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 손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눅 14:11) 엔두루 머레이 著 / 김희보 譯 총신대학교 출판부 HUMILITY Dr. Andrew Murray Translated by REV. KIM HEE BO Lord Jesus! May our Holiness be perfect Humility! Let Thy perfect Humility be our Holiness! "아! 더 비어지고 더 낮아지게 하소서! 우러러보는 자 없고 아는 자 없는 비천한 인간이 되어도, 오직 그리스도, 그리스도만으로 채워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그릇이 되게 하소서!“
역자 서문 겸손! 이것은 진실로 기독교의 최고(最高) 최귀(最貴)의 도덕이다. 흔히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란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사랑은 겸손을 뿌리로 하고 피어난 꽃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 뿌리가 마를 때면 그 꽃은 자연히 시들고 말 것이다. 저자는 예수의 구속의 비결도 결국은 겸손이라고 했다. 그는 겸손을 하나의 도덕으로만 간단히 본 것이 아니라, 진실로 기독교의 핵심 진리요, 구속의 원리라고 했다. 그의 겸손에 대한 깊은 명상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벌써 1년 남짓 “승리의 생활”에 연재되었던 것을 독자들의 요구에 응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하게 된 것이다. 저자 「머레이」박사(1828-1917)는 하나님께서 지상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라고 하여 조금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는 본래 스코틀랜드 사람으로 남 아프리카에서 출생했다. 스코틀랜드의 아벨딘 대학을 졸업하고 화란에 가서 신학을 공부했다. 때는 1838~40년대였다. 이 때는 바로 구미각처에 놀라운 부흥이 있었고 새로운 영적 각성이 있었던 때였다. 이 때에 미국에서는 「피니」선생을 중심으로 큰 부흥이 있었고, 구라파에서는 장로교를 중심으로 큰 부흥이 있었다. 「머레이」박사의 그 젊은 가슴은 이 땡레 부흥의 불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신학을 마친 후 화란개혁교회의 목사로서 목회생활에 열중하면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경건한 성자적 생활과 깊은 명상의 생활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에게 감화를 주고 있다. 그의 글의 특징은 평범한 진리를 깊이 묵상한데 있다. 이 책을 읽는 분은 알 것이나 그의 사상은 깊다. 그러므로 이 책을 펴는 여러분도 고요한 곳에서 깊은 묵상을 같이하며 읽으시기를 바란다. 끝으로 이 역서의 어떤 부분은 원문의 문장을 치중하는 것보다도 저자가 나타내려 하는 그 뜻을 정확히 드러내려는데 치중했다. 이 책이 역자 자신에게 큰 은혜가 되었던 것과 같이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도 은혜가 있기를 삼가 바라며 앞으로도 「머레이」의 그 경건한 글들이 우리 교계에 많이 소개되고 읽혀지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주후 1955년 7월 15일 김 희 보 새로운 재판을 내면서 이 작은 역서가 1977년 초판을 낸 후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얻어 해를 달리하면서 벌써 10여만부가 출판되었다. 역자로서는 뜻밖의 일이다. 이 작은 책은 누구보다도 먼저 나의 애독서이다. 나는 나의 청년 시대에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토마스 아켐피스의 책을 애독했지만 언젠지 모르지만 그 책은 나에게서 떠나 버리고 「겸손」이라는 이 책이 그 자리를 대신 메꾸었다. 나는 수시로 나의 마음의 피로를 느낄 때에는 이 책을 펴놓고 읽는다. 그 때마다 새로운 은혜를 입는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권하고 싶은 책이다. 겸손. 이것은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아름다운 덕이다. 겸손에 힘쓰는 것은 곧 그대로 그리스도를 배우는 일이다. 역자는 이제, 이 작은 책이 여러 믿음의 형제들에게 계속 사랑을 받으며 읽혀지는 좋은 벗이 되어지기를 삼가 바란다. 1996년 늦가을 역자 김 희보 머리말 우리가 겸손해야 할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우리는 피조물인 때문이요, 둘째는 죄인인 때문이요, 셋째는 성도이기 때문이다. 이하의 본문에서 나는 , 한 두 가지의 이유로써, 거의 편중적으로, 우리들은 피조물이니깐 겸손해야 한다는 이론을 강조했다. 금일의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죄와 겸손과의 관계를 치중해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내가 믿기로는 충만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들 중의 이면(즉 피조물로서의 겸손)을 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예수의 겸손이 우리의 본이라면, 우리는 먼저 예수의 겸손이 그 위에 선 바 원리(原理)를 알아야만, 그의 본을 따를 수 있을 것이며, 또 우리도 그와 같이 설 수 있는 공통의 기반(基盤)을 찾게 될 것이며, 우리가 그를 닮을 수 있는 근거를 얻게 될 것읻다. 우리가 하나님 앞과 사람의 앞에서 참으로 겸손하게 되기를 원하며, 또 겸손이 우리의 즐거움이 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겸손이란 죄로 인한 수치의 표적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죄와는 상관없이, 바로 예수 자신과 하늘의 옷입혀지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종의 형체를 입음으로써 영광을 취하신 예수께서는 친히 가르치시기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처음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될찌니라”하셨는데 이같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백히 가르치신 복된 사실은, 모든 사람의 종이 죄어 저들을 돕는 자가 되는 것보다 더 거룩하고 신령한 일은 달리 없다는 것이다. 자기의 본분을 잘 알고 있는 진실한 종은, 그의 주인이나 객들의 수종을 드는 일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는 법이다. 겸손은 회오(悔悟)같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심오한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이 곧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이 생명에 참예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이 겸손이야말로 얼마나 고귀한 일이며, 또 모든 사람의 종이 됨으로써 이것을 실천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생의 최고의 과업(課業)이라는 사실을 깨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내 자신의 시앙생활을 회고해 보거나, 또는 세계의 그리스도의 교회 전반의 형편을 살펴 볼 때, 예수의 제자로서 가져야할 두드러진 특징으로서의 이 겸손을 추구하는 노력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느끼게 한다. 교역(敎役)생활에 있어서나, 사생활에 있어서나,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또는 특별한 신자들의 모임에서나, 혹은 또 그리스도를 위한 사업의 계획과 추진 과정에 있어서까지라도, 겸손을 가장 으뜸가는 덕성(德性)으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흔적이 얼마나 많으며, 또 은혜가 자라는 유일한 뿌리로서의 겸손, 예수와 친교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아니할 유일한 조건으로서의 겸손의 가치를 몰각(沒却)한 형편들이 얼마나 현저한가! 높은 성결을 추구하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 말과 비등(比等)한 겸손이 없더라는 비난은, 설사 그 비난의 진실성에 의심의 여지가 있다손 치더라도 뜻 있는 그리스도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경종(警鐘)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어떠한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온유하고 겸비한 하나님의 어린 양을 따른다는 표식을 우리의 겸손으로서 증명해 부여야 할 것이다. 엔드루 머레이 차 례 역자 서문 머리말 제 1 장 피조물의 영광인 겸손 제 2 장 속죄의 비결인 겸손 제 3 장 예수의 생활에 나타난 겸손 제 4 장 예수의 교훈에서 보는 겸손 제 5 장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본 겸손 제 6 장 일상생활에서의 겸손 제 7 장 겸손과 성결 제 8 장 겸손과 죄 제 9 장 겸손과 신앙 제10 장 겸손과 자아에 대한 죽음 제11 장 겸손과 행복 제12 장 겸손과 영화(榮華) 부기(附記) 겸손을 위한 기도
제 1 장 피조물의 영광인 겸손 그들은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 존귀와 능력을 받으신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계 4:11)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그 목적은 오직 하나이었는데, 그것은 즉 피조물(被造物)로 하여금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동참케 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과 영광을 그들을 통하여 나타내려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 또는 피조물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셨으며, 또 피조물과의 교통을 통하여서 자신의 지선(至善), 지영(至榮)하심을 나타내려하셨다. 인간에게 선(善)과 영광이 있다면 그것은 결단코 인간 자신에게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셔서 일하고 계시는 분으로 그의 능하신 말씀으로 만물을 다스리시고, 또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이 세상 피조물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다면 피조물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단한 절대적인 완전한 의존 관계에 서 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그 능력의 말씀으로써 순간마다 우리를 붙들어야 되는 것이다. 우리 피조물은 존재의 근원과 시작을 돌이켜 보아야 할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다시 말하면 인간에 있어서도, 그의 고결한 생각과 높은 덕행과 아울러 참 행복은, 과거에도 그랬거니와 현재와 영원한 미래에 있어서도 여전히 겸손히 비어진 마음에만 채워지는 것이다. 이 빈 마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임재하시어서 능력을 나타내시고 그의 선하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은 처음 한 번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쉬임없는 능력 있는 활동으로 말미암아 순간 순간 계속하여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창조물들의 이 같은 본질로 보아서도 겸손은(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마음이다) 인생의 첫째ㅔ 되는 의무요, 또 가장 고상한 덕행이요, 동시에 모든 도덕의 기초인 것이다. 교만해지거나 혹은 이 겸손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이것은 모든 죄악의 근원이 된다. 천사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드디어 광명한 천국에서 흑암의 세계로 쫓겨나게 된 것은 스스로 교만한 태도로 자기 자신을 돌아 본 때문이었다. 우리의 첫 조상들이 그들의 높은 자리에서부터 오늘날 우리가 지금 빠져 있는 바와 같은 이러한 처참한 경지에로 떨어지게 된 것도, 역시 그 간교한 뱀이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 즉 다시 말하면 그의 교만이라는 독약을 우리들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넣어 준 때문인 것이다. 하늘 나라나 이 세상 나라를 막론하고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교만은 곧 지옥으로 인도하는 문이요, 지옥의 시작이며 동시에 저주(咀呪)이다. (附記① 참조)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맺어야 할 근본적인 유일한 관계는 잃어버린 겸손을 도로 찾는 것 이외에도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오심도 이 땅에서 겸손을 회복시키시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겸손을 가지게 하는 동시에 그 겸손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함이었다. 천국에 계셨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낮추시사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보는 그 겸손은 그리스도가 천국에서 아버지와 같이 계실 때에도 그를 주장하였던 것이었다. 그 겸손은 그로 하여금 천국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게 했고, 또 그는 그 겸손을 천국에서부터 이 땅에 옮겨 오셨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 땅위에서 그는 자기를 낮추시사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것이었다. 그의 겸손은 그의 죽으심에 대하여 그 가치를 발휘하게 했고 또한 우리의 구속을 성취케 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구원이란 곧 그의 사심과 죽으심, 그의 성품과 정신 및 그가 가졌던 겸손 이외에 다른 무엇은 아니었다. 이 겸손은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기본적인 태도였으며, 동시에 그의 구속사업의 기초였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의 지극히 겸손한 생애를 가지시고 인간의 운명을 대신 지고 구속사업을 성취하신 것이었다. 그의 겸손은 우리의 구원이 되고, 그의 구원은 우리의 겸손이 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생활은 죄에서 속량을 받고 또한 그들의 옛사람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새 사람이 되는 인표를 맞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저들의 모든 관계는 오직 마음에 흘러넘치는 겸손으로 인침을 받아야 한다. 만일에 이 겸손이 없다면 하나님을 모실 수도 없고, 사랑도, 기쁨도, 힘도 있을 수 없다. 겸손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뿌리박을 수 있는 유일한 심전(心田)이다. 겸손의 결핍, 이것으로 모든 불만과 실패의 근원을 충분히 설명할 수가 있다. 겸손은 다른 여러 자기의 은혜나 미덕(美德)들 중의 하나라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 은혜와 미덕의 뿌리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겸손만이 홀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올바른 태도요, 또한 겸손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행사를 우리에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깊이 통찰하면 할수록, 또 절대적인 자제(自制)의 필요성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는 좀 더 순종하게 될 것이며, 또 언제든지 순종하게 될 것이다. 교회에서 겸손을 외치는 호소는 심히 적은데 그 이유는 겸손의 본질과 그 중요성을 이해하는 바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바친다거나 받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지 전능 하심을 진실로 느끼게 될 때 받는 충격은, 오직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전무(全無)에 대한 의식일 뿐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러한 의식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피조물된 우리가 이제 이같은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것임을 인식하고, 우리의 뜻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신(神)이 활동할 수 있고, 그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는 도구와 그릇이 되도록 할 때에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겸손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우리 인간의 지위를 옳게 똑바로 인식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임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성결(聖潔)을 추구하고 가르치는 진실한 신자들의 생활에 있어서 겸손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덕(德)의 최고의 표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때때로 말하고 있다. 생각건대 그 이유의 하나는 교회가 보여주고 가르치는 모범과 교훈에 있어서 응당 가장 강조되어야 할 겸손의 중요성이 그렇게 되어 있지 못한 때문이 아닐까? 또는 피조물이 하나님과 더불어 가져야 할 제일 중요한 관계가 곧 겸손이고, 또 그가 축복 받는 비결이 여기에 있으며, 천사들은 그렇게 겸허하게 만들고, 예수를 그처럼 낮추셨고, 지극히 거룩한 하늘의 성도를 그렇게 겸허하게 만들어 하나님으로 하여금 전체가 되도록 맡겨 버린 것이 겸손이라는 이 진리를 무시했기 때문이 아닐까? 많은 신자들은 그들의 체험이 다음과 같은 점에 있어서 나의 체험과 똑같은 점을 고백하리라고 확실히 알고 있다. 즉 나는 오랫동안 주님을 아노라고 해왔으나, 주님의 참 제자의 특성은 마음의 온유와 겸손에 있다는 것을 말랐고, 또한 겸손이란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간구와 기도와 신앙과 훈련의 목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었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할 때에 알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여러 차례 거듭하여 명백히 그 제자들에게 이 겸손에 대하여 교훈 하셨던 것과, 또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교훈을 참으로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제 조용히 나를 돌아보아 교만처럼 뿌리 깊이 우리의 마음속에 침투되어 있는 것은 없고, 또한 교만처럼 곤란하고 위험한 것은 없다는 점을 먼저 인정하자! 우리가 우리의 심령에 겸손이 얼마나 부족되어 있는지, 우리는 또한 얼마나 무능력한 것들인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우러러보는 일 이외에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느끼자. 우리의 심령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의 지극하신 겸손을 찬양하는 마음으로 충만해 질 때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우자! 우리는 이제 우리의 교만을 통회할 때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우리의 심령에 오셔서 우리 안에 놀아운 생명과 은혜를 나누어주시리라는 것을 믿자!
