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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김교각 스님

작성자은경|작성시간26.06.17|조회수21 목록 댓글 0

구화산에 핀 신라의 꽃, 김교각 — 지옥이 비지 않으면 성불하지 않으리라중국 구화산에 金地茶금지차. "신라 차'라는 이름으로 1,300년을 살아남은 차나무가 있습니다. 줄기 속이 텅비어 대나무처럼 생긴 이독특한. 품종. 중국.문헌에 에 신라 차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719년 신라 왕자 김교각(金地藏) 스님이 씨앗을 품고 바다를 건넌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2020년, 구화산 대각선사 종학 스님이 그 씨앗을 직접 채취해 경주 기림사로 보내왔습니다. 1,300년 만의 귀환이었습니다



1. 천 년의 침묵을 깨고 피어난 이름

불교는 한국인의 정신적 원형과 맞닿아 있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뿌리 내렸을 때, 그것은 단순히 외래 종교의 유입이 아니라 한국적 사유로 재창출된 새로운 정신의 탄생이었다. 원효의 화쟁(和諍)과 의상의 화엄(華嚴)은 동아시아 불교의 정점을 찍었고, 그 도도한 흐름 속에서 수많은 신라 승려들이 진리의 원류를 찾아 서역으로, 당나라로 향했다.

그 수만 리 길을 걸어간 구법자들 중, 오늘날까지 중국 대륙의 수억 민중에게 '살아있는 부처'로 추앙받는 인물이 있다. 바로 신라 왕자 출신의 승려, 김교각(金喬覺)이다. 그는 719년, 신라의 안락한 왕궁을 뒤로한 채 차가운 바다를 건넸다. 그의 봇짐 안에는 몇 알의 볍씨와 차 씨, 그리고 신라의 영물인 삽살개 한 마리가 전부였다.



2. 왕관을 벗고 가사를 입다

김교각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그는 신라 성덕왕의 장남 김수충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왕위 계승의 서열에 있었으나 동생 중경이 태자로 책봉되는 정치적 풍랑 속에서, 그는 세속의 권력 대신 영원한 해탈의 길을 선택했다. 24세의 청년 김교각이 마주한 것은 신라의 왕좌가 아니라 당나라의 험준한 산맥이었다.

그는 중국 안휘성의 구화산(九華山)에 자리를 잡았다. 본래 아홉 개의 봉우리가 마치 아홉 아이와 같다 하여 구자산(九子山)이라 불리던 그곳은, 훗날 시선(詩仙) 이백이 산의 형세가 마치 아홉 송이 연꽃과 같다 하여 '구화산'이라 고쳐 부르게 된 절경의 성지다. 김교각은 이 거친 산야에서 백토(白土)와 쌀을 섞어 끼니를 떼우는 '백토소미'의 고행을 자처하며 자급자족의 삶을 실천했다.



3. 지옥의 문 앞에 선 보살

구화산에서 김교각이 보여준 수행의 깊이는 당나라 황실까지 감복시켰다. 숙종 황제는 그에게 금인(金印)을 내렸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위해 화성사(化城寺)를 창건했다. 그러나 김교각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화려한 사찰이 아니라 그의 서원이었다.



"지옥이 비지 않는다면, 결코 성불하지 않으리라(地獄未空, 誓不成佛)."



그는 스스로 지장보살(地藏菩薩)의 화신이 되기를 원했다. 석가모니가 입적하고 미륵불이 오기까지의 무불(無佛) 시대,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극락행을 거부하고 지옥의 문턱에서 눈물 흘리는 보살. 김교각의 자비는 이백의 시구 속에도 선명히 남았다. 이백은 그를 향해 "보살의 자비로운 힘 무변고해 구하나니, 하해 같은 그 공덕 세세손손 빛내가리로다"라며 찬탄했다.



4. 신라의 향기를 심고 등신불이 되다

김교각은 단순히 법문만을 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가져간 '황립도'라는 볍씨는 굶주린 민중의 배를 채웠고, 신라의 차 씨는 구화산의 명차인 '금지차(金地茶)'가 되어 오늘날까지 그 향기를 전하고 있다. 《개옹다사》와 《구화산지》에 기록된 공경차와 금지차의 유래는 그가 가져온 차 씨에서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794년, 99세의 나이로 가부좌를 튼 채 입적한 그의 육신은 3년이 지나도록 부패하지 않고 생전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등신불(等身佛)로 모셨고, 이는 구화산이 중국 불교 4대 성지 중 하나인 지장보살의 성지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의 모티프가 된 무라선사의 등신불 역시, 김교각으로부터 이어진 구화산의 독특한 신앙적 전통 위에 서 있는 것이다.



5. 시대의 스승, 김교각의 귀환

중국 땅에는 김교각 외에도 김가기, 혜초, 원측, 의상 등 수많은 신라 구도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김교각이 독보적인 이유는, 그가 외래인이 아닌 '중국 민중의 신앙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국경을 넘어 인류 보편의 가치인 자비와 헌신을 몸소 보여주었다.

천 년 전, 삽살개 '선청'을 데리고 산길을 오르던 신라 왕자의 뒷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는 화려한 왕관 대신 낡은 가사를 택했고, 금은보화 대신 차 씨와 볍씨를 심었다. 그가 남긴 "지옥이 비지 않으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외침은, 각박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라는 준엄한 경구로 다가온다.

구화산의 안개 속에서 피어오르는 금지차의 향기 속에는, 신라 왕자 김교각이 꿈꾸었던 '차별 없는 대동(大同)의 세계'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구화산 #김교각 #김동리 #등신불 (金地茶)금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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