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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상대주의/ 윤리적 절대주의

작성자수성|작성시간09.03.10|조회수7,282 목록 댓글 0

Ⅰ.윤리적 상대주의

1.의의

윤리적 상대주의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보편타당하게 적용되는 도덕 원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도덕 규칙은 모두가 문화나 개개인의 기호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견해이다.


2.문화적 상대주의

(1)문화적 상대주의 의의

문화적 상대주의는  서로 다른 문화권은 그 나름의 도덕적 규범을 가지고 서로 다른 사회에서는 다른 관습이 존재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따라서 문제의 발생 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할 경우 독립적인 표준이 존재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에스키모 인들은 성적 관습의 측면에서 현대 사회의 보편적 관습과 차이를 보인다. 그들은 1명 이상 부인 가능하며 손님에 대한 환대의 의미로 손님을 자신의 부인과 동침시킨다. 자신의 공동체안의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남자는 다른 남자의 부인과 정규적 성적 접촉 요구 가능하다. 그리고 부인은 부부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파트너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2)문화상대주의의 관점

문화적 상대중의에서는  모든 것이 어떤 절대적 표준에 기반 한다는 관점을 갖지 않는다.

 우리 관습 중 많은 부분이 문화적 산물에 불과함을 지적하며 식인, 젖가슴 노출 등 그 자체의 존재를 인정한다. 또한 문화적 상대주의에서는 독단주의를 배제하는데 이는  우리의 도덕관이 사회적 편견일 수 있음과 우리의 규범이 사실은 최선이 아닐 수 있음을 의미 한다.즉, 우리에게  윤리적 겸손을 가질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3)베네딕트의 예시

1)소비에 대한 문화적 차이

케나다 벤쿠버 섬의 원주민인 크와키우들 족은 자신의 지위와 경쟁관계에 있는 부족을 초대하여 다량의 귀중한 선물을 제공하여 자신의 세력을 과시한다. 그 보복의 유일한 방도는 분에 넘치더라도 자신들이 대우받은 정도 이상으로 답례하는 포틀레취를 개최하는 것이다.


말라야 지역의 세마이 족들은 사냥에 탁월한 사람이 자신의 포획물을 같이 간 동료들에게 균등하게 배분하여 평등주의를 실현키고 과도한 형태의 사치와 선심을 경계하고 배격한다.


2)문화적 차이에 따른 암소 숭배와 돼지 혐오의 사례

인도의 힌두교인들은 암소를 생명의 모체로 간주하여 숭배한다. 고대 인도에서 수소는 희생하고 그 고기를 먹었지만 우유를 생산하는 암소의 도살은 금했는데, 〈리그베다〉의 게송은 암소를 데비('여신')라고 부르고 아디티('신들의 어머니')와 동일시한다. 기원후 수세기 동안에는 소를 죽이는 것이 브라만(4계급 가운데 최고인 사제계급)을 죽이는 죄와 같았다. 소를 어느 정도 숭배하는지는 정화의례와 극도의 참회의례에 판차가비아, 곧 소의 5가지 산물(우유·응유·버터·오줌·똥)이 쓰인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특히 10세기 이후로는 전설적인 크리슈나의 생애에서 목가적 요소가 중요해지면서, 소의 신성화가 더욱 강조되었다.


반면 유태인과 이슬람교도는 돼지를 불결한 동물로 간주하여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대신 소를 잡아먹는다. 이 때문에 인도인과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인도인의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3)여아 살해에 대한 도덕적 평가

뉴기니아 비스마르크 산맥에 살고 있는 마링 족은 여아 살해를 허용하고 있다. 마링족과 같이 문명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부족의 경우 성인 남녀의 비율은 비슷하거나 여성이 더 많지만 소년과 소녀의 비율은 150대 100의 수치로 나타난다. 이는 태어날 떄 남년가 동수였던 유아 분포비율이었으나 성장해나가면서 여아의 1/3 정도가 죽는다는 것이다.


