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교계 잡지,주보][우리 성인] 정문호 바르톨로메오(鄭文浩, 1801~1866)

작성자아우구스티노|작성시간26.06.19|조회수5 목록 댓글 0

[우리 성인] 정문호 바르톨로메오(鄭文浩, 1801~1866)

 

 

축일 : 9월 20일

관련 성지 및 사적지 : 지석리성지, 전주감영, 숲정이성지, 천호성지

 

“하느님을 배반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결심하였소.”

 

정문호 바르톨로메오는 충청도 임천(현 충남 부여군 충화면)에서 양반집 자제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한 고을의 원(員)까지 지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를 믿게 된 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생활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는 박해가 일어나자 고향을 떠나 여러 지방을 유랑하며 살다가 손선지(孫善智, 베드로)가 살고 있던 전라도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에 정착하여 신앙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정문호는 평소 행동이 바르고 학식이 높아 동료 교우들에게 교회의 예법이나 교리를 자세하게 잘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정문호는 전주 지역까지 박해가 진행될 것을 예감하고 오사현을 보내어 박해에 대한 전주감영의 정세를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오사현은 비신자인 데다가 고을의 관직에 있었으므로 전주감영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고, 또 자원하여 신자들을 도와 성심껏 협조도 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떠난 지 이틀이 지나도록 아무런 전갈이 없자 정문호는 안심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상하게 생각하던 차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12월 5일 한재권(韓在權, 요셉), 손선지와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정문호는 다음날 전주감영으로 끌려가 감영 앞 구류간에 갇혔고, 3일 후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어 몸이 쇠약한 데다, 험한 고초를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 고문을 당할 때는 배교의 유혹에 흔들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함께 문초를 받던 조화서(趙華瑞, 베드로)로부터 격려를 받고 순교하기로 결심을 굳혔습니다. 결국 그는 12월 13일 조화서, 손선지, 한재권, 이명서(李明書, 베드로), 정원지(鄭元智, 베드로)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장대(將臺)에 있는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아 6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우리 성인 정문호 바르톨로메오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교회와 역사, 2026년 6월호]

 

 

[병오박해 180주년, 병인박해 160주년 기억(記憶)의 해, 호명(呼名)의 해] 다시 부르는 노래, 병인박해(丙寅迫害)

 

 

병인박해(丙寅迫害)는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 집권기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면서 전개된 박해로,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19세기 중엽 조선은 서양 세력의 동아시아 진출과 통상 요구 속에서 강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으며, 조정은 전통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강경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학으로 불리던 천주교는 서양 세력과 연결된 사상으로 인식되어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1866년 초 조선 조정은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고 처형되었다. 특히 조선 교회를 이끌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사제도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이 가운데 베르뇌(Berneux, 張) 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 주교, 오매트르(Aumaitre, 吳) 신부, 위앵(Huin, 閔) 신부 등 9명의 선교사들이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평신도 가운데서는 장주기(張周基, 요셉)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신앙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순교는 여러 형장에서 이루어졌다. 서울 한강변의 형장이었던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 볼리외(Beaulieu, 徐) 신부, 도리(Dorie, 金) 신부가 처형되었으며, 조선 시대 대표적인 처형장인 서소문에서도 남종삼(南鍾三, 요한) · 홍봉주(洪鳳周, 토마스)와 더불어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또한 한강변에 위치한 절두산 순교성지 일대 역시 병인박해 시기에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된 장소로 전해진다.

 

병인박해는 조선 천주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신자들의 순교는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중요한 신앙 유산으로 전승되었다. 한편 프랑스 선교사들의 처형 소식은 해외에 알려져 같은 해 프랑스 군대가 조선에 침입한 병인양요(丙寅洋擾)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병인박해는 종교 탄압 사건을 넘어 19세기 조선의 정치 · 사회 · 외교적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교회와 역사, 2026년 6월호]

 

 

[우리 성인] 전주 숲정이 순교 성인 (1)

 

 

1866년 병인박해 순교 성인의 마지막 그룹은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했습니다. 부자(父子) 관계인 조화서(베드로)와 조윤호(요셉), 이명서(베드로),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손선지(베드로), 한재권(요셉) 그리고 정원지(베드로)는 병인년 연말에 체포(1866년 12월 5일)되어, 같은 시기 문초와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조윤호를 제외하고는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로 순교했습니다. 순교일은 1866년 12월 13일이었습니다.

