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시나리오
written by 숲
진호는 후드 모자를 푹 뒤집어 쓴 채 몸을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정석의 침대 위였다. 사실은 한참 전 깼지만 눈을 꼭 감고 자는척을 했다. 언제부터 자신을 보고 있던건지 정신을 차렸을때부터 정석이 자신을 곁에 와 있던걸 느꼈다. 정석은 진호가 진작에 깼다는것을 알고 간간히 실없는 소리를 걸어왔다. 눈꼽 꼈어요. 입 씰룩이지 말아요. 진호는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고 참다가 터뜨렸다. 바닥에 앉아 침대위로 팔을 괴고 있던 정석이 속삭이듯 물었다.
“잘 잤어요?”
반쯤 눈을 뜨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진호의 목이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몇시야..”
“두시.”
요환의 동네를 나와 정석을 만났고 그 사이의 몇시간은 기억에 남지 않았다. 가끔 그랬다. 술이나 잠에 취하면 기억이 조각난것처럼 잘려나갈때가 있었다. 굳이 기억해 내려고 애쓰지 않은 채 진호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금방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깊고 반듯한 정석의 얼굴은 스탠드 불빛에 비쳐 더욱 짙은 음영에 드리워져있다. 진호는 손을 뻗어 정석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안자?”
“나가봐야 해요.”
“지금?”
“지금.”
앞머리끝을 톡톡 매만지다가 손바닥으로 정석의 눈꺼풀을 쓸어 내렸다.
“좀..자다가라. 응?”
정석은 진호의 손목을 잡아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더 있다가요. 일어나 양 팔을 쭉 치켜올려 기지개를 펴고 의자에 걸어둔 자켓을 집어들었다. 진호도 덩달아 몸을 일으켜 앉았다.
“냉장고에 먹을거 있으니까 배고프면 먹고...”
“...지금 나가는거야? 그럼 나도 나갈래. 나 택시타는데 까지만..”
정석은 바닥으로 발을 딛고 일어서는 진호의 어깨를 잡아 앉혔다.
“올 사람 없으니까 여기서 출근해요.”
“.....그래도..”
진호는 혹여 정석의 애인이 들이닥칠까봐 조마조마하는 기색이었다. 철판깐줄 알았더니 이런면도 있나 싶어 정석은 싱겁게 웃어버린다.
“아무도 안오다니까 그러네. 편하게 있어요. 옷장에서 셔츠 대충 골라입고..아, 나가자마자 입구에 택시 서는데 있으니까 거기서 타요.”
이거야 원, 집 보는 어린애도 아니고. 진호는 멋쩍어서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누군가 신경을 써주고, 그 관심을 받는 것은 어색하지만 솔직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민연스러워 괜히 타박을 부려본다.
“내가 유치원생이냐?”
현관에서 자켓 지퍼를 끌어올리던 정석이 훅 돌아봤다.
“햇님반 맞죠? 백합반인가?”
진호는 주먹을 꽉쥐고 정석을 향해 위협적인 포즈를 취했다.
“너 나가면 다 훔쳐갈거야. 후회하지마라.”
“그럼 콩밥 실컷 먹여줄테니까..”
“한마디도 안지지?”