화전일구기(10년)-10년간 휴경-그동안 돼지를 여자가 사육-여성의 불만고조-돼지축제를 통해 수를 줄이기-이웃부족간의 전쟁-남성비율 축소-전쟁에 대비하여 인위적인 여야 살해


(3) 문화 상대주의의 문제점

1) 논리적 문제

문화적 상대중의는  논증 구조가 다음과 같다.


(전제) 다른 문화들은 각각 다른 도덕적 규범을 가지고 있다.

(결론) 따라서 도덕에는 어떤 객관적인 진리도 없다. 옳고 그름은 단지 견해상의 문제로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이다.


이런 논증의 문제점은 전제에서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 전제는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것(서로 믿음이 다르다) 이고 결론은 사실에 대한 것(보편적 도덕이 없다)이어서  의견이 다르다는 사실에서 객관적 진리가 없다는 결론은 나올 수 없다.

예를 들어 천동설과 지동설이 대립한다고 거기서 객관적 진리가 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 없다.


2)내용적 문제

문화적 상대주의에 따르면 첫째, 사회들 사이의 관습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즉, 문화 상대주의의 중요성 주장을 하다보면 식인, 노인의 인위적 죽음,노예의 죽음  등  비인간적 관행에 대해서도 비판이 불가능하다.

둘째, 문화적 상대주의에 따르면  도덕의 진보라는 생각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과거의 역사를 돌아볼 때  여성의 지위 향상은 도덕적 진보의 개념에 속한다.

이런 진보 개념은 동일한 표준을 전제하므로 상대주의에서는 불가능하다. 이런 논리를 따르면  사회 개혁이라는 개념도 불가능하며  ‘나은 방향으로’ 개념자체의 사고가  불가능하게 된다.


3) 근본적 문제

문화적 상대주의는  구체적인 규범의 차원과 근본적인 도덕 원리 차원을 혼동하기 쉽다. 왜냐하면 근본적 도덕원리는 동일하거나 유사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도인들은 소를 먹지 않는 풍습이 있는 이는 그들의 종교인 힌두교에 따라 소로 태어난 인간영혼에 대한 숭배의식 때문이다. 이런 관습의 차이를 도덕적 가치관의 차이로 보는 것은 문제가 된다. 어떤 집단이 처한 물리적 환경, 종교적 환경의 차이로 누구나 그 환경에 처하면 그럴 수 밖에 없는 당위적 환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스키모 인들이 유아살해를 허용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는데 그 배경을 살펴보면 영하40도 이하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장기간 영아에 대해 수유를 할 수 없고 이동이 잦은 상황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좀 더 높은 영아를 집중적으로 관리하여 키우자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또한 여야 살해를 선호하는 이유도 남자들이 집단에서 식량을 공급하고 이런 과정 속에서 남자의 사망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다른 문화적 관습을 허용하다 보면 사회의 존립 자체를 위해 필수적인 규칙들이 존재하는데 이를 무시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즉, 각기 다른 생활환경 속에서도 지켜져야 하는 보편적인 도덕가치의 존재를 인정하기 어렵게 된다.


3.개인적 상대주의

(1)소피스트의 회의주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의 척도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의 척도이다. 실재를 판단하는 것은 즉 어떤 것이 존재하며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각 개인이다. 그리고 이 개인의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척도, 즉 기준이나 표준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경험과 신념은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자신의 경험이나 신념과는 전혀 무관하게 어떤것이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을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러한 기준에 의해서 측정된 것이 아닌 다른 어떤 실재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다. 결국 어떤 것들이 나에게 나타나는 대로 그것들은 당신에게 는 그렇게 존재하며, 어떤 것들이 당신에게 나타나는 대로 그것들은 당신에게는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소피스트들은 그들의 회의주의로 인해 도덕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즉, 1) 도덕률이란 각각의 공동 사회에 의해 임의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그 사회에 내에서만 적합성과 권위를 갖는다.

2) 도덕률은 비자연적인 것이므로 그것들에 복종하는 것은 사회적 압력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행위가 은밀히 이루어질 수 있다면 '선'한 사람들조차도 그 도덕률을 추종하지 않을 것이다.

