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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포유동펌)

[임콩등] 최악의 시나리오 05

작성자형은내맘좋도모르면서|작성시간26.06.21|조회수88 목록 댓글 0

 

 

 

 

어릴때 아버지가 사다주신 로봇 장난감이 그랬다. 허리까지 오는 조립식 로봇덕에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대장노릇을 있었다. 밥도 거르고 몸은 씻지도 않으면서 로봇만큼은 매일 반질반질 광이 나도록 닦아냈다. 어머니가 회초리를 들어도 말을 듣기는커녕 늘어나는 것은 눈치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로봇이 좋았던게 아니라 동네 아이들을 끌고다니는 것에 희열을 느꼈던 같다.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로봇을 동네 소각장에 던져 넣었다. 이상 대장노릇을 못한다는 미련은 조금 남았지만 머지 않아 아무렇지 않아졌다. 그래서 그때 장난감 로봇처럼, 너도 쉽게 버릴 있을거라 생각했다. 

 

 

 

 

 

 

 

최악의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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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사내 근무을 했기 때문에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날이 많았다. 오늘 메뉴는 콩나물국에 밑반찬 너개. 대충 구색을 맞춘 식당밥이 맛있었던적은 한번도 없다. 그러나 이정도면 감지덕까진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만족해야했다. 집에서 음식을 해먹는일이 거의 없으니 제대로 집밥을 먹으려면 어머니가 계신 대전집으로 내려가야했다. 최소한의 영양분은 포함됐을 식판을 들고 어디 구석 자리없나 하고 둘러보았다. 한창 북적거릴 시간인데 식당안은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부서 사람들이 취재다, 촬영이다 우르르 빠져나가는 날은 아는 무리에 끼거나 혼자 얼른 먹고 일어나야했다. 오전에만 하더라도 한껏 여유를 부리다가 점심직전에 리콜이 걸려 부서는 난리가 났다. 극비리에 촬영중인 영화의 출연배우 사진을 무단사용했다고 소송얘기까지꺼내며 영화사측에서 엄포를 놓은모양이다. 흔치 않는 일이었다. 편집장이 한동안 죽여뒀던 성질을 애꿎은 인턴들에게 화풀이 하며 편집실을 왔다갔다 하는동안 메일함만 열었다 닫으며 멀뚱히 않아있기 뭐해 일찍 식당으로 내려왔다. 진호야 기자명함 달고 하는일은 프리에 가까웠으니 남들 쉴때 뜰새없고 남들 바쁠때 쉬고 있는일이 허다했다. 같이 구내식당을 애용하던 준형과 중만이 짝을 맞춰 취재를 나가는 바람에 오늘은 혼자였다. 자주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구석으로 걸어가는 진호를 누군가 제법 큰소리로 불러 세웠다. 

 

 

 

 

! 홍진호!” 

 

 

 

 

어디서 부르나 싶어 고개를 두리번 거리던 중에 창가 식탁에서 기철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리오라며 손목을 까닥까닥 한다. 기철말고도 사무국 직원 몇몇이 앉아있었다. 다들 낯익은 얼굴들이라 꾸벅 목인사를 하고 식판을 내려놓았다. 그들도 자리를 잡았는지 밥이며 반찬이 수저 흔적없이 수북한 모양새다. 입에 물고 있던 패스를 다시 목에 걸고 자리에 앉는 진호의 어깨를 기철이 친다.    

 

 

 

 

얼굴 보기 힘들다?” 

 

웬일로 식당에서 밥을 먹냐?” 

 

 

 

 

기철이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것은 흔치않은 일이었다. 사무국으로 전직한 후에 사람들과 어울려다니며 밖에서 식사를 했기 때문에 식당근처에서 마주칠일이 아예 없었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기철에겐 초라하기짝이없는 식당밥을 먹을까, 하던 참에 기철이 쌩뚱맞은 소리를 한다. 

 

 

 

 

장가 가려면 돈모아야지.” 

 

 

 

 

진호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긴, 그동안 나가서 뿌리고 다닌 점심값이며 술값을 계산하면 외곽 어디에 작은 아파트하나쯤은 사고도 남았을것이다. 그런거 생각하는 놈이었으면 진작 정신차렸지. 입맛이 안돌아서 말간 콩나물국에 밥을 퍽퍽 말아 억지로 한입 두입 밀어넣으며 진호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법인카드 교환 때문에 이번주 회식이 미뤄졌다고 기철이 투덜거린다. 그럼 그렇지, 법인카드 때문에 외식을 못한거구만. 어이가 없어 웃는 사이 진호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가 한숨을 쉬며 화제를 돌렸다. 

 

 

 

 

내가 요즘 펀드 때문에 미치겠다. 이거 빼야되나 말아야 되나..마누라가 닦달을 하는데 아휴 ..” 

 

그냥 놔두는게 낫지 않아요? 지금 빼면 똥이라던데..” 

 

 

 

 

남자의 표정은 뭐라도 씹은것처럼 구겨졌다.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든다. 그냥 놔두는게 좋다, 아니다. 진호는 아무말 않고 입으로 국만 퍼다날랐다. 

