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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 지 식 여 행 ┃

[스크랩] (18) 용화선원 전강선사

작성자어질이|작성시간07.01.16|조회수168 목록 댓글 1

△ 스승 전강 선사를 생전과 다름 없이 용화선원의 조실로 모시고 있는 송담 선사가 스승의 진영 앞에서 ‘부처님 오신 날’ 법회에서 설법 중이다.


남의 등불 부러워말고 내 등불 켜라

인천시 남구 주안동 기린산 용화선원. 이곳은 공장지대다. 예전엔 주위가 염전이었다. 어찌 산 좋고 물 좋은 명당들을 두고 이 곳에 참선도량이 자리했을까. ‘마음 밖 경치’를 구할 것 없다.

1961년 용화선원을 창건한 이가 전강선사(1898~1975)다.

전강은 전남 곡성 입면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상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던 어머니가 일곱 살 그와 젖먹이 여동생을 두고 세상을 떴다. 계모가 들어왔다. 계모로부터 방치된 여동생은 걸음마도 떼어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에겐 늘 밥보다 가까운 게 매였다. 전강이 어린 시절 살기 위해 익힌 것은 좀도둑질이었다. 허기를 면하러 콩과 쌀을 훔쳐 먹었다. 그리고 들켜서 죽도록 얻어 맞기 일쑤였다.

14살 때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떴다. 그러자 계모는 자신이 낳은 아들까지 두고 개가해 버렸다. 이 때부터 어린 이복동생을 업고 밥을 빌어먹으려 이모와 고모집을 찾아 나선 전강은 늘 밥 한 술 얻어먹지 못한 채 쫓겨났다. 이런 박대가 너무 서러워 물에 빠져 죽으려고도 하고, 어머니 무덤에 가서 ‘데려가 달라’고 밤새 울기도 했다.

견디다 못한 전강은 계모가 개가한 집을 찾아내 문 밖에서 이복동생을 눈물로 떼어 들여보내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 이 때부터 그는 주린 배를 채우려 사냥꾼 조수와 유기공방의 풀무꾼, 행상 등 온갖 일을 했다.

그러다 한 승려를 만나 절에 들어간 그는 제대로 도를 닦기 위해 해인사로 향했다. 해인사 행자시절 그는 인물도 뛰어나고 글도 잘하던 두 살 위 봉룡사미와 절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해인사에 휴양하러온 예쁜 신여성을 보고 상사병이 든 봉룡사미가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며칠 뒤 방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 외로운 처지에서 육친처럼 의지했던 봉룡사미가 다비식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하는 모습을 보던 전강은 자신과 인연을 맺은 사람은 하나 같이 이렇게 떠나가는 현실에 망연자실했다. 이 때 노승의 게송이 전강의 가슴을 비수처럼 파고 들었다.

“도를 닦는 사람은 머리털 희어지기를 기다리지 말아라/쑥대 속의 무덤은 소년의 무덤임을 알라.”

얼마 뒤 그는 꿈 속에서 지옥에 빠져 고통 받았다. 너무 놀라 신음하다 깨어난 그는 생사를 넘어서는 일이 너무도 다급해졌다. 소년이라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23살에 참선수행 해탈…10년뒤 보광서원 죌 추대
정진…또 정진…게으름엔 ‘불방망이’ 내리쳐

참선 수행을 통해 해탈해야만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말을 들은 그는 은사 스님에게 참선을 하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은사 스님은 그에게 경전 공부부터 차근차근히 하라며 꾸중할 뿐이었다. 그러나 전강은 평생 책만 보다 언제 생사를 넘겠느냐며 막무가내였다.

결국 그는 ‘무’(無)자 화두에 몰입했다. 그러나 조급증이 화근이었다. 병약한 몸으로 화두에 신경을 곤두세우자 머리에 열기가 오르고, 피가 입과 코로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상기병이었다. 그러나 직지사에서, 예산 보덕사에서도 그의 화두 정진은 멈추지 않았다. 핏기 없는 몸으로 죽음을 인 채 구름처럼 떠돌던 그의 발길은 어느 새 고향 곡성을 향하고 있었다. 한 밤에 태안사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계곡 물소리를 듣는 순간 ‘생사의 구름’이 찰나에 씻겨 가버렸다. 온몸의 전율 속에서 전강은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바지춤을 내린 전강은 법당 앞에서 시원스레 오줌을 누었다. 막 바지춤을 올리려는데 한 스님이 대노해 다가와 호통을 쳤다.

