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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예화

[스크랩] 김익두 목사의 일화

작성자agaser|작성시간15.07.15|조회수1,370 목록 댓글 2

김익두목사의 일화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의 청풍 김씨 응선씨와 전익선씨 사이에서 1874년 11월 3일 새벽에 독자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안악골은 양산대의 산준령이 대원면 평촌리 마을을 마치 비둘기 날개 처럼 포근히 감싸고 있었으며 수려한 산새와 빽빽히 들어선 소나무 숲이 마을을 병풍 처럼 두르고 있어서 자연 환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김익두의 삶의 여정의 걸음마

김익두는 안악골 기름진 땅의 제일가는 부자집에 태어나 부모와 일가 친척들의 귀염둥이로 사랑을 독차지하며 살았다.


김익두의 영적인 삶의 힘

그는 전국 방방곡곡 안가보지 못한 곳이 없으며 일본ㆍ만주ㆍ러시아 까지 두루 여행하면서 복음을 증거했다. 옥합을 깨뜨려 온몸으로 헌신한 김익두에게 하나님이 생활을 보증하섰다.


재령읍교회를 담임하다

당시 재령읍교회는 남자교인 1명과 여자교인 10명이 전부였다. 김익도 전도사가 재령읍교회에 시무하자마자 곧 행사를 가졌는데 어린이 여름성경학교를 개최한 것이다. 강사 김익도전도사의 설교에 어린아이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울고 회계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마치 재령읍내의 아이들이 다 모여든 것 처럼 아이들의 홍수 속에 눈물 바다를 이루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어떤 아이들은 엉엉 소리를 내어 큰 소리를 내어 울기까지 했고 회개하는 기도로 은혜의 시간을 이루었다.


재령읍교회에서의 어린이 여름 성경학교에서의 신앙 부흥

한국교회 100년사에 어린이 여름성경학교에서 어린이들이 통곡하고 회개했다는 역사는 들어 본적이 없다. 지금도 매년 여름마다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여름성경학교를 실시하지만 죄를 회개하고 깨우치는 그런 일은 결코 볼 수가 없다. 즐거운 오락과 재미있는 프로그램과 맛있는 간식으로 집회시간을 메꿔 나갈 뿐이다.


그러나 김익도 전도사는 어린이는 물론하고 학생부 수련회나 부흥회에서도 구름같이 사람들이 모여 들었으며 집회때마다 큰 회개운동이 일어나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김익두 전도사가 집회하는 곳마다 경이롭기만 한 회개 운동이 폭발했다.


신천읍 교회 시대를 열다.

소안론 선교사를 비롯한 외국인 선교사들이 신천읍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면서 이 지역 복음화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교회당을 세웠으나 도무지 부흥되지 않아 고심하던 중 소안론 선교사는 김익두전도사를 신천읍교회로 파송하여 신천읍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외국인 선교사의 동역 전도사로 부임시키기로 결정하고 김익두 전도사에게 간곡히 신천읍교회로 부임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익두 전도사는 수일간을 기도하며 망설이다가 결국 소안론 선교사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마침내 재령읍 교회를 떠나 신천읍교로 부임하게 된다.


신천읍 교회에서의 사역

김익두 전도사는 선교사의 동역 교역자로 두 사람이 신천 서부교회를 위하여 사역하게 되었다. 신천에는 명색만 교회이지 성도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무인 교회였다.  신천읍교회로 부임한 김익두전도사는 막상 현지에서 현황을 살펴보니 한심하고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기도에의 사역으로 들어가다.

김익두 전도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날마다 산에 올라가 철야기도하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러나 교회당은 텅텅비어 아무도 출석하는 사람이 없었다. 김익두 전도사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원근각처를 두루 다니면서 전도할동을 계속했고 끈질기게 하나님께 메달려 기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없이 6개월이 지나갔다. 그러니 얼마나 한심했겠는가?


한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 오다.

그러던 중 어느날 이윽고 한 여인이 교회로 찾아왔다. 다리를 절룩꺼리며 초라한 형색으로 인사를 하는데 반신불수와 같은 병자였다. 6개월만에 찾아온 사람이 병자라 한심한 생각이 들어 낙심되었지만 그는 곧 마음을 고쳐먹고 하나님께 감사 했다. “주여! 감사합니다. 성도 한사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감사한 생각이 드니까 친철한 마음도 생겼다. 반신불수의 여인은 사람대접을 받으니까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김익두전도사와 선교사는 이 여자 한 사람 앉혀놓고 6개월만에 등록된 첫 성도와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또 한영혼이 주님께로 돌아 오다.

겨우 한 사람의 성도를 얻은채 또 6개월의 세월이 지나갔다. 김익두전도사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졌다.  “주여! 한 사람 보내 주신 것을 감사하오나 한 삶 데리고 어찌 교회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더 보내 주시옵소서!”

어느 날 또 한사람이 찾아 왔다. 

“저는 각설이 올시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밥이나 좀 주시요”  “네 그러지요” 김익두전도사는 어른 밥 한 그릇을 가져다 먹였다. 그는 또 한번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ㆍㆍㆍㆍ 하필 온다는 사람이 거지 각설이라니ㆍㆍㆍ거지도 사람인가?” 그러나 다음 순간 김익두전도사는 곧 뉘우치고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다. “주여! 이 죄인이 또 범죄하였나이다. 거지라고 업신여겼사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육신은 거지라 하더라도 그 영혼은 천하보다 귀한 줄 알고 진실로 보내 주신 은혜 감사드리옵나이다."

김익두 전도사는 그 거지를 천사 같이 대접했다. 아브라함이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했던 생각이 나서 친절하게 대접했던 것이다. 이로써 겨우 1년만에 겨우 2사람의 성도를 얻게 되었다.

"주여! 감사합니다. 이제 두사람의 성도를 허락하셨사오니 또 한사람 보내 주소서"

하나님께 성도를 더 보내 달라고 합심하여 기도했다. 네 사람이 열심히 기도했는데 다시 6개월 만에 한 사람이 찾아 왔다. 금식하며 기도하기를 1년 6개월만에 3사람의 성도를 얻은 뒤에야 비로소 김익두 전도사는 하나님의 깊은 뜻과 섭리를 확연히 깨닳아 알 수 있었다.

"주여!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는데 과연 한 사람의 영혼을 얻기가 이렇게 힘든 줄을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고 기도했다. 김익두 목사가 후일에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성도를 그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였는데 그 동기는 이때에 성도의 귀중성을 깨닳았기 때문이다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부흥의 물결은 계속되고

어렵게 금식하며 기도하며 1년 6개월만에 얻은 3사람의 교인이 들어온 후부터는 신기하게도 매주 10명 안팎, 혹은 20여명, 때로는 30여명씩 떼를 지어 입교하였고 교회가 갑짝스럽게 부흥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만 2년 남짓한 햇수로는 3년만에 무려 300여명의 큰교회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의 부흥이 인위적인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만이 가능케 된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실로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기대하기 어려운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 진 것이다.

“주여! 감사하옵나이다. 이 일이 대체 어찌된 일이 옵니까? 가슴이 벅차 큰 물결이 밀려 오느듯 합니다. 못난 종이 그렇게 투덜댔사온데 어찌 이다지도 무한 하신 은총을 베푸시나이까? 주여! 이죄인을 용서해 주옵소서. 믿지 못했던 종을 용서해 주옵소서.!”

