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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와 대표작품

작성자mansan|작성시간05.08.11|조회수341 목록 댓글 0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와 대표작품(1944-1999)
 ▲ 1999년 귄터 그라스(독일·소설가)-`양철북'
 ▲ 1998년 주제 사라마구(포르투갈·소설가)-`수도원의 비망록'
 ▲ 1997년 다리오 포(이탈리아 극작가)-`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우연한 죽음'
 ▲ 1996년 비슬라바 쉼보르스카(폴란드·시인) -`끝과 시작
 ▲ 1995년 셰이머스 히니(아일랜드·시인) -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
 ▲ 1994년 오에 겐자부로(대강건삼랑·일소설가) - '개인적체험'
 ▲ 1993년 토니 모리슨(미·소설가) - '재즈'
 ▲ 1992년 데렉 월코트(세인트 루시아) - '또 다른 삶'
 ▲ 1991년 나딘 고디머(남아공·소설가) - '보호주의자'
 ▲ 1990년 옥타비오 파스(멕시코·시인) - '태양의 돌'
 ▲ 1989년 카밀로 호세 세라(스페인·소설가) - '파스쿠알두아르테 일가'
 ▲ 1988년 나집 마흐프즈(이집트·소설가) - '우리 동네 아이들'
 ▲ 1987년 요세프 브로드스키(러시아계 미·시인) - '소리없는 동네'
 ▲ 1986년 월레 소잉카(나이지리아·소설가) - '늪 지대 사람들'
 ▲ 1985년 클로드 시몽(불·소설가) - '사기꾼'
 ▲ 1984년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체코슬로바키아·시인) -'프라하의 봄'
 ▲ 1983년 윌리엄 골딩(영·소설가) - '파리 대왕'
 ▲ 1982년 가르시아 마르케스(콜롬비아·소설가) - '백년 동안의 고독'
 ▲ 1981년 엘리아스 카네티(영·소설가) - '현운'
 ▲ 1980년 체스와프 밀로즈(폴란드·시인) - '한낮의 밝음'
 ▲ 1979년 오디세우스 엘리티스(그리스·시인) - '방향'
 ▲ 1978년 아이작 싱어(미·소설가) - '고레이의 사탄'
 ▲ 1977년 비센테 알레이산드레(스페인·시인) - '마음의 역사'
 ▲ 1976년 솔 벨로(미·소설가) - '희생자'
 ▲ 1975년 에우제니오 몬탈레(이·시인) - '기회'
 ▲ 1974년 H·마르틴손(스웨덴·시인) - '아니 아라 '
E·욘손(스웨덴·소설가) - '해변의 파도'
 ▲ 1973년 패트릭 화이트(호주·소설가) - '아주머니 이야기
 ▲ 1972년 하인리히 뵐(독·소설가) - '기차는 늦지 않았다
 ▲ 1971년 파블로 네루다(칠레·시인) - '황혼의 세계'
 ▲ 1970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구소련·소설가) - '수용소 군도'
 ▲ 1969년 새뮤얼 베케트(아일랜드·소설/극작가) - '고도를 기다리며'
 ▲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천단강성·일·소설가) - '설국'
 ▲ 1967년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과테말라·소설가) - '과테말라 전설집'
 ▲ 1966년 S·요세프 아그논(이스라엘·소설가) - '출가'
  렐리 사크스(스웨덴·시인) - '엘리'
 ▲ 1965년 미하일 솔로호프(구소련·소설가) - '고요한 돈강
 ▲ 1964년 장 폴 사르트르(불·철학가·작가) - '구토'
 ▲ 1963년 게오르게 세페리스(그리스·시인) - '연습장'
 ▲ 1962년 존 스타인벡(미·소설가) - '에덴의 동쪽'
 ▲ 1961년 이보 안드리치(유고슬라비아·시인) - '드리나강의 다리'
 ▲ 1960년 생존 페로스(불·시인) - '찬가'
 ▲ 1959년 살바토레 콰지모도(이·시인) - '시인과 정치'
 ▲ 1958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구소련·소설가) - '닥터 지바고'
 ▲ 1957년 알베르 카뮈(불·소설가) - '이방인'
 ▲ 1956년 J·R·히메네스(스페인·시인) - '프라테로와 나
 ▲ 1955년 H·락스네스(아이슬란드·소설가) -'독립된 백성
 ▲ 1954년 어니스트 헤밍웨이(미·소설가) -'무기여 잘 있거라“
 ▲ 1953년 윈스턴 처칠(영·정치가) - '제2차대전 회고록'
 ▲ 1952년 프랑수아 모리악(불·소설가) -'테레즈 데케르'
 ▲ 1951년 P·라케르크 비스트(스웨덴·소설가/시인) - '바라바'
 ▲ 1950년 버트런드 러셀(영·철학자) - '권위와 개인'
 ▲ 1949년 윌리엄 포크너(미·소설가) - '음향과 분노'
 ▲ 1948년 T·S·엘리엇(영·시인) - '황무지'
 ▲ 1947년 앙드레 지드(불·소설가) - '좁은 문'
 ▲ 1946년 헤르만 헤세(스위스·소설가/시인) - '데미안'
 ▲ 1945년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칠레·시인) - '비수'
 ▲ 1944년 J·V·옌센(덴마크·소설가/시인) - '긴 여행'




T. S. 엘리엇

(T(homas) S(tearns) Eliot)

1888∼1965. 미국 태생 영국의 시인·극작가·문학비평가.


〈황무지 The Waste Land〉(1922) 같은 시와 〈대성당의 살인 Murder in the Cathedral〉(1935)·〈칵테일 파티 The Cocktail Party〉(1950) 등의 희곡을 통해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했다. 성공적인 뮤지컬 〈캣츠 Cats〉는 〈늙은 주머니쥐의 고양이에 관한 책 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1939)을 기초로 한 극으로, 1981년 영국에서 막을 올렸고 1982년 뉴욕에서 상연되었다.

시인·극작가·문학평론가·편집인으로서 엘리엇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20세기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시어·문체·운율 등의 실험으로 영시(英詩)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일련의 평론들을 통해 과거의 정통적 견해들을 타파하고 새로운 주장을 내세웠다. 또한 사회적·문화적 제반 문제들에 대해서도 의견을 피력했으며, 페이버앤드페이버출판사의 이사로서 젊은 시인들을 관대하면서도 분별력있게 도와주던 후원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발표된 〈4개의 4중주 Four Quartets〉로 당시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영국의 시인이자 문학가로 인정받아 1948년 메리트 훈장과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쉴리 프뤼돔

Sully Prudhomme

본명은 René-François-Armand Prudhomme.

1839. 3. 16 파리~1907. 9. 7 샤트네.

프랑스의 시인.


낭만주의의 과도함에 대한 반항으로 시에 우아함과 균형 및 미학적 기준을 회복하고자 했던 고답파 운동의 지도자였다.

학교에서 과학을 공부했지만 눈병 때문에 과학자의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맨 처음 얻은 일자리는 공장 사무실의 서기였는데, 1860년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이 직장을 그만두었다. 1865년에는 불행했던 연애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우아하고 음울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절(詩節)과 시 Stances et poèmes〉(1865)에는 그의 대표시 〈 깨진 항아리 Le vase brisé 〉가 포함되어 있다. 〈시련 Les Épreuves〉(1866)·〈고독 Les Solitudes〉(1869)도 초기의 감상적 문체로 쓴 작품들이다. 이후에는 개인 감정을 서정적으로 표출한 시를 단념하고, 고답파의 보다 더 객관적인 접근을 위해 운문에서 철학적 개념을 표현한 것을 시에 적용했다. 이런 경향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정의 La Justice〉(1878)와 〈행복 Le Bonheur〉(1888)인데, 〈행복〉은 사랑과 지혜를 찾아 헤매는 파우스트의 탐험을 다루고 있다. 후기 작품은 이따금 애매하고, 운문에서 철학적 주제를 표현하는 문제에 있어 너무 순진하게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1881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01년 제1회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B. 비외른손

(Bjørnstjerne Martinius Bjørnson)

1832∼1910. 노르웨이의 시인·극작가·소설가·언론인·편집인·대중 연설가·연극연출가.


당대 노르웨이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헨리크 입센, 알렉산더 헬란, 요나스 리와 더불어 19세기 노르웨이 문학의 '4대 거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쓴 시 〈예, 우리는 이 땅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Ja, vi elsker dette landet〉는 노르웨이 국가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롬스달렌이라는 작은 농촌마을에서 자랐는데, 이 마을은 나중에 그가 쓴 농촌 소설의 무대가 되었다. 처음부터 명확하게 교훈적인 의도를 갖고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노르웨이의 역사와 업적에 대해 국민적 자부심을 자극하고 이상을 제시하려고 애썼다. 작가 생활을 시작한 뒤 15년 동안 북유럽의 전설과 자신이 알고 있던 당시 노르웨이의 시골생활에서 영감을 얻어 글을 썼다. 그는 이 두 소재를 번갈아 이용했고, 자신의 이러한 집필방식을 '윤작'체제라고 불렀다. 북유럽 전설에서 얻은 자료는 희곡으로 결실을 얻었으며 당대의 농촌생활에 대한 자료는 소설로 수확을 얻었다. 이 두 분야는 모두 새시대의 노르웨이를 옛날의 노르웨이와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국민적 사기를 높이는 데 이바지했다. 이 윤작체제방식이 낳은 초기 성과로는 농민소설 〈양지 바른 언덕 Synnøve solbakken〉(1857), 단막 역사극 〈전투와 전투 사이 Mellem Slagene〉(1857), 소설 〈아르네 Arne〉(1859)·〈행복한 소년 En glad gut〉(1860), 희곡 〈절름발이 훌다 Halte-Hulda〉(1858) 등을 들 수 있다.