“천지에 부처의 진신(몸)이 아닌 곳이 없는데, 그럼 어디에다 오줌을 누란 말이냐!”

불과 23살에 견성한 사자가 드디어 포효를 시작했다. 백수들은 사자의 포효만 듣고도 뇌가 파열된다든가. 그는 거칠 것이 없었다. 혜월, 용성, 한암, 만공, 보월 등 당대의 6대 선지식들이 모두 그의 견성을 인가했다.

1960년 전강을 찾아 출가한 평택 만기사 주지 원경 스님(64)을 찾았다. 남한노동당 지도자 박헌영의 아들인 그를 전강은 법제자 송담 선사(76)의 상좌로 맺어주었다.

전강은 법을 거량함에 털끝 만한 틈을 보이지 않았다. 불과 33살의 나이에 천하제일사찰 통도사 보광서원의 조실로 추대됐던 전강은 법에선 은사도 제자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원경의 스승 송담은 전강이 광주의 한 시장에서 가게를 하며 키운 제자다. 온갖 뒷바라지를 해온 송담이 10년 간 묵언(일체 말하지 않음)정진을 끝내고도 끝내 (깨침의) 한소식을 전하지 못하자 전강은 자식보다 아끼던 그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다음날 송담은 사자의 포효를 시작했다.

용화선원에 연등이 불을 밝히고 있다. 중국의 운문 선사는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한 부처에 대해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한 방망이로 때려 잡아 개에게 먹여 천하를 태평케 했을 것”이라고 했다. 남의 등불을 우러러보지 말고 오직 자신의 등불을 켜라던 부처의 가르침대로 이렇게 진실한 연등을 밝힌 이가 또 있을까.

용화선원의 송담은 스승의 육신이 떠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조실 자리를 거부하고 스승 전강의 법신을 여전히 조실로 모신 채 수좌들을 지도하고 있다. 송담에게 전강은 여전히 ‘스님’이다. 스님은 스승님의 줄임말. 최후의 의지처인 백척간두에서조차 밀어버리고, 분별 망상을 용서 없이 물어뜯어버리는 그 스승의 은혜를 어찌 글로 담을 것인가.

 

인천/글·사진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전강선사 이야기

작야월만루(昨夜月滿樓)하더니 
창외노화추(窓外蘆花秋)로다 
불조상신명(佛祖喪身命)한데 
유수과교래(流水過橋來)로구나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전강선사의 오도송이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묘법이요, 
온 법계가 원융무애(圓融無碍)하고 일체가 유심조(唯心造)이다. 
그러나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또한 얻을 수 없다는 마음도 없다. 

내가 25세 때 덕숭산 금선대에 계신 만공 스님을 
처음 찾아가서 예배하니 나에게 묻기를 
"심마물이 임마래오(甚마物 恁마來)?"하시었다. 

내가 다시 예배하니 
또 묻기를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어?"하시었다.

이번에는 내가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니 
만공 스님은 그만 얼굴을 찌푸리시면서 
"허! 저렇게 주제 넘는 사람이 견성했다해. 
네 습기(習氣)냐, 체면없이 무슨 짓이냐?" 
이러시고는 그 다음부터는 나를 보시기만 하면 비웃으며 
"저 사람, 저런 사람이 견성을 했다 하니 말세 불법이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번번이 조롱을 하시었다.

나는 차츰 불안해지다가 분심이 났다. 
선지식이 저러실 때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몸은 극도로 쇠약하여 핏기가 하나도 없어 
앉으면 잠이 와서 앉지도 못할 정도로 바짝 말랐다. 
그래서 운동대를 붙잡고 서서 '에라! 한바탕 해봐야겠다. 

그까짓 놈의 몸은 하다가 죽으면 그뿐이지.'하고 
나는 만공 큰스님의 말씀을 믿고 그 회상에서 하안거 중 
판치생모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하다가
 반 철이 지날 무렵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 의지(馬祖圓相公案 意旨)'가 
확 드러났다.

그 길로 조실 방에 들어가 보월 스님 앞에 원상을 그려 놓고 묻기를 
"마조원상 법문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入也打 不入也打)>고 하였으니 
조실 스님께서는 어떻게 이르시겠습니까?" 하니 
보월 스님은 곧 원상을 뭉개셨다.

