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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 교 와 영 상 ┃

[스크랩] 전도선언

작성자어질이|작성시간07.12.06|조회수99 목록 댓글 0
전도선언

 

“모든 이들의 이익.안락을 위해 길을 떠나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의미와 문장을 갖춘 법을 설하거라”


부처님이 바라나시로 간 목적은 성취됐다. 다섯 비구는 아라한이 됐고, 야사와 친구 등 54명의 귀의로 승단도 구성됐다. 야사의 아버지.어머니는 삼귀의(三歸依)에 의한 최초의 재가 남.여신자가 됐다. 불교를 구성하는 세 가지 보배인 부처님, 부처님 가르침, 승단이 완벽하게 바라나시에서 이뤄진 것이다. 부처님은 자신감도 얻었다. 이 세상에 설법을 듣고 미혹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자신감을 얻은 부처님은 마침내 제자들과 세계를 향해 당당하게 외쳤다.


“나는 하늘과 인간의 모든 그물을 벗어났다. 비구들아! 그대들도 천신과 인간의 모든 그물을 벗어났다. 비구들아! 길을 떠나거라. 여러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동정하여, 인간과 천신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마라.


비구들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의미와 문장을 갖춘 법을 설하라. 아주 원만하고 청정한 행을 드러내 보여라. 세상에는 마음에 먼지와 때가 적은 자도 있다. 그들이 법을 듣지 못한다면 쇠퇴할 것이지만, 법을 듣는다면 잘 알게 되리라. 비구들아! 나도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나니 마을로 가야겠다.”


부처님의 전도선언(傳道宣言)으로 불리는 이 대목은 〈마하박가〉, 〈쌍윳따니까야〉 4:1, 〈잡아함경〉 ‘승색경’ 등 여러 경전에 보인다. 자세히 보면 전도선언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됐음을 알 수 있다.


첫 부분은 전도의 정신을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가 그것이다. 중생구제(衆生救濟)는 불교의 목적이다. 그것이 이 전도선언에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다. “사실 싯다르타는 중생구제를 위해 출가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는 것처럼, 싯다르타는 자신의 인생문제를 해결하고자 집을 나섰다. 물론 싯다르타의 출가가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제한 셈이 됐고, 지금도 그렇지만 ‘중생구제’가 싯다르타의 출가 이유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 초기불전들을 유심히 읽어보면 이 전도선언 이전에 중생구제라는 말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문제 해결이 싯다르타의 출가이유였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그런데 바라나시에서 첫 설법에 성공하고, 자신의 설법을 들은 사람들이 개안(開眼)하자 한 때 자신을 괴롭혔던 번뇌가 사실은 모든 중생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중생구제를 본격적으로 선언한다. “그대들은 천신과 인간의 모든 그물에서 벗어났다. 여러 사람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비구들아 길을 떠나라. 세상을 동정하여, 인간과 천신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는 대목은 단순히 전도의 정신이 아니라, 불교의 존재목적이 됐다.


전도선언 첫 부분에서 보이는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마라”는 대목도 주목된다. 이는 〈마태복음〉 10:6에 보이는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 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말과 너무나 다르다. 그리고 〈마가복음〉 6:7에 보이는 “열두 제자를 불러 둘 씩 둘 씩 보냈다”는 기록과도 배치된다. 부처님의 전도선언과 〈마태복음〉.〈마가복음〉의 선교(宣敎)양상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박해받을 일이 아니고, 오직 천신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길을 떠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마라”고 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불교가 세계로 전파되면서 분쟁과 전쟁, 학살이 벌어진 적은 한번도 없다. 반면 기독교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이를 두고 두 종교의 우열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수 천 년에 걸친 불교의 역사를 봐도 불교는 환영을 받았지, 박해받은 적은 없었다. 불교라는 거대한 나무 아래 다른 사람의 피를 바친 적도 거의 없었다. 이것이 전도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전도선언에서 주목되는 두 번째 것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의미와 문장을 갖춘 법을 설하라. 아주 원만하고 청정한 행을 드러내 보여라”는 부분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 남을 속이거나, 다른 사람의 피를 요구하거나, 다른 가르침을 비판하지 마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은 후일 ‘초중종(初中終)의 선(善)’으로, “의미와 문장을 갖춘 법을 설하라”는 ‘의문구족(義文具足)’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부분 특히 예수가 열 두 제자를 보내며 말했다는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이를 고치며, 죽은 이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라.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마라. 그때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다.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의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는 대목과 비교된다.