 

 

 

 

지난주에 오백 깎였잖아. 이게 말이 되냐? 내가 그냥 환매시킬라 그랬는데 합이 마이너스 삼천이다. 시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고 중얼거리며 남자가 머리를 쥐싸맸다. 남자의 말에 꼬박꼬박 응수를 하던 기철이 진호를 툭친다. 그의 쓸데없는 오지랖이 발동되는 순간이다. 

 

 

 

 

. 진호 니네 매형 증권..아니다, ...자산 관리팀에 있다 그랬지?” 

 

 

 

 

갑자기 요환의 이야기가 튀어나와 흠칫 놀란 진호는 들고있던 숟가락을 국에 담궜다. 남자가 뭐든 물어올게 뻔했기 때문에 조금 긴장한채로 기철을 본다. 아니나 다를까 줄곧 기철 무리를 향해 몸을 틀었던 남자가 진호가 앉아있는 앞으로 의자를 고쳐 앉았다.  

 

 

 

 

..그래?동향이 어떻데?” 

 

 

 

 

일반적인 매형과 처남이 아니듯 요환이 자산운용사에 다닌다고 해서 분야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적도 없다. 그냥 흘러가는 말로 일은 잘되냐고 물어보거나 따로 보도자료등을 통해 상황이 어떤지 대충 짐작만 할뿐이다.  

 

 

 

 

글쎄요. 저는 그쪽에 관심이 없어서..” 

 

그래도 들은게 있을거 아냐?” 

 

 

 

 

기철이 거들었다. 기철은 진호의 집안사정에 관한건 전혀 몰랐다. 진호가 조카를 끔찍이 예뻐하니까 누나부부와도 사이가 좋을것이라,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얘기 안해.. 죄송해요. 잘모르겠어요.” 

 

 

 

 

대충 얼버무리니까 남자도 이상 묻지 않고 입맛을 다셨다. 웬만하면 기철이 남자에게 부리는 아부성 발언에 동조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정말 아는게 없었다. 난감에 하는 기철을 향해 진호는 한번 겸연쩍게 웃고 말았다. 사람들은 단순히 매형과 친하지 않은가보다 하겠지만 진호는 다시한번 요환과의 거리를 실감하게 되었다. 요환과 자신의 관계는 특별하지도 못할뿐더러 평범하지도 않다. 갑자기 속이 미식거려 수저를 내려 놓았다. 먼저 일어서려는데 기철이 같이 나가자고 잡는다. 이방인처럼 가만히 앉아 기철이 식판을 깨끗하게 비울때까지 기다렸다.  

 

 

 

 

 

 

 

테라스형 6 직원휴게실은 올봄 까지만 해도 금연구역이었다. 여직원들만 득실대던 휴게실은 흡연이 가능해지면서 남자직원들의 전용공간이 되어버렸다. 진호 역시 금연결심을 하기 전까지 뻔질나게 드나들던 곳이다. 기철은 자판기 커피 2 뽑은걸 생색내며 한잔을 진호 앞에 내려놓았다.  

 

 

 

 

- 감사합니다. 이거 아까워서 어디 먹겠습니까?” 

 

감사하면 사던지.” 

 

돌았구만.” 

 

 

 

 

껄걸 웃던 기철이 담배 한대를 꺼내문다. 

 

 

 

 

니네 난리 났다며?” 

 

그렇긴한데 . 급한불은 껐어.” 

 

하여간 그것들 오바하는건 알아줘야돼. 어차피 홍보할 지네가 먼저 뿌릴거면서..” 

 

 

 

 

기철과는 수습시절에 처음 만났다. 애초에 문화부로 지원서를 냈던 진호와 달리 어줍지않게 사회부 공채지원을 했던 기철은 컷트라인에 걸려 결국 문화부 소속으로 수습생활을 시작했다. 2 남짓 함께 선배기자들을 따라다니며 보조노릇 하다가 기철이 사무국으로 전직하고 진호는 월간부로 들어가며 자연스레 거리가 생겼다. 예전처럼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만 둘다 낯을 가리거나 사람을 꺼리는 성격이 아니라서 오며가며 종종 나누는 대화는 어색하지가 않았다. 

 

 

 

 

여자 만날볼래?” 

 

됐거든.” 

 

 

 

 

기철은 진호가 남자를 만나고 다니는 것을 아예 몰랐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동성애를 경멸하듯 기철도 일반적인 부류중 하나였다. 친하게 지낸다고 해서 속속들이 내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기철같은 완전 노말의 경우엔 더욱 그랬다. 말하고 다닌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먼저 알아차렸던 사람은 있었다. 반응도 가지각색이었다. 이해하는척 하며 뒤에서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대쉬해오던 남자들도 있었다. 굳이 커밍아웃을 해야할 이유가 없었고 할수 있으면 끝까지 숨기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현실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대로가 편했다. 

 

 

 

 

안만나는데? 혹시 여자 있냐?” 

 

없어. 그런거.” 