1857년에 입센의 후임으로 베르겐 극단의 예술감독이 되어 1859년까지 일했다. 1858년에 여배우인 카롤리네 라이메르스와 결혼했고, 〈베르겐포스텐 Bergenposten〉지의 편집인이 되었다. 1859년 선거에서 보수당 국회의원들이 패배하고 얼마 후 자유당이 결성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 신문에서 보인 활동 때문이기도 했다. 비외른손은 3년 동안 해외를 여행한 뒤 크리스티아니아 극단의 연출가가 되었고, 1866∼71년에는 〈Norsk Folkeblad〉지를 편집했다. 같은 시기에 〈시와 노래 Digte og sange〉(1870) 초판이 나왔고, 서사시인 〈아른리오트 겔리네 Arnljot Gelline〉(1870)도 발표되었다. 정치 투쟁과 문학인들간의 싸움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던 비외른손은 글쓰는 데만 전념하기 위해 노르웨이를 떠났다. 결국 국제적 명성을 가져다준 희곡 〈파산 En fallit〉(1875)·〈편집자 Redaktøren〉(1875)는 스스로 택한 망명 생활에서 얻은 성과였다. 이 2편의 희곡은 뒤이어 발표한 희곡 〈왕 Kongen〉(1877)·〈새로운 체제 Det ny system〉(1879)와 마찬가지로 문제를 제기하고 거기에 대해 논의함으로써, 덴마크 작가이자 비평가인 게오르그 브란데스가 주장하던, 당대문학이 제공해야 하는 바를 충족시켰다. 후기 작품으로는 소설 〈 쿠르트가의 유산 Det flager i byen og pahavnen〉(1884)·〈신의 뜻대로 Pa Guds veje〉(1889)·〈우리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 Over Ævne Ⅰ〉(1883)·〈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 Over Ævne Ⅱ〉(1895)을 비롯한 수많은 감동적 희곡들이 남아 있다. 〈쿠르트가의 유산〉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기적에 대한 믿음을 비난한 반면, 〈신의 뜻대로〉는 사회 변화를 다루면서 그런 변화는 우선 학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밖에도 〈파울 랑게와 토라 파르스베르그 Paul Lange og Tora Parsberg〉(1898)는 정치적 편협함을 주제로 했다. 만년에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며 세계 평화와 국가간의 화해를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일했다. 비외른손은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고, 그의 희곡은 유럽에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확립하는 데 이바지했다. 190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Frederic Mistral)

1830∼1914. 프랑스의 시인.


19세기에 프로방스 어문학의 부흥을 주도했고, 1904년에는 문학과 언어학에 이바지한 공로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프로방스 지방의 유복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아비뇽의 콜레주 루아얄(나중에 그의 이름을 따서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고등학교로 바뀌었음)에 다녔다. 이 학교 교사 중 한 사람이었던 조제프 루마뉴는 그에 앞서 프로방스 속어로 시를 쓰기 시작했었고 평생 동안 그의 친구가 되었다. 1851년에 엑상프로방스대학교에서 법학사학위를 받았다.

직업을 갖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부유했던 그는 일찍부터 프로방스 지방의 생활과 언어를 재건하는 데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854년에 몇몇 친구들과 함께 프로방스어와 관습을 유지하기 위한 모임인 '펠리브리주'를 창설했고, 나중에는 범위를 남부 프랑스 즉 '오크어의 지방' 전역으로 넓혔다(프랑스 남부지방을 '오크어의 지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현대 프랑스어로 '그렇다'를 뜻하는 '위'[oui]가 남부지방 사투리에서는 '오크'로 발음되었기 때문). '오크어'는 음유시인들의 언어로서 남부 프랑스의 문화어였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시인들도 이 언어를 사용했다. 미스트랄은 '오크어'를 문학으로 되살리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그는 전2권으로 된 오크어 학술사전 〈펠리브리주의 보석 Lou Tresor dou Felibrige〉(1878)을 만드는 일에 20년의 세월을 바쳤다. 또한 아를에 프로방스 민속박물관을 세웠고, 노벨상 상금도 이 박물관을 위해 사용했다. 오크어를 옛날의 지위로 돌이키려는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의 시적 재능은 그 언어를 이용하여 오래도록 살아남는 걸작을 만들었고, 오늘날 그는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문학작품으로는 〈미레유 Mireio〉(1859)·〈칼랑도 Calendau〉(1867)·〈네르토 Nerto〉(1884)·〈론 강의 시 Lou Pouemo dou Rose〉(1897) 등 4편의 장편 서사시와, 역사비극 〈잔 여왕 La Reino Jano〉(1890), 서정시집 〈황금의 섬 Lis Isclo d'or〉(1876)·〈올리브 수확 Lis Oulivado〉(1912), 그리고 〈아르마나의 산문 Prose d'Armana〉(1926∼29)에 수록된 많은 단편소설 등이 있다. 1848년에 최초의 서사시 〈저택 Lis Meissoun〉을 썼는데, 이 작품은 그가 죽은 뒤인 1927년에 〈르뷔 드 프랑스 Revue de France〉지 7월호와 8월호에 발표되었다. 회고록인 〈나의 근원 Moun espelido〉(1906)은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위대함은 첫번째 장시인 〈미레유〉와 마지막 장시인 〈론 강의 시〉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2편의 작품은 12편으로 이루어진 본격적 규모의 서사시이다.

시인이 살았던 시대와 지역을 무대로 한 〈미레유〉는 부유한 농부의 딸이 가난한 바구니 제조공의 아들을 사랑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생트마리드라메르 교회에서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고장에 대한 사랑을 이 시에 쏟아넣었다. 구노는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오페라를 작곡했다(1863). 〈론 강의 시〉는 낭만적인 젊은 네덜란드 공작과 가난한 나룻배 사공의 딸이 거룻배인 '루 카뷔를'호를 타고 리옹에서 보케르까지 론 강을 따라가는 이야기이다. 먼저 배에 탄 네덜란드 공작과 나중에 올라탄 사공의 딸 사이에 사랑이 싹트지만, 루 카뷔를 호는 론 강을 오가는 최초의 기선에 의해 뜻하지 않게 침몰당함으로써 그들의 연애도 막을 내린다. 승무원들은 강가로 헤엄쳐 가지만, 두 연인은 물에 빠져 죽는다. 이 서사시는 〈미레유〉보다 음악성과 문체는 떨어지지만, 생기발랄하고 아름답다. 이 작품은 미스트랄이 말년에 이르러 자신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으며, 그가 사랑하는 것 대부분이 그의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았음을 보여준다.


에체가라이 이 에이자기레

(Jose Echegaray y Eizaguirre)

1832∼1916. 스페인의 수학자·정치가·극작가.


1904년 프로방스의 시인 프레데리크 미스트랄과 함께 노벨 문학상을 수상해 19세기 후반기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초기에 수학교수였으며 1868년에 공무원이 되어 여러 직책을 거쳤다. 1874년 재무부 장관에 임명되어 스페인 은행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첫 희곡 〈수표장 El libro talonario〉은 그가 42세였던 1874년까지는 상연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 연평균 2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린 다작의 작가였다. 초기 작품은 거의 낭만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있으나 헨리크 입센과 그밖의 극작가들의 영향을 받아 후기에는 명제극을 썼다. 그는 종종 풍자적인 반전을 사용하여 논제를 드러냈다. 예를 들면 〈미치광이 또는 성자 O locura o santidad〉(1877)에서는 정직이 사회에서 광기로 비난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가 자신의 모든 희곡에서 다룬 수법은 멜로드라마식이었다. 비록 오늘날에는 잊혀졌으나, 자신의 부족한 희곡적 효과를 보충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는 당시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의 작품들은 등장인물들의 허구성, 상황의 비진실성, 과시적 문체 등으로 인해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으나, 스페인 연극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요작품으로는 역사에 관련된 낭만주의의 주제와 비슷한 〈칼 손잡이 En el puno de la espada〉(1875)·〈죽음의 한복판에서 En el seno de la muerte〉(1879)·〈미치광이 신 El loco Dios〉(1900) 등이 있다.





H. 솅키에비치

(Henryk (Adam Alexander Pius) Sienkiewicz)

필명은 Litwos.

1846∼1916. 폴란드의 소설가.


높은 인기를 누렸고 190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바르샤바대학교에서 문학·역사·철학을 공부했으나 1871년 중퇴했다. 이미 1869년부터 실증주의의 영향이 보이는 비평을 출판하기 시작했는데, 실증주의는 당시 폴란드 등지에서 유행한 철학사조로 특히 과학이 이룬 성과를 강조했다. 1872년 첫 장편소설인 〈헛되이 Na marne〉를, 1875년 첫 단편소설인 〈늙은 하인 Stary suga〉을 발표했다. 〈가제타 폴스카 Gazeta polska〉의 특파원 자격으로 미국을 여행했고(1876∼78),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거쳐 폴란드에 돌아온 뒤 많은 단편소설을 출판해 성공을 거두었다. 이중에는 〈음악가 얀코 Janko Muzykant〉(1879)·〈등대지기 Latarnik〉(1882)·〈정복자 바르테크 Bartek Zwyciezca〉 (1882) 등이 있다. 1882∼87년 일간지 〈수오보 Sowo〉의 공동편집자로 일했다. 1900년에는 작가생활 30주년 기념으로 폴란드 국민들로부터 키엘체 근처 오블레고레크의 조그만 땅을 받아 1914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제1차 세계대전중 폴란드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폴란드의 전쟁희생자들을 위해 구제활동을 폈다.

1883년에는 위대한 3부작 역사소설을 〈수오보 Sowo〉지에 싣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불과 칼로써 Ogniem i mieczem〉(1884)· 〈대홍수 Potop〉(1886)·〈 판 보우오디요프스키 Pan Woodyjowski〉(1887∼88)로 구성되어 있다. 17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서사시적인 간결 명료함을 갖춘 생동감 있는 문체를 통해 폴란드인의 영웅적 자질을 강조하면서 코사크·타타르·스웨덴·투르크인에 대한 폴란드인의 투쟁을 그렸다. 이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제1부인 〈불과 칼로써〉이며, 보그단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자포로지예 카자크의 반란을 저지하려는 폴란드인의 노력을 그렸다. 그밖의 장편소설로는 네로 황제 치하의 로마를 배경으로 쓴 역사소설 〈쿠오바디스? Quo Vadis?〉(1896)가 있다. 이 책은 널리 번역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의 주요작품들은 과장이 많고 역사적 정확성이 부족하다는 비평을 받았지만, 서술 능력이 뛰어나며 인물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조수에 카르두치

(Giosue Carducci)

1835∼1907. 이탈리아의 시인.


1906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문학적 거장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공화당원인 시골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남부 토스카나의 황량한 마렘마 지역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피사대학교에서 공부하고 1860년에 볼로냐대학교에서 이탈리아 문학교수가 되어 그곳에서 40여 년 강의했다. 1890년에 종신 국회의원이 되었고 이탈리아 국민들로부터 국민시인으로 존경받았다.

