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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관련 글]교회안에서 작은 마리아가 되고 싶습니다.

작성자아우구스티노|작성시간08.05.07|조회수147 목록 댓글 0

 교회안에서 작은 마리아가 되고 싶습니다.

 

 

나의 주교 문장을 보면 십자가 밑에 소문자 ‘m’이 쓰여 있다. 새로운 하느님의 뜻인 주교 직무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교회 안에서 작은 마리아가 되고 싶은 나의 간절한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세례성사와 신학교 입학

 

나는 고등학교 1학년 성탄 때 우리 집안에서 처음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성 김대건 신부님을 주보로 모신 가톨릭계 학교에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되어 가톨릭교회를 접하게 되었고, 학교의 교리반에 나가서 교리를 배워 세례성사를 받았다. 학교에서 가톨릭 학생회 활동을 하였고,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되어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열정적으로 노력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가톨릭 신자 선생님들과 본당에서 교리를 가르쳐 주시던 수녀님들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길을 가도록 만들었다. 가톨릭 신자가 되면서 학교생활은 물론이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기쁘게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내 삶의 중심을 당신 쪽으로 이끌어 주셨음을 느꼈다.

 

신학교에 입학하려 했을 때, 집안 식구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래서 가족들에게는 다른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말하고 서울 신학교에 가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가족 중에 가톨릭 신자가 없고, 세례 받은 지 겨우 2년이 되는 철부지였지만 신학교에서는 나를 받아 주었다. 생각할수록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하느님의 특별한 보살핌과 섭리의 결과였다.

 

포콜라레 운동의 만남과 삶의 변화

 

그러나 지상 천국을 기대하며 들어간 신학교에서, 나는 날이 갈수록 불편함과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가톨릭 집안이 아니면서, 사제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들어간 준비되지 않은 학생으로서 당연히 겪는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포콜라레 운동을 만났다. 이 운동에 참여한 신학생들과 모여서 복음 말씀을 한 구절씩 택하고, 신학교 안에서 그 말씀대로 구체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내 안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는 신학교와 신학생들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심했는데, 신학생들이 착하고 훌륭하게 보였고 신학교 분위기도 집처럼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신학교와 신학생들에게 변화가 있을 리 없었다. 말씀을 살려고 노력하는 내 마음과 눈이 변하면서 신학생들과 신학교의 삶이 기쁘고 감사한 모습으로 변한 것이었다.

 

특별히 ‘마리아 사업회’라고 부르는 포콜라레 운동은 항상 마리아의 모습으로 살아야 함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낳아 주셨듯이, 마리아를 닮은 사랑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이웃에게 마리아를 낳아 주는 삶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가르쳐 주었고, 내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또한 포콜라레의 마리아뽈리(마리아의 도시) 참석은 나에게 새로운 신앙 체험이었다. 교회 안의 하느님 백성이 모두 모여,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유일한 법으로 정하고 함께 생활하는 것이었다. 마리아께서 늘 사랑을 사셨듯이 마리아뽈리 시민 모두가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도 새로운 신앙생활에 대한 신선함을 가져다주는 단비와 같았다.

 

신학교에서 3년을 보낸 나는 남북이 갈라져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최전방에서 군 복무를 하였다. 어려운 군 생활 중에도 특별히 말씀을 살려고 노력하면서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는 아름다운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남과 북의 ‘같은 형제들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서로 총을 겨누며 대치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리고 보초를 설 때는 물론이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평화의 모후이시며 일치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묵주기도를 바쳤다.

 

마리아적인 사제로 이끈 포콜라레 사제 학교

 

군에서 제대하여 신학교 복학을 준비하던 중, 로마의 포콜라레 운동의 교구 사제와 신학생들을 위한 사제 학교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교황님이 계신 가톨릭교회의 중심인 로마에서 공부하게 되었다는 감동과 기쁨에 밤잠을 설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교황님이 계시고, 키아라가 계신 교회의 심장에서 살면서 공부하는 은총이 주어진 것이었다.

 

사제 학교는 세계 40여 개국에서 모인 100여 명의 사제와 신학생들이 ‘성경을 유일한 교과서’로 삼고, 말씀을 사는 것을 규칙으로 하여 함께 사는 것을 체험하는 곳이었다. 1년 동안의 사제 학교 체험이 끝난 후 그곳에서 살면서 나는 라테라노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루셨던 공동체를 체험하면서 하느님에 대하여 공부하는, 이론과 실제가 만나는 은총으로 충만한 삶의 연속이었다. 각국에서 모인 친구들과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체험을 하였던가! 영성적으로 많이 성숙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특별히 성품성사를 통하여 받는 직무 사제직이 ‘마리아적인 사제’임을 나는 마음 깊이 깨달았다.

 

사제 생활을 성모님을 통해 예수님께 봉헌하면서, 부제품(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과 사제품(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성모님 축일에 받는 은총이 나에게 주어졌다. 공부를 계속하라는 주교님의 명을 받들어 4년을 더 공부하여 교의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십자가 아래의 성모님처럼

 

나는 교구로 돌아와 주교님께서 주시는 명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기쁘게 봉사할 수 있었다. 대흥동 주교좌성당 수석 보좌신부, 솔뫼 피정의 집 관장, 가톨릭 교육회관 관장, 사목국장, 신학교 교수, 신학교 학장을 맡다가 주교로 임명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에 주교님께 무엇을 하겠다고 청해 본 일도 없고, 주교님께서 임명하시는 것을 못하겠다고 거절한 적도 없다. 언제나 주교님의 명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예.” 하고 대답했다. 물론 사목국장, 학장, 주교로 임명받았을 때 그 중요한 직책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나의 부족함을 말씀드렸던 기억은 난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예수님, 왜 당신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성모님, 왜 당신은 십자가 아래서 고통스럽게 계셨습니까?” 하고 기도드린다.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어려움이나 고통 속에서도 십자가의 예수님과 십자가 아래의 성모님처럼 끝까지 사랑하고 싶은 소망 때문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을 특별하게 여기며 사랑하려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낳아 주는 작은 마리아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작은 마리아, 키아라 루빅의 선종

 

포콜라레 운동을 시작한 키아라 루빅께서 3월 14일 영원한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셨다. 키아라 루빅은 내가 마리아를 닮은 삶을 살도록 계속적인 가르침과 영성적인 힘을 주신 분이다. 그분은 항상 마리아를 닮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서, 세상의 많은 이들에게 예수님을 전해 주는 작은 마리아의 삶을 사셨다. 키아라는 하느님 말씀대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말씀을 살도록 도와주었으므로 마리아처럼 ‘교회의 어머니’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작은 마리아가 되는 삶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깊이 느끼고 있다.

 

 

유흥식 나자로 주교-대전교구장, 교의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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