감격한 김익두 전도사는 자신의 믿음이 부족했던 것과 어려웠던 때마다 낙심햇던 부족한 믿음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


신천읍교회의 부흥의 역사

300여명의 신자가 주일날이면 구름같이 모여 들었으므로 가건물을 지어 예배를 드렸는데 그곳마저 곧 성도들로 가득 찼다. 한국의 기독교사의 초기시대라고 할 수 있는 그 시절에 황무지 같은 신천읍에 300여명의 교인들이 모인다는 것은 역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분명했다. 3년만에 대교회로 성장한 김익두전도사의 일과는 교회의 급격한 부흥으로 말미암아 매우 분주해 졌다.


김익두 목사의 경건의 뿌리

이른 새벽에 일으나 하나님께 은밀히 기도하였고 신ㆍ구약 성경을 꼭 하루에 한 장씩 규칙적으로 정독했으며 하루 꼭 3번 가정예배를 드렸다. 그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던지 혼자서 길을 걸을 때에도 말씀을 암송하였고 자나깨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성경을 읽으며 길을 걷다가 담벽에 부딪히기도 하고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도 많았다. 가끔은 읽는데 너무 열중하다가 그만 길을 지나쳐 “아이쿠, 여기가 어디지? 내가 언제 여기까지 왔나하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했다. 김익두전도사가 길을 걸을 때에는 성경을 보거나 기도를 할 때가 많아서 길거리에서 인사하는 사람을 보지 못할 때가 빈번하여 인사를 받아주지 않고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다.


김익두 전도사 신학교에 가다.

신천읍교회에서는 신실하고 능력있는 종 김익두 전도사를 신학교에 보내어 훌륭한 목사로 양성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당회를 열어 의논 끝에 김익두 전도사를 평양신학교에 입학시키기로 의결하고 학비 일체를 신천읍교회에서 지급키로 했다. 1906년에 드디어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3개월 동안 평양에 가서 수업을 받고 다시 돌아와 교회일을 돌보다가 다시 3개월은 평양에 가서 공부하는 방식으로 6년 동안 공부하고 나면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능력을 받기 위한 몸부림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능력을 바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깯닫고 마음에 결심한 바가 있어 학교 뒷산에 올라가 밤새워 기도할 것을 작정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성령의 충만을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에 몰입하여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한방울 두방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투두두두두둑.....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비가 쏟아졌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요동치 않고 무아지경에 빠져 기도하고 있어서 온몸이 비에 흠씬 젖었지만 주먹으로 땅바닥을 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었다. 빗방울이 흙과 범벅이되어 튀어오르는 바람에 전신이 흙탕물로 뒤집어 쓴 것처럼 함박 젖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밤새도록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성령충만을 간구하는 그의 열화같은 기도는 밤이 새도록 계속되었다 .새벽이 되자 망월같이 크고 둥근 성령의 불이 그의 가슴에 들어왔다. 그는 전신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워 지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김익두 목사는 산에서 내려와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학우들이 그를 보고 기겁을 했다. 온몸이 흙탕물에 젖어 기괴한 모습을 하고 불쑥 들어왔으니 놀라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놀란 눈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학우들을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하고 말했다. 언제나 그에게는 명성을 얻을만한 곡절과 일화가 따라 다녔다.


김익두 전도사 신학교 졸업하다.

1911년 평양 신학교 제 3회 졸업생으로 27명의 학우들과 함께 신학교를 졸업을 하게 되었고 그때 그의 나이 37세였다.


김익두 전도사 목사 안수를 받다.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12년 12월 5일에 그 당시 독노회였던 황해노회 제3회 정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김익두목사의 안수식은 신천교회의 청빙서에 의해 성도들의 기도와 축복속에서 거행되었다. 안수 위원 목사들은 무릎을 꿇고 앉은 김익두의 머리위에 손을 얹었고 임직식을 주관하던 노회장은 떨리는 음성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주여 오순절의 불과 같이 이 조선에도 성령의 불을 붙혀 주옵소서! 엘리사에게 갑절의 영감을 입혀 주셨듯이 이 하나님의 종에게도 갑절의 영감을 부어 주옵소서! 삼천리 강산을 복음으로 가득차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멘!

갖은 인생의 신고 끝에 하나님의 종으로 소명을 받은 김익두목사는 감격과 충만한 사명감으로 온몸이 떨려 왔다. 하나님께서 그를 붙드셨고 그의 심령은 성령으로 충만 했다. 자신을 이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마침내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그의 두눈에서 비오듯 흘려내렸다.


신천교회당 신축하다.

김익두목사가 시무하는 신천교회는 해를 더할수록 부흥하여 교인의 수가 700명을 넘게 되었고 그 시대로서는 엄청난 부흥이였다. 그 동안 예배당으로 사용해 오던 가건물이 이제는 예배 인원을 모두 받아 들일 수 없을 정도로 수용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예배당은 인원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비 좁아서 뒤쪽에 서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 혹은 문턱에 앉거나  아예 밖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다. 김익두 목사는 안수 밭은 후 첫 번째 사업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를 놓고 간절히 기도를 했다. 온 교회가 합심하여 뜨겁게 기도했으며 밤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주일에는 모든 교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700명 이상이 함께 예배할 수 있는 큰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김익두 목사는 특별히 산상 금식기도를 작정하고 산으로 올라 갔다. 3일 간 금식하며 기도했고 밤에는 철야로 기도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면서 그는 늘 “인간의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앞지러지 않게 하옵소서”  하고 겸손히 기도하기를 잊지 않았다. 이 기도는 그가 평생토록 일관한 유일한 기도의 제목이었다고 한다. 김익두 목사는 예배당 건축을 위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3일동안 전심전력으로 하나님께 간구했다. 3일이 지나자 김익두목사의 마음에 강한 확신이 왔다. 기도 중에 큰 목조 예배당이 흡사 노아의 방주와도 같이 웅장하게 김익두목사의 눈에 비쳤다. 비몽사몽간에 그의 눈앞에 나타난 환상이었다. 김익두 목사는 놀라운 환상을 보게 되었고 “아! 저 예배당!”김익두 목사는 자신도 모르게 나즈막하게 외쳤다. 이 환상으로 그는 응답의 확신을 갖게 된 동시에 “평안할 찌어다”라고 하시는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두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흘려내렸다.


예배당 건축을 위한 몸부림

김익두 목사는 3일간의 금식기도를 마치고 돌아왔다. 다음 주일 대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후에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모든 성도에게 광고하고 건축헌금을 책정하게 되었다. 건축비 기금이 기다렸다는 듯이 앞 다투어 모금이 되었다. 당장이라도 예배당이 세워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작정된 헌금액은 계획된 건축비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이였다. 김익두 목사는 당대에 동양 제일의 교회당을 건축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이었다. 생각 끝에 신천 지역 유지들을 한사람 한 사람 방문하여 그뜻을 전달하기로 결심하고 부유층 지역 유지들을 차례로 방문하게 되었다. “주여! 저들이 비록 주님을 믿지는 않사오나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감동하사 주님의 전을 지을 건축비를 헌금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허락하여 주옵 소서!”

김익두 목사는 그들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기도를 계속했다. “주여! 저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옵소서!” 김익두 목사가 그들을 방문하여 교회당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어찌된 일인지 쾌히 승낙을 하는 것이였다.

“김목사님 이렇게 신천읍을 위해 애쓰시는데 어찌 모른체 할 수 있겠습니까? 신천을 위하여 회당을 지으신다는데 제가 도울 수 있는데 까지 돕겠습니다.”