3) 정의(正義)의 본질은 권력이며 '힘이 곧 정의이다.'

4) '선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그 삶이 즐겁고 유쾌한 삶이라는 제안 외 달리 타당한 설명이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었다.


소피스트의 대표자인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모든것의 척도이다”라고 하였고 고르기아스는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소피스트들의 주장은 인간의 감각적 경험과 유용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상대론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즉 절대적이고 보편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각 개인에 따라서 진리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4.윤리적 주관주의


(1)윤리 주관주의의 의의

윤리 주관주의는 도덕성이 가치를 평가하거나 도덕적 평가를 하는 개인의 눈 속에 있다고 함으로써 도덕을 개인의 기호나 취향의 문제로 돌리는 입장이다. 즉 도덕적 옳고 그림이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도덕성이 개인의 정서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2)윤리적 주관주의의 철학자


1)웨스터 마스터-인간의 정서 강조

인간의 도덕적 의식은 궁극적으로 정서에 근거해 있고 개개인의 정서적 감정은 각자 다르기 때문에 도덕적 판단이 객관적일 수 없으며 도덕적 가치가 절대적일 수 없다. 도덕적 판단의 근거는 사회적 찬성이나 거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찬성이나 거부에 있다고 해야 한다.


2)니체의 도덕관-계보학

도덕적 가치는 어디서 유래하는가? 도덕적 가치는 인간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역사단계에서 어떤 특정한 유형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특수한 가치일 뿐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이러한 방법을 계보학이라 일컫는다. 우리는 어떤 사건에 대한 원인을 찾자마자 그 원인에 대한 원인을 묻는 습관이 있다. 기원에 대한 연쇄적 질문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존재 즉 신의 도입을 초래한다.

 계보학은 이러한 접근 방식을 거부한다. 계보학은 사건의 발생 시점에서 시작하여 그것의 역사적 전개를 살펴봄으로써, 그 사건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 존재의 출현을 막아낼 수가 있다. 더욱이 그것은 그 사건의 발생의 시점에서의 필연성을 부정함으로 해서, 지금까지 그것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던 지배 권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고도의 정치 권력의 문제와 연계되는 것이다. 

도덕을 떠나 도덕을 조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도덕은 공동체를 어떤 수준, 어떤 질로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즉 관습은 한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것, 해가 되는 것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나타내며 그 관습은 세월이 흐르면서 공정화, 불변화 되면서, 관습의 기원은 차츰 망각되고 관습의 외면적 형식은 보다 공고해진다. 관습으로서의 도덕은 관습 그 자체가 도덕이 되었다는 것보다, 그것에 대한 복종의 감정에서 도덕이 연유했음을 말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즉 우리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복종하는 고도의 권위가 도덕이다.

따라서 관습에서 유래한 도덕은 보편타당한 원리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집단이 개인을 굴복시키기 위한 강요로 생겨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강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로운 복종, 거의 본능이 되기에 이른다. 그러면 그것은 쾌락(Lust)과 결부되어 그 때부터 미덕(Tugend)으로 불리게 된다.   

 니체는 도덕의 보편성 비판에 이어 도덕의 절대성을 비판하고 있다. 즉 니체에게 있어서 도덕은 어떤 절대적, 신적 영역으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라, 모든 다른 현상과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다


3)흄-자아 동일성의 중요성

형법250조에 의하면 사람을 살해한자는 일정한 형벌을 받음을 규정하고 있다.A라는 사람이 타인을 살인을 하던 B라는 사람이 타인을 살해 하더라도 형법이라는 획일적인 기준에 의해 처벌을 받고 일정한 사회적 동일성을 유지한다.

흄은 이런 동일성을 도덕과 개인의 자아와 연관하여 생각을 하였다. 한 인격의 자기 동일 성이 유지 되지 않는다면 즉 시간마다 다른 인격을 가진다면 한 인간에 대한 도덕적 비난이나 종교적 ,법적 심판이 무의미해진다.

