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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착하게 살았다>, 이지호, 나는 오늘 착하게 살았다, 어린이시나라

작성자이준식|작성시간26.06.12|조회수28 목록 댓글 0

< 자기 긍정과 자기 위로의 시 >

 

                                                편집부

 

나는 오늘 착하게 살았다

 

이지호

 

뚱뚱한 게 예민하긴.

못생긴 게 까칠하긴.”

 

이 말을 듣고도

그 입을 찢지 않았다.

 

 

이지호, 《나는 오늘 착하게 살았다》, 어린이시나라, 28쪽

 

-시 제목이 참 좋다.

“나는 오늘 착하게 살았다”니! ‘오늘 나는’이나 ‘나는 오늘’로 시작하는 글은 보통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쓰던 일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나는 오늘 엄마랑 시장에 갔다. 갔더니 맛있는 것들이 아주 많았다. 엄마한테 옥수수를 사달라고 했는데, 안 사줬다. 엄마한테 쓴소리만 들었다. 그러면 다신 시장에 안 데려온다고. 옥수수도 안 사줄 거면서 왜 데려온 거지?’ 초등학생인 양 일기처럼 글을 써 본다. 제목이 은연중에 일기를 연상하게 해서일까? 이 시는 제목이 너무 친근하고 따듯한 느낌을 준다. 하물며, 화자는 “착하게 살았다”고 한다.

‘착하게 살아야 함’은 어려울 수 있다. ‘착함’이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 같고, 착하게 ‘살아야 함’은 노력이 필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착하게 산다’는 것은 언뜻 쉬워 보인다. 마치 ‘오늘 하루 잘 살았다’처럼 말이다. 화자의 “착하게 살았다”는 제목을 읽고, 독자들은 ‘그래, 그렇지. 착하게 살아야지. 착하게 살았구나. 잘했네.’하고 여긴다. 제목이 ‘착하게 살아야 했다’라면 무언가 힘든 일을 겪었고, 그것을 이겨냈을 거란 기대를 하게 만들 텐데, 그냥 ‘착하게 살았다’고 하니 그냥 당연한 듯 세상 쉬운 일처럼 말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독자는 기분 좋고 가볍게, 마음 놓고 시를 읽기 시작한다.

 

-시는 두 연뿐이라 아주 단순하고 명쾌하게 읽힌다.

1연에서 큰따옴표로 어떤 사람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들려준다. 헌데,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말이다. 누군가는 화자일 가능성이 큰데, “뚱뚱한 게 예민하긴. 못생긴 게 까칠하긴.” 읽는 이는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어떨까?’를 상상하거나, ‘나도 이런 비슷한 말 들은 적 있는데.’하고 공감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우리 사회에서는 뚱뚱하면 예민하면 안 되고, 못생기면 까칠해선 안 된다. 뚱뚱하고 못생긴 사람들에게 그러면 안 되지만, 뚱뚱한 사람들은 타인이 허튼 말이나 막말을 해도 자신들의 몸처럼 넉넉히 잘 받아줘야 하나 보다. 아니면, 못생긴 것도 별로인데 까칠하기까지 하면 안 되나 보다.

1연의 말은 성격과 외모를 한꺼번에 싸잡아 흉보는 내용이다. 직접적으로 욕을 하지는 않았지만 듣는 이에게는 너무 아픈 말이다. 한때 ‘까방권’이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까임방지권이라는 말의 준말인데, 그 뜻은 잘생기고 예쁜, 소위 멋진 사람들은 타인들로부터 자신들을 내리깎는 말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악플이 유행하는 시대에 연예인들의 고충을 반영한 세태를 보여주는 말이다. 권리가 있다는 말은 그런 권리가 없는 사람들도 있음을 내포한다. 언제부터 외모와 겉모습이 이렇게 인정받는 세상이 됐을까? 어쩌다가 그런 게 권리라는 말까지 가져다 쓰게 된 걸까? 1연은 제목을 기분 좋게 읽은 독자의 뒤통수를 친다. 화자는 1연의 저 말을 듣고 어떻게 했을까? 무얼 했을까? ‘착하게 산’일은 무엇일까? 2연을 보자.