가는 곳 마다 협조적이어서 큰 어려움 없이 건축예산이 모두 확보 되었다. 드디어 신천 서부 교회당의 건축이 시작 되었고 위치는 신천읍 척서리에 자리한 송화목 고개 언덕이였다. 그곳에서 내려다 보면 신천읍이 한눈에 훤히 내려다 보이고 경관이 수려하여 예배당 위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였다. 착공을 위한 예배를 드리고 드디어 공사가 시작되었다.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700여명의 교인들이 모두 공사에 잠여하여 돌을 나르고 땅을 파고 물을 길어 오는 등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공사를 진척시켜 나갔다. 김익두목사의 지도하에 일치 단결하여 감사와 기쁨으로 예배당을 건축함으로써 공사는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어 1913년 신천 교회당은 웅장한 모습으로 완공되었다. 이 일은 김익두 목사가 안수 받은지 1년만의 일이였다. 목사와 성도들이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쁨으로 예배를 드렸다. 새로 지은 예배당 건물을 보기 위하여 도처에서 많은 사람이 구경을 왔다. 원근 각처의 교회와 교인들도 찾아와 기뻐하며 구경하고 돌아갔다.


병고침의 은사가 나타나다.

성경 사도행전 3장 6절에 기록된 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하는 말씀이 있다. 김익두 목사는 이 성구를 읽고 또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베드로는 누구이며 김익두는 누구인가?”

김익두 목사의 성격에는 이러한 도전적인 일면이 있었다. 양자택일의 결단력이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용단을 내리는 남달리 강한 성격이 있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복음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이렇게 담대한 성품을 주신 것이라 생각된다. 황해도 신천읍에는 안중근 의사가 살던 두라면에 저수지로 가는 길목에 척서리 개울이라고 하는 냇가가 있었다. 이 냇물을 “척사재개”라고도 불렀는데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신천의 명소였다. 이 맑은 물은 저 멀리 아득히 보이는 구월산 계곡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였다. 이 척서리 개울에 돌다리가 있었는데 이 다리 옆에는 언제나 앉은뱅이 거지가 구걸을 하고 있었다. 가는 이 오는 이들이 앉은뱅이 거지를 불쌍히 여겨 동냥을 해 주었기 때문에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익두 목사도 그 자리를 지날 때 마다 잊지 않고 꼭 얼마의 돈을 쥐어주고 지나갔다. 때때로 김익두 목사는 '나도 베드로처럼 저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만 있다면 근사할텐데.......하고 늘 마음에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가랑비가 내리는 한적한 오후에 김익두 목사가 그 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고 인적이 드문 시간이어서 매우 조용한 때였다.

“한푼 적선 합쇼!”

김익두 목사를 보고 앉은뱅이가 손을 내밀었다. 성경구절을 암송하느라고 골똘해 있던 그가 움칫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은 인적도 뜸하고 마침 보는 사람도 없으니 이럴 때 한번 저 앉은뱅이를 일으켜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에 다시 한번 주위를 빙 둘러다보니 마침 오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행여나 사람이 보는데 시도하였다가 만일 실패하기라도 하면 무슨 망신일까 싶어 아무도 없을 때 한번 시도해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때가 마침 좋았고 기회가 적중하다고 생각되어 그 앉은뱅이에게 다가가서 손뼉을 딱 치면서 불렀다

“날 똑똑히 보시오!”

“예? 나요?”

앉은뱅이는 갑자기 상기된 김익두 목사의 얼굴을 의아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김익두 목사는 앉은뱅이의 손을 꽉 움켜잡고 그를 주목하면서 큰 소리로 명령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외치면서 그를 힘껏 잡아 일으켰다. 원래 힘이 장사인 김익두 목사인지라 앉은뱅이는 그의 힘에 의해 번쩍 들려졌다. 그리고 김익두 목사는 그의 손을 놓았다. 그랬더니 잠시 들려졌던 그 몸체가 그만 땅바닥에 털썩 떨어지면서 엉덩이가 땅에 부딪히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본래 불편한 육신이라 통증을 못이겨 소리를 지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아이쿠 나 죽네! 사람 살려요! 그는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사람 죽여요 ! 아이구 아이구...........”

김익두 목사가 살펴보니 앉은뱅이가 전혀 일어설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만 부끄럽고 무안한 마음이 생겼다. 순간 번쩍 뇌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왜 내가 믿음으로 하지 않고 주위를 돌아보았는가? 이런 연약한 믿음으로 어떻게 앉은뱅이를 일으키겠다고 나섰는가? 참 한심한 노릇이다....”

아무리 성경을 다시 상고해봐도 베드로가 한바퀴 빙 둘러보고 앉은뱅이를 일으킨 일이 없었기에 생각하수록 자신의 행위가 부끄러웠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는 그만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와 그 길로 예배당으로 뛰어 갔다. 강단 아래 무릎을 꿇고 깊이 탄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여!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종이 심히 믿음 없음을 회개하나이다. 이 연약하고 어리석은 종이 주의 영광을 훼손한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김익두 목사는 자신의 믿음이 부족함을 탄식하며 진심으로 깊이 뉘우치고 회개했다. 이러한 상태로 목회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행위인가를 깨닫고 7일을 금식하며 철야로 기도했다. 물 한모급 입에 대지 않고 완전히 식음을 전폐한채, 깊은 기도에 몰입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도 모두 부질없는 것임을 마음 깊이 깨달으며 기도에 열중했다. “주여! 하잘 것 없는 개나 돼지도 발이 있고 소, 닭도 다리가 있어 걸어 다니고 있는데 저 불쌍한 인생은 무슨 죄가 많아서 저렇게 걷지도 못하고 앉아서 평생 저 고생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김익두 목사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남달리 인정이 많은 그였다 .더우기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남을 가엾게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생겨 애통하고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눈물로 흘러 내린 것다. ‘앉은뱅이를 고쳐 한번 명성을 얻어 보리라'고 생각했던 허망한 명예욕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사랑과 긍휼의 눈물이 한없이 흘러 내렸다. 이렇게 눈물로 회개하고 기도하다가 6일째 되는날 척서리 냇가로 다시 내려갔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엿새를 굶어서 다리가 휘청거리고 기운이 진하였지만 힘을 내어 간신히 다리까지 걸어갔다. 다리 근처에 자리를 잡고 동냥을 청하던 앉은뱅이는 멀리서 김익두 목사가 자리를 향해 걸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기겁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오지마시오! 적선 안 해도 좋으니 제발 오지 마시오”

앉은뱅이는 손을 휘저으며 김익두 목사가 다가오는 것을 제지했다. 또 한번 혼이 날까봐 겁을 집어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호소했다.

“지난번 일은 용서하시오. 내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금식하고 철야하며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 드렷소이다. 오늘밤이 기도 작성한 마지막 날인데 나와 함께 가서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말하는 김익두 목사의 태도에 그는 마음이 움직여 함게 가기로 동의했다.


김익두 목사의 앉은뱅이를 일으키다

엿새동안을 꼬박 굶어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김익두 목사는 앉은뱅이를 등에 업고 있는 힘을 다해 교회당으로 걸어갔다. 강단 밑에 엎드린 김익두 목사와 앉은뱅이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던지 전신에서 땀이 비오듯 흘렀고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주여! 이 불구자를 불쌍히 여겨 일으켜 주옵소서!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주께서 이 사람을 일으키사 걷게 하여 주옵소서! 걷지 못하는 다리에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믿습니다! 주여, 믿습니다!”

