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불자마당이 만들어지니 마당을 채울 그 무언가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제 머리가 허연 노인이 되었지만 젊을 때의 고민을 생각해보며 불교와 삶이라는 주제로 틈나는 대로 글을 써 보겠습니다. 청년이 아니신 분들은 읽는 재미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청년도 없고, 노인도 없으니 또 그냥 읽으셔도 됩니다.)
얼마전 중국 운남성 여행을 할 때의 일입니다. 여행을 같이 하는 친구는 집에 허스키라는 종의 커다란 개를 키우고 있는데 문득 그 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아내를 지켜준 개야"하고 말을 끝내었습니다. 그래 제가 아는 체를 했습니다.
"너는 참... 하나님이 지켜주지. 어찌 개가 지킬 수 있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친구는 태도를 바로하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한 열번 쯤 외쳤을 겁니다. 저는 깜짝 놀랐고 한편으로 기가 막혔습니다. 무소불위의 절대군주앞에서 경거망동을 한 신하가 목숨을 건지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크게 나무라는 모습과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학교 3년 동안 교회를 다녔습니다. 크리스마스날 교회에 놀러갔다가 그냥 잡힌 것입니다. 고등학교는 장로교재단의 미션스쿨을 다녔습니다. 들어가기전에는 미션스쿨인 줄 몰랐습니다만 중학생때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선택에 대한 후회나 불만은 없었습니다. 수요일 아침마다 예배를 보았고 한 주에 한 시간은 목사님을 모시고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좀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가 아닌 하나님이 지켜준다는 말은 성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아무리 집을 튼튼하게 지어도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으면 무너지고, 아무리 경비병을 많이 세워도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으면 도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불교적으로는 '잔머리 굴리는 것 보다, 선을 행하고 공덕을 쌓아라'하는 뜻이죠. 교회를 나가는 친구에게 성경말씀을 인용해서 참 멋지게 한 방 먹인 겁니다. 그런데 친구의 반응이 놀라웠습니다. 도를 넘었으니까요. 사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가드(God)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가드는 '상과벌'의 존재로 대체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언행을 하면 상이, 그릇된 언행을 하면 벌이 옵니다. 일요일 교회를 안가면 한주일 내내 찜찜하게 살아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던 청봉거사님은 처음으로 절에 가는 날 갑자기 천둥벼락이 치는 것을 보고 천벌을 받는 것인가 걱정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불벼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내 친구는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반응이었습니다.
고3때, 대학입시에 눈코 뜰 사이가 없는 시기에도 우리는 한주에 한번씩 목사님을 모시고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어느 날 우리는 세계 4대 종교에 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과 기독교를 비교연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최초로 불교이론을 접하는 기회였는데 그 시간이 지난 후 저는 '나의 종교는 불교다'하고 선언했습니다. '석가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지만 수행하여 부처가 되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이론은 저에게 꿈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기독교가 보여주는 제한된 자유, '주와 종'이라는 그런 개념 때문에 불교의 완전한 자유, 완전한 해방과 같은 주장이 저를 매료시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이렇게 저는 불교에 들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불교를 믿는 이유는 참 다양한 듯합니다. 제가 선원에 입주했을 때 지거사란 분이 한동안 머물렀습니다. 나무에 홈을 파서 수석을 받치는 받침대를 만드는 재주를 가지신 분인데 산청에 있는 수석받침대의 상당수가 그 분이 만드신 겁니다. 그 분이 선원을 찾아와 백봉선생님께 삼배를 올리고 찾아 온 이유를 말했습니다.
"참 나를 찾기 위해 왔습니다."
지거사처럼 '참 나'를 찾기 위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불교에 들어 온 분들도 참 많은 듯합니다. 출가하신 스님들은 대부분 여기에 속하지 않을까요? 대학 때 저는 토인비가 쓴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좋아했고 그래서 많이 들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내 삶의 캔버스에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저 뿐이 아니었죠. 그런 사람이 많았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한결 더 많았지만 말이죠. 이렇게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 지식인으로서의 불자에게 한국불교의 선수행은 제대로 된 방편입니다. 우리 보림선원 역시 이를 깨닫기 위한 방편에 집중되어 있죠.
붓다가 되기 위해서, 실상(實相)을 알기 위해서 불교에 들어 온 분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불자들은 '의지하기 위해서' 불교에 들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전쟁터에 나간 아들이 무사히 귀환하도록 가피를 얻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고생하는 남편이 돈을 잘 벌도록 가피받기 위해, 취직을 못하는 자식이 빨리 취직하는 가피를 얻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외로움속에서 불보살의 가피로 힘을 얻기 위해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때 불보살과 대화하고 싶어서 등등. 이는 교회가 주는 가치이기도 합니다만 불교 역시 자비의 종교, 가피의 종교이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불교에 들어 온 불자들도 원하는 것, 그리고 평안과 행복을 얻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위에 언급되지 않았다구요? 그럴 겁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불문(佛門)에 들어 오든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안해 질 수 있습니다. 평안과 행복속에서 세상사람들을 돕고, 세상에 가치를 제공하며, 그리고 먹고 사는 것 걱정하지 않으면서 멋지게 모습을 굴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