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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이야기

한산인 유정공과 설죽공에 엮힌 사연을 통해 문중의 부흥에 대해 논하여 보다.

작성자해은 이대원|작성시간19.03.17|조회수226 목록 댓글 8

작년이맘때쯤 필자의 문중인 소호문중 수은공파와 관련하여 글을 쓰다가 바쁜일들이 있어 잠시 미루어 둔것이 있다.


한산이씨 수은공파는 시대의 변화속에서 큰 일들을 많이 하였고 학문의 추구만 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시대가 어려울때는 다양한 형태로 일어나서 의를 실천하였다.


시조이신 수은 이홍조 할배는 청나라가 처들어왔을때는 의병의로 창궐하였고,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죽은 사후에는 나라의 예도를 위해 만인의 청원 만인소로 일어섰으며,
이후 장헌세자 즉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에서도 일어났으며


위정척사 운동을 통한 서원철폐령 반대 상소에도 우뚝 일어나 상소하였고 일본이 국권을 훼손할때는 최초 의병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명성황후 시해후에도 항일운동에 참여하였으며 항일운동의 정신적지주와 더불어 일제강점기에도 항일운동의 몸소 실천한 가문이다.


이는 개항이후 위정척사운동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상소 단발령으로 시작된 항일운동은 1945년 광복을 맞이할때까지 대략 80년간 지속된 항일운동 실천은 2대-3대에 걸친 문중의 수난시기였다.


또한 광복되자 얼마지나지 않아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되었고 소호문중의 많은 유산이나 유물은
이시기 동안 서원이나 정자 큰 한옥집 같은 종가 및 소호문중의 족친 가구등은 엄청난 소실을 보았다.



그래서 문중의 힘을 다시 회복하고 흩어져있는 소호문중 일가들의 소식을 파악하고 추스러기 위해 서산서원 고산사원 중심의 복원과 족보의 간행이 다시 시작되었던 것이다.



1988년 소호문중족보는 이보다 20년 정도 앞선 구족보에 일부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그러면 소호문중의 한국전쟁이후 족보간행 구족보 즉 1960년대 최초의 족보는 누가 주도하여 만든것일까?


소호문중 전체가 한 것은 맞지만 중심인물이 없다면 이룰수도 또한 학식있는 인물이 아니면 해낼 수가 없는 일인것은 누구나 다 아실것이다.


그 단추는 사실 이전에 저자가 올린 기사에 있다. 조선의 마지막 전통 한약방을 운영하신 한산이씨
이영구( 李永求) 이시다.



자가 양원(養元)이며 1909년에 출생하셨고 1970년 졸하였다. 묘소는 안동 일직 원동(원리) 서산서원근처이었으나 몇해전 이전하였으며 슬하에 1남 3녀 두었다.


지금은 공의 후손들은 모두 대구에 거주하고 있다.



영자구자 할아버지는 학식이 매우 높으셨으며 살아생전 당시 소호문중의 종가 어르신들도 영구할아버지의 이야기에는 모두 고개를 숙여서 경청하고 모든 일에 잘 참여하셨다고 한다.




그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서산영당 (지금의 서산서원)의 한때 실질적 훈장으로 역할을 하신 한산이씨 휘 영구의 조부이신 대은공 이수영(형)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가문의 수난기 마다 일어선 큰종가 수은종택과 대산종택이 있었다.



대산 이상정 소산 이광정 약와 이현정 사후는 면암 이우 선생이 있었고 면암 이우 사후에는 면재 이병운 소암 이병원이 있었다. 그 이후에는 필자의 백부 신암 이병하 설죽 이병은이 있었다. 그 이후에는 석정 이수학 대은 이수영 긍암 이돈우가 있었고 그 이후에는 존칭 생략 이성구 이영구가 있었고 그 이후에는 수은종택 이장원이 있었고 지금은 이경원 이방수 이동수가 소호에 있다. 이외에 언급못한분들이 많이 있지만 지면상 생략하였다.



2010년부터 차츰 번역되고 디지털화 되기 시작한 승정원일기는 이제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소중한 유물이되었고 이로 인해 저자는 영남만인소의 소두였던 면암공 이우 선조님이 증직되어 2품에 해당하는 상당직의 벼슬이 내러온것도 최초로 소개하였다.



목은선생연보를 증직한 대은공 이수영은 당시 고은사 주지스님이셨던 함홍당 치능 대선사가 평소 매년 안부를 묻고 친하게 지내셨던 분이었으며 지금 함홍당 치능 대선사의 행적 사적비는 의성 고은사 입구에 위치하여 있다.


그 행적중 일부가 함홍당집에 나오며 최근 번역되었다.


