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불교에서는 '용서(容恕)'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용서라는 말이 없다고 잘못한 사람과 싸우라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나는 잘했고 너는 잘못했다, 그러니 잘한 내가 잘못한 너를 용서한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상대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하는 말입니다.
상대의 인격에 대한 큰 모욕입니다.
불교에서는 '일체 중생의 불성은 꼭 같다(一切衆生 皆有佛性)'고 주장합니다.
성불해서 연화대 위에 앉아 계시는 부처님이나 죄를 많이 지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있는 중생이나 자성자리, 실상(實相)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겉을 보고 미워하거나 비방하거나 한층 더 나아가서 세속말의 용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고 나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부처님같이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생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실례로 들어도 그와 같습니다.
부처님을 일생 동안 따라다니면서 애를 먹이고 해치려고 수단을 가리지 않던 사람이 '제바닷([調達)'입니다.
보통 보면 제바닷타가 무간지옥에 떨어졌느니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느니(生陷地獄) 하는데 그것은 모두 방편입니다.
중생을 경계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어찌 됐건 그러한 제바닷타가 부처님에게는 불공대천의 원수인데 부처님은 어떻게 원수를 갚았는가?
성불(成佛), 성불로써 갚았습니다.
죄와 복이 온 시방법계를
비춤을 깊이 통달했다.
深達罪福相
照於十方
착한 일 한 것이 시방세계를 비춘다고 하면 혹시 이해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악한 짓을 한 무간지옥의 중생이 큰 광명을 놓아서 온 시방법계를 비춘다고 하면 아무도 이해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가장 선한 것을 부처라 하고 가장 악한 것을 마귀라 하여 이 둘은 하늘과 땅 사이(天地懸隔)입니다마는, 사실 알고 보면 마귀와 부처는 몸은 하나인데 이름만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다 해도 그 사람의 자성(自性)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고, 아무리 성불했다 하여도 그 사람의 자성에는 조금도 더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와 부처는 한 몸뚱이이면서 이름만이 다를 뿐 동체이명(同體異名)입니다.
비유하자면 겉에 입은 옷과 같은 것입니다.
제바닷타가 아무리 나쁘다고 하지만 그 근본자성, 본모습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나중에 제바닷타가 성불하여 크게 불사(佛事)를 하고 중생을 제도한다고 했습니다.
제바닷타가 성불한다고 [법화경]에서 수기(授記)하였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정신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긴다"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 행동, 공부하는 근본지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불교에 들어오는 첫째 지침은 '모든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고 스승과 같이 섬겨라'입니다.
우리 불교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은 물론 소나 돼지나 짐승까지도 근본자성은 성불하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부처님과 같이 존경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불교 믿는 사람은 상대방이 떨어진 옷을 입었는지 좋은 옷을 입었는지 그것은 보지 말고 '사람'만 보자는 말입니다.
[성철선사님 법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