 악덕이라고 간주되는 어떤 행동을 살펴보자. 예를 들어 의도적인 살인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살인을 모든 측면에서 살펴보고 당신이 악덕이라고 부를만한 어떤 사실이나 혹은 실재하는 것이 있는지 탐구해 보라. 어떤 방식으로 살펴보든지 당신은 오직 어떤 정념들, 동기들, 의지들, 그리고 생각들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어떤 사실(matter of fact)은 없다. 당신이 대상을 살피는 한 당신은 악덕을 발견할 수 없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마음속을 반성해보고 그러한 행동에 대하여 당신 안에서 발생하는 불승인의 소감을 발견할(find) 때까지는 결코 악덕을 발견할 수 없다. 여기에 사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느낌의 대상이지 이성의 대상은 아니다. 악덕은 대상 안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속에 놓여 있다. 따라서 당신이 어떤 행동 혹은 어떤 인격적 특성(Character)이 악덕이라고 말할 때, 당신은 그것을 고려해 본 결과 당신의 본성적인 구조로부터 비난의 소감 혹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덕과 악덕이 우리들 "마음 밖의 대상"에, 즉 평가의 대상이 되는 행동 안에 있는 어떤 사실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 안에" 있는 "사실"들은 도덕적 구분의 근거가 된다. 우리는 우리들이 어떠한 소감을 가지고 있는가에 근거해서 도덕적 선과 도덕적 악을 구분한다. 우리들이 어떠한 소감을 가지고 있는가가 도덕적 선과 악을 분별하는 기준이 된다. 우리들이 우리 마음밖에 있는 대상을 살피는 한, 우리는 도덕적 선과 악을 발견할 수 없지만,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우리가 어떤 소감을 갖고 있는지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발견할(find)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덕과 악을 구분하게 되는 것이다. 흄이 여기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도덕적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하는 사실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선과 악을 분별하도록 하는 사실은 평가의 대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가를 하는 우리의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이다.


(3)윤리적 주관주의 문제

윤리적 주관주의는 ‘너도 옳고 나도 옳다.’라는 식의 도덕적 유아론에 빠짐으로써 도덕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도덕적 판단이 너와 나의 개인적인 도덕적 감정에 근거하고 있고 그 개인의 감정은 본래 다르기 때문에 개개인 상호간의 공동 기준을 마련할 수 없다. 이로 인해 나는 옳지만 너는 그르다는 도덕적 비판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5.규약적 윤리 상대주의


(1)규약적 윤리 상대주의 의의

규약적 윤리 상대중의는 문화마다 관습이 달라서 도덕적 평가가 다르며 도덕 자체가 문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 모든 사회에 타당하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윤리적 상대주의다. 그러나 타당한 도덕 규칙은 그 규칙이 적용되는 특정 문화 속에서 관습이나 개개인의 규약적 동의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개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관주의와 다르다. 도덕은 사회문화에 상대적인 것으로서 전적으로 사회의 산물이며 도덕은 그것을 낳은 문화를 넘어설 수 없다.

 

(2)규약적 윤리주의 중요논제


①행위의 옳고 그름은 사회마다 다르므로 모든 사회에 두루 적용되는 보편적인 도덕적 표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②개인이 어떤 방식으로 행위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지 또는 그른지의 여부는 그들 각자가 속한 사회에 의존적이다.

③어느 때 어느 장소가 되었든 모든 사람에게 두루 적용되는 절대적인 또는 개관적인 도덕적 표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3)규약적 윤리 상대주의 의 문제점

문화 상대중의 가 참이라고 해도 의존성의 논제에 문제가 많기 때문에 윤리적 상대주의 가 정당화되기 어렵다. 현대와 같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므로 ‘귀어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자유로운 변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 규약적 윤리 상대중의는 도덕을 문화나 사회의 산물로 적락시킴으로써 문화 추월적 관점에서 볼 때 명백히 부도덕한 사람을 도덕적인 사람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셋째, 규약적 윤리 상대주의 는 인류 역사상 위대한 성인을 비롯한 개혁론자를 모두 부도덕한 존재로 전락 시키는 이상한 결과를 초래한다.

