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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의 강바람 속에서 다시 만난 사관학교의 시간

작성자김 재균 (3기)|작성시간26.06.09|조회수30 목록 댓글 0

팔당의 강바람 속에서 다시 만난 공군 2 사관학교의 시간

한국에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태평양 상공을 건너며 몇 자 적어 본다.

창밖에는 끝없는 구름만 펼쳐져 있다. 수만 피트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평온하기만 한데, 내 마음은 아직도 한국에 머물러 있다. 마치 몸만 비행기에 실렸을 뿐, 마음은 여전히 북한강 강변 어딘가를 천천히 걷고 있는 듯하다.

뉴욕으로 돌아오기 이틀 전이었다.

사관학교 동기인 송치대가 연락을 해 왔다.

“교관님들 한번 뵙고 가야 하지 않겠나?” 나의 제의에 그는 승쾌히 동의 하였다.

짧은 휴가였다. 부모님 제사를 모시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여행을 하다 보니 어느새 귀국 날짜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한국에 올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만나고 싶은 사람은 많고 시간은 늘 부족하다.

졸업 후 한 번도 보지 못한 동기들도 있다. 서로 소식을 묻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어쩌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처럼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아가고 있으리라 믿으며 지낸다.

돌이켜보면 미국 생활이 어느덧 내 인생의 절반을 훌쩍 넘었다.

영주권도 없던 시절,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던 미국 생활. 언어도 낯설고 문화도 달랐던 그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 버티며 달려왔다. 그때는 앞만 보고 걸었다. 무엇을 향해 그렇게 달렸는지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시간들이 오늘의 나를 지탱하는 단단한 초석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이제는 나이 들어가면서 조금씩 내려놓는 법을 배우고 있다.

예전 같으면 하루라도 더 움직이고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려 했겠지만, 이제는 사람 한 명과 마주 앉아 나누는 한 잔의 차와 한 끼의 식사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번에는 꼭 교관님들을 뵙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기호 교관님은 오래전 나의 고향 나주를 찾아와 주셨고, 내가 자란 시골집까지 함께 둘러본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그냥 인사도 못 드리고 미국으로 돌아가기에는 마음 한구석이 너무 허전했다.

그렇게 우리는 팔당으로 향했다.

송치대는 내가 머물고 있던 아현동까지 직접 차를 몰고 와 주었다. 가는 길에 분당에 들러 오랫동안 알고 지낸 교수님을 만났다. 생강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살아보니 알겠다.

늘 곁에 있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응원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인생이 주는 큰 선물이라는 것을.

분당을 떠나 팔당에 도착했을 때, 정진석 교관님께서 먼저 와 계셨다.

멀리서 걸어오시는 모습이 마치 강변의 갈대처럼 부드럽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세월은 누구도 비켜가지 못하지만, 그 모습 속에는 여전히 우리가 젊은 시절 바라보던 교관님의 기품이 남아 있었다.

이기호 교관님은 여러 번 전철과 열차를 갈아타며 오시느라 조금 늦으셨다. 송치대가 마중을 나간 사이, 나는 정진석 교관님과 함께 북한강 변을 걸었다.

강물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강물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관학교 시절 이야기, 졸업 후 살아온 세월 이야기, 그리고 이제는 하나둘 떠나간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마치 깊은 강물 속에 가라앉아 있던 오래된 기억들을 하나씩 건져 올리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교관님도 도착하셨다.

우리는 팔당의 뱀장어집에 둘러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막걸리부터 주문했다.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은 나와 이기호 교관님뿐이었다.

막걸리 한 잔이 오갈 때마다 시간은 거꾸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느새 팔당의 식당이 아니라 사관학교 교정에 앉아 있었다.

교관님들은 교관님들대로 추억이 있었고, 우리는 학생들대로 추억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몰랐다.

교관과 생도라는 관계가 단순한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만은 아니라는 것을.

돌아보니 우리는 모두 같은 사관학교라는 이름 아래 젊음을 바쳤고, 같은 시대를 살아낸 공동의 운명체였다.

그것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이렇게 다시 만나 웃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북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호수처럼 잔잔한 강물을 바라보며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남은 진심만은 바꾸지 못하는 모양이다.

몇십 년의 공백도 그날만큼은 짧은 쉼표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쉬움 속에서도 나는 먼저 서울로 향해야 했다.

아현동에는 뉴욕 병원에서 함께 근무하는 동료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관님들과 헤어져 서울로 들어오는 길.

도시는 말없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와 환하게 빛나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뉴욕도 서울의 절반만큼이라도 깨끗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느 도시가 더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곧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지금 나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번 휴가의 마지막 장면으로 남은 것은 화려한 관광지도, 유명한 명소도 아니다.

팔당의 강바람.

북한강을 따라 걷던 시간.

그리고 사관학교 시절로 돌아가 함께 웃었던 두 분의 교관님과 동기들의 얼굴이다.

세월은 흘러도 추억은 늙지 않는다.

그리고 2 사관학교에서 함께했던 그 시간들은, 여전히 우리 가슴속 어딘가에서 젊은 생도의 모습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태평양 상공을 건너는 지금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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