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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료

[스크랩] 주일성수이야기

작성자agaser|작성시간12.10.14|조회수319 목록 댓글 0

주일 성수이야기

어떤 목사님들의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에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열띤 논쟁이 있었는데 사람들의 의견이 모두 달라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맨 뒤에 앉아 있던 젊은 목사가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의장! 법대로 합시다! 법대로!” 그러자 사회를 맡고 있던 연로하신 목사님이 젊은 목사님을 향해서 조용히 말했다. “젊은 목사님, 만일 법대로 했다면, 당신은 지금 지옥 불에 있을 거요.”

은혜의 법, 사랑의 법으로 하는 것이 모든 규정과 절차를 무시한 무질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물과 상황을 좀 더 융통성 있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안식일의 문제, 주일 성수를 생각해 보더라도 그것을 율법의 정신, 주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의 관점에서보다는 외적인, 행위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 어떤 목사님의 집에 모처럼 시골에서 친구 분들이 오셨다. 그런데 마침 집에는 그분들을 대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사모님은 주일이긴 했지만 가까운 슈퍼로 가서 콜라 한 병과 과일과 과자를 사왔다. 그리고 그것을 손님에게 내밀었는데 그 순간 목사님의 분노가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그는 과일과 콜라 병을 던져버리면서 크게 아내를 꾸짖었다. “이게 무슨 짓이요? 사모라는 사람이! 주일에 돈을 쓰다니!” 언젠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도대체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일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이처럼 사람을 경직되고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일까? 대접할 것이 없어서 없는 돈을 털어서 먹을 것을 사온 것, 그런데 그 행위가 주일날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엄청난 죄를 범한 것이 되는 것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려야 하고. 과연 이러한 모습들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신앙생활일까?

▶ 오늘날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주일 성수를 이해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그저 주일이 되어서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서 졸다 오더라도 주일 성수를 했다고 생각한다. 예배를 드리면서 공상을 했던, 설교를 들으면서 어젯밤에 보았던 주말의 명화를 깊이 묵상하던, 일단 그의 몸이 교회에 갔다오면 그는 이제 신앙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교회에 좀 더 오래 머물면서 교제를 나누거나 여러 가지 봉사활동에 참여하면 좀 더 열심히 주일 성수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주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사랑을 원하신다. 그분이 원하는 것은 장미꽃 100송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포함되어있는 그리움, 사모함이다.

애타는 열정으로 그분을 찾는 사람을 주님은 기다리시는 것이다. 주일을 범했느냐, 아니냐는 단순한 한두 가지의 외적인 행위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만에 주일에 친구를 만나 주안에서 즐겁게 교제를 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식사를 하고 밥을 사먹는 데에 돈을 썼다면 그것이 꼭 죄가 되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다. 죄란 행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상태와 동기의 문제이다. 어떤 이가 그의 몸은 종일 교회에 있어서 여러 가지 교회 일에 바쁘게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마음 가운데 형제를 판단하며 시기하거나 말로 상처를 주었다면 그것은 죄이다. 몸으로 열심히 봉사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마음속에 그렇게 수고하는 자신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났다면 그는 진정한 봉사를 했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어떤 선배와 대화를 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형님, 저는 아무리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해 봐도 주일날에 돈을 쓰는 것이 왜 죄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그는 지극히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면서 말했다. “조심해라. 너는 지금 이단으로 가고 있어.”

▶ 신앙의 경직성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주를 사랑하기 원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여 그분께 자기의 삶을 내어드리려고 애써도 몇 가지의, 별로 본질적이지도 않은 아주 단순한 한두 가지의 견해차이로 이단이 되어 서로 벽이 생기고 정죄하는 사이가 된다. 적지 않은 성도들과 교회들이 서로 아주 사소한 것들 때문에 벽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본다. 피아노의 위치에 대한 견해가 달라서 갈라진 교회도 있고, 예배시간의 헌금순서에 대한 이견 때문에 갈라진 교회도 있다. 어떤 교회는 크리스마스에 교회의 떡을 누가 하느냐하는 문제로 갈라져 두 파로 나뉘어져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결국 갈라져 버렸다. 그것들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목숨을 걸고 사수해야 하는 진리이며 기초일까?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실제적으로 알아갈수록 그 사람은 부드럽고 자연스러우며 따뜻해지게 된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렇지 않고 반대로 가면 그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해야 하며 관용에 있어서 자라가야 한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교회의 바깥에 있는 세상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를 해롭게 하는 원수를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진정 융통성과 넓은 마음을 배워가야 한다. 우리가 옳다고 굳게 믿는 것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우리가 몹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의외로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소한 것들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이 신학대학원에 가서 주일날에 돈 쓰는 문제에 대하여 강의를 했다. 그러면서 “주일날에 주님의 일을 하다가 배가 고프면 자장면을 사먹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했다. 어느 학생 하나가(교회에서는 전도사) 손을 들고 경건하게 질문했다. “목사님, 짬뽕은 안 됩니까?”

참으로 단순하고 경직된 의식이다. 자장면을 먹어도 된다고 하면 그저 자장면만을 먹어야 하는 줄 안다. 그런데 참 우스운 것 같지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 중에서 이처럼 융통성이 없는 이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것이 이론과 교리에 강하고 실제적인 삶에서는 약한 피상적인 신앙의 모습인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경직성에서 우리는 벗어나고 발전해가야 한다. 주님을 진정 기쁘시게 하는 것은 어떤 외적 행위 자체보다 그 마음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일 성수를 바르게, 제대로 하는 것일까? 주일에 결코 돈을 쓰지 않고 예배 시간을 엄수하며 열심히 봉사에 힘쓰고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는 것일까? 외적인 행위도 필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행위에 포함된 마음의 자세이다.

주님은 외적인 행위에 지치신 분이다. 성경은 말한다.