그 내용중 많은 부분은 대은공 이수영과 공의 부친인 설죽공 이병은 이야기이다.


대은공 이수영의 많은 이야기중 관직전수는 아래에 나온다.

승정원일기

고종(高宗) 26년 기축(1889, 광서) 1월 30일(병자) 맑음


26-01-30[68] 김윤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김윤수(金胤洙)를 예빈시 주부로,
김상묵(金相默)ㆍ

이수영(李秀瑩)ㆍ

정복원(鄭宓源)을 의금부 도사로,

강한경(姜漢庚)을 감찰로, 김인근(金仁根)을 평해 군수로, 민영헌(閔泳憲)을 예빈시 주부로,


김도원(金道源)을 감찰로, 이준하(李俊夏)를 연일 현감으로, 김기영(金基永)을 사천 현감으로, 이근석(李根碩)을 의금부 도사로, 이시홍(李時弘)을 전옥서 주부로, 박원신(朴元信)을 감찰로, 김여혁(金麗赫)을 평해 군수로, 홍우덕(洪祐德)을 인의로, 김기호(金基鎬)를 전적으로, 정재호(鄭在鎬)를 감찰로, 김학수(金學洙)를 연일 현감으로, 권용(權溶)을 의금부 도사로, 고용(高溶)을 전적으로, 박내춘(朴來春)을 감찰로, 손홍직(孫洪稙)을 평해 군수로, 민재승(閔載升)을 의금부 도사로, 성하영(成夏永)을 사천 현감으로 삼았다.


출처번역 한국고전번역원 | 최연숙 (역) | 2000



승정원일기 2981책 (탈초본 136책) 고종 26년 1월 30일 을해[병자] 57/93 기사 1889년 光緖(淸/德宗) 15년

○ 傳于趙秉翊曰, 平海郡守申鴻模, 延日縣監具永書, 郭山郡守尹喜民, 前府使白東奭, 順川郡守安秉宅, 泗川縣監成夏永, 竝內禁將除授。 以金胤洙爲禮賓主簿, 金相默·李秀瑩·鄭宓源爲禁府都事, 姜漢庚爲監察, 金仁根爲平海郡守, 閔泳憲爲禮賓主簿, 金道源爲監察, 李俊夏爲延日縣監, 金基永爲泗川縣監, 李根碩爲禁府都事, 李時弘爲典獄主簿, 朴元信爲監察, 金麗赫爲平海郡守, 洪祐德引儀, 金基鎬爲典籍,鄭在鎬爲監察, 金學洙爲延日縣監, 權溶爲禁府都事, 高溶爲典籍, 朴來春爲監察, 孫洪稙爲平海郡守, 閔載升爲禁府都事, 成夏永爲泗川縣監。



그러나 오늘 필자가 논하고자 하는 요지는 사실 위의 내용이 아니다.



필자의 방계 족질이신 운계 이희준 교수님의 선조이신 유정공이다.



운계 이희준 교수님의 선조 유정공은 우리 소호문중에 당시 1850년대 전후 학업을 배우러 오셨고 석정공 이수학의 도움으로 현재 구미 근처 문중에 소호문중에서 배워간 목은선생연보 판각본을 보관하고 계시다.



그래서 그 인연으로 우리 고산서원 향사에도 오셔서 큰 도움과 빛을 주고 계신다.


몇해전 운계 이희준 교수님은 필자만 만나면 당시 소호에 학업을 배우러 다녔던 이야기를 하면서 누구에게 배웠는지 궁금해 많이 하셨다.


그때마다 사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아니면 선조님의 인연 우정 등등 때문일거라 생각을 하고 당시 필자의 선조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말씀해주고 싶었지만 그럴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마땅한 근거 자료를 바쁘다는 이유로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쩌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바로 대은공 이수영의 부친 설죽공 이병은이었을 확률의 높은 상관관계를 알려드릴수 있으며 설죽공 이병은은 면암 이우의 제자이며 면암 이우의 부친이 소산 이광정으로 목은선생연보의 최초 저자이다.


그 이유는 성주 한개마을 반촌의 가장 높은 벼슬을 하였고 불천위제사로 모든 후손들이 존모하는 응와 이원조 선생이 찬한 설죽공 이병은 관련 묘비석 때문일것이다.


해석해보다 시간상 완성을 못하고 처음 일부만 보면 바로 그 근거가 나온다.


