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의 말씀
| 우리는 ··· 하느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로마 5:10. 아담과 하와는 아버지이신 여호와와 누리던 소중한 관계를 잃었습니다. 죄를 짓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가족이었습니다. (누가 3:38) 하지만 그들은 여호와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분의 가족으로 남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들이 자녀를 갖기 전이었습니다. (창세 3:23, 24; 4:1) 따라서 그들의 후손인 우리는 여호와와 화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5:10, 11) 다시 말해, 그분과 좋은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한 참조 자료에 의하면 “화해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적이었다가 친구가 되다”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화해가 가능하도록 여호와께서 먼저 손을 내미셨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여호와께서는 죄 많은 인류와 좋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속죄 마련을 하셨습니다. 이 마련에는 어떤 것을 동일한 가치를 지닌 다른 것으로 교환하는 것이 관련됩니다. 이렇게 하여 잃은 것을 되찾거나 손상된 것을 대체할 수 있습니다. 「파25.02」 3-4면 7-8항 |
예수의 부활과 재림은 증강현실이다(그림: JW.ORG).
| For if, when we were enemies, we were reconciled to God by the death of his Son, much more, being reconciled, we shall be saved by his life. 우리가 적이었을 때에 하느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지금 아들의 생명에 의해 구원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로마 5:10. 반스의 성경 노트 만약 - 이 구절의 생각은 단순히 로마서 5:9의 반복과 확장에 불과하다. 사도는 그 생각을 곱씹으며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입장을 강력히 확인한다. 우리가 적이었을 때 - 그 일은 우리가 적일 때 수행되었다. 그 일로 인해 우리는 적에서 친구로 변했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그 기초는 우리가 아직 적대적일 때 놓였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수행하려는 단호한 목적을 보여주셨으며;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것을 완성하겠다는 서약을 하셨다. 우리는 화해했습니다 - 주목하세요, 마태복음 5:24. 우리는 합의에 이르렀습니다; 우정과 연합의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그의 친구가 되었고, 반대를 내려놓으며, 그를 우리의 친구이자 지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계획의 위대한 계획입니다; 고린도전서 5:1-20; 골로새서 1:21; 에베소서 2:16. 이는 양쪽 모두 화해에 장애물이 존재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 장애물이 제거되었고; 이로써 연합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율법의 존중을 지키며; 죄를 증오하심을 보여주며; 그의 정의를 지키고 진리를 지키는 동시에 용서하라; 로마서 3:26에 주목하라. 그리고 인간이 화해되기를 거부하는 마음을 제거함으로써; 마음을 굴복시키고 변화시키며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과 율법에 대한 증오를 극복하여; 하나님의 군사에 순종하게 하여.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하나님과 화해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친구이며; 자신의 율법과 성품, 구원의 계획에 만족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 대신 주님 예수님을 제물로 바치신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훨씬 더 많은 - 기대할 만한 것이었다; 더 강하고 인상적인 고려사항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의 삶으로 - 우리는 그의 죽음으로 화해했습니다. 죽음에는 그의 낮고 겸손하며 고통스러운 상태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매우 약해 보인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계획이 패배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적들은 십자가와 무덤 안에서 그를 승리시키고 기뻐했다. 그러나 이 연약하고 비열하며 굴욕적인 상태의 결과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상태에서, 겸손하고, 멸멸받으며, 죽어가고, 죽어가면서도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위대한 일을 이루는 능력을 가졌다면, 그분이 살아 계시고 고귀하며 승리한 구세주이신 지금 우리를 지켜주실 수 있기를 얼마나 더 기대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분의 죽음의 기절 능력이 우리를 화해시킬 수 있었다면, 고귀한 구세주로서의 온전하고 강력한 능력이 우리를 지키고 구원하기에 얼마나 충분할까. 이 주장은 구세주 자신이 말한 내용을 확장한 것일 뿐이다; 요한복음 14장 19절, "내가 살아 있으니 너희도 살리리라." |
| 가상현실(Virtual Reality)과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종교의 영역은 수학적 허수의 영역이다. 그런데 이 영역은 순 허수와 실수부·허수부가 같이 존재하기도 하는 영역이 있다. 이 둘을 통털어 복소수(Complex Number)의 영역이라 부른다. 종교의 교리가 완전한 상상의 세계를 언급하는 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현실의 영역에 일부만 가상 세계를 덧 붙여 사용하기도 한다. 즉 배경은 현실이면서 특정 대상들만 인공을 쓰거나 페이크 처리를 하는 것이다. 이 방법에 사람들은 가상을 현실로 많이 착각하게 된다. 완전한 가상이면 현실과 쉽게 구별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기에 따라 우리의 삶을 결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현실에 일부만 가상을 덧붙여 놓으면 가상과 현실을 구별하기 힘들다.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서 나뭇군과 같이 산다거나 바다에 용궁이 있어 토끼 간을 구하러 용궁에 간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쉽게 현실과 구별된다. 그런데 예수가 인간을 위해서 대신 죽고 부활하여 하늘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실제로 믿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실제 상황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에 그가 하늘로 돌아갔다는 가상적 스토리 마저 진짜 현실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의 승천에 관한 복음서의 내용은 가상을 덧붙여 놓은 것, 쉽게 말하면 '증강현실'인 것이다.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므로 죽을 수는 있으나 실제로 되살아 나거나 하늘로 승천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분명히 현실을 증강시킨 것에 불과하다. 예수가 실제로 하늘에 올라가 우리의 생명을 마법의 힘으로 부여할 수 있거나 하늘 왕국의 왕으로 임명되어 우리를 사실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가상이 실제는 아니지만 실제처럼 받아들여 예수와 같은 정신을 이어받는 삶이 된다면, 분명히 우리의 미래는 정의롭고 공평하며 건강을 누리며 오래 살 수 있는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이 실제라면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다면 당연히 그 앎에 따라 행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믿음보다 앎이 위층에 존재하기 때문에 믿음보다 앎, 즉 정확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더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의 덧붙여진 증강 현실을 구별하여 그것의 본질적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 '믿음'과 '앎'을 구별시켜 우리의 행동을 더욱 분명하게 취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다. 예수가 실제로 부활하였다거나 그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증강된 현실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면서 그것을 허구로 돌릴 것이 아니라, 본질적 의미를 실천하는 것이 훨씬 훌륭한 것이며, 우리가 능동적으로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
질문
1.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의 실제 예를 생각해보자.
2. 예수의 부활과 재림을 실제와 가상으로 구별하는 것이 왜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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