쾌적한 웃음소리가 현관에 울렸다. 정석이 나가고 곧 센서 마저 꺼진 집안의 적막은 스탠드 자황빛 하나에 의존했다. 진호는 침대에 누워 엎드렸다가 뒹구르고 다시 몸을 일으켜 멍하니 벽만 보고 있기를 반복했다. 딱히 잠이 오는것도 아니고 마음 한 구석이 소화되지 않은것처럼 꽉 막혀 있었다. 오래전부터 박혀 있는 돌덩이 마냥 깊은 숨을 내셔도 어두운 무게는 가라앉지를 않는다. 요환 때문이었다. 실낱같던 구실도 진호 제 손으로 잘라 버렸다. 다시 돌아간다면 요환은 전처럼 자신을 대해 줄것이다. 그것이 싫어 그렇게 화를 내고 요환의 입장에서 못할짓을 해버렸는데, 하루도 안되어 것마저 잡고 싶어 진다. 요환의 말대로 자신은 구제가 불가능한 인간 말종일까? 진호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고요는 끝없는 잡념을 불러 일으킨다. 진호는 온갖 상념을 떨쳐버릴 듯이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는 일어나 스위치를 켰다. 훤하게 밝아진 집안을 빙 둘러보았다. 거실 겸용 방은 남자 둘이 살기에 조금 넓은감이 있었다. 집안의 물건들은 먼지 한티끌없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정석과 그의 애인은 둘다 무척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한명이 어지르기 시작하면 남은사람이 아무리 결벽을 부려도 집안은 어지럽혀지기 마련이다. 진호는 욕실문을 열어보고 냉장고도 뒤적이며 세입자 마냥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그러다 침대 바로 옆 서랍 앞에 서서 잠깐 고민을 한다. 제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허락없이 물건을 뒤적이는 일은 없을뿐더러, 번질나게 드나드는 요환의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 사는 것이 다 똑같지, 별것 있겠냐 싶지만 손은 어느새 손잡이를 끌어 당겼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콘돔 박스였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 진다. 자신과 할때 콘돔을 쓴적은 한번도 없었다. 정석은 도중에 콘돔을 찾는 진호의 손을 늘 저지시켰다. 물론 그냥 하는 것이 서로에게 더 좋은 편이었지만, 세심한 배려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뤄질 수 있던 관계는 그저 쾌락을 찾아 탐닉하고 움직일 뿐이었다. 공연히 심술이 난 진호는 포장된 콘돔을 한웅큼 집어 바지 주머니에 꾹 밀어 넣었다. 다음에 만나면 등위로 손톱자국을 깊게 박아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정석은 애초에 진호를 집으로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제 품에 안겨 울다가 정신 잃은 사람을 모텔방에 던져놓고 올 정도로 몰인정하지도 않다. 억지로 깨워 집에 데려다 줄까 생각도 해봤지만 온몸을 던져 고독을 표하는 홍진호를 외면할 수가 없던 것이다. 그 작은 몸이 숨 넘어가도록 울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스물 아홉의 남자, 홍진호는 정석이 이해할 수 없을정도로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면이 있었다. 쉽게 드러나지 않은 일면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은 단순히 호기심 이상의 관심을 부리게 된다. 정석이 진호를 어르고 달래며 위로 한것은 애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동정에 가까운 감정이었고 관계에 대한 의무였다. 홍진호와 박정석은 의도치않게 암묵적인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다. 정작 진호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홍진호가 그날 밤, 간절히 부르던 누군가의 이름은 오직 정석만이 알고 있다.
조수석 시트에 던져놓았던 핸드폰이 끊임없이 울린다. 정석은 전화를 받는대신 속도를 높였다. 핸들을 꺾어 편의점 도로변에 차를 세우자마자 가게앞에 서 있던 호리한 남자가 얼른 뛰어온다. 차문을 열고 빽 윽박을 지르며 시트에 앉는 폼이 익숙하다.
“전화 왜 안받어!”
“영수야 밑에 폰.”
정석은 남자가 모르고 깔고 앉은 핸드폰을 가르켰다.
“집으로 가지 왜 여기서 만나쟤? 추워 죽겠네.”
“히터 틀까?”
영수는 10월에 무슨 히터냐며 도리질을 치면서도 계속 툴툴 거렸다. 정말 춥다는 뜻이 아니라 안아 달라는 말을 저 식으로 돌리고 돌려 건넨것이다.
“어차피 청평간다며.”
“그건 그런데...뭐 가져갈 것도 있고..”
“아까 전화로 말하지.”
“급한건 아냐.”
영수는 눈치가 아주 빠른편이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주머니 이곳저곳을 뒤적여 라이터를 찾는척하며 넌지시 물었다. 이번엔 직감 따위는 재쳐두고 아무생각없이 떠 본것이다.
“혹시 누구 와있어?”
정석은 바지주머니에서 지포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여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아는 형.”
“아는 형?”
짧게 빨아들였던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며 영수가 반문한다.
“금방 갈거야. 일 있어서 잠깐 들린거니까..”
정석은 태연스레 거짓말을 했다. 영수의 못마땅한 눈초리가 여실히 드러났다. 동거를 하고 있지만 정석의 명의로 된 집이니 갈라서야 한다면 당연히 영수쪽이 짐을 싸야 한다. 물론 지금은 정석의 물건이 저 것이나 다름없는데다 집안 곳곳에 제 물건이 진을 치고 있다. 촬영 때문에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아졌어도 그대로 방치해둘지언정 사람을 들이는 일은 없었다. 가끔가다 누군가 오게 된다면 꼬박꼬박 영수의 허락을 맡았다. 그냥 표면 그대로 아는형이 잠깐 들를 수도 있는 것이라 넘어 가면된다. 그러나 어째서 찝찝한 기분이 드는지 영수, 본인으로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영화 촬영 때문에 지방을 오가느라 며칠간 대면은커녕 연락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것 때문에 민감해 진것이라 생각했다.
