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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설교

[스크랩] 성탄 약속의 배경 (사 7:10-14)

작성자샬 롬|작성시간25.12.25|조회수11 목록 댓글 0

성탄 약속의 배경 (사 7:10-14)

 

10절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절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2절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3절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메리 크리스마스~~ 복된 성탄절을 맞이하여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에 “성탄 약속의 배경”이라는 제목입니다. 그걸 말씀하기 전에

 

성탄절을 가장 잘 나타낸 성경 구절을 소개하고자합니다.

 

성탄절을 가장 잘 나타낸 성구는 요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보다 더 잘 말씀한 곳이 있겠습니까?

 

이 구절을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가장 사랑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작은 성경이다." 성경 66권 전체를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바로 이 구절이 된다는 뜻입니다.

 

영국의 설교의 왕자로 불리는 찰스 스펄전도 "이 구절은 아이들도 발을 담그며 놀 수 있을 만큼 얕지만, 거대한 코끼리도 헤엄쳐야 할 만큼 깊은 사랑의 바다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즉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만, 그 담긴 사랑의 깊이는 깨달을 수 없을 만큼 깊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저명한 학자 헨리 라이트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성경이라는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황금의 문이며, 천국으로 향하는 영광의 열쇠다." 현대 기독교 작가이자 목회자인 맥스 루카도 "만약 성경의 모든 페이지가 소멸되고 단 한 구절만 남아야 한다면, 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 남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탄의 약속이 주어진 배경을 보면

 

우리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가장 믿음 없고 악한 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아하스 왕이 그 사람입니다. 아하스는 BC 735년 ~ 715년까지 통치한 유다의 제12대 왕으로 12년간 통치했는데 남유다 역사상 가장 믿음 없고  악한 왕 중 한 명입니다. 그의 통치 기간은 정치적으로는 위기의 연속이었고, 영적으로는 암흑기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믿었습니다. 국제정세를 보면 당시 신흥 강국인 앗수르의 부상으로 말미암아 주변 나라들이 위태로웠습니다. 그때 북이스라엘(베가 왕)과 아람(르신 왕)이 반 앗수르 동맹을 맺고 유다를 그 동맹에 가입시키려 했으나 유다가 말을 듣지 않자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유다를 쳐들어왔습니다.

 

이때 유다는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고, 아하스는 극심한 공포에 빠졌습니다. 이때 아하스가 치명적인 실수를 하는데 신흥강국인 앗수르를 의지한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중국 같은 경우입니다. 협력 관계를 넘어 속국으로 만들어 버리니 문제입니다. 그걸 안 이사야는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외쳤으나 그 조언을 무시하고 앗수르에 도움 요청했습니다.

 

그는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셋 3세'에게 성전과 왕궁의 금은보화를 다 털어 뇌물로 보내며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고 온갖 아첨 다하면서 도움을 구걸했습니다. 그 결과 앗수르의 세력으로 위기는 넘겼으나, 유다는 이때부터 더 크고 악한 나라 앗수르의 속국이 되어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 20:3~4절 보면 앗수르 왕에게 온 나라 사람들이 발가벗겨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적극적으로 우상 숭배를 시작했습니다. 이방의 풍습을 따라 자식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인신 제사를 드리고, 앗수르의 화려한 제단을 본떠 예루살렘 성전에 배치하고, 원래 있던 하나님의 놋제단은 구석으로 밀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성전 폐쇄하고 유다 전역에 우상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대하28:19에 "이는 유다 왕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여호와께 크게 범죄하였"다 했고, 대하28:22에는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 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그가 얼마나 악했든지 왕하16:2에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 했다고 혹평합니다.

 

그는 죽어서도 왕으로서의 예우를 받지 못하고 왕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혼을 판 왕이었습니다. 당장의 위기를 피하기 위해 강대국을 의지하고 우상을 받아들이고 나라를 영적·정치적 노예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사7:2절에 보면 심각한 모습을 봅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쳐들어온다고 하니 폭풍에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습니다. 아주 넘어지고 실족해버림을 의미합니다. 기절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미세한 바람처럼 적의 소식만 들어도 갈피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불안한 심리 상태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큰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말씀으로 용기를 주지만 아하스는 믿지 않았습니다. 환경은 겹겹으로 악한 데다 왕마저 믿음이 없으니 어떻게 할 방도가 없는 상황입니다. 멸망하기로 작정된 자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 시간 당시 불행했던 역사를 이렇게 길게 이야기합니까?

 

성탄은 바로 그러한 배경에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10절 보면 아하스가 얼마나 믿음이 없고 나약하면 하나님께서 나서서 징조를 구하라고 하셨을까요? 믿음이 없어 내가 징조를 구하는 것이 일반인데 아하스 경우는 반대였습니다.

 

그런데 12절에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대답합니다. 언듯 믿음 있는 소리 같지만 그토록 의지하지 말라고 하신 앗수르의 도움을 구할 것을 결심하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못 믿어도 앗수르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는 더 도둑놈이다. 앗수르를 믿지 말라. 앗수르를 의지하면 보물도 재산도 사람들까지 벌거벗겨 끌려 갈 것이다’ 하시는데 아하스는 그래도 믿겠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가 고집은 셉니다. 갈수록 태산입니다. 망하기로 작정된 사람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도와준다 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한숨밖에는 나오지 않는 상황입니다. 답이 없습니다.

 

그러자 13절에 “이사야가 -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책망하면서 14절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성탄의 약속을 주십니다. 이런 데서 성탄의 약속이 주어짐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 복을 약속할 때가 아니잖습니까? 불벼락이라도 내릴 상황입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온전히 함께 있겠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래도 되는 겁니까? 잘못할 때 징계를 내리시는 그 공의는 어디 갔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에 멸망시킬 수 없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셔서 함께해 주시는 길밖에는 다른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테의 신곡에 지옥의 문 위에 "이곳에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라는 폐가 붙어있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절망입니다. 이 절망이 바로 성탄의 배경이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주실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요3:16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남쪽 유다 아하스 왕의 모습이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이란 말씀입니다.

 

전적부패, 전적무능력, 그러므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을 통체로 주시는 방법 말고는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이 되도록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탄이고 그것이 영접이고 구원의 완성이고 그것이 임마누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할 일은 두 손 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 나의 구세주로 믿어 영접하는 것입니다.

 

15-16절에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이 말씀은 아이가 자라서 분별력이 생기기 전에 즉 불과 2~3살도 되기 전에 네가 두려워하던 두 왕이 멸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왕은 유다를 침공한 아람의 르신과 북이스라엘의 베가로, 그 예언대로 BC 732년경에 앗수르에 의해 차례로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처럼 예수만 영접하면 우리의 죄도 육성도 세상도 다스려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아직 어리듯 우리가 예수님의 함께하심을 체험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주를 믿는다면 벌써 달라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잘 믿는다면 그 풍성함이란 이루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벧전1:8-9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한 말씀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17절 이하를 보면 유다가 겪어보지 못한 큰 재앙을 내리실 것을 말씀합니다. 앗수르의 침략입니다. 바벨론 때와 같은 상황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세상을 가까이하면 누구 무엇을 통해서든지 가만 두지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기 백성을 온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성탄은 영원히 멸망할 죄인인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함께하심이 우리의 구원이요 믿음이요 지혜요 의로움이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아하스가 우리들입니다. 이대로 살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의 참 대책이신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시고 경배함으로 온전한 구원을 경험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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