밤이 새도록 두 사람은 서로 붙들고 울면서 목이 쉬도록 하나님께 간구했다. 어느덧 깊은 밤이 지나고 새벽 미명이 되었을 때 갑자기 앉은뱅이가 다리에 힘을 얻더니 벌떡 일어섰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옮기더니 급기야는 예배당 안을 껑충껑충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너무도 기뻐서 두 손을 들고 “만세! 만세!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껑충껑충  뛰어 예배당 안을 계속 돌아 다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익두의 하나님이시여! 고맙고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익두 목사도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김익두 목사는 앉은뱅이의 뛰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두 다리는 곧게 뻗어 있고 성한 사람의 발과 조금도 다름없이 뛰고 있었다. 김익두 목사는 이러한 기적 가운데서도 결코 자랑하지 않았다. 헌당식을 마친 직후에 이러한 이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일천명을 수용할수 있는 예배당 안을 앉은뱅이는 마구 뛰어다녔다. 그는 너무 기뻐서 어쩔줄 몰랐던 것이다. 한국 기독교 백년사에 최초로 나타난 이적이 이처럼 신천 서부교회 에배당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신천 사람이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척서리 냇가의 앉은뱅이가 갑자기 일어나 자기 발로 걷고 뛰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소문은 삽시간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황해도는 물론이고 평양과 서울까지 퍼지고 전국 방방곡곡에 전해졌다. 김익두 목사가 주위를 한바퀴 휘 둘러보고 기도했을 때는 실패했으나 회개하고 믿음으로 기도할때는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때로부터 한국 기독교사에 이적의 첫 봉화가 올랐으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김익두 목사는 30여년 동안 부지기수의 병자를 성령의 능력으로 고치는 사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고 전국을 놀라게 하는 복음의 종이 되어 크게 쓰임을 받았던 것이다. 오늘날도 병고침의 이적이 때때로 나타나고 있으나 앉은뱅이가 일어나거나 병자가 완쾌되는 뚜렷한 증거를 목격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한 신유의 이적이 빈번히 일어나기는 하지만 육체의 내부에 있는 질병들이 대부분이어서 참으로 병고침을 받은 것인지 일시적인 진정상태였는지 분명치 않을 때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를 통해 나타난 병고침의 이적은 매우 분명하여 그 병고침의 결과가 뚜렷이 증거되었다. 전신불수 환자가 완치되고 앉은뱅이가 걸어다니고 소경이 눈을 떴기 때문이다.



표적과 기사와 이적의 종

김익두목사가 땀과 눈물로 기도하며 사랑으로 복음을 증거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다. 그가 주위를 돌아 보며 명예욕에 사로잡혀 행할 때는 실패의 부끄러움을 느끼며 자신의 불신앙을 눈물로 회개할 수 밖에 없었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행할 때는 이와 같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의심할 때는 실패했고 믿고 기도했을 때는 앉은뱅이가 벌떡 일으나서 걸어가는 기적을 체험한 것이다.


성경 읽기

신천 서부교회의 성도들은 성경 읽는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겼다. 김익두 목사의 성경읽는 습관을 본받아 철저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읽기는 성도들의 생활 중에 가장 비중있는 일과이었다. 김익두 목사는 신ㆍ구약 성경 66권을 거의 외우다 시피 통달한 사람이었다. 평생에 신약은 1,000번을 정독했고 구약은 100독을 독파했는데 평상시 암송하는 구절은 100구절 정도 늘 외우고 있었다. 신 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언제나 그의 머릿속에 충만하여 수시로 그의 입술을 통해 흘러 나왔고 그의 손에는 항상 성경책이 들리워져 있었으며 무슨 대화에 임하든지 반드시 성경책을 펴 놓고 말했다.


계속되는 예배

1946년부터 1950년에 이르는 5년여 동안 김익두 목사는 산천서부 교회에서 매일 저녁 집회를 했는데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계속하겠다는 의지로 매일 밤마다 모임을 가졌다. 어김없이 저녁 7시가 되면 (여름은 8시) 예배를 드렸다. 5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집회를 계속했는데 그동안에 신약성경을 처음부터 차례차례 읽어 나가면서 강해했다. 평일 집회에서는 여러 가지 질문도 하고 신앙생활에 필요한 성경지식을 문답식으로 가르쳤으므로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병자를 위한 애타는 마음

“자기 교회의 성도가 병들어 고통 중에 있을 때 7일 이상 금식기도 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기도한 분 있으면 손들어 보시오!”


치병 때문에 모함을 받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망

“나는 앉은뱅이가 어찌나 불쌍하던지 작심하고 7일 금식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려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키셨습니다. 결코 내가 고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양을 위하여 하루 금식도 못하는 목사가 주님 앞에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그렇게 말들을 많이 합니까?”


기도의 비결을 터득하다.

김익두 목사가 회심한 직후의 일이다. 그는 두문불출하고 열달동안 신약성경 100독 이상을 읽으며 기도와 경건 생활로 시간을 보냈다.

“온 정신을 통일하여 하나의 기도 제목을 놓고 집중적인 기도를 해야지, 이것 저것 중언부언 기도하면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기 어렵다. 금식 기도도 목적을 여러 가지 나열하지 말고 오직 한가지 목적을 두고 간절히 기도하라.”


성경을 읽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음

“내가 아는 것이 없지 않느냐? 나는 별로 학문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만 죽어라고 읽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만 잘 알고 있다. 내가 성경만 읽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총애하시고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이 없도록 전국 방방곡곡 구경시켜 주셨다. 만주, 중국은 물론이고 러시아까지 다 구경하지 않았느냐? 뿐만 아니라, 나는 빨아놓은 이불에서 자 본 일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평생토록 새 이불에서 잠재워 주시더라.”


호랑이 부흥사

김익두목사가 가는 곳마다 신유의 이적과 말씀, 통회의 역사(役事)가 일어남으로 그의 명성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전국 도처의 교회에서 부흘 사경회를 인도해 달라는요청이 쇄도했다. 김익두 목사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성령의 능력으로 은혜가 넘쳤다. 교회마다 다투어 그를 청함으로 인해 때로는 본 교회에 사정이 있어도 끝까지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은 따라 나서야 할 때가 많았다. 그 당시 부흥집회는 집회기간에 주일도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집회에 나가면 의례히 주일예배도 현지 교회에서 드려야 할 때가 많았다. 그곳에서 집회를 마치면 곧장 본교회로 돌아올 겨를도 없이 이웃교회로 또 다시 이웃교회로 초청을 받아 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떤 때는 한번 나가면 몇 달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할 때도 있었다. 기차역이 신천에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쉽게 초청에 응할 수 있도록 복음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었던 것이다. 전국 어디를 가든지 언제나 출발할 수 있는 교통상의 편의까지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것 같았다. 그 당시 김익두 목사의 초청 부흥 성회는 3년 전에 미리 부탁해야만 성사가 될 정도로 바쁜 일정으로 꽉 짜여 있었다. 이처럼 교회와 가족을 떠나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가족들과의 연락은 편지나 인편으로 주고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집회를 그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때였다.

삼천리 방방고고에 있는 교회들이 김익두목사의 집회를 원했기 때문에 그가 다녀 보지 못한 곳은 그의 없었다. 심지어는 만주, 일본, 러시아에서 조차도 김익두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했다. 심할 경우에는 1년에 집에서 3-4일 밖에 머물지 못할 때도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사역이였다. 1910-1940에 이르기까지 약 30여년간은 그를 통하여 한국 교회사에 큰 획을 긋는 부흥의 역사가 타오르는 불꽃 처럼 일어나던 시기였다.


집회 때마다 일어나는 현상들

집회때마다 나타나는 특징은

첫째-회개의 역사로서 통회 자복하는 사람들로 눈물 골짜기를 이루었고

둘째-성경의 심오한 진리를 가르침으로 은혜가 충만했으며

셋째-놀라운 병고침의 역사가 일어 난 것이였다.

