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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촌잡록(道村雜錄) 상(上)

작성자삼산노주|작성시간16.05.26|조회수36 목록 댓글 0

 

도촌잡록(道村雜錄) 상(上)

 

요순(堯舜) 이후로 공맹(孔孟) 이전까지 여러 성현들이 공부한 것을 보면 모두 경(敬)을 위주로 하였는데, 한당(漢唐) 이후로는 유자(儒者)들이 경을 일삼을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정자(程子)의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경에 대한 공부를 할 줄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성현들의 심법(心法)의 요체를 얻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공부와 관련하여 자세한 과정을 논한 것도 이때에 와서 비로소 구비되었는데, 그 내용은 전성(前聖)이 밝히지 않은 것을 드러내 보여 준 것이었다. 이는 정자가 여기에 힘을 기울여서 자득(自得)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말을 보면 모두가 실제로 겪으며 체험한 데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경은 우리들이 종신토록 행해야 할 사업이니, 한때 행하고는 곧바로 그만둘 성격의 것이 아니다. 대개 경에 입각하면 덕행이 확립되지만, 불경(不敬)하면 덕행이 폐기되고 만다. 군자가 덕행을 그만둘 때가 어찌 있겠는가. 학자가 힘을 기울여 행하면서 오로지 이 경을 위주로 공부해야 할 것이니, 성현의 지위에 이르는 일도 이 공부를 순일하고 익숙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사람 자신이 반드시 수치(修治)하려는 마음을 가져야만 비로소 경 공부를 할 수가 있다. 수치라는 것은 불선(不善)의 요소를 제거하고 선으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경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오직 불선의 요소를 제거하려고 하기 때문에, 불선의 요소가 있을까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불선의 요소를 제거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불선의 요소가 있다 한들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또 불선의 요소가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경(敬)을 어디에다 쓰겠는가. 따라서 불선의 요소를 제거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지경(持敬) 공부를 한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거짓이 아니겠는가.맹자(孟子)는 우산지목장(牛山之木章)에서, 사람의 양심(良心)은 본래 모든 사람에게 있는데 물욕(物欲)에 의해 곡망(梏亡)된다고 하였고, 말미에 “잡고 있으면 보존되고 놓아 버리면 도망친다.〔操存舍亡〕”는 공자(孔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물욕에 의해 곡망된다고 한 것은 그 병통을 이야기한 것이요, 인용한 공자의 말은 그 병을 치유하는 방법을 이야기한 것이다. 대개 곡망되는 것은 마음을 놓아 버리는 데에서 연유하는 것이니, 제대로 잡고 있으면서 보존하면 자연히 곡망되는 폐해가 없어질 것이다. 그러고 보면 조존(操存)하는 공부야말로 양심을 보존하여 지키고 물욕의 폐해를 막는 방법이 된다고 하겠다.《맹자》에서는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도망친다.〔操則存 舍則亡〕”라고 하였고, 《대학(大學)》에서는 “마음이 보존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보아도 제대로 보이지 않고 들어도 제대로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참맛을 알지 못한다.〔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라고 하였는데, 이 두 가지 말이 존양(存養) 공부에 지극히 친절하다. 정자(程子)가 “마음을 강자 안에 두고서 밖으로 치달리지 않게 해야 한다.〔心要在腔子裏〕”라고 하고, 또 “이미 놓친 마음을 붙잡아서 다시 사람 몸 안으로 들어오게 해야 한다.〔將已放之心 反復入身來〕”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뜻이다. 심술(心術) 공부를 하는 자는 항상 이 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마음이 보존된 상태에서는 허령(虛靈)한 지각(知覺)이 내면에 있기 때문에 온갖 잡념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는 성현의 마음이라 할지라도 역시 이와 같을 뿐인데, 단지 성현은 이와 같은 상태를 오래 지속할 수 있는 반면에, 학자는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진실로 공부가 순일해지고 익숙해져서 오래도록 잃지 않게 되면 바로 깊은 경지로 나아가게 될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성현을 배우는 요체라고 할 것이다.공자가 이르기를 “평상시에 집에서 거처할 적에도 공손한 자세를 유지하고, 일을 맡아서 처리할 적에도 공경히 해야 한다.〔居處恭 執事敬〕”라고 하였다. 거처공(居處恭)은 이 마음을 내면에 두는 것이고, 집사경(執事敬)은 이 마음을 일 위에 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동정(動靜) 간에 마음을 두지 않는 때가 없어서, 조존(操存)하는 공부가 동정 간에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다. 만약 일을 맡아서 처리할 적에 이 마음을 그곳에 두지 않는다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단지 정(靜)할 때에만 공력을 기울이고 동(動)할 때에는 상관하지 않는다면, 그 공부가 한쪽에 치우쳐서 주밀(周密)하지 못하게 된 결과, 마음을 붙잡는 때는 적고 놓치는 때가 많아져서 마음이 보존되는 경우는 적고 도망치는 경우가 많아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공부한다면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맹자》 우산지목장(牛山之木章)은 심법(心法)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앞에 나오는 두 대목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본래 선한데 물욕에 해침을 당해서 잃게 됨을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말하기를 “제대로 길러지기만 한다면 어느 것이든 자라나지 않는 것이 없고, 제대로 길러지지 못하면 어느 것이든 시들지 않는 것이 없다.〔苟得其養 無物不長 苟失其養 無物不消〕”라고 하였는데, 이는 제대로 기르면 길러지고 제대로 기르지 못하면 시드는 것이야말로 만물이 모두 그러하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사람의 선한 마음이 물욕에 해침을 당해 잃게 되는 것 역시 제대로 기르지 못해서 시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말미에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도망친다.〔操則存 舍則亡〕”는 말을 인용하였는데, 이것은 제대로 기르고 제대로 기르지 못하게 되는 이유를 말한 것이다. 무릇 방목(放牧)하고 벌채(伐採)하여 곡망(梏亡)하면서 제대로 길러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모두 마음을 놓아서 도망치게 하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 만약 항상 붙잡아 보존하면 물욕이 해칠 수 없게 되어 이 마음이 자연히 내면에 있게 될 것인데, 이처럼 물욕의 해침을 당하지 않고서 그 마음이 보존될 경우, 보존된 그 마음이 바로 양심(良心)이니, 이것은 양심을 제대로 길러서 자라나게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마음을 붙잡아 보존하는 공부야말로 양심을 기르는 방법이 된다고 할 것이다.《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떠날 수가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는 것이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고 하였다. 이것은 도는 떠나서는 안 되고 비도(非道)는 당연히 떠나야 함을 말해 주고 있다. 대개 어떤 일이든 간에 대소(大小)를 막론하고 오직 도와 비도만이 있을 뿐이다. 도라는 것은 사리상 당연(當然)한 것이요, 그 이외에는 모두가 비도이다.오직 군자만이 항상 도를 따르려고 노력하면서 비도를 미리 막으려고 한다. 그래서 항상 계신(戒愼)하고 공구(恐懼)하는 것이니, 이는 혹시라도 도에 위배되어 비도가 될까 두려워해서 경계하는 것이다. 도에 위배될까 경계하는 공부는 어느 때 어느 곳이나 적용되지 않는 곳이 없게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윽하고 어둠침침한 속에서 외물(外物)을 응접할 일도 없고 사물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때부터 또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대저 외물을 응접할 일도 없고 사물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때에는 무엇이 도이고 무엇이 비도인가? 이러한 때를 당하여 이 마음을 내면에 간직하고서 맑게 영정(寧靜)한 상태를 유지하면 그것이 도요, 잡념이 분분하게 일어나면 그것이 비도이다. 이러한 때에도 계신 공구하는 이유는 분분하게 일어나는 잡념을 막고 영정한 상태를 이루기 위해서이다.《맹자》에서 “잡으면 보존되고 놓으면 도망친다.〔操則存 舍則亡〕”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심법(心法) 중에서 제일 중요한 요지이다. 그리고 《중용》에서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근신하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한다.〔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고 하였는데, 이것 역시 심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똑같은 말들이다. 계신 공구하는 목적은 마음을 잡기 위함이니 이것은 바로 마음을 잡는 방도이고, 계신 공구하면 그 마음이 하나로 수렴(收斂)될 것이니 이것은 바로 조즉존(操則存)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마음을 잡기 위한 것일 뿐만이 아니라 마음을 놓치는 것도 미리 막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대로 마음을 잡고 놓치지 않는다면 그 마음이 보존되지 않는 때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성현의 심법 가운데 지극히 정밀하고 지극히 중요한 대목이라고 하겠다.정자(程子)가 이르기를 “사람이 걸리는 404가지의 질병은 모두 자기에게 말미암는 것이 아니지만, 마음만은 반드시 자기에게 말미암도록 해야 한다.〔人四百四病 皆不由自家 惟心由自家〕”라고 하였다. 만약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천하 만물을 다스리겠는가.조존(操存)하는 공부는 잠시라도 멈춰서는 안 된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슨 일인지 살펴보고 나서,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이라면 자상하게 생각해서 결론을 얻고 결론을 얻은 다음에는 그 생각을 멈추어야 할 것이요,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 즉시 멈추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단지 조존하는 공부가 몸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조존 공부를 할 때에 잡념이 일어나면 잡념이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오직 마음을 다잡고서 열중하기만 하면 된다. 잡념이 일어나는 것은 조존 공부가 중단되어서 그런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마음을 놓으면 도망친다고 하는 것이다. 언제나 마음을 붙잡고서 놓지 않을 수 있게 되면 잡념이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조존 공부를 마땅히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공부를 중단하는 일이 없이 지속하고 싶은 마음이 또 어찌 없기야 하겠는가. 