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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 진도군에 본관을 둔 성씨. [연원] 진도김씨의 시조 김국빈은 중국 후한(後漢) 사람으로 위․촉․오의 세 나라로 갈려 싸우던 건안(建安)의 난리를 피해 고국을 떠나 배를 타고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죽포(竹浦)에 도착했다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 미추왕(味鄒王, 262~284)의 부름을 받아 경주에서 군국정사(軍國政事)라는 벼슬을 살았다. [입향 경위] 실제로 진도를 본관으로 득성(得姓)한 사람은 왕건이 나주를 공격하기에 앞서 진도를 공략할 때 협력한 23세손 김경호(金敬浩)이다. 김경호는 940년,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건국 유공자들을 포상할 때 옥주후(沃州候)가 되었다(옥주는 진도의 옛 이름이다). 이후 그 가족들은 개경으로 옮겨 살았다. 개경으로 옮겨간 후 진도김씨의 가세는 번창하였다. 김경호의 큰아들 김구석(金九碩)은 고려 정종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냈고, 15세손 김형숙(金亨淑)의 부인은 진도의 임회박씨였다. 그의 조카 김경조(金慶祚)는 고려 말기 이방원에 의한 정몽주 숙청 때에 정몽주와 함께 죽어, 지금도 선죽교에 세워진 비에 진도사람 김경조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48세손 김춘림(金春霖, 1589~?)대에 이르러 고려 말 우의정을 지낸 홍주이씨 이서(李舒, 1332~1410)의 9대 손녀를 부인으로 맞는 등 명문을 이루었다. [세거 현황] 진도김씨는 개경으로 옮겨간 후 경기도에 2파, 황해도에 3파, 영남에 4파가 있었으나, 오늘날은 개성파만 남게 되었다. 진도김씨 개성파는 주로 개성·칠원·개풍 등지에서 살다가 한국전쟁 때 그 일부가 남하하여 서울과 부산에 주로 살고 있다. [묘역] 옥주후의 작위를 받았다는 김경호의 묘소는 ‘옥주부 동쪽 20리 사현(沙峴)에 있다’고 했고, 그의 아버지 묘는 낭산(郎山)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사현은 모래재, 몰고개의 한문표기로, 지금의 진도 향동재 정도로 비정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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