김익두 목사가 강단에 서면 성도들은 눈물로 회개했고 은혜가 충만하여 기쁨에 넘쳐 집으로 돌아갔다. 1세기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세기적인 부흥사라고 해도 결코 과찬이 랄 수 없는 믿음의 영웅이였다. 언제나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를 붙들고 사용하심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를 통하여 교회들의 부흥이 일어나다.

김익두 목사의 집회 통하여 부흥이 일어난 수 많은 교회들 중에서 신축한 교회당이 약 150여개처이고 증축한 교회당이 약 150여개처이다. 어린이 선교원은 무려 300여개처를 신축 또는 증축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는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는 것만큼 어린이 선교원을 세우는 일에 적극적이였으니 실로 페스탈로치에 버금가는 교육적 선견지명이 있었던 같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어린이 선교원을 부설 운영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들은 당시 김익두 목사의 어린이 복음 전도에 대한 남다른 열심히 밑걸음이 되었고 또한 그와 같은 이들의 헌신적인 믿음의 결과일 것이다.


그의 위상과 집회를 통한 역사

그의 소문은 전국 교회에 널리 알리워져 있었으므로 수 많은 성도들이 그를 손꼽아 기다렸다. 심지어 불신자들 조차도 김익두 목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당시 그의 명성은 대단했다. 그가 설교하는 집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가는 곳마다 예배당이 가득차게 되어 언제나 몰려오는 인원을 수용하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예배당이 비좁을 때는 학교를 빌리기도 하고 때로는 넓은 뜰에 멍석을 깔아 앉히기도 했다. 어느 집회에서는 각 가정에서 가마니를 한 장씩 가져오게 하여 집회를 갖기도 했다.


부흥회의 인도한 역사

이렇게 많은 이적과 기사와 잊을 수 없는 많은 에피소드를 남기며 그는 일생을 통해 779회나 되는 부흥회를 인도했던 것이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결신자의 수가 약 300여만명에 달했고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목사로 헌신한 사람이 200여명에 달했고  그의 직접적인 권유로 목사가 된 사람은 100여명이였다. 김익두 목사 직접 자비로 신학 공부를 시켜 목사가 된 사람이 8명이나 된다.


세계적인 부흥사

이웃 일본에서도 호랑이 부흥사가 조선 반도에 나타났다고 경탄하며 김익두 목사를 존경했으며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를 세기적인 부흥사로 높이 평가하였다. 죄에 대하여 추상같이 책망하는 호랑이 부흥사 앞에서 떨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의 불의한 죄에 대해서는 추호도 용납함이 없이 준엄한 그에게 호랑이 부흥사란 별명이 붙혀졌고 당시의 모든 이들에게 불리워졌던 이러한 별명은 그가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는 영적 지도자요 목회자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적 증명회

김익두 목사는 1912년 목사 안수를 받은 이후부터 신유의 은사를 나타내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권능과 영과을 드러낸 복음의 종이였다. 그는 척사재 냇가의 앉은뱅이를 일으켜 걷게 한 이적으로부터 1938년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일경으로부터 목사직을 박탈당한 뒤 황해도 직전리로 은퇴할 때까지의 목회 사역을 통해 회개와 표적과 기사로 수많은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했고 놀라운 성령의 역사로 전국을 놀라게 했던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였다. 그의 이러한 행적을 간과할 수 없어 황해 노회에서는 이적증명회라는 기관을 조직하여 김익두 목사의 병고침과 이적, 기사의 현장을 증거하고 보존하기 위해 “조선 예수교 이적명증집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적명증회에서 선발된 사람들은 김익두 목사를 수행하면서 이적이 나타날 때마다 이적 전과 후의 사진을 찍고 당사자의 진술을 받아 출간했다. 1권부터 3권까지 계속 출판 되었다.


이적명증회의 발기 취지문

“옛날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께서 3년간 전도하실 때에 기적, 이사를 많이 행하심은 당시 인민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천국의 오묘한 진리를 믿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권능을 특별히 나타내사 병을 고치시며 사귀를 내어 쫓으시며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이적과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시며 또 떡을 먹이시는 일들 기사를 행하사 패역한 세대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능을 목도하고 예수의 존재를 인정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그 후 사도시대에 이르러서도 동일한 기적이 여러번 나타난 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바이다. (중략)


하나님께서 우리 조선 반도의 민족을 권고하심으로 그리스도교를 신봉한지 이미 37년! 교회의 왕성함과 신도의 전짐함은 실로 상위의 은혜이므로 감사할 따름이어니와 본도 신천 읍내 교회 목사 김익두씨는 이미 주님의 사명을 받아 사역한지 수십년에 종종 영적을 나타내 권능 목사라는 아름다운 이름까지 얻었더니 특별히 금춘부터 경상남북도와 황해도 등지에서 안수 기도함으로 현대약으로 치료 못할 자를 완쾌시킨 자가 그의 수백명에 달한다. 그중에 특이한 경우를 말하면 곧 앉은뱅이가 걸으며 벙어리가 말하며 소경이 보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꼽추가 펴지며 반신불수가 완전해지며 17년 된 혈루병자가 낫는 등 일일이 매거(枚擧)키 어려운 지라  (중략)


진리의 말씀을 세상 학설로 몰아 붙이며 하나님의 권능을 마음가운데 의심하던 자여 주님의 때가 가까웠으니 참회하고 주님을 진실히 믿을 지어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약소한 우리 조선에 이러한 이적을 주신 것은 당신의 경륜을 이루고자 하심이니

첫째-조선은 미신적이라고 오해하는 자의 생각을 깨트리시고자 함이요

둘째-모범적으로 신령한 신앙됨을 세계에 표창케 하려 하심이라.

그런고로 우리는 이에 한회를 조직하여 자못 김목사에게로 말미암아 나타난 이적 뿐만 아니라 30여년간 조선 교회에 많이 나타난 이적을 일일이 수집하여 하나님의 권능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음을 증명하고 또한 후세 교회가 조선 내에서 성령의 이적을 믿지 않는 자들로 깨닫고 회개하게 하며 우리 조선 교회내에 역사적 광휘를 표창케 하기 위하여 본회를 발기하고 취지를 공포함“

구주 탄생 1920년 7월


막대거지  박수진 병고침을 받다(현풍집회)

1919년 12월 5일 현풍읍내의 현풍교회에서 집회하다. 박수진이라는 거지행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십여년전 돌연한 사고로 아래턱이 떨어져 마음대로 먹을 수도 없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병자가 되어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막대로 집 대문을 두드리며 동냥해 먹고 살았다.  그가 대문을 뚜드릴 때 막대로 뚜드리기에 막대거지로 불리웠는데 이 사람도 김익두 목사의 소문을 듣고 찾아 온 것이다. 김익두 목사의 눈에 박수진이란 사람이 눈에 띄어 김익두 목사는 그만 가슴이 뭉클해지며 불쌍한 생각이 들어 눈물울 걸썽이며 민망해 했다. 그를 위해 기도하여 보낸 후 김익두 목사는 불쌍한 막대 거지를 위해 집회기간 동안 7일간의 금식기도를 작정하고 그날부터 하나님께 메달려 불붙는 듯한 기도를 시작했다. 새벽, 낮, 밤의 연속 집회로 육신이 매우 피곤할 것이건만 김익두 목사는 계속 금식하면서도 조금도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더욱 힘이 넘치는 설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마침내 부흥회 마지막날 새벽집회 때 박수진의 턱이 놀랍게도 감쪽같이 들어붙어 원상회복이 되었다. 신경과 근육이 회복되었고 완전히 정상인의 얼굴로 돌아왔다. 박수진은 너무 감격해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하고 소리 질렸는데 말이 제대로 나왔다. 그는 얼마나 기뻤던지 소리를 지르며 온 동네를 띄어 다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온 교회가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미하였다. 현풍읍민이면 누구나가 다 아는 막대거지 박수진이 병고침을 받은 것을 보고 누구나 놀랐고 그로 인해 전도의 효과가 지대했다.

