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구원받게 되는 것인가? 다음에 소개하는 예화를 통하여 참된 구원의 경험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자.
한번은 중국에 갔을 때 어느 호텔에 일주일을 머물렀다. 칠층에 묵었는데 그다지 좋은 호텔이 아니라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책이 잔뜩 든 무거운 가방을 들고 하루에도 서너번씩 오르락 내리락 했는데, 한번만 올라갔다 내려와도 땀이 쭉 빠졌다. 이런 식으로 일주일을 살고 나니 딱 죽을 지경이었다. 그 다음 일주일이 지나서 이번에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호텔로 갔다. 일층에서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칠층까지 단번에 올라간다. 아, 얼마나 좋고 감사한지. 절로 감사가 나왔다. 칠층까지 걸어서 올라가는 고역을 치루어 보았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다.
내 힘으로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고 애써도 율법은 지켜지지 않는다. 오히려 항상 신경이 거기에만 쏠려 있기 때문에 남들이 율법을 지키나 안 지키나 하고 주위를 살필 뿐이다. 그래서 주위에 나보다 좀 못나고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험담하고 비판하고 정죄한다. 성일을 지키려고 교회에 와도 내 맘에 안 드는 사람을 보면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율법을 지키기는 커녕 율법의 정신에서 멀어도 한참 멀다. 이런 자신을 보니 한심해서 눈물만 날 뿐이다. 이런 경험을 해 본 자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죄의 본성을 가진 나를 내 마음의 중심에 있는 단순하고도 순수한 믿음을 보시고 나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2:16.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19절. 율법을 지키려고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자꾸 실패하고 넘어짐으로서 율법에 대해서 죽었던 사람이 이제는 그 방향을 바꿔서 예수께로 나아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고 한다는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죄된 본성을 가진 죄인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러므로 율법의 근본이시며, 그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생애를 사셨던, 의로우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 속에 모셔야 한다. 바로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사는 실제 생활이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사는 생애 자체이기 때문에 믿음은 율법을 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3:31. 우리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율법을 폐할 수는 없다. 믿음으로도 폐할 수 없으며 사랑으로도 폐할 수 없다.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이므로 하나님 그분과 마찬가지로 불변하다. 그러므로 성서적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율법을 폐지시키고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 속에 받아들임으로서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내 방식으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애쓰던 것을 이제는 그만 두고 하나님의 방식, 즉 믿음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이다. (송병천 목사)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구원받게 되는 것인가? 다음에 소개하는 예화를 통하여 참된 구원의 경험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자.
한번은 중국에 갔을 때 어느 호텔에 일주일을 머물렀다. 칠층에 묵었는데 그다지 좋은 호텔이 아니라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책이 잔뜩 든 무거운 가방을 들고 하루에도 서너번씩 오르락 내리락 했는데, 한번만 올라갔다 내려와도 땀이 쭉 빠졌다. 이런 식으로 일주일을 살고 나니 딱 죽을 지경이었다. 그 다음 일주일이 지나서 이번에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호텔로 갔다. 일층에서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칠층까지 단번에 올라간다. 아, 얼마나 좋고 감사한지. 절로 감사가 나왔다. 칠층까지 걸어서 올라가는 고역을 치루어 보았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다.
내 힘으로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고 애써도 율법은 지켜지지 않는다. 오히려 항상 신경이 거기에만 쏠려 있기 때문에 남들이 율법을 지키나 안 지키나 하고 주위를 살필 뿐이다. 그래서 주위에 나보다 좀 못나고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험담하고 비판하고 정죄한다. 성일을 지키려고 교회에 와도 내 맘에 안 드는 사람을 보면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율법을 지키기는 커녕 율법의 정신에서 멀어도 한참 멀다. 이런 자신을 보니 한심해서 눈물만 날 뿐이다. 이런 경험을 해 본 자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죄의 본성을 가진 나를 내 마음의 중심에 있는 단순하고도 순수한 믿음을 보시고 나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2:16.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19절. 율법을 지키려고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자꾸 실패하고 넘어짐으로서 율법에 대해서 죽었던 사람이 이제는 그 방향을 바꿔서 예수께로 나아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고 한다는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죄된 본성을 가진 죄인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러므로 율법의 근본이시며, 그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생애를 사셨던, 의로우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 속에 모셔야 한다. 바로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사는 실제 생활이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사는 생애 자체이기 때문에 믿음은 율법을 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3:31. 우리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율법을 폐할 수는 없다. 믿음으로도 폐할 수 없으며 사랑으로도 폐할 수 없다.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이므로 하나님 그분과 마찬가지로 불변하다. 그러므로 성서적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율법을 폐지시키고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 속에 받아들임으로서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내 방식으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애쓰던 것을 이제는 그만 두고 하나님의 방식, 즉 믿음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이다. (송병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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