잡념이 일어날 때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잡념을 없애려는 마음이 또 어찌 없기야 하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조존 공부는 매번 중도에 단절되기가 쉽고, 잡념은 수시로 벋어 나가기 일쑤인데, 오직 이 잡념이 벋어 나가는 까닭에 조존 공부가 폐기되곤 하는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되는 것은 참되지 못한 요소를 그냥 놔두려고 하면서 실제로 잡념을 제거하지 않으려고 해서인가, 아니면 제거하고는 싶지만 이겨낼 수 없어서인가? 그러나 만약 실제로 제거하려고만 한다면 어찌 이겨낼 수 없는 이치가 있겠는가. 대개 이 잡념들은 실제로 자기에게서 나온 것들이다. 따라서 자기가 한 일이라면 그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자기에게 달려 있으니, 어찌 이겨낼 수 없겠는가. 이것은 바로 참되지 못하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무릇 공부가 발전하지 않는 것은 모두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니, 오직 있는 정성을 다 쏟으면서 용감하게 결단을 내려야만 할 것이다.이른바 집지(執持)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가지고 저것을 잡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그 마음이 스스로 멈추고 스스로 안정되어 빠져나가지 않는 것이 마치 잡고서 놓치지 않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경(敬)하면 이 마음이 송연(竦然)해지는 가운데 수렴(收斂)이 되어 고요히 안정된다. 온갖 생각이 끊이지 않고 벋어 나가는 것은 바로 마음이 느슨하게 풀려서 경(敬)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미발(未發)의 상태에서 고요히 안정되어 있을 때에는 마음속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 바로 정대한 본심(本心) 그것이다. 그러나 온갖 생각이 분분하게 뒤섞이며 일어날 때에는 그 정리(正理)가 사라지게 된다. 그 본심이 정대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발동하면 절도에 맞게 되는 것〔中節〕이요, 정리가 사라지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발동하면 절도에 맞지 않게 되는 것〔不中節〕이다.마음을 잡는 것〔操〕은 힘을 쓰는 일이요, 마음을 놓는 것〔舍〕은 힘을 쓰지 않는 일이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방일(放逸)한 습관에 물들어져 왔다. 그렇기 때문에 힘을 쓰는 일을 수고롭게 여기고 힘을 쓰지 않는 일을 편하게 여기며, 힘을 쓰는 일은 생소하게 여기고 힘을 쓰지 않는 일은 익숙하게 여기고 있다. 그래서 마음을 잡기는 어려운 반면에 마음을 놓기는 쉬운 것이다. 만약 이것을 참고 부지런히 애쓰면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습관처럼 되게 할 수만 있다면, 자연히 편안하게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응취(凝聚)하고 수렴(收斂)하고 보수(保守)하여 이 마음을 고요히 안정시키는 것이야말로 학자들이 첫째로 절급하게 여겨야 할 근본적인 공부이다. 따라서 잠시라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이니, 요컨대 죽은 뒤에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조존(操存)하는 것이야말로 학자들의 첫째가는 본질적인 공부이다. 만약 이 공부를 하는 일이 없다면, 또 어떻게 학문을 말할 수가 있겠는가.심법(心法)의 요체는 단지 조(操)라는 하나의 글자 속에 들어 있다. 이 글자를 전후 좌우에 써 놓고 항상 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마음을 잡는 것은 힘을 쓰는 일이니 고생스러울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을 놓는 것은 힘을 쓰지 않는 일이니 편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마음을 놓아 버려 도망치게 하면 마구 치달리고 날아다니는가 하면 얼음처럼 차가워지기도 하고 불처럼 뜨거워지기도 할 것이니, 마음을 잡고 있는 것보다도 그 고생이 더욱 심할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잡는 것이 설령 고생스럽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바로 도리상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어찌 고생스러운 것을 꺼려서 그만두어서야 되겠는가.무릇 선한 일은 모두 우리의 근로(勤勞)의 대상이다. 오직 근로해야만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니, 성현이 성현이 될 수 있었던 까닭도 오직 근면함과 민첩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마음을 잡아서 보존하는 공부는 단지 계속해서 근로해야 마땅한 것인데, 어떻게 염증을 내고서 게을리 할 수가 있겠는가. 인(仁)을 자기의 임무로 알고서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고 하였으니, 성현의 공부를 하려면 원래 근로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마음을 붙잡아 보존하는 일이 설령 수고스럽다 하더라도, 마음을 보존하고 정리(正理)를 체득하면 장차 큰 안락(安樂)의 경지를 이루게 될 것이니, 그 수고로움은 안락을 누릴 수 있는 요인이 된다. 마음을 놓아 도망치게 하는 일이 편안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몸에 주인이 없어져서 온갖 선(善)의 요소가 없어지면 단지 광망(狂妄)의 결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니, 그 편안함은 해로움을 끼치는 요인이 된다.밤에 누워서도 잡념에 끌려 다니는 바람에 편안히 잠을 이룰 수 없으니, 이 또한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진정 괴롭다고 여긴다면 어째서 잡념을 통렬히 끊어버리지 못하는가. 잡념이란 바로 자기의 생각이 만들어 낸 것이니, 자기가 끊어버린다면 어찌 끊어지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이 잡념도 극복할 수 없다면, 그렇게 허약한 몸으로 무슨 일인들 제대로 해내겠는가.예로부터 성현이 공부한 것도 그 요체는 단지 경(敬)일 따름이었다. 성현이 성현이 될 수 있었던 까닭도 단지 이 공부를 하였기 때문일 뿐이다. 대체로 경을 하면 그 덕이 닦여지는 반면에, 불경(不敬)하면 그 덕이 폐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부를 하면 현인이 되고, 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범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보를 원하는 자라면 이 공부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퇴보를 원한다면 이 공부를 그만두어도 좋다.마음을 잡는 것은 힘을 쓰는 일이요, 마음을 놓는 것은 힘을 쓰지 않는 일이다. 힘을 쓰는 일은 수고스럽고, 힘을 쓰지 않는 일은 편안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항상 수고스러운 것은 싫어하고 편안한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어떤 일을 막론하고 근면해야 성공하고 안일하면 폐기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힘써야 할 것은 근면이요, 사람이 경계해야 할 것은 안일이라고 하겠다. 인(仁)을 자기의 임무로 알고서 죽은 뒤에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니, 힘쓰는 일을 어찌 잠시라도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고어(古語)에 “생소한 곳은 익숙하게 만들고, 익숙한 곳은 생소하게 만들어야 한다.〔生處放敎熟 熟處放敎生〕”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매우 좋다. 별의별 생각이 분분하게 일어나는 것이 바로 익숙한 곳이요, ‘붙잡아 지키면서 전일하게 하는 것〔執持專一〕’이 바로 생소한 곳이다. 생소한 곳을 연습해서 익숙하게 만들고, 익숙한 곳을 연습해서 생소하게 만드는 이 일이야말로 심술(心術) 공부에 있어서 절실하고 중요한 방법이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연습해서 생소한 곳이 날로 익숙해지게 하고 익숙한 곳이 날로 생소해지게 해야 할 것이니, 이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공부가 본격적으로 효과를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집지전일(執持專一)이라고 하는 이 네 글자를 벽에다 써 붙여놓고 언제나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경(敬)은 송연(竦然)히 자신의 마음을 붙잡고 끊임없이 힘을 쓰는 것이니 실로 노고(勞苦)에 해당하고, 태(怠)는 퇴연(頹然)히 자신의 마음을 놓아 버리고서 전혀 하는 일이 없으니 실로 안일(安逸)에 해당한다. 그런데 옛날의 성현들은 항상 경을 위주로 하고 태만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노고를 좋아하고 안일을 싫어해서였겠는가. 지수(持守)하는 것을 노고로 알고 태만한 것을 안일로 여기는 것은, 형기(形氣)로 인한 사욕(私欲)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만약 덕을 가지고 말한다면, 공경은 덕을 확립하는 요인이 되고, 태만은 덕을 폐기하는 요인이 된다. 그런데 군자는 덕을 위주로 하고, 형기로 인한 사욕을 따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수(持守)에 힘을 기울이면서 잠시라도 중단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요, 태만하게 되지 않도록 금하면서 잠시라도 틈을 타고 들어오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옛날 성인이 덕을 닦은 공을 보면 모두가 이와 같았다.사려(思慮)가 일어날 때에 타당하지 못한 사려라고 생각되면 바로 그칠 것이요, 신체(身體)와 수족(手足)을 움직일 때에 타당하지 못한 움직임이라고 생각되면 바로 그칠 것이다. 요컨대 생각하면 안 되는 사려와 행하면 안 되는 동작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고요해지면서 안정될 것이다. 이것은 학자에게 있어서 절실히 필요한 공부이니, 성찰(省察)하고 금제(禁制)하여 잠시라도 그만두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신독(愼獨) 공부이다.‘마음을 잡아 지키는〔操守〕’ 공부가 중단되기 때문에 ‘마음을 놓쳐 도망치게 하는〔舍亡〕’ 병폐가 생기는 것이다. 잡념이 벋어나가려고 할 적에는 그 즉시 조수(操守) 공부가 중단되었음을 깨닫고서 계속 이어 나가야 할 것이다.조수 공부는 언제나 열심히열심히 부지런히부지런히 꼼꼼히꼼꼼히 해 나가야 한다.심법(心法)이야말로 학자에게 가장 근본적인 공부요, 그 밖의 것은 모두 여사(餘事)이다. 따라서 본무(本務)를 당연히 급선무로 여기고 여사는 뒤로 미뤄야 할 것인데, 사람들은 항상 완급(緩急)과 선후(先後)를 뒤바꿔서 행하고 있으니, 이는 잘못된 일이다.공자(孔子)는 이르기를 “군자는 남을 대할 때에 공경하면서 예의를 갖춘다.〔君子與人恭而有禮〕”라고 하고, 또 “군자는 크거나 작거나 많거나 적거나 간에 감히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는다.〔君子無小大 無衆寡 無敢慢〕”라고 하고, 또 “군자는 의리를 기본으로 하여 예의 있게 행동하고 겸손한 태도를 취한다.〔君子義以爲質 禮以行之 遜以出之〕”라고 하였으며, 맹자(孟子)는 이르기를 “군자는 인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예를 마음속에 간직한다. 인을 간직한 사람은 남을 사랑하고, 예를 간직한 사람은 남을 공경한다.〔君子以仁存心 以禮存心 仁者愛人 有禮者敬人〕”라고 하고, 또 “남에게 예의를 갖추었는데도 답례를 하지 않으면 자신의 경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禮人不答 反其敬〕”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군자는 사람들을 모두 경(敬)의 자세로 대해야 하고 거만한 요소가 있게 하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덕이 성대한 사람은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없다.〔德盛不狎侮〕”라고 하였다. 