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령의 대지도론산책
〈63〉 보시바라밀⑥
명예.이익.공양공경 바라지 않아야 청정 보시
《맑은 마음, 착한 생각이 삼보찬탄
지혜 키워주기 위한 생각뿐이어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어려운 이치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법보시라면
이런 경우도 생각해볼 만합니다.
사람을 백 명(혹은 천 명)이나 죽인 연쇄살인범
앙굴리마라 보다도 더 못된 악인인
데바닷타의 경우입니다.
그는 승가의 화합을 깼고,
왕자를 꼬드겨서 천륜을 저버리게 했으며,
부처님과 아라한에게 해를 입힌 자로서,
오무간죄의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가다(呵多, 핫타카)라는 스님도 있습니다.
어찌나 총명한지,
특히 그의 말솜씨는 너무나 뛰어나서
사부대중과 타종교인들 중에서
그와 논쟁을 벌여 이긴 자가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는
오직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주장하며
교묘하게 말을 뒤틀면서 주장을 펼쳤습니다.
가다 덕분(?)에
“비구가 거짓말을 하면
바일제죄가 된다”라는
항목이 생겨났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데바닷타와 가다 두 사람은
매우 명석한 수행자였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데바닷타에게 이끌린 비구들이 생겨났고,
그들을 거느린 데바닷타는
붓다의 승가에서 떨어져 나와
별도의 교단을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가다 스님의 경우
외도들이 모조리 논쟁에서 패했으니
그만큼 불교의 위상을
높였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도
역시 법보시를 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안타깝게도
대지도론>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의 법문은
법보시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데바닷타는
그릇된 견해라는 죄를,
가다 비구는
거짓말의 죄를 지은 것입니다.
도를 위한 청정한 법보시가 아니라
그저 명예와 공경과 공양만을 구해서
진리를 판 것이니
그들에게는 보시의 공덕이 아니라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대지도론>의 설명입니다.
“말로 이치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해서
다 법보시는 아니다.
언제나 맑은 마음(淨心)과
착한 생각(善思)으로
모든 생명을 교화하는 것이 법보시다.
재물의 경우,
착한 마음으로 보시하지 않으면
복덕을 얻을 수가 없듯이,
법보시도 그와 같아서
맑은 마음과 착한 생각으로 해야만
법보시가 된다.
법을 설하는 사람이
맑은 마음과 착한 생각으로 삼보를 찬탄하고
죄와 복의 문을 열어 보이고,
네 가지 진리를 보여주며,
중생을 교화해서
붓다의 길에 들어서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 청정한 법보시이다.”
그런데
‘법’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이웃을 힘들게 하지 않고
착한 마음으로 가엾게 여기는 것이니
이것은 부처님에게 나아가는 인연이 되고,
둘째는
모든 법이 진정 텅 빈 것임을 관찰하는 것이니
이것은 열반으로 나아가는 인연이 됩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웃을 향해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서
이 두 가지 법을 말하되
마음속에
명예나 이익이나 공양공경을 바라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에게 나아가는 청정한 보시가 됩니다.
법의 보시가 재물의 보시보다
더 훌륭한 것은
두 말 하면 잔소리입니다.
그 이유는,
재물의 보시는
뭔가 내놓을 만한 재산이 있어야 하고,
그 재산은 덧없는 것이어서 제한적인 반면,
법의 보시는
재산이 없어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법(진리)은 재산처럼
덧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법의 보시에서 재물의 보시도 나오며,
재물의 보시는
붓다가 있는 세상이건 없는 세상이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법의 보시는
오직 붓다의 세상에서
가능한 일이기에 더 희유하다고
대지도론>에서는 말합니다.(제11권)
남들 앞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전할 때
오직 상대방을 편안케 하려는 마음에서
시작해야 하고,
이 일이 서로의 지혜를
키워주기 위함이라는 생각뿐이어야
‘법보시’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법문한다”는 생각도,
명예와 공양을 바라는 마음도 지우고
“제 법보시를 받아주십시오”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대중 앞에 서야한다는 뜻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