 

 

 

 

기철 입장에서야 충분히 희한해 보일수 있었다. 4,5년을 알아왔다. 부서가 갈리면서 예전만큼 가깝게 지내지 않아도 뭐하고 사는지, 대소사 정도는 안다. 난간에 기대서있던 기철은 빤히 진호의 얼굴을 본다. 외모는 적당히 호감형에다 월급 꼬박꼬박 받고 그나이때 남자들에 비해 씀씀이도 헤프지 않다. 여자가 기피할리도 없고 분명 진호 스스로 빡빡한 독신주의자 노릇을 하는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독신? 지금이야 있어보이지. 10년만 지나봐라. 독거 된다. 독거.” 

 

 

 

 

진호가 소리내어 웃자 기철은 어쭈? 이놈봐라 하며 훈계를 이어갔다. 늙으면 가정이 최고다, 요즘은 맞벌이가 대세니 정도면 돈걱정 크게 안해도 된다며 기철이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은 사실 진호의 공감을 얻기 힘들었다. 것보다 기철의 손이 움직일때마다 같이 휘둘리는 담배로 진호의 시선도 이저저리 흔들렸다. 금연초를 사야할까, 싶다. 

 

 

 

 

그때가서 후회말고 형님 새겨들어.” 

 

 

 

때가 있는법이야. 나중엔 돈주고도 ..” 

 

알았다고 

 

 

 

 

이러다 여자랑 섹스는 해봤냐? 소리까지 나올성 싶어 말을 가로막았다. 기철은 그걸 못이기는척 만나본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의자를 앉았다. 

 

 

 

 

그래서 만나 볼래? 진짜 괜찮은 애로 엮어줄게.” 

 

 

 

 

새끼 손가락을 까닥대며 상체를 들이미는 기철을 빤히 쳐다보던 진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 새키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연애학 강의를 해줬더니 값은 지불하지 못할망정 딴청만 피우는 꼴이 얄밉딱스러워 기철은  머리통을 한대 줘박아 버릴까 하다 그만두었다. 

 

 

 

 

자꾸 그러면 형님이 너를 의심할 밖에 없다. 자식아.”  

 

 

 

 

한번 안댄 종이컵에 담뱃재를 톡톡 털어내며 기철이 그런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손톱만큼의 의심도 못할 것을 안다. 솔솔 김이 나는 커피 위로 희검은 담뱃재가 녹아 들었다. 비위가 상한다. 커피맛이 떨어져 종이컵에서 입을 떼어냈다. 기철이 담배를 뻑뻑 펴대는 사이 진호는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여기 유치원인데요. 태환이 삼촌맞으세요?] 

 

 

 

 

나긋한 여자의 목소리는 유치원교사일 싶다. 

 

 

 

 

. 그런데..” 

 

[아버님한테 연락이 안되서...] 

 

 

 

 

진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요환이 한참 바쁠 시간이다. 더군다나 요즘은 밀려드는 투자자들 때문에 식사 챙길 시간도 없을텐데 진호가 전화를 해봤자 불통일게 뻔하다. 

 

 

 

 

저한테 말씀하세요.” 

 

[딴게 아니라 태환이가 아파서 조퇴를 시키려는데 집에 아무도 안계신 같아서요.] 

 

 

 

 

아이가 아프다는데 침착한 여자의 목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그렇다고 괜히 호들갑 떨어대는걸 듣고 싶은 것은 아니다. 

 

 

 

 

어디가요?” 

 

[열이 나더라구요. 너무 걱정하실건 없고..어떻게? 저희가 데려갈까요?] 

 

 

 

 

다시 시계를 확인한다. 기철이 입모양으로 ? 그러기에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감기기운이라고 하지만 어디가 얼마나 아프길래 병원까지 다녀온건가 싶어 걱정이 커진다. 유치원버스가 2시쯤 사거리에 서니까 태환을 태워 보내겠다는 마다했다.  

 

 

 

 

제가 데리러 갈게요.” 

 

 

 

 

폴더를 닿자마자 무슨일이냐 채근하는 기철한테 급한일이라고 했다가 아무일도 아니라고 말을 바꾼다. 말투는 침착했는데 표정은 그렇지 않다. 기철은 진호의 어깨를 두어번 토닥이고 테이블 위의 종이컵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래, 얼른 가봐라. 나중에 술이나 한잔 하자.” 

 

 

 

 

바로 나가려다가 부서에 들러 조퇴서를 냈다. 이렇게 바쁜데 어딜 빠져나가냐는 편집장의 눈초리가 생각보다 누그러져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지하철역은 건너 도로에 있었기 때문에 그냥 택시를 타기로 했다. 택시를 잡아타면서 차를 사야 할까 다시한번 고심한다. 