청년시절 카르두치는 당시 유행하던 낭만주의를 버리고 고전양식으로 되돌아가려 시도했던 젊은이들의 중심 인물이었다. 주세페 파리니, 빈센초몬티, 우고 포스콜로에게 배웠으며 이들로부터 받은 영향은 그의 첫번째 시집 〈시 Rime〉(1857, 뒤에 〈청춘시집 Juvenilia〉·〈가볍고 진지한 시 Levia gravia〉라는 제목으로 모아 수록됨)에 잘 나타나 있다.

시인으로서 위대한 힘과 공화당원으로서의 능력, 교회의 권위에 대한 적대감은 사탄에 대한 그의 찬가 〈악마찬가 Inno a Satana〉(1863)와 당시의 정치에서 영감을 얻은 〈단장격(短長格)과 장단격(長短格) 시편(詩篇) Giambi ed epodi〉(1867∼69)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격렬하고 신랄한 시는 시인의 남성답고 반항적인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1880년대의 〈새로운 서정시 Rime nuove〉·〈야만스러운 송시 Odi barbare〉에는 마렘마 풍경에 대한 환기, 어린시절의 추억들, 외아들을 잃은 슬픔, 커다란 역사적 사건들의 재현, 로마 역사의 영광을 회고하려 한 야망적인 시도, 고대문명에 대한 이교도적 행복 등을 소재로 한 카르두치의 최고 작품이 실려 있다. 고전주의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라틴어로 된 작시법을 이탈리아어로 된 운문으로 각색했으며, 〈야만스러운 송시〉는 호라티우스와 베르길리우스의 보격(步格)을 모방하여 쓴 것이다. 시적 이미지와 시적 형식을 이용한 그의 이탈리아 문학 연구는 시에 버금가는 최고의 산문 작품이었다





러디어드 키플링

((Joseph) Rudyard Kipling)

1865∼1936. 영국의 소설가·단편작가·시인.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찬양, 인도와 미얀마의 영국 군인들을 다룬 이야기·시·동화 등으로 유명하다. 1907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화가이며 학자였던 아버지 존 록우드 키플링은 러호 미술관 관장이었는데, 아들의 소설 〈킴 Kim〉 첫장에서 '놀라운 집'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어머니는 앨리스 맥도널드였고, 두 이모는 각각 19세기의 유명한 화가 에드워드 번존스 경과 에드워드 포인터 경의 아내가 되었으며, 또다른 이모는 앨프레드 볼드윈과 결혼하여 뒷날 총리가 된 스탠리 볼드윈을 낳았다. 이러한 인척관계는 키플링에게 평생 영향을 주었다.

키플링은 어린시절의 대부분을 불행하게 보냈다. 부모는 그가 6세 때 영국으로 데려가 5년 동안 사우스시의 한 가정에 양자로 맡겼다. 그때의 공포는 〈음매 음매, 검은 양 Baa Baa, Black Sheep〉(1888)이라는 이야기에 묘사되어 있다. 그뒤 데번 북부 웨스트워드 호에 있는 유나이티드서비시스대학에 들어갔는데, 이 학교는 학비가 싸고 수준이 낮은 신설 기숙학교였다. 이 학교의 기억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지만, 〈스탤키사 Stalky & Co〉(1899) 및 이와 연관된 작품에서는 이 학교를 영국 교육의 지고한 목표를 달성한 무법의 낙원으로 미화했다. 스탤키 무용담은 키플링의 상상력이 이루어낸 최고의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1882년 키플링은 인도로 돌아가 7년 동안 저널리스트로 일했다. 그의 부모는 요직에 있지 않았지만 인도에 거주하는 영국인 중 최상층에 속했기 때문에, 그는 이 계층의 사람들을 잘 알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관심과 애정을 느꼈던 인도 본국인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도 예민하게 관찰했다. 그는 소속된 신문에 짤막한 산문과 가벼운 시를 실었다. 1886년 〈부문별 노래 Departmental Ditties〉, 1888년 〈옛날부터 전해오는 소박한 이야기 Plain Tales from the Hills〉를 출판했으며, 1887∼89년에는 종이표지로 된 단편집 6권을 펴냈다. 1889년 영국으로 돌아온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당대 최고의 산문작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1892년 〈막사의 담시 Barrack-Room Ballads〉를 발표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는데, 영국에서 바이런 이후 그처럼 빨리 명성을 얻은 시인은 없었다. 계관시인 앨프레드 테니슨 경이 1892년에 죽자 키플링은 그의 뒤를 이어 대중의 존경을 받았다.

경박해서 실패작이 된 로맨스 〈놀래카 The Naulahka〉(1892)를 함께 쓴 미국의 출판업자이며 작가인 울콧 밸러스티어의 누이 캐롤라인과 1892년 결혼했다. 아내와 미국으로 가서 버몬트 주에 있던 아내 소유의 집에서 살았으나, 이웃 사람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미국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는지 아니면 그럴 마음이 없었는지 영국으로 돌아와 버린 키플링은 미국인들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에 사는 동안 눈이 멀게 되어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으로부터 버림받는 한 화가의 이야기인 〈꺼져버린 불빛 The Light That Failed〉(1890), 대담한 느낌은 있으나 묘사가 지나쳐 실패작으로 끝난 〈용기있는 지휘자 Captains Courageous〉(1897), 원래 동화책으로 씌어졌지만 고전으로도 손색이 없는 〈킴〉, 문체가 뛰어나고 이야기가 재미있기는 하지만 키플링이 균형잡히고 일관성 있는 장편소설은 잘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한 〈정글북 The Jungle Books〉(1894, 1895) 등을 출판했다.

1902년 서식스 주 버워시에 집을 사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영국의 역사를 단순하게 극화시킨 작품이면서도 키플링의 심오한 직관을 담은 두 작품 〈푸크 언덕의 요정 Puck of Pook's Hill〉(1906)·〈보상과 요정 Rewards and Fairies〉(1910)을 비롯한 대부분의 후기 작품은 서식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가 많은 시간을 보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최대의 다이아몬드 광산 소유주이면서 정치가인 세실 로즈로부터 집을 선사받았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키플링은 제국주의를 신봉하게 되었고, 이 태도는 해가 갈수록 더욱 강해졌다. 키플링은 모든 영국인, 더 넓게는 모든 백인이 미개한 세계의 야만적인 원주민들에게 유럽 문명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키플링의 사상은 당대의 자유주의적인 사고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점점 고립되었다. 영국 시민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명예인 메리트 훈장을 2차례나 거절했으며, 1895년 계관시인 지위가 주어질 경우 거절할 뜻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오이켄



루돌프 오이켄

(Rudolf Christoph Eucken)

1846∼1926. 독일의 관념론 철학자.




190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해설가이며 윤리학과 종교에 대한 저술가였다. 괴팅겐대학교에서 목적론적 관념론자인 독일의 사상가 R. H. 로체 밑에서 공부했으며 베를린대학교에서는 독일의 철학자 F. A. 트렌델렌부르크의 윤리학 사상과 철학에 대한 역사적 접근법에 이끌려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71년 스위스 바젤대학교의 철학과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874년 예나대학교의 철학교수가 되어 1920년까지 재직했다.

오이켄은 추상적 주지주의와 체계철학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철학의 초점을 인간의 실제경험에 맞추었다. 그는 인간이야말로 자연과 정신이 만나는 장소이며 정신생활을 지향하는 끊임없는 적극적 노력을 통해 비정신적 성격을 극복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자 특권이라고 주장했다. 때로 윤리적 활동주의라고 불리는 이러한 실천적 노력에는 인간의 모든 능력이 필요하지만 특히 의지와 직관의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자연주의 철학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퍼부었던 그는 영혼 덕분에 인간이 모든 다른 자연세계와 구별되며 영혼은 결코 자연과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은 〈개인과 사회〉(1923)·〈사회주의와 그 생활형태 Der Sozialismus und seine Lebensgestaltung〉(1920)에 잘 나타나 있다. 〈사회주의와 그 생활형태〉에서는 사회주의를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 삶의 정신적·문화적 가치를 파괴하는 체제라고 공격하고 있다. 오이켄의 노벨상 증서에는 '관념론적 생철학을 옹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수많은 저서에서 그가 보여준 서술의 온유함과 강직함'이 지적되어 있다. 그밖의 저서로는 〈삶의 의미와 가치 Der Sinn und Wert des Lebens〉(1908)·〈우리는 아직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Konnen wir noch Christen sein?〉(1911) 등이 있다.






라게를뢰프(1909)



셀마 라게를뢰프

(Selma (Ottiliana Lovisa) Lagerlof)

1858∼1940. 스웨덴의 소설가.




설화나 영웅담에 기초한 소설을 썼으며 190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자 최초의 스웨덴 작가이다.

병으로 한동안 다리를 절었던 것을 제외하면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집에서 교육받은 뒤 스톡홀름에서 교사훈련을 받고 1885년에 란스크로나로 가서 교사가 되었다. 그곳에서 첫번째 소설인 〈 예스타 베를링의 이야기 Gosta Berlings saga〉(2권, 1891)를 썼다. 이 책은 그녀의 고향인 베름란드의 전성기, 즉 부유한 제철소 주인과 소지주들의 생활상을 연대기적으로 다루면서, 나약한 성격이지만 매력이 넘치는 배교자인 사제 예스타 베를링이 이끄는 12명의 기사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서정적 문체에 비장감이 넘치는 이 책은 토마스 카알라일의 영향을 보여주며, 1890년대 스웨덴 낭만주의 부흥운동에 기여했다. 1894년 〈보이지 않는 고리 Osynliga lankar〉라는 소설집을 발간했고, 1895년에는 여행장학금을 받아 교직을 그만두고 글쓰기에만 전념했다. 이탈리아를 방문한 뒤 시칠리아에 관한 사회주의적 소설인 〈반(反) 그리스도의 기적 Antikrists mirakler〉(1897)을 출간했다. 또다른 소설집 〈지주(地主) 이야기 En herrgardssagen〉는 그녀의 가장 훌륭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서 한해 겨울을 보내던(1899 ∼ 1900) 중 영감을 얻은 〈예루살렘 Jerusalem〉(2권, 1901∼02)으로 스웨덴 최고의 소설가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그밖에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간결하지만 힘찬 필치의 역사 이야기 〈아르네스 페닝가르 씨 Herr Arnes Penningar〉(1904)와 어린이를 위한 지리독본(讀本) 〈닐스의 이상한 여행 Nils Holgerssons underbara resa genom Sverige〉(2권, 1906∼07)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깊은 상실감에 빠져 몇 년 간 거의 작품활동을 하지 못했으나 그후 〈모르바카 Marbacka〉(1922)·〈나의 유년시절의 추억 Ett barns memoarer〉(1930)·〈셀마 라게롤뢰프의 일기 Dagbok for Selma Lagerlof〉(1932) 등에서 그녀의 유년시절을 섬세한 예술성으로 회상하여 썼으며, 18세기를 무대로 한 베름란드 3부작 〈뢰벤시욀드의 반지 Lowenskoldska ringen〉(1925)·〈샤를로테 뢰벤시욀드 Charlotte Lowenskold〉(1925)·〈안나 스베르드 Anna Svard〉(1928)를 출판했다. 아버지가 죽은 후 팔았던 모르바카의 저택을 노벨상 상금으로 다시 산 뒤 그곳에 정착했다. 그녀는 현대 소설가 중 가장 재능있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파울 폰 하이제

(Paul Johann Ludwig von Heyse)

1830∼1914. 독일의 작가.