제 2 장 속죄의 비결인 겸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빌립보 2:5-8) 어떠한 나무도 그 뿌리가 가지고 있는 그 생명의 본질 그대로 자라나지 않을 수 없다. 그 나무가 존재해 있는 동안 그 나무는 자기를 이 세상에 나게 했던 그 씨 속에 들어 있는 그 생명 그대로만 살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계의 진리는 우리의 조상인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이 진리의 원리를 잘 이해하는 것은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그 구속이 과연 얼마나 필요하였던가를 알고, 또 구속의 본질이 어떠한 것인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속죄의 필요성 교만하기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던 뱀, 그의 전 성품이 꼭 악마와 같이 교만하였던 그 뱀이 [하와]의 귓속에다 유혹의 말을 속삭였을 그 때, 그 한마디의 말에는 바로 지옥의 독약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하와]가 그 말을 듣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겠다는 욕심이 그의 마음에 생기게 됐을 때, 그만 그 독약은 그의 심령과 피와 생명에 흘러 들어와 그 복된 겸손과 또 하나님께만 의존하던 마음, 이 마음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행복이 될 뻔하였건만 그만 그것을 영원히 파괴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드디어 [하와]의 생명과 또 그 [하와]에서부터 이어받은, 즉 다시 말하면 그에게서부터 돋아난 인류들의 생명은 그 행복 대신에 저 무서운 죄들과 모든 저주와 사단의 교만의 독약으로써 바로 그 뿌리부터가 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비참한 현실과 또 모든 전쟁과 민족간에 피흘리는 일과 모든 이기심과 고통과 모든 야심과 질투와 아픈 마음과 고달픈 생활은 우리가 매일 만나는 모든 불행들과 더불어 그 근원이 저 저주받은 악마가 불어넣어 준 교만, 즉 자신의 교만과 또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교만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인간의 구속이 필요하게 된 것은 교만 때문이다. 우리의 속량이 필요한 원인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교만 때문이다. 우리의 구속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게 되는 것은, 우리들의 내심 깊이 침투하여 들어온 그 무서운 세력의 본질을 이해하는데서만 가능한 것이다. 뿌리의 본질대로 나무는 자랄 수 밖에 없다. 사탄이 지옥에서부터 이끌어내어, 인간의 생명 속에 던져준 그 무서운 교만의 세력은 실로 놀랍게도 이 세상 도처에서 매일 매시간 강하게 움직이며 활동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다. 사람들은 그 힘을 두려워하며 싸우다가 그것을 피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력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또 그 힘이 놀라운 위력이 어디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무서운 세력은 어디에서 또는 어떠한 방법으로 타파되어야 할 것인지 이에 대해서도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음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교만은 그의 뿌리와 힘을 우리의 안과 밖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력 속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이 교만이 우리 자신에게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여 통회하고 탄식함이 필요한 그만큼, 또 그 교만은 그 근원에 있어서부터가 사탄에게서 시작된 것임을 아는 것이 또한 필요하다. 만일에 우리가 이 뿌리 깊은 교만을 계속하여 이겨낼 수가 없고, 또 그것을 청산해 버릴 수가 없다는 절망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면, 우리는 곧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초자연적인 힘,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어린 양의 구속의 필요를 느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이기적 근성과 또 교만에 대하여 싸우는 절망적인 투쟁은, 이제 우리가 우리의 배후에 있는 흑암의 세력을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더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극도의 절망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외부의 힘과, 또 어떤 외부로부터 오는 생명을 갈망하고 받아들이는데 오히려 더 유익할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이러한 갈급한 심정만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 사탄과 또 그의 교만을 물리치기 위하여 하늘에서부터 이 땅에 끌어온 그 겸손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무는 그 뿌리의 본질대로 자랄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우리 안에 뿌리 박힌 죄의 세력을 알기 위해서 첫 [아담]과 그의 타락을 돌이켜 보는 것이 필요하지마는 또한 우리는 둘째 [아담]과, 그가 또 우리의 심령에 그의 능력, 즉 다시 말하면 살아 움직이는 겸손의 영을 우리 마음에 주어 교만을 이기에 하는, 그 그리스도의 능력을 잘 아는 것이 필요하다. 악마가 뿌린 교만의 세력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강하게 지배한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준 겸손의 힘은 더욱 우리를 강하게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그리스도로부터 받았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아담]에게서부터 생명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 보다도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생명은 실로 더 큰 것임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자라나야 한다.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2:19)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성품에 들어온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가 그 위에 서고 자라나야 할 뿌리인 것이다. 그 생명은 강한 세력으로 그 전에도 역사했고, 예수님의 부활을 가능케도 했으며, 오늘날에도 우리의 심령 속에서도 역사하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그 생명을 연구하고 알고 의지하는 것이 제일 필요한 일이다. 그 생명은 지금에 와서는 우리의 것이 되었으며, 또 우리가 그 생명을 소유함으로서 우리의 전체의 생활은 그 생명의 지배를 받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성, 즉 다시 말하면 우리의 구속주로서의 본질을 이룬 그의 특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올바른 사상을 가져야 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일이다. 그러면 구속주 그리스도의 특성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오직 하나 밖에 없는데, 그것은 곧 그의 겸손이다. 그의 성육신이란 결국 자기를 낮추어 사람이 되었다는 그의 성스러운 겸손 이외에 또 무엇이겠는가? 종의 형상을 입고 오신 그의 일생은 결국 겸손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결국 겸손이 아니고 다른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그는 자기를 낮추사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이었다. 그의 승천이며 또 보좌의 하나님께로부터 찬란한 면류관을 받게 한 그의 영광이야말로 그의 겸손 이외에 다른 무엇이 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천국에 있었을 때나 또는 그의 죽으심에 있어서, 도는 그의 보좌에 앉으심에 있어서, 그 어느 때를 막론하고 모두가 다 겸손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스도 자체는 인간의 형체를 입은 하나님의 겸손의 화신(化身)이다. 영원한 [사랑]이신 그가 자기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들을 봉사하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겸손과 온유로 스스로 옷 입은 것이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겸손은 예수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의 은인이요, 구주요, 종이 되게 하셨고, 예수는 또한 필연적으로 겸손의 성육신으로 나타나셨던 것이다. 겸손한 하나님의 어린 양인 그는 지금 역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만일에 하나님의 어린 양이 나무의 뿌리라고 한다면 그의 가진 성품은 그 뿌리에서 돋아난 모든 가지와 잎과 열매 속에 나타나야 할 것이다. 만약 겸손이 예수의 생애에 있어서 첫째 되는 것이요, 또 그의 모든 아름다운 성품과 덕행을 종합하여 겸손이라고 하고, 또 그의 구속의 비밀이 겸손이라고 한다면, 그의 가지인 우리의 영적 생명의 건강과 힘은 겸손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겸손이야말로 우리가 찬미해야 할 예수의 첫째 되는 성품이요, 또 우리가 그에게 첫 번으로 간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이 겸손만은 차지해야 할 유일한 것임을 확실히 믿는데서 우리의 영적 생명은 힘을 얻고 건강함을 입게 될 것이 당연하다. (附記② 참조) 그리스도인의 전 생활의 기초가 되는, 바로 이 뿌리를 망각해 버릴 때 그 신앙 생활이 매우 연약해지고 열매 없이 되는 것은 구태여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이 겸손을 체득코자 애쓰지는 않으면서 오히려 구원의 기쁨만을 느끼고자 한다. 그러나 겸손 없이는 구원의 기쁨을 느낄 수 없다. 자아(自我)를 완전히 죽여 버리는 겸손! 예수께서 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기 위하여 인간적인 영광을 모두 단념해 버리는 겸손! 하나님만이 전부요, 주님만이 영광되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은 전적으로 티끌만도 못한 것으로 여기는 그 겸손! 이같은 겸손을 우리들의 가장 큰 기쁨보다도 더 추구하며, 또 어떠한 희생을 내어서라고 이것을 맞아들이고자 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종교가 세계를 정복코자 하는 소망은 전혀 가질 수 없다. 나는 독자 여러분에게 이 겸손을 아무리 간절히 권하여도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의 이름으로 성도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중에서 참으로 겸손한 하나님의 어린 양의 그 정신을 가진 자를 과연 우리는 얼마나 찾아 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생각해 보자.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요구와 감정과 그 연약함에 대하여 그 얼마나 무관심하며 피차간에 사랑이 결핍되어 있는가를! 종종 솔직하고 정직하다는 구실 밑에 변명되고 있는 모든 날카로운 빠른 비판과 폄론(貶論), 또는 모든 감정과 분노의 표시와 남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모든 생각, 이것들은 모두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교만에서 오는 것들이다. 우리가 이제 아주 심한 교만에 대하여서는 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눈을 뜨고 본다고 하면 그 얼마나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의 사회에 침투되어 있는가를 도처에서 볼 것이다. 소위 성도들이 모인 자리라고 해도 그 예외는 되지 못한다. 만일에 신자들 자신이, 혹은 그들의 주위의 모든 단체가, 혹은 우리의 사회가 주님의 겸손으로 진정 쉬임없이 인도함을 받는다면,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를 우리는 스스로 자문해 보자. 또 만일에 우리의 전 심령이 밤낮으로 예수님의 겸손이 우리 속에, 그리고 우리 주위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애원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상상해 보자.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생애에 나타난 그 겸손이 우리의 심령에는 얼마나 부족되어 있는가를 깊이 묵묵히 반성해 볼 때에 진실로 지금까지 어떠한 분이시었는지 또 그의 구속이 참 무엇이었는지를 우리는 참되게 알지 못하였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성도 여러분! 예수의 겸손을 배우자! 이 겸손이야말로 그의 구속의 비밀이요, 숨은 뿌리였던 것이다. 하루 하루 이 겸손 속에 깊이 잠기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셨고, 또 그의 성스러운 겸손까지도 여러분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이 그리스도가 이제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활동하실 것이며, 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여러분을 개조하실 것임을 온 마음과 뜻을 다해서 의심 없이 믿으라.
제 3 장 예수의 생활에 나타난 겸손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눅 22:27)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특히 주님의 내면생활을 엿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종종 아버지와 자기와의 관계에 대하여, 또 자기를 이끄는 그 원동력에 대하여, 또는 자기가 힘입어 행사하는 그 권능에 대한 영적자각(靈的自覺)에 대하여서 말씀하셨던 것이었다. 거기에서는 [겸손]이라는 낱말은 찾아볼 수 없으나, 우리는 성경의 어느 다른 곳에서보다도 주님의 겸손이란 어떤 것이었던가를 이 요한복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이 은혜는 다른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이 전부가 되도록 피조물이 승낙을 하는 일이며, 하나님만이 역사 하시도록 자신을 순복시키는 덕이라는 것을 말한바 있다. 요한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는 땅에 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서는 전적으로 종속적(從屬的)인 입장을 취했고, 오직 하나님께만 존귀와 영광을 돌렸던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자주 가르쳤던 교훈, 즉 “스스로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요”라고 하셨던 그 말씀이 진리였음을 그는 자기의 행동으로써 보여 주셨던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특히 자기와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하여 하신 말씀들에 우리가 귀를 기울인다면 주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말씀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셨던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와 자기와의 관계를 말할 때에 전적으로 자기를 부인해 버렸던 것도, 바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자기와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신 그 정신인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 5:19)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니” (요 5:41)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6:38)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요7:16)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요7:28)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요8:28)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요8:42)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요8:50)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요14:10)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요14:24) 위의 모든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역사의 가장 깊은 뿌리들이 무엇이었나를 우리에게 공개해 준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위대하신 능력의 구속의 역사를 어떻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실 수 있었던가를 위의 성구들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이 성구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했음을 보여준다. 위의 성구들은 이미 구속을 성취하셨고 지금도 교통을 계속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그 본 성품과 생황의 요소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그것은 곧 하나님만이 전부이기 위하여 그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역사 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의사와 능력은 물론 자기 자신을 온전히 버렸던 것이다. 그 자신의 능력, 그 자신의 뜻, 그 자신의 영광, 그의 모든 역사와 가르침과 더불러 그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그는 거듭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내가 아니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일하시기 위하여 나 자신을 아버지께 바쳤으니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아버지만이 전부시라고 하셨다. 이러한 전적인 자기 부인과 절대적인 복종 및 아버지에게만 의지한 그의 생활이 온전한 평안과 기쁨의 근원임을 그리스도는 아셨던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침으로 인하여 잃은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셨고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하셨다. 마침내 그를 높여 그의 우편에 앉게 하셨다. 이같이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셨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앞에 항상 계셨기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을 또한 사람 앞에서도 낮출 수 있었고, 또 모든 사람의 종이 될 수 있었음을 발견했었던 것이다. 그의 겸손이란 다른 것이 어니라 오직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이었고, 또 사람들이 자기에게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또 자기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든지 간에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즐겨하시는 그것을 하나님이 친히 자기 안에서 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셨던 그것이 곧 그의 겸손인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그처럼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곧 이같은 마음과 이러한 정신과 성품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받게 된다는 것은 곧 이러한 성품을 우리가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함이다. 이 겸손이란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한 그 자기부인(自己否認)을 이름이요, 또한 이 자아(自我)란 그 자체는 하나님을 모셔야만 하는 하나의 빈 전(殿)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을 이름이며, 또한 이 자아가 주장하는 모든 소욕과 행위는 하나님만이 전부가 되기 위하여 잠시잠간이라도 허용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이름이니 이 모든 것이 곧 겸손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겸손의 본질과 그 성격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우리들의 겸손이 그렇게도 형식적이요, 또 보잘 것 없는 것은 이 진정한 겸손의 본질과 그 성격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 또 그것을 알아보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이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하였는지를 배워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겸손이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이며, 또 그 힘은 어디에서 나는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이는 하나님이신 것을 확실히 아는 그 지식과 또 우리들 자신은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니요, 또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우리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께만 의지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그 지식에서 진정한 겸손과 그 힘이 생기는 것이다. 이 겸손의 생활이란 그리스도께서 이미 실지로 보여준 생활이요, 또한 죄와 혈육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하나님께 향한 진정한 생활을 이름이다. 만일에 이 생활이 우리에게 너무도 그 표준이 높아 우리에게는 감히 실천할 수 없는 것이라고 느껴진다면, 우리는 더욱 더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자 애써야 될 것이다. 이같이 온유하고 겸손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은 오직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심으로써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겸손의 생활을 진실로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순간 순간 쉬지 않고 만물 속에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감추인 섭리(攝理)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우주의 모든 자연과 생물(生物) 내지(乃至)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이 감추인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외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이 모든 자연과 능력과 그 지선(至善)하심을 나타낼 수 있는 하나의 그릇이요, 관문(關門)에 불과한 것임을 증거 해야 한다. 모든 덕과 은혜의 근원, 또 모드 신앙과 진정한 예배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곧,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스스로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섬기며, 겸손히 참으로 겸손히 머리를 숙이는데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몸소 자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사랑하시는 인간들을 위하여 온 하나님의 종이라고 느끼셨다. 이렇게 느낀 필연적 결과로서 그는 스스로 인간들의 종이 되었고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실현(實現)케 했다. 그는 결단코 한 순간이라도 자기의 명예를 구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의 권세를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의 전 정신은 오직 하나님만을 나타나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하나님께 바친 생활을 실천하려는 정신뿐이었다. 형제여! 당신은 겸손으로 옷 입었는가? 그대의 일상생활을 살펴보라! 그대의 친구들에게 물어보라! 예수께 물어보라! 여러분이 알지 못했던 그 성스러운 겸손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알려진 것을 하나님께 찬양하라! 틀림없이 여러분은 아직까지 맛보지 못했던 하늘의 축복을 그 겸손을 통해서 체험하게 될 것이다.
