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가족 ㅡ 김 규동. 김 수영. 서정춘.윤 제림. 천상병.홍신선
가족사진ㅡ신석종
세사람의 가족 ㅡ 박 인환
식구 ㅡ 안도현
우리들의 가족 ㅡ 박 몽구
제삿날 ㅡ 고 운기
모네
가족 김규동
둘은 가버리고
막내가 남았다
너도 이윽고 어디론가
가야 하겠지
빈 책상 서랍을
열었다 닫는다
하늘이 푸르구나
뭘 한다고 셋씩이나 낳아
이 고생 하느냐고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이제 내 펜대의 사념도 침묵에 싸인다
얘들아
다 크고 나면 그저 이렇게 멋없으냐
아직도 내 잔등에 가물거리는 것
너희들이 목마를 타던
고사리 손이 감촉이고나
<깨끗한 희망> 창비.1985
가족 김수영
古色이 蒼然한 우리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던가
파도처럼 옆으로
혹은 세대를 가리키는 지층의 단면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
누구 한 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그것은 저 넓은 문창호의 수많은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겨울바람보다도 나의 눈을 밝게 한다
조용하고 늠름한 불빛 아래
가족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전령을 맡긴 탓인가
내가 지금 순한 고개를 숙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기고 있는 서책은
위대한 고대조각의 사진
그렇지만
구차한 나의 머리에
성스러운 향수와 우주의 위대감을
담아주는 삽시간의 자극을
나의 가족들의 기미많은 얼굴에
비하여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제각각 자기 생각이 빠져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부자연한 곳이 없는
이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유순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 안에서
나의 위대한 소재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 뿐이냐
<뿌리> 민음사. 1974년
가족 서정춘
어미 새 쇠슬쇠슬 어린 새 달고 뜨네
볏논에 떨어진 저녁밤 얻어먹고
서녁 하늘 둥지 속을 기러기떼 가네
가다 말까 울다 말까 이따금씩 울고
울다가 잠이 와 멀다고 또 우네
어미 새 아비 새 어린 새 달고 가네
서편제
가족 윤제림(1959 - ) 충북 제천
새로 담근 김치를 들고 아버지가 오셨다
눈에 익은 양복을 걸치셨다
내 옷이다. 한번 입은 건데 아범은 잘 안 입는다며
아내가 드린 모양이다
아들아이가 학원에 간다며 인사를 한다
눈에 익은 셔츠를 걸쳤다
내 옷이다. 한번 입고 어제 벗어놓은 건데
빨래줄에서 걷어 입은 모양이다
장 욱진 ㅡ 가족
가족 천상병
우리 집 가족이라곤
1989년 나와 아내와
장모님과 조카딸 목영진 뿐입니다
나는 나대로 원고료를 벌고
아내는 찻집 '귀천'을 경영하고
조카딸 영진이는 한복제작으로
돈을 벌고
장모님은 나이 팔십인데도
정정하시고...
하느님이시여!
우리 가족에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안성기. 오소영. 안다빈(1988- )
가족 홍신선
이른 봄날 오후 보통리 저수지에 가서 보았다
떡밥, 빈 라면컵, 찌그러진 콜라 깡통
플라스틱 막걸리병 그리고 겨우내
물 속에서 허리 이하가 녹은 낡은 갈대
새하얗디 새하얀 햇살에 눈 못 뜨고 섰는 멍한 갈대 하나를
아니다. 전세집처럼 4평방킬로미터의 희부연 하늘을 맞들고
이 나라에서 다른 나라 속으로 나는 쇠오리 한 가족을
큰 놈 궁둥이깨 고개 숙여 잇대인 작은 놈의 궁둥이
미등처럼 깜박이는 , 털을 기운 궁둥이를 보았다
하릴없이 떨어져 남은 빈 수면에는
손들 내린, 목이 쉰 물결들이
삼삼오오 한가롭게 흩어져가고
그들 사이
목공소 주인 노릇하는 아우도
흩어져가고
두엄 걷은 마늘밭 마늘잎들
한가롭게 흔들리는 마늘밭의 허공에서
나는 문득 보았다
밑그림처럼 흐린
반쯤 고개 쳐든 수건 쓴 어머니를
가족사진 신석종
빗소리가 가늘게
뭄 밖에서 웅성거리는 날
날개 달린 생각들이
밤 늦도록 들락거리고
나와 함께, 방아네서
축축하게 눅지는 것들
그 중에서도 유독
벽에 걸린 식구들 사진 몇 장이
두런두런 깨어나
소복이 모여, 나를 쳐다본다
내가 그들을 깨웠을까
쳐다보는 그들이
나를 잠못들게하나
세사람의 가족 박인환
나와 나의 청순한 아내
여름날 순백한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유행품으로 화려한
상품의 쇼우 윈도우를 바라보며 걸었다
전쟁이 머물고
평온한 지평에서
모두의 단편적인 기억이
비둘기의 날개처럼 솟아나는 틈을 타서
우리는 내성과 회한에의 여행을 떠났다
평범한 수확의 가을
겨울은 백합처럼 향기를 풍기고 온다
죽은 사람들은 싸늘한 흙 속에 묻히고
우리의 가족은 세 사람
토르소의 그늘 밑에서