191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전통주의자들의 모임인 뮌헨 학파의 뛰어난 회원이었다. 그리스어·로마어·로망스어를 공부했고, 연구보조금을 받아 1년간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연구를 마치고 독립적인 학자가 되었으며,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2세의 부름으로 뮌헨으로 갔다. 그곳에서 시인 에마누엘 가이벨과 더불어 뮌헨 작가단의 대표가 되어 정치적 급진주의, 유물론, 리얼리즘의 잠식으로부터 전통적 예술 가치관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고전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문체를 개발했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쓴 단편소설로 그 분야의 거장이 되었다. 단편소설 중 걸작은 〈라라비아타 L'Arrabiata〉(1855)이다. 또한 〈세계의 어린이 Kinder der Welt〉(1873)를 비롯한 소설과 많은 희곡을 썼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의 최고 작품은 자코모 레오파르디 등 이탈리아 시인의 작품을 번역한 것이다. 1871년 노벨레 형식을 '매 이론'(Falkentheorie)의 개념으로 정의했다('매 이론'은 조반니 보카치오 형태의 노벨레 〈매이야기 Tale of a Falcon〉에서 유래했음). 그는 이상적인 상태에 관심을 갖고 삶의 어두운 측면을 나타내기를 거부했으며, 점차 성장하는 자연주의 학파를 신랄하게 반대했다. 그의 인기는 그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시기에 급격히 하락했다.





타고르



R. 타고르

(Rabindranath Tagore, 벵골어Rabndranth hkur)

1861∼1941. 인도의 시인·사상가·교육자.




191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인도 문학의 정수를 서양에 소개하고 서양 문학의 정수를 인도에 소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위대한 성자 데벤드라나트 타고르의 아들로서 일찍이 시를 짓기 시작했다. 1880년대에 몇 권의 시집을 낸 뒤 시가집 〈아침의 노래〉(1883)로 예술의 기초를 확립했다. 1890년에는 성숙된 천재성을 보여주는 〈마나시 Mnas〉라는 시모음집을 펴냈는데 〈마나시〉에는 형식에 있어서 오드를 비롯해서 벵골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형식을 지닌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그의 대표적인 시들도 상당수 실려 있다. 이 시집에는 그가 지은 최초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시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1891년 실라이다와 사이야드푸르에 있는 아버지 소유의 부동산을 관리하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마을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냈고, 그들의 빈곤과 후진성에 대한 깊은 동정심은 나중에 그의 많은 저작들의 핵심적인 주제가 되었다. 1912년에 출간된 〈한 다발의 이야기들 Galpaguccha〉에는 그들의 '비참한 삶과 자그마한 불행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는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으나, 결코 인도의 독립을 지상 최고의 목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실라이다에서 벵골의 전원을 사랑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갠지스 강을 사랑하여 그의 문학의 중심 이미지로 삼게 되었다. 이곳에 머무는 여러 해 동안 〈황금 조각배 Sonr Tari〉(1893)·〈경이 Citr〉(1896)·〈늦은 추수 Caitli〉(1896)·〈꿈 Kalpan〉(1900)·〈찰나 Kak〉(1900)·〈희생 Naibedya〉(1901) 등의 작품집과 함께 〈Chitrgad〉(1892, 〈Chitra〉라는 제목으로 1913년에 재출간)와 〈정원사의 아내 Mlin〉(1895)라는 서정적 희곡을 출간했다. 1902∼07년 사이에 처자식과 사별한 그는 울적한 심경을 훌륭한 시로 형상화했다. 그는 1913년 널리 알려진 작품집 〈기탄잘리 Gtnjali〉('찬송을 헌정함'이라는 뜻, 1910)의 영역본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1915년 영국으로부터 기사작위를 수여받았으나, 1919년 암리차르에서의 대학살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그 작위를 반납했다.

타고르는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수많은 작품을 썼다. 그는 생애의 후기 25년 동안 21권의 저작을 펴냈다. 그는 이 기간의 대부분을 유럽, 아메리카, 중국, 일본,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강연하는 일로 보냈다. 그의 작품들 상당수가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영역되었지만, 영역본들은 벵골어 원작에 비해 문학적 가치가 상당히 떨어진다. 그는 시와 단편소설 외에 주목할 만한 소설도 여러 편 썼는데, 〈고라 Gor〉(1907∼10, 영역 1924)는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타고르는 1901년 볼푸르 근처 산티니케탄에 학교를 세우고 인도와 서양의 각 전통에서 최상의 것들을 선별해 조화시켜 가르치고자 했다. 그는 1921년 그곳에서 비스바바라티대학교를 세웠다. 한편 1920년 〈동아일보〉창간에 즈음하여 〈동바의 등불〉이라는 시를 기고하여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한국민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V. 폰 헤이덴스탐

((Carl Gustaf) Verner von Heidenstam)

1859∼1940. 스웨덴의 시인·산문작가.


그는 스웨덴의 자연주의 운동에 반발하여 환상, 아름다움, 국민적 주제 등을 다루는 문학의 부흥을 요구했다. 191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건강이 좋지 않아 젊은시절의 대부분을 중부 및 동부의 지중해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첫번째 시집 〈성지순례와 방황의 세월 Vallfart och vandringsar〉(1888)은 여러 남쪽 나라의 우화와 상당 부분의 동양 철학이 수록된 작품으로, 스웨덴 대중들 사이에서 즉각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수필 〈르네상스 Renassans〉 (1889)에서 처음으로 스웨덴의 단명했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문학운동에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새로운 스웨덴 문학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는 중에, 2권의 시집 〈시 Dikter〉(1895)·〈신 시집 Nya dikter〉(1915)을 냈는데, 이 마지막 시집의 시 대부분은 〈스웨덴 계관시인:베르너 폰 하이덴스탐 시선 Sweden's Laureate:Selected Poems of Verner von Heidenstam〉(1919)에 번역되었다. 역사소설도 몇 편 썼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카롤리네르나 Karolinerna〉(2권, 1897∼98)·〈폴쿵스의 나무 Folkungatradet〉(1905∼07)이다. 20세기초 그의 작품은 대중적 호소력을 잃었고 말년의 25년간은 실제로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로맹 롤랑

(Romain Rolland)

1866∼1944. 프랑스의 소설가·극작가·수필가.


20세기 프랑스 문학의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자들 중 하나이다. 그의 삶과 글은 당대의 사회와 정치 및 정신세계에 일어난 주요사건들, 즉 프랑스 군부의 반유대주의를 폭로한 드레퓌스 사건, 평화주의, 공산주의, 파시즘에 대한 투쟁, 세계평화 추구 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14세 때 파리로 공부하러 간 그는 정신적 혼란에 빠져 있는 사회를 발견했다. 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간 그는 종교적 믿음을 잃고, 스피노자와 레오 톨스토이의 글을 발견했으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역사를 공부했고(1889), 예술박사학위를 받은 뒤(1895), 2년 동안 이탈리아에 파견되어 로마의 프랑스어 학교에서 가르쳤다. 처음에는 희곡을 썼지만, 많은 관객을 끌어모아 '국민의 영웅심과 신앙'에 다시 불을 붙이려던 그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자신의 희곡을 2갈래로 묶어서 출판했는데, 하나는 〈아에르트 Aert〉(1898)가 들어 있는 〈신앙의 비극 Les Tragedies de la foi〉(1913)이고, 다른 하나는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늑대들 Les Loups〉(1898)과 〈당통 Danton〉(1900)이 들어 있는 〈혁명극 Le Theatre de la revolution〉(1904)이었다.