사 1:11-12 /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가 바치는 짐승의 제물이 역겨워 죽을 지경이다. 더 이상 그런 것들을 내게로 가져오지 말아라. 너희가 바치는 살찐 숫양에 나는 질려 버렸다. 너희가 잡아서 바치는 제물의 피는 보기도 싫다. 12) 범죄한 것은 뉘우치지도 않는데 누가 너희의 희생제물을 달갑게 받겠느냐? 너희가 내게 살라 바치는 향불도 내 코에는 악취일 뿐이다. 너희가 거룩하게 지키는 초하루와 안식일과 특정한 날에 모이는 금식 기도회가 아무리 경건한 모임인 체하더라도 그것들은 모두 다 사기 행각이 아니냐? 나는 그런 것들과 더 이상 상관도 하기 싫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단순히 성전 마당만을 밟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며 주님의 마음 가운데에 깊이 나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중심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 마음 중심의 사랑을 오직 주님께 깊이 바치는 것이다. 간절함과 사모함으로 주님을 구하고 소원하는 것이다.

행위 한두 가지가 아니라 우리의 전 인격이 간절하고 뜨겁게 주님께 드려질 때 우리는 참된 예배자로서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며 하루 종일 주님을 누리고 맛보며 교통할 수 있는 것이다.

참된 주일 성수, 그것은 마음과 심령 속의 간절함에서부터 온다. 그렇게 중심이 분명할 때 우리는 사소한 것으로 인하여 흔들리지 않게 될 것이다.

주일성수와 교회의 역할

꽤 오랫동안 주일 성수는 교회의 금과옥조였으며 신앙을 재는 판단 기준이었다. 그런데 요즈음 그런 생각은 많이 무너져 내렸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현상은 두드러지고 있다. 그렇다고 예전의 차가운 율법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이는 크리스천 직장인들이 힘들어 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하는가? 다른 모든 경우에서 그렇듯 성경을 통해 주일 기본 원리를 찾고 현실의 상황에 맞게 적용해보자.

주일은 구별된 날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한 후에 하루를 인식의 날로 만드셨다(창 2:3). 이것은 창조의 원리로서 모든 사람은 이 원리를 지켜야 올바르게 살 수 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율법으로 정해서 그날을 지켰다(출 20:8-11). 초대교회는 유대인들이 지키던 안식일 다음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 즉 매주일 첫날을 주일로 지켰다(고전 16:2). 지금도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구별된 날이 있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든 모르든 창조 원리를 따르고 있음을 뜻한다. 주일의 요일은 종교와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구별된 날을 지킨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여기에 바로 창조의 원리가 있다.

주일은 안식일과 구별되는 날이다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 교회의 ‘주일’사이의 관계는 항상 논쟁거리였다. 이 두 날은 창조 원리의 입장에서 볼 때 같은 종류의 날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다. 구약의 안식일은 현재 신약 성도들에게는 그림자이고 그것의 본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골2:16-17).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주일을 다른 요일들과 완전히 구분된 날로 생각하지 않는다. 주일을 다른 날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모든 날을 똑같이 여길 수 있다(롬 14:5).

주일은 구별되는 날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느 한 날을 신성시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구별해서 드리는 주일은 안식일과 구별된다.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어떤 음식을 거룩하고 어떤 음식은 속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음식이 거룩해졌으므로 특정 음식을 속되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두 원리에 입각해서 오늘날 우리의 주일을 생각한다면 욕심을 채우려고 쉼 없이 일하는 잘못을 범치 않으며, 주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율법적 사고로 인해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성수의 원리

주일이 어떤 날인지 기본적으로 이해했다면 그날을 어떤 자세로 지키는가가 과제로 남는다. 모든 성도들이 그날을 지키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저마다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에게 성수는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이들은 주일에 매매 행위를 하지 않는 것까지 주일 성수에 포함시킨다. 이에 대한 원리를 살펴보자.

주일을 지키는 것은 일을 쉬는 것이다. / 안식일의 규칙이 현재 우리 모두에게 실제의 구속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구약의 제사 율법 등이 현재 구속력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셨을 때의 기본 원리는 지금도 그대로 적용된다. 유대인들만을 위한 법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지만, 창조 원리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날에는 모두 쉬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던 일을 중단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육체의 쉼을 얻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사람은 물론 짐승들까지도 쉬도록 한 것은 육체의 쉼이 피조물에게 필수 사항임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과도하게 일하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려야 하며, 일함으로써 채울 수 있는 물질의 욕망도 아울러 절제해야 한다.

②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해서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다 주관하시지만 일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일을 해서 삶을 유지한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런데 일주일에 하루를 쉬면서 우리가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을 믿고 그분을 신뢰하게 된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 주일을 지키는 것은 일을 중단함으로써 육체의 안식뿐만 아니라 영의 안식을 얻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예배다. 예배는 특별한 날에만 드리는 것이 아니며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시간과 장소를 구별할 수밖에 없다.

주일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한 마음으로 찬양하며 가시적으로 그분께 영광 돌리는 날이다. 그것은 한 주간 일하게 하시고 그 열매를 누리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축하하는 일이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사건은 그 당시 큰 논쟁거리였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심으로써 구별된 날을 지키는 원리를 보여주셨다. 구별된 날에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은 금해야 할 ‘노동’이 아닌 적극적으로 해야 할 ‘사역’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의사가 평일에 병원에서 환자를 돌아보았다면 그것은 ‘노동’이지만, 주일에 교회의 지체로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의 병을 치료했다면 그것은 ‘사역’에 해당된다. 이 원리는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런 의미에서 주일에 행하는 많은 활동들은 또 다른 ‘일’이 아닌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섬기는 ‘사역’이다.