 

 

 

 

 

 

 

태환이 다니는 사립유치원 건물은 멀리서부터 시선을 끌었다. 바스티유 감옥을 연상시키는 외관 말고도 일대 건물이 죄다 으리으리했기 때문에 다니는 원생들의 집안수준을 알만했다. 유치원 이름은 사회,사설 기사에 자주 올랐다. 학예발표회때 말고도 두어번 온적이 있었는데 들를때마다 떨떠름한 기분을 떨칠수가 없었다. 적어도 유치원이라면 아이들 웃음소리나 동요를 치는 피아노소리쯤은 들려야 정상이 아닌가 싶었다. 대학건물같기도 하고 연구소 같기도 곳은 어리고 여린 태환이 있기에 너무 삭막하다. 애초에 집근처 유치원으로 보내려고 했던 요환과 달리 집안 어른들은 시설 넓고 교사수가 많은 곳을 선호했다. 비싼곳이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요환의 어머니가 그렇게 난리니 요환으로서도 수긍하고 넘어간것이다. 원내 보험이 따로 있으니까 병원비는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지갑을 도로 접었다. 현관까지 따라나온 여교사 2명이 진호의 등뒤로 공손히 몸을 숙인다. 만사 제쳐놓고 부모보다 먼저 달려온 삼촌. 그들은 조카를 많이 좋아하는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진호는 처지를 들킨 것마냥 뒤가 화끈거려 견딜수가 없었다. 태환을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미리 불러놓은 택시로 빠르게 올라탔다. 

 

 

 

 

아이가 크게 아팠단적이 한번있었다. 누나가 떠나고 얼마되지 않아 열감기를 심하게 앓았었는데, 경기를 일으키다가 요환의 품에서 늘어진 작은 몸이 아직도 선연히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 후유증으로 태환은 또래에 비해 시력이 좋지 못하다. 시신경 손상은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길래 서너달에 한번꼴로 대학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요환과 가족들의 몫이었기 때문에 진호가 관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태환이 병원에 다녀 온날은 울고 불고 떼를 쓰며 진호를 찾았다. 진호의 목을 끌어안고 엄마를 불렀다. 태환에게 엄마란 존재는 만화 영웅과 같은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자 누구도 채워 없는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래서 태환이 아플때마다 겁이 났다. 아이가 갈때마다 빌어먹을 엄마의 자리도 커졌으니까. 

 

 

 

 

오피스텔 현관으로 들어가는길에 태환이 바람을 쐬고 싶다고 졸랐다. 어린입에서 어른같은 소리가 한번씩 튀어나올때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지 난감했다. 태환을 안고 보도를 서너번 왔다갔다 하다가 벤치에 앉았다. 

 

 

 

 

삼촌....” 

 

.” 

 

“...삼촌.” 

 

?” 

 

 

 

 

진호의 무릎에 앉아 몸을 기댄 태환이 미동없이 삼촌만 부른다. 아이의 숨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진호가 작고 어린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희미하게 병원 소독약 냄새가 나는 같아 안쓰러워졌다. 

 

 

 

 

바람이 찼기 때문에 들어가자고 했더니 태환도 군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올해 들어서 제법 키가 훌쩍 크길래 몸무게도 늘었을 같았는데 고작 1~2키로 차이라 별로 무거운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진호에게 안기는 것을 좋아했다. 아니 필사적으로 그래야만 하는것처럼 굴었다. 마치 코알라 새키가 어미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안듯. 안아달라 떼쓰고 조르고 어린내들 말대꾸 하는 것은 오직 진호에게만 했다. 요환의 친가쪽에서 아이다운 맛이 없다고 할정도로 조숙하게 굴다가 진호의 앞에만 오면 갖은 어리광을 부렸다. 그것은 진호의 기분을 아주 묘하게 만들었다. 

 

 

 

 

집으로 들어온후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열렸다. 시간에 들릴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일하는 아주머니인줄 알았다. 중년의 여자는 의아해 하다가 진호가 태환이 종종 말하던 삼촌인 알고 안심하는 듯했다. 집안에 들이지 않고 적당히 둘러대며 택시비를 주고 돌려보냈다. 유치원에서 받아온 해열제를 먹이고 태환을 재웠다. 약기운 때문이 아니라 아이는 원래 피곤했던지 금방 잠이 들었다. 진호는 텅빈 거실바닥에 앉아 티비를 틀었다. 카펫이 있어 엉덩이가 배기지 않았다. 초봄까지 깔려 있던 아이보리 카펫은 깨끗하게 세탁되어 다시 자리를 잡았다. 카펫뿐만아니라 진호의 시야에 들어오는 가구나 물건이 배치가 조금씩 바뀌어 있었다. 집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것은 진호 하나 뿐이었다. 채널을 고정시키지 못하고 리모콘 버튼을 눌러 댔다. 만한 프로그램이 하나도 없었다. 

 

 

 

 

거실장 아래 CD꽂이는 진호가 채워놓은 영화 DVD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태환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나 원어 명작선이 대부분이었다. 타이틀을 확인하며 손끝으로 하나하나 넘기다가 골라 잡은 것은 요환이 봤으면 하고 중앙에 꽂아넣은 dvd였다. 요환은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것이라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지만, 무심코 정리를 하다 타이틀 표지를 가득 매운 여배우의 외모에라도 끌려 봐줬으면 했다. 레오노르 와틀링. 그녀는 아주 예뻤으니까.  

 

 

 

 

영화는 상실과 소통, 부재등 사랑에서 절대 필요치 않은것들로 가득차 있지만 그것 역시 사랑이라 이야기한다. 아름다운 알리샤, 그녀를 사랑하는 베니그노. 남자는 여자에게 끝없이 세상을 들려준다. 자신의 사랑만이 가득한 세상사를 그녀만이 들을수 있도록. 절실한 베니그노의 사랑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진실하고 아름답다. 일방적인 애정은 결국 온전한 사랑이 있을까? 베니그노는 진호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건 진호 역시 모른다. 