그는 예술과 음악이론을 잠시 가르친 뒤, 글쓰는 일에 모든 시간을 바치기 위해 1912년에 교사직을 사임했다. 샤를 페기와 함께 〈레 카이에 드 라 켕잰 Les Cahiers de la Quinzaine〉(프랑스어로 '半月手帖'이라는 뜻)이라는 잡지에서 일했는데, 10권으로 이루어진 그의 가장 유명한 소설인 〈장 크리스토프 Jean-Christophe〉(1904 ∼ 12)는 이 잡지에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그는 이 작품과 〈싸움을 넘어서 Au-dessus de la melee〉(1915:제1차 세계대전중, 싸우는 동안에도 끝까지 진리와 인간성을 존중하라고 프랑스와 독일에 호소하는 글 ) 라는 소책자로 19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사상은 격렬한 논쟁거리가 되었고, 그가 죽은 뒤 1952년에 〈전시 일기, 1914∼19 Journal des annees de guerre, 1914∼19〉가 출판될 때까지 그의 사상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14년 스위스로 가서, 1937년 프랑스로 귀국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영웅에 대한 그의 숭배와 열정은 〈베토벤의 생애 Vie de Beethoven〉(1903)·〈미켈란젤로의 생애 Vie de Michel-Ange〉(1905)·〈톨스토이의 생애 Vie de Tolstoi〉(1911) 등 천재들의 전기를 쓰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그의 걸작 〈장 크리스토프〉는 프랑스에 '로망 플뢰브'(roman fleuve:대하소설)를 도입했다. 서사시적인 구성과 문체에다 시적 감수성이 풍부한 이 작품은 독창적인 예술가(여기서는 베토벤과 자신을 절반씩 본떠서 창조한 독일 태생의 천재 음악가 장 크리스토프 크라프트) 가 부딪치는 잇따른 위기를 제시한다. 이 예술가는 우울한 순간에도 삶에 대한 사랑으로 영감을 얻는다. 이 젊은 독일인과 한 젊은 프랑스인의 우정은 그가 언젠가는 전세계에서 확립될 수 있다고 믿었던 '적대 세력들간의 화합'을 상징한다. 익살스럽고 환상적인 〈바보 브뢰뇽 Colas Breugnon〉(1919)을 발표한 뒤 7권으로 이루어진 2번째 대하소설 〈매혹된 영혼 L'Ame-enchantee〉(1922∼33)을 발표했는데, 여기서는 정치적 파벌주의의 잔인한 결과를 폭로했다. 1920년대에는 아시아, 특히 인도로 눈길을 돌려,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1924) 같은 작품을 통해 인도의 신비주의철학을 서양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고 애썼다. 그는 보기 드문 이해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 설 수 있었다. 또한 작품뿐만 아니라 국제적 평론지인 〈유럽 Europe〉(1923)의 창간에 이바지한 공로로 좌파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특히 1935년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막심 고리키를 만난 뒤로는 이런 지위가 더욱 확고해졌다. 그당시 전세계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들, 예를 들면 알베르트 슈바이처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버트런드 러셀과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같은 사람들과 나눈 수많은 편지는 〈로맹 롤랑의 수첩 Cahiers Romain Rolland〉(1948)으로 발표되었다. 항상 '모든 사람에게 반대하는 한 사람'으로 남아 있었고, 영웅적 이상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가 죽은 뒤에 출판된 〈회고록 Memoires〉(1956)과 일기는 인류에 대한 사랑에 불타는 한 작가의 보기 드문 성실함을 증언하고 있다.







카를 슈피텔러

(Carl Spitteler)

1845∼1924. 스위스의 시인·작가.


환상적 상상력을 지닌 시인이었으며 비관주의 색채를 지녔지만 영웅시를 주로 썼다.

러시아와 핀란드에서 8년간 가정교사로 있다가 귀국 후 첫번째 위대한 시작(詩作)인 신화적 서사시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 Prometheus und Epimetheus〉(1881)를 썼다. 그후 몇 년 동안은 학생을 가르치거나 신문·잡지에 기고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이 시기에 폭넓은 문학형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1892년 유산을 상속받아 루체른에 정착해 창작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2번째 위대한 작품 〈올림푸스의 봄 Der olympische Fruhling〉(1900∼05)은 대담한 창의력과 생생한 표현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1919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말년에는 첫 작품을 수정하는 데 몰두하여, 초판보다 더 짜임새있는 구성을 보여주면서 〈올림푸스의 봄〉처럼 운을 맞춘 2행 연구 형태로 된 〈고통을 견디는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der Dulder〉(1924)를 발표했다.

그밖에 폭넓은 다양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중기의 것으로 7편의 운문체 우주 신화 〈엑스트라문다나 Extramundana〉(1883)·〈발라드집 Balladen〉(1896)·〈문학적 비유 Literarische Gleichnisse〉(1892), 2권의 서정시집 〈나비 Schmetterlinge〉(1889)·〈풀잎과 종의 노래 Gras und Glockenlieder〉(1906) 등이 있다. 또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어린시절의 목가 〈여성혐오자들 Die Madchenfeinde〉(1907)과, 극적으로 끝나는 중편소설 형식의 〈콘라트 소위 Conrad der Leutnant〉(1898)를 썼는데, 이 작품은 그가 싫어했던 자연주의에 가까운 것이었다. 소설 〈심상 Imago〉(1906)은 환상적인 창작의 재능과 중산층의 가치관 사이에서 발생하는 그의 내적 갈등을 예리하게 반영한 것으로, 정신분석학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이밖에도 자극적인 수필집 〈웃고 있는 진리 Lachende Wahrheiten〉(1898)와〈아주 어린시절의 체험들 Meine fruhesten Erlebnisse〉(1914) 등을 비롯한 몇 편의 흥미로운 전기가 있다. 1914년 〈우리 스위스인의 입장 Unser Schweizer Standpunkt〉이라는 정치적으로 영향력있는 논문을 발표하여 독일 지지일변도의 전쟁관에 반대했다.






크누트 함순

(Knut Hamsun)

본명은 Knut Pederson.


1859∼1952. 노르웨이의 소설가·극작가·시인.


192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20세기로 접어들 무렵 신낭만주의의 반항의 기수로서 과도한 자연주의적 경향으로부터 소설을 구해냈다. 농부 출신으로, 어린시절의 대부분을 로포텐 섬에서 보냈고 정규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다. 19세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그때는 노르웨이 북부에 있는 보되에서 구두공의 도제로 일할 때였다. 다음 10년 동안은 임시 노동자로 일했다. 그는 미국을 2번 방문했는데, 시카고에서는 시가 전차 차장으로, 노스다코타에서는 농장 일꾼으로 일했다.

그의 첫번째 출판물은 소설 〈굶주림 Sult〉(1890)으로, 노르웨이의 한 굶주린 젊은 작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굶주림〉은 당대의 전형적인 노르웨이 소설에서 보이는 사회적 리얼리즘과는 명백하게 구분되었다. 이 작품의 신선한 관점과 자극적·서정적인 문체는 유럽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첫번째 성공에 이어 그는 톨스토이와 입센 같은 우상들을 공격하는 일련의 강론들을 잇달아 발표했고,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작품들을 썼다. 〈신비 Mysterier〉(1892)·〈판 Pan〉(1894)·〈빅토리아 Victoria〉(1898) 등의 초기 작품들에 나오는 비사회적인 주인공들처럼 그 역시 진보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불손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원숙한 문체로 씌어진 〈대지의 성장 Markens grøde〉(1917)에서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철학을 표현했다. 그러나 니체나 스트린드베리의 영향을 받은 맹렬한 개인주의적 메시지는 끝까지 현대 서양 문명에 대한 반감을 나타냈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있던 독일을 지지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반역자로 수감되었지만 나이 때문에 감형되었다.

그의 평판은 나치 협력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지만 사후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적 관심이 새로워졌고, 새로운 해석들이 나옴으로써 그의 작품은 다시 국제적인 독자층을 얻었다. 그의 사려 깊은 비합리주의와 자기 멋대로의 방식, 돌발적이며 인상주의적인 문체는 유럽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막심 고리키, 토마스 만, 아이작 B. 싱어 같은 작가들이 그를 거장으로 인정했다.





프랑스



아나톨 프랑스

(Anatole France)

본명은 Jacques-AnatoleFrancois Thibault.

1844∼1924. 프랑스의 작가·비평가.


풍자적이고 회의적이며 세련된 비평으로 당대 프랑스의 이상적 문인이라는 평을 받았다.

서적상의 아들로서 그는 일생을 책과 더불어 보냈다. 학창시절에 고전문학의 기초를 닦았으며 일생을 문학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초기시들은 고전주의 전통의 고답파적 부흥에 영향을 받았으며, 그다지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이미 인위적 제도에 대해 냉소적인, 예민한 문장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관념적 회의주의는 초기 소설들에 나타나 있다. 이러한 작품으로는 책에만 애착을 가지고 실생활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한 문헌학자에 대한 소설인 〈실베스트르 보나르의 범죄 Le Crime de Sylvestre Bonnard〉(1881), 마술에 대한 믿음을 은근히 조롱하는 〈페도크 여왕의 불고기집 La Rotisserie de la Reine Pedauque〉(1893), 풍자적이고 총명한 비평가가 국가의 거대한 제도들을 살펴보는 〈제롬 쿠아냐르의 견해 Les Opinions de Jerome Coignard〉(1893)가 있다. 그의 사생활은 상당한 혼란을 겪었다. 1877년 마리 발레리 게랭 드 소빌과의 결혼은 1893년 이혼으로 끝났다. 1888년에는 아르망 드 카야베 부인을 만났으며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하여 창녀가 성녀가 되는 이야기를 다룬 〈타이스 Thais〉(1890)와, 피렌체를 무대로 한 당대의 연애소설 〈붉은 백합 Le Lys rouge〉(1894)을 썼다.






에리크 악셀 카를펠트

(Erik Axel Karlfeldt)

1864∼1931. 스웨덴의 시인.


본질적으로는 향토주의와 전통의 틀 속에 얽매여 있지만 그의 시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고, 그가 죽은 후인 1931년 노벨 문학상을 안겨주었다. 앞서 1918년에는 수상을 거부한 바 있다. 그는 고향 시골 농부들의 문화에 강한 유대감을 느꼈으며 평생 동안 이어진 그의 작품활동은 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 6권의 시집으로 출판되었다. 〈광야와 사랑의 노래 Vildmarks-och karleksvisor〉(1895)·〈프리돌린의 노래 Fridolins visor〉(1898)·〈프리돌린의 유쾌한 정원 Fridolins lustgard〉(1901)·〈플로라와 포모나 Flora och Pomona〉(1906)·〈플로라와 벨로나 Flora och Belona〉(1918), 그리고 죽기 4년 전에 출판한 〈가을의 호른 Hosthorn〉(1927)이 그것이다. 1938년 그의 시 일부가 영어로 번역되어 〈Arcadia Borealis:Selected Poems of Erik Axel Karlfeldt〉로 출판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숭배자들 가운데서도 그가 자신의 재능을 오로지 스러져 가는 지방문화를 위해서만 썼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프랑수아 모리악

(Francois Mauriac)

1885∼1970. 프랑스의 소설가·수필가·시인·극작가·언론인.



195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현대 생활의 추악한 현실을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한 프랑스 가톨릭 작가들의 계열에 속한다. 그의 주요소설들은 끊임없이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벌어지는 음울하고 준엄한 심리 드라마이다. 그의 모든 작품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죄악·은총·구제라는 문제와 씨름하는 종교적 영혼이다.