주일성수의 현실적인 원리

앞에서 말한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원리를 신실하게 지켜야 한다. 그러나 상황이 변함에 따라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구체적인 방법에는 변화가 있을 수 있다. 원리를 지킨다고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늘 창조적인 변화를 꾀해야 한다. 주일과 관련해 고려해야 할 중요한 현실이 있는데, 직업 가운데는 일을 중단할 수 없는 분야들이 있어 모든 사람이 함께 정한 날을 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주일 성수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구약이 정하는 안식일의 율법은 지킬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대로 지키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유대 율법이 규정한 대로 전 인구가 하던 일을 중단한다면 사회는 완전히 활동을 정지하게 될 것이다. 그 상황을 한번 상상해보라.

다행히 신약 교회의 주일 성수에 관해서는 안식일의 율법과 같은 강제 규정이 없다. 그러므로 주일 성수의 원리를 지키면서 변하는 현실에 적응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주일 성수를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전통적인 의미의 주일 성수 개념을 바꿀 필요는 있다.

일요일을 주일로 삼는 것이 원칙이다 / 지금까지는 현재의 일요일이 부활의 날이기 때문에 이날을 주일로 지켜왔다. 이 전통은 계속되어야 한다. 다행히 현대 대부분의 사회는 일요일을 일반적인 휴일로 지키기 때문에 그 원리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주일을 일요일로 국한하지 말라 / 어느 한 사회에서 휴일을 현재의 금요일이나 토요일로 정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를 들면, 지금 아랍지역에서는 금요일을 휴일로 지킨다. 이런 경우에는 그날을 주일로 지킬 수 있다. 그것을 거부하고 굳이 일요일을 주일로 지켜야 한다고 우길 필요는 없다. 주일은 달력의 날짜가 아니라 주님이 정하시는 날짜이며, 하나님께 영으로 예배드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직장에서 주일을 일요일이 아닌 다른 날로 지킨다면, 같은 맥락에서 거기에 속한 크리스천들에게는 주일이 일요일이 아닌 다른 날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요일에 환자를 돌보아야 하는 간호사들의 경우 일요일이라고 해서 쉬거나 그날에 예배를 드릴 수도 없다. 그런 경우에 다른 날에 쉬면서 예배를 드린다면 바로 그날이 그에게는 주일이다.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지 않는 것은 예외 사항이다 / 그렇다고 일주일 가운데 아무 날을 주일로 정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편의에 따라 주일을 정한다면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주의 날’이 아니라 ‘나의 날’이 될 것이다. 여러 상황 때문에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지 못할 때 예외적으로 다른 날을 주일로 삼을 수 있지만 그것을 ‘자기만의 규칙’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크리스천들에게는 예외적인 상황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율법주의에 넘어지기 쉽다. 심지어 하나님도 율법에 예외를 두셨음을 기억하라. 모압 여인 롯을 유다의 일원이 되게 하여 결국 메시아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이 그 예다. 이렇듯 우리도 예외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예외적인 상황으로 인해 원칙이 무너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래야 세속주의, 편의주의의 우를 범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비둘기 같은 순결함과 뱀 같은 지혜가 모두 필요하다.

주일 성수와 교회의 역할

원리를 말했지만 다양한 상황에서는 예외의 경우가 많이 생긴다. 그렇지만 한두 번 예외를 허용하다보면 신앙을 자기 편의대로 이용하는 세속화의 길로 나가기 쉽다. 그렇다고 해서 예전의 율법으로 회귀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바로 여기서 교회의 역할이 필요하다.

주일에 일하는 문제

우리 주위에는 주일에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전통적인 성수주일을 고집하는 것은 이런 현실을 무시하는 처사다. 교회는 현실을 인정하고 이들을 위한 대안을 제공해야 한다.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린다거나 평일에 하루를 정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주일에 나누지 못하는 교제를 다른 날에 나누도록 교회가 이끌어준다면 이 문제를 얼마든지 보완할 수 있다.

주일에 놀러가는 문제

주일에 놀러가는 문제는 항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교회에서 주 5일 근무제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 문제와 연관이 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주일에 놀러가는 것은 분명히 주일 성수에 위배된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에서 가족과 함께 쉬는 것을 무작정 정죄만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정식으로 일 년에 몇 번 이러한 기회를 갖도록 허용해주면 어떨까? 지나친 죄책감에 빠지지 않으면서 또한 편의주의에서도 성도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례가 전혀 없는 일도 아니다. 교회는 현재 이미 교역자들에게 휴가를 줄 때 몇 주간 주일 예배를 다른 곳에서 드리면서 시간을 보내도록 하기도 한다. 이것을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하자는 것이다.

주일 성수는 여전히 신앙생활에 있어 중요한 요소다. 이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너무 큰 손실이다. 그러나 단순히 옛 것만을 고집한다고 해서 주일 성수가 회복되지는 않는다. 현실의 변화에 적응하면서 주일 성수의 원리를 지키는 것, 이것이 이 문제를 향한 주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성수주일(聖守主日)

구약의 안식일

오늘날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구약시대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을 본받은 것이다. 십계명의 제 4계명은 안식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명령한다(출 20:8). 구약의 안식일은 어떻게 지켰는가?

▶ 시간은 제 7일 하루 종일이었다.

출 20:9, 10 /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7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아무 일도 하지 말라.

▶ 대상은 집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었다.

출 20:10 /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 이유는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 시 제 7일에 쉬셨고 그 날을 구별하여 복 주셨기 때문이다.

출 20:11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 방법은 세속적 일들을 중단하고 휴식하며 성회로 모이며 매매나 오락을 금하는 것이었다.

출 23:12 / 너는 육 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칠 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출 34:21 /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칠 일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출 35:3 /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레 23:3 /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 성회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그의 말씀을 듣는 모임을 가리킨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영적 훈련과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하였다.

느 13:15-22에 보면, 안식일에 노동이나 매매하는 일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므로 금지되었다.

사 58:13, 14 /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여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 벌칙은 사형이었다.

출 31:14, 15 /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7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민 15:32-36 /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거할 때 안식일에 나무하던 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돌로 쳐 죽임을 당하였다.