나는 보월 스님께 말하되 
"납승을 갈등 구덩이(葛藤과臼) 속에 죽이신 것입니다. 
마조방하(馬祖棒下)에 어떻게 생명을 보존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보월 스님의 대답이 떨어지기 전에 문을 닫고 
만공 스님 처소에 와서 다시 묻되,

"마조원상 법문을 보월 스님께 물었더니 
원상을 뭉개었습니다. 이렇게 그르칠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만공 스님은 도로 나에게 묻되 
"자네는 어떻게 이르겠는가?" 하시었다.

내가 답하되, "큰스님께는 이르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더니 
만공 스님이 주장자를 초안이에게 주시면서 
"자네가 묻게" 하시니 
초안 스님이 주장자로 원상을 그리고 
"입야타 불입야타(入也打不入也打)" 해서, 
내가 초안이를 보고 여지없이 일렀다. 

그러나 학자를 위해서 설파하지 않는다. 
만공 스님께서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면서 점검하시되,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가 있겠느냐(誰知更有夜行人)" 하셨다. 

그런 다음, 만공 스님과 한암 스님과의 서신문답과 
기타 중요 공안에 대한 탁마(琢磨)를 낱낱이 마치고 떠나려고 할 때, 
만공 스님께서 물으시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했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시니 

내가 곧 엎드려서 허부적 허부적 땅을 헤집는 시늉을 하니
만공 스님께서 "옳다. 옳다!(善哉善哉)" 인가하시고 
곧 나에게 전법게(傳法偈)를 지어 주시되, 

불조미증전(佛祖未曾傳)이요 
아역무소득(我亦無所得)이라 
차일추색모(此日秋色暮)한데 
원소재후봉(猿嘯在後峰)이로다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제방 선덕(諸方禪德)들은 한번 착안해 볼지어다. 

우리 부처님께서 출가하셔서 여러 유명한 선인들을 
차례로 찾아서 도를 물었으나,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으로 극과(極果)를 삼으므로 
구경(究竟)의 생사해탈법이 아님을 알고 선인의 처소를 떠나셨다. 
이것이 바로 출가의 진면목이다. 

참선법을 닦는 대중들이여! 
저 비상비비상처정 따위를 얻고서 
부처님의 정법을 증득하였다고 하지 말라. 

더욱이 입을 벌려서 학자를 속인다면 그 죄는 더욱 크리라. 
자기나 눈이 멀지언정 어찌 남까지 눈 멀게 하겠는가. 

그러니 이런 선병(禪病)에 걸린 자는 모름지기 
눈 밝은 선지식을 찾지 않는다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게 되리라. 

지금부터 삼백여년 전 월봉(月峰) 스님이 계셨는데 
법문을 잘 하기로 그 당시에 제일 유명하였다.

그때 나라에 큰 재(齋)가 있어 월봉 스님을 법사로 모시고 
법회를 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는 나라의 중신과 청신사 청신녀 등 
사부대중이 많이 모였다. 

그 중에는 허름한 옷을 입은 한 노승도 끼어 있었다. 
이 노승이 바로 환성지안 선사(喚醒志安 禪師)인 것이다.

그런데 월봉 스님은 법문을 하실 시간이 되었는데도 
웬일인지 떨면서 기력을 잃고 법문을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중들은 월봉 스님을 억지로 
법상에 오르게 하고 법문을 청하였다.

그때 월봉 스님은 『원각경』「보안장」을 설하시는 중에 
'무변허공 각소현발(無邊虛空 覺所顯發)'이라는 구절을 법문하게 되었는데 
월봉 스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무변허공에서 각이 나타난 바이니라" 

이렇게 엉뚱하게 법문을 할 때 앉아서 듣고 있던 
노승이 벽력 같은 '할' 을 하니 월봉 스님은 
법상에서 뚝 떨어졌다. 

그것은 원각대지(圓覺大智)에서 나온 노승의 일할(一喝)에 
그만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생사해탈 정법은 법문을 잘하고 명성이 높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수행하고 증득하는 데 있는 것이니 
만약 그때 노승의 할이 없었던들 대중들은 
<무변허공이 각의 나타난 바이다>를 
<무변허공에서 각이 나타났다>고 그릇 믿을 뻔하였으니, 

부처님의 정법이 사견종자(邪見種子)로 
말미암아 얼마나 위태하였겠는가! 