만약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실로 덕을 해치게 될 것이니, 이 점을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곽언(郭偃)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내면에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면, 반드시 밖으로 퍼지고 백성들에게 알려져서 백성들이 실로 그를 떠받들 것인데, 이것은 악을 지니고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행동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夫人美於中 必播於外而越於民 民實戴之 惡亦如之 故行不可不愼也〕”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신독(愼獨) 공부에 매우 절실하다.숙향(叔向)이 말하기를 “행동할 때에는 공경이 가장 중요하고, 거처할 때에는 검약만 한 것이 없고, 덕성으로는 겸양이 최고이고, 일 처리에는 자문하는 것이 제일 낫다.〔動莫若敬 居莫若儉 德莫若讓 事莫若咨〕”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매우 좋으니 법도로 삼아야 할 것이다.오거(伍擧)가 말하기를 “사욕이 다대(多大)해지면 덕의가 희소(稀少)해진다. 덕의가 행해지지 않으면, 가까이 있는 사람은 근심하며 떠나가고 멀리 있는 사람은 거스르며 항거한다.〔私欲弘侈 則德義鮮少 德義不行 則邇者騷離 而遠者拒違〕”라고 하였다. 대개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은 서로 소장(消長)의 관계에 있는 만큼, 이는 형세상 필연적인 일이라고 할 것이다. 춘추(春秋) 시대 말기에 열국(列國)의 대부(大夫)들 중에도 의리를 아는 이들이 많았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이치에 거의 들어맞는 것이 이와 같다.《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몸이 늙어 가는 것도 잊고, 앞으로 햇수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모른 채, 날마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죽음에 이른 뒤에야 그만둔다.〔忘身之老也 不知年數之不足也 俛焉日有孜孜 斃而後已〕”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유장의 나이에 효도와 우애를 행하고, 기질의 나이에 예를 좋아하며, 세속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서, 몸을 닦으며 죽음을 기다린다.〔幼壯孝悌 耆耋好禮 不從流俗 修身俟死〕”라고 하였는데, 이 두 구절은 바로 우리들이 노경(老境)에 이르러서 마땅히 힘써야 할 말들이라고 하겠다.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대저 효의 덕이란 어떠한 것인가. 이것을 세워 두면 하늘과 땅에 가득 차고, 이것을 펼쳐 두면 사방의 바다에 퍼지고, 후세에 전하면 아침 저녁이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을 밀어서 동해에 이르게 하면 동해와 수준(水準)이 같아지고, 이것을 밀어서 서해에 이르게 하면 서해와 수준이 같아지고, 이것을 밀어서 남해에 이르게 하면 남해와 수준이 같아지고, 이것을 밀어서 북해에 이르게 하면 북해와 수준이 같아진다.〔夫孝 置之而塞乎天地 溥之而橫乎四海 施諸後世而無朝夕 推而放諸東海而準 推而放諸西海而準 推而放諸南海而準 推而放諸北海而準〕”라고 하였다.치지이색호천지(置之而塞乎天地)는 이것을 세워 두면 종(縱)으로 높은 하늘과 깊은 땅 끝까지 가득 찬다는 말이고, 부지이횡호사해(溥之而橫乎四海)는 이것을 펼쳐 두면 횡(橫)으로 넓고 먼 사방의 바다까지 가득 찬다는 말이고, 시저후세이무조석(施諸後世而無朝夕)은 이것을 후세에 전하면 끝나는 때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준(準)은 어느 것과 수준이 같아진다는 말이니, 즉 사방의 바다와 그 넓고 먼 수준이 같아진다는 말이다. 방저동해이준(放諸東海而準) 이하 4구(句)는 횡호사해(橫乎四海)의 뜻을 극언(極言)한 것이다. 말하자면 효란 종으로 하면 상하(上下)의 끝까지 이르고, 횡으로 하면 사방의 끝까지 이르고, 후세에 전하면 끝나는 때가 없다는 뜻이니, 이는 효의 위대함을 극언한 것이다.사람의 행위 가운데 효보다 큰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효의 도야말로 상하와 사방과 만세(萬世)의 끝까지 다하여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요, 천지(天地)와 신인(神人)과 사방과 만세에 감동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니 아, 얼마나 지극하다고 하겠는가. 증자의 이 말을 사람의 자식이 된 자들은 종신토록 암송해야 할 것이다.《예기》 제의(祭義)에 이르기를 “효자가 제사를 지내려고 할 때에는 그 일을 미리부터 생각해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때를 당하여 필요한 물품들을 충분히 갖추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잡념이 없는 텅 빈 마음의 상태에서 이런 일들을 행해야 한다.〔孝子將祭 慮事不可以不豫 比時具物 不可以不備 虛中以治之〕”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참으로 법도로 삼을 만하다.무릇 제사 지낼 때에 기일에 앞서서 재계(齋戒)하는 것은 그 마음을 정제(整齊)하기 위해서일 뿐만이 아니라, 제사에 필요한 물품이 미진하게 되는 후회가 없도록 뜻을 집중해서 생각하기 위함이다. 재계하는 날에는 다른 모든 일을 중단하고 오로지 제사에 뜻을 집중하면서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제사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미리 준비해서 깜박 잊고 미치지 못하는 걱정이 있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경(敬)을 이루는 도리라고 할 것이다.《예기》 예기(禮器)에 “기본적인 예의가 삼백 가지요, 구체적인 예절이 삼천 가지인데, 그 정신은 하나이다.〔經禮三百 曲禮三千 其致一也〕”라고 하였고, 《중용》에 “크고 넉넉하도다. 예의가 삼백 가지요, 위의가 삼천 가지로다.〔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라고 하였다.무릇 이 세상의 대소(大小), 내외(內外), 상하(上下), 길흉(吉凶)의 일에 따른 이름의 가짓수가 삼백 가지나 되는데, 여기에 또 각기 많고 적은 미세한 곡절이 있어서 그 가짓수가 무려 삼천 가지에 이르고 있다. 대개 셀 수 없이 많은 천하의 사물 모두가 각각 당연(當然)한 이치를 갖고 있으니, 이른바 삼백이라고 하고 삼천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그런데 《중용》에서 이것을 ‘지도(至道)’라고 표현하였으니, 이는 도가 크게 온전히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성인이 행한 것을 보면 여기에서 벗어난 것이 없으니, 도를 배우는 자들은 노력해야 할 것이다.성인은 환과고독(鰥寡孤獨)을 업신여기지 않고, 호소할 데가 없는 사람들을 모질게 대하지 않는다. 지극히 미천한 하천인(下賤人)이나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사람의 목숨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어떻게 그들을 소홀히 하고 박대하여 원한을 품게 할 수 있겠는가.사람의 감정 중에서도 오직 화를 내는 것을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비록 지친(至親)의 사이라 할지라도 화 나는 일 때문에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렇게 되면 또한 너무도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무릇 내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려 판단하는 것이 가장 일을 해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일이 의사(疑似)한 것만을 보고서 그 사람의 마음을 자기 혼자 헤아려 보고는 희로(喜怒)의 감정을 발한다면, 그 사람이 억울하다면서 원망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대개 일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요소가 있다 해도 그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혹 있을 수 있다. 일이 그렇게 된 것은 그가 일을 분명하게 요량하지 못해 일 처리를 잘못한 탓일 수 있으니 그의 마음이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일이 잘못된 것을 보고 그 마음을 헤아려서 화를 냈다지만, 만약 그의 마음이 실제로 그렇지 않다면 이 또한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이와 같은 경우를 당했을 때에는 무턱대고 그의 마음을 단정하지 말고서 기운을 가라앉히고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과연 그렇지 않다면 자연히 노여워할 일도 없게 되겠지만, 만약 그래도 의사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진상을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처리할 일이요, 그가 그러했으리라고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반드시 그러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가 그러했다는 것으로 처리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한다면 억울하게 느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그렇긴 하지만 이와 같이 제대로 자세히 살피지 못하게 되는 것 역시 노여워하는 기분에 좌우되기 때문이니, 반드시 그 실상을 파악해서 억울한 사람이 없게끔 하려면, 반드시 자기 마음을 가라앉혀 노여워하는 감정이 없게 한 뒤에야 가능할 것이다.사람들에게 “선(善)은 행해야 하는 것인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라고 물으면, 반드시 모두 행해야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또 “불선(不善)은 행해야 하는 것인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라고 물으면, 반드시 모두 행하면 안 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선은 행해야 하는 것이고 불선은 행하면 안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선은 행해야 하고 불선은 행하면 안 된다는 것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면, 어찌하여 선을 행하고 불선을 제거하려는 뜻을 세우지 않는단 말인가.사람이라면 누구나 항상 “나의 뜻이 혹시라도 선을 행하는 데에 있지 않고, 혹시라도 불선을 행하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자성(自省)해 보아야 할 것이요, 만약 그렇다면 통렬히 회개하면서 선은 반드시 행하려 하고 불선은 반드시 제거하려고 해야 할 것이다. 또 “내가 행하는 것이 혹시라도 선 쪽에 있지 않고, 혹시라도 불선 쪽에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자성해 보아야 할 것이요, 만약 그렇다면 통렬히 회개하면서 선을 반드시 힘써 행하여 자기 몸에 지니도록 기약해야 할 것이요, 불선을 반드시 힘써 제거해서 절대로 하지 않도록 기약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어찌 선인(善人) 군자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공자가 이르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고 하였다. 이것은 도를 듣는 것을 생명보다도 중하게 여긴 것이다. 대개 도라는 것은 사람이 행해야 할 도로서, 사람이 가장 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이 도를 모른다면 이것은 가장 중한 것을 잃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도를 듣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하고 급한 것이다.대저 천하의 일 가운데 목숨보다도 중한 것은 없는데, 도가 목숨보다도 중하다고 한다면, 이보다 중한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대저 도가 이와 같이 중한 것이고 보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도(求道)에 전념하여 공력(功力)을 쏟으면서 다른 일에 동요되는 일이 없이 오직 도를 듣는 것만을 기약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도를 구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성현의 말씀 모두가 이 도를 밝히기 위한 것이니, 이 말씀을 읽고 구하기만 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상정(常情)으로 말한다면 도를 들은 자는 지극히 적고 듣지 못한 자가 거의 대부분이니 듣지 못했다고 해서 해가 되지 않을 듯도 싶다. 