▶ 중요성은 언약의 표이었다.

출 31:16, 17 /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겔 20:12, 13에 지적된 이스라엘의 죄는 안식일이 언약의 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더럽힌 것이었다.

예표적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안식이다. 안식일 계명은 사실상 하나님 안에 있는 완전하고 영원한 안식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참 안식은 하나님 안에 있다.

성수주일(聖守主日)의 근거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참 안식을 예표하였다. 이 예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땅의 저주와 인생의 수고는 죄의 결과이었다(창 3:1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사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참 안식을 주셨다.

마 11:28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므로 구약의 제 7일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막 2:28 /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골 2:16, 17 /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칼뱅은 말하기를, “초기 교부들은 관례적으로 이 계명을 예표라고 불렀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된 한 날의 외적 준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주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이 폐지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말하자면 그는 안식일의 참된 성취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미신적인 날들의 준수를 완전히 피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은 하나님께 대한 공적 예배의 날이라는 도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 4계명의 성취는 위축된 경건 생활로가 아니고 풍성한 경건 생활로 성취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신약 성도는 구약 성도보다 더욱 자원적으로 하루 이상을 구별하여 지킬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신약교회에 주일을 공적 모임의 날로 주셨으므로, 우리는 억지로가 아니고 즐거히, 자원적으로 이 날을 거룩히 지켜야 한다.

칼뱅은 비록 안식일 계명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으나 교회의 공적 모임을 위한 필요성은 오늘날도 유효하며 따라서 신약교회는 주일을 공적 모임의 날로 힘써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 1618-19년 개혁교회의 정통적 도르트 대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의 제 4계명에는 의식적 요소와 도덕적 요소가 있다. 의식적 요소는 창조 이후 제 7일의 휴식과,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그 날의 엄격한 준수이었다. 도덕적 요소는 어떤 특정한 날이 종교를 위해 적합하다는 사실과, 그 목적을 위해 종교와 그것의 거룩한 묵상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휴식이 요구된다는 사실에 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폐지되었으므로, 주일[주의 날]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엄숙하게 성별되어야 한다. 사도들의 시대 이후, 그 날은 이미 원시 카톨릭 교회에 의해 지켜져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7은 안식일에 관해 단순히 말하기를, “그것은 세상의 시초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때까지는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고; 그리스도의 부활 때부터는 주간의 첫째 날로 바뀌었으며, 성경에서 주의 날로 불리고,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서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 신약성경은 교회의 공적 모임의 필요성에 대해 계속 강조한다. 또한 6일 간의 육체적 노동과 수고로부터의 휴식도 여전히 필요하다. 초대 교회는 모이는 교회로서 본을 보여주었다.

행 1:13-15 /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모인 무리의 수가 한 120명이나 되더라.”

행 2:1 /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2:42 /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 2:44, 46 /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 교회는 모이는 데 의미가 있고 모일 때 힘이 있다. 모이지 않는 교회는 무의미하고 무기력하다. 교회는 모여야 함께 기도하고 교제하고 말씀을 배울 수 있다. 교회는 모일 때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성령의 감동의 역사가 일어난다. 마귀는 교회의 모임을 두려워하며 그것을 폐하려 한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모여야 한다.

히 10:23-25 /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교회는 공적 예배 모임을 위해 날이 필요하였고, 주일은 우리의 구원과 안식을 위해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로서 하나님께서 신약교회의 공적 예배의 날로 주신 그 날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도 시대 때부터 제 7일 대신 첫째 날 곧 주일에 모이기를 시작하였다. 드로아의 성도들은 안식일 후 첫날 곧 주일에 떡을 떼려고 모였다(행 20:7).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게 매 주일 첫날 곧 주일에 각 사람이 이익을 얻은 대로 헌금하라고 교훈하였다(고전 16:1-2). 또 하나님께서 주일을 구별하셨다는 추가적 증거들도 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는데, 그 날은 주일이었다(행 2:1-4; 레 23:16).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인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날은 ‘주의 날’ 곧 주일이었다(계 1:10).

사도시대 직후의 교부들도 주일 집회를 언급하였다. 주후 70-100년경 바나바의 서신의 저자는 “그러므로 또한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제 8일을 기쁨으로 지킨다.”고 말하였다. 2세기 초 익나시우스는 “만일 옛 습관들로 살았던 자들이 새로운 소망에 이르러, 더 이상 안식일들을 지키지 않고 주의 날을 따라 그들의 삶을 산다면.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를 떠나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순교자 저스틴(165년경에 순교)도 “그 도시에 사는 자들뿐 아니라 그 나라에 사는 자들도 다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날에 성경 읽기와 기도와 권면과 성찬을 위해 모이곤 하였다. 그 회중은 일요일에 모였는데, 그것은 이 날이 하나님께서 어두움을 변화시켜 세상을 창조하신 첫째 날이기 때문이며 우리 주 예수께서 이 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2세기 말, 터툴리안은 “우리는 일요일을 기쁜 날로 즐거이 지킨다. 주의 날에 우리는 금식하거나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교회의 공적 예배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하다. 주일 성수가 식으면 교회는 쇠잔해질 수밖에 없다. 대체로 주일 없이 사는 자는 하나님 없이 사는 자리로 나아간다. 주일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회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사회로 타락하고 말 것이다. 청교도 신학자 죤 라일은 말하기를, “영국 기독교의 번성과 부패는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의 보존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당신의 안식일을 제거해 보라. 그러면 당신의 종교는 곧 없어지게 될 것이다. 일반적 규칙으로, 사람의 걸음은 안식일 없는 데(No Sabbath)로부터 하나님 없는 데(No God)로 나아간다.”고 하였다. 우리는 교회의 공적 모임을 위해 주일 하루를 구별해야 한다.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교회로 모이는 주일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주일 예배회들에 열심히 참석해야 한다.

성수주일의 방법

우리는 어떻게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하는가?

