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 富者
장시간 비행할 일이 있어 심심풀이로 고른 책이다. 불과 하루 만에 끝내고 여행도 가기 전에 정리한다. 필자는 김준태로 한국철학 전공의 박사인 모양이다. 유교는 본래 이익이나 부를 부정하지 않는다. “부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바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는 것이 아니면, 누리지 않아야 한다.” 강조한다.
재물을 나누지 않으면 악취가 풍긴다는 경주 최부자부터 얘기가 시작된다. 조선 중기 무인 최진립으로부터 손자 최국선에 이르러 부잣집 면모를 갖춘단다. 11대 최현식까지 10대 이상 300년에 걸쳐 부자로 내려온 집안이다, 부자의 힘은 사회적 책임을 다한대서 비롯되었고, 근검절약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지 않았으며 이익을 공유하고 베풂으로써 수많은 위기를 이겨냈다.
함께 행복해야 나도 잘산다는 윤선도가. 선조 때 형판 윤의중의 자녀 삼 남매가 분재기인 ‘윤유기동생회회문’은 노비 384구, 전답 약 40만 평이었다. 손자 윤선도는 간척 사업을 대대적으로 해서 확장했다. 조부가 자손이 끊어져 윤선도가 입양되었는데 예조입안서가 보물로 지정돼 있어 구경하러 간 기억이 있다. 최고 경영자가 혼자 잘났다고 회사의 수익이 나지 않듯이 직원이 행복해야 회사도 행복해진다. 윤선도는 이점을 강조했고 자손들이 그의 당부를 잘 따른 덕분에 해남윤씨 가문은 오랫동안 번창했다.
살을 내어주고 뼈를 지킨 김만일.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에 김만일 묘가 있다. 숭정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이다. 도총관은 정2품 관직으로 오늘날 장관급이다. 개국공신 김인찬의 후손으로 지손이 제주도에 내려와 정착한 것이다. 말 목장을 대규모로 경영하며 막대한 부를 이룬다. 광해군 때 말 목장 관리 실태를 감독하려 내려온 양시헌이 김만일과 세 아들을 체포했다. 보고를 받은 광해 임금은 격노한다. 양 시헌이 어찌 멋대로 형을 가할 수 있단 말이냐? 양시헌을 파직한 뒤 그의 죄를 처벌하라. 그리고 어느 부서에서 양시헌을 차출해 보냈는지 해당 책임자도 문책하라 지시한다.
작은 이익도 놓치지 않는다. 황 수신. 황수신은 황희 정승의 아들로 그도 영의정을 역임했다. 그자 죽자, 그의 행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는 체격이 웅장하고 성품이 관대하여 재상다운 풍모가 있었다. 정승이 되어서는 일의 큰 얼개를 잡는 데 힘썼다. 하지만 세상의 부침에 따라 쉽게 처세를 바꾸었으며, 누대에 걸쳐 조정에 봉직했으면서도 볼 만한 업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뇌물이 폭주하였는데, 한 이랑의 밭이라도 더 가지러 탐하고 한 사람의 노복이라도 더 차지하려 다투었기 때문에, 대간으로부터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길, ”성이 황이어서인지 마음도 누렇구나“라고 하였다. 실록의 기록이다.
지역의 특성을 활용한다. 김만덕. 제주의 기녀 김만덕이 재물을 풀어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해 살렸다고 목사가 장계로 보고하였다. 상을 내리려 하자, 만덕이 사양하면서 금강산 유람하길 원하니 허락하고, 인근 고을에서 양식을 지급하게 하였다. 만덕은 1812년 죽으며 양아들의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제주도의 가난한 백성을 위해 써달라며 기부했다. 부자의 사회적 책임을 보여준 훌륭한 모범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자신을 낮추어라. 김근행. 김근행은 선조 때 임금을 호종한 공로로 공신이 된 역관 김득기의 아들로 효종 때까지 최일선에서 활동했다. 그는 돈을 벌려고 나서지 않았다. 일본 역관으로 대마도 도주와 친분이 두터웠다. 인연으로 화약 제조에 필요한 유황을 일본에서 많이 구해 조정에 사들였다. 청나라의 문책을 받지 않을 양을 조절해 공급한 것이다. 그는 자손들에게 결단코 사치하지 말고 물건을 자랑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는 이런 사람은 반드시 망할 것이니 근처에 가지도 말라고 했다. “집 앞에 수레와 말이 법석대는 자, 무뢰배 건달이나 이득을 챙기려는 무리를 모아다가 일의 향방을 따지고 이문을 취하려는 자, 점쟁이나 잡술가를 청해다가 공적인 일이건 사적인 일이건 길흉을 묻는 자, 거짓으로 말과 행동을 꾸며 선비인 체하는 자, 아침의 말과 낮의 행동이 다른 자, 으슥한 길에서 서로 작당하는 자, 항상 위 지리에 있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자는 반드시 망하고 말 걸세. “내가 누가 라인이다, 누구의 파벌에 속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면, 정적이 그 권세가를 공격할 때 약한 고리인 나부터 공격 표적으로 삼을 테니 말이다. 서인과 남인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혼란한 정국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높은 사람을 위해 일하더라도 반드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살피고 특정인에게 줄 서지 말라는 그의 당부는 지금을 살아가는 유리에게도 유용한 처세들일 것이다.