 

 

 

 

잔잔하게 깔리는 ost속에 어울리지 않는 기계음이 섞여들었다. 정지버튼을 누르고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을 확인한다. 중만에게서 전화였다. 취재를 나갔다가 이제 회사에 돌아와 한창 작업중이었나 보다. 기사를 기재해야하는데 진호가 취재했던 자료에서 인용해도 되겠냐며 다급하게 굴어서 pc암호를 가르쳐주었다. 후에도 2 전화가 중만에게 드라이브 어느 폴더에 있다는걸 상세하게 가르쳐 주고나서야 중만이 연신 고맙다며 전화를 끊는다. 이미 영화 보는 흥이 끊길데로 끊긴 진호는 멀건히 앉아 화면만 응시 했다. 

 

 

 

 

한번 벨소리가 울렸다. 전원을 꺼버릴까 하고 액정을 보는데, 이번엔 요환의 번호가 떴다. 결국은 받을거면서 5~6초간 뜸을 들였는데 요환과 통화 할때만 나타나는 고질적인 습관이었다. 

 

 

 

 

[?] 

 

..태환이..” 

 

[들었어. ?] 

 

 

 

 

뒤늦게 유치원에서 연락을 받은 요환은 진호가 태환을 데리고 간걸 알고 있었다. 

 

 

 

 

. 약먹고 ..괜찮아.” 

 

[그래. 금방 갈게.] 

 

 

 

 

폴더를 접으려다가 다시 요환을 불렀다. 상대가 전화를 끊기전에 절대 먼저 끊는법이 없는 요환이 대답한다. 대단한 얘기하자고 부른 것은 아니다.   

 

 

 

 

.....올때 소화제 사다줄래? 약통에 없네.” 

 

[알았어.] 

 

 

 

 

약통에 없다, 소리는 덧붙이지 말걸 그랬다. 명치가 쓰라렸다. 소화제는 거실 서랍 약통에 넉넉히 구비되어있었다. 그런데도 요환에게 부탁한건 작은 구실을 이용해서 끈적하고 찝찝한 기분을 풀고 싶어서였다. 일이 있고 난후, 진호가 이런식으로 굳이 확인을 하지 않아도 모든것은 이미 위치로 돌아와 있었다. 엿같다, 생각하며 진호는 플레이어 전원을 껐다. 영화의 결말은 항상 보지 못했다. 오늘도 보지 않을 셈이다. 

 

 

 

 

5 20, 시계를 보다가 베란다 문을 열었다. 해떨어질 시간이 되면 부쩍 추워졌다. 난방온도를 높이고 태환이 자고 있나 확인했다. 은행 도로에서 신호가 걸린 요환이 오려면 족히 10분은 걸릴테고 서방기다리는 꼴로 가만히 앉아있기도 뭐해서 베란다 문을 닫고 주방으로 갔다. 부엌을 보면 그집 살림을 안다고 했던가, 원체 깨끗했기 때문에 아주머니가 들어와서 일을 봐줘도 크게 티나지 않았다. 아침에 먹고 나간 흔적이 그대로 씽크대안에 쌓여있다. 기름이 눌러붙은 그릇은 식기세척기로 닦이지 않는다. 진호는 고무장갑을 끼고 세제를 풀어 접시를 박박 닦아냈다. 키친타올로 물기를 닦고 있을 사이 요환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진호야.” 

 

 

 

 

도어락 소리가 들릴때부터 이미 들어 것을 알고 있었는데 짐짓 모른척을 했다. 요환이 주방쪽으로 와서 자신의 이름을 재차 부르자 진호가 몸을 돌려 언제왔어? 태연하게 놀란 얼굴을 한다. 

 

 

 

 

아주머닌?” 

 

내가 가시라 그랬어.” 

 

 

 

 

타이를 풀던 요환이 진호에게 잠깐 두었던 시선을 거둔다. 그러지마, 멀리서 오시는 분인데. 요환은 태환의 방문을 슬쩍 열었다가 자는것만 확인하고 도로 문을 닫았다. 씽크대를 정리하고 거실로 진호가 요환과 조금 거리를 두고 멀뚱히 있었다. 

 

 

 

 

?” 

 

 

 

 

요환이 무엇을 묻는지 몰랐다. 아직 여기있냐는 소리같기도 해서 대답도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데, 요환이 테이블위로 약봉지를 내려놓았다. 진호는 그제서야 말이 무얼 뜻하는지 알았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그냥 미식 거리는거야. 괜찮아.” 

 

많이 아프면 병원가고..” 

 

 

 

 

그냥 하는 소리였는지 아님 조금이라도 걱정이 되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는 사오라고 해서 사온 것뿐인데 저는 같잖은 감동까지 받아 청승을 떠는 꼴은 정말 볼썽사나울 것이다. 애써 무덤덤한 했다.  

 

 

 

 

병원은 무슨... 그냥 체한거야.” 

