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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 이야기

영화음악 이야기 Le Roi danse 왕의 춤 (The King Is Dancing) 2000

작성자지광희|작성시간15.10.09|조회수173 목록 댓글 0

 
Le Roi danse (The King Is Dancing) - trailer
 
제작년도: 2000
감      독: Gerard Corbram
각      본: Eve de Castro
원      작: Phillipe Beaussant
촬      영: Gerard Simon
제      작: Dominique Janne
음      악: Jean-Baptiste Lully
출      연; Benoit Magimel, Boris Terral, Tcheki Karyo,
              Claire Keim, Johan Leysen, Emile Tarding,
              Jacques Francois, Veronique Maille, Alan Eroy. 
상영시간: 113 min.
 
 
 
 
때는 17세기의 후반기 프랑스, 고색창연한 연주회장에서 ‘테 데움(성악곡)’을 지휘하던 작곡자이자 지휘자인 륄 리(보리스 떼랄)가 ‘왕은 오지 않았어’라며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혼잦말을 되내이다 커다란 지휘봉을 그만 자신의 발에 내리 꽂고 만다.  급속도로 악화되어가는 발의 상태로 인해 절단을 해야만 생명을 건질 수 있는 상황이 닥치지만 륄리는 결단코 자신의 다리를 자를 수 없다며 이를 완강히 거부한다. 그리고, 영화는 반백의 륄 리가 청춘의 꽃을 만개하던 30여 년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간다. 
 
 
 

 당시 14살이던 루이14세(브누와 마지멜)는 어린 나이의 자신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고 있던 모후와 이태리 출신의 실세 권력자인 재상 마자랭에 앞에서 륄 리가 작곡한 무곡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다. 일찌기 5살의 어린나이에 부왕 루이 13세의 죽음으로 왕위를 이어받았던 탓에 모후와 결탁한 마자랭의 그늘 아래에서 제대로 된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던 루이 14세는 음악과 춤의 세계에 심취하며 자신의 울분을 때론 삭혀내고 때론 토해낸다.  이런 루이 14세의 모습에 경외심과 연민의 감정으로 그를 위해 음악과 춤이 동시에 가능한 무곡을 만들어 주게 된 륄리는 결국 광적인 집착으로 가득찬 일방적이고도 은밀한 ‘사랑’까지 남몰래 바치게 된다. 이러한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여인과 결혼까지 한 륄리였지만 그는 아내의 위급한 출산도 아랑곳하지 않고 병든 루이 14세의 침실 바깥에서 그가 병마와 싸우는 동안 끊임없이 바이올린(or 비올라)을 연주하며 오로지 그의 주군이자 사랑에게 혼신을 바친다.

 한편, 아버지의 부재와 권력을 둘러싼 비정한 세계 속에서 그토록 애정을 갈망하던 모후가 결국 자신의 반대편에 서있음을 자각하게 된 루이14세는 점점 더 음악과 춤의 세계로 빠져들며 륄리와의 교감을 쌓아간다. 하지만, 그가 춤과 음악에 빠져들수록 평소 그의 음악과 춤에 대한 취향을 못마땅해 하던 모후와의 사이는 갈수록 벌어지고 만다. 1661년 마침내 실세였던 재상 마자랭이 죽고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하게 된 루이 14세는 재상제와 함께 법원의 칙령심사권을 폐지하는 등 드디어 모든 권력이 왕권에 종속되는 이른바 ‘태양왕’ 시대를 열어 젖힌다.

 

 

그리고 이런 왕의 겉에는 이제까지 단순히 왕의 취향이었던 음악과 춤을 ‘태양왕’ 루이 14세의 절대왕권을 위한 상징적인 도구로 만들어 가며 루이 14세를 위한 남성적인 초기 발레의 틀을 창조해가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륄 리가 있었다. 비록, 모후가 죽음의 문턱에서 간절히 부탁한 춤추는 것을 그만두어달라는 청을 거절한 루이 14세가 모후의 죽음이후 죄책감에 시달리며 얼마간 춤과 음악을 멀리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후 륄리는 희곡의 대가인 ‘몰리에르(체키 카료)’와 함께 귀족세력과 대립하고 있던 왕에게 힘을 실어주는 희곡을 무대에 올리고 이에 심혈을 기울인다. 하지만, 얼마후 귀족세력과 제휴하게 된 루이 14세는 작품을 통해 귀족들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비판을 일삼던 륄리와 몰리에르를 멀리하게 되고 만다. 이에 왕의 사랑을 갈구하던 륄리는 몰리에르와의 공동창작했던 오페라(정확히는 음악과 희곡이 결합한 초기 형태)극을 자신의 이름만으로 출판을 감행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루이 14세는 귀족세력에 대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륄리와 몰리에르를 냉대하며 그들을 잊혀진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왕으로부터 강제적으로 망각되어버린 존재가 되어 몰리에르는 폐병으로 자신의 공연극인 ‘상상병 환자’의 무대에서 숨을 거두고 륄리 또한, 거대한 지휘봉에 자신의 발등을 찌르는 자상으로 인한 파상풍으로 절망과 회한 속에 왕과 세상에 이별을 고한다. 

