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제5칙 설봉의 온 대지
“좁쌀 한 알에도 모든 진리가 다 들어있다”
{벽암록} 제5칙은 설봉의존(雪峰義存 : 832~908)선사의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설봉화상이 대중에게 법문하였다. “온 대지를 손가락으로 움켜서 집어 들면 좁쌀 크기만 하네. 이것을 눈앞에 내던졌지만 새까만 칠통같이 (대중은) 전혀 알지 못하네. 북을 쳐서 전 대중이 노동(普請)이나 참여 하도록 하라.”
擧. 雪峰示衆云, 盡大地撮來, 如粟米粒大. 抛向面前, 漆桶不會. 打鼓普請看.
‘만법은 하나’라는 소식 드러낸 말씀
‘망념 없애려는 것도 망념’ 깨달아야
{운문광록}과 {조당집}을 보면 “북쪽에는 조주가 있다. 남쪽에는 설봉이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설봉이 문하에 1,700명이 넘는 많은 대중을 거느릴 만큼 위대한 당대 최고의 선승이었음을 말해준다.
{벽암록}에 원오선사는 설봉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설봉화상이 대중들에게 ‘온 대지를 손가락으로 움켜서 집어 들면 좁쌀크기만 하네.’라고 법문 하였다. 옛사람이 사람들을 지도하고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행화는 뛰어난 지혜와 방편이 있었으니 참으로 고생하였다. 설봉화상은 투자산(投子山)에 세 번 오르고, 동산(洞山良价)화상을 아홉 차례나 찾아뵙는 수행을 하였다. 그는 물통과 주걱을 들고 가는 곳마다 밥 짓는 소임을 맡아서 수행한 것도 이 생사대사의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설봉화상이 “온 대지를 좁쌀크기만 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신심명]에서 말하고 있는 “만법과 자기와 하나가 된 경지(萬法一如)”를 말한다. 즉 일체의 만법을 자기와 상대하는 존재로 두지 않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경지를 제시하고 있다.
{보장록}에도 {불설법구경}의 일절을 인용하여 “삼라만상은 일법(一法)의 도장 찍힌(所印) 것이다.”라고 하며 “도장 찍힌 것(印)은 근본(本際)이다”라고 설한다. 또한 일법(一法)이란 일심(一心)을 말하는 것처럼, 온 대지를 움켜쥐어 하나의 좁쌀크기로 만들었다고 하는 말은 일체 만법의 근본을 체득하여 자기와 하나가 되고 일체가 되었다는 말이다.
자신과 온 대지나 만법을 대상으로 두고 있는 한 주객의 대립과 상대적인 차별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온 대지나 일체의 만법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일체의 상대적인 대립과 차별심을 초월하여 일체의 만법을 자기 마음대로 활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설봉화상이 ‘온 대지를 좁쌀크기’로 만들었다고 하는 말은 〈화엄경〉의 설법으로 정리하면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논리이다. 온 대지와 만법은 많음(多)이지만 하나(一)이다. 〈법성게〉에서도 “법성은 서로 원융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다.”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의 만법을 근본인 일심(一心)에서 깨달으면 만법(萬法)이 하나가 된 일여(一如)의 경지를 이룰 수가 있다.
불교에서는 일(一), 혹은 제일의(第一義), 제일월(第一月)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일(一) 은 근본이며 본래의 입장을 의미한다. 불법의 근본으로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세계를 초월한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하는 말이다. 반야경전에서 설하는 불이(不二)나 불이(不異) 역시 하나(第一)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이(二)나 이월(二月)은 차별과 분별을 상징하는 중생심에 떨어진 것을 말한다.
조주화상이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萬法歸一)”고 설한 말도 설봉의 법문과 마찬가지 입장이다.
온대지를 움켜쥐고 좁쌀만한 크기라고 말했다는 것은 실제로 온 대지를 좁쌀 크기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불법은 현상법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는 심법(心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말하는 것도 존재하는 모든 것을 텅 비우는 것이 공(空)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사물을 상대하고 있는 자신의 차별심과 번뇌 망념과 착각된 마음을 텅 비워서 일체의 모든 사물에 집착하지 않도록 공(空)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온 대지를 움켜서 하나의 좁쌀 크기로 만든다는 것은 일체의 모든 존재에 대한 상대적인 차별심과 분별심과 집착을 텅 비워 버린 것을 말한다. 번뇌 망념의 마음을 없애고 비우려고 하면 더욱 비울 수가 없다. 비우려고 하는 마음이 번뇌 망념이 되기 때문에 더욱 더 번뇌 망념의 함정에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번뇌 망념을 비우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자신의 불성을 자각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실천을 제시하고 있다. 견성(見性)은 번뇌 망념이 없는 자신의 불성을 깨닫는 수행방법이다. 자각이란 근원적인 불성의 지혜작용을 말하는데, 차별의 세계(만법)에서 본래의 세계(불성)으로 되돌아가는 방향과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마치 번뇌 망념의 숲(중생심)에서 벗어나 편안한 자기 자신의 집(불성)으로 되돌아가는 구조와 같다.