 

김성준이의 정신이상을 고치다.

동래군 상면 삼원리 김채권씨의 아들 성준(25세)가 정신이 상을 일으켜 부모들의 속을 태웠다. 그는 황소뿔을 잡고 황소와 싸우기도 했고 남의 집 돼지굴에 들어가 놀기도 했고 논과 밭의 곡식을 상하게 하기 일수 였다. 김익두 목사님이 부산에서 부흥회 한다는 소식을 듣고 붙들어 억지로 예배당에 들어 왔다. 예배당안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소동을 일으키자 사람들이 성준이를 피해 도망 다니느라고 큰 소란이 일으났다.  김익두 목사가 성준이의 미친 모습을 매우 측은히 생각하여 눈물울 흘리며 하나님께 병 낫기를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도록 소란하던 성준이가 갑자기 다소곳해지며 정신 이상 증세가 사라져 전혀 딴 사람 처럼 멀쩡한 청년으로 되돌아 왔다. 집회에 참석했던 수 많은 사람들이 목전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이적을 보고 저 마다 탄성을 올리며 하나님을 찬미했다.


  전신마비 환자의 재생

봉산군 금인면 명유리 오택순씨의 딸 진익(4세)은 원인불명의 질환으로 3개월전부터 전신마비가 와서 자리에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어린 딸의 애처로운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는 한숨과 눈물로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사리원 교회의 김익두 목사 부흥집회 소식을 듣고 병든 딸을 등에 업고 김익두 목사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 딸을 부디 살려주세요.”

진익의 어머니는 목이 메인 음성으로 눈물을 쏟으며 그의 앞에 어린 딸 진익을 눕혔다. 전신마비로 움직이지 못하는 측은한 진익의 모습을 바라보는 김익두 목사의 눈에서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진익이 얼마나 가엾었던지 기도하는 김익두 목사의 음성이 울먹였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자 마자 아기가 손발을 움직이며 전신에 새힘을 얻어 일어나 앉는 것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어서 눈으로 목격하고도 믿기 어려운 성령의 능력이었다.


김익두 목사의 진실한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없는 복음의 도구였다. 그는 항상 입버릇처럼 기도하기를 “내 열심히 아버지의 뜻을 앞지르지 않게 하여 주소서!”하고 기도했으며 일생 동안 단 한번도 자신의 능력으로 병을 고친 것처럼 내세워 자랑한 일이 없습니다. 때문인지 그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이적과 기사가 나타나 주님의 영광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평범한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고백에 의하면 “나는 어저께 앉은뱅이가 병고침을 받고 벌떡 일어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도 또한, 오늘 만난 반신불수 환자의 측은한 모급을 보노라면 과연 이 지경의 중풍병자를 고칠 수가 있을까? 하고 의심한다. 그러면 나는 어저께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하나님이 오늘 중풍병자를 못고치시겠는가?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자꾸 기도하면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이 왔으며 그 확신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이적을 일으키셨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주여! 주님의 놀라우신 능력으로 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워주소서!하고 기도할 때에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환상이 나타나면 반드시 앉은뱅이가 일어났고 그 환상이 보이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일어서지 못했다. 그는 진실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했으며 믿음대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증거했다.


신천읍교회에서의 이적

1921년 8월 21일부터 29일까지 신천서부교회에서는 김익두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김익두 목사가 시무하던 본 교회를 1919년에 떠나 서울 남대문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한지 3년만의 일이었다. 신천서부교회로서는 김익두 목사와 헤어져있는 동안에 모든 성도가 무척 그리워하던 터여서 이번 집회에의 기대가 매우 컸다.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 여름이었기 때문에 햇볕이 무척 따가운 때였다. 그러나 그가 3년만에 고향에 돌아와 부흥집회를 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황해도 일대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앞다투어 모여들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신천읍교회는 초만원이 되고 말았다. 각처에서 모여든 불구자, 병자들도 수없이 모여들어 신천시내가 소란했다. 부흥회가 진행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통회 자복하며 거듭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고 날마다 구원얻는 사람의 수가 늘어갔다. 인파가 넘쳐 한사람씩 안수기도를 할 수가 없었으므로 단에 서서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으면, 병자들이 김익두 목사 앞을 차례로 지나갔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단 앞을 지나간 많은 병자들이 병고침을 받는 기적이 일어나 사람들을 경탄케 하였고 온 신천읍이 소동하였다.


신문기사로 보도된 이적사건

당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신문 보도기사를 몇 가지만 소개해본다.


경기 기독신문 제 259호 중에서

“과학을 초월한 현대의 기적 김익두 목사는 아이들까지도 탄복한다. 비행기가 나타나고 606호가 발명된 현세에 20세기 이전에 예수때 일어났던 기적이 일어났다. 아득한 2000년후 오늘 한국에 이 진리는 거듭 증거되었다.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신천읍교회 김익두 목사가 수년내 경상도, 평안도 전국을 두루 다니며 선교하는 중 벙어리가 말하며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혈루증이 나았던 현저한 실적이 진실이라는 사실이다. 최근 신천에서는 앉은뱅이가 일어났고 전국적으로 모여들어 신천여관에 묵으면서 ‘김목사 보셨소?’ ‘오늘도 못보았습니다’가 인사가 되었다. 마치 부모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처럼 실망한다. 그러므로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의 물분량과 미스비어스 화산의 뜨거운 분량과 김익두 목사의 헤아릴 수 없는 기도의 능력은 세계3대 불가사의이다.”


동아일보 제 58호 기사 중에서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걸어 다니고, 황해도 신천읍교회 김익두 목사는 1920년 5월 17일 부산에 도착하여 부산진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중 안수기도를 하여 앉은뱅이를 걷게 하였으니 두수이다. 두수는 부산진 좌전동 446번지 김낙언의 아들로 난지 8개월만에 우연히 앉은뱅이가 되었다가 8년만에 김익두 목사의 안수를 받았다. 안수받은 두수는 일어나 걷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이적이다. 밀양읍교회의 18세 여자 벙어리가 말을 하고 있고 경남지방 22명의 불구자가 완전 완쾌되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로 말미암아 조선천지가 떠들썩 하였고 세계 매스컴에 타전되었다.


기독신보 제 257호

1920년 11월 10일, 만명의 큰 무리가 김익두 목사 부흥회로 목욕을 하였다. 경성 숭동교회에서 지난 10월 2일부터 김익두 목사를 청하여 부흥회를 하였다. 타락자가 나와 회개하고 교만한 자가 겸손해지고 굽은 손이 펴지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병든 자가 나았다. 헌금이 천여원에 달했다. 이적! 만명의 무리가 밤을 새우며 회개하여 철야로 눈물을 쏟고 서울 장안이 성령의 큰 은혜로 단비를 맞았다.



신사참배 거부와 그 믿음의 투쟁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 민족에 대해 그들이 섬기는 신사에 대해 일제히 참배할 것을 강요했다. 특히 조선 기독교인들 모두에 대해 신사참배를 요구했고 교회 지도들에 대해서는 온갖 유혹과 탄압정책을 펴며 그들의 우상에 대한 참배할 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목사들이나 성도들이 결단코 이를 거부하였으므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그들의 무력을 동원하여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로 말미암아 도처에서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김익두 목사 신사참배 거부로 수난을 당하다.