그리고 죽으면 이 몸이 없어지는 만큼 그 걱정이 막대하다고 할 것인데, 성인은 그만 도를 듣는 것이 생사(生死)보다도 중하다고 하였으니, 상정으로 생각하면 그렇지 않을 듯도 싶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 사람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도를 얻는 것이 목숨보다 중하다는 것을 제대로 깨닫는다면 매우 좋겠지만, 만약 제대로 깨달아지지 않거든 ‘나는 그저 범인(凡人)이요, 나의 지식 수준은 아래에 있다. 반면에 성인의 지혜는 범인보다 말할 수 없이 월등하게 높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옳지 않을 것이요, 성인의 말씀은 반드시 사실 그대로일 것이다.’라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결단을 내려 자기 마음속의 생각을 쫓아내 버리고 성인의 말씀에 따라 도를 구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도를 배우는 일은 인간의 첫째가는 사업인 만큼, 실로 이것보다 귀한 것이 없고, 이것보다 급한 것도 없으며, 또 하지 못하게 막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하지 않는 것인가. 도를 배우면 높고 귀한 사람이 되고, 도를 배우지 않으면 낮고 평범한 사람이 된다. 모두가 똑같은 사람인데 배우느냐 배우지 않느냐에 따라서 존비(尊卑)가 나뉘는 것이다. 그런데 배우고 배우지 않는 그 까닭은 이것이 귀하고 급한 것인지를 아느냐의 여부에 말미암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이런 것을 아는 자야말로 어찌 행운이 아니겠으며, 이런 것을 모르는 자야말로 어찌 불행이 아니겠는가. 도를 배우지 않는 저 사람들은 모두 불행한 자들인데, 자기가 불행하다는 것도 모르고 있으니 이 또한 민망한 일이다.의리(義理)를 알고 고금(古今)을 알며, 성현의 뜻을 자기의 뜻으로 삼고 성현의 행동을 자기의 행동으로 삼으며, 몸을 닦고 덕을 높여서 부앙(俯仰) 간에 부끄러움이 없게 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으며 어찌 쾌하지 않겠으며 어찌 좋지 않겠는가. 반면에 의리를 알지 못하고 고금을 알지 못하며, 이욕(利欲)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고 부잡(浮雜)으로 자기의 행동을 삼으며, 녹록(碌碌)하게 용렬한 사람으로 살다가 자기 몸을 마친다면, 어찌 민망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민망한 일을 좋은 일로 여기고 있으니, 참으로 미혹(迷惑)되었다고 하겠다.지식을 추구하되 성현의 지식처럼 되게 해야 하고, 신심(身心)을 단련하되 성현의 신심처럼 되게 해야 하고, 행사(行事)를 열심히 노력하되 성현의 행사처럼 되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성현을 배우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스스로 수치(修治)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대개 사람이 이 육신을 가진 이상에는 본디 정욕(情欲)과 기호(嗜好)가 있게 마련이다. 오직 성인만이 이 정욕과 기호가 자연히 정도(正道)에 합치될 뿐, 현인(賢人) 이하는 정도를 잃는 일을 면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중인(中人) 이하는 자품(資稟)이 아름답지 못한 데다가, 살아오는 동안 보고 들으면서 습관으로 물든 것이 모두 세속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 정욕과 기호가 거의 대부분 바르지 못하니, 반드시 수치하는 노력을 기울여서 불선(不善)한 점을 고치고 선을 행하는 일에 힘써야만 비로소 그 정도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예로부터 선인(善人) 군자들은 모두 수치하는 노력을 통해서 그 경지에 이른 것이다. 만약 수치하는 일이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내맡겨 두면, 바르지 못한 기호를 교정하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장차 그 속으로 점점 깊이 휩쓸려 들어간 나머지, 심한 경우에는 악인(惡人)이 되고 보통의 경우에는 용인(庸人)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세상의 용인과 악인이 용인과 악인이 된 까닭은 모두가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선악(善惡)은 오직 수치하느냐 수치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니, 어찌 자포자기하여 용인이나 악인이 되게 하고 스스로 수치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사람이 스스로 수치(修治)하려고 해도 학문이 없으면 수치하는 방법을 모르게 될 것이다. 학문이라는 것은 지식을 통하고 수치하는 길을 열기 위한 것이니, 이것은 사람이 더욱 급히 서둘러야 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을 하면 지식이 있게 되고 행의(行義)가 있게 되지만, 학문을 하지 않으면 지식도 없고 행의도 없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선악(善惡)과 고하(高下)는 오직 학문을 하느냐 학문을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니, 관계되는 바가 어찌 지극히 크다고 하지 않겠는가.《예기》 표기(表記)에 이르기를 “욕심 없이 인을 좋아하는 자와 두려움 없이 불인을 싫어하는 자는 천하에 한 사람 정도나 있을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가 도를 의논할 때에는 자기의 입장에서 해야 하지만, 법을 적용할 때에는 백성의 처지를 고려해서 해야 하는 것이다.〔無欲而好仁者 無畏而惡不仁者 天下一人而已矣 是故 君子議道自己 而置法以民〕”라고 하였다.욕심이 있어서 인(仁)을 좋아하거나 두려워하는 일이 있어서 불인(不仁)을 싫어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참된 것이 아니고,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마음속에 욕심을 두지 않고 두려워하는 것이 없는 자만이 인을 좋아하고 불인을 싫어하면서 그 사이에 털끝만큼이라도 이해(利害) 관계가 개입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으로 인을 좋아하고 불인을 싫어하는 것이 될 텐데, 이러한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천하에 한 사람 정도나 있을 따름이라고 한 것이다.대개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바로 도(道)인데, 이와 같이 하는 자는 거의 없다시피 한 실정에서 오직 자기만이 가능할 뿐이요, 일반 백성들은 모두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도를 의론할 때에는 자기가 가능한 것에 입각해서 하니 이것을 일컬어 도라고 하고, 일반 사람들이 하는 것은 도라고 일컬을 수가 없는 것이다.그러나 법을 적용하는 경우에는 그 일을 가지고 논해야 마땅하니, 만약 그 일이 인을 좋아하고 불인을 싫어하는 것에 해당된다면, 비록 그의 마음에 바라는 욕심이 있고 두려워하는 일이 있어서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마음이 그렇다고 하여 죄를 줄 수는 없는 일이다. 대개 일반 백성에 대해서는 그 일이 죄에 해당되지 않는 것을 그저 다행으로 여겨야지, 도를 행하라고 그들에게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표기(表記)에 또 “도를 향해 가다가 중도에 그만둔다. 운운〔鄕道而行 中道而廢云云〕”한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그 주(註)에, 중도에 그만두는 것은 힘이 다해서 그만두는 것이니, 힘이 다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해설은 타당하지 않을 듯싶다. 이 대목은 대개 다른 사람은 이 도를 향한 노력을 오래 지속할 수 없지만 군자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의미이니, 망신지로야(忘身之老也) 이하의 구절이 바로 이것을 증명한다.이것은 《중용》에서 “도를 따라가다가 중도에 그만두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 군자는 중용에 따라 행하기만 할 뿐, 세상을 피해 은둔하며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는 법인데, 이런 일은 오직 성자만이 가능한 일이다.〔遵道而行 半道而廢 吾不能已矣 君子依乎中庸 遯世不見知而不悔 惟聖者能之〕”라고 말한 것과 그 뜻이 동일하다.이것은 오직 ‘마음속으로 인을 편안하게 여기는 자〔中心安仁者〕’만이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표기에서 천하에 한 사람 정도나 있을 따름이라고 한 것이고, 《중용》에서 오직 성자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한 것이다.어떤 일을 고려(考慮)할 때 타당함을 얻기란 쉽지 않다. 완전히 타당하게 되도록 고려하는 것은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기필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성인이 묻기를 좋아하고 살피기를 좋아하였으니, 이는 완전히 타당하게 되지 못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성인도 오히려 완전히 타당하게 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고 보면, 범인(凡人)의 경우야 더더욱 타당함을 잃는 것이 필시 많을 것이요 타당함을 얻는 것은 필시 적을 것이다. 이미 타당함을 잃었는데도 스스로 타당하다고 생각하여 행한다면 일을 망칠 것은 뻔한 일이다. 타당함을 잃은 일이 어떻게 실패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세상에서 현명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어떤 일이든 모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환히 꿰뚫어 보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잘못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일이란 묻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또 자기의 마음을 비우고서 남의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대개 중인(衆人)의 지혜를 모아 생각하면 타당한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의 의견을 참고하여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른다면 그 일이 거의 실패하지 않겠지만, 자기 주장만 내세우면서 남의 말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일은 모두 실패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필부가 이와 같을 경우에는 그 피해가 그래도 적다고 하겠지만, 임금이 만약 이와 같다면 그 피해를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사람에게 학문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은, 몸에 옷이 없으면 안 되는 것과 같고, 입에 음식이 없으면 안 되는 것과 같고, 질병에 의약(醫藥)이 없으면 안 되는 것과 같다. 몸에 옷이 없으면 추위에 떨고, 입에 음식이 없으면 기아에 시달리고, 질병에 의약이 없으면 병세가 더욱 심해질 것인데, 이 세 가지 경우 모두 정도가 심해지면 사망에 이르고 말 것이다. 사람에게 학문이 없으면 용렬하고 잡스러운 사람이 될 것이요, 심한 경우에는 악인이 되기까지 할 테니, 그 재앙이 사망에 이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고 보면 학문이 사람에게 있어 어찌 지극히 급한 일이 아니겠는가.그러나 세 가지의 일에 대해서는 사람들 모두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학문에 대해서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는 추위와 기아와 병으로 죽는 것이 재앙이 된다는 것만 알 뿐이요, 사람이 용인(庸人)이 되고 악인이 되는 것이 재앙이 된다는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 사람의 현부(賢否)야말로 어찌 사람에게 막중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어찌 용인이 되고 악인이 되도록 자포자기해서야 될 일이겠는가.의리(義理)를 위주로 하는 자는 그 마음이 밝아지고, 명리(名利)를 위주로 하는 자는 그 마음이 어두워진다. 