마지막으로 규약적 윤리 상대주의가 전제로 삼고 있는 의존성 논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윤리적 객관 주의자를 비롯한 비상대주의자가 약한 문화 의존선성 노제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일부의 문화 상대중의 논의와 양립 가능한 선상에서 윤리적 객관주의나 절대주의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Ⅱ.윤리적 절대주의


1.윤리적 절대주의의 의의

윤리적 절대주의는 상대주의를 넘어서 모든 문화에 보편타당하게 적용할 수 있는 도덕 원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윤리적 절대주의는 어떤 예외적 상황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인 도덕 원리를 주장한다.


2.전통적 윤리학에서의 절대주의

(1)소크라테스


1)소크라테스-지(知) 중요성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지(知)와 덕(德)은 같은 것이다. 만일 덕이 "가능한 한 영혼을 선(善)하게 만드는" 데 관련되는 것이라면,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선과 지(知)는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 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단순히 선과 지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 이상을 말한다. 그는 이 양자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선을 아는 것이 곧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는 덕이며, 덕은 바로 지의 목적인 것이다. 지와 덕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했던 소크라테스는 더 나아가 악덕이나 죄를 지의 부재(不在)라고 주장한다. 지가 덕인 것처럼 무지는 악덕이다. 이러한 추론의 결과로 소크라테스는 어느 누구도 알면서 악덕에 빠지거나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그에 의하면 그릇된 행동은 항상 무의식적이며, 따라서 무지의 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도덕의 의미-인간의 행복 추구

 덕(德)이란 인간의 기능의 완전한 실현이다. 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기능은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행복에 대해 필연적으로 갈망하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선택함에 있어 그 행동이 그를 행복으로 이끌 것이라는 희망을 전제한다. 도둑은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도둑질이 그에게 행복을 줄 것이라는 희망에 따라 도둑질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사람들은 행복의 상징들인 권력, 쾌락, 부(富), 의미, 가치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것들과 참된 행복의 기반을 혼동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인 것이다. 즉 도둑도 자신이 도둑질을 하여 행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절도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2) 플라톤

 1)플라톤의 도덕

플라톤에 있어 도덕(道德)은 인간의 상실된 내적 조화의 회복에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성이 욕망과 육체의 자극에 의해 전도되었던 과정을 다시 역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성은 자아의 비이성적인 부분들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을 회복해야 한다. 악을 낳았던 것이 무지와 잘못된 지식이었기 때문에 단지 지식만이 덕(德)을 다시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행하는지 간에 그 행위가 그들에게 쾌락과 행복을 줄 것이라고 신념 한다. 만약 신념하지 않는 행위가 있다면 그 행위는 육체를 통해 표현되지 않는다.

플라톤에 의하면, 어느 누구도 그 자신에게 해로운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물론 인간은 살인이나 거짓말과 같은 잘못된 행위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그러한 행위로부터 그 자신이 어느 정도의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이 잘못된 지식이며, 인간은 그것을 극복함으로써만이 도덕적이 될 수 있다.


2)이데아의 추구

 도덕적 지식에 있어 인간의 깨어남은 두 가지 방식으로 가능하다.