보통은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외모 비하는 나쁜 거야.’라든가 ‘뚱뚱하거나 못생긴 건 잘못된 게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네가 더 잘못하는 거야.’ 등으로 맞받아쳐 주길 예상하고 짐작한다. 권선징악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나쁜 사람은 호되게 당하고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 모습은 모두를 기쁘게 한다. 헌데, 화자는 “이 말을 듣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 “그 입을 찢지(도) 않았다.” 결국은 한 게 없다. 듣고만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침묵은 보통 동의나 긍정인데, 2연의 내용은 전혀 반대의 것이다. 저 말을 하는 사람의 입을 찢고 싶을 정도의 분노를 느끼는 화자의 심정이 그대로 느껴진다. 화자의 표정이나 가만히 듣고 있었을 태도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분노가 ‘입을 찢을 만큼의 것’이라는 데에는 십분 공감이 간다. 한편, 폭력성과 잔인함의 정도가 더 큰 자극을 찾는 대중들에 힘입어, 눈 뜨고 보기 힘든 수준의 영상 이미지로까지 난무하는 요즘이다. 이미지도 아니고 영상도 아닌, “입을 찢지 않았다.”는 문자가 이렇게 끔찍하게 느껴질 수 있다니. 시는 두 연이라고 해봤자, 길어야 두세 문장일 뿐인데. 독자들은 놀랍다. 보여주지 않았는데 마치 그 분노를 본 것 같다.

앞서 ‘화자가 결국은 한 게 없다’고 썼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어떤 일을 하지 않은 것도 무언가를 한 것과 같은 행동이고 선택이다. 어릴 적 아이들이 밖에서 동무들과 어울리다 다른 친구한테 맞고 들어가면 보통 부모들은 ‘너도 같이 때려주지 않고 뭐 했느냐’라는 핀잔 섞인 말을 하곤 했다. 못 때린 것인지 안 때린 것인지, 아니면 이런 분간조차 할 겨를이 없었던 것인지 아무튼, 상대가 한 나쁜 행동을 똑같이 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바로 좋은 사람이다. 좋은 일을 한 사람은 그 상대보다 나은 사람이다. 부모의 핀잔을 듣는 아이들이 이를 잘 분간하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 속의 화자는 “이 말을 듣고도” 인내했다. 공자의 말을 들지 않아도 모두가 안다. 요즘의 말로 하자면,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하는 사람’이 그렇다. 화자가 한 착한 일, 바로 “착하게 한 일”을 설명하고자 근거를 들자면 이 밖에도 많다. ‘폭력은 폭력을 부르는 법’이고, ‘지는 게 이기는 것’ 아닌가! 화자는 행동했다. 그 못된 “입을 찢지 않았다.”

 

-오늘은 착하게 살았지만, 어제는 어땠을까?

속으로 울며 억울해하기만 했을까? 내일의 화자는 어떨까? 1연의 말들을 한두 번 들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아무래도, “나는 오늘”이라는 제목이 걸린다. 시를 쓰는 데에 상상력이 필요하지만, 시를 읽는 데에도 상상력은 필요하다. 화자의 내일은 어떨까? 화자를 향한 저런 말들이 사라지기는 만무한데, 내일도 인내하고 지는 게 이기는 현명함을 택할까? 그렇지 않고, 내일은 폭력성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참 섬뜩하다. 화자가 느낀 분노는 적지 않은 시간 조금씩 쌓인 것일 테고 내일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화자가 가진 섬뜩함이 어디까지일까를 상상하면 참 아득해진다. 아득해지는 만큼 마음도 무거워지고, ‘폭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제목이 화자의 내일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서 두렵지만, 오늘의 자신을 스스로 긍정하고 있어서 참 다행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지만, 화자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다독이고 인정하고 있다. ‘착하게 살았다’니 얼마나 중요한 긍정인가! 일상에서 평소 나쁜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을 인정받고 긍정하긴 쉽지 않다. 화자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겐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화자가 쓴 제목의 자기 긍정은 스스로를 지키는 큰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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