“성령에 충만해 권위 있는 말을 하라”는 예수와 달리 부처님은 처음과 중간과 결말을 일관(一貫)하여 잘 설할 것을 제자들에게 요구했다. 청중의 감정을 뒤 흔들며 가르침을 펴는 것보다 고요한 어조로 담담하게 대중들에게 설명해 주라고 요구했다. “이론과 내용을 가지고, 이성(理性)을 향해 호소하라”고 제자들에게 강조한 것이다. 때문에 이 부분은 부처님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전도선언에서 세 번째로 주목되는 것은 “나도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나니 마을로 가야겠다”는 부분이다. 우루벨라의 세나니 마을은 부처님이 대각을 성취한 곳이다. “그곳에는 많은 고행자와 수행자들이 있다. 그런데 내가 도를 이룬 그곳에는 아직도 가르침이 하나도 퍼지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 가르침을 설하리라”는 의미가 함축적으로 들어있다.


그러면 부처님은 왜 보드가야 근방에서 첫 가르침을 펴지 않았을까. 자신의 가르침을 이해할 사람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범천의 권유를 받고 첫 설법 상대를 물색하던 부처님은 알라라 칼라마와 웃타카 라마풋타를 찾았으나, 그들은 이미 죽었다는 소리를 천신(天神)으로부터 듣는다. 그래서 다섯 비구를 찾아 바라나시까지 갔다. 바라나시에서 목적을 성취하고, 설법에 자신을 얻었기에 다시 보드가야로 돌아가 그곳에 있는 수행자들을 교화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전략적인 포교’라 할 수 있다. 아마 보드가야 부근에서 첫 설법을 했다면 부처님은 낙담(落膽)했으리라. 바라나시로 가던 길에서 만난 아지비카파 소속의 수행자 우파카의 예가 이를 증명한다. 부처님의 말을 듣던 우파카는 “그럴 수도 있겠네요”하고는 가던 길을 계속 가버렸다.


한편 제자들에게 전도선언을 한 부처님은 보드가야로 출발했다. 가던 도중 숲 속에 들어가 나무 밑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 때 30명의 지체 높은 무리들이 부인을 데리고 그 숲에서 마침 휴흥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명은 부인이 없어 기녀를 데리고 나왔다. 모두들 술이 취하자 기녀는 재물을 가지고 도망가 버렸다. 무리들이 이리 저리 기녀를 찾다 부처님을 발견하고 물었다.


“한 여인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내막을 들은 부처님이 그들에게 말했다. “젊은이들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대들에게 어떤 것이 더 중요하냐? 그대들이 찾고 있는 여인이냐, 아니면 그대들이 찾아야 할 자아(自我)냐?” “저희들이 찾아야 할 자아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젊은이들아 앉도록 해라. 그대들을 위해 법을 설하겠다.”


부처님은 그들을 위해 법을 차례로 설명해 주었다. 마치 때 없는 흰 천이 잘 염색되듯이 그들은 그 자리에서 먼지와 때를 멀리 여읜 법안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았다. 그들은 의심에서 벗어났고, 망설임이 제거됐고, 두려움이 없었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은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이 부처님께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저희들은 부처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오너라, 비구들아.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이렇게 그들은 구족계를 받았다



▲ 전도선언의 역사적 의의


특정집단 아닌 全인류 대상

개방적인 종교 강령을 선포


불교는 누구를 위한 가르침일까. 당연히 모두를 위한 가르침이다. 전도선언에 이것이 잘 드러난다. 사실 불교는 특권을 가진 엘리트들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다. 민중을 위한 종교이며, 중생을 위한 종교다. 부처님 당시엔 상인계급과 지식인들에게 호소력이 강한 것이 사실이지만, 원칙적으로 불교는 누구에게나 다 열려 있었다. 불교는 어떤 카스트도 배척하지 않았다. 수드라라고 불가촉천민이라고 멀리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인도했다.


따라서 부처님은 역사상 처음으로 특정한 집단이 아닌,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종교적 강령을 구상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전도선언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불교는 우파니샤드처럼 비의적(秘義的)인 가르침이 아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도시에, 새로운 대도시에, 무역로 주변에 나와 있었다. 곳곳에서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승단(상가. 비구상가)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먼지와 때를 완전히 여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상가에 가담한 사람은 이제까지 잠들어 있던 인간성의 영역 전체에 눈을 떤 사람들”(카렌 암스트롱)로 평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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