세상에서 명리에 골몰하는 자를 보면, 남이 반드시 천하게 여기리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재앙과 패망이 반드시 이르리라는 것도 알지 못한다. 이것은 그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이해(利害)의 소재를 알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눈은 본디 물건을 볼 수 있지만 외물(外物)에 가리게 되면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도 본디 시비와 이해를 알 수 있지만 명리에 가리게 되면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사람들 중에서 독서를 하고 문학을 할 줄 아는 자는 정(精)하고, 독서를 하지 않고 문학을 하지 않는 자는 추(粗)하다. 독서를 하고 문학을 하는 자 중에서 성현의 글을 읽는 자는 정하고, 과업(科業)이나 사장(詞章)을 하는 자는 추하다. 성현의 글을 읽는 자 중에서 성현의 글을 귀중하게 여기며 읽는 자는 정하고, 단지 성현의 언어를 많이 알려고만 하는 자는 추하다. 성현의 언어를 읽고 성현의 취지(趣旨)가 어디에 있는지 깊이 탐구하여 의리의 실체를 추구하는 자도 물론 정하다고 하겠지만, 일단 성현의 취지와 의리의 실체를 파악한 뒤에 자신이 몸소 그대로 따라서 행하는 자는 더욱 정하다고 할 것이다. 그대로 따라 행해서 마침내 그가 하는 일이 은현(隱顯)과 대소(大小)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성현의 취지와 합치되어 어긋나는 점이 없게 되면, 이것이 바로 성현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다.정인(正人)이 역사책을 읽다가 정인 군자의 행사(行事)를 보면 반드시 경모(敬慕)하며 찬탄하고, 소인의 간사한 일을 보면 반드시 통분하게 여기며 그 악행을 미워한다. 반면에 속인(俗人)이 역사책을 볼 경우에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선을 보고서 경모하고 찬탄하면 스스로 선을 행하려고 할 것이 분명하고, 악을 보고서 통분하게 여기며 미워하면 스스로 불선(不善)을 행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 분명한데, 세상에서 사학(史學)에 통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그 품행 면에서 꼭 볼 만한 점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으니, 그들이 역사책을 볼 때에 마음속으로 감동을 느껴 반성하는 점이 없다는 것을 이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성현의 글을 읽고 성현의 말을 암송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장차 여기에 의지해서 행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글을 읽고 그 말을 암송하면서도 여기에 의지해서 행하려는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시부(詩賦)를 읽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렇게 읽는 것은 겉치레일 뿐이다.세간에서 이 학문을 하는 자가 지극히 적으니, 이 학문에 종사하는 자라면 물론 그를 매우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세상에서 학문에 종사하는 자를 보면, 외면만을 힘쓰면서 명리(名利)를 좋아하는 자가 또한 많고, 성실하게 이 학문을 하는 자는 매우 적은 형편이다. 명리를 위해 이 학문을 하는 자는 그가 추구하는 것이 명리일 뿐이니 그의 공부 역시 단지 외면에 그치고 만다. 그래서 의리에 대해서는 터득하는 점이 없게 되는 것이다.이런 자들이야 이야기할 가치도 없다고 하겠지만, 성실하게 학문을 하는 자라고 할지라도 제대로 깊이 연구해서 의리를 터득하는 자는 또한 드물기만 하다. 모르겠지만, 그가 탐구하는 것이 깊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깊이 탐구는 해도 그의 사려(思慮)가 정세(精細)하지 못한 탓에 제대로 통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옛날의 유선(儒先)들을 보면 학문을 자임(自任)하고 일생을 초야에서 보내면서 죽은 뒤에야 그만둔 이들이 많으니, 그들이 추구한 자세는 지극히 성실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의 의론을 살펴보면 뛰어난 조예를 제대로 보여 주는 것이 많지 않으니, 이 의리를 연구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문을 하는 자라면 이 의리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학문 공부는 길을 가는 것과 같다. 목적지가 아무리 멀다고 하더라도 쉬지 않고 가다 보면 자연히 그곳에 도착하겠지만, 만약 멈추고 가지 않는다면 지극히 가까운 곳이라도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도를 배우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일 중에서 가장 존귀하고 가장 중대한 사업이다. 후생(後生)이 이 일을 자기의 사업으로 삼을 수 있다면, 그는 또한 특출(特出)한 자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대저 이 일로 말하면 사람에게 가장 절급(切急)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업에 비해서도 가장 존귀하다고 할 것이요, 또 하는 일이 다른 사업보다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도를 배우는 일이야말로 당연한 일로서 사람들마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이니, 꼭 특출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만 이 일을 하는 자가 거의 없는 실정에서 어쩌다가 간혹 나오기 때문에 특출한 자라고 말할 따름이다.이 일을 하는 자도 물론 지극히 적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하는 자는 더더욱 드물기만 하다. 이는 대개 처음에는 학문에 뜻을 두었다 하더라도 그 뜻을 견지(堅持)하지 못한 나머지 다른 사업으로 옮겨 가거나 명리(名利)에 휩쓸려 따라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모르겠지만, 이와 같이 되는 것은 처음 학문에 뜻을 둔 것이 본래 성실한 자세에서 나오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성실한 자세에서 나왔다고는 하더라도 독실하게 힘을 기울이지 못한 탓으로 스스로 터득한 것이 없어서 외물(外物)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그런 것인가? 그러고 보면 이 일에 종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고서 늙도록 피곤한 줄도 모르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두는 자야말로 어찌 귀한 존재가 아니겠는가.사람의 식견(識見)은 경술(經術)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다. 예로부터 유사(儒士)를 귀중하게 여긴 이유는 그가 경술에 통했기 때문이다. 유사가 되어서 경술에 통하지 못하면 자연히 식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유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우리나라의 유사는 모두 경학(經學)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어떻게 식견이 있을 수 있겠는가. 과거 공부를 위해서 경서를 읽는 자는 읽지 않은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유사는 모두가 그러하니, 그러고 보면 모두 경학을 모르는 사람들뿐이다.과거에 급제하는 자도 모두 이 속에서 나오고, 대간(臺諫)과 시종(侍從)도 여기에서 나오고, 재상(宰相)이 되는 사람도 여기에서 나온다. 그러고 보면 유사로부터 재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경학이 없는 사람들뿐이요, 모두 식견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뿐이다. 세상이 쇠퇴하고 혼란스러운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세간에 문예(文藝)와 기람(記覽)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난 자들은 왕왕 있지만, 선(善)을 행하는 데에 뜻을 둔 자는 지극히 적다. 이는 대개 문예와 기람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난 자는 기품(氣稟)이 맑은 자요, 선을 행하는 데에 뜻을 둔 자는 기품이 정대한 자라고 할 수 있는데, 품부받은 기질(氣質)이 맑은 자는 많은 반면에 정대한 자는 적기 때문이다. 문예와 기람의 재능만 있을 뿐 선을 행하려는 뜻은 없는 자는 그 기질이 맑지만 정대하지 못한 자요, 문예와 기람의 재능도 있고 선을 행하려는 뜻도 있는 자는 그 기질이 맑은 동시에 정대한 자이다. 따라서 이들은 더욱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그런데 선을 행하는 데에 뜻을 둔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중에는 그 선이 매우 높기는 하지만 단지 이와 같이 하기만 할 뿐 더 이상 발전을 추구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하면, 성현으로 자기의 목표를 삼고서 그 선을 계속 추구하여 마지않는 자가 있으니, 여기에도 고하(高下)와 대소(大小)의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는 모두 기품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인데, 이와 함께 학력(學力)의 유무(有無)도 그 사이에 작용하는 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군자와 소인의 성정(性情)을 살펴보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너무나도 같지 않다. 군자는 학문과 도덕에 뜻을 두고 있기 때문에, 오직 학문과 도덕이 발전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날마다 여기에 힘을 기울일 뿐이요, 의식(衣食)과 거처(居處)에 대해서는 좋게 하려는 뜻이 전혀 없이 대충 기한(飢寒)이나 면하고 비바람이나 가리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소인은 전적으로 외물(外物)에 뜻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양분이 많고 맛있는 음식을 한껏 먹으려 하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의복을 한껏 입으려 하고, 어마어마하게 크고 아름다운 집에서 한껏 거처하려고 한다. 심지어는 전토(田土)와 재산(財産) 역시 한없이 늘리려고만 하기 때문에, 이미 풍족한데도 더 풍족해지려고 하고 이미 많은데도 더 많게 하려고 하는 등 그 욕심이 끝날 줄을 모른다. 그러고 보면 군자와 소인이 애호하고 숭상하는 것은 하늘과 땅처럼 현격히 다르다고 하겠다.개우석(个于石)의 개(个)라는 글자는 응당 자립(自立)의 뜻이 되어야 한다. 그 자의(字義)는 본래 매(枚)라는 글자의 뜻이니, 이른바 1개(个) 2개, 1매(枚) 2매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대개 그 글자를 살펴보면 인(人) 자 안에 1획(畫)을 세웠으니, 이것은 둘 사이에 홀로 서서 이쪽이나 저쪽에 기울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홀로 우뚝 서서 자신의 절조를 지킬 뿐, 남에게 의지하여 빌붙는 일이 없는 것을 말하니, 개우석은 자신의 절조를 지키는 뜻이 돌처럼 견고한 것을 의미한다.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비록 대현(大賢)은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글을 읽어 지식을 갖추고 의를 행함으로써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럽지 않게 될 수 있다면 평범하고 용렬한 수준은 면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이 정도만 되어도 괜찮다고 하겠다.이 세상에는 글을 잘하는 사람도 적지 않고 선인(善人)도 많지만, 이 학문을 하는 자는 지극히 적다. 그리고 이 학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깊이 연구해서 스스로 터득하는 자는 더더욱 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학문을 하기가 어려워서이겠는가. 학문하는 일로 말하면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사람마다 모두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제대로 터득하는 자가 이처럼 지극히 적단 말인가. 