견성의 체험은 한 생각 한 생각(念念)의 자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좌선의〉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라.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면 번뇌 망념은 텅 비워(空) 없어진다.”라고 설하고 있다. 번뇌 망념을 자각하는 일이 불성의 지혜작용이며, 중생심의 차별세계를 초월하여 근원적인 불성의 집으로 되돌아 간 깨달음의 체험이다.
설봉의 설법은 일체의 모든 사물이나 만법을, 자신과 하나가 된 깨달음의 경지를 “온 대지를 움켜쥐니 좁쌀만 하네.”라고 설한 것이다. 일체의 모든 사물과 만법을 설봉이 마음대로 활용 할 수가 있게 된 경지를 설하고 있다.
그래서 설봉은 온 대지를 좁쌀만한 크기로 만들어 대중에게 내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지혜가 없기 때문에 설봉의 법문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
여기서 설봉이 대중에게 던진 행위는 일체의 만법을 대중에게 펼친 방편법문을 말한다. 설봉이 온 대지를 좁쌀 크기로 뭉친 것은 만법을 근본의 일심(一心)에서 깨달아 자기자신의 지혜로 만든 것이며, 대중에게 던진 것은 자신이 체득한 불법의 근본정신을 대중들에게 펼쳐 보인 자비심인 것이다. 설봉이 이렇게 온 대지의 만법을 자기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구족했기 때문에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실행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설봉의 법문 내용과 보살행의 자비심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설봉화상은 북을 쳐서 대중들에게 모두 노동(普請)에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노동은 당대 선원의 독창적인 종교운동의 하나다. 전 대중이 의무적으로 공동 노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규정을 {선원청규}에 두고 있다. 선원의 노동은 자급자족의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일임과 동시에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인 노동력을 생산에 참여하여 대중과 함께 나누는 보살행으로 실행되었다. 따라서 선원의 보청(普請)은 단순한 육체노동이 아니라 신심을 하나(萬法一如)로 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체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실행하는 일이다.
설봉화상은 대중들을 노동에 참여하도록 한 것은 설봉이 설법한 내용을 본인들이 직접 체험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즉 땅을 파는 노동을 하면서 온 대지를 각자 자기 마음대로 직접 활용하는 체험을 하도록 한 것이다. 불법은 법당에서 제시한 이론이 아니다. 지금 여기 자신의 지혜와 육체적인 노동력으로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의 일을 하면서 전개해야 하는 생활의 지혜인 것이다.
벽암록 제6칙 운문의 날마다 좋은 날
매순간 깨달음의 삶 살아가면 ‘날마다 행복’
{벽암록} 제6칙은 운문(雲門文偃 : 864-949)화상의 “날마다 좋은 날”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유명한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운문화상이 대중들에게 설법하였다. “15일 이전의 일에 대해서는 그대들에게 묻지 않겠다. 15일 이후에 대해서 한 마디(一句) 해 보아라.” 스스로 자신이 말했다. “날마다 좋은 날이지(日日是好日)!”
擧. 雲門垂語云, 十五日已前不問汝, 十五日已後道將一句來. (自代云), 日日是好日.
귀중한 인생 허비하지 않으려면
‘지금여기’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당송대의 선원에서는 주지가 법당에서 대중들에게 정기적으로 설법하는 것을 상당(上堂), 혹은 시중(示衆)이라고 한다. 선원의 주지 설법은 1일, 5일, 10일, 15일, 20일, 25일 실행된 상당 법문을 대참(大參)이라고 하고, 또한 아침저녁에 수시로 설법하는 것을 소참(小參)이라고 한다.
주지가 법당에서 대중들을 위해서 설법하는 것은 중생교화의 보살행으로 학인들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도록 하는 전인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운문의 법문도 15일 실시하는 정기설법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운문이 말하는 ‘15일 이전’과 ‘15일 이후’는 한달을 반으로 나눈 중간인데, 마침 15일은 정기 설법으로 상당법문이 있었기 때문에 이 15일을 기준으로 하여 학인들의 안목을 점검하는 문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15일 이전은 지난 과거가 되기 때문에 지난 일을 생각하는 일은 쓸데없고 무의미한 일이다. 그러나 15일 이후는 자신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 수행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분명한 방향과 방법을 제시 할 수가 있어야 한다.