첫째, 지식이 정신의 기억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면 이 잠재된 지식은 때때로 의식의 표층에 나타난다. 영혼이 한때 간직했던 지식은 상기(想起)의 과정에 의해 재인식될 수 있다. 상기는 무엇보다도 정신이 감각적인 경험의 모순들로 곤경에 부딪히게 될 때 시작된다. 누군가 다양한 사물들의 이치를 깨달으려 노력할 때 그는 사물들 그 자체로부터 이데아들에로 "비상(飛上)"하기 시작한다. 정신은 해결할 필요가 있는 난제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둘째, 동굴의 비유에서 플라톤은 어떻게 인간이 어둠으로부터 밝음에로, 무지로부터 지식에로 이동하는가를 묘사한 바 있다. 거기에서 그는 죄수들이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분위기를 그리고 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죄수라는 사실도, 그들이 그릇된 지식에 속박되어 무지한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그들의 각성을 위해서는 어떤 외적 요인이 필요하다. 플라톤에 의하면 "죄수가 사슬로부터 풀려나 자신의 무지를 치료하려면 그를 누군가 우선 강제적으로 일으켜 뒤로 돌려서 눈을 쳐들고 빛을 향해 걷게 해야 한다." 즉 누군가 죄수의 사슬을 풀고 그를 돌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도덕적 발전은 그의 지적 상승과 평행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점증하는 지식은 진·선·미의 이데아에 대한 그의 사랑을 보다 깊게 해준다는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3)아리스토텔레스 - 최고선이 목적


1)목적의 지향-행복추구

모든 행동은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그는, 목적을 두 종류로 구분하였다. 하나는 ‘도구적’ 목적(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행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본래적’ 목적(그 자체를 위해 수행되는)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동은 그것에 적합한 목적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이러한 목적들은 비록 가치는 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선을 결코 달성할 수 없다. 궁극적인 목적이 되기 위해서 하나의 행위는 “자족적”이며 “최종적”이어야 하는데, 그러한 행위는 “항상 그 밖의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이며”, 그것은 또한 인간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야말로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2)도덕적 행위의 요건

①올바른 사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도덕적 행위는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어떠한 것도 자연적으로 그것의 본성과 대립되는 습관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은 습관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올바르게 사유하는 습관, 올바르게 선택하는 습관, 올바르게 행동하는 습관이 도덕의 발전을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②인간의 책임의식

도덕성과 도덕적 선택은 인간의 책임 의식을 전제로 한다. 만일 어떤 행동 양식은 바르고 어떤 행동 양식은 그르다면, 왜 어떤 인간이 올바른 방식 대신에 잘못된 방식으로 행위 하는가의 이유를 밝히는 것은 필수적이다. 만일 우리가 칭찬을 하거나 비난한다면, 다시 말해 덕을 찬양하고 악덕을 비난할 수 있다면, 인간은 실로 진실 되게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정에 따르면, 어떤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행위는 “자발적인” 행동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비자발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그 정상이 참작되며, 때로는 동정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자발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칭찬과 비난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자발적인 행위와 비자발적인 행위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에 의해 구분된다고 한다.

즉 “비자발적인” 행위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 의해 책임이 없다. ① 그 행위는 특수한 상황들에 대한 무지에서 행해졌다. ② 혹은 외적 강제의 결과이다. ③ 혹은, 더 큰 죄악을 피하기 위해 행해졌다. 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자발적인” 행위의 경우는 행위자에게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그 행위는 위의 세 가지 조건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3.윤리적 객관주의


(1)윤리적 객관주의 의의

한 도덕 원리가 보편적으로 타당하게 적용되지만 예외적 상황에서 또 다른 도덕 원리에 의해 유보될 수 있음을 허용 한다. 윤리적 객관주의는 언제 어디에서든지 보편타당하게 적용되는 도덕 원리가 존재함을 승인하지만 그 도덕 원리가 상황에 따라서는 다른 도덕 원리에 의해 유보될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 예를 들면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 원리는 “긴박한 도움의 손길을 뿌리쳐서는 안 된다”는 다른 도덕 원리에 의해 유보될 수 있다. 이때 객관주의가 상대주의와 다른 점은 유보가 소멸은 아니라는 점이다. 시행해야할 것이 일시 유보 되었다면 다시 시행하거나 시행하지 못한 데 따른 보상이나 배상이 이루어져야 함을 뜻한다.