신뢰 자본이 힘이다. 한순계. 선조 때 노수신, 성혼, 이이가 자주 찾아와 얘기를 나눈 사람이 한순계다. 시장에 숨은 市隱 선생이라 불리며 칭송받던 개성 유기 상인이다. 무반가문의 양반이지만 궁핍하여 장사한 인물이다. 기술 혁신으로 품질을 향상하고 정직하여 경쟁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틈나면 용광로 불 옆에서 글을 읽고 시를 지었다. “푸른 물은 산을 싫어하지 않고/ 푸른 산은 물과 어울리네/ 넓고 큰 산과 물속에/ 오가는 한가한 한 사람“이라는 시 ‘산수가’가 지금도 유명하단다.
담대하게 승부하라. 임상옥. 의주 상인 임상옥은 재물을 잘 늘었다. 청과 조선 양국의 이익을 움켜쥐고 왕실처럼 부를 누렸으니, 북경 사람들은 지금도 그의 이름을 거론한다. 순조의 외삼촌이자 국가 경제를 총괄하는 박종경이 모친상을 당하자, 그는 백지어음을 부의금으로 내서 호감을 산다. ‘문일평’의 글에는 백지어음이 4,000냥으로 유통되었다고 한다. 뇌물로 사업권을 가져온 것이니, 칭찬할 일은 못 되겠지만 통 큰 행동임은 분명하다. 그는 무릇 치킨 게임에서 승리하려면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 동시에 상대방이 예측 불가능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공포를 심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이 회계업무를 보는 서기가 70명이었고, 한 번에 700명의 손님을 대접할 정도의 재산 규모였단다.
위기는 기회다. 김세만. 숙종 때 경강의 상인 김세만은 쌀 100석을 운반하다 황해도 용매진에서 배가 침수한다, 수영 군사들이 구조해 목숨을 건지고 쌀도 무사했다. 그는 쌀을 전부 군영에 기부한다. “제가 만약 물에 빠져 죽었다면 어차피 이 쌀은 모두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었을 겁니다, 다행히 살아났으니, 이 쌀을 진영에 복무하는 병사들을 위해 씀으로써 목숨을 구해주신 ‘호생지덕’으로 갚고자 합니다. “그는 위기는 언제나 올 것이니 대비를 철저히 한다. 우수한 항해사를 고용해 안전성을 제고했다. 이는 신용을 높여 고객의 만족도를 높인 것이다. 아울러 역량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으면 위기에 취약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업종을 확장했다. 해상운송과 여객주인업을 병행했다. 이는 시너지를 얻어 막대한 이윤을 창출한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역량을 강화해 성공을 거둔 케이스다.
적을 줄여라, 변승업 가문. 허생전의 허생이 서울 부자 ‘변계영’을 찾아가 ”내가 무엇을 좀 해보려고 하는 데 집이 가난하여 돈이 없소, 그대가 1만 냥을 빌려줄 수 있소? “묻자 바로” 좋소“하면서 지금 돈 36억을 담보도 없이 빌려준다. 빌려준 부자의 변을 들어보자. “남에게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대개 자기 능력을 거창하게 떠벌리고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임을 강조한다. 한데 낯빛이 비굴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기 일쑤다. 저 손님은 비록 차림새는 남루하지만, 말에 군더더기가 없다. 눈빛이 당당하여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그가 재물이 없어도 만족하는 자라는 것을 의미하니, 그가 시도해 보겠다는 일 또한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변계영의 아들이 변웅성으로 9남1녀을 둔다. 아들이 변승업으로 역관이다. 장씨 가문 ‘장현’을 사위로 맞아 그의 당고모가 장희빈의 외조모다. 그는 정치자금을 뇌물로 제공했고, 철저하게 몸을 낮춤으로써 살아남았다. 만년에 50만 냥, 지금 가치로 1,800억에 이르는 채권 장부를 불태워버린다, 그의 병환에 아들이 채권을 회수하려 할 때다. 아들은 유산으로 받고 싶은 것인데, 그는 한양에 내 돈을 빌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 돈을 돌려받을 생각을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내가 보건대, 권세가 있거나 재물을 모은 사람 중에서 삼대를 넘기는 이가 없었다. 지금 이 돈을 흩어버리지 않는다면, 장차 우리 집안에 재앙이 닥칠 것이다.” 그러나 변승업이 죽은 후, 그의 집안은 양자들끼리 송사를 벌여서 왕에게 단단히 찍힌다. 내부 분열로 상처를 입고, 그의 가문은 자취를 감춘다. 변승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유효한 교훈을 준다. 돈은 사람이 벌어다 주는 것이다. 좋은 인재를 발견하면 과감하게 투자할 필요가 있다.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부 리스크를 잘 관리해야 한다. 적을 줄이고 공격당할 여지를 미리 차단한 점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기업이 자손의 재산 다툼으로 망하는 모습은 요즘도 낯설지 않다. 후계 문제를 정리해서 내부 갈등을 예방해야 한다. 내가 죽은 뒤 자손이 어찌 행동할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내가 그 빌미를 제공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주장한다.
2024.12.17.
조건의 부자들
김준태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