제 4 장 예수의 교훈에서 보는 겸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마11:29)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20:24) 예수께서는 자기의 모든 심정을 우리에게 공개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과 또 그의 생활이 얼마나 겸손으로 충만 되어 있었는가를 알게 된다. 이제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우리는 그가 겸손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알 것이며,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가 겸손한 것 같이 겸손하라고 요구한 것이 과연 어느 정도이었는지를 알 것이다. 우리는 이제 마음을 가다듬어 그의 말씀을 상고하자, 나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는 이상 설명을 더 잘 할 수가 없으니 이제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겸손에 대하여 그는 얼마나 여러 번 또한 얼마나 열심히 가르치셨는가를 알아보자. 우리는 그 교훈에서 깊은 감명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감명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교훈을 통하여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1. 먼저 우리는 예수께서 공생애(公生涯)에 들어서며 첫 번으로 하신 그 말씀이 무엇이었던가를 들어보자. 그가 산 위에서 하신 설교 곧 산상보훈(山上寶訓)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3,5)라고 하셨다. 이렇게 예수께서 천국에 대하여 전파하신 바로 그 첫 교훈의 말씀은 곧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 무엇인가를 계시하여 주신 것이었다. 극히 가난한자,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임한다. 온유한 자들,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런 것도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오히려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은 겸손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겸손이야말로 금생(今生)과 내생(來生)을 통하여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다. 2.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11:29) 이 성경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자기가 선생인 것을 암시하여 주셨다. 그는 우리에게 이 말씀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다. 즉 그는 우리가 그를 선생으로 알 것과, 우리가 항상 그에게 배우고 본 받아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 온유와 겸손은 바로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목표물이었다.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완전환 마음의 쉼을 얻을 수 있다. 겸손은 진실로 구원의 요소가 된다. 3. 제자들은 서로 높아지기를 원해서, 하늘 나라에서 누가 제일 클 것인가 하는 말다툼을 했다. 저들은 스스로 이 싸움을 해결 짓지 못하고 주님께 갔다. (눅9:46, 마18:3)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 하나를 불러 저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가 높아지리라”고 하셨다. “누가 하늘 나라에서 제일 큰 자냐”하는 이것은 실로 해결 짓기 어려운 문제다. “하늘 나라에서 제일 으뜸 되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의 대답은 오직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늘 나라에서 제일 큰 영광, 하늘 나라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것,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 이것은 곧 겸손이다. 4. [세배대]의 아들들이 예수께 간구하기를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죄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할 때에 예수께서 대답한 말씀, “내 좌우 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하신 말씀을 우리는 듣고 있다. 저들은 그것을 찾거나 요구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저들의 생각은 겸손의 잔과 겸손의 세례가 되어야 할 것 뿐이다. 예수께서 또 다시 뒤이어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라 말씀하셨다. 이 예수의 겸손이야말로 천국에서 오신 그리스도의 표적이다. 그러므로 이 겸손은 하늘나라에 가서도 우리의 영광을 재는 유일한 표준이 된다. 가장 겸손한 자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자다. 천국에 있어서 가장 귀한 자리는 가장 겸손한 자에게 줄 것으로 약속되었다. 5. 높은 자리와 지위를 탐하는 [바리새]인들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말씀,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23:11)고 하신 그 말씀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러한 겸손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사다리다. 6. 예수께서 어느 날 어떤 [바리새]인의 집에서 청함을 받은 손들이 서로 상좌(上座)를 택하시는 것을 보시고 비유를 들어 “무릇 자릴르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4)고 하신 그 말씀은 문자 그대로 진리이다. 이밖에 다른 길이 없다.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만이 자기를 높이는 길이다. 7. 예수께서는 또한 [바리새]인과 세리(稅吏)에 대한 비유를 통하여서, “자기를 높이는 자마다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8:9-14)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릴지라도 먼저 하나님과 사람 앞에 깊고도 참된 겸손이 충만하지 않으면 그 예배는 무가치한 것이다. 8. 제자들의 발을 씻고 난 다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고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요13:14) 진실로 예수께서는 그 모든 계명과 그 생활 전체를 통해서 이 겸손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 근본적인 정신적 요소인가를 알리려고 애썼음을 느낄 수 있다. 9. 성만찬을 잡수실 때에도 제자들은 역시 또 누가 제일 큰 자인가 하며 서로 말다툼을 했다. (눅22:24-27)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깨우쳐 주셨다. 예수께서 몸소 걸어가신 길, 우리를 위하여 개척하신 그 길은 오직 겸손이다. 우리의 구원을 성취케 한 그 힘! 우리를 구원하신 그 힘은 오직 겸손이었다.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게 하는 그 겸손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겸손에 대한 간곡한 설교를 그리 많이 들어 볼 수 없음은 왠 일일까? 이 겸손을 실천하는 자 과연 그 얼마나 되는가! 겸손의 부족을 느끼고 고백하며 안타까워하는 자 얼마나 되는가! 예수의 겸손을 모범하여 자기의 것으로 그것을 소유하 자가 극히 적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거듭 말하려는 것은 그 겸손을 배우려고 간절히 원하고 기도하는 사람조차 볼 수 없다고 하는 것뿐이다. 심하게 말한다면 교회 내부의 성도들의 모임에 있어서도 이 겸손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할지니라” 신실한 청지기와 참된 종의 성격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즉, 주인에게 헌신하는 것과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살피며 근심하는 것과 주인의 번영(繁榮)과 존귀(尊貴)와 행복을 기뻐하는 것 - 이것들이 곧 그들의 특별한 성품이 아니겠는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 땅 위에 이러한 성품들을 가진 신실한 종들이 없지는 않다. 그들에게 있어 종이라는 이름은 둘도 없는 영광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반성해 보자! 나 자신을 이제 하나의 청지기와 종으로서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자 과연 몇이나 되는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은 곧 우리를 죄와 혈육에서 해방하는 가장 높은 자유인 것을 아는 자가 과연 얼마나 있는가? 이렇게 종이 되는 것으로서 신앙생활의 즐거움을 삼는 자 과연 그 몇이나 되는가? 예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서로 종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서로 종이 되라”는 이 그리스도의 교훈을 우리가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시 없는 큰 축복인 동시에, 죄와 이기심에서 떠나 새롭고 완전한 자유를 얻게 함을 말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로 종이 된다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 같이 생각되는데, 그것은 아직도 그 마음에 교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 오히려 피조물의 영광이요, 그리스도의 정신이며, 또한 천국의 기쁨임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이제 우리를 못살게 하고 괴롭게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라도 도와주고 섬기라는 그 교훈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일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수고를 나누고 깊은 영교(靈交)를 가진다면, 우리가 이제 너무 낮다고 해서 처하지 못할 자리는 없을 것이며, 또 아무리 머리를 굽히고 허리를 굽혀도 지나친 일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하는 일에 귀천(貴賤)이란 있을 수 없고, 아무리 천한 일이라 해도 계속치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형제여! 자매여! 이제 높고도 거룩한, 그 숭엄한 생활에 이르는 길을 배우라. 내려가라. 더욱 낮은 곳으로 내려가라! 이 길이야말로 예수께서 보여 주신 길이다. 이 길이야말로 하늘 나라에서 큰 자가 되기를 바라며, 또 그의 오른 편과 왼 편에 앉기를 원하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길이다. 그러므로 높아지기를 찾지도 말고 요구하지도 말라. 그러한 것은 다 하나님의 권한에 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기를 힘쓰며, 또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종의 자리 외에 다른 자리를 구하려 하지 말라. 종의 자리를 잡는 것이 네 유일한 목적이요 기도가 되게 하라! 하나님은 미쁘시다. 물이 가장 낮은 골을 찾아 채워지듯이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비어 있고 스스로 낮은데 처해 있는 피조물을 끊임없이 찾으신다. 그를 찾아서 그의 영광과 그의 능력을 부어 그를 놀이기도 하며 축복하기도 하신다. 자기 자신을 겸손케 하는 일, 이것은 우리의 갈급한 유일한 일이어야 하고, 겸손한 자를 높이는 일은 하나님의 항상 즐겨 하시는 일이다. 그는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지극하신 사랑으로 스스로 낮추는 자를 영원히 높이실 것이다. 흔히 우리는 이런 말을 듣는다. “겸손과 온유는 씩씩하고 담대한 사나이다운 우리의 기개(氣槪)를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아!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한다! 자신을 낮추어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의 지극한 존귀를 차지하는 길인 것임을----. 이 겸손의 정신이야말로 천국의 왕이 보여준 충성(忠誠)의 정신인 것이며, 또 그것은 사나이다운 것보다도 더 훌륭한 것, 곧 하나님다운 일인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의 겸손은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임재(臨在)하여 계시다는 표적이니 이 얼마나 큰 영광이며 즐거운 일이겠는가? 이 겸손이야말로 이 큰 즐거움에, 그 큰 영광에 다다르는 유일한 길이다. 그의 위대한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는 길이다. 온유와 겸손으로 옷 입은 예수는 지금 우리를 부르신다. [내게로 나아와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배우라]고-----. 형제여! 자매여! [겸손은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라는 생각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히 채워질 때까지 다시, 또 다시 이 글을 묵상하며 연구하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해 보여 주신 그것을 그는 반드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믿자! 그리고 또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성품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신다는 것도 믿자! 온유와 겸손으로 옷 입은 그는 그와 같이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심령에 들어오시어 계실 것이다.
제 5 장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본 겸손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눅 22:26)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그 인격과 그 교훈에 나타난 겸손은 진실로 어떠 한 것인가를 연구해 왔다. 이제 여기에서는 예수께서 친히 택하여 세우신 열 두 제자들 중에 나타난 겸손을 연구해 보기로 하자.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겸손과 우리 인간들의 겸손의 차이를 명백히 알 수 있게 되는 동시에, 또한 오순절에 이루어졌던 제자들의 그 놀라운 심령의 변화를 이해하게도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통하여서만 우리 인간들은, 사단이 우리에게 불어 넣어준 그 교만을 완전히 이기신 그리스도의 겸손의 빛나는 승리에 동참(同參)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 온 여러 성경 말씀에서 그 제자들은 겸손의 은혜가 얼마나 부족 되어 있었던가를 알 수 있었다. 그들 중에 누가 제일 높아질 것인가 하며 그들은 서로 말다툼한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세배대]의 두 아들이 그 어머니와 더불어, 모든 다른 제자들보다 뛰어 나는 첫 자리, 곧 예수님의 좌우편의 자리를 요구했다. 그들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도 누가 가장 큰 자로 헤아림을 받을 것인가 하고 서로 다투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참으로 자기를 낮춘 때가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베드로]는 “오! 주여 나는 죄인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하며 애원한 때도 있었다. 또 그들은 예수께서 파도를 꾸짖어 잔잔케 했을 때 그 앞에 엎드려 경배도 했다. 그러나 이따금 나타났던 이러한 겸손으로서는 아주 습관화된 그들의 근성(根性)인 교만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그들의 습관화된 근성이란 종종 지위(地位)와 권세에 대한 자연적이며 무의식적(無意識的)인 이기심(利己心)의 표현이었다. 제자들의 이 모든 것들을 주의 깊이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들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가장 큰 은혜인 겸손이 아직도 극히 부족하면서도 참으로 열렬하고도 활동적인 종교는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제자들에게서 이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의 열심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들은 열렬히 예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버렸다. 자기들의 선생인 예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신 것도 그들은 알았다. 그들은 예수를 믿었고, 사랑했고, 또 그의 계명도 열심히 지켰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버렸다. 비록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을 때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과 더불어 죽음까지도 같이 나눌 각오를 가지고 있었던 그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그들 자신도 알지 못했던 무서운 흑암의 권세가 깃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어두움의 권세는 그들이 이제 예수를 증거하고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증인이 되기 전에 당연히 끊어 버렸어야 할 것이었다. 이 사실은 오늘날도 역시 그렇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성령의 은혜가 충만히 드러나며, 또 많은 무리에게 은혜를 전달해 주는 그러한 목사, 교수들, 그러한 지도자, 그러한 선교사나 교사들을 우리가 찾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어떤 시험이 닥치거나, 혹은 우리가 더 가까운 교제를 하여 그들을 잘 알게 되거나 하는 때에는, 그들도 역시 겸손의 은혜가 그들의 성품화 되어 있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실로 슬픈 일이다. 겸손은 무엇보다도 으뜸 되고 또 가장 높은 은사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실로 이룩하기 가장 어려운 것 중에 하나이며 또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중의 하나이다. 이 겸손이란 우리 마음에 성령이 충만하여 우리가 우리 속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와 동행하게 될 때 비로소 권능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그 제자들을 보아서 알 수 있다. 둘째로 또 우리가 제자들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즉 모든 외부적(外部的) 교훈과 모든 인간적인 노력으로서는 교만을 물리치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품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교훈, 인간의 노력은 참으로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것임을 우리는 제자들에게서 배우게 된다.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 밑에서 훈련을 받아왔다. 그가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원하셨던 가장 큰 교훈은 곧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를 배우라” 고 하는 그것이었다. 때를 따라 예수께서 제자들과 [바리새]인들, 혹은 무리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은, 곧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은 오직 겸손이라는 것을 언제나 암시(暗示)했다. 그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언제나 겸손히 사람들 앞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도성인신(道成人身)의 가장 중요한 비밀이 무엇인가를 여러 번 저들에게 암시해 주었다. 그 비밀이란 “곧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섬기러 왔노라.” “나는 너희 중에서 섬기는 자이니라” 고 말씀 하신 그것이었다. 그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의 본을 따라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조금도 효과가 없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까지도 누가 가장 큰 자인가 하고 다툼이 일어났던 그 사실을 보라! 그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또 열심히 그의 교훈을 배우려고 애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되고 말았다. 어떠한 힘 있는, 비록 그리스도 자신의 교훈으로 사람을 가르친다고 해도 그들의 교만을 물리칠 수는 없고, 아무리 날카로운 변론을 가지고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심지어는 아무리 신실하고 열정적인 개인적 열심과 노력으로라도 교만이라는 그 악마의 뿌리를 뽑을 수는 없다. 사단이 사단을 쫓아낸다면 더 강한 사단이 또 새로이 들어가는 법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이, 즉 그의 겸손이 우리의 새 성품이 되어서 우리의 옛 성품을 부수고 힘 있게 나타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임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셋째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참 겸손이란 그 겸손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심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인간 아담으로부터 교만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곧 그리스도로부터 겸손을 받아야 한다. 교만은 우리의 본성이다. 이 교만은 무서운 힘으로 우리를 다스리고 있다. 왜? 교만은 곧 우리의 혈육 자체요 또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겸손도 그 같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만 한다. 즉 그 겸손이 우리의 본 성품이 되어야만 한다. 교만해 지는 것이 자연스럽고 쉬운 것과 같이 겸손 역시 자연스럽게 쉽게 되어야 하며, 또 그렇게 될 수 있다. “죄 많은 곳에 은혜도 풍성하다” 고 하신 그 약속은 심령 문제에 있어서도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죽음으로써 악마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죄악을 없이하여 영원한 구속을 이루었다. 그는 부활을 통하여 아버지께로부터 새로운 완전한 생명을 받으셨다. 그 생명은 곧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사람의 생명, 인간들과 영교(靈交)할 수 있는 생명이다. 또한 그 생명은 신령한 권세로서 사람의 생명 속에 들어가, 그 생명들을 새롭게 하며 충만케 하는 생명이다. 그는 승천(昇天)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영을 받으셨으니, 그가 세상에 계셨을 때에는 할 수 없었던 그것들을 능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비로소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과 영원히 동행케 되었고, 그들을 대신해서 그들을 위해 살게 되었으며, 그들도 겸손히 아버지 앞에서 살게 되었으니, 이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저희 속에 거하사 생명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오순절에 오셔서 자기의 소유(所有)를 취하셨다. 즉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을 통하여 그가 이 땅 위에서 가르치셨던 모든 것을 완전히 실현케 되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능력있는 역사는 모든 것을 변화시켜 완전케 하셨다.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의 생활과 저들의 편지서 들은 모든 것이 변해졌다는 것과, 또 그 온유와 겸손으로 고난을 참으신 예수님의 영(靈)이 참으로 저들을 장악하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이제 여러분들은 모두 자신들을 반성해 보라. 여러분의 신앙의 정도와 은혜는 모두 조금씩 다른 줄 안다. 어떤 분들은 지금까지 생명에 관한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죄의식(罪意識)으로 자기가 정죄(定罪)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온갖 열심을 다하여 자기의 노력으로 이 죄에서 벗어나 보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낙심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신령한 은혜와 힘찬 능력을 얻어 기쁨에 차고 넘치는 증거를 하고 있을지라도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아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늘 만족을 주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러분이 이상 어느 급(級)에 속해 있거나를 막론하고 내가 이제 긴급히 권고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에 있어서는 겸손이야말로 그의 으뜸 되는 영광이요, 첫째 되는 계명이며, 우리의 가장 귀한 축복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요구하는 그러한 신자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은혜가 제자들에게 매우 결핍되어 있었을 때에, 그들의 영적 진보가 과연 그 어느 정도의 것이었던가를 여러분은 다시 한번 묵상해 보라! 겸손 이외의 다른 은혜는 우리의 심령을 진정으로 만족시켜 줄 수 없다. 이 큰 은혜인 겸손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이 가리워져 있다. 이 사실을 만일에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면 이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회개의 기도를 드리자! 오직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우리 자신으로서는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이 사실을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진심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심령에 내재(內在)하시는 그리스도의 진리가 나타날 때에만 교회는 그의 아름다운 진리로 옷 입히어 질 수 있으며, 거룩한, 진실로 거룩한 겸손의 미(美)가 교회의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에게서 나타나 보여지게 될 것이다.