그러나 노승의 '할' 로 부처님의 정법을 바로 잡았으니 
이것이 바로 불법정화인 것이다. 

소요 스님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비하여 성동(聖童)이라고 고을 사람들한테 칭송을 받았다. 

13세에 출가하여 부휴대사 밑에서 일대시교(一代時敎)를 통달하고 
수백 명의 학인 가운데 운곡(雲谷)·송월(松月) 스님과 더불어 
법문삼걸(法門三傑)이라고 칭호를 받았던 17세의 소년 강사 
소요 스님이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부처님의 경전을 아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마칠 것 같지 않았다.

어느 날 묘향산에 계신 서산대사를 찾아가서 
법을 가르쳐 줄 것을 청하니, 
서산대사는 보자마자 법기(法器)인 줄 아시고 
그날부터 시봉을 시키면서 능엄경 한 토씩을 매일 가르쳐 주셨다. 

이미 경전을 통달한 강사인지라 능엄경을 모를 리 없지만 
서산대사의 가르침이라 매일 배우다보니 삼 년이 다 지나갔다. 

소요 스님이 생각하여 보니 한심하였다. 
대선사요, 대도인이라 하여 찾아왔는데 법은 가르쳐 주지 않고 
이렇게 다 알고 있는 능엄경만을 가르쳐 주니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러나 참고 계속 배워 가는데 소요 스님이 
잠깐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면 서산대사는 웬일인지 
때묻은 작은 책을 보시다가는 곧 안주머니에 넣곤 하는데 
이렇게 여러 번 계속되고 보니 소요 스님은 
그 작은 책에 대하여 매우 관심이 많았다. 

하루는 서산대사가 잠자는 틈을 타서 그 작은 책을 보려고 하니 
서산대사는 깜짝 놀라 깨어나서 
그 책을 더욱 소중히 감추는 것이다. 

그러니 더욱 관심이 많아지고 또 무슨 책인지 
점점 의심이 커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작은 책을 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단속이 심하고 또 그냥 그대로 
아무런 법도 얻지 못하였으니, 
더욱 화가 나서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소요 스님은 서산대사에게 하직을 고하니 
그때야 비로소 서산대사가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던 때와 
콧물이 묻은 그 작은 책을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가려고 하거든 이 책이나 가지고 가게." 하셨다. 

서산대사가 주신 책을 펴보니 게송이 있는데, 

작래무영수(斫來無影樹)하여 
초진수중구(초盡水中구)로다 
가소기우자(可笑騎牛者)여 
기우갱멱우(騎牛更覓牛)로구나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다가 
물 가운데 거품을 태워 다할지니라. 
가히 우습다 소 탄 자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 

이 게송을 가지고 호남으로 내려가 20년간을 참구하였으나 
깨닫지를 못하고 나이 40에 이르러 다시 묘향산에 돌아가서 
서산대사를 뵈오니 감개가 무량하여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20년 간을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는 스승이 아니었던가. 
서산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공부가 어떻게 되었느냐?" 
"떠날 때 주신 게송의 의지를 아직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서산대사께서 "가히 우습다 소 탄 자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 하시는 바람에 
소요 스님은 언하에 확철대오 하였다. 

                수행의 등대지기 전강 선사

                설 해 / 사미니과

                 

                 

                수행자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자신의 수행에 대한 확신일 것이다.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눈 깜짝하지 않을 믿음이야말로 수행자의 진정한 생명이 아닐까?


                전강선사의 悟道를 향한 순례야말로 묵숨을 걸고 자기 수행에 대한 확신을 향해 삶을 던진 수행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만하다. 철저한 자기 실험만이 마침내 해탈의 길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온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보이신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되던 해 어머니를 잃고 서모의 따가운 눈초리와 시달림을 받으며 유년을 보낸 선사는 12살에 동생과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서모의 재가로 삶의 비애가 산재하고 있는 험난한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사냥꾼의 조수, 일본인 가게의 점원, 풀무간에서의 심부름 그리고, 유기장수 등 16살에 해인사로 출가하기까지의 다양한 삶의 체험으로 인해 선사는 정신적인 성숙을 이룬다.


                생에 절망해 본 사람만이 생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말처럼 선사는 1913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인공스님을 득도사로 응해스님을 계사로 수계하고 永信이라는 사미로 새로운 삶을 힘차게 살게 된다. 僧으로서 갖춰야 할 여러 가지 위의와 經을 배우던 선사는 친하게 지내던 봉령 사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목숨의 허망함을 깨닫고 이 때부터 만공스님께 받은 無字화두를 들고 구도의 길에 오른다.