 

전주의 7위 성인에 대한 순교 배경을 간략히 짚어 보겠습니다. 병인년 12월 5일, 포졸들은 두 교우촌, 곧 대성동과 성지동으로 나누어 천주교를 믿는 이들을 체포했습니다. 조씨 부자(父子)와 이명서는 대성동 근처 신리골에서, 나머지 넷은 성지동에서 붙잡혀 구진포리의 주막으로 끌려왔고, 전주로 압송되었습니다. 이 일곱 순교자의 중심에는 조화서가 있었는데, 다른 이들이 고문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흔들릴 때 조화서의 굳은 신앙은 이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는 대역죄인을 제외하고는 가족을 같은 날 사형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조화서를 포함한 여섯 명이 사형장으로 끌려갈 때 아들 조윤호는 “아버님이 오늘 영복소(永福所)에 가시는군요. 거기 가시거든 저를 잊지 마세요.” 하면서 전주에 남았습니다. 그러면서 “왜 저는 데려다가 죽이지 않습니까?”하고 영장에게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영장은 젊은 조윤호의 목숨을 살려주고 싶어 천주교를 믿지 않는다는 동의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고문과 음식 등으로 회유하려고 했으나, 조윤호의 굳은 마음을 꺾을 수 없었고, 결국 마지막에 조윤호는 매질과 교수의 형태로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조윤호는 조 안드레아(조부, 기해박해 순교자), 조화서에 이어 3대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들 전주의 7위 순교 성인은 마치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의 마지막 그룹이 서울 당고개 성인과 복자이듯이 병인박해의 당해년 마지막 순교자 그룹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번 『교회와 역사』 6월호에서는 전주 숲정이의 순교자 6위 가운데 정문호, 조화서, 손선지 이렇게 3위 성인을 먼저 기억해 봅니다.

 

정문호는 체포될 때 나이가 66세였습니다. 그는 대성동 근처 신리골 교우촌에 있었는데, 천주교에 입교하기 전에는 고을 원(員)까지 지낸 바 있습니다. 전주에 도착하여 지하 감옥같은 곳에 갇혀 문초가 시작되면서, 정문호는 목숨을 건지고 싶어 하며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참나무같이 단단한 사람’이었던 조화서가 동료들을 격려하자 순교의 의지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영장에게 “저는 천주를 배반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정문호는 벼슬을 지낸 바 있으므로 순교하러 가는 길을 과거(科擧)에 비유하여 조화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천국에 과거 보러 가는 걸세. 기쁜 날이 아닌가?”

 

최양업 신부의 복사와 마부로 알려진 조화서는 성지동 교우촌에서 자리를 잡고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성지동까지 천주교인들을 체포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으로 평온하게 지내고 있었지만, 포졸들이 교우촌을 습격하면서 조화서가 먼저 체포되었고, 아들도 따라서 전주로 끌려갔습니다. 조화서는 그곳에서도 천주교의 모든 규율을 지키며 기도생활을 해 나갔습니다. 그는 사형장에서도 십자성호를 그으며 “우리는 죽을 때에도 천주교 규칙을 지킨다.”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사형장에 가기 전에 아들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겼습니다. “용기를 잃지 말고 이내 나를 따라오너라.”

 

훌륭한 천주교인의 모범으로 알려진 손선지 회장은 16세의 나이에 샤스탕(Chastan) 신부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되어 47세에 순교하기까지 이 직책을 수행했습니다. 충청도 임천에 살다가 대성동 근처 신리골로 이사했고,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했습니다. 추수 무렵 천주교인들에 대한 수색이 심해진다는 소문에 손선지 회장은 이렇게 묵상했습니다. “곡식을 키로 까불어서 검불과 분리시키는 것처럼 천주께서도 박해 때에 그렇게 하시는데… 나같은 사람을 천주께서 당신 곳간에 받아 주실까?” 그는 바로 그해 겨울 12월 5일 밤에 체포되었는데, 배교의 말 한마디만 하면 풀어준다는 회유를 거부하자, 그에게 심한 고문을 하여 팔뼈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때부터 손선지 회장은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먹고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형장으로 가기 전, 옥에 남아 있던 교우에게 저고리를 벗어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죽으러 가니 이 옷은 소용이 없네. 받아서 입게.” 그는 희광이가 한 번에 머리를 베지 않고 어깨를 치자, “장난하지 마라.” 하며 두 번째 칼날에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증언자들을 통해 손선지 회장이 사형장에서 “예수, 마리아” 하고 기도하며 순교했다고 전해 오고 있습니다.

 

[교회와 역사, 2026년 6월호]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