옛 시대에는 도를 아는 자가 많았는데, 후세에 와서는 지극히 적어졌다. 이를 통해서 살펴본다면 세상의 교화가 행해지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도 하겠다.학문은 사람에게 있어서 마치 없어서는 안 되는 물이나 불처럼 긴급하고 절실한 것이지만 그 일이 또한 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대개 이것은 심상(尋常)하게 할 수 있는 일이요, 특별히 잘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일이란 단지 성현의 글을 읽고서 그 뜻을 탐색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 뜻이 있는 곳은 바로 의리(義理)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 뜻을 통하면 의리는 자연히 밝혀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의리가 일단 밝혀지면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일을 자연히 그만둘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학문의 도는 지(知)와 행(行)을 겸하는 일인데, 우선 그 절반의 공부는 단지 글을 읽고 그 뜻을 탐구하는 데에 있다. 글을 읽고 뜻을 탐구하는 일이 어찌 하기 어려운 것이겠는가.지금 사람들 가운데 글을 배워 문리(文理)에 통효(通曉)하고 과문(科文) 짓는 법을 배워 과거에 급제하는 자들이 비일비재하다. 그들이 공력을 쏟으면서 고달프게 노력하는 것이 어찌 이 학문을 하는 것보다 수월하다고야 하겠는가. 가령 그들이 그쪽에 쏟는 노력만큼 이 학문에 공력을 기울인다면 어찌 성취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학문을 하기가 어렵지 않다는 것이 어찌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그쪽 방면으로만 향하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고, 이 학문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것이 바로 천하가 온통 무지(無知)에 휩싸인 가운데 선인(善人) 군자를 찾아볼 수 없게 된 이유이다.대저 사람들이 이 학문을 제대로 하지 않는 까닭은, 이 학문이 얼마나 시급하고 절실한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 또 어떻게 힘을 써야 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저 문왕(文王)을 기다리지 않는 호걸들이 세상에 어찌 많이 있겠는가. 중인(中人) 이하는 반드시 인도해 준 뒤에야 흥기(興起)하는 법이다. 그들을 제대로 인도해 주지 않은 탓으로 세상에 학문하는 사람이 없게 하여 똑같이 무지하게 만들고 말았으니, 정말 탄식할 일이라고 하겠다.대저 학문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결국에는 심상(尋常)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 스스로 어찌 모르기야 하겠는가. 그들은 단지 심상한 사람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 거기에 안주하고서 학문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대저 남아(男兒)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떻게 심상한 사람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고는 그 속에서 뛰쳐나오려고 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한(漢) 나라 때에는 《논어》와 《맹자》를 논맹(論孟)이라고 병칭한 경우를 볼 수 없었고, 또 공자와 맹자를 공맹(孔孟)이라고 병칭한 경우도 볼 수 없었다. 당(唐) 나라 한유(韓愈) 때에 와서 비로소 맹자를 추존(追尊)하여 “공자가 맹가에게 전하였다.〔孔子傳之孟軻〕”라고 하였는데, 한유와 유종원(柳宗元)의 글을 보면 모두 논맹이라고 병칭하고 있다. 그리고 송(宋) 나라 때에 와서는 유자(儒者)들이 더욱 존경하며 앙모하였다.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2편은 《예기(禮記)》 속에 들어 있었는데, 한 나라와 당 나라의 유자들은 모두 그것이 성학(聖學)의 정전(正傳)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 뒤 송 나라 때에 인종(仁宗)이 《중용》을 왕요신(王堯臣)에게 하사하고, 《대학》을 여진(呂臻)에게 하사하였으니, 이는 2편이 정밀하고 순수한 것이 다른 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범 문정(范文正 범중엄(范仲淹))이 《중용》을 횡거(橫渠 장재(張載))에게 전수하였으니, 이 역시 유자의 학문의 방도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그러다가 정자(程子) 때에 와서 비로소 《논어》와 《맹자》에 《중용》과 《대학》 2편을 합쳐서 사서(四書)로 만든 다음에 학자들이 도를 추구하고 성현을 희구하는 문로(門路)로 삼게 하였다. 이는 천하의 수많은 서적들 중에서도 이 사서가 가장 정밀하고 가장 긴요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만세(萬世)의 법도가 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논맹(論孟)과 용학(庸學)은 학자에게 있어서, 마치 방원(方圓)을 구할 때에 규구(規矩)를 사용하는 것과 같고 평직(平直)을 구할 때에 준승(準繩)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학자가 이 사서를 방치하고서는 도를 구할 수 없으니, 이는 마치 방원과 평직을 구하는 자가 규구와 준승을 방치하고서는 방원과 평직을 만들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그러나 정자 이전에는 이와 같은 글이 많은 서적 속에 들어 있었는데도 사람들이 귀중한 것인 줄을 알지 못하였는데, 정자가 처음으로 한데 모아 표장(表章)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바로 정 부자(程夫子)의 학문이 한(漢)ㆍ당(唐) 이래 1000여 년간에 독보적으로 일어나서 성인이 전한 도를 홀로 얻게 된 소이(所以)라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로부터는 천하의 학자들이 모두 이 사서를 법도로 삼을 줄 알게 되었다.따라서 사서를 표장하기 이전에는 학자들이 물론 향방을 알기에 어려운 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서를 표장한 이후에는 도를 구하는 학자들이 마치 길을 잃고 헤매다가 지남(指南)을 얻은 것처럼 아무 어려움 없이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세상의 선비들은 여기에 대해서 깊이 음미할 줄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는 마치 일월(日月)이 밝게 비추는데도 소경은 보지 못하고, 뇌정(雷霆)이 진동하는데도 귀머거리는 듣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한(漢) 나라 이래로 국가가 사자(士子)를 인도한 방법과 현사(賢士)와 명유(名儒)가 학문을 한 방법은 모두 오경(五經)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오경은 학자가 덕을 이루고 국가가 정치를 행하는 대법(大法)이라고 할 것이니, 오경이 우주(宇宙)에 있는 것은 마치 일월(日月)이 천지(天地)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우리나라에는 경학(經學)이 없다. 그래서 인재가 배출되지 않고 세도(世道)가 무너졌으니, 경학이 끊어져 없어진 폐해가 실로 이와 같다고 하겠다. 경학이 폐기된 것은 과거(科擧) 제도가 그렇게 만든 데에서 연유한다. 대개 우리나라는 경술(經術)이 밝게 드러난 적이 없는데, 이는 예로부터 그러하였다. 당초에 과거 제도를 설치할 적에 그 일을 주관하는 자가 경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저 강경(講經)을 한다는 이름만 사모하였을 뿐 강경을 하는 실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 탓에 이러한 제도를 만들어서 경술이 영원히 폐기되게 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국가의 크고 작은 여러 관직들이야말로 세상을 다스리는 기구 아닌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현사(賢士)를 얻어서 관직에 있게 해야만 그 직책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요, 이렇게 해서 여러 관직 모두가 제대로 수행되면 성대한 정치를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다. 반면에 불현(不賢)한 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할 경우에는 그 직책이 폐기되고 말 것이요, 이렇게 해서 여러 관직 모두가 폐기되면 세상이 어떻게 쇠하지 않고 어지러워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관직이 폐기되는 이유로는 대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불현한 자는 그 마음이 정대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힘쓰면서 직무를 등한시하기 일쑤이고, 뭔가 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저 관례에 따라 책임만 면하려고 할 뿐이요 처음부터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할 마음은 없으며, 심지어는 공무(公務)를 가탁해서 사욕을 채우는 자까지 나오게 마련이다. 불현한 자는 또 지식이 없어서 원래 직무를 수행할 만한 재능이 없기 때문에, 설령 있는 힘을 다해서 해 보려고 하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함부로 행하다가 일을 해치기 일쑤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현한 자에게 직책을 맡기면 유해무익(有害無益)할 것은 뻔한 이치이다.그러고 보면 세상이 잘 다스려지느냐 혼란스럽게 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재를 제대로 기용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 사람을 뽑을 때에는 반드시 그 사람의 현덕(賢德)을 기준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서 사람을 기용할 때에는 오직 과거 급제 출신이나 문음(門蔭)의 제도를 채택하고 있을 뿐이다. 문음의 경우는 단지 소관(小官)으로 그칠 뿐이니 논외로 친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직책의 경우는 오로지 과거 급제자들을 기용하는데, 과거에서 시취(試取)하는 것을 보면 단지 과문(科文)을 잘 짓거나 경서의 토석(吐釋)을 능숙하게 암송하는 자들만을 뽑고 있을 따름이다.그런데 이 두 가지를 잘하는 기술은 현자(賢者)가 닦는 학업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자의 경우는 꼭 잘한다고 할 수 없는 반면에, 불현한 자들은 어려서부터 연습해 온 만큼 모두 능숙하게 잘해 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거 제도를 통해서는 현자를 얻기가 항상 어려울 수밖에 없고, 불현한 사람이 뽑히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대저 인재를 뽑을 때부터 현덕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 데다가, 뽑힌 사람들을 보더라도 현자가 아닌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중요한 직책을 맡겨서 현자가 수행할 사업을 행하게 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는 비유컨대 장인(匠人)이 아닌 사람에게 집을 짓게 하고, 옥공(玉工)이 아닌 사람에게 옥을 다듬게 하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그들이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세상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만약 정치를 잘해 보려고 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제도를 변통(變通)해야만 가능할 것이다.사람의 지식(知識)과 행의(行義)는 모두 경술(經術)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다. 