 안된다. 언젠가 시간이 멈추게 될 것이다. 시간승리자가가 되어야 한다. 시간을 정복해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땃따 땃따 비빳사띠 (tattha tattha vipassati)”라는 말이다. 현재 일어난 법을 그때 그때 잘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새김(sati)과 올바른 알아차림(sampajana)으로 실현된다. 이렇게 새기고 올바로 알아차렸을 때 모든 법은 무상, 고, 무아가 된다. 그리고 진리가 이끌어 열반에 들면 시간을 정복한 것이 된다. 

 

나는 시간을 정복할 수 있을까? 찰리 멍거의 유튜브 영상을 보고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오늘을 일생처럼 살아야 한다. 아니 지금 이 순간을 통찰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무상, 고, 무아로 통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시간승리자, 시간을 정복한 자가 될 것이라고 한다.

 

 

2026-05-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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