 

한편, ‘태양왕’ 루이 14세는 절대왕권의 거대한 상징적 축조물인 ‘베르사이유’ 궁전의 완공과 함께 절대왕권 확립을 자축하는 자리에 이제는 사라져 버린 륄리와 음악과 춤의 부재를 아쉬워 하며 궁전을 나선다.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라는 선언이 결코 과장이 아닌 절대군주제를 확립한 ‘태양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어찌보면 소위 폭군이라는 불명예를 안을 수도 있는 절대왕정을 추구했지만 200여 년 전에 일찌감치 혁명을 통해 절대왕정과 귀족주의를 단두대로 보내버린 ‘공화국’의 모태인 자국 프랑스에서도 상당히 너그러운 역사적, 문화적 관심과 배려(?)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상황은 순전히 본인의 개인적인 추측이긴 하지만, 그가 절대왕권을 확립하는데 있어서 역대의 어떠한 권력자보다도 시대를 앞서가는 문화적, 예술적 취향을 내세운데 있을 거라 판단해 보게 되는데, 영화 <왕의 춤>은 바로 이러한 판단에 근거해 바라본다면 상당히 흥미로운 작품이 될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 하겠다. 일례로 1661년 권력을 자신으로 집중하는 개혁을 이루고 난뒤 루이 14세가 가장 먼저 한일은 ‘왕립무용학교’를 설립하는 작업이었다.

 

 

이 ‘왕립무용학교’는 현재 ‘국립무용음악아카데미’, 즉 ‘파리 오페라 극장’의 전신이 된다. 그리고, 프랑스가 단 하나의 문화적 유산으로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없이 선택하게 되는 ‘베르사이유 궁전’ 또한, 루이 14세의 권력의지와 철학, 예술에 대한 비젼이 총망라되어 완성된 거대한 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다른 어떤 서방의 나라들보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상대적 비중을 높게 책정하는 프랑스 특유의 취향과 기질상 ‘루이 14세’는 그 어떤 권력자보다 많은 사랑을 받을 만한 구석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아마도 현대 프랑스에서 이와 비슷한 예로는 고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 정도가 아닐까 한다. 미테랑은 수많은 정치적, 경제적 실패와 개인적인 스캔들과 결함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이고 국가적인 문화 예술 사업을 통해 제시한 새로운 문화의 패러다임을 시작함으로서 현재까지는 드골과 함께 프랑스 대중들이 가장 사랑하고 인상깊어 하는 정치인이 되지 않았던가 말이다. 당대에도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권력을 장악해 나아가는 루이 14세의 전략에 있어서 발레와 오페라라고 하는 당시 새로운 형태의 예술은 그가 모후와 재상 마자랭에 의해 구축된 ‘앙시앙 레짐(구체제 권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줄 수있는 중요한 무대였을 것이다. 동시에 귀족과의 권력투쟁에 있어서도 직접적인 전면전 보다는 일종의 은밀한 수사학으로서 당대의 예술적 지향점을 가지고 취향의 태도를 드러내보이며 이를 주류적 예술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계기를 마련함으로 해서 자신의 권력의지를 관철시켜 나아가는 루이 14세의 정치 전략상의 파격은 가히 그 자체가 예술성과 상통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이렇게 영화 <왕의 춤>은 루이 14세가 해쳐가고 구축해나아가는 절대왕권을 향한 권력투쟁의 한 축을 보여주며 다른 한 축으로는 당대의 궁정음악가  ‘장 바티스타 륄리’와의 애증사를 한 축으로 하는 갈등과 비극의 드라마를 맞물리며 펼쳐 보인다. 루이 14세와 륄리간에 발생되는 비극은 그들이 공유하던 예술이 서로 다른 욕망이 투사되는 매개로서 작동한다는 점에서 잉태된다. 륄리에게 음악과 춤은 자신의 은밀한 동성애적 성향과 함께 맞물린 태양왕 루이를 향한 일편단심의 사랑을 표현하고 그와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유일한 매개체였지만 루이 14세에게는 5살의 어린나이에 부왕의 죽음으로 왕이라는 지위에 올라야 했던 특수한 상황과 뒤를 이은 대지주들의 반란(프롱드의 난), 어머니와 그녀의 실질적 정부였던 마자랭에 의한 20년간의 섭정 등, 왕으로서 생존해 가기 위해 살얼음판 같은 정치적 현실을 감내하기 위한 도피처이자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확인받기 위한 강력한 수단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는 결국 절대왕정의 구축에 성공한 루이 14세에게 이제는 그 수단적 측면에서 버거워져버린 예술과 그 현신이라 할 수 있는 ‘륄리’가 어떠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변모해 갈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는데 단초가 되어준다. 영화의 초반부, 14살 생일을 맞이하여 춤을 추게 된 루이 14세에게 새파란 애송이 궁정음악가였던 ‘륄리’는 자신을 마자랭과 같은 이탈리아에서 왔다는 이유로 냉대하던 왕자를 위해 품안에서 따스하게 녹여낸 신발을 꺼내어 준다. 

 

 

누구나 알겠지만 많은 무용 중에서도 발레는 발과 다리에 의한 표현력이 특히나 핵심을 이루는 무용이다. 더구나 발레의 기초를 다진 루이 14세와 륄리의 관계를 생각할 때 이 장면은 상당히 핵심적인 상징성을 이룬다. 더군다나 우연찮게도 륄리는 지휘봉으로 자신의 발을 찌르는(17세기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기다란 젓가락 같은 가벼운 지휘봉이 아니라 육중하고 둔중하여 지휘자의 절대적 지위를 상징하는 금속과 무거운 오동나무로 이루어진 지팡이 같은 지휘봉이 쓰여졌다.) 마치 자해와도 같은 자상으로 인해 파상풍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이는 예술가 륄 리가 절대적 존재를 상정하고 어떻게 예술을 정치와 권력에 복속시켰는지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은유이자 구도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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