 

 

 

 

진호의 체증은 요환이 오고나서 말끔히 가라앉아 있었다. 어린애들 꾀병이 집에 돌아가면 가시듯이. 태환 때문에 퇴근을 당긴다고 무리하게 전산작업을 요환은 쇼파에 기대앉아 눈가를 꾹꾹 눌렀다. 마실거 줄까? 가져다 ? ..아니. 됐어. 마땅히 할일이 없어진 진호는 나갈 채비를 했다. 

 

 

왔으니까, 그럼 갈게.” 

 

데려다 줄게.” 

 

 

 

 

요환이 느리게 따라 일어섰다. 사실은 그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뻔히 보이는것은 일부러 의도하기도 했다. 타이밍에 요환이 어떤말을 하겠다, 말을 하면 이런 대답을 하겠지, 줄줄이 머릿속에 꿰고 있던 진호는 안심했다. 요환이 집앞까지 바래다 주는 것은 거의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한차례 작은 홍역을 치른 후였기 때문에 그것마저 없어질까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럼 먹고 가자.” 

 

소화 안된다며 

 

말고 .” 

 

됐어.” 

 

 

 

 

진호는 못들은척,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문을 열고 이것저것 뒤적이며 얼굴을 박고 그랬던 같은 유습한 소리를 한다. 

 

 

 

 

차릴게..씻고와.” 

 

 

 

 

요환은 떨떠름한 얼굴로 있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차린 밥상이라고 해봤자 거창할거 하나 없었다. 밥솥 코드가 뽑혀 있었기 때문에 렌지에 햇반을 돌렸다. 아주머니와 요환의 어머니가 보내 밑반찬을 꺼내 전시하듯 늘어놓았다. 생각 같아선 찌개나 국이라도 끓여 내놓고 싶지만 태환이 먹을 소세지나 튀길줄 아는 실력으론 막막했다. 가벼운 차림으로 갈아입고 나온 요환이 의자를 빼서 앉았다. 

 

 

 

 

먹을게. 너도 먹지 그래?” 

 

괜찮아..” 

 

 

 

 

요환의 젓가락질이 오가는 곳은 밥그릇 , 반찬 개로 한정되어 있었다. 배가 고파서 먹기보다 의무적으로 씹어 삼키는게 맞았다. 맞은편에 앉아 요환 마시라고 컵에 물을 따르던 진호는 앞의 수척한 얼굴을 본다. 혈기돌던 얼굴이 창백하다. 모두 탓인것만 같다. 진호는 아무말 없이 반찬그릇을 요환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요환은 묵묵히 젓가락질을 했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차키를 가져나온 요환이 주방에서 식탁을 치우고 있는 진호를 불렀다. 자기가 할테니 나가자고 그러는데도 이것만, 이것만 하며 기어코 행주로 식탁까지 닦고 나왔다. 

 

 

 

 

진호야. 다음부턴....” 

 

그럴 능력은 .” 

 

“......” 

 

그런걸로 미안해 하지마. 안그래도 .” 

 

내가 미안한건 둘째치고 회사일은 다르잖아.” 

 

“.....” 

 

 

 

 

요환도 회사 생활을 하니까 월차를 끌어 쓰고 잦은 조퇴를 하는 직원이 사내에서 어떤부류에 드는지는 알고 있었다. 물론 자리가 위태로울 정도로 무리를 하는 바보가 아닌 것은 안다. 다만 요환은 진호가 태환보다 본인을 챙겼으면 했다. 요환이 한마디 하려는 찰나에 태환이 방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아빠! 삼촌 혼내지마!” 

 

 

 

 

태환은 잠이 눈을 비비며 요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삼촌 한테 뭐라 그러지마! 요환에게 대고 한번 빽소리를 지른다. 사람 태환앞에서는 입조심을 하려고 노력했다. 간혹 집안에서 실랑이를 벌일때도 있었지만 언성을 높이는 정도지,잦은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이는 그렇지 않았나보다. 작은 귀로 듣고 작은 머릿속에 나름의 상황을 정리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진호는 덜컥 겁이났다. 제가 요환에게 했던 행동을 혹시라도 보고 기억하게 될까봐.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알게 되면 깨물고 죽어야 될날이 올지 모른다. 진호는 무릎을 꿇고 태환의 손을 끌어와 품에 꼬옥 안았다. 

 

 

 

 

그런거 아냐. 삼촌 혼나는 아냐.” 

 

진짜?” 

 

그래. 아냐. 이제 아파?” 

 

 

 

 

이마에 손을 갖다대며 부드럽게 저를 달래는 진호의 음성에 안심한 태환이 목을 끌어 알았다. 아이는 요환을 등지고 진호에게 온몸을 내맡기듯 안겨 있었다.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진호가 요환을 올려다 보았다. 시선이 교차한다.

 

 

 

 

거봐, 형은 못버린다까.. 절대로. 

 

 

 

 

진호의 웃는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요환은 입술사이로 허탈한 실웃음을 뱉었다. 웬만해선 먼저 떨어질 같지 않은 태환을 진호가 떼어냈다. 망연하게 모습을 지켜보던 요환은 태환의 앞에 가서 몸을 숙였다. 