대개 경술이 있어야 지식이 있고, 지식이 있어야 행의가 있게 되는 것이요, 나아가 천하의 일에 대처하고 천하의 일을 성취하는 것도 모두 경술을 통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만약 경술이 없으면 의리(義理)를 알지 못하게 되니, 비록 심지(心智)가 개명(開明)한 자라고 하더라도 계려(計慮)하는 것이 단지 사지(私智)에 그칠 뿐이라서 끝내는 도에 합치되지 못할 것이요, 비록 자품(資稟)이 선량하고 미행(美行)이 볼 만한 자라고 하더라도 일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함은 물론이요 시비 판단에 어두운 나머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의롭지 못한 지경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경술이 없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들이다.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 이래로 언론(言論)과 행사(行事)가 세상에 일컬어질 만한 사군자(士君子)들을 보면 그들 모두가 물론 경술을 소유한 사람들이긴 하였지만, 대개는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때에 와서야 치지(致知)와 역행(力行)을 공부하는 방법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치지는 성현의 말씀 가운데 정미(精微)하고 온오(蘊奧)한 내용을 한 글자 한 구절마다 모두 연구해서 그 뜻을 투철하게 깨닫기 위한 것이요, 역행은 심술(心術)의 은미(隱微)한 상태로부터 일상적인 동정(動靜)의 사이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말과 하나의 행동을 모두 법도에 따라 행하면서 한결같이 성현을 본받음으로써 곧장 성현의 경지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맹씨가 전한 도를 이어받았다.〔接乎孟氏之傳也〕”라고 말한 것이다.정주(程朱) 이전의 유자(儒者)들이 경전(經傳)에 힘을 기울였다고 하더라도, 물론 정주처럼 전일하고 독실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경전의 글을 읽고 대의를 파악하여 그것을 가지고 몸으로 실천하고 그것을 가지고 당시 세상의 일에 대처한 점에 있어서는 모두 동일하게 할 수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술(經術)을 지녀야만 비로소 대인 군자가 되는 것이니, 경술도 없으면서 대인 군자가 될 수 있는 그런 이치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우리나라 사람의 인물됨을 보면 평범하고 잗달기만 할 뿐 걸출한 위인(偉人)은 보기 드문데, 그 까닭을 깊이 생각해 보면 실로 경술이 없는 데에 연유한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에서 과거 공부를 하는 사람들 모두가 경서(經書)를 읽고 있는데, 어찌하여 경술이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대개 그들이 평소에 공부하는 것이 경서라고는 하지만 마음과 뜻을 집중하여 쉬지 않고 골몰하는 것은 단지 토석(吐釋)을 익히는 것일 뿐이요, 그 속에 담긴 의사(意思)는 전혀 탐구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이 글을 모두 외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습관적으로 익히고 있을 뿐이요, 그 뜻을 조금이라도 아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어떻게 그들이 경술을 소유할 수가 있겠는가.우리나라의 강경(講經)하는 법을 보면, 문리(文理)와 의의(意義)를 통했는지의 여부는 도대체 살펴보지 않고, 단지 서너 구절의 훈고(訓詁)를 잘 외우거나 토석에 착오가 없는 자만을 뽑고 있을 따름이다. 경서의 토석을 어떤 사람이 달아 놓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아서 인출(印出)하여 유포시킨 뒤에 수많은 사자(士子)들로 하여금 이대로 익히게 하고 있다. 그리고는 강송(講誦)을 할 때에도 일률적으로 인출된 교본에 의거하게 하면서, 하나라도 차질을 빚거나 위배할 경우에는 번번이 낙제시키곤 한다.대저 토를 달게 된 이유를 살펴보건대, 원래 우리나라의 언어가 중국과 같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문자나 구절이 끊어지는 곳에 방언(方言)을 끼워 넣어 연속되게 함으로써 그 뜻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토라는 것은 단지 그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하려는 수단일 뿐이니, 본시 그다지 중하게 여길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의미를 통했는지의 여부는 따지지 않은 채 단지 인본(印本)에 달린 토를 잘 기억하고 있는지의 여부만을 가지고 취사(取舍)를 결정하고 있으니, 강경(講經)을 하는 본래의 뜻이 어찌 이러한 것이겠는가.그리고 방언의 ‘하며’와 ‘하고’와 ‘이요’는 그 뜻이 같고, ‘하니’와 ‘한대’도 그 뜻이 같으며, 그 밖에 말은 달라도 뜻은 같은 것이 매우 많은데, 그 뜻이 같기만 하다면 어느 쪽의 방언을 택하건 모두 안 될 것이 없다. 당초에 토를 단 자가 여러 가지 토 중에서 마침 하나를 취해서 정본(定本)을 만든 다음에 독자로 하여금 일체 그대로 따르게 한 것인데, 다른 토도 그 뜻이 같은 관계로 독송(讀誦)할 적에 서로 뒤섞이기가 쉬운 만큼, 매우 익숙하게 연습해야 하고 또 항상 익혀야만 정본의 토를 분명하게 기억하여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이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모두 문리(文理)에 통하기만 하면 서로 뒤섞인다 한들 경의(經義)에는 조금도 해가 될 것이 없는데, 공력을 잔뜩 허비하면서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다니, 이 어찌 너무나도 무익한 공부가 아니겠는가.게다가 그 토 중에는 문리에 통하지 않고 본의(本意)를 잃은 것도 매우 많은데, 잘못 단 토를 한결같이 따르게 하다니, 이것은 더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그리고 《상서(尙書)》에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의 유무(有無)를 기록해 놓은 것과 같은 것은 문의(文義)와는 조금도 관계가 없으니, 그것을 분명히 기억한들 무슨 이로움이 있으며, 그것을 잘못 기억한들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가지고 급제와 낙제를 결정하곤 하는데, 이런 것들도 항상 익혀야만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종류는 경서 중에서 너무나도 긴요하지 않은 것들이니, 설사 독자들이 이에 대해서 지극히 정밀하게 하고 익숙하게 한다 하더라도, 경서의 뜻을 통하는 데에 어찌 조금이라도 이로운 바가 있겠는가.그리고 경문(經文) 중에서도 반드시 글의 분량이 적은 장구(章句)만을 가려서 시험을 보이곤 하는데, 이는 강경(講經)하는 응시자가 가려서 읽었으리라는 것을 미리 감안해서 취하는 조치이다. 또 주해(註解) 중에서도 단지 몇 구절의 훈고만을 질문하곤 하는데, 이 역시 강경하는 응시자가 모두 읽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미리 감안해서 취하는 조치이다. 시관(試官)의 시험 방식이 이와 같기 때문에 응시자들도 가려서 읽는 것이 이미 규례(規例)로 굳어지고 말았다. 대저 전편(全篇)을 읽으면서 오직 그 뜻을 통하지 못할까 두려워해야 할 텐데, 경문 중에서는 글의 분량이 적은 장구만을 가려서 시험하고, 주해 중에서는 몇 구절의 훈고만을 가려서 시험하고 있으니, 이렇게 하고서야 어떻게 그 뜻을 통하게 할 수가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글을 읽는다면 비록 글을 읽었다고 말하더라도 경서의 뜻에는 어두울 것이니 읽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허위(虛僞)를 분식(粉飾)해서 시험에 응시하는 것인데, 시관 역시 허위라는 것을 알고서도 그들을 뽑고 있는 것이다. 시험을 보이는 자나 강경에 응시하는 자나 모두 허위 일색이니, 이치로 볼 때 이러고서도 실력 있는 인재를 어떻게 뽑을 수가 있겠는가.대저 토석(吐釋)에 공력을 쏟아도 이로울 것이 전혀 없고, 분량이 적은 장구만 가려서 시험하는 것은 허위라고 할 것인데, 과거에서 뽑을 때에는 전적으로 이 방식만을 채택하기 때문에, 지의(旨意)와 의리(義理)를 꿰뚫어 통달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국가의 시험을 통과할 수 없는 실정이다. 대저 사자(士子) 중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일단 과거에 급제하고 싶어 한다면, 급제하지 못할 공부를 어찌 기꺼이 하려고 하겠으며, 급제할 수 있는 공부를 어찌 하지 않으려고 하겠는가.이 때문에 많은 사자들이 있는 힘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은 단지 무익하고 허위로 가득 찬 일들일 따름이요, 경서의 뜻을 연구하는 것은 전혀 없게 되고 말았으니, 그러고 보면 이는 이렇게 하는 자들의 죄가 아니요, 국가의 강경(講經) 제도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난 200년 동안에 걸쳐 이 제도가 뭇 사자들을 오도(誤導)하여 더 이상 경서의 뜻을 탐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누구나 의리를 모르게 만들고 말았으니, 이 제도가 해를 끼친 것이야말로 왕안석(王安石)의 삼경자의(三經字義)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국가의 정치는 전적으로 인재의 힘을 빌려야 한다. 그런데 한 나라의 사자(士子)들이 모두 의리를 알지 못한 채 하나같이 수준이 낮고 비루하기만 하다. 그리하여 크고 작은 여러 관직들이 모두 이런 사람들로 채워져 있으니, 임금이 대신하는 하늘의 일이 어떻게 폐기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국가에서 행하는 일이 어떻게 혼란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대저 강경(講經)을 통해서 시취(試取)하는 본래의 목적은 경술(經術)에 통달한 인재를 얻기 위함이다. 그런데 거꾸로 경술이 없어지게 하고 인재를 어리석게 만든 나머지, 한 세상이 똑같이 무지해져서 여러 관직들이 모두 폐기된 가운데 나랏일이 끝내는 지리멸렬해진 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이런 지경에까지 이를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당초 과거 제도를 설치할 적에 그 일을 주관한 자가 필시 경술에 통달한 자가 아니었을 것이요, 따라서 경학(經學)의 경중(輕重)의 소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단지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경학으로 시취하려고 한 것일 뿐이요, 중국 조정에서 인재를 뽑는 곡절을 상세히 알아보고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당초에는 그 폐단이 이와 같이 심하지는 않았을 텐데, 뒤에 와서 시관(試官)이 된 자들이 더욱 심하게 그 제도만을 융통성 없이 고수하고, 사자(士子)가 된 자들이 교묘하게 허위를 일삼는 일이 날이 갈수록 불어난 나머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지금 이 제도를 고치지 않으면, 국내 사자들의 학술이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을 길이 없다. 그리고 사자들의 학술이 바르지 못하면 인재가 황폐해질 것이니, 여러 관직들이 폐기되는 것을 무슨 수로 바꿀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이 제도를 고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정치의 근본이 되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이 제도를 고치는 방안을 말한다면, 마땅히 배강(背講)하는 방식을 임강(臨講)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강독하는 장(章)도 분량의 대소를 가리지 말 것이요, 주(註) 역시 모두 읽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강독하는 것이 서투른지 익숙한지를 살펴보고, 그 의의(意義)의 소재를 질문한 다음에, 강독을 익숙하게 하고 의의를 통한 자만을 뽑아야 할 것이요, 토석(吐釋)이 설령 인본(印本)의 그것과 다르다 할지라도 문리(文理)를 해치지만 않으면 그런 사람도 뽑아야 할 것이다.대저 사람이 기억하는 능력은 각자 같지 않다. 한 번 보고서 바로 기억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백 번을 읽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 그리고 기억을 한다고 해도 한 구절이나 한 글자라도 착오가 없을 수는 없는 일이다.