“그대들은 각자 자신이 체득한 지혜의 안목으로 한 마디(一句) 말해 보아라!”라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한 마디(一句)는 불법의 대의를 언어 문자의 개념으로 상대적인 차별심과 분별심으로 설명하는 이론이 아니라 근원적인 본래심의 지혜로 깨달음의 경지를 이루는 한 마디를 말한다. 불법의 교리나 정신에 대해서 지식으로 설명하거나 이론적으로 제시할 수는 있어도, 한 마디(一句)로서 깨달음의 경지를 만들어 살 수 있는 지혜로운 말을 제시한다는 것은 불법을 완전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운문의 문하에 모인 대중들도 운문의 문제제기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운문이 스스로 대답한 일구(一句)가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다. 운문이 말하는 ‘날마다 좋은 날’은 그냥 매일 매일 즐겁고 보람되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불법의 대의와 사상은 의미 없는 종교가 된다.
불법의 정신을 모르고 사바세계에 사는 평범한 인간의 일상생활이 날마다 좋은 날이 될 수가 있는가? 날마다 좋은 날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은 날이 자기에게 닥쳐오기를 바라는 요행이 아니라 좋은 날을 만들어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능력과 지혜를 체득하도록 제시하고 있는 법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날마다 좋은 날이 될 수 있는가? 매일 좋은 날로 만들어 살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방법과 불법의 정신을 체득하지 못하면 이 법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야기로 끝난다.
15일 이전과 15일 이후는 한달을 반으로 나눈 중간 날짜임과 동시에 우리들의 삶을 살고 있는 매일이다. 한달은 하루하루의 연속이며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고 있지만 시간은 물과 같이 연속된 것이기 때문에 쪼개고 나누어 토막을 낼 수가 없다.
사실 한달이나 하루는 ‘지금’이라는 한 순간(一念: 刹那)의 연속시간이다. 따라서 좋은 하루를 만들며 살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 이라는 시간을 좋은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사실 불교는 시간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나 자신을 비롯하여 가족과 이웃, 좋은 친구나 많은 것들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무상(無常)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선불교에서 말하는 생사대사(生死大事) 혹은 일대사(一大事)는 무상에 관련된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도록 함과 동시에 소극적인 대응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입장에서 지혜로 극복할 수 있는 실천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를 좋은 날로 살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는 시간을 좋은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좋은 시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불교의 정신에서 보면 깨달음의 경지에서 창조적인 삶을 사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바세계의 삶이 무상(無常)하고 괴롭고(苦) 자아의 영원한 존재가 없는 무아(無我)이고, 탐.진.치 삼독과 오욕에 물든 더러운 예토(穢土)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반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사는 법신의 삶은 번뇌 망념의 나고 죽음이 없는 불변의 세계(常)에서 항상 법희(法喜)의 즐거움(樂)이 있고, 자신의 청정한 불성의 지혜작용을 청정한 법계(淨土)에 두루 지혜의 광명으로 비추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을 좋은 시간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각자 자기자신이 주인이며 주체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경전에서는 ‘불성’, ‘여래장’, ‘진여자성’, ‘청정심’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선불교에서는 평상심, 본래심, 주인공, 진인(眞人), 본래인(本來人) 등으로 불린다. 사물에 집착하고 삼독심에 떨어진 범부의 중생심이 아니라, 일체의 번뇌 망념을 초월한 깨달음의 주체를 말한다.
따라서 날마다 좋은 날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 자기가 깨달음의 본래심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 하는 일에 몰입해야 한다. 우리들의 삶을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에 교차되는 곳에 살고 있다. 자신이 있는 여기라는 공간을 바꾸고 옮길 수가 없으며, 또한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을 미리 끌어당겨서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불교에서는 시절인연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일이란 육체적인 일과 정신적인 일로 나눌 수가 있는데, 가장 절박한 숨쉬는 일에서 육체를 움직이는 일(行住坐臥 語默動靜),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일, 노동을 하는 일, 매사 인간은 일을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인간의 삶이란 바로 자신의 일인 것이며, 일과 삶은 같은 말이다. 또한 정신적인 일은 일념(찰나) 일념에 번뇌 망념이 일어났다가 없어지는 생멸(生滅; 生死大事)의 일을 비롯하여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기 위해 경전을 읽고 사유하는 지혜작용의 일 등 한순간도 일이 아닌 것이 없다.
인간은 일을 통해서 자신의 위대한 보살도의 삶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일을 깨달음의 지혜로운 일이 되도록 하라’고 법문을 하고 있다. 자기의 일에 몰입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본래심으로 삼매의 경지에서 실천하도록 제시한 법문이다. 조사선의 참선은 언제 어디서나 일상생활하는 가운데 깨달음의 지혜로운 생활이 되도록 하는 생활종교이다. 임제가 “자신이 곳에 따라서 주인이 된다면 자신이 있는 그곳이 깨달음의 세계가 된다.”라고 설했다.
‘날마다 좋은 날’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운문의 설법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사람이 일상생활속에서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깨달음의 지혜로 위대한 보살도를 실천하도록 제시한 법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