그는 독실하고 엄격한 중상류 계층에서 태어났다. 보르도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906년 파리 국립고문서학교에 들어갔지만 얼마 후 글을 쓰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처음으로 출판한 작품은 〈맞잡은 손 Les Mains jointes〉(1909)이라는 섬세하고 열정적인 시집이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소설에 있었다. 첫번째 소설 〈사슬에 묶인 아이 L'Enfant charge de chaines〉(1913)와 〈백의(白衣) La Robe pretexte〉(1914)는 아직 불안정한 기법을 보이지만, 그래도 그가 되풀이해 다루게 될 주제의 유형을 확립했다. 그는 고향인 보르도의 부르주아 생활의 단조롭고 숨막히는 구속을 골격으로 해, 사랑을 빼앗긴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탐구하고 있다. 그가 일류 소설가로 자리를 굳힌 것은 〈문둥이에게 보내는 입맞춤 Le Baiser au lepreux〉(1922)을 통해서이다. 〈사랑의 사막 Le Desert de l'amour〉(1949)과 〈테레즈 데케루 Therese Desqueyroux〉(1927)에서는 더욱 원숙해진 기량을 보여주었는데, 〈사랑의 사막〉은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주는 1925년도 소설 부문 대상을 받았다. 〈테레즈 데케루〉는 여주인공이 숨막힐 것 같은 생활에서 탈출하기 위해 남편을 죽이려고 했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흔히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독사의 집 Le Noeud de vipees〉(1932)은 한 가정을 중심으로 펼쳐진 드라마로서, 가족에 대한 늙은 법률가의 증오심, 탐욕,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개종을 묘사하고 있다. 다른 소설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등장인물들이 인간관계에서 찾아 헤매는 사랑은 헛되며, 신의 사랑만이 진정한 것임을 피력하고 있다.

1933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후기 소설로는 자전적 작품인 〈프롱트나크의 비밀 Le Mystere Frontenac〉(1933)과 〈바다로 가는 길 Les Chemins de la mer〉(1939), 종교적 위선과 지배에 대한 욕망을 분석한 〈바리사이 여인 La Pharisienne〉(1941)이 있다. 1938년 극작가로 방향을 바꿔 〈아스모데 Asmodee〉로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이 희곡의 주인공은 자기보다 약한 영혼을 지배하는 사악하고 오만한 인물로, 이 주제는 별로 성공하지 못한 작품 〈가엾은 여인 Les Mal Aimes〉(1945)에도 등장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그는 평론가들 앞에서 자신을 정당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소설가와 작중 인물들 Le Romancier et ses personnages〉(1933), 4권으로 된 〈일기 Journal〉(1934∼51), 3권의 〈회고록 Memoires〉(1959∼67) 등은 그가 소설을 쓴 의도와 방법 및 당시의 도덕적 가치관에 대한 그의 태도를 말해준다. 〈신과 악마 Dieu et Mammon〉(1929)에서는 그리스도교 작가들이 부딪치는 어려운 문제, 즉 인간의 본성에 숨어 있는 사악함을 묘사하되 독자들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는 방법에 관해 고찰했다.

그는 또한 유명한 논쟁가이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를 비난하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파시즘을 규탄하면서 정력적으로 논쟁에 뛰어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레지스탕스 작가들과 함께 일했고, 전쟁이 끝나자 정치 토론에 점점 더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1962년부터 공식적으로 드골을 지지했고, 1964년에 〈드골 De Gaulle〉이라는 책을 썼다. 프랑스 밖에서 그의 명성은 서서히 퍼져갔고, 많은 사람들은 그를 마르셀 프루스트 이후의 위대한 프랑스 소설가로 인정하고 있다.




파스테르나크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Boris (Leonidovich) Pasternak)

1890 ∼ 1960. 러시아의 시인.




장편소설 〈의사 지바고 Doctor Zhivago〉로 1958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소련 내에서 커다란 반대가 야기되어 수상을 거부했다. 러시아 혁명의 잔혹함과 그 여파 속에서 펼쳐지는 방황, 정신적 고독, 사랑을 서사적으로 기술한 이 소설은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소련에서는 비밀리에 번역본으로만 유포되었다.

그는 교양 있는 유대인 가정에서 성장했다. 아버지 레오니드는 미술교수였으며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이들은 모두 이 집안을 자주 찾은 손님이었음), 그리고 레닌의 초상화를 그렸다. 어머니는 피아니스트 로자 카우프만이었다. 어린시절 파스테르나크는 조숙한 시인이었으나 음악가가 될 작정이었다. 6년간 음악이론과 작곡을 공부했으나 갑자기 철학으로 방향을 바꾸어 모스크바대학교와 독일 마르부르크대학교에서 철학 강좌를 수강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신체상의 이유로 병역이 면제되는 대신 우랄 지방의 화학공장에서 근무했고 혁명 후에는 소비에트 교육부 도서관에서 일했다.

첫번째 시집은 1913년에 출간되었다. 1917년에는 놀랄 만한 2번째 시집인 〈장벽을 넘어서 Poverkh baryerov〉를 펴냈으며, 〈누이, 나의 삶 Sestra moya zhizn〉(1922)을 출간하면서 역량 있는 신인 서정시인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시는 상징주의의 영향을 반영한다. 러시아의 기준으로 볼 때는 비록 전위적이고 비종교적(非宗敎的)이었으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33∼43년의 작품은 공식적인 작품양식(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너무 동떨어져 출판이 불가능했으며 1930년대말의 대숙청 기간에 그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가 스탈린의 고향 그루지야 시인들의 작품을 번역했기 때문에 숙청에서 제외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셰익스피어, 괴테,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들, 베를렌, 릴케 등을 번역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다. 1956년 파스테르나크는 큰 기대에 부풀어 모스크바의 유력한 월간지에 소설 〈의사 지바고〉를 기고했으나 "10월혁명과 혁명의 주역인 인민, 소련의 사회건설을 중상했다"는 비방과 함께 거부당했다. 1957년 이 소설은 이탈리아의 출판사를 통해 서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파스테르나크에게서 저작권을 사들인 그 출판사는 '수정을 위해' 원고를 되돌려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영역본이 출간된 1958년에는 이미 18개 국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노벨상 수상 소식이 알려지자 소련에서는 파스테르나크 탄핵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작가동맹에서 제명되었으며 생계유지의 수단마저 빼앗겼다. 공공 모임에서는 그를 국외로 추방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는 제1서기장 흐루시초프에게 "조국을 떠난다는 것은 내게 죽음을 의미한다"라는 취지의 탄원서를 보냈다. 그는 페레델키노의 집에서 암과 심장병에 시달리며 여생을 보냈다. 영어로 번역된 작품으로는 단편소설과 자전적 작품 〈안전 통행권 Okhrannaya gramota〉(1931), 그리고 엄숙함과 고요한 내적 관조로 끝나는 그의 시 작품 전체가 있다. 1987년에야 소비에트 작가동맹에서 파스테르나크의 사후 복권을 허락함으로써, 1958년 작가동맹에서 추방된 이후 불법으로 되어 있던 작품들의 적법성이 인정되었고, 드디어 〈의사 지바고〉가 소련 내에서 출판될 수 있었다. 시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가 주도한 평가위원회는 복권에 덧붙여 페레델키노에 있는 그의 집에 기념관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





옥타비오 파스

(Octavio Paz)

1914∼1998. 멕시코의 시인·작가·외교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가족이 멕시코 내란으로 파산했기 때문에, 파스는 궁핍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로마 가톨릭계 학교와 멕시코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글쓰기에 몰두하여, 19세 때인 1933년 첫시집 〈숲속의 달 Luna silvestre〉을 출간했다. 파스는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에 스페인을 방문하여, 공화주의자들의 대의명분에 강한 공감을 느꼈다. 그는 〈그대의 뚜렷한 그림자 밑에서 외(外) Bajo tu clara sombra y otros poemas〉에서 그 경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고, 1937년에 스페인에서 출판된 이 시집을 통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작가로 인정받았다. 고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는데, 여기서 접한 초현실주의는 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멕시코로 돌아와서는 〈탈레르 Taller〉(1939)와 〈엘 이호 프로디고 El hijo prodigo〉(1943)를 비롯한 여러 권의 중요한 문학 평론지를 창간·편집했으며 1970년대에는 또다른 문학 정치 평론지인 〈플루랄 Plural〉을 편집했다. 주요시집으로는 〈통과 금지! No pasaran!〉(1937)·〈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1949)·〈독수리냐 태양이냐? Aguila o sol?〉(1951)·〈태양의 돌 Piedra de sol〉(1957)이 있다. 같은 시기에 수필과 문학 평론을 모은 산문집도 출판했는데, 영향력 있는 수필집 〈고독의 미로 El laberinto de la soledad〉(1950)는 멕시코의 특성과 역사, 문화를 분석한 책이고, 〈활과 금조 El arco y la lira〉(1956)와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는 동시대의 스페인계 중앙 아메리카의 시를 연구한 문학 평론집이다. 파스는 1946년에 멕시코 외교관으로 들어가, 1962∼68년에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재임한 것을 비롯하여 다양한 직책을 맡았으나, 1968년에는 멕시코 정부가 급진파 학생들을 가혹하게 다룬 것에 항의하여 인도대사직을 사임했다. 1962년 이후에 쓴 시로는 〈백색 Blanco〉(1968)·〈동쪽 비탈 Ladera este〉(1971)·〈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1981) 등이 있으며 후기 산문 작품으로는 〈접합과 이합 Conjunciones y disyunciones〉(1970)·〈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atico〉(1974)가 있다. 파스는 마르크스주의·초현실주의·실존주의·불교·힌두교에서 차례로 영향을 받았고 원숙기의 시에서는 풍부한 초현실주의적 형상으로 형이상학적 문제를 다루었다. 그가 다룬 가장 중요한 주제는 성적인 사랑과 예술적 창조성을 통해 실존적 고독을 극복하는 인간의 능력이었다.





비수아바 심보르스카

(Wislawa Szymborska)

1923∼ . 폴란드의 시인. 비평가


비수아바 심보르스카는 1923년 폴란드 서부 코르니크에서 태어나 1945∼48년 대학에서 폴란드문학과 사회학을 공부했다. 1945년 "나는 말을 찾고 있다 Szukam slowa -"I am Looking for a Word")라는 시로 일간지 (Dziennik Dloski)를 통해 등단했다. 사전검열제도가 힘을 잃은 1957년 이후 비수아바 심보르스카는 힘이 넘치는 시와 서평집, 그리고 프랑스시 번역서를 출간했다. 그녀는 1952년과 1954년 작품 초기에는 사회적 현실주의에 순응하는 글을 썼으나 후에는 이 초기 작품들을 작가 스스로 거부했다. 그녀의 시, '글쓰는 기쁨(The Joy of Writing)'의 끝 부분에는 그녀의 관점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글귀가 있다 - "글쓰는 것의 기쁨 / 보존의 힘 / 인간의 손의 복수." 그녀는 "과장 없는, 죽음에 관하여' 라는 시에서 "단 한 순간도 / 영원할 수 없는 / 생명은 없다."라고 말하며 응징을 가한다. 그녀는 1953∼81년 크라코우지방의 문학주간지의 시부문 편집장 및 칼럼니스트로 일하면서 많은 작품을 저술했다. 그녀의 시는 1952∼96년 동안 16권의 시집으로 모아 출판되었다. 그녀는 1991년 괴테상을 수상했고, 1996년 폴란드 펜클럽상 등을 수상했다.