(2)윤리적 객관주의와 절대주의와의 차이

윤리적 객관주의의 원리는 “살인을 하지 말라”라는 명제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윤리적 절대주의자들은 원리를 준수해야한다고 여지며 마링 족의 여아살해는 허용 될 수없는 반도덕적인 행위가 된다. 이 입장에서는 어떤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객관주의자는 “살인하지 말라‘는 도덕원리가 어떤 문화권에서도 준수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마링 족의 여아살해에 대해 그것이 반도덕적이라고 비난하며 결과적인 면에서는 절대주의와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살인하지 말라“의 예외를 허용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 두 입장의 차이가 드러난다. 예를 들어 괴한이 침입했다고 가정해보자. 괴한이 나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고 할 때 괴한을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괴한을 죽여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만약 죽였다면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하는가? 윤리적 절대주의 입장에 따르면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야한다. 하지만 윤리적 객관주의 입장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이 입장에 따르면 어떤 도덕 원리도 어떤 상황에서 그 시행이 다른 원리에 의해 유보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4.윤리적 절대주의

문화 초월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 도덕 원리의 적용이 어떤 예외도 호용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그 절대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윤리적 객관주의와 구분된다.

예를 들어 사회에서 고려장이란 풍습이 나타나는 원인 중에 하나는 유용성의 원리를 들 수 있다. 어떤 사회가 생산기술과 생산량이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노인이 생산성의 증진에기여하지 못하거나 장차 생산성을 지닌 사람들의 생존에 장애가 된다면 고려장을 허용한다. 즉 생산능력의 부족으로 노인의 인위적 죽음을 허용하는 도덕규칙을 승인하는 것이다. 이런 유용성의 원리는 근원적 원리로 한 사회에서 고려장을 허용하고 다른 사회에서 고려장을 허용하지 않는 구체적 도덕 규칙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경우 모든 문화에 걸쳐 보편 타당하게 적용되는 도덕 원리가 있다고 해야 한다.


5.공리주의에서 유용성의 원리

1)공리주의의 내용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영국은 자본주의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경쟁과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세계관이 요청되었는데 J Bentham이 창안하고 J S Mill에 의해 발전된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사회의 기본원리를 오직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서 구하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가 얼마만큼의 악(惡)을 산출할 것인지를 생각해서, 선(善)에서 악을 뺏을 때 가능한 최대의 선을 산출할 수 있도록 행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리주의는 이기적인 개인이 자기중심적 관점을 넘어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2)공리주의와 유용성의 원리

오늘에 이르러 공리주의는 실용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와 결합하면서 가치 기준을 넘어 사회를 지배하는 법칙으로 기능하고 있다. 특히 공리주의가 지닌 '공리의 원칙'과 '유용성의 원칙'은 사회적 효율성을 강조하는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유용성의 의미는 본래적 가치를 극대화하고 본래적 비가치를 극소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유용성은 정의와 상충한다. 유용성의 원리에 따르면 차별대우하는 행동이나 규칙에 의해서도 대차가 최대로 산출된다. 반면에 정의의 원칙에 따르면 어떠한 개인도 타인의 행복에 대한 단순한 도구나 수단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최근의 생명공학,CCTV 설치, 사형제도, 안락사 문제뿐만 아니라 이라크 파병을 포함한 국제 문제에 이르기까지 공리적 판단과 결부되지 않은 것이 없다. 법이나 정치제도, 도덕, 종교 모두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기여하는 여부에 따라서 그 정당성이 판단될 뿐이었다.


3)공리주의의 유용성 원리의 한계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구명선의 윤리'에서 '아홉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이 희생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공리주의 입장에서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이 언제나 정당화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 정의의 관점에서는 그 어떤 누구에게도 망망대해의 배에서 내리라고 강요할 권리는 없다. 소수의 희생이 부당할 뿐만 아니라 공동선은 평등한 개인의 자유로운 동의에 의하여 추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리주의는 일반적으로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우선함으로써 자칫 개인은 전체의 행복을 위해 희생될 위험에 놓이게 된다. 다수의 커다란 이익을 위해서는 소수의 이익을 희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도 다수결의 원리를 채택함으로써 소수를 무시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하여 사회적 약자나 논의에서 배척되는 타자들에게는 어둠을 드리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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