나의 불운한 편력인 일기책이 떨고
그 하나하나의 지면은
음울한 회상의 지대로 날아갔다
아 창백한 세상과 나의 생애에
종말이 오기 전에
나는 고독한 피로에서
氷花처럼 잠들은 지나간 세월을 위해
시를 써본다
그러나 창 밖
암담한 상가
고통과 구토가 동결된 밤의 쇼우 윈도우
그 곁에는
절망과 기아의 행렬이 밤을 새우고
내일이 온다면
이 靜寞의 거리에 폭풍이 분다
박인환시선집. 산호장. 1955년
줄리아 로버츠 가족
폴 뉴먼 가족
식구 안도현
두 마리 비오리가
연못을 건너가고 있다
연못 기슭까지 날개가 닿는
커다란 새 두마리를 데리고
구질구질한 가난도 캄캄한 서러움도 없다는 듯이
푸진 저녁밥상을 차리던 내 어머니같이
그 옆에 말없이 앉은 아버지같이
미끄러지듯 경쾌하게
(물속에 잠긴 두 발은 마구 세상을 긁고 있겠지만)
물 바깥의 자태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건너가고 있다
두 마리 비오리는
(잘 익은 까마중 같은 눈으로 먹이를 찾느라 두리번거리겠지만)
암컷의 뱃속에서 여물어가는 알이
차돌처럼 단단해질 때까지는
건너가겠다는 듯이
우리들의 가족 박몽구
진종일 양짓발에 쪼그려 앉아 가래를 끌륵이는
노인들의 손등처럼 물기 없는 닭장차에도
어김없이 꽃씨들이 넘실거리고
부벼도 부벼도 사랑에 닿지 못하는 살갗들뿐인
아파트의 벽돌 사이로 제비가 나는데
우리들의 키는 너무도 작아
아니 우리들의 벽은 너무도 완고해
두근두근 천길 땅 밑을 흐른다 하여도
한낱 백짓장을 사이한 듯 들리던 저 소리도
태평양을 건너온 위성통신 하나로
높은 담 너머로 곧잘 사라지고
기름 하나를 담보처럼 붙들고
콧대를 높이던 중동 벼락부자들의 화대가 싸지고
큰손들이 달러를 뿌렸다는 소문 하나에
우리들의 담은 이렇게 높아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가
아니야 아니야 고개를 흔들며
모두들 한덩어리가 되어
모처럼 거머쥔 행복의 티켓을 놓치지 말라는
앵커맨의 구호 끝에 튀진 침이 채 마르기 전에
구호의 그물에 걸리지 않은 청년 하나
맹물의 3080원을 풀칠의 4200원으로 인상하라며
말이 다하자, 석유를 부어 저를 바치는 외침마저
피킷을 든 손은 매몰차게 뿌리치고
때아닌 함박눈이 장례식에 가는 구름 같은 발길들을
묶어버린 아침,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일제히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철쭉꽃 연붉은 사랑. 실천문학사. 1990년
렘브란트 ㅡ 가족
제삿날 고운기(1961 - ) 전남 벌교
열여덟 평 좁은 집에
일곱 형제 식구들 모이면
이곳은 난데없는 수용소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여자들이 한 판
벌여 놓은 옆에 남정네들은 비좁은 자리를 만들고
맥주로 목을 축이다 보면 나오는
옛날 고향 이야기
포교당 앞 부잣집과
그 집 큰마님은 후실 소생을
친자식처럼 키웠다는 이야기며
벌교 우리 옛집을 샀던 배씨는
노름으로 집도 날리고
아들마저 빈털털이가 되어
서울 어디선가 산다고 셋째 형은
근황을 추가한다
한 무더기 일일이 이름조차
대기 힘든 조카아이들은 편을 갈라
장기를 두고 포커놀이를 하면
남정네들의 이야기는 급기야
반란사건 때 온통 빨갱이 마을이 된
화정이롸 거기 살던 무당을 떠올리고
서울로 오려 했다지만 소식을 모르는
벌교남국민학교 최 선생을 더듬는데
나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제삿날이면 이렇게 이야기 속에 추억하는
우리 할머니는 다 아셨다고 한다
누가 빨갱이고 누가 깡패고
누가 신실한 사람이고 누가 거짓말쟁이였는지를
과학스런 역사 공부 한 번 한 적 없어도
그 터에 뿌리 내리고 살았던 사람은
땅에 어떤 거름을 주고
언제 김을 매야 좋은지 아는 것처럼
오래 입 다물고 사시다
아예 숨마저 거두신 지 오래
노가주 나무 숲에 숨어 바람도 피해 가던
할머니가 하셨을 법한 얘기는
제삿날 밤 일곱 손자
남정네들이 모여서 한다
고흐 ㅡ 감자먹는 사람들
가족 ㅡ 고흐
손목 윤제림
나 어릴 때 학교에서 장갑 한 짝을 잃고
울면서 집에 온 적이 있었지
부지깽이로 죽도록 맞고 엄마한테 쫓겨났지
제 물건 하나 간수 못하는 놈은
밥 먹일 필요도 없다고
엄마는 문을 닫았지
장갑 찾기 전엔 집에 들어오지도 말라며.
그런데 저를 어쩌나
스리랑카에서 왔다는 저 늙은 소년은
손목 한 짝을 흘렸네
몇 살이나 먹었을까 겁에 질린 눈은
아직도 여덟 살처럼 깊고 맑은데
장갑도 아니고 손목을 잃었네
한하운처럼 손가락 한 마디도 아니고
발가락 하나도 아니고
손목을 잃었네.
어찌할거나 어찌 집에 갈거나
제 손목도 간수 못한 자식이.
저 움푹한 눈망울을 닮은
엄마 아버지 아니 온 식구가, 아니
온 동네가 빗자루를 들고 쫓을테지
손목 찾아오라고 찾기 전엔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찾아보세나 사람들아
붙여보세나 동무들아
고대로 못 붙여 보내면
고이 싸서 동무들 편에 들려 보내야지
들고 가서 이렇게 못쓰게 되었으니
묻어버려야 쓰겠다고
걔 엄마 아버지한테 보이기라도 해야지
장갑도 아니고
손목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