 

 

 

 

삼촌 데려다 주고 올게.” 

 

 

 

 

요환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토닥이자 아이도 알아듣고 쇼파로 가서 누웠다. 방에 들어가서 자라는데도 굳이 거기 있겠다며 쇼파 깊숙이 얼굴을 묻는다. 혹여 태환이 깼을때 무섭지 않게 만화채널을 틀어놓고 함께 집을 나왔다. 

 

 

 

 

 

 

 

 

 

 

요즘 증시상황이 어때?” 

 

 

 

 

요환은 핸들을 돌리며 그건 묻냐고 되받아 물었다. 낮에 구내식당에서 기철무리와 했던 대화 때문이 확실했다. 그때 대화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요환을 만나면 물어봐야겠다고 줄곧 마음먹은 것이 있었다.  

 

 

 

 

그냥...환율이 장난아니게 뛰니까..여기저기서 난리네.” 

 

너네 회사는 크게 무리 없을거야. 어차피 내수로 돌아가니까.. 따로 펀드 든것도 없잖아.” 

 

“...” 

 

? 잘릴까봐 겁나?” 

 

그런거 아냐.” 

 

 

 

 

말을 끝으로 진호는 입을 다물었다. 환율이니, 증시니 하는 것이 궁금했던 것이 아니다. 그냥..대화가 하고 싶었다. 

 

 

 

 

 

 

 

요환이 골목입구로 바짝 붙어 차를 세웠다. 진호는 문을 열지 않고 입술을 달싹이다 어렵게 물었다.  

 

 

 

 

들어와서 한잔 하고갈래?” 

 

 

 

 

구시대적 멘트였다. 말은 이미 뱉었는데 떨림이 혀끝에서 진동한다. 그래서 후회했다. 태환이 DVD 있으니까 가져가라고 하는편이 어색했을 것이다. 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문을 여는데 요환이 진호를 잡았다. 

 

 

 

 

그래.” 

 

 

 

 

원하는 대답이 순순히 나왔는데도 진호는 잠깐 어안이 벙벙해 졌다. 10년을 알아왔다고 해서 결코 요환이 편한상대는 아니었다. 불편함은 거북하거나 꺼려지는 성질의 것과 전혀 달랐다. 주차하고 오겠다며 먼저 진호를 내려 놓고 차를 뒤로 빼는 요환을 뒤로하고 얼른 계단을 올라갔다. 요환이 사는 동네와 집에 비교하면 초라하다 못해 기어들어가는 수준이었다. 진호는 집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욕실문을 열었다. 남짓한 욕실 창문으로 골목을 내려다 보았다. 혹시 요환이 그대로 가버리면 어쩌나, 차라리 그냥 가버렸음 좋겠다 하는 이중적인 마음은 진호를 더욱 긴장하게 했다. 건물 지하주차장이나 세입자 전용주차장은 따로 없었다. 골목 한켠에 요환의 벤츠가 어울리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벌건 대낮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동네는 호기심 많고 말도 많아서 외제차 하나 들어오면 땅값 올랐다는 얘기부터 사람들만 모여있다. 아침에 늘어 놓았던 옷가지들을 대충 방으로 밀어놓고 냉장고를 열었다. 마실만한게 별로 없었다. 급한데로 문짝 구석에 박혀 있는 홍차를 꺼내들었다. 계단을 울리는 요환의 발소리가 심장소리 마냥 가까워 졌다. 묘한 긴장감이 일었다. 

 

 

 

 

아직 열쇠야?” 

 

 

 

 

집안에 들어온 요환이 현관문을 닫으며 손잡이를 보고 물었다.  

 

 

 

 

? ... 바꿔야지, 바꿔야지 하면서 까먹었다.” 

 

잊어버릴게 따로 있지.” 

 

 

 

 

작년에 빌라 건물내서 3집이나 도둑이 들었었다. 자주 집을 비우는 진호도 타겟이 되었는데, 회사 노트북을 가져가는 바람에 백업해 두지 않은 자료가 날라가 한동안 애를 먹었던것 빼고는 피해는 없었다. 아이 한테 삼촌집 도둑놈 들었다고 흘러가는 소리로 한것이 요환의 귀에도 들어갔던 것이다. 요환이 거실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물었다. 

 

 

 

 

없어졌네.” 

 

 

 

 

빌라에 입주할때부터 거실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던 티비 받침대를 내놓은건 벌써 1년전의 일이다. 집안을 둘러보며 이거 바뀌었네, 없어졌네 하는 것은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상황에 마땅히 할말이 없으니까 그런걸 알고 있다. 유리컵에 캔홍차를 따라 붓는 진호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띈다.  

 

 

 

 

. 공간만 차지해서 가구점에 내놨어.” 

 

 

 

 

진호는 요환의 앞에 유리잔을 내놓고 앉으며 시덥잖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거 팔고 오천원 받았어.” 

 

 

 

 

입에 잔을 대고 있던 요환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팔고나서 시원하더라. 엄마 그거 보고 아주 난리 났지만..” 