제 6 장 일상생활에서의 겸손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일 4:20)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사람과 더불어 교제하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즉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정도로서 측량될 것이라는 말은 참으로 지당한 말이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매일 매일의 우리의 사회생활이라는 현실적인 시험장에서 그 진실성이 증명되지 않는 한 그것은 거짓이다. 우리의 겸손 역시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자신을 낮춘다고 생각하기는 매우 쉽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겸손한 생활만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도 겸손하다는 유일의 증거가 된다. 이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겸손이 우리의 본 성품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혹은 하나님을 묵상할 때, 혹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우리가 취하는 겸손이 흔히 보는 바와 같이 일시적이요 형식적인 겉 모양이 아니라, 진실로 속 생명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그 겸손은 모든 이웃 형제를 대하는 사사건건(事事件件)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겸손이 진실로 우리의 소유물이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만 특별히 나타내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보통 행동에서 언제나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극히 평범한 일상생활일지라도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영원한 가치를 띠게 된다. 그 이유는 곧 이런 것을 통하여 우리가 어떠한 정신, 어떠한 품성의 소유자인가가 증명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부주의하는 그 때가 곧 우리의 성품이 사람들 앞에 전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겸손한 사람을 찾으려 한다면, 먼저 그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살펴보아야 한다. 겸손은 예수께서 언제나 가르치신 바였다. 제자들 중에 누가 제일 큰가 하는 말다툼이 일어났을 때에, 혹은 [바리새]인들이 연회 석상에서, 또는 회중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았을 대에도 가르치신 것은 겸손이었다. 심지어는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까지 친히 그들에게 본을 보여 주신 것이 곧 겸손이 아니었던가? 비록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하다 할지라도 사람 앞에서 겸손하지 못하더면 그 겸손은 아무 것도 아니다. [바울] 사도 역시 겸손에 대해서 많은 교훈을 하셨다. 그가 [로마]의 신도들에게 써 보낸 편지 중에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고 하셨고, 또한 [고린도] 교회의 신도들에게는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말하였으니 뿌리가 되는 겸손이 없이는 사랑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사랑함으로 서로 종이 되라, 서로 성나게 하며 서로 시기하게 하는 헛된 영화를 바라지 말라”고 하였다. [에베소] 교인들에게는 처음 3장에 걸쳐 하늘 나라의 생명에 대한 매우 은혜스러운 말씀을 하신 다음, 곧 이어서 “그러므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항상 감사함으로 그리스도의 두려움 안에서 서로 순복하라” 고 하였다.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에게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자기를 낮추시고...”라고 하였다. [골로새] 교인들에게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겸손한 마음과 온유한 심정은 사람과의 관계에서와 서로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겸손을 이웃에게 타나내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겸손이란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위에서 본 바와 같은 모든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하여 겸손을 배우자.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기를 힘쓴다. 즉,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서로 종이 되며, 각각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서로 순복하라” 하신 말씀 그대로의 생활이다. 그러나 흔히 이러한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지혜에 있어서나, 재능에 있어서나, 혹은 받은 바 신령한 은혜에 있어서 우리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우리보다 낫게 여길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질문은 마음의 참 겸손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평범한 빛 가운데서 볼 때 우리들 자신은 진실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전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완전히 죽여 버릴 때에 나타나는 것이 겸손이다. 이것을 행하며, 또 “오 주여, 당신을 찾은 후에 나는 나 자신을 버렸습니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렇게 되고서야 비로소 자기 중심의 모든 생각은 끊어버리고, 모든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되며, 또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구하지 않고 오직 자기를 하나님의 종으로 또는 모든 사람의 종으로 생각하게 된다. 어떤 신실한 종은 주인보다 더 지혜로울지 모른다. 그러나 신실한 종은 역시 종으로서의 정신과 태도를 가진다. 참 겸손한 사람은 가장 연약하고 가장 볼 것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오히려 우러러보며 그들을 존경하고 섬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그리스도의 정신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가장 작은 자라도 높이는 일, 즉 다시 말하면 피차에 종이 되는 일을 하게 된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시기와 질투란 없다. 겸손한 사람은 각기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섬김과 존경받음을 볼 때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다른 사람은 칭찬을 받고 자기는 오히려 천대를 받고 무시를 당해도 참을 수 있다. 이는 그가 마치 [바울] 사도와 같이 하나님의 임재(臨在)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 고 한 그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사람은 마치 예수님께서 자기의 기쁨을 위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존귀를 구하지 않으신 그 마음을 받아들인 때문이다. 동료들의 실수와 죄를 보고 날카로운 말로 책망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에도, 겸손한 사람은 “서로 참으며 용서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해 주신 것과 같이 하라” 고 여러 번 되풀이되는 그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생활에 나타낸다. 그러한 사람은 주 예수를 옷 입음으로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 예수께서 우리를 완전히 변화시키셨음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받아 남을 용서해 줄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겸손은 단순히 스스로 낮추는 생각이나 말에 있지 않고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겸손한 마음”에 있다. 그 겸손한 마음이란 긍휼과 자비와 온유와 오래 참음, 곧 하나님의 “어린 양의 표”로 심령에 인침을 받은 지극히 부드러운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더 높은 경험을 애써 추구하는 돈독한 신앙가들이 오히려 종종 위험에 떨어지게 된다. 그 위험이란 곧 용기와 희락과 청렴과 열성과 희생을 도덕의 최고의 목표로 하는데서 온다. 이것들은 옛날 [스토익]파에서도 가르치고 실천했던 것들이었다. 이렇듯 세상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아름다운 덕을 목표하고 나아가는 그러한 사람들은 좀 더 깊고, 좀 더 온유하며, 더욱 거룩하고, 더욱 경건한 은혜, 곧 마음이 가난한 것, 온유한 것, 자기를 낮추는 겸손, 이런 것들을 등한히 여기고 가치 없이 생각하기 쉬우며, 거기에 신앙생활의 큰 위험이 있다. 예수께서 일찍이 하늘 보좌에서 처음으로 이 땅에 가져다 보여 주신 것이 겸손이었고, 그의 가르치신 것이 또한 겸손이었으며, 십자가에 죽으심이 또한 겸손이었다. 신앙 동지들이여! 우리들은 성경에 나타난 그 겸손한 초상(肖像)인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배우자! 그것으로 애써 배우고 나서 이웃 여러 형제들에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자. “내 마음의 캠퍼스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과연 찍혀져 있음을 볼 수 잇느냐?” 고. 독자 여러분이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과, 또 예수의 영이 우리 안에서 탄생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그 계시의 말씀들이 진실로 한 마디씩 모두 이루어지도록 하자! 우리 하나 하나의 실수와 허물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온유하고 겸손한 하나님의 어린 양에게로 겸손하고 온유하게 돌아오게 하는 자극제로 삼자.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마음에 보좌를 정하시고 임재하여 계신다면, 그리스도의 겸손, 그 온유는 우리 속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생수의 시내가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자! “나는 예수를 알았고, 내 영혼은 그를 소중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속에 아직도 무엇인가 나를 온유하지 못하게 만들고, 인내하지 못하게 하며, 친절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음을 알았다. 나는 예수님께 이 일을 아뢰이고, 내 뜻을 그에게 맡겼다. 그랬던 바 그가 내 속에 들어오셔서 나로 하여금 온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 인내하지 못하게 하는 것, 친절 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내 속에서 제거(除去)하시고 연후에 문을 닫으셨다.” -George Foxe- 나는 앞서 말한 모든 것을 한 번 더 되풀이하려 한다. 내가 깊이 느끼기로는, 오늘의 교회는 이 거룩한 겸손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수난을 당하고 있건만, 그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겸손이야말로 하나님께 자기의 권능을 나타내 보일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드리는 것이건만... 얼마 전의 일이다. 어떤 진실함 신자가 여러 나라와 여러 사회에 흩어져 살고 있는 선교 본부와 전도 단체들의 내용을 많이 알게 된 후 곧 통탄하여 말하기를, 여러 점에 걸쳐서 그들에게 사랑과 인내의 정신이 슬프게도 매우 부족하더라고 하였다. 서로 참고 사랑하며 평화의 줄로 심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켜나가리란 매우 어려운 것임을 우리는 물론 안다. 그러나 기쁨으로 협조하는 동지들이 되어야 할 자들이 도리어 방해하는 자와 약하게 하는 자가 되었으니 이것이 왠 일인가? 이것은 곧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그 겸손, 무리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자가 되고 또 가장 작은 자로 취급을 당하면서도 기뻐하며, 또 예수님처럼 가장 비천한 자리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의 종이 되고 친구와 동료를 도와주고 위로해 주는 자가 되려고 애쓰는 그 겸손이 부족한 탓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위하여서는 자신을 기쁘게 내어놓은 그 사람들이, 그들의 형제를 위하여서는 자신을 내어놓기를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교회에 대한 비난과 말썽거리가 어디서 생기는가! 이것은 다 그리스도의 겸손이 모든 미덕(美德) 중에서 첫째 되는 미덕이요, 또한 성령의 모든 은혜와 능력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거의 가르치지 않는데 그 원인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그 겸손은 교회에 가장 필요한 덕이다. 이 겸손은 누구나 신앙생활의 첫째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강조해서 설교해야 할 것이 겸손이란 것을 교역자들이 아마도 거의 망각하고 있는 듯 싶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자. 이 은혜가 부족하다는 그 발견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큰 은혜를 받게 하는 동기가 되는 것임을 믿자! 남을 괴롭게 하고 못살게 하는 모든 형제들을 대할 때에, 우리는 오히려 그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가르치신 그의 겸손을 연습하고 실천하는 좋은 기회로 알 것이요, 이 기회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한 특별한 기회임을 알자.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요, 나 자신은 진실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그러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힘을 옷 입고 서로 사랑으로 섬길 기회를 찾는 그러한 신앙을 가지자!