                수행 도중 상기가 되어 피를 토하는 등 못쓰게 된 몸을 이끌고 제산, 용성, 만공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 문하에서 죽기를 각오한 피나는 정진으로 1921년 23살 되던 해 구름이 걷히고 난 후의 청산이 마침내 산 뼈를 드러내듯이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경지를 얻게 된다. 해탈의 희열, 즉은 오도송은 이러하다.


                昨夜月滿樓      어젯밤 달빛은 누각에 가득 찼는데

                窓外蘆花秋      창밖에는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神命      부처와 조사도 신명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는구나.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지 오래되었으나 이십대 초반에 깨달음을 얻은 스님은 흔치 않다. 참선뿐만이 아니라 온 몸으로 부딪치는 만행과 열정적이고 구도적인 삶을 통해 開悟에 이르게 된 것이다. 스물 세 살의 젊은 나이에 깨달음을 얻은 선사는 운수행각을 하며 당대의 선지식인 혜봉, 혜월, 용성, 한암, 금봉, 만공 스님 등을 찾아다니며 수많은 선문답을 통해 그의 철저한 견성을 인가받았다.


                1923년 25살 되던 해 덕숭산 금선대에서 만공스님께 인가를 받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뜰을 거닐던 만공스님이 하늘의 별을 보며 ‘하늘에 가득찬 저 별들 가운데 어느 별이 전강 그대의 별인고?’ 라는 물음에 선사는 갑자기 땅바닥에 엎드려 손을 허우적거리며 별을 찾는 시늉을 해 보임으로써 선종 77대 법맥을 잇고 전법게를 받았다.


                佛祖未曾傳       부처님과 조사가 일찍이 전하지 못한 것

                我亦無所得       나 또한 얻은 것 없네.

                此日秋色暮       오늘 가을 빛도 저물어 가는데

                猿嘯在後峰       원숭이 휘파람은 뒷산 봉우리에 있구나.


                근대 선종의 중흥조였던 경허 선사의 오도송에 대한 허물을 지적할 정도로 선지가 밝았던 선사는 지혜 제일이라는 위명을 드날릴 만큼 알아듣기 쉬우면서도 비수처럼 날카로운 선지와 우렁찬 사자후가 느껴지는 법문으로 제방의 눈 푸른 납자들에게 영혼의 눈을 뜨게 하셨다.


                “인생의 무상함은 찰나다. 이 몸으로 다행히 정법을 만났으니 이 생사해탈 참선법을 닦지 않으면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또 알면서 닦지 않으면 더욱 어리석은 것이다. 삭발출가한 수행자는 첫째도 참선이요, 둘째도 참선이요, 셋째, 넷째, 다섯째도 참선이니라. 참선을 열심히 해서 생사대사를 해결하는 것에만 힘쓰는 것이 참다운 수행자다 이 말인 게야. 요새 정진은 게을리 하고서 높은 감투나 쓰려고 덤벙대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 주지네, 부장이네, 원장이네, 그런 감투도 수행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어. 정진들 하란 말여, 정진! 이 뭐꼬! 화두를 참구해서 일대사를 마쳐야 한단 말이네. 다들 알겠는가?”


                선사는 서른세 살에 통도사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 수도암 선원, 동화사 선원, 무문과 등 전국 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말년인 1962년 주안 용화사에 법보선원을 건립하고 주석하시면서 僧 ․ 俗을 가리지 않고 마음을 밝히라는 법문으로 수행자들의 등불이 되셨다. 법랍 61세, 세수 77세 되던 1975년 1월 13일 오후 2시 법좌에 올라,


                如何是 生死苦 인고?             무엇이 생사의 고통인고?

                喝!                                      할!

                九九는 飜成八十一이니라.     구구는 거꾸로 세어도 팔십일이니라.


                라는 법문을 하시고 그 자리에서 열반에 드셨다. 독자적인 가풍으로 경허, 만공스님의 가신 자리를 채워주셨던 이 정신적인 거인의 육신은 이미 바람과 흙으로 돌아갔지만, 형체 없는 법신은 홀연히 성취한 오도적 삶을 중생에게 회향하고자 오늘도 간절히 상주 설법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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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색즉시공 | 작성시간 14.04.03 관세음보살~~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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