 

 

 

 

아차 싶었다. 진호에게 요환의 가족이 그렇듯, 요환 역시 처가였던 진호의 어머니를 너스레 떨며 입에 올릴 상대는 못되었다. 그러나 요환은 끝까지 예의를 차려주었다.   

 

 

 

 

계시지?” 

 

“.....” 

 

자주 뵈러 가고 그래.” 

 

..” 

 

 

 

 

세월이 무색해질정도로 이야기가 없었다. 두사람 사이의 공통주제는 태환 밖에 없었지만 진호가 요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다. 오늘 회사에서 어떤일이 있었고 점심 메뉴가 맛이 있었네, 없었네 하는 아주 사소하고 잡다한 것까지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에겐 그럴만한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티비를 틀까 하다가 안그래도 복잡한 머리가 정신사나워 싶어서 리모콘을 내려놓았다. 순간 무거운 침묵을 깬건 요환이었다. 

 

 

 

 

가봐야 겠다.” 

 

벌써?” 

 

마셨어.” 

 

   

 

정말로 차만 마시고 일어 요환에게 불편한 기색이 보였다. 그럴 밖에 없었다. 집은 요환이 홍진희와 연애를 하던시절부터 이혼직전까지 주기적으로 드나들던 곳이었다. 어떤식으로든 의식하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대하기 어려웠던 장모나 전부인은 이상 이곳에 없다. 그러나 홍진호가 있었다.  

 

 

 

 

..” 

 

 

 

 

진호는 현관으로 걸어가는 요환의 등을 잡았다. 정확히 진호의 손에 잡힌건 셔츠 자락뿐이었다. 요환이 돌아 섰을때 진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언젠가 말해야 하는것이라면 지금이 때인 같았다.  

 

 

 

 

미안해..” 

 

뭐가?” 

 

“.......그때 미안했어.” 

 

“.........” 

 

 

 

 

빈정이나 숨은뜻이 있던건 아니다. 요환도 곡해해서 듣지 않았다. 그런데도 분위기는 천근만근한 진호의 마음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화가 나서 그랬어... 그러면 안되는건데..” 

 

“.......” 

 

 

 

 

나랑 전화할때면 엄마가 형한테 항상 미안하다고 전해달래. 근데 한번도 한적 없어. 내입에서 미안하단 소리가 나갈땐 내가 형한테 잘못 했을때뿐이었음 좋겠어. 어떤식으로든 좋으니까 형이랑 나만 관계되었으면 . 

 

 

 

 

“....잘못했어..” 

 

“........” 

 

“....정말... 잘못했어..” 

 

 

 

 

광경은 용서를 빈다고 하는게 적당할까, 아님 요환의 개의치 않는 반응을 유도해 낸다는것이 옳을까. 였다. 정말 미안했고 요환이 괜찮다고 해주길 바랬다. 진호는 자신이 점점 비굴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대답없이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던 요환이 누구에겐 천금같은 말을 뱉었다. 

 

 

 

 

걔랑 그런사이 아냐.” 

 

 

 

 

알았으니까 그만하라거나 또는 미안해 필요없다, 요환이 그렇게 말하고 나면 한텀 쉬었다가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요환은 진호가 확신짓고 있던 여자와 자신의 관계를 정의내려 주었다. 요환은 그것이 지금 순간 진호에게 주는 최고의 답이란걸 알고 있었다. 옅게 화색이 돌던 얼굴로 금방 서글픔이 베어든다. 진호는 자신이 이기적이라 생각하면서도 어쩔수가 없었다. 요환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있는 알고 있다. 살에 박힌 가시 마냥 신경쓰이는데 뽑아내지 못하고 굳은살이 되도록 내버려둬야 하는, 자신의 존재는 요환에게 그럴수밖에 없었다. 

 

 

 

 

신경쓰지말고 여자만나서 다시 결혼도 하고....’ 흔히들 상대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 한때는 자신과도 충분히 행복할 있을거라 생각했던 진호의 이성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되도않는 억지 그만부리고 놓아주자고, 그런데 죽어도 그렇게는 못하겠다. 

 

 

 

 

매너모드로 바꿔 놓았던 핸드폰 진동소리가 현관을 울린다. 침묵속에서 소리는 아주 크게 다가왔다. 현관문을 열던 요환도 신경 쓰였는지 돌아본다. 

 

 

 

 

전화 안받아?”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요환이 보는 앞에서 전원버튼을 눌렀다. 진호는 액정에서 얼핏 감독 것도 같았다. 통신회사의 로고가 잠깐 나오다 화면이 꺼진다.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닌 , 아무렇지 않은 . 10년을 속고 속이며 살았어. 까짓것 아무것도 아니야. 

 

어때? 정도면 로버트 드니로 부럽지 않잖아.   

 

 

 

 

 

 

 

 

 

 

영화사 건물을 빠녀나온 정석은 급하게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기 진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대한 그가 빨리 받아주길 바라면서, 신호음이 길게 울리다가 음성 사서함 멘트로 이어진다. 정석은 다시 한번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자의 목소리가 전화를 받을수 없다고 알린다. 폴더를 닫는 정석의 입에서 욕지기가 작게 튀어나왔다. 정석에게 급한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진영수에게는 아주 치명타가 수도 있는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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