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의 글이 적지 않으니, 중인(中人)의 기억 능력으로는 아무리 열심히 읽는다 하더라도 모두 외운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까닭에 중요한 대목만 추려서 외우는 재주를 부리게 된 것이니, 이렇게 한다면 이서배(吏胥輩)들이 하는 수작과 다를 것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그리고 그 뜻을 알지 못하면 습관적으로 그 글을 외운다고 하더라도 식견이 있는 자가 될 수 없다. 반면에 그 뜻을 안다면 그 글을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도를 아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따라서 임강(臨講)을 하게 하고 그 뜻을 질문한다면, 배송(背誦)하는 어려움이 없어진 결과 중요한 대목만 추려내어 외우는 재주를 부릴 일도 자연히 없어짐과 동시에 반드시 전편(全篇)을 모두 읽게 될 것이요, 또 반드시 그 뜻을 탐구하기만 할 뿐 토석에 온 힘을 쏟는 무익한 공력도 허비하지 않게끔 될 것이다.대저 성현의 언어에는 의리가 깃들어 있다. 따라서 그 글을 읽고 그 뜻을 통하기만 하면 의리가 자연히 밝아질 것이니, 이에 감동을 받고 선심(善心)을 발하여 흥기(興起)하여서 선을 행하는 자가 분명히 많아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습(士習)이 자연히 바로잡히고 인재가 자연히 많아질 것이니, 그러고 보면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마땅히 힘써야 할 급선무가 아니겠는가.내가 일찍이 이런 의견을 제기하면서 성상께 들려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의 상신(相臣)이 막는 바람에 그 일이 결국 시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는 대개 그 사람 자신에게 경학이 없었던 까닭에 경술이 귀중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나머지, 사람이 꼭 경술에 통할 것은 없으니 경서의 뜻을 모른다 해도 해가 되지는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뜻이 원대하지 못한 탓으로 사습을 바꿔 선치(善治)를 이루는 일에는 당초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고, 또 자기가 아는 것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은 의론에 대해서는 저지하는 것을 능사로 알고 따르는 것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국가를 책임져야 할 재상이 이 모양이었으니, 좋은 계책이 시행되는 것을 어떻게 바랄 수 있었겠는가.임금이 자기 몸의 동정(動靜)과 작위(作爲) 모두를 규구(規矩)와 법도에 합치되게 하여 털끝만큼이라도 법에 맞지 않거나 도에 맞지 않는 일이 없게끔 한다면, 임용하는 사람도 모두 선인(善人)일 것이요 시행하는 일도 모두 타당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는 소이(所以)라고 할 것이다. 반면에 임금이 하는 일이 법도에 맞지 않아, 궁실을 짓기를 좋아하거나 유연(游宴)하기를 좋아하거나 잡희(雜戱)를 즐기거나 신선술(神仙術)을 좋아하거나 전공(戰功)을 세우기를 좋아한다면, 이것은 모두 임금의 도리로 볼 때 행할 일이 못 되는 것이다. 임금이 하는 일이 이 몇 가지 속에 포함된다면, 임금이 임용하는 사람도 반드시 선인이 아닐 것이요, 시행하는 일도 모두 도리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니, 국가가 어떻게 어지러워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날의 대인(大人)이 반드시 임금을 바로잡는 일을 급선무로 삼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치도(治道)에 대해서는 옛날의 성현들이 상세히 말해 놓았다. 그래서 역대(歷代)에 그대로 행해서 효과를 본 것이 또한 많으니, 이에 의거해서 행한다면 어려움 없이 좋은 정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정치를 하는 자들은 오직 평범한 지려(智慮)를 가지고 쇠한 세상에서 흘러 내려온 규례(規例)만을 한결같이 따르고 있다. 그리고는 이렇게 하면 좋은 정치를 이룩할 수 있다고 하면서 옛날의 법도를 따라 본받으려는 뜻은 전혀 없으니, 더욱 심하게 쇠퇴하고 혼란해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대저 옛날의 거룩하고 밝은 제왕의 도를 오랜 뒤에 본받아 오늘날에 시행함으로써 쇠퇴하고 혼란스러운 습속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학문을 한 군자만이 제대로 해낼 수 있는 것이니, 어찌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런데 세상의 임금들이 사람을 기용하는 것을 보면 언제나 범상한 사람들만을 뽑고 있으니, 그들에게 어떻게 현사(賢士)와 군자가 해야 할 사업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주D-001]맹자(孟子)는 …… 있다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나온다. 곡망(梏亡)은 짓눌려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공자의 말의 전문은 “잡고 있으면 보존되고 놓아 버리면 도망치며, 드나드는 일정한 때도 없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도 없는 것, 그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이다.[주D-002]마음을 …… 한다 : 정이(程頤)의 말인데, 《근사록(近思錄)》 권4 존양류(存養類)에 나온다. 강자(腔子)는 몸 안에 신명(神明)이 거한다는 곳으로, 곧 자신의 내면을 뜻한다.[주D-003]이미 …… 한다 : 정호(程顥)의 말인데, 역시 《근사록》 권4 존양류에 나온다. “성현의 수많은 말씀들도 그 요점을 살펴보면, 단지 사람으로 하여금 이미 놓친 마음을 붙잡아 묶어서 다시 사람 몸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聖賢千言萬語 只是欲人將已放之心 約之 使反復入身來〕”라는 말을 포저가 요약한 것이다.[주D-004]평상시에 …… 한다 : 제자 번지(樊遲)에게 일러 준 말로,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나온다.[주D-005]사람이 …… 한다 : 《근사록》 권4 존양류(存養類)에 나오는 정호(程顥)의 말인데, 원문은 “人有四百四病 皆不由自家 則是心須敎由自家”로 되어 있다. 사백사병(四百四病)은 사지(四肢) 백체(百體)가 사시(四時)에 걸리는 질병이라는 해석과,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에 각각 101가지의 질병이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각종 질병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주D-006]인(仁)을 …… 하였으니 : 《논어》 태백(泰伯)에 “선비는 뜻이 크고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 하면 등에 진 짐이 무겁고 앞으로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을 자기의 임무로 알고 있으니 그 짐이 또한 무겁지 않겠는가. 죽은 뒤에야 그만두는 것이니 그 길이 또한 멀지 않겠는가.〔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라는 증자(曾子)의 말이 나온다.[주D-007]생소한 …… 한다 : 송(宋) 나라 여혜경(呂惠卿)이 절도사(節度使)로 항주(杭州)에 있을 때에, 대통 선사(大通禪師) 선본(善本)이라는 승려를 찾아갔더니, 그 선사가 “나는 그대에게 출가해서 불법을 배우라고 권하지는 않겠다. 다만 복을 아끼면서 수행하라고 그대에게 권하고 싶다.〔我不勸你出家學佛 只勸你惜福修行〕”라고 말하고, 또 “나는 단지 그대에게 생소한 곳은 익숙하게 만들고, 익숙한 곳은 생소하게 만들도록 권할 따름이다.〔我只勸你生處放敎熟 熟處放敎生〕”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명(明) 나라 오지경(吳之鯨)이 지은 《무림범지(武林梵志)》 권8 재관호지(宰官護持)에 나온다.[주D-008]군자는 …… 갖춘다 : 《논어》 안연(顔淵)에 나온다.[주D-009]군자는 …… 않는다 : 《논어》 요왈(堯曰)에 나온다.[주D-010]군자는 …… 취한다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나온다.[주D-011]군자는 …… 공경한다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나온다.[주D-012]남에게 …… 한다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나온다.[주D-013]덕이 …… 없다 : 《서경》 주서(周書) 여오(旅獒)에 나온다.[주D-014]어떤 …… 것이다 : 《국어(國語)》 권9 진어(晉語) 3에 나온다.[주D-015]행동할 …… 낫다 : 《국어》 권3 주어 하(周語下)에 나온다.[주D-016]사욕이 …… 항거한다 : 《국어》 권17 초어 상(楚語上)에 나온다.[주D-017]몸이 …… 그만둔다 : 《예기(禮記)》 표기(表記)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주D-018]유장(幼壯)의 …… 기다린다 : 《예기》 사의(射義)에 나온다. 유장은 20세와 30세를 가리키고, 기질(耆耋)은 60세와 70세를 가리킨다.[주D-019]대저 …… 같아진다 : 《예기》 제의(祭義)에 나온다.[주D-020]아침에 …… 좋다 : 《논어》 이인(里仁)에 나온다.[주D-021]망신지로야(忘身之老也) 이하의 구절 : ‘중도이폐(中道而廢)’ 바로 뒤에 이어지는 구절로 “몸이 늙어 가는 것도 잊고, 앞으로 햇수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모른 채, 날마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죽음에 이른 뒤에야 그만둔다.〔忘身之老也 不知年數之不足也 俛焉日有孜孜 斃而後已〕”이다. 《禮記 表記》[주D-022]마음속으로 …… 자 : 표기의 ‘향도이행(鄕道而行)’ 구절 맨 앞에 “마음속으로 인을 편안하게 여기는 자는 천하에 한 사람 정도나 있을 따름이다.〔中心安仁者 天下一人而已矣〕”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주D-023]성인이 …… 좋아하였으니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 6 장에 “순 임금은 묻기를 좋아하고 천근한 말도 자세히 살피기를 좋아하였다.〔舜好問而好察邇言〕”라는 말이 나온다.[주D-024]개우석(个于石) : 《주역(周易)》 예괘(豫卦) 육이효(六二爻)에 “절조가 돌처럼 견고한지라, 하루가 지나기 전에 안일에서 벗어나니, 정하고 길하리라.〔个于石 不終日 貞吉〕”는 말이 나온다.[주D-025]문왕(文王)을 …… 호걸들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주(周) 나라 문왕과 같은 성군(聖君)이 나오기를 기다린 뒤에야 흥기하는 자들은 일반 백성들이다. 호걸의 인사들로 말하면 문왕이 없더라도 오히려 혼자서 흥기한다.〔待文王而後興者 凡民也 若夫豪傑之士 雖無文王猶興〕”라는 말이 나온다.[주D-026]공자(孔子)가 맹가(孟軻)에게 전하였다 : 한유의 원도(原道)에 “요는 이 도를 순에게 전하고, 순은 이 도를 우에게 전하고, 우는 이 도를 탕에게 전하고, 탕은 이 도를 문왕ㆍ무왕ㆍ주공에게 전하고, 그들은 공자에게 전하고, 공자는 맹가에게 전했는데, 맹가가 죽은 뒤에는 전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堯以是傳之舜 舜以是傳之禹 禹以是傳之湯 湯以是傳之文武周公 文武周公傳之孔子 孔子傳之孟軻 軻之死 不得其傳焉〕”라는 유가(儒家)의 이른바 도통설(道統說)이 나온다.[주D-027]맹씨(孟氏)가 …… 이어받았다 : 주희(朱熹)가 정자(程子)의 업적을 일컬으면서 찬미한 말로, 《대학장구(大學章句)》 서문에 나온다.[주D-028]왕안석(王安石)의 삼경자의(三經字義) : 송(宋) 나라 신종(神宗) 때에 왕안석이 지은 《모시의(毛詩義)》와 《상서의(尙書義)》와 《주관신의(周官新義)》를 합친 이른바 삼경신의(三經新義)를 말한다. 신종이 왕안석에게 “지금 경서를 이야기하는 자들의 설이 각각 다르니 어떻게 도덕을 하나로 만들 수 있겠는가. 경이 지은 경을 반포하고 유통시켜서 학자들이 귀일되도록 하라.〔今談經者從殊 何以一道德 卿所著經 其以頒行 使學者歸一〕”고 하였는데, 이 책이 희령(熙寧) 8년(1075) 6월에 완성되어 학관(學官)에 반포되자, 천하 사람들이 일컬어 신의(新義)라고 하였으며, 사자(士子)가 유사(有司)에게 나아가 강경 시험을 볼 때에는 반드시 그의 해설을 위주로 해서 답안지를 작성하였다고 한다. 《宋史 卷157 選擧志3, 卷327 王安石傳》[주D-029]배강(背講)하는 …… 것이다 : 과거 시험 방식의 개혁을 위해서 포저가 일관되게 주장한 것인데, 끝내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배강은 책을 보지 않고 강독하는 것으로, 배독(背讀) 혹은 배송(背誦)이라고도 하며, 이와 반대로 책을 펴놓고 보면서 강독하는 것을 임강(臨講)이라고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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