제 7 장 겸손과 성결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 (시 65:5) 우리는 오늘날 이 시대를 정화(淨化)하기 위한 성화운동(聖化運動)을 흔히 말하고 있으며, 또 이같은 운동이 실지로 각처에 일어나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결의 은혜를 사모(思慕)하고 잇고, 이것을 가르치는 교사들도 많이 있으며, 또 각종 성결에 관한 복스러운 진리는 전에 보지 못하던 정도로 매우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결(聖潔)의 참 가치는 오로지 그것이 겸손으로 나타나는 것이냐, 아니냐로 결정된다. 겸손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인간의 마음 속에 머물게 하고, 또 거기서 빛을 발하게 하는데 절대로 필요하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아들, 어린 양 예수의 성스러운 겸손은 곧 그의 생(生)의 비결이요, 속죄의 죽음의 근원이었고, 보좌의 영화를 이루게 한 비결이었다. 겸손은 곧 우리의 성결의 정도를 시험하는 정확한 시금석이다. 겸손은 실로 성결의 꽃이요, 향기요, 미(美)다. 위선적인 거짓 성결의 제일 큰 표는 겸손의 결핍이다. 성결의 은혜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이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성령으로 시작되었던 일이 무의식중에 혈육(血肉)으로 끝마치지 않도록, 또는 전혀 예측도 하지 못했던 곳에 교만이 침입하여 들어오지 않도록 항상 경각성(警覺性)을 잃지 않는 일이다. 우리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바리새]인은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것마저 자기를 높이는 그러한 장면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던가. 그리스도께서 그 [바리새]인의 교만을 폭로한 이후, [바리새]인은 오히려 죄인이 되어 버리고, 세리는 반대로 의롭다함을 얻었다. 그러나 자기의 뿌리 깊은 죄를 통회하던 이 세리도 역시 앞으로 그 [바리새]인과 같이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전이 되어 지기를 간절히 원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우리 마음속에는 마치 [바리새]인과 세리와 같은 두 사람이 함께 있음을 항상 느낀다. 통회 자복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그 세리가 이제 앞으로 크게 경계해야 할 것은 바깥에서 자기를 멸시하고 비웃는 외부의 [바리새]인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자기를 찬양하고 높이려는 숨어 있는 [바리새]인이다. 특히, 나는 거룩한 사람이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때에는, 더 한층 교만을 경계해야 한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욥1:6)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18:11) 우리가 비록 성전에서 통회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믿고 애원하는 그때일지라도 우리 속에 있는 [바리새]인적인 교만한 마음은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고 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찬양할 수도 있다. 교만은 찬양이라는 옷을 입고 나타날 수도 있고, 또 회개라는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한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한 이 말은 비록 배척해 버린다 해도 이 같은 정신은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감정과 언어에는 자주 그것이 표현되고 있다. 만일에 내가 하는 이 말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여러분이 알고자 한다면, 이제 모든 신자들의 피차(彼此)에 서로 서로에 대하여 평론하는 말들을 주의하여 들어 보라.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모든 신자들에게서 찾아보기가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많은 교회와, 성도들의 단체와, 많은 성도들의 조직과, 회합과, 심지어는 많은 선교회까지라도 불신자들의 단체와 다름이 없는 데까지 타락된 것들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이렇게 된 결과로 그 거룩한 성도들의 집회에는 화평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사업은 지장을 받는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성도라고 부르는 그 사람들이 아주 성급(性急)하고, 인내성이 없고, 이기적이요, 자기 고집만 있고, 또 가혹한 비판과 불친절한 말로서 피차에 자기보다 낫게 여기지 않는 동시에 마음의 온유함이 없기 때문이다. [나]라는 인물은 가장 엄혹(嚴酷)한 인물로서, 그는 언제나 자기를 위해서 가장 좋은 좌석과 제일 높은 자리를 요구하며, 그 요구가 용납되지 않을 때는 크게 상처를 입는다. 교회의 지도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분규(紛糾)의 대부분은 이 거대한 [나]가 떠들고 일어나는데서 기인(起因)한다. 우리들 가운데는 가장 낮은 자리를 취하는 비결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드문지! -[스미스] 부인 정신사상(情神史上)에 나타난 대로 인간들은 한때 겸손과 자아반성(自我反省)의 시대를 가진 때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겸손으로 옷 입는다는 것과, 겸손한 정신을 가진다는 것과, 또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종으로 품었던 바로 그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서 나타내 보이는 이러한 것들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옆으로 비껴라. 나는 너보다 더 성결하다!” 하는 자가 있다면 이 얼마나 풍자적인 말이겠는가! 거룩한 분이신 예수는 곧 겸손한 분이시었다. 가장 거룩한 자는 가장 겸손한 자이다. 하나님과 같이 거룩한 자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우리의 거룩의 정도도 커진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게 되면 우리는 참으로 겸손하게 된다. 왜냐하면 겸손이란 하나님만이 전부라는 생각으로서 자기를 전혀 나타내려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거룩한 자는 가장 겸손한 자인 것이다. 그러나 슬픈 것은, 비록 이사야 시대의 그 뻔뻔스럽게 뽐내던 [유대인]같은 사람들을 우리들 사이에서 자주 보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러나 믿는 형제를 대할 때나 세상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 그와 같은 정신으로 대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어떤 의견을 발표할 때, 일을 시작할 때, 남의 과오를 지적할 때, 그 외모는 세리와 같이 겸손하나 그 소리는 여전히 “하나님이여 감사하나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나이다.”하는 [바리새]인의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기를 모든 사람들의 종으로 알고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적은 자보다 더 적은 나...”라고 이렇게 스스로 낮추는 그러한 겸손을 우리는 지금 찾아 볼 수 있는가? 물론 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 이 사랑의 정신이 흘러넘치는 곳에 겸손이 있다. 즉 우리의 마음 밭에 사랑의 영이 두루 비춰서 거룩한 성품이 충만히 자라난 곳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이 진실로 마음 안에 이루어진 곳에, 비로소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남을 축복하는 것으로 자신의 축복을 삼고, 연약한 사람을 돕고 높이는 것으로 자신의 영광을 삼는 온전한 사랑의 능력이 주어진다. 이러한 심령에 하나님은 들어오신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권세로서 들어와서 자기 자신의 완전하심을 계시하여 보여 줄 때, 인간의 초라한 모습은 자연히 드러난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극히 초라하게 된 인간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겸손치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임재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 임재 하에 우리 영혼이 여태껏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심령이 지극히 겸허(謙虛)할 때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정이 되어진다. 이러한 심령에서야 비로소 참 은혜의 말씀과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이시여,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대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태도와 감정은 진실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겸손을 시험하는 하나님의 시금석(試金石)임을 우리에게 알게 하소서” “참된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다름없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소서. 겸손, 이것은 어린 양 그리스도의 생명이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이 겸손이 있게 하소서.” 성결을 가르치는 교사는 물론이요, 성결의 은혜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이 강단에서나 교단에서나, 골방에서나 집회에서나 그 어디에서나 다 같이 조심해야 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성결의 교만이다. 우리가 이것을 조심해야 할 이유는 자기는 거룩한 체하는 성결의 교만처럼 미묘하고 간교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 교만이야말로 모든 교만 중에 제일 위험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나는 너보다 겸손하니 너는 나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지는 않으며, 또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교만은 전혀 무의식 중에 또는 내 마음의 숨은 태도 속에서 또는 내 영적 상태가 남보다 많이 진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서 자라고 있다. 이러한 교만은 특별히 자기를 내세우거나 혹은 자기를 사랑하는 그런데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겸손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자들의 표가 된다. 욥42:5,6 이사야6:6)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교만한 마음은 말과 생각으로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조(語調)에서도, 말하는 태도(態度)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까지라도 우리의 이러한 마음을 예민하게 간파(看破)한다. 그들은 이러한 것을 듣고 지적해 말하기를 “거룩한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도 결국은 말뿐이요, 어떤 특별한 거룩한 열매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아! 형제들이여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생활이 거룩해진다고 느껴지게 될 때에, 우리는 더욱 겸손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일에 우리가 더욱 더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 심령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심을 증명하는 유일한 표(겸손)는 점점 희미해지고, 쓸데없는 사색(思索)과 아름다운 감정만을 추구하고 즐겨하는 천박한 신앙이 되고 말 것이다. 여러분이여 돌아오라. 우리 함께 예수께로 가자! 우리가 예수님의 그 겸손으로 완전히 옷 입히울 때까지 우리는 그의 품 안에 깃들이자! 오직 이것만이 우리가 거룩해지는 유일한 길이다.
제 8 장 겸손과 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 겸손이란 흔히 뉘우쳐 회개하는 것과 동일시(同一視)되는듯하다. 그러한 결과로 우리의 심령이 끊임없이 죄의 속박을 당하고 있는 거기에만 겸손으로 나아가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게까지 된 사람들이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진정한 겸손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 이상의 것이라고 믿는다. 예수의 교훈과 사도들의 편지를 통해서 볼 때, 이 고귀한 미덕인 겸손은 인간들의 죄악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이 기록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겸손은 축복의 근원이요 성결(聖潔)의 근원이다. 겸손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보좌를 정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혈육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전부가 되는 그 곳에 자기란 있을 수 없다. 앞서 내가 겸손과 죄는 본질상 연관성이 없다고 말하였지만, 사실상 사람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의 마음을 얼마나 겸손케 했는가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이제 사도 [바울]을 들어 생각해 보자. 그는 속량함을 받은 거룩한 사람으로서의 생(生)을 보낸 사람이었지만,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죄에 대한 깊은 자각(自覺))은 언제나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한때 자기가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자와 비방하는 자로서의 생활을 한 것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기록하기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15:9,10)고 했고, 또 말하기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에 전하게 하심이라.” (엡3:8)고 말했다. 디모데전서 1:13-15에는,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으니 죄인들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했다. 과연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구원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영원히 그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셨다. 그러나 [바울]자신은 그가 얼마나 무섭고 큰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가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즐거움을 누릴수록, 또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대하여 감격과 기쁨을 누릴수록 자기는 구원함을 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 죄인이라는 자각(自覺)없이 구원의 즐거움이 있을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구원이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바울]이 한 순간이라도 잊을 수 없었던 사실은 다름 아니라 자기는 비록 죄인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그의 팔로 안아서 그의 사랑으로 자기에게 면류관을 씌우셨다는 그 감격이었다. 위에서 인용한 성경 구절들은 흔히 바울의 일상적인 범죄의 고백이라고 인정하기 쉽다. 그러나 그 구절의 전후 문맥을 조심히 읽어보면 그런 것이 아님을 곧 깨닫게 된다. 그 구절들은 영원 불변의 더욱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그 뜻은, 즉 그가 비록 영광 중에 있다 할지라도 속량을 받은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울]사도의 전 신앙생활을 통하여, 또 솔직하게 자기의 흉금(胸襟)을 털어놓은 그의 편지서 들을 살펴보아도 자기의 부족과 실수에 대하여 기록한 곳은 없으며, 또는 자기의 할 일을 못했다든가 완전한 사랑의 법을 범했다든가 하는 암시를 독자들에게 주는 곳도 없다. 그 반대로 그가 자신을 변호한 구절들은 오히려 적지 않다. 그의 모든 말은 그의 생활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흠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살전2:10)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신실하심으로써...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 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고후1:12) 이 성경 구절들은 그의 이상(理想)이나 희망이 아니고 그의 실제 생활이 그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이 쓴 편지들에는 죄의 고백이 없다. 그의 생활을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성령의 충만한 생활이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즉 지극한 겸손은 일상적인 범죄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뇌리에서 떠날 수 없는 심각한 죄의식에서 생겨났다는 점이다. 우리가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또 그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우리가 은혜로 구원함을 받은 죄인들이라고 고백하는 일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최고의 기쁨으로 삼아야 한다. [바울]은 그가 은혜를 받기 전에 자기 범했던 무서운 죄악들을 잠시도 잊을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일단 돌아서 후에는 일상적인 범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은혜를 더 깊이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또한 그는 언제나 범할 수 있는 죄악의 어두운 잠재세력(潛在勢力)을 인식했고, 또 그 잠재 세력은 오직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으로만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라고 한 로마서 7장의 말씀에 계속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일찍이 나를 사로잡았던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도다” 고 하신 8장의 말씀은 그의 혈육의 근절(根絶)과 성화를 가리킴이 아니요, 성령이 그의 몸의 행실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계속적인 신앙생활의 승리를 이름이다. 건강이 병을 물리치고 생명이 죽음을 이기는 것처럼,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 계시는 그리스도는 우리 심령의 건강이 되고 빛과 생명이 된다. 이 내재(內在)하시는 성령은 때를 다라 끊임없이 역사 하심으로써 우리들의 믿음을 연단하여, 마침내 가장 높은 믿음과 기쁨의 자리에 도달하게 한다. 그러나 그 믿음과 그 기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고자 하는 겸손을 더 깊게 만드는 비녀(婢女)의 역할만을 해야 한다. 위에 인용한 세 성경 구절들은 모두 [바울]에게 주어졌던 그 큰 은혜, 즉 그를 그렇게도 겸손케 만들었던 은혜, 그가 또 시시각각으로 필요를 느꼈던 그 은혜가 무엇이었나를 보여주고 있다. [바울] 사도와 함께 했던 하나님의 그 은혜, 그로 하여금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게 했던 그 은혜, 그로 하여금 이방인들에게 다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으로 전파케 하였던 그 은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넘치도록 부요케 했던 그 은혜, 그것은 곧 그의 겸손이었다. 동시에 이 겸손은 과거에도 죄를 범했었으며, 또 지금도 늘 죄를 범할 위험성에 처해 있는 자기를 늘 반성케 하는 은혜이다. 이러한 겸손이야말로 바로 죄인이 가져야만 할 본성이요, 영광인 것이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풍성하다” 고 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가 죄를 어떻게 취급하고, 또한 어떻게 죄를 도말 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은혜의 체험이 풍성하면 할수록 죄인이라는 의식도 더욱 강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진실로 겸손케 하는 것은 죄가 아니요, 그가 과거에 어떠한 죄인이었나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죄의식(罪意識)이다. 나로 하여금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죄의식은 죄가 아니고 오히려 은혜다. 내가 항상 슬퍼하는 바는, 즉 자기를 책망하며, 정죄하며, 또 애써 노력함으로 겸손해지려 하나, 아직도 친절과 사랑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갖춘 겸손한 심령이 이루어지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자아반성(自我反省)중에서라도 마음속에 아직도 “나”라는 것이 살아 있으면 아무 것도 자아 중심주의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지는 못한다. 우리를 겸손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啓示)다. 죄를 정죄하는 율법뿐만 아니라 죄에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겸손케 한다. 율법은 우리의 마음을 두렵게 하고 상하게 하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심령을 그 아름다운 겸손으로 채워서 기쁨을 충만케 한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욥]과 [이사야]로 하여금 그렇게까지 완전히 하나님 앞에 복종케 한 것은 무었이었던가?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로운 거룩한 계시 때문이 아니었던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가까이 오신 때문이 아니었던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입고 자기를 완전히 버릴 수 있는 심령을 가진 자는, 곧 하나님을 무(無 )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로, 또한 허물 많은 죄인들을 그의 은혜로 완전히 구원하신 구속주로 알아 그를 바라보고 의지하며 경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람의 교만을 낮추고 그 날에 주께서 홀로 높아지리라” 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참으로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사람이란, 곧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의 사랑의 충만한 빛 가운데 거하면서,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통해 오는 거룩한 사랑으로 충만해진 바로 그러한 죄인인 것이다. 결코 그는 죄의 지배를 받는 그러한 죄인이 아니며, 오히려 죄악에서 구속함을 받고 하나님께 점령된 죄인인 것이다.