김익두 목사가 64세이던 해 1938년 어느 날 종로 경찰서 소속 고등계 형사 한명이 숭동교회 사택으로 찾아와 그를 신사 참배할 것을 권유했다. 고등계형사의 회유와 협박에도 김익두 목사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음인지 매우 분명한 어조로 반대하는 답변을 했다. 그러자 일본 형사는 더 이상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닳았음인지 매우 불쾌한 기색을 띠고 본서로 되돌아 가버렸다. 형사가 되돌아간 다음 주일에도 김익두 목사는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결코 신사참배를 해서는 안된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수일이 지난 후 종로 경찰서의 고등계형사가 다시 찾아와 “목사님 서장님이 한번 뵙자고 하시는데 바쁘시더라도 함께 가셨으면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김익두 목사는 마음 속으로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고 가족들에게 간략한 부탁의 말을 남기고 그를 따라 종로 경찰서로 갔다. 종로 경찰서는 일제시대 때 우리 민족을 탄압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악명 높은 곳이였다. 이곳에 연행되어온 김익두 목사는 무쇠도 녹아 나간다는 악명 높은 고문실에서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었다. 잔인한 고문과 악형으로 도무지 감당키 어려운 육신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는 결코 신앙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일경들의 고문 방법은 매우 잔인하고 가혹했다. 김익두 목사는 고통을 못 이겨 수 차례나 혼절했는데 그럴 때마다 일경들은 바게츠에다 찬물을 가득 담아와 그의 얼굴에 퍼부어 정신을 들게 했다. 그러나 그는 정신이 들 때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주여! 고통 때문에 실언할까 두렵사오니 종의 입술을 지켜 주옵소서” 그는 자신의 육체가 고통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보다 육체의 고통을 못이겨 일본제국주의자들 앞에 신앙의 절개를 굽혀 하나님께 범죄할까 염려 했다. 이경들의 잔인한 고문은 거의 매일 같이 계속되었다. 일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복음의 일선에서 헌신한 그에게 이러한 육체의 고난은 참으로 감당키 어려운 시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가 지금 받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는 믿음돠 소망으로 이 모든 고난을 감내했다. 종로 경찰서장은 한달 가까이 가혹한 고문을 계속했으므로 천하의 김익두 목사도 별수 없이 굴복하리라 믿고 득의 만만한 얼굴로 이죽거렸다. 김익두 목사는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 또한 단호한 거부의사로 마침내 서장은 그가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깨닳았다. 도저히 육체적인 고통만으로 그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에게 최후 통첩을 하였다. “당신은 이제부터 목사가 아니외다. 그러므로 당신은 결코 숭동교회에서 설교해서는 않되오! 라고 했다. 김익두 목사는 굽히지 않고 끝까지 항거를 했다.  그러나 그들의 엄청난 무력 앞에서 더 이상 그의 말은 아무 효력도 나타낼 수 없었다. 결국 김익두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일제의 강요에 의해 목사직을 빼앗기고 숭동교회의 담임 목사직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도 않되는 사유와 탄압으로 목사직을 박탈당하던 현실이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였다.

고문으로 거의 죽음의 직전에 까지 간 김익두 목사

김익두 목사가 고등계 형사에 의해 강제 연행되어 경찰서에 들어간 후 그의 가족들과 숭동교회 성도들의 불안과 초초감은 어떻했겠는가? 사방으로 수소문하고 그의 행방을 알려 해도 알길이 없는 지라 모두가 안절 부절 했다. 매일깥이 철야로 기도하고 뜬눈으로 밤을 세워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가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십여일이 지난 후에야 겨우 처음으로 종로 경찰서에 근무하는 조선인을 통해 불길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말을 듣고 모두가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탄식하기도 하고 슬픔을 못이겨 울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으로 그를 도울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기를 수일이 지니서야 종로경찰서로부터 김익두 목사를 데려 가라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부인과 성도들이 종로경찰서로 숨가쁘게 달려가 김익두 목사의 신병을 인수하고 보니 이미 그의 몸은 죽은 시체나 다름이 없었다. 가슴에 귀를 대고 숨소리를 들어보았으나 겨우 희미한 호흡을 하고 있을 뿐이고 맥박마져 고르지 않았다. 장남 성식이 아버지를 등에 업고 경찰서로 나와 그의 몸을 달구지에 눞였다. 가족들과 성도들이 그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슬픔을 참지 못했고 청년들은 분노를 참지 못해 어쩔줄 몰랐다. 김익두 목사를 실은 달구지가 숭동교회 정문으로 들어오자 기다리고 있던 많은 성도들이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모습을 보고 모두가 슬픔과 분노를 못이겨 눈물을 흘렸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그의 옷을 벗기고 보니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이 온 몸이 피멍이 들어 시퍼렇게 되어 있었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안정을 시키기 위해 다뜻한 방에 눞히고 정성껏 치료 했다. 5일이 지나서야 겨우 의식을 회복했고 13일이 되어서야 겨우 말을 했다. 그러나 몸을 자유롭게 웁직이지는 못했다. 김익두 목사가 하나님의 은혜로 목숨을 건진 것은 장차 그가 해야할 복음의 과제가 남아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신도가 된 김익두 목사   

1938년 12월 28일 일제의 강제 파직으로 목사직을 박탈당한 김익두 목사와 그의 가족들은 정든 숭동교회를 떠나지 않으면 않되었다. 일경들의 감시와 압력으로 더 이상 숭동교회에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35년 7월 8일에 숭동교회 8대 당회장으로 부임한 이래 약 3년 6개월 동안 오직 복음에의 사명을 위해 신명을 바쳤던 그는 동지섣달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일제의 악랄한 탄압과 강요에 의해 본의 아니게 숭동교회 사택을 떠나 황해도 은율군 장안면 직전리의 외딴 촌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날은 몹씨 추웠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어서 길도 미끄러웠다. 머나먼 길을 떠나야 했음으로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출발했다. 숭동교회의 수 많은 성도들이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는 것을 뒤로하고 김익두 목사와 그의 가족들은 슬픔을 달래며 떠나야만 했다. 아직 몸도 회복되지 아니한 불편한 몸을 수레에 싣고 마치 귀양 가듯 외로운 길을 떠나 머나먼 황해도로 걸음을 재촉했다. 신앙의 본분을 지키다가 추방당하는 그 모습이야 말로 주님의 십자가를 쫓는 거룩한 길이 아니고 무었이겠는가?


휴직생활

황해도 은율군의 직전리 마을은 황해도 북쪽 해변에 위치한 자그마한 어촌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 있는 반도 형태의 마을이며 북단에는 바다 건너 진남포가 마주 보이는 곳으로 풍경이 아주 수려한 마을이였다.  엄동의 12월말에 머나먼 길을 따라 이곳 직전리 마을에 도착한 김익두 목사와 가족들은 어촌마을의 소박한 초가집에 짐을 풀었다. 자그만 방이 세칸이 있고 마루가 하나 있는 전현적인 시골집이였다. 김익두 목사는 한 겨울 동안 건강회복을 위해 기도와 몸조리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봄이 되어 그는 뒷 동산에 사과나무 묘목 600그루를 사다가 심었다. 땀을 흘리며 땅을 파고 한그루 한그루 정성껏 나무를 심었다. 그의 여생을 사과나무를 가꾸며 보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초봄부터 열심히 사과나무를 가꾸고 집앞 밭에는 채소를 심어 가꾸기도 했다. 사과 나무밭 뒷편에는 초목이 우거진 산이 있엇고 그곳 후미진 곳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 높다란 곳에 팽팽하게 다듬어진 보기에 좋은 바위여서 김익두 목사는 이 바위를 기도의 처소로 삼고 하루도 걸르지 않고 기도를 계속했다. 하루 세 번씩 기도를 했는데 새벽, 낮, 밤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는 1938년-1945년간 7년동안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하였는지 때로는 비를 맞으면서도 기도를 계속하여 옷이 흠뻑젖는 것 조차도 몰랐다고 합니다. 어느해 여름에는 기도하는 그의 주변을 큰 뱀이 기어다니고 있었는데 그를 헤치지 않았다. 딸이 아버지를 뵈러왔다가 기급하여 뱀이라고 소리쳐도 그는 눈을 감은 채 조금도 놀라지 않고 여전히 기도를 계속했다.


