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대사의 평상심平常心과 범부의 일용사日用事
강서 대적도일선사大寂道一禪師 곧 마조대사馬祖大師의 마조어록 중에 시중법문示衆法門을 인용한다. 다음과 같다.
마조어록: 대중에 보여주고자 말했다. “도는 수습修習할 필요가 없다. 단지 오염汙染시키지 말지니라. 무엇을 오염이라 하는가? 단지 어떤 생사심生死心으로 조작하거나 따라가면 모두 오염이다. 만약 그 도를 바로 체달하고자 하느냐? 평상심平常心이 도이니라. 무엇을 평상심이라 일컫는가?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으며, 취사가 없고, 단상斷常이 없으며, 범정凡情도 없고 성해聖解도 없느니라. 이에 유마경에 이르기를, ‘범부행凡夫行도 아니고, 성현행聖賢行도 아니니, 이것이 바로 보살행이니라.’라고 한 것이다. 단지 지금 행주좌와行住坐臥하고 군기群機에 수응隨應하여 중생을 영접함이 모두 도일 따름이니라.”(示衆云 道不用修 但莫汙染 何爲汙染 但有生死心 造作趨向 皆是汙染 若欲直會其道 平常心是道 何謂平常心 無造作 無是非 無取舍 無斷常 無凡無聖 經云 非凡夫行 非聖賢行 是菩薩行 只如今行住坐臥 應機接物 盡是道)
나의 견해: 위 시중법문의 취지를 따라가면, 마대사의 평상심은 바로 유마경의 보살행에 귀결한다. 마조대사의 평상심과 유마경의 보살행, 바로 보살의 마음은 전혀 다르지 않다. 이는 모두 양변을 여읜 중도행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범부들이 쓰는 평상이란 오늘의 일이 어제와 다름없는 보통의 상태를 뜻한다. 하지만 마조대사는 여기에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으며, 취사가 없고, 단상이 없다는 엄청난 조건을 붙인다. 이는 범부의 마음이 아니라 양변을 여읜 중도의 마음이자 보살의 경지이다.
평상심에 대한 마조대사의 정의는 위와 같다. 평상심이 도라고 말할 때, 그 평상심은 마조대사의 평상심인가? 아니면 범부의 평상심인가? 범부는 보살행을 평삼심으로 쓸 수 없다. 절대 범부의 평상심이 될 수 없다. 만약 이것이 보살의 평상심이라면, 그 보살에게도 평상과 상대되는 이상異常이나 비상非常이 있어야 언어로서의 대대가 성립된다. 그렇다면 보살의 마음에도 평상이 있고, 이와 상대되는 이상이나 비상이 있을까? 하지만 분별이 끊어진 보살의 세계에는 이상도 비상도 존재할 수 없다. 이보다 더 큰 패궐은 있을 수 없다.
일단 공부자의 견해를 취하면, 정명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 마조대사는 평상이라는 범부의 단어를 가져와 존재할 수 없는 모순된 개념을 덧씌운 셈이다. 부처님이나 교학의 논사들은 모두 정명을 어지럽히지 않고서도 위대한 경이나 논서를 저술하거나 법을 설한 것에 비하면, 마조대사는 언어의 기본규칙을 깨고 혼란을 초래함으로써 지혜의 부족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자문자답한다.
“만약 그 도를 바로 체달하고자 하느냐?”
“범부의 일용사日用事가 도이니라.”
주역에 “백성은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군자의 도는 다해가니라.”(百姓日用以不知 故君子道鮮矣)라는 말씀이 있다. 백성들은 날마다 밥 먹고 일하며 도를 쓰고 있지만, 스스로 그것이 도인 줄 모를 뿐이다. 알지 못한다고 해서 도가 아닌 것은 아니다. 범부의 일용사가 바로 도이기 때문이다.
이 일용사는 마조대사의 평상심의 도보다 훨씬 더 탁월하다. 어째서 그러한가? 원각경에 이르기를, “선남자여, 일체 중생의 갖가지 환화幻化는 모두 여래의 원각묘심圓覺妙心에서 나오느니라.”(善男子 一切衆生 種種幻化 皆生如來 圓覺妙心)라고 한다. 바로 범부들이 일상에서 겪는 희로애락이나 욕망 착각 등 갖가지 환화, 다시 말하면 이상하거나 비상하다는 마음 등은 그 뿌리를 찾아가면 결국 여래의 원각묘심에서 한순간도 떠난 적이 없다. 이 범부의 일용사를 따라서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면 곧바로 원각에 이른다. 이것이 어찌 길이 아니랴.
다시 부연한다. 마조대사가 주창한 평상심의 도에 이르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조건이 따른다. “무엇을 평상심이라 일컫는가?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으며, 취사가 없고, 단상이 없으며, 범정도 없고 성해도 없느니라.” 이 자격요건을 갖춘 마음은 인류 역사상 서가모니 부처님이나 문수보살 보현보살 또는 유마거사 같은 성인들의 경지일 뿐이다. 그러나 범부의 일용사가 도라고 하면, 여기에는 일체 조건 중에 단 하나도 필요 없다. 범부가 탐진치貪瞋癡에 눈이 어두워 이상한 마음을 내고, 위기 상황에서 비상한 마음을 내며 살아가는 그 고단한 일상 자체가 이미 원각묘심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굳이 마조대사처럼 감정을 다 메마르게 하고 분별을 억지로 끊어내어 이상이나 비상이 없는 무정물 같은 상태를 만들 필요가 없다. 그저 날마다 살아가는 일용사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면, 본래 갖추어져 있던 원각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확실하고 탁월한 길이 어디 있으랴.
2026. 6. 10. 15:00, 丙午 甲午 乙卯 癸未, 길상묘덕일 규련원주葵蓮園主 정덕성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