제 9 장 겸손과 신앙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맏을 수 있느냐“ (요 5:44) 어떤 사람의 말씀 중에서 나는 다음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높은 신앙생활의 축복은 마치 상점 진열장 유리문 앞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물건들을 똑똑히 볼 수는 있으나, 그것들을 만질 수는 없습니다. 만일에 손을 내밀어 그것을 가지려고 해도 가질 수 없다고 누구나 대답할 것입니다. 즉 그 물건과 우리 사이에는 두터운 유리가 막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신자들도 참된 화평과 안식, 즉 사람과 기쁨이 흘러넘치는 행복된 그 약속을 바라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참으로 소유케 하는 것을 방해하는 그 무엇이 막혀있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매우 많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직 교만이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 주신 그 약속은 확실한 것이며, 또 어떠한 힘에도 지장을 받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택하신 자를 불러 강건케 하는 그 힘은 매우 강하다. 믿는 자가 의지(依支)하는 하나님의 힘찬 능력은 어떠한 장애라도 그것을 당할 수 없다. 그렇다고 또 그 힘이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고 또 우리의 축복을 받는 것은 오직 우리의 부족 때문이다. 신앙만 있으면 모든 것이 형통해야 될 것인데, 이 신앙이 형통치 못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말씀을 통하여 본다면 믿음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진실로 우리의 교만 때문이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우리가 이제 교만과 신앙은 근본적으로 도저히 용납(容納)될 수 없는 것임을 안다면, 신앙과 겸손은 그 근본에 있어서 동일한 것임을 알 것이며, 동시에 또 우리가 참된 겸손을 가지지 못하면 결코 참된 신앙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음속에 교만을 품고 있으면서도 진리에 대한 강한 지적 확신(知的確信)은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적 확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산 신앙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이제 잠깐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앙이란 나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요 전혀 무가치(無價値)한 것임을 고백하고, 자기를 완젆 굴복시킨 후 하나님의 역사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믿음이란 우리 안에 있을 수 있는 지극히 겸손한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아니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음을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것임이 아닐 수 없다. 겸손이란 단순히 사람의 심령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고만 살 수 있도록 준비해 주는 것을 이름이다. 그러므로 자신만을 위하고, 자기의 뜻만을 주장하고, 나아가서는 자신을 믿고, 또 자기를 높이는 그 교만, 그러한 교만은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막아 그 나라의 축복을 소유치 못하게 한다. 그 교만은 혈육에 가담하여 혈기(血氣)를 더해 준다. 그러한 교만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며 하나님만이 전부라는 것을 거절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신령한 나라와 그 나라의 은혜를 자각하고 이해하는 기관(器管)과 감각(感覺)이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영광만을 추구한다. 이러한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이 전부라는 데서 비로소 온다. 우리가 서로 서로 사람의 영광과 존귀와 명예만을 추구하고 사랑하며, 또한 열심히 보존하려고 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을 추구할 수도 없고, 그 영광을 받을 수도 없다. 교만이 믿음과 합하기는 불가능하다. 구원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귀는 교제를 이름이다. 따라서 구원은 우리가 예수의 겸손에 동참하며 연합하는 것을 이름이다. 우리의 심령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하며 또 은혜스러운 사역(使役)을 하는 그 겸손을, 사모하며 간구하는 마음조차 없으리만큼 교만이 계속적으로 우리를 그렇게 강하게 점령하고 있는 그 때는, 바로 우리의 신앙이 매우 약해 진 때인 것임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겸손과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우리 대다수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밀접하게 일치되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제 그것을 그리스도의 생활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예수께서 어떤 백부장의 위대한 신앙에 경탄하며 ‘[이스라엘]중에서도 그와 같이 큰 믿음을 가진 자를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백부장이 ’오 주여! 당신이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고 말한 것은, 위대한 신앙과 지극한 겸손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하는 말이다. 또 어떤 때 예수께로부터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라고 칭찬을 들었던 어떤 어머니는, 개의 호칭을 받고도 오히려 “옳소이다, 주여. 그러나 개도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여인의 신앙과 겸손은 분리될 수 없었다. 자기를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인정케 만드는 것과 또 믿음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제하여 버리게 하는 것은 오직 겸손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존귀케 하지 못하지나 않을까 하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그것도 오직 겸손이다. 형제여! 우리가 성결해지지 못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그렇게도 피상적(皮相的)이고 일시적(一時的)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 무엇인가? 그 원인을 우리는 비록 깨닫지 못하나 할지라도, 그것은 곧 우리 속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하고 있는 교만과 혈육에 속한 “나”라는 것이 여전히 계속하여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모든 교만과 혈육의 생각을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하면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서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오직 중생된 거룩한 성품만이 혈육에 속한 옛 사람의 자리를 걷어 버리고 우리를 참으로 겸손히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과연 우리는 알고 있는가. 절대적이며, 끊임이 없으며, 가히 없는 겸손만이 우리의 모든 기도와 하나님 앞에 나가는 일과 또 이웃 사람들을 대하는 모든 태도에 있어서의 근본적 성격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거의 모르고 있다. 우리는 눈 없이 사물을 보려고 허덕이며, 또는 노력하지 않고 생존하려고 애쓰는 사람과 같이 정직한 겸손과 마음의 온유함이 없이 하나님을 믿으려 하며, 그에게 가까이 가려하며, 또한 그의 풍성한 사랑 안에 거하려 한 일이 없었던가? 형제여! 우리는 참 믿음에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잘못을 지금까지 범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즉 다시 말하면 우리 안에 계속 옛 사람이 도사리고 있으면서, 그 옛 사람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과 부유함을 입어 보려고 하지는 않았는가? 분명 그것은 안될 일이다. 우리는 이제 신앙의 발걸음을 돌리자. 무엇보다 더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서 우리 자신을 겸손히 낮추도록 힘쓰자! 그리하면 그가 우리를 높이실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끝없이 낮추신 그 십자가와 그의 죽으심, 그의 무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이 되었고, 그것은 또 우리의 길도 된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또는 그리스도처럼 겸손히 되어지는 것을 우리의 유일한 소망으로 또는 간절한 기도의 제목으로 삼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기쁨으로 맞아들이기로 하자. 이것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아마도 여러분은 마음에 의심이 있을 것이다. 즉 이제까지 내가 말한 것은 어떤 은혜의 체험을 한 사람들이거나, 또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은혜를 전달하는 그릇의 역할을 하면서도 그 자신은 아직 겸손이 결핍한 그런 사람들에게 관하여서 -이었는데, 그렇다면 혹 여러분은 생각하기를 비록 그들은 사람에게서 오는 영광을 더 많이 바라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들은 참 믿음, 나아가서는 강한 믿음을 가졌기에 그들에게 그러한 은혜의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으나 가장 주요한 답변은 이렇다. 즉 그들은 실지로 어느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음은 사실이고, 또 그 믿음의 분량에 따라 특별한 은사들도 받았음은 물론이다. 때를 따라 남에게 은혜를 끼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은혜의 순간에도 그들의 겸손의 결핍으로 인하여 그들의 믿음의 역사가 큰 지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베푸는 은혜는 때때로 피상적(皮相的)인 것으로, 또 일시적(一時的)인 것으로 스러지는 일이 많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것은 곧 하나님만이 전유(全有)가 되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전무(全無)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다 더 지극한 겸손은 틀림없이 보다 더 깊은, 보다 더 충만한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다. 권능의 신으로만 아니라 충만한 은혜로 특히 지극한 겸손으로, 자기를 낮추는 자의 심령에 역사하시며 임재하시는 성령께서는, 또 그러한 자를 통하여 많은 회개자(悔改者)들에게 지금까지도 전혀 상상조차 못했던 능력과 성결과 견고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통하신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형제여! 여러분은 받고자 마로 바치고자 하라. 오직 하나님께로 오는 영광만을 찾고자 여러분 자신을 바치라. 이것이 없이는 여러분의 욕심, 즉 사람에게서 오는 영광을 취하고자 하는 욕심을 없이 할 수는 없고, 또한 여러분의 감정과 아픔과 분노를 극복할 수 있는 길도 없다. 영화롭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영광만으로 여러분의 전부가 되게 하라! 그러면 여러분은 사람의 영광과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데서 해방이 될 것이며, 기쁨으로 자기를 전무(全無)로 돌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같이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끼는 거기에서 비로소 우리는 믿음 안에서 강건히 자라게 될 엇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면 겸손해질수록 하나님께서는 더욱 더 그대와 가까이 계시면서, 모든 신앙적 요구를 충족(充足)시켜 주실 것이다.
제 10 장 겸손과 자아에 대한 죽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빌 2:8) 겸손은 죽음에 까지 이르는 길이다. 왜? 죽음으로서만 이 겸손은 그 극치(極致)를 이루기 때문이다. 겸손은 꽃이다. 이 꽃에서 맺어진 완전한 열매는 곧 자아를 희생시키는 죽음이다. 예수께서는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고, 또한 우리가 걸어야 할 그 길을 개척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낮추시사 자기를 하나님께 복종케 하신 그것을 증명할 수 있었던 길은, 오직 죽음밖에는 없었다. 인간의 성품을 죽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이 죽음의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있어서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도 또한 같다. 겸손은 우리를 자아에 대해서 죽는 데까지 인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얼마나 완전히 바쳤는가를 증명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타락한 성품에서 해방이 되어,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과 새 성품의 풍성한 탄생으로 인도하는 그 길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겸손은 그 생명의 호흡이요, 그 성품의 기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 직접 영적 생명으로 하늘에서부터 오시어 치히 제자들의 심령 속에 거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것은 죽음을 통해서였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그 생명은 죽음에서 나타난 생명이었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생명이었으며, 죽음을 통하여 얻은 생명이었다. 제자들의 심령 속에 거하기 위하여 오신 그리스도는 일찍이 스스로 죽으셨다가 이제는 영원히 살아있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생명,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모습에는 죽음의 흔적이, 다시 말하면 죽음에서 나온 흔적이 나타나 있다. 그의 제자들의 생애에도 그 죽음의 흔적이 나타나 있음을 보는데, 그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지게 된 것은 오직 죽음을 맛보신 그의 영이 그들의 심령에 내재(內在)하셔서 역사 하시는 때였던 것이다. 주 예수의 그 죽음의 흔적들 중에 제일 크고 첫째 되는 것으로 그가 친히 그를 따르는 참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것은 곧 겸손이다. 오직 겸손만이 사람을 온전한 죽음으로 인도하고 또 죽음만이 겸손을 완전히 이룰 수 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겸손과 죽음은 그 본질상 하나이다. 겸손은 꽃 중의 봉오리다. 이 꽃은 죽음으로 인하여 완전한 열매를 이루게 된다. 겸손은 죽음을 택한다. 겸손은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또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완전히 없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낮추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기의 뜻을 완전히 죽여버렸다는 그 사실을 그는 죽음으로서 증명하였었다.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쓴 잔을 받으시고 그는 가지 자신을 완전히 버렸다. 그도 우리 인간이 가지는 모든 연약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는 그것을 완전히 버리는 죽음을 택하였다. 그를 유혹했던 죄악도 물러갔다. 이렇게 그는 참 사람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 만일에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자기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종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셨던 그 한없는 겸손이 아니었더라면, 그가 죽음을 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여러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대가 죄에 죽는다는 것은 그대 안에 있는 생명이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통과함을 의미한다. 그 때에야 그대는 진실로 죄에 죽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의 성격과 행위에 있어서 이 죽음의 능력이 완전히 나타나게 되는 것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그 능력을 얼마나 여러분에게 나누어주느냐 하는 그 분량에 따라 결정된다. 거기에 이러한 가르침이 필요하게 된다. 즉 만일에 그대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완전한 교통을 가지기를 원하며, 또 자아(自我)로부터 완전한 구원을 얻고자 원한다면 그대 자신을 낮추라. 이것이 곧 그대가 해야 할 하나의 의무인 것이다. 여러분은 전적으로 무력한 여러분 자신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맡기라. 여러분 스스로는 자기를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다는 그 무능력(無能力)함을 통절히 느끼라. 여러분은 티끌만도 못한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반성하라. 온유와 참음과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굴복하라. 모든 굴욕을 받아들이라.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 때는 오히려 여러분을 겸손케 하기 위한 은혜의 기회로 생각하라. 여러분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여러분을 낮추어야 하는 기회를 만날 때마다, 이 기회야말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될 수 있는데 도움을 주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그러한 겸허(謙虛)를 볼 때는 그 겸허야 말로 여러분이 마음을 다하여 그것(겸손)을 사모하는 증거로 받아들일 것이요, 그것을 간절히 간구하는 가장 좋은 기도로 받아들일 것이며, 그의 강력한 은혜의 역사를 위한 준비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러한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성령의 강건케 하시는 능력으로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완전히 계시해 주실 것이다. 이때야말로 종의 형상을 입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진정으로 여러분의 심령 속에 이루어지는 때요, 그가 여러분의 심령에 거하시는 때다. 이렇게 될 때에 비로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완전히 죽어졌다는 충분한 경험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제 한번 더 깊이 묵상하라. 즉, [이 죽음만이 완전한 겸손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이다]하는 이 말씀을---. 아! 주의하라! 많은 사람들은 겸손을 좋아하기는 하나, 너무 겸손해지는 것을 오히려 두려워하는 이러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들은 진정한 겸손이 무엇이며 도 겸손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너무도 생각이 많고, 너무도 이론(理論)이 많으며 의심(疑心)이 많다. 그들은 겸손해지는 것을 주저한다. 참으로 경계해야 할 일이다. 죽기까지 그대 자신을 낮추라. 겸손의 극치(極致)는 죽음에서 이루어진다. 풍성한 은혜의 모든 체험과 진정한 헌신(獻身)과 참으로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이 모든 성스러운 사건들 밑에는, 반드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참으로 겸손해 졌다는 것을 실지로 증명하는 죽음이 있는 법이다. 우리는 아직도 “나”라는 존재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때 일지라도, 비참한 일이지마는 자아희생(自我犧牲)에 대한 것과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자아에 대하여서 죽었다는 확실한 증표(證票)는 오직 겸손 외에는 없다. 그 겸손은 아무런 칭찬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오직 자기를 비어 종의 형태를 취한다. 우리는 온유하고, 하나님의 어린 양을 참으로 체험하지도 못하고, 찾지도 못했을 때일지라도, 버림을 받고 배척을 당한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많이 말할 수도 있고, 그의 십자가를 거짓 없이 외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두 가지 뜻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온유와 죽음이다. 우리는 이 온유와 죽음을 동시에 옷 입은 그리스도를 찾고 받아들이자! 그리스도에게서 이 두 면은 서로 뗄 수 없다. 따라서 이 온유와 죽음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또한 뗄 수 없는 존재이어야 한다. 만일에 우리의 노력으로만 이것들을 우리의 소유로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 얼마나 절망적인 일인가! 비록 약간의 은혜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우리의 성품이 우리의 성품을 이길 수가 없고, 비록 또 중생한 자라 할지라도 나라는 존재가 나 자신을 내어 쫓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찬양하라! 구속사업은 이루어졌다. 영원히 끝났고 영원히 성취되었다. 예수의 죽음은 영원히 우리가 할 수 없는 그것을 단번에 이루셨다. 승천하신 예수님, 단번에 지성소에 참예하신 그 예수님은 우리에게 능력으로 영교(靈交)할 수 있는 성령을 주셨고, 또 그의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그 능력을 바로 우리의 것으로 주셨다. 겸손을 추구하고 연습함에 있어서 우리의 심령이 예수님의 발자국을 따르기만 한다면, 우리의 심령의 눈은 뜨이게 될 것이다. 우리 영혼이 바라는 소망은 높아질 것이며, 믿음에는 활력이 생기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참된 충만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 성령은 충만한 권세로서 우리로 하여금 매일 매일 죄와 혈육을 이기게 하고 우리의 생활은 겸손으로 넘치게 할 것이다. (附記 ③ 참조)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롬 6:3, 11, 13) 신자들의 모든 자아의식은 그리스도를 죽음에까지 이끌어간 그 정신으로 변해져야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난 자와 같이, 또는 주 예수의 시체를 자기 몸에 지니고 있는 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신자의 생활에는 언제나 다음의 두 면(面)이 뚜렷해야 한다. 즉 예수와 더불어 그의 무덤에 까지 내려가는 뿌리 깊은 겸손- 죄와 자아에 대한 죽음-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예수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서 예수께서 지금 계시는 하늘에 까지 그 머리를 드는 일이다. 성도들이여! 예수의 죽으심과 삶을 마치 나의 죽음과 삶인 것 같이 믿음을 가지고 선포하라! [자아]와 [자아]의 능력으로부터 해방된 자리인 예수의 무덤, 곧 하나님의 휴식에 들어가라. 자기의 생명을 아버지의 손에 맡겼던 그리스도와 같이 그대 자신을 낮추라. 매일 매일 온전히 아무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그 자리에 이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영화로운 자리로 이끌어 올릴 것이다. 예수님은 깊은 음부에까지 자기를 낮추셨었다. 매일 아침 그대는 뉘우쳐 자기를 낮추고 낮추라. 그러면 예수님의 생명은 매일 매일 그대의 심령 속에서 새로워질 것이다. 즐겁고 정답고 화평하고 행복된 그 겸손으로 하여금 그대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의 표를 삼으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겸손에 참예한 심령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을 발견할 수 있고, 자기를 죽일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배우고 맞아들인 자들로서의 그 심령은 온유와 겸손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서로 참을 수 있다. 진실로 죽음을 택할 수 있는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의 온유, 그리스도의 겸손 속에서만이 발견되는 것이다.