“화났어?”
“화는 무슨..”
진영수는 질투뿐만 아니라 의심도 많았다. 겉으론 쿨한척, 갖은 여유를 다 부리고 다니지만 정석에 관련된 일이라면 온갖 실마리를 상상하며 혼자 애 태웠다. 정석은 영수의 불안함을 잘 알고 있었다. 정석 또한 그 불안함을 달래려 많은 신경을 쏟아부어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영수의 귓볼을 만지작 거리던 정석의 손이 목덜미로 옮겨 갔다. 정석은 핸들을 잡지 않은 왼손으로 영수의 뒷목을 살살 주물렀다. 근처 강변가에 차를 세우고 세 개피째인 담배를 무는 영수의 머리를 아프지않게 쥐어박았다.
“그만 좀 펴라. 녹음 남았잖아.”
“폐암걸려 뒤질려고 그래.”
“너 걱정되서 그런게 아니라....”
“영화 망할까봐? 나 때문에 오백만은 먹고 들어가는거야. 알고나 그래?”
정석은 익살맞게 거드름을 피우는 영수의 앞에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래서 너 쓴거야. 가격대비 성능최고잖아.”
“왜이래? 나 몸값 장난 아니게 뛰었는데..박정석만 모르고 있네.”
“러닝개런티 너무 기대하지마라.”
“이번에 주는거 보고.. 다음 영화 생각해볼게.”
정석은 막 영수의 입술에 닿으려던 담배를 뺏어 제 입에 가져갔다. 필터 끝 온기와 함께 닿는 맨솔향은 영 입에 맞지 않는다. 도로 가져가려고 손을 뻗는 영수의 손목을 탁 낚아챘다.
“같이 뒤질려고 하니까 냅둬.”
정석은 담배를 물고 심드렁한 영수의 말투를 흉내냈다. 가늘게 눈을 뜨고 정석을 흘기던 영수가 어쩔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정석이 대신 뱉어낸 담배연기가 자욱하게 차안을 메우는 동안, 영수는 습관적으로 글로브박스를 뒤적였다. 카 서비스 팜플렛을 꺼내 몇장 넘기다가 신형 자동차 광고면을 보고 하려던 말이 생각나 정석을 불렀다.
“맞다. 나 차 뽑으려는데..뭐가 좋을까?”
“뽑지마. 꼭 필요해?”
“매니저 불러내는것도 좀 짜증나서 그래.”
“매니저 니 봉이잖아.”
“내가 언제, 새벽에 그러는거 미안하잖아..택시타고 다니기도 뭐 하고..”
“사고치고 돌아다니면 뒷감당 누가 하라고? 안그래도 너네 사장 맛이 가 있던데..”
영수는 고개를 돌려 정석을 빤히 쳐다본다. 눈동자에는 놀라움이 서려있었다. 정석은 담배를 비벼끄고 태연한 얼굴로 영수를 본다. 뭐가? 도리어 뭘그렇게 쳐다보냐며 묻는다.
둘이 싸우고 헤어지기를 무던히 반복하던 시절이 있었다. 진영수는 정석을 만나기전 지금의 소속사 사장과 동거를 했었다. 그때 그는 아역배우 출신 타이틀을 버리고 성인배우로의 재기를 꿈꾸고 있었고 정석은 단편영화 후반작업을 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계기는 남들과 비슷했다. 같이 작업하던 대학선배의 친구가 소속사 사장이었고 여차 함께한 술자리에서 사장이 데리고 나온 영수가 있었다. 서로의 외모가 끌렸기 때문에 호감이 생겼고 자연스레 마음이 맞았다. 잘 사귀고 있던 와중 영수가 재계약을 하고 소속사에 남아 있기로 결정하며 갈등은 시작되었다. 정석은 이미 끝난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영수는 정석과 자신이 동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달랐다. 정석은 더 열정적이었고 뜨거웠으며 진지했다.
“둘이 술마신적 있다며?”
영수가 사장을 암만 물고 늘어져도 그는 아무일 없다고 일관했다. 그래서 더욱 불안했다. 저 모르게 정석과 사장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던것이라 단정지었다. 불신을 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자책하며.
“별거 없었어.”
정석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사장과 똑같은 소리를 한다.
“진짜야?”