그녀는 다양한 문체와 모순적 정확성을 지닌 시를 통해 단편적 인간 현실에 담겨 있는 역사적·생물적인 상황을 드러낸다.

그녀는 <모래알로 보기 View with a Grain of Sand> (1995), <소리, 느낌, 생각:70편의 시Sounds, Feelings, Thoughts: Seventy Poems>, <다리 위의 사람들 People on a Bridge> 등의 작품을 저술했다





가오 크싱지안

(Gao Xingjian)

1940∼ . 중국태생의 프랑스 소설가, 번역가, 극작가, 연극제작자, 비평가, 예술가


가오 크싱지안은 1940년 중국 동부 강조우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의 중국침략 이후 혼란기에 성장했고 아마츄어 배우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연극과 글쓰기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962년 베이징에서 불어전공으로 학사학위를 받았다. 중국문화혁명기간(1966∼76)에 가오는 재교육캠프에 강제로 보내졌고 이때 가오는 자신의 작품이 가득 들은 가방을 불태워버렸다. 그는 1979년에서야 작품을 발간하고 외국을 여행할 수 있었고, 1980∼87년에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1986년 중국당국에 의해 그의 연극작품들이 금지된 후 그는 열 달 동안을 숲 속과 산, 강을 따라 걸어서 해안에 도착하여 1987년 중국을 탈출했다. 그는 정치난민으로 프랑스에 정착, 현재 프랑스 시민으로 살고 있다.

작가는 글을 쓸 때에 유일하게 자유를 얻는다고 말한다. 그의 뛰어난 소설작품 "영혼의 산 Soul Mountain"은 작가가 중국의 산골지역을 시간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여행하면서 얻은 인상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여러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여 서로를 비춰주고 동일한 자아의 여러 단면들을 반영하면서 개인의 뿌리와 내적 평화, 자유를 추구한다. 작가는 이러한 방법으로 관점의 전환을 창조함으로써 독자에게 모든 신념들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작가는 보편적 타당성과 날카로운 통찰력, 그리고 언어적 정교함을 지닌 작품을 통해서 중국 장편소설과 드라마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는 <영혼의 산 Soul Mountain> 이외에 중국 문화혁명 기간 동안 정치활동가, 피해자, 그리고 관찰자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그려낸 <한 남자의 성경 One Man's Bible>등 다수의 작품을 저술했다.




귄터 그라스

(Gunter (Wilhelm) Grass)

1927∼ . 독일의 시인·소설가·극작가·조각가·판화가.


첫 소설 〈양철북 Die Blechtrommel〉(1959)은 나치 치하에서 성장하여 전쟁에서 살아 남은 독일 전후세대를 대변한 탁월한 작품이다.

그는 고향인 단치히에서 히틀러 청년운동을 겪었으며, 16세에 징집당한 뒤 부상을 입고 전쟁포로가 되었다. 뒤에 뒤셀도르프에서 미술을 배우며 암시장거래, 묘비제작, 재즈 악단 드럼 연주 등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작가협회인 '47그룹'(Gruppe 47)의 격려로 시·희곡을 써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1956년 파리로 가서 〈양철북〉(1979 영화화)을 썼다. 이 악한소설은 다양한 문체들을 구사하는 다채로운 성격의 작품으로서, 폴란드와 독일의 이중적 속성을 지닌 단치히에서 평범한 가정들이 나치즘에 동화되어가는 과정과 전쟁기간의 피폐, 소련군의 진입, 전후 '경제적 기적'을 이룬 독일의 자기만족적 분위기 등 그의 개인적인 체험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들을 상상력으로 왜곡하거나 과장하여 이야기를 엮어나갔다. 무질서한 환상의 저변에는 도덕적 진지함이 깔려 있기 때문에 그는 이 소설로 '전후세대의 양심적인 인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잇달아 중편소설 〈고양이와 쥐 Katz und Maus〉 (1961), 서사소설 〈비참한 세월 Hundejahre〉(1963)을 출판하여 단치히 3부작을 완성했다.

그밖의 소설들도 정치적 시사문제를 다루었는데, 석기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남녀 간의 전쟁에 관한 저속한 내용의 우화 〈넙치 Der Butt〉(1977), 30년전쟁 막바지의 가상적인 작가모임 '1647그룹'(Gruppe 1647)에 대한 〈텔그테에서의 만남 Das Treffen in Telgte〉(1979), 인구폭발과 핵전쟁의 위기 속에서 자식을 낳을 것이냐 말 것이냐로 몹시 고민하는 젊은 부부를 그린 〈출산 Kopfgeburten:oder die Deutschen sterben aus〉(1980) 등이 있다.

사회참여작가로서 그는 서베를린에서 사회민주당의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신의 사회적·문화적 신념을 위해 열렬히 싸우는 한편 정치적인 소논문도 썼다. 그의 극작품들은 외젠 이오네스코, 새뮤얼 베케트의 부조리극과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주제 사라마구

(Jose Saramago)

1922∼ . 포르투갈의 소설가, 산문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1922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수 백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가난으로 인해서 책을 거의 읽지 못하다가 후에 자동차정비공으로 2년간 일하는 동안 리스본의 공공도서관을 이용해 독서할 수 있었다. 1944년 결혼 후 1947년 첫 아이가 태어나던 해 그는 첫 작품 <죄악의 땅 The Land of Sin>을 출간했다. 그후 19년 동안 절필하였다가 1966년 <가능한 시들 Possible Poems>로 다시 작품을 선보였다. 1991년에 그의 작품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복음 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Christ>이 포르투갈 당국에 의한 사전 검열로 카톨릭교에 대해 공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판정되고 그 결과 유럽문학상 후보 추천이 거부되자 부인과 함께 카나리아제도의 란자로테(Lanzarote)섬으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1977년에 출판된 사라마구의 작품, "소설 : 그림과 서법의 안내서 (Manual of painting and calligrapy: a novel)"는 그의 작품세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주제는 예술가, 화가, 문필가의 기원이며, 상당부분 자전적으로 읽힐 수도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사랑과 도덕적 문제들, 작가 개인의 여행에서 얻은 인상, 그리고 인간 개개인 및 사회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그는 풍부한 상상력과 동정, 모순에 바탕을 둔 우화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난해한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썼다.

그의 작품으로는 <발타사르와 블리문다 Baltasar and Blimunda>, <리카르도 라이스가 죽은 해 The Year of the Death of Ricardo Reis>, <무지 : 소설 Blindness: a Novel> 외 다수가 있다.






다리오 포

(Dario Fo)

1926∼ . 이탈리아의 극작가, 배우, 감독, 무대 및 의상 디자이너, 연극음악 작곡가


다리오 포는 1926년 이탈리아 바레스지방의 작은 마을 산지나노에서 태어났다. 1940년 밀란으로 이주하여 브레라예술아카데미에서 공부했고 전쟁 후에는 공예기술학교에서 건축을 잠시 공부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군대에 징집되었으나 탈영하여 숨어 지내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밀란의 브레라예술아카데미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후에 빠렌띠아극단에 들어가 하계버라이어티쇼에 출연하기 시작했고, 이때 후에 그의 45년간의 연극공연 및 제작에서 여주인공으로 출연하며 그의 작품구성 및 제작에 공헌한 Fanca Rame를 만났다.

다리오 포는 여러 해 동안 전세계를 돌며 연극을 공연했고 그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그는 웃음과 심각함을 혼합하여 사회의 불평등과 악습을 부각시켰고 동시에 우리에게 폭넓은 역사적 관점을 제공했다. 포는 진지한 풍자가로서 다양한 측면을 지닌 작품을 저술했다. 그의 독립적이고 명확한 시각은 여러 계층의 호응을 얻었지만, 동시에 작가 자신에게 커다란 위험도 부담하게 했다. 비제도적인 전통은 포의 작품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중세시대의 광대들을 흉내내어 권력을 징계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품위을 고양시키는 작품을 썼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우연한 죽음 Accidental Death of an Anarchist>(1970), <트럼펫과 나무딸기열매 Trumpets and Raspberries>, <얼간이들과 함께 한 놈 The Devil with Boobs> 등이 있다.





시머스 히니

(Seamus Heaney)

1939∼ . 아일랜드의 시인, 수필가, 번역가


시머스 히니는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시 서쪽에 위치한 데리(Derry)지방의 한 농장에서 9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으며, 학업을 마친 후 아일랜드공화국으로 거주지를 옮겨 1976년 이후 더블린에서 살고 있다. 그는 1953년 가족과 함께 고향 데리를 떠나 여러 곳을 옮기며 살았으나 그의 시에는 어린 시절 작가가 성장했던 데리지방이 여전히 '마음의 고향'으로 등장한다. 1966∼72년 영국 퀸즈 대학교에서의 강의를 시작으로 1970-1971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1982년부터는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수사학을 가르쳤고, 1989∼94년에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시를 가르쳤다. 현재 그는 아일랜드 예술가문인협회 회원이며, 미국 예술문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이다. 히니는 언어적 미와 도덕적 깊이를 지닌 작품을 통해 일상의 기적과 살아있는 과거를 고양시키는 작품을 썼다.

그의 작품으로는 <북쪽 North>(1975), <산사나무 호롱등 The Haw Lantern>, <사물 보기 Seeing Things> 외 다수가 있다.






오에 겐자부로

(大江健三郞)(e kenzabur)

1935∼ . 일본의 소설가.