제 11 장 겸손과 행복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멀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12:9) [바울]이 큰 은혜를 받으므로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육체에 한 가시를 주어 겸손을 유지하도록 했다. [바울]의 첫 번 간구는 이 가시를 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세 번씩이나 그것을 위하여 간구했다. 드디어 응답이 왔다. 즉 그 가시야말로 오히려 하나의 축복이라는 것과 또 연약하고 겸손한 중에서 오히려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더 잘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기도의 응답이었던 것이다. 곧 그때부터 [바울]은 자기가 받은 그 고통에 대하여 새로운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는 단순히 그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괴로움을 기쁨으로 여기고 그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그 고통에서 놓여나기를 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는 그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겸비(謙卑)의 자리 바로 그 자체가 축복의 자리요, 능력과 기쁨의 자리인 것을 [바울]은 분명히 배웠던 것이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실지로 겸손해지고자 노력하고는 있지만 위에 말한 모든 사실들을 간과(看過)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을 실지로 겸손케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오히려 두려워하며 피하려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을 오히려 불행으로 여겨 거기에서 놓여나기를 원하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진정으로 겸손해지는 그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겸손하라고 하는 그 명령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종하려고 애를 쓰기는 한다. 그러나 드디어 실패하고 만다. 그들은 때때로 간절히 겸손해지기를 간구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비록 말로서는 아닐지라도 내심 깊이에서는, 자기를 실제로 겸손케 하여 줄 그 모든 것들이 오히려 자기에게서 떠나가기를 바라며 간구하는 경우가 더욱 많은 실정이다. 그들은 아직도 겸손이야말로 하나님의 어린 양의 미(美)의 표현이요, 천국의 기쁨으로 알고 그것을 추모(追慕)하며, 또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들에게는 그것을 얻을 수 없도록 스스로 자기를 속박하고 있는 그 무엇이 있다. 자기 자신을 낮추는 그것이, 아직도 진정으로 우러나서 표현되는 참 겸손, 즉 자연적인 성품(性品)이 되어 있지 못하다면, 그 겸손이 곧 그들의 기쁨이 될 수는 없다. 그들은 아직도 “나는 나의 연약함으로 크게 기뻐하며 자랑하리니, 나는 이제 나를 겸손케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즐겁게 받으리라” 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그대는 과연 이러한 겸손의 자리에까지 들어가고자 원하는가? 물론 누구나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그러한 지경에까지 인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울]을 그렇게 겸손케 만든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곧 주님 예수의 나타나심이 아니었던가, 오직 하나님께서 임재(臨在)하심으로서만이 나 자신을 내어 쫓을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깊은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즉 예수님의 임재가 아니면 그는 혈육을 따라 구하는 모든 욕심을 분쇄(粉碎)할 수 없고, 또 예수님의 임재하심이 아니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욱 충만히 나타내기 위하여 오히려 굴욕을 즐거워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들어 갈 수는 없다는 이 진리를 그는 명확히 깨달았던 것이다. 예수님의 임재와 능력의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그 겸손만을 모든 은혜의 최고봉으로 삼게 한다. 이제 우리는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친 그 교훈을 배우도록 하자. 우리 중에는 믿음이 두터운 분, 우수한 교사, 또는 은혜의 깊은 체험을 가진 분들이 많이 있을 줄 아나, 그들 역시 기쁨으로 자기의 약한 것을 오히려 자랑할 수 있는 완전한 겸손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바울]에게서도 본다. 즉 사도 [바울]에게도 자기를 높이는 교만의 위협은 바로 그의 지척(咫尺)에 있었다. [바울]도 그때까지는, 그리스도만이 자기 안에 살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죽여 전무(全無)로 돌리고, 모든 굴욕(屈辱)을 오히려 즐거워 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완전히 알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그러기에 [바울]에게 있어서는 이제, 하나님만이 전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주님의 겸손을 완전히 본받아, 연약한 것을 오히려 즐거워할 줄 아는 것을 배워야 함은 무엇보다도 긴급한 최고의 일인 듯했다. 신자들이 배워야 할 최고의 교훈은 겸손이다. 아! 좀더 거룩해지고자 원하는 모든 성도들이여, 이상의 교훈을 잘 명심하라. 비록 우리에게 감격적인 헌신(獻身)과 뜨거운 열심과 놀라운 은혜의 체험이 있다고 해도, 우리 주님의 특별하신 손이 이것을 절제해 주지 않으신다면, 그 모든 것이 부지불식(不知不識)중에 자기를 높이는 교만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제 최고의 성결(聖潔)은 곧 지극(至極)한 겸손이라는 그 교훈을 배우자. 이와 동시에 또한 이 겸손은 스스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미쁘신 우리 주님의 내주(內住)하심으로서만이 이루어진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자. 자! 우리는 이제 이상에 말한 모든 진리의 빛에 비취어서 우리의 생활을 반성해 보자. 그리고 우리도 바울이 약한 것을 자랑하며 비방과 궁핍과 환난 중에 오히려 기뻐하던 것 같이 기뻐할 수 있는가 반성해 보자. 형제여! 우리는 스스로 반문해 보자. 모든 비난과 시비와 또는 친구 혹은 원수로부터의 책망을 들을 때마다, 또는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오직 이 때야 말로 예수께서 나의 전체가 될 수 있는 기회로 나는 알고 있는가? 이런 때야말로 자신의 명예와 기쁨은 아무 것도 아니요, 진실로 지극한 겸손만을 나는 즐거워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우리는 과연 알고 있는가? 우리에게 대하여 어떠한 비난이 있고 또 박해(迫害)가 있다 할지라도, 오직 나에게는 예수만이 전체라고 하는 이 일편단심으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삼켜 버림으로서 나의 혈육(血肉)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그것이야말로 참 은혜요 천국을 소유한 참 행복인 것이다. [바울]을 인도하시던 주님은 오늘날 우리도 또한 인도하시고 계심을 믿고, 그를 의지하자. [바울]에게는 특별한 훈련과 또 특별한 교육이 필요했다. 그가 하늘의 음성을 들었던 그 일보다 더 귀한 은혜는 연약하고 비천한 중에서도 오히려 그것을 자랑할 수 있는 그의 겸손이었다. 아! 오늘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또한 이 은혜다. [바울]을 보호하시던 예수께서는 우리도 또한 보호하신다. 예수께서 [바울]을 가르치시던 그 학교는, 또한 우리의 학교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교만해지지나 않는가 하고 질투와 사랑이 어린 눈으로 우리를 감찰하시고 계신다. 우리가 교만해 질 때면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악마를 스스로 발견하도록 가르치신다. 그리고 우리를 거기에서 구원해 내고자 힘쓰신다. 주님께서는 모든 시련과 연약함과 환난을 통하여 우리를 겸손케 만들고자 하신다. 우리가 마침내 그의 은혜만이 전체임을 배우고, 또 우리로 하여금 겸손을 오히려 지키게 하는 바로 그 [가시]를 즐거워 할 때까지 주님은 우리를 낮추신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하여 완전해지는 그의 능력과, 또 우리의 겸허한 마음에 충만히 채워지는 성령의 임재만이 전혀 실패를 모르는 비결이 된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이 겸손한 사람, 사도 바울은 참 기쁨의 비결을 배웠던 사람이다. 그가 자기의 연약함을 느끼면 느낄수록 더 낮은데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겸손이 더 크게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겸손의 능력도 더욱 더 충만해졌고, 그리스도의 임재하심도 더욱 확연해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 고 고백할 그 때에 비로소, 그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한없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위에 말한 모든 것을 한 번 더 총괄하여 다음 두 가지의 결론으로 말해야 겠다는 느낌을 가진다. 그 하나는 교만의 위험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무서운 것이며, 또 더 몸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겸손으로 받는 은혜도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또 더 가까운데 있다는 사실이다. 교만의 위험성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크고 더 가까이 있다는 그것은, 특별히 우리가 깊은 은혜의 체험을 가질 때에 더욱 더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수 천 수 만 관중에게 은혜를 끼치고 절찬을 받는 진리의 설교자와, 천국의 숨은 진리를 드러내서 밝히며 외치는 능력의 부흥사와, 또는 많은 사람에게 기쁨과 축복을 느끼게 하는 힘 있는 전도자들까지라도 자기도 모르는 은밀한 중에 또는 무의식(無意識)중에 나타나는 그 교만의 위험성은 알지 못하고 있다. [바울] 역시 그러한 위험 중에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바울]에게 가시를 주신 그 일이 성경 기록에 남게 된 것은 우리를 경고하기 위한 때문이다. 즉 우리로 우리의 위험을 알게 하는 동시에, 또 유일의 안전한 길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만일에 그 기록이 어떤 혈육에 속한 이기주의자에 관한 것이거나, 혹은 자기가 설교한 것조차 자기는 실행하지 않는 거짓 설교자에게 관해서 거나, 또한 은혜를 받고도 겸손해지거나 온유해지지 않는 그러한 사람에 관해서 한 말이라면 우리는 더 문제시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겸손의 은혜는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위대하고 더 가까이 있다. 예수의 그 겸손은 우리의 구원을 이룩했다. 예수 자신이 곧 우리의 겸손의 창시자(創始者)이시다. 우리의 겸손은 그의 원하시는 바요, 또 그것을 위해 그는 우리를 돕고 있다. 우리가 교만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하여서는 그의 은혜로 충분하다. 그의 능력은 또한 우리의 연약함을 완전케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연약하고 비천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고, 오히려 그것을 택하자. 겸손으로 우리의 기쁨, 우리의 즐거움을 삼자.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오히려 기쁨으로 자랑하자. 그 연약함이 우리를 겸손케 한다. 우리가 겸손해질 때 그리스도의 능력은 우리에게 임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겸손케 하며, 또 겸손을 지속(持續)케 한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이 겸손을 믿음으로 또 기쁨으로 받아들이자.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다. 지극한 겸손이야말로 그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참 행복과 기쁨의 비결임을 배우자.