신의주 사건과 신사참배의 진상

일경으로부터 일체의 목회활동과 여행을 금지 당한 김익두 목사였기 때문에 직전리 마을 사는 동안 먼 곳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일경들은 그가 설교를 하지 못하도록 언제나 감시 대상에 오려놓고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때때로 그들의 감시를 피해 부흥회를 인도하러 나가기도하고 설교를 맡기도 했다. 1941년 김익두목사가 신의주교회 집회를 마치고 막 나오는데 대기하고 있던 왜경들이 덤벼들어 그를 연행했다. 그리고는 우격다짐으로 그들의 신사로 끌고 갔다. 그를 염려한 목사들과 많은 성도들이 신사까지 따라왔다. 왜경들이 신사 앞에서 김익두 목사의 머리를 완력으로 눌러 숙이게 하려고 힘을 썼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가 완강히 거부하자 왜경 두사람이 양쪽에서 팔을 잡고 강제로 머리를 눌렀다. 김익두 목사는 한사코 몸을 젖히며 거부를 했다. 왜경들이 한참동안을 실랑이를 벌렸으나 끝내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자 욕을 퍼붓고 협박을 하고는 그를 풀어 주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김익두 목사가 신사에 참배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왜경들이 친일파 목사들을 통해 고의로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해방과 함께 다시 목회를 시작하다.

1945년 8월 15일 김익두 목사는 해방의 감격과 더불어 오래도록 쉬고 있는 목회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가 살고 있눈 짖전리 교회에서 다시 설교 강단을 맡아 복음을 전하며 목회활동을 재개하게 된 것이다. 진실로 김익두 목사는 감사했다. 이제 그의 나이 71세 였다. 다시금 강단에 설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 올랐다. 마치 부활을 맛보는 것 처럼 그는 생동하는 기쁨으로 복음 전도의 일을 다시 시작했다. 비록 노령의 나이에 접어들었지만 복음의 능력을 소유한 그에게는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 그는 참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 부지런히 심방하고 한마디의 말씀이라도 더 진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기도하며 열심히 준비를 했다. 비록 성도의 수가 많지는 않는 시골교회였지만 그는 동네마다 열심히 다니며 전도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증거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주님의 양들을 돌보기에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25년만에 다시 부임한 신천 서부교회

노령의 김익두 목사가 직전리교회에서 복음에의 활동을 재개하고 목회생활을 전념하고 있을 때 그가 1903년에 처음으로 개척하여 세운 신천 서부교회에서는 담임목사가 공석 중이여서 후임자를 청빙하기 위해 의논이 분분했다. 당시에 담임목사인 김현준 목사가 공산당에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대상에 올라가자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남한으로 탈주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신천 서부교회는 김현준 목사 후임으로 누구를 청빙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여러날 심사숙고한 끝에 만장일치로 김익두 목사를 다시 청빙하기로 가결했다. 모든 성도들은 그가 비록 72세의 고령이긴 하지만 그의 일생의 업적과 능력 그리고 그가 개척하고 친히 세운 신천 서부교회로 다시 돌아와 필생의 복음 사역을 마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김익두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1913년 당시에 건축했던 현재의 교회당 건물이 벌써 33년이 지났음으로 다시 건축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기왕이면 처음 지은이가 헐고 다시 새 예배당을 세우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로 신천 서부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게되자 여러날 기도하고 생각 끝에 결국 25년 만에 다시 신천서부교회로 부임하게 되었다. 1047년에 신천서부교회에서는 김익두 목사의 위임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고 1948년에는 김익두 목사의 성역(聖域) 40주년을 기념하여 황해노회 주최의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가졌다. 신천서부교회에서의 하루 하루의 일과는 잠시도 쉴틈이 없는 스케줄 가운데 최선을 다하는 생활이였다. 공적인 업무 이외에 잠간의 시간이라도 나면 교회에서 개인기도로 그 시간을 채웠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음에 관한 한 자신을 잃어버린 채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 만을 따라 행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렸던 사람이였다.


기독교 연맹 위원장 사건과 진상

해방이후 북한 땅에는 김일성이 정권을 장악하고 철권통치를 시작하고 있었는데 당시 수 많은 기독교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강양욱이 주축이 되어 기독교 연맹이란 유명무실한 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임의대로 기독교 연맹위원장에 김익두 목사를 세우고 이를 남북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마치 김익두 목사가 김일성정권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처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사건이다. 그러나 사실 김익두 목사는 기독교 연맹이 무슨 단체인지 조차 알지 못했고 서명 날인 한 장 한일이 없었으므로 당시에 일부 사람들에 의해 그가 김일성정권의 꼭두각시처럼 알려진 것은 그 진상을 잘 알지 못하는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 날조 된 사건으로 말미암아 김익두 목사는 그의 명예에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신천서부교회에서 강양욱이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설교 중에 “우리 정부는 김익두 목사님을 매우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김익두 목사님을 우리 기독교 연맹의 위원장으로 모시기로 한 것입니다. ” 그는 그의 설교 중에 아닌 밤 중에 홍두깨 내밀 듯이 김익두 목사를 기독교연맹 위원장으로 모시기로 했다는 선언을 했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수 많은 성도들이 영문을 몰라 옆사람의 얼굴을 마주보며 어리 둥절했다. 사전에 단 한마디도 이런 말을 들은 일이 없었기에 모두가 의아해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양욱은 회중들의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또한 우리 정부는 김익두 목사님을 중앙 대의원(국회의원)에 임명하여 나라를 위해 수고 하시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선언은 전혀 뜻밖의 일이였다. 김익두 묵사의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의 어느 누구도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던 일이였다. 이는 강양욱이 의도적으로 폭탄 선언을 해버리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위한 책략이였다. 결국 이 사건은 강양욱이 자기 임의 대로 김익두 목사가 기독교 연명위원장이며 북조선의 중앙대의원이다! 하고 일방적으로 선언해버린 사건이였다. 강양욱은 설교를 마치고 묻는 김익두 목사에게 말한디 하지 않고 강양욱은 얼렁뚱땅 바쁘다는 핑계로 부리나케 가방을 챙겨들고 나가버렸다. 그러나 이후 북한 전역은 물론이고 대남방송을 통해서도 김익두 목사가 기독교연맹위원장이며 북한의 중앙대의원이라고 대대적인 선전을 시작했던 것이다.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고 강연회때마다 선전 자료를 삼아 떠들고 다녔다. 이런 정치적인 음모는 공산당이 원래 즐겨 쓰는 비열한 수법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이를 해명하기 위한 어떤 방법도 강구할 수 가 없었다. 그들의 정권하에서 신문에 해명광고를 낼 수도 없고 더욱 방송을 통해 진상을 통해 밝힌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김익두 목사는 “내가 아니면 그만이지 강양욱이 저 혼자 떠들고 다닌 것을 구태어 변명할 필요가 있나? 사필귀정(事必歸正)이야!‘ 하면서 누가 뭐라든 전혀 이 문제를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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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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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keyyoung | 작성시간 15.07.16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종려나무 | 작성시간 15.07.18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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