歲己未。余與雪竹李公會話於高山。
기미년 1859년 고산서원에서 설죽공이병은과 남아서 대화한 이후 이후 생략

臨別次隱侯詩以贈。未久承公訃。又次其韻以輓。歲寒相期之意。遂成千古。悲夫。日其孤秀瑩。袖李侍讀敦禹狀。請余墓銘。其忍以老洫辭。按狀公諱秉殷字質汝。韓山人。上世有稼亭牧隱兩先生。入本朝大司諫允蕃。贈吏參希伯。至諱弘祚。以前縣監見昏朝政亂。隨外大父西厓柳先生南下遂家焉。號睡隱。高祖諱碩輔。曾祖諱再知。俱隱德不仕。祖諱顯靖弘文校理。從再從兄大山先生學。號約窩。考諱敬進士。樂善好義。見重於宗黨。妣慶州崔氏。處士興浩女。以婦德稱。健陵壬寅八月四日生公。自幼剛介。記性過人。


及冠學于族叔俛庵公。公敎人一遵大山齋居學規。公承受不懈


족숙 면암 이우공에게 나아가 학업을 전수 받았으며 설죽공 이병은은 숭고하고 존엄 존모하신 대산이상정의 대산제의 학규에 따라 남들 제자를 가르쳤으며 공은 가승하여 배우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즉 면재공 소암공 사후 대략 1830-1860년경 소호에 학업을 배우러 왔다면 이는 바로 필자의 설죽공 이병은 이었다.

論陰陽之生。皆始於下。公言陽生於下。陰生於上。引朱詩以證之( 출처 응와 이원조가 찬한 설죽공 내용 일부 )

바로 고산서원에서 음양의 생겨남을 논하고 태극도설 심경 성리설 등 수없이 많은 해석과 영남삼로로 불리우신 백불암 최흥원 대산 이상정 남야 박손경 중 대구 팔공산에 있는 칠계 마을의 백불암 최흥원의 백불암집 교정을 위해 특별 초빙으로 모셔서 교정하신분이 설죽공 이병은 이었으며 지역의 향시에 매번 장원을 하고도 면암 이우의 영남만인소 사건으로 이후 관직을 하지못한 사연을 안고 지내신 분이셨다.


이는 다방면의 자료를 나름 분석해보고 전주류씨 안동김씨 진성이씨 당시 성현의 자료나 당시의 일부 행적을 찾아 쌓은 신뢰성이 높은 확률의 근거이다는 잠정 결론을 내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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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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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운계 희준 | 작성시간 19.03.18 직각공 승오의 목은선생연보 발문에 나오는 승학과 백곡종인 상우 ㅡ 유정공 중. 유정공 은 설죽공의 제자이다고 보학적으로 아래와 같이 정리한 대원일가님 대단히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 방조 유정공 연구에 좋은 자료로 하겠습니다
    학맥이 대산 소산을 지나고 설죽 이병은에 이르렸고 성주 이씨 응와 이원조가 안동고산서원에 설죽공에게 배우려왔고 공의 행적을 묘비 찬해 기록으로 남겼다.
    及冠學于族叔俛庵公。公敎人一遵大山齋居學規。公承受不懈
    족숙 면암 이우공에게 나아가 학업을 전수 받았으며 설죽공 이병은은 숭고하고 존엄 존모하신 대산제의 학규에 따라 남들 제자를 가르쳤으며 공은 가승하여 배우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
  • 작성자운계 희준 | 작성시간 19.03.18 않았다
    대산 소산 약와
    면암
    면재 소암
    신암 설죽ㅡ대은의 부
    석정 ㅡ승학 ㅡ 대은 긍암. 유정 ㅡ 백곡종인

  • 답댓글 작성자해은 이대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03.18 교수님 한가지를 더 첨부하자면 "치"의 영향이 전주류씨 수곡의 류치명의 치자 항렬의 영향이 아닐까도 연구해보았지만 연관관계를 찾기가 힘든부분이 있었습니다

    대산소산은 외조부 밀암 이재 본가영향
    약와는 대산의 제자 면암이우 대산소산 영향
    이후 면재 소암 신암은 천사 김종덕과 동암류장원

    설죽은 면암이우

    석정이수학 = 승학은 면암이우 김굉 봉화 강씨

    대은 긍암은 정재 류치명

    응와집에 보시면 설죽공 제문이 나오면 긍암집에 보시면 설죽공 행장을 보시면 긍암 이돈우가 설죽공에게 배움을 청한부분이 나옵니다. 이로인해 1850년 전후는 설죽공이 소호에 온 사람들을 지도한것이 정확하다고 봅니다
  • 작성자해은 이대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03.18 설죽공의 형 신암공과 대산의 증외손 정재 류치명은 그당시 한양에서 있었습니다 정재류치명의 행장에 나옵니다.
  • 작성자운계 희준 | 작성시간 19.03.18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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