199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일본어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깨뜨리는 듯한 거칠면서도 단조로운 문체로 일본 전후세대의 반항을 간결하게 묘사해냈다.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집안은 전후의 농지개혁으로 사유재산을 거의 잃었다. 1954년 도쿄대학[東京大學] 프랑스 문학과에 입학해 1959년에 졸업했으며, 재학시절 문필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이래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신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960년에는 중국 베이징[北京]에 가서 일본 젊은 작가의 대표로 마오쩌둥[毛澤東]을 만나기도 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그가 정치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된다. 〈분가쿠카이 文學界〉라는 문예잡지에 〈죽은 자의 사치 死者の奢り〉(1957)가 실리면서 처음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창작 활동은 평탄하지 않았다. 〈사육 飼育〉(1958)으로 주요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芥川賞]을 수상했으나, 2번째 장편 〈우리들의 시대 われらの時代〉(1959)는 오에가 점차 사회·정치 비판에만 몰두해가는 느낌을 풍긴다는 악평을 받았다.

오에는 차츰 신좌익 정치사상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1960년 한 우익 청년이 일본 사회당 당수 아사누마 이네지로[淺沼稻次郞]를 암살한 사건에 자극을 받아 1961년 〈세븐틴 セヴンティ-ン]과 〈정치소년 죽다 政治少年死す〉라는 2편의 단편을 썼으나, 후자는 우익 단체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다. 1960년에 결혼했는데 1963년 뇌가 비정상인 아들이 태어났다. 이 불행한 체험을 소재로 하여 〈개인적인 체험 個人的な體驗〉(1964)이라는 장편을 써서 1964년 신초샤[新潮社] 문학상을 수상했다. 여기에서 그는 기형아 출생을 주제로 삼아 인권을 유린당한 전후세대의 문제를 파헤쳤다.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그는 히로시마[廣島]를 방문하여 〈히로시마 노트 ヒロシマ·ノ-ト〉(1965)를 썼다. 1970년대 초반의, 특히 에세이를 중심으로 한 그의 작품에는 핵시대의 힘의 정치에 대한 우려와 3차대전에 대한 의문들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외 작품 중 〈만연원년의 풋볼 万延元年のフットボ-ル〉(1967)로 다니자키상[谷崎賞]을 받았는데, 이 작품은 〈우리들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 われらの狂氣を生きのびる道を敎えよ〉(1969)·〈핀치 런너 조서 ピンチランナ-調書〉(1976)·〈동시대의 게임 同時代ゲ-ム〉(1979)이라는 짧은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1983년 출간된 〈새로운 인간이여 눈을 떠라 新しい人よ目覺めよ〉는 고도의 세련된 문학적 기교와 개인적 고백을 통한 작가의 진솔함이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1994년 12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행한 '애매한 일본과 나'라는 제목의 노벨 문학상 수상소감 연설에서 "일본이 특히 아시아인들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또한 "전쟁중의 잔학행위를 책임져야 하며 위험스럽고 기괴한 국가의 출현을 막기 위해 평화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딘 고디머

(Nadine Gordimer)

1923∼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소설가.







추방과 소외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1991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특권층인 백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15세에 첫 소설을 잡지에 발표했다. 많은 독서를 통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apartheid)이 백인이 아닌 아프리카 흑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게 되었고 차츰 그 정책에 정치적으로 강한 반대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트와터스란트대학에서 1년간 공부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작품활동뿐만 아니라 미국의 여러 학교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첫 단편집은 〈사탄의 달콤한 목소리 The Soft Voice of The Serpent〉(1952)이며 1953 소설 〈기만의 세월 The Lying Days〉을 출판했다.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정책이 남아프리카 국민에게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주로 다루었으며, 개인적인 소외와 사회정의의 실현 사이에서 빚어지는 지속적인 긴장상태를 자세히 묘사했다. 고디머는 이 긴장상태가 결국 인종차별정책, 망명에 대한 국가의 거부, 현정책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무기력한 상황 속에서 마비상태를 낳게 된다고 생각했다. 소설 〈보호론자 The Conservationist〉(1974)로 1974년 부커 매코넬상을 받았다. 후기 작품에는 〈버거의 딸 Burger's Daughter〉(1979), 단편집 〈병사의 포옹 A Soldier's Embrace〉(1980)·〈7월의 사람들 July's People〉(1981)·〈자연의 위안 A Sport of Nature〉(1987) 등이 있다.





카밀로 호세 셀라

(Camilo Jose Cela (Trulock))

1916∼ . 스페인의 소설가.


스페인 내란 후에 활동한 작가로서 가장 인기를 끈 첫번째 소설 〈파스쿠알 두아르테가(家) La familia de Pascual Duarte〉를 통해 폭력과 기괴한 이미지(像)을 강조하는 성향의 '가공주의'(tremendismo)라는 이야기체 양식을 확립했다.

스페인 내란(1936∼39)을 전후하여 마드리드대학에 다녔으며, 내란 기간에는 프랑코 군대에서 복무했다. 셀라는 문학활동이 중단되었던 전쟁 기간이 끝난 후 최초로 부상한 소설가로서, 소설·단편·기행문 등 그의 문학작품들의 구성이나 등장인물의 성격묘사보다는 소품, 세부묘사, 혁신적인 언어구사 등이 특징이다. 현실을 변형시켜 기괴한 인물을 만들어내는 셀라의 경향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으로 〈파스쿠알 두아르테가〉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수차례 살인을 저지른 한 농부의 사회적 배경과 가족환경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스페인 문학이 나아갈 방향으로 간결성과 평이함을 제시하고 있다. 2번째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소설 〈벌집 La colmena〉(1951)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의 마드리드 전경이 펼쳐진다. 셀라의 정확한 관찰력과 다채로운 서술기법은 스페인 시골의 도보여행과 라틴아메리카 국가 방문에 대한 기행문에서 잘 나타나며, 이들 중 대표작으로는 〈알카리아로의 여행 Viaje a la Alcarria〉(1948)·〈미뇨에서 비다소아까지 Del Mino al Bidasoa〉(1952)·〈유대인, 무어인과 그리스도인 Judios, moros y cristianos〉(1956) 등이 있다. 단편 이야기집 가운데는 〈스쳐가는 구름 Esas nubes que pasan〉(1945)·〈칼드웰 부인이 아들과 말하다 Mrs. Caldwell habla con su hijo〉(1953)와 4부작 〈풍차 El molino de viento〉(1956) 등이 있다. 소설 〈산 카밀로 1936 San Camilo 1936〉(1969)는 프랑스 신소설파(nouveau roman school)의 영향을 보여주었다. 1950년대 중반에 마요르카에 정착하여 문학 평론지를 발간했고 여러 책을 출판했다. 1968년부터 여러 권으로 된 성(性)에 관한 개괄서인 〈비밀사전 Diccionario secreto〉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1957년에는 스페인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나기브 마푸즈

(Naguib Mahfouz, Najb Maf라고도 씀. )

1911∼ . 이집트의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아랍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1988)을 받았다.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카이로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934∼71년에 이집트 행정부의 문화 부문에서 일했다. 〈라두비스 Rdbs〉(1943)를 비롯한 초기 작품들은 고대 이집트를 무대로 했지만, '카이로 3부작'으로 널리 알려진 그의 대표작 〈알술라시야 AlThulthiyya〉(1956∼57)에서는 현대 이집트 사회를 묘사했다. 이 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 파루크 왕을 몰아낸 1952년 군사 쿠데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카이로에 살던 여러 가문의 3대에 걸친 삶을 그리고 있다. 이 3부작은 20세기 이집트인의 사상·태도·사회상의 변화를 한눈에 꿰뚫어볼 수 있게 해준다. 그뒤에 쓴 작품들에서는 옛 이집트의 왕정, 영국의 식민주의, 현대 이집트 등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묘사했다. 주목할 만한 소설 가운데는 여성이나 정치범 문제 등의 사회문제를 다룬 것도 있다. 〈게벨라위의 아이들 Awld ratin〉(1959)은 종교를 주제로 한 소설로서 후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마호메트·모세를 비롯한 종교적 인물들을 등장시킨 까닭에 한동안 이집트에서 판금당했다. 그밖의 유명한 소설로는 〈도둑과 개들 AlLi wa-al-Kilb〉(1961)·〈거지 Al-Shadh〉(1965)·〈미라마르 Mirmr〉(1967)가 있다. 단편소설 작가로서의 그의 업적은 단편집 〈신의 세계 Duny Allh〉(1963)에서 드러난다. 마푸즈는 40여 편의 장편소설과 여러 단편집 외에, 30여 편이 넘는 영화대본과 여러 편의 희곡을 썼다.






올레 소잉카

(Wole Soyinka)

본명은 Akinwande Oluwole Soyinka.

1934∼ . 본명은 Akinwande Oluwole Soyinka.


나이지리아의 극작가·시인·소설가·비평가.





198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인류 발달의 장애물들을 비극적으로 느끼며 풍자적 문체로 현대 서아프리카에 대한 글을 썼다. 요루바족인 그는 거번먼트 칼리지와 이바단에 있는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다녔고, 1958년 영국의 리즈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했다. 나이지리아에 돌아와 국립극장 '가면 1960'(후에 오리선 극장이 되었음)을 설립했고, 나이지리아의 독립을 축하하기 위한 첫번째 중요한 희곡 〈숲의 춤 A Dance of the Forests〉을 썼다. 이 희곡은 낭만적 전설을 벗겨내고 현재가 더이상 과거와 같은 황금시대가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신생국가를 풍자했다.

1956년 이바단에서 초연된 〈사자와 보석 The Lion and the Jewel〉(1963 출판)과 같이 좀더 가벼운 분위기의 희곡에서는 거만하고 서구화된 학교 선생을 조롱했고, 〈제로 형제의 시련 The Trials of Brother Jero〉(1960)·〈제로의 변신 Jero's Metamorphosis〉(1972) 등의 희곡에서는 어수룩한 신도들을 이용해 벼락부자가 된 교회의 영악한 설교자를 비웃었다. 그러나 〈콩기의 수확 Kongi's Harvest〉(1965, 1966년 다카르에서 열린 제1회 흑인 예술제의 개막극이 됨)·〈길 The Road〉(1965)과 같은 좀더 진지한 희곡들에서는 아프리카의 권위주의적인 통치와 나이지리아 사회 전반에 대해 환멸을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강한 종족 The Strong Breed〉(1963)은 매년 부락이 지은 죄에 대한 속죄양으로 마을 사람 중에서 국외자 한 사람을 골라내는 전통적인 의식에 대한 관심이 표현된작품이다. 그의 희곡에는 요루바족의 민속 및 종교에 깊게 뿌리를 둔 주제 및 극적 기?/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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