① 우리는 주일을 온종일 지켜야 할 것이다. 장로교회 예배모범은 “이 날은 주일인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라고 말했다(1:2).

② 우리는 온 가족이 다 주일을 지켜야 할 것이다.

출 20:10 /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부모는 교회에 나와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 자녀는 학교와 학원에 가거나 집에서 TV를 보고 놀거나 학교운동장에서 공치기를 하고 논다면, 그것은 성수 주일하는 것이 아니다. 또 자신은 주일을 지키지만, 자신의 가게나 사업체를 주일에도 열고 일하게 한다면, 그것도 성수주일이 아니다.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과 우리가 경영하는 일에 종사하는 직원들도 쉬게 해야 할 것이다.

③ 우리는 주일에 세속적 일들을 중단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주일에 쉬는 직업과 직장을 구해야 한다. 또 자신의 권한 안에 있는 일들은 주일에 쉬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주일을 거룩히 지키면서 버는 돈이 복된 돈이다. 주일 없이 번 돈은 어느 날 없어지고 말 것이다. 일주일 내내 일하여 돈을 번다할지라도 하나님이 불어버리시면 하루아침에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시는 돈만 복되다.

의사의 응급실 근무, 군인이나 경찰 등의 비상근무 등 직업상 부득이 주일에 일해야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주일을 지킬 수 있도록 애쓰며 부득이한 경우는 그 처지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주부들은 부득이한 것 외에는 주일에 빨래나 대청소를 하지 말고 학생들은 주일에 학교나 학원에 나가지 말고 시험공부도 중단해야 한다. 우리는 가게에서 물건을 사거나 음식점에 들어가 음식을 사 먹는 일 등도 금해야 하며 자동차 주유도 미리 해야 한다. 성도는 주일에 세상의 회의들이나 행사들이나 잔치들 등에 참여하지 않아야 하며 주일에 축구나 테니스 등의 운동이나 등산, 낚시, 텔레비전 시청, 영화 감상, 스포츠 관람 등을 피해야 할 것이다.

사 58:13, 14 /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장로교회 예배모범에는 “미리 육신의 모든 사업을 정돈하고 속히 준비하여 성경에 가르친 대로 그 날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없게 하라”(1:1), “종일토록 거룩히 안식하고 위급한 일 밖에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폐할지니, 세상 염려와 속된 말도 금함이 옳다”(1:2), “먹을 것까지라도 미리 준비하고 이 날에는 가족이나 집안 사환으로 공동 예배하는 일과 주일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되지 않도록 함이 옳다”(1:3)라고 말하였다.

④ 우리는 주일에 교회의 공적 예배회들로 모여야 한다. 교회는 오전에뿐 아니라 할 수 있는 대로 오후에도 모여야 한다. 교회의 공적 모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말씀을 배우고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고 새로워지는 시간이다. 교회의 예배회들을 귀중히 여겨 지키는 자는 영적으로 자랄 것이지만 그 시간들을 소홀히 여겨 자주 빠지는 자는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며 영적 손실이 클 것이다.

장로교회 예배모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날은 주일인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 공동회집으로나 개체로 예배하는 일에 씀이 옳으며(1:2). 주일 아침에는 개인으로나 혹 권속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히 저희 목사가 그 봉직하는 가운데서 복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함으로 공동예배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준비하라(1:4). 개회 때부터 일심 단합함으로 예배 전부에 참여하기 위하여 정한 시간에 일제히 회집함이 옳고 마지막 축복 기도할 때까지 특별한 연고 없이는 출입함이 옳지 않다(1:5). 이와 같이 엄숙한 태도로 공식예배를 마친 후에는 이 날 남은 시간은 기도하며 영적 수양서를 읽되 특별히 성경을 공부하며 묵상하며 성경문답을 교수하며 종교상 담화를 하며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것이요, 병자를 방문하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 불신자에게 전도하며 경건하고 사랑하며 은혜로운 일을 행함이 옳다(1:6).

성수주일은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시험물이며 또한 성공과 실패의 시험물이다. 신약 성도는 구약 성도보다 더 큰 은혜를 받은 자이므로 하나님께서 여러 날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을지라도 지킬 수 있을 것인데, 주일 하루를 거룩히 지키는 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요 특권이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주일을 거룩히 지키자!

주일성수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배움

1. 한국 개신교의 주일성수 사상의 흐름

우리나라 교회가 주일성수를 신자들에게 어떻게 강조하여 말하고 신앙의 당연한 의무로 하도록 가르쳐 왔는가를 알기 위해서 먼저 한국 개신교의 주일성수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교사에 의하여 전해지고 그 결실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져 온지가 어언 100년이 훨씬 넘어섰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로서 첫 발을 디딘 분이 독일 선교사인 구츠라프 목사이며 그때가 1832년이요 그 후 30여년이 지나서 또 한 분의 다른 선교사가 있었으니 영국 선교사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목사이다. 그는 1865년에 우리나라 땅을 밟았다. 그 후에도 몇 몇의 선교사가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에 공식적인 선교의 문이 열려진 때는 1885년이다. 북장로교회로 불리는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파송되어 온 첫 선교사가 있었으니 그는 언더우드(Horce G. Underwood) 목사이다. 그는 한국으로 오는 중에 들른 일본에서 미 감리교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아펜셀라(Henry G. Appenzeller) 목사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그러니 벌써 100년을 훌쩍 넘어서 110주년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들어온 100년이 되었을 때는 기독교 100주년 기념행사이니 무엇이니 하며 한창 시끄러웠었다.

굳이 우리나라의 기독교의 전래로부터 끄집어내는 것은 개신교가 100년을 훨씬 넘어선 이 시점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단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예배 모범의 한 조항과 관련해서이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은 이분들이 속해 있는 신학교와 관련이 있다. 다행히 개혁주의 신앙을 지녔고 또한 청교도적 정신 속에 있었던 것은 그래서이다.