“어. 가끔 통화도 해.”
“뻥이야? 진짜야?”
정석은 평소에도 장난끼가 심했기 때문에 그가 하는 농담속에 섞여 나오는 진심을 걸러 듣기란 쉽지가 않았다.
“너 스케쥴 때문에 몇 번 전화 왔었어.”
“왜?? 왜 글루 전화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 새키가 딴말해?”
“야..니네 사장 들으면 섭섭해 하겠다.”
“좀!”
“믿어라. 너도 좀.”
영수는 이미 정리된 사장과 자신의 관계를 정석에게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할수 있다면 모두 까발리고 털어서라도, 그러면 마음이 좀 편해질까 했었다. 막상 정석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의 이야기가 오르락 거리니 자신을 믿어주는 것이 기쁜 한편으로 섭섭함이 고개를 드민다. 인간의 감정은 늘 양면성을 동반 하여 고뇌에 빠지게한다. 영수는 이도저도 아닌 복잡한 얼굴로 정석을 바라보았다.
“왜그렇게 봐?”
정석이 검지로 콧잔등울 툭 치며 물었다.
“박정석 이제 인간됐나 싶어서...”
다정한 손길로 영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석이 비실 웃었다.
“니가 싫어 하는거 안한다고 했잖아.”
한 날 둘이 술을 마시다가 흘러가는 말로 정석이 그랬었다. 천하의 박정석이?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영수는 그가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지릿지릿해진다. 하지만 솔직한 얼굴은 만들어내지 못하겠다.
“그럼 나도 그래야되나?”
“날로 먹을래?”
정석의 목을 끌어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익숙하고 기분좋은 향을 흠뻑 들이마쉬며 영수는 눈을 감았다. 무조건적이진 않지만 믿음은 애정을 근거로 두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살던대로 쿨하게, 헤어질때는 뒤도 돌아보지 말자 다짐했었다. 초반에는 제법 진지하게 자신을 대하는 정석을 속으로 비웃기도 했었다. 하지만 함께한 시간이 흐를 수록 언젠가 올 헤어짐에 대한 미련을 키워가는것은 영수쪽이었다. 단순히 이별을 생각하는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게 아파왔다. 정석이 살가운 말이나 애교를 좋아하는줄 알고 있었는데도 알량한 자존심은 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진영수는 상처를 받는 것이 무서웠다. 모두 드러내고 주다보면 뒷감당을 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을 맹신했다. 단 며칠 보지 못한것이 못견디게 힘들었으니 안아 달라고. 그 두 어마디를 하지못해 영수는 얼굴만 더 깊게 파묻었다.
마감이 끝난 월간행 부서들은 조금 여유가 트였다. 몇 몇은 같은 계열부로 가서 일을 분담받기도 했고 나머지는 홈페이지나 메일을 확인하며 미뤄두었던 소일을 하기 시작했다. 진호는 결국 일찍 정석의 집을 나와 집에서 출근을 했다. 자리에 앉아서 주간 스케쥴표를 확인하고 있는데 누가 책상을 똑똑 두드렸다.
“선배 어제 어디 갔었어요?”
돌아보니 같은 대학 출신이라 평소 친하게 지내는 준형이 멀건히 서 있었다. 회식 하기로 해놓고 돌연 사라져서 전화는 꺼놓고, 편집장이 얼마나 화냈는 줄 아냐며 다닥다닥 쏘아붙이는 준형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진호는 팔을 뻗어 저 쪽을 가르켰다.
“다 끝났으면 저리 좀 가라. 엉? 얼마나 퍼 마셨으면 술냄새가....”
진호가 면박주는것에 익숙해진 준형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예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자리를 잡았다.
“아..선배 어제 할 얘기가 얼마나 많았는데 전화도 안받고..진짜..”
“진짜 뭐? 날 왜그렇게 찾았는데? 평소엔 관심도 없더니..”
“관심이 없다뇨, 아주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뭐가?”
준형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주위의 눈치보는 시늉을 하다 목소리를 낮췄다. 과장된 제스쳐는 대학때부터 보던것인데도 우스꽝스러운건 여전했다.
“박정석이요.”
뜻밖의 이름이 나오자 모니터 전원을 켜던 진호의 손가락이 순간 굳었다. 원래 울상인 준형의 얼굴은 월척을 낚은 강태공처럼 반짝 빛났다.
“박감독이...왜?”
“박감독? 오올~ 친해진거에요? 강선배 말로는 리셉션에도 갔다면서요.”