제 12 장 겸손과 영화(榮華)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눅 14:11)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약 4:10)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6) 바로 어제,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즉 “나는 어떻게 하면 교만을 이길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었다. 그 대답은 간단하다. 교만을 이기기 위하여는 두 가지의 필요한 것이 있다. 그대에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것을 하는 일이 첫째로 필요하다. 그것은 즉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자기가 하시겠노라고 하신 그 약속을 믿고 그를 의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즉 하나님께서 그대를 높이리라고 하신 그 말씀이다. 자기를 낮추라고 하신 그 명령은 확고부동(確固不動)한 계명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명령은, 그대가 이제 그대의 노력으로 그대의 교만한 성품을 내어 쫓을 수 있고, 그대의 심령에 거룩하신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그대의 노력으로 이룩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대의 힘으로 겸손을 이룩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 명령이 말하고자 하는 교훈은, 즉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기회마다 자기를 낮추라는 것이다. 진실로 겸손이야말로 모든 덕(德)의 어머니요, 하나님 앞에서 첫째 되는 인간의 의무며, 우리의 영혼을 영원히 보호하는 아성(牙城)이다. 여러분의 심령은 이 만복의 근원이 되는 겸손 위에 터를 잡으라. 하나님의 약속은 진실 되고 거짓이 없다. 자기를 낮추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높이실 것이다. 스스로 낮추라고 하신 이 하나님의 유일한 요구를 여러분이 실행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자기가 약속하신 그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더 크신 은혜를 베푸실 것이니, 때가 이르면 여러분을 높이실 것이다.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남의 모든 방법에는 다음 같은 두 가지 단계가 있다. 즉, 준비의 기간이 있으며 성취의 때가 있다. 준비의 기가이라고 함은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시기를 이름인데, 그 때는 하나님께서 인들로 하여금 존 더 높은 소망을 향하여 일어 설 수 있도록 깨우치고 교육하고 훈련하는 때이다. 이 때는 물론 부분적 성공과 노력이 있기는 하나, 인간들의 실패와 무능으로 짜여진 시련의 연속기간이다. 그리고 나서 성취의 때가 온다. 이 때는 바로 우리의 신앙이 약속을 쟁취(爭取)하는 때다. 우리가 애써 얻고자 했으나 늘 실패했던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때도 바로 그 때다. 인간의 구속사업에 관한 모든 문제에 있어서의 주도권(主導權)은, 하나님께서만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먼저 역사하신 후에 인간의 차례가 온다. 인간은 먼저 하나님의 법도를 순종하기 전에 자기의 무능을 알아야 하며, 자기에 대하여 절망하고, 자기에 대해서 죽는 법을 알아야 하며, 처음에는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던 것들을 완전히 깨닫고 지혜롭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리하여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다 모르고 있었으나,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우리 각자의 모든 것, 즉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겸손을 추구함에 있어서도 이와 같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을 낮추라”는 계명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주어진다. 그러나 그 계명에 대해서 순종하려는 열심 있는 노력의 댓가는 다음과 같은, 쓰라린 두 가지임을 알게 된다. 그 하나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뿌리 깊은 교만, 즉 자기를 낮추기를 싫어하고, 내세우기만 좋아하며, 하나님에게 완전히 순복하기를 기뻐하지 않는 깊은 교만이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이 흉악한 마물(魔物)을 제거하려는 우리들의 노력이나,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까지도 얼마나 무력한가 하는 사실이다. 자기의 전체의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고 인내함으로서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교만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히 행하는 그 사람은 복 있는 자이다. 우리는 인격의 형성과정을 안다. 즉 행위는 습관을 낳고, 습관은 성질(性質)이 되고, 성질은 의지(意志)가를 결정한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의지는 인격을 이룩하는 것이다 이 원리(原理)는 영적 은혜의 계단에 있어서도 똑 같이 적용된다. 즉, 끊임없이 반복되는 행위(行爲)가 습관 성질이 되고, 또 그것들이 의지를 결정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내어 맡김으로서 교망해 지려는 마음을 낮출 때는, 보다 더 큰 겸손의 은혜가 임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靈)이 우리 안에서 승리를 얻게 된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의 심령은 완전히 새로운 성품을 이루게 된다. 즉 그때야말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신 주님께서 영원히 우리의 심령에 거하시게 된다. (附記 ④ 참조) ‘주님 앞에서 네 자신을 낮추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시리라.’ 인간의 영화와 존귀는 어디에 있는가? 피조물의 최고의 영광은 오작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하고 그것을 선포하며,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릇이 되는데 있다. 이러한 그릇이 될 수 있기는 오직 하나님만이 전체가 되게 하기 위하여 나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는데 있다. 물은 항상 가장 낮은 곳부터 먼저 채워진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더욱 낮아지고 비어질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속히, 더욱 충만히 채워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신다는 일은 하나님 자신을 떠난 어떤 다른 형편으로도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주어질 수도 없는 일이다. 그가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 자신을 더욱 더 많이 주시는 것뿐이다. 즉 우리가 더욱 완전히 그를 소유하게 되는 일이다. 그가 우리를 높이시는 것은, 세상의 상급과 같이 보상을 받을만한 상당한 행동이 있을 때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그 상급은 오직 우리 자신의 겸손의 결과요, 열매이다. 그 상급 자체가 곧 그 사람 속에 깃들어 있는 그러한 거룩한 겸손이며, 하나님의 어린 양의 겸손과 일치되고 동화(同化)된 그러한 겸손이 우리에게 있음으로 성령(聖靈)의 충만(充滿)함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상급이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 이 말씀이 진리임은 바로 예수 자신이 그 증거다. 이 약속이 우리에게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그 확실성에 대해서는 예수 자신이 그 보증이 되신다. 그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니 우리는 그의 멍에를 메고 그를 배우자. 우리가 만일에 주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낮추심 같이 우리가 그 앞에 낮추면, 그는 또 다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자기를 역시 또 낮추실 것이다. 그러면 주님과 멍에는 같이 멘 우리는, 그와 더불어 우리의 멍에를 또 다시 낮추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의 멍에를 메고 더욱 길이 그와 사귀며 우리 자신을 낮추게 될 때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 위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 능력은 겸손한 심령 위에 임하신다. 우리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바로 모실 때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실 것이다. 자신을 낮춤으로 그의 영광을 높이도록 힘쓰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대의 겸손을 더욱 완전케 함으로서 그대를 더욱 영화롭게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대의 심령에 부으리라. 모든 면에 침투(浸透)해 들어오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래들 소유하게 될 때, 그대의 자아(自我)는 아주 자연스럽게 없어지고 아주 즐겁게 죽게 될 것이다. 드디어는 자아에 대한 욕망도 생각도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모든 것은 그에게 점령도고 또 그는 내게 모든 것으로 채워 주셨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등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형제여, 우리는 일찍 우리의 헌신(獻身)과 신앙이 아직도 우리의 성결을 이룩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반성해 보았는가? 신앙이란 아름다운 명칭 밑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이 우리의 혈육(血肉)의 힘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찾아 부른 것은 내 육체를 위하여 혈육의 행복을 위함은 아니었던가? 무의식 중에,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그대의 영혼이 기뻐한 것은, 역시 그대 자신과 그대의 인위적(人爲的)인 성결을 두고서가 아니었던가? 절대적인 겸손, 즉 자기를 전적으로 버렸던 그리스도의 겸손은 우리의 겸손으로 가지는 것만이 우리가 원하는 성결한 생활의 근본적인 요소(要素)란 것을 우리는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내 자신을 죽인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나를 온전히 점령한 때에만 이루어진다. 지극히 작은 먼지가 나부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밝은 햇빛이 거기에 비취기 때문임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의 존재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따뜻한 햇빛 속에서 나부끼고 있는 먼지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그, 앞에서 겸손해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이여! 나는 먼지에 지나지 않나이다! 나는 그대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하신 사랑에 삼키운 바 되오니 오직 하나님만이 전유(全有 )가 되시고 나는 없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당신 앞에서 지극히 겸손해져서 진실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 버리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귀하고 넘치는 은혜임을 확실히 믿도록 우리에게 가르치소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사 57:15) 형제여! 우리는 이제 다음의 기도를 우리 각자의 기도로 삼자! “아! 더 비어지고 더 낮아지게 하소서! 우러러 보는 자 없고 아는 자 없는 비천한 인간이 되어도, 오직 그리스도, 그리스도만으로 채워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그릇이 되게 하소서!
부기(附記) (1) 위에 말한 모든 것이 영원한 세대에 걸쳐서 가르치는 것은, 곧 교만은 최귀(最貴)한 천사로 하여금 마귀가 되어 떨어지게 하는 것이며, 겸손은 타락한 혈육(血肉-인간)을 천사의 보좌에까지 이끌어 올린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타락한 마귀의 권세 밑에 있는 자를 새로운 피조물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크신 목표이시며, 이 목표를 위해서 마귀의 교만과 정욕과 더불어 하나님의 어린 양의 겸손은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그 날에 영원 속에서 울려오는 큰 나팔 소리는 죄의 근원은 오로지 교만뿐이며, 이를 이긴 것은 겸손뿐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밝히 선포하게 될 것이다. 진리는 이것이다. 곧 그대에게서 교만이 죽지 않으면 하늘의 것이 그대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즉 진리의 깃발 밑에서 그대 자신을 거룩하신 영 앞에 바치라, 겸손의 씨를 뿌리지 않는 자는 하늘에서 거둘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교만을 결코 하나의 도덕적 결함으로만 보지 말 것이며, 겸손을 하나의 인격적 덕성(德性)으로만 보지 말라. 전자는 사망이요, 후자는 생명이며, 전자는 지옥이요, 후자는 천국이다. 그래서 교만한 그만큼 그대 앞에는 마귀가 살아있으며, 그대가 진정하게 겸손한 그만큼 그대 앞에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계신다. 교만이 그대의 영혼에게 주는 해독(害毒)을 만약 그대가 진실 되게 알게 된다면, 그대는 한 팔, 한 눈을 희생하면서라도 그 독사(毒蛇)을 제거해 달라고 애걸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겸손 속에 들어있는 능력, 즉 사람을 거룩하게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그 능력을 알게 된다면, 또는 그것이 그대의 성품에서 얼마나 큰 독소(毒素)를 제해 버릴 수 있는 가를 알게 된다면, 그대는 그 극소량(極少量)이라도 잃지 않기 위해서 온 세계의 발등상 노릇을 하는 것까지도 감수(甘授)할 것이다. (2) 우리는 두 가지 일을 알아야 한다. 첫째 우리의 구원이란 자아(自我)에서 구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우리는 혈육에 속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로는 현상계(現象界)의 만유(萬有)중에서 우리의 구원이 되고 구죽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이 겸손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주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제시하시 첫째의 조건은,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주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제시하신 첫째의 조건은,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범죄한 성품의 일체의 근원은 나(自我)다. 우리의 구원의 가능성은 나를 부인하는 데만 있다. 우리의 구원은 겸손이다. 혈육의 자아(自我)는 타락한 인간의 모든 죄악의 뿌리요, 가지요, 나무 자체다. 타락한 천사들과 범죄한 인간들의 죄악의 모든 근원은 자기 교만이다. 반면에 천국의 생명의 모든 근원되는 덕은 겸손이다. 천국과 지옥의 구분을 짓는 것은 겸손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노력의 초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전혀 교만과 겸손 사이의 투쟁에 있다. 즉 교만과 겸손은 인간을 영원히 소유하려고 싸우고 있는 양대 세력인데, 그 어느 편에 자신을 맡기는가 하는 것에 우리의 영원한 생명은 달려있다. 인생의 최고 복지는 오직 하나뿐, 곧 이 겸손 - 그리스도의 겸손은 따르는데 있다.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속하기 전에는 그는 교만과 자아에 완전히 속해 있다. 그러므로 인생의 선한 싸움이란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겸손을 본받아, 그가 [아담]으로부터 이어받은 [나]라는 우상을 죽이는 일이다. (3) 자아에 대하여 죽는 일 혹은 그 권세에서 벗어져 나오는 일은 혈육의 힘으로서는 아무리 적극적인 대항을 해도 성공할 수가 없다. 자기를 죽이는 오직 유일한 참된 길은 인내와 온유와 겸손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길뿐이다. 자아를 죽이는 길은 이 길 외에 없다. 만일 내가 그대에게 묻기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완전한 인내와 온유와 겸손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그대는 대답하지 않을 것인가? 우리도 이제 그리스도를 위하여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취하는 행동 중에서 가장 귀한 행동이다. 그리스도는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다만 이 미덕(美德)안에만 있다. 이 미덕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좌를 펴신다. 범죄한 인간에게는, 그가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 앞에 나와서 인내와 겸손으로 순종하며, 자기 자신을 죽이기 전에는, 그의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는다. 위는 온유하고 겸손하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공로를 의지하고 그를 앙모함으로서만 우리의 구원을 얻는다. 그만이 우리의 영혼 속에 이 복되고 거룩한 하늘의 미덕을 탄생시키시고 육성시키신다. 우리의 영혼에 온유하고 겸손하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탄생하지 않고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 즉 하나님의 어린양의 그 온유와 겸손과 그 순종이 우리 마음 가운데 탄생했을 때, 그 때가 바로 우리 영혼에 사랑이 탄생된 생일(生日)이 된다. 어는 때이건 그것을 얻은 순간부터라야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이 우리의 영혼을 즐겁게 한다. 이러한 참 평화와 기쁨은 전에 우리가 이른 바 평화니 기쁨이니 하던 모든 사이비(似而非)한 것들을 다 지원버린다. (4) 비결 중의 비결은 이것이다. 즉 참된 기도의 핵심은 겸손이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새로워지기 전까지는, 즉 모든 세상의 욕망을 버리기 전까지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찾는 마음의 갈증이 우리 중심에 불타 오기 전에는, 기도는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마치 학생들이 학과를 공부하는 모양과 같이, 마지못해 하는 경향을 면할 날이 없을 것이다. 그런 기도는 다만 하는 수 없어서, 즉 그것을 무시 할 수는 없으니까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고, 이제 드리는 충고를 받으라. 이 충고대로 하면 그대는 이후로 교회에 나갈 때마다 입으로만 믿는 신자, 위선자라는 자책(自責)을 면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또 그대의 믿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찬송가를 부를 때의 괴로움을 면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라- 교회에 나갈 때 세리(稅吏)와 같은 마음으로 나가라. 세리가 눈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소서”라면서 외부적으로 표시한 태도를 그대의 마음의 테도로 가지라. 최소한도로 마음 속에서라도 이 태도를 굳게 지켜 흔들리지 말라.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간구는 거룩해질 것이요, 그대가 부르는 찬미, 읽는 성경, 드리는 기도, 기타 다른 일들까지 그대의 심령을 온통 기울여 하는 부끄러움 없는 것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대가 세리의 심정으로 맞아지면 낮아질수록 그대는 높은 곳으로부터의 도움을 받고, 큰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친구여, 이것은 비결 가운데 비결이다. 이것은 그대로 하여금 그대가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할 것이며, 중심에 다함이 없는 은혜의 근원을 지어줄 것이다. 또 그대의 마음에 겸손이 유지될 때, 그 마음으로 받은 축복은 현실의 축복도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겸손한 심령에는 무엇하나 헛된 것이 없고, 무익한 것이라곤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거룩한 성장(成長)을 계속한다. 그것 위에 떨어지는 모든 일이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이 된다. 그런즉, 이 겸손의 틀 안에 그대 자신을 가두라. 그 속에는 모든 보화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타락한 영혼의 정욕을 씻어 거룩한 생명으로 만드는 하늘의 물이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는 기름이다. 그런즉 항상 이 안에 잠겨 있으라! 어디를 가나 입고 다니는 옷과 같이, 어디를 가나 묶고 가는 띠와 같이, 그것들을 버리지 말라! 오직 그 속에서만 호흡을 취하라. 겸손의 눈으로만 보고, 겸손의 귀로만 들으라, 그렇게 될 때는 그대가 교화에 나갔을 때나, 집에 있을 때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나, 세상의 모욕을 받을 때를 막론하고 그 모든 것이 그대에게 교훈이 되며, 또 그것들을 합동하여 그대의 신령한 생명의 성장을 도울 것이다.
겸손을 위한 기도 나는 이제 여기에 모든 사람이 시험해 볼 수 있는 매우 착실한 시금석(試金石) 하나을 제공하련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험하는 일이다. 일 개월 동안 세상 모든 일, 세상 이야기를 떠나라, 그대 자신에 관한 것은 무엇이건, 기도하는 일, 읽는 일, 논의하는 일을 중지하라. 전에 하여오던 생각 궁리를 끊어버리라. 그리고 그대의 온 심령의 힘을 기울여 그 한 달 동안 그대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도 계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다음과 같은 기도를 계속하여 드리라.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때나, 걸어 다닐 때나, 앉아 있을 때나 언제나 중심에서는 다음의 한 가지 기도를 열렬히 하나님께 드리라.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크신 은혜를 좇아서 저로 하여금 제 안에 있는 교만을 깨닫게 하옵시고, 또 제하여 버리게 하옵소서. 그것이 어떤 종류이건, 아무리 적든, 어느 정도이든 간에, 또 그것이 악한 영의 역사이건 간에, 혹은 제 본성의 소산이건 간에 그것을 깨닫고 제하여 버리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제가 하나님의 빛과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하여 지극히 깊은 겸손의 비밀을 체득하게 하여 주소서” 그대의 심중 밑바닥에서 일어나는 이 문제에 대한 간절한 생각 이외에는 모든 생각을 물리치라. 그리고 오직 간곡한 심정에서, 흡사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그 고통을 면키 위하여 기도하고 간구하는 듯한 심정으로 조르라. 만일 그대가 이 기도에 그대의 온 심령과 성의를 쏟기만 한다면, 나는 감히 단언하노니, 설사 그대에게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던 마귀들의 두 배나 되는 마귀들이 붙어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쫓겨 나갈 것이요, 그대는 그 여인과 같이 거룩하신 예수의 발 밑에 엎드려 감사의 눈물을 뿌리며 울게 될 것이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