고신교단에서 장로교회(고신) 50주년 희년 기념으로 발행한 '한국장로교회사'에서는 미 북장로교 외지 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A. J. Brown)이 1911년까지의 한국 초대 선교사들에 관하여 언급한 것을 소개하기를 "나라가 개방된 이후 첫 25년간의 선교사는 전형적인 퓨리탄형의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1세기 전 그들의 조상들이 뉴잉글랜드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안식일을 지켰으며, 춤과 담배 그리고 카드놀이에 기독교 신자들이 빠져서는 안 될 죄라고 보았다. 신학과 성경비평에 관해서는 철저히 보수적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전천년의 견해를 없어서는 안 될 진리라고 주장했다. 고등비평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생각되었다."고 하였다.(한국장로교회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출판국, 2002, p.70)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안식일'은 우리나라 개신교단의 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중요하고도 철저하게 다루어져 왔다. 그리고 선교사의 안식일 준수의 가르침은 그들이 성경관에 철두철미한 '오직 성경'이란 개혁주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보았다. 사실 언더우드 목사 자신은 장로교를 전하기 위해서 한국에 오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의 복음을 공포하기 위해서 한국에 왔을 뿐이다(Ibid, p.73). 이렇게 그는 처음부터 교파적 이해관계에 의하지 않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잇는 초기 선교사들의 성향은 개혁주의 입장에 있으며 청교도적이었다.

선교사들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로 교회가 형성되었는데, 노춘경은 1886년에 언더우드 목사에 의하여 세례를 받은 첫 세례자였다. 그리고 그해에 계속해서 솔내교회에서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가 세례를 받았다. 그런가 하면 1887년에 서울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목사 자택에서 14명의 세례교인들이 모여 조직교회를 설립하는 일이 있었다. 이 조직교회의 설립은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로 그 기록이 남다.

언더우드 목사에 의하여 시작된 한국의 교회는 장로교회였다. 그리고 이 장로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배우는 일에 힘을 썼다. 그런가 하면 성경의 가르침을 좇아서 신앙에 신실하고자 하였다. 특히 한 분 하나님이신 여호와 신앙에서 이방 종교적이고도 이방 풍속적인 삶에서 떠나는 생활을 해 나갔다. 이는 필연적으로 미신인 제사 생활을 금하고, 술과 담배를 끊는 절제와 경건 생활을 가져왔다. 고신 교단에서 발행한 '한국장로교회사' 에서는 이를 "처음부터 주초가 죄가 되기 때문은 아니었고, 이것들이 바른 생활과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었다."고 하면서 "경제상으로나 도덕상으로 보면 술은 없이할 물건이었다."고 하고 있으나(Ibid, p.97)

이러한 것은 장로교회(고신)가 주초를 하는 사람에게 권징을 시행한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1916년에 이은 제 5회 총회에서 술로 인한 권징건이 있었는데 "치리:금년 책벌 467인이요 출교가 189인이온 데 혼인 위반죄와 주일 범한 죄와 술 취하는 죄가 많사오며 해벌은 133인이오며"라고 회록은 기록하고 있다(Ibid, p.97)

초기 선교사에 의한 가르침으로 인한 '안식일'은 '안식일 성수' 곧 기독교의 안식일인 '주일성수'로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주초문제보다 더욱 철저하였다. 주일성수에는 과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목숨을 걸었으니까요. 필자는 한국예수교장로회 총공회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6.25 전쟁 때 거창 지역에 있은 한 사건을 자주 들은 기억이 있다. 당시 거창 지역에 사는 집사 한 분이 계셨는데 그 이름은 배추달이다. 이분이 주일에 북한군이 마당을 쓸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함으로 인해서 총살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주일에 마당을 쓸라는 명령이 주일성수에 대한 시험으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주일성수를 위해 죽을 것을 각오하고 순교를 당했다는 내용은 어렸을 당시 필자에게서는 큰 감동과 감명을 갖게 했다. 그리고 주일성수에 의한 순교자적인 신앙 정신을 더욱 갖게 했다. 그에 따라서 주일에 시행되던 각종 시험(자격증 시험)이나 학교 행사 동원에서도 주일성수를 위해 받는 해(害)를 무릎 쓰고 애를 썼다. 주일성수를 위해 고난의 해를 받고 목숨의 위협을 받았던 사례는 찾으면 많이 있을 것이다.

교단 헌법에서 예배 모범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킬 것

1. 주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의무이니, 미리 육신의 모든 사업을 정돈하고 속히 준비하여, 성경에 가르친 대로 그대로 그날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없게 하라.

2. 이 날은 주일인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 공동회집으로나 개체로 예배하는 일에 씀이 옳으며, 종일토록 거룩히 안식하고 위급한 일 밖에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금할지니, 세상 염려와 속된 말도 금함이 옳다.

3. 먹을 것까지라도 미리 준비하고, 이 날에는 가족이나 집안 사환으로 공동 예배하는 일과 주일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되지 않도록 함이 옳다.

4. 주일 아침에는 개인으로나, 혹 권속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히 저희 목사가 그 봉직하는 가운데서 복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함으로 공동 예배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준비하라.

5. 개회 때부터 일심 단합함으로 예배 전부에 참여하기 위하여 정한 시간에 일일이 회집함이 옳고, 마지막 축복 기도할 때까지 특별한 연고 없이는 출입함이 옳지 않다.

6. 이와 같이 엄숙한 태도로 공식 예배를 마친 후에는 이날 남은 시간은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영적 수양서를 읽되 특별히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며, 성경문답을 교수하며, 종교상 담화하며,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것이요, 병자를 방문하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 불신자에게 전도하며, 사랑으로 교제하며, 은혜로운 일을 행함이 옳다

여기서 주일에 어떻게 지내야 잘하는 것이며 성수하는 것이냐 하는 것은 논외이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겠다만, 다만 주일성수를 왜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본 글의 중심이기 때문에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주일을 거룩히 지킬 것'의 1항에서 3항은 그 근거가 구약의 안식일 규정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이런 규정에 따라서 이렇게 지켰으니까 신약시액에 있는 오늘날의 교회는 그 안식일 규정에 따라서 주일 또한 이렇게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며 또한 지배적이다.