깐죽거리는 준형을 당장 ◎⃝아내고 싶지만 진호는 어딘가 불안한 기색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말고 왜.”
“아니..왜..박정석 호모란 소리 있었잖아요. 여기자들이 그게 궁금해가지고..”
그럼 그렇지. 진호는 한심하단 눈초리로 준형을 올려다 보았다.
“야. 꺼져. 가서 게시판 정리나 해.”
“아 나, 선배 그거말고오!! 이게 핵심이라니까. 박정석이 사귀는 사람이..”
“가서 일해라?”
더 들을 것도 없다며 어깨를 퍽 쳐내도 준형은 끈덕지게 달라붙어 말을 이었다. 친분 때문에 너무 내버려 둔것인가, 기강을 다시 잡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진영수래요.”
진호는 잠깐 할말을 잃었다. 진영수? 박정석 영화 주연배우 그 진영수 말야? 어이가 없어서 곧 헛웃음이 삐져나왔다. 신문,잡지사는 온갖 루머의 집결체이다. 기자들이라고 떠도는 소문을 걸러낼 재간은 없다. 몇날 며칠을 ◎⃝아다니며 물증을 잡아 대박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말이 그럴듯하다 싶으면 최대한 자극적인 단어를 뽑아내서 일단 기사를 쓰고 조회수를 올린다. 인터넷 기사가 활성화 된 후부터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냐 하는 식의 엇나간 기자정신을 너도나도 한껏 발휘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호가 어처구니없어 하는 이 가십거리도 충분히 기사로 뻥뻥 터질수 있는것이다. 마치 실제 있는 일처럼 살을 가져다 붙여.
“누가 그래?”
“여기저기서요, 들어보니까 아예 없는말 아니던데요? 넷에 목격담이 좀 올라오나봐요.”
“니가 봤어?”
“아니 안봐도! 그럴듯한거 있잖아요. 왜.”
그런건 키보드 대충 두들겨서 지어내면 그만이다. 3년차인 헐렁한 후배놈은 기사감이다, 아니다를 걸러내는 요령이 영 없어 보였다.
“근데? 왜 나한테 그러는데?”
“참, 선배가 인터뷰 했으니까아!!”
준형은 되려 답답하다며 진호를 가르켰다. 인터뷰 했으니까 당연히 사적인 취재도 했을거란 투다. 유명인이 스캔들 돌면 본인 주위의 반반한 애들이 죄다 엮이는거야 으레 있는 일이지만 이건 너무 뜬금없었다. 진영수라면 그 나이대 미남 배우 중에서도 연기력이 앞서 잇달아 유명 감독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배우였다. 사생활로는 연상의 유명 여배우들과의 스캔들이 기정사실화 되어 기사가 크게 터진적은 있었다. 연예계라면 전혀 관심없어도 따지고보면 비슷한 계열이니 크게 난 기사들은 진호의 머릿속에도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영수에 대한 홍진호의 평은 남다르거나 특별하지 않다. 주목받는 영화의 주연배우. 딱 그것이다. 깊게 생각한다는 것이 우스워 진다.
“그래서 그거 기사로 내고 싶냐? 연예부로 가고 싶어? 보내줄까?
“그런건 아니죠! 그냥 궁금하니까..그렇지. 나는..그냥 뭐..”
우물쭈물하며 진호의 눈치를 보던 준형은 슬며시 책상에 걸텄던 엉덩이를 뺐다. 진호가 저런식으로 으름장을 놓을때면 그가 화가 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니 얼른 몸을 사려야 한다. 위상이 바닥으로 떨어진 연예부보다 훨씬 급 위인 문화부 소속 기자가 한낱 가십거리 따위를 나불대는 것에 화가난 것이 아니다. 같은부 기자끼리 체면치레 할 필요도 없고 기사화 된다면 연예부 이름을 달고 올라갈것이니 큰 상관도 없다. 다만 진호의 반응은 어딘가 붕 뜬채 격앙되어있다. 진호는 조금 다른 부분에 신경이 곤두서 있던것이다.
진호 스스로 인정하는건 아니었지만 더 이상 박정석은 흘러가면 가는데로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단시간내에 홍진호의 궤도안에 뚝 떨어져 들어온 박정석은 현재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보호 해 줄 필요가 있다. 그래, 이것은 의무 인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다 필요없고. 그거..퍼뜨리고 다니면 아주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살벌한 제 선배의 위협에 준형은 아연실색하여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