사실 주일성수는 안식일 규정에 의한 성수 개념으로 가르쳐져 왔고, 그래서 그에 따른 주일성수를 해 왔다. 안식일 규정은 시내산 언약의 체결과 함께 주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적 관계를 맺으면서 백성들이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의를 이해하고 순종으로 살아야 할 것으로서 율법을 수여하셨다. 이때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어떤 사상과 정신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종교법인 십계명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서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사는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할 사회법과 그들을 언약의 백성으로 맺어주는 제사와 관련한 제사법, 그리고 제사 보존을 위해서 필요한 절기법, 그리고 절기를 좇아서 제사를 드려 가는 일을 위해서 성전법을 주셨다.

안식일 규정은 십계명의 제 4항이며, 1-3항과의 연계되어 있다.

출 20:8-11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 안식일 규정은 신명기에서 다시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갖는 애굽의 종으로부터의 구원과 관련하여서 주어진다.

신 5:12-15 /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교단 헌법의 예배 모범에서 '주일을 거룩 지킬 것'은 바로 이러한 안식일 규정에 따른 것이다. 그러니까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인 십계명에서 '안식일 규정'에 관한 율법 조항을 충실히 지키는 것에 의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예배모범의 '주일을 거룩히 지킬 것'은 율법의 문자적이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 법의 조항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소교리문답(제 57-61문답)을 통해서 교리적으로 가르쳐지고 있다. 제4계명인 안식일에 관하여 질문하고 답하는 것에서 말이다.

▶ 그렇다면 말이다. 여기에는 이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서 올바르게 지켜야 할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그에 따른 설명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안식일이 무엇이기에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가에 올바른 이해 속에서 올바르게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 해석과 설명이 없이 단지 안식일법[안식일 규정]이 이러니까 이를 좇아서 주일을 이렇게 성수하라는 식이다. 여기에서 주일을 지키는 문제에서 율법주의에 관한 불필요한 논쟁이 생깁니다.

그러면 성경은 주일을 어떻게 말씀하시고 있는가? 하는 관점으로 접근하여서 이 문제를 성경에서 풀어가야 하겠다. 그래서 주일을 성경에 의한 신앙으로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네 교회가 전통있게 그래서 제도적으로 지켜 나가고 있는 주일성수는 과연 성경적으로 하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서 신앙으로 하고 지켜 나가는 것입니까?

2. 구약에서의 안식일에 대한 살핌

(1) 창조 사역에서 계시하여 주시고 있는 안식 개념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6일 간에 걸쳐 창조하신 사역의 내용을 각 날을 통해서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2장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그 대략을 언급하십니다. 천지와 만물은 6일 간에 걸쳐 창조되었다. 각 날마다 하나님의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사역이 있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여섯째 날에 이르러 마지막 창조 사역을 하시고 마침내 모든 창조 사역을 마치셨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복을 주시고 그날을 거룩히 여기셨다. 이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일을 다 마치시고 안식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안식하심에 대하여 바른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 안식하심은 구약의 율법에서의 ‘안식’이나 오늘날 주일에는 ‘안식’한다고 하는 것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안식한다고 하는 것을 어떤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가 하면, ‘휴식, 휴면, 휴양’의 차원에서 이해를 하고 있다. 철저하게 ‘쉰다’는 개념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동작을 중지한 상태에서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편안한 쉼」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교회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였었는가 하면 “주일은 안식하는 날로서 편안하게 휴식하여 몸을 회복시키는 날인데 성도들이 예배 외에도 여러 기관에서 봉사하므로 실은 안식하기보다는 파김치가 되어 주일 저녁때만 되면 나가 골아떨어지니 이는 주일을 잘못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에는 성도들이 예배 후에 참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시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여 주일 예배 후에 가족 간에, 또는 성도 간에 야외에 나가 거닌다든지 레저 스포츠를 즐기는 것을 허용한 적이 있다. 아니 오히려 권장하였다.

안식을 잘못 이해하면 이런 실수나 잘못을 범하기가 아주 쉽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하심’을 잘 이해를 하여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안식하심 속에서 함께 안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두 번을 거듭 말씀하고 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하시던 동작을 중지하고,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셨다.’를 의미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안식하심은 그냥 ‘안식하시니라’란 말만 보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앞의 말씀과 반드시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안식하심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라고 하셨고, 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보면 말이다. 그동안 창조 사역이 행해진 여섯 날은 하나님 안에 들어 있다. 창조 사역에서 등장하는 처음의 이 여섯 날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사역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동일한 개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한 창조 사역을 시작하고 마치실 때마다 ‘아침’이 되며 또한 ‘저녁’이 되는 날의 개념을 가졌다. 이는 여섯째 날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일곱째 날이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이 날에 안식하셨다고 말씀하신다.

▶ 그러면 말이다. 하나님께서 일곱 번째의 날이 되어서, 그래서 그 날이 와서 사람들이 땀 흘려 일한 후에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물에 씻으며 두 팔과 두 다리 쭉 뻗으며, ‘아이고, 이제 좀 쉬겠구나!. 이제 살만하다.’고 하는 그런 인식 속에서 이제 ‘모든 일을 마쳤으니 이제는 쉬자.’고 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평안히 쉬셨다는 의미에서 안식을 하셨다고 하는 것이겠는가? 아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모든 사역이 마쳐지고 그래서 여섯째 날에 이어서 일곱째 날로 불려질 그 다음 날이 창조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갖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안식하셨다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기를 '안식하시는 하나님'으로 말씀하여서 엿새 동안의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 있는 피조물인 천지 만물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있어서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존재'의 관계에 놓여 있는 '날'에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말씀과 함께 또한 '(그)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하나님의 안식 개념이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창조하시는 일을 다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게 복을 주시고 그날을 거룩히 여기신 것과는 같은 개념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히 여기신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관계성이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일곱째 날이 특별히 '거룩히' 여겨지는 것은 그날에 복을 내리시는 일이 있기 때문이며, 이는 천지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의 관계에 있게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에서이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주이시다. 천지 만물은 자신들의 주이신 하나님의 복 속에서 존재한다. 일곱째 날은 이런 관계성이 확인되는 구별되는 특별한 은총이 베풀어진 날이었다. 그런 면에서 앞서의 엿새와는 확실히 다른 거룩한 날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모든 만물의 주로서 복 있게 다스려 가시는 날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천지 만물에게 복을 내리신 것 그 성격은 다름 아닌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데서 찾아진다.

▶ 그러면 말이다. 여기서 말씀하시고 있는 하나님의 ‘안식’과 그분 안에서 천지 만물이 누리는 ‘안식’은 어떤 의미에 의한 것일까? 먼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7째 날이 갖는 날의 의미부터 알아야 한다. 창세기 2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7째 날은 창조 사역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대로 순서상으로는 6째 날 다음에 오는 일곱째 날이다. 그러나 이 7째 날은 그 다음에 다시 1째 날로 이어지고 그래서 다시 2째 날이 되고 셋째 날이 되고 … 해서 또 다시 7째 날을 맞이하고 하는 그 7째 날이 아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하나님의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사역에서 자연스럽게 “아침이 되며 저녁이 되니 이는 ○째 날이니라.”였으나, 6째 날 이후에는 다시 “아침이 되며 저녁이 되니 이는 ○째 날이니라.”는 더 이상 언급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날인 7째 날은 창조 사역을 마친 이후에 천지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의 복을 누리게 되는 ‘안식하는 날’로서 날의 총체적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7째 날은 새로운 시작의 날이다. 창조의 사역은 6째 날로 마쳐졌다. 7째 날이 창조 사역이 마친 끝 날이 아니다. 엿새간에 걸친 천지 만물의 창조 사역이 마쳐지고 이제 그 천지 만물에게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의 복을 누리는 날이 주어져 시작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7째 날은 천지 만물에게는 안식하는 시작의 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7째 날은 7번째의 날이요 그래서 다시 6번의 날이 지나고 나서 7번째에 맞이하는 그런 날이 아닌 [이때는 하루, 이틀...이 지나서 며칠 째이고 하는 개념이 없다. 날이 사시와 연한을 이루지만 창조 당시에는 ‘아침이 되며 저녁이 되니’외에는 날수를 세고 연수를 세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천지 만물이 안식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복을 누리는 날을 살아가는 날의 총체적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 그러면 말이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안식, 그리고 천지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안식은 어떤 의미로 쓰이는 용어인지를 본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의 창조 사역을 이루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다. 마지막 창조 사역을 마치셨을 때에는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만족해하시며 기뻐하시는 모습의 극치를 알게 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만족하심과 그로 인해서 갖는 기뻐하심은 하나님 자신이 원하시는 창조의 뜻대로 되어진 것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 만족하심과 기쁨을 그때만 갖는 것이 아니라 7째 날에 복 주어 그 창조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해져 가는 것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가지신다.

여기에서 날의 거룩성이 있다. 날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날이 ‘거룩한 날’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한 천지 만물에 복을 내리시는 날을 삼았다. 그렇게 해서 7째 날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날을 거룩히 여기셨다.

▶ 그렇다면 말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7째 날에 안식하셨기 때문에 그 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 날을 거룩히 여기시는 것인데, 그것은 곧 안식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식 속에 천지 만물을 안식하게 하는 복을 내리시는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이 되며 저녁이 될 때까지 그 날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 만물은 하나님이 내리신 복인 안식 속에서 존재를 한다. 이것에 의해서 천지 만물은 복 있는 존재로 다루어지며, 이렇게 하나님이 내리신 복을 받아 복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날들은 함께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 7째 날을 거룩히 여기신 것은 그래서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안식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일곱째 날과는 서로 연결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 셋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식이다. 그러니까 창조물인 천지 만물은 자신을 창조하신 주이신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복을 받음으로써 이러한 복을 누리는 날을 살아가는 복 있는 존재인 것이요 그런 날로서의 날은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 그러므로 천지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안식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관계 속에 있게 하는 것으로서의 날에 있을 때에 비로소 날은 의미가 있다. 거룩한 날이라고 말이다.

이렇게 창조 받은 천지 만물은 안식하는 날에 있다. 그러니까 안식의 상태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고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 만물이 안식하는 이 안식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날에서 안식하시는 하나님과 그가 지으신 피조물의 관계를 맺어주는 안식은 단순히 그냥 있는, 그러니까 단순히 피조물이 하나님 안에서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의미는 아닐 것이다. 분명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피조물이 존재하는 목적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안식일 해석에서 명백하게 드러났지만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서 있으며, 그 안식일의 주인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날이 의미를 지니고 존재하게 하셨다.

▶ 그렇다면 말이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에게 안식하게 하는 것으로서 날을 주신 것은 천지 만물로 하여금 안식하는 그 날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게 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것의 이해는 우선 첫 번째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에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날에 복을 주셨다든지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든지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창조하신 천지 만물이 아주 만족스러워서 대단히 흡족해 하시는 상태에 놓여있는 것을 표현하는 언어적 묘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한 뜻에 의해 되어진 창조가 온전한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계속하여 드러냄을 의미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는 것이요 이러한 창조 상태를 지속해 나가시는 것으로 7째 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히 여기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데서 찾아진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 만물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신 그 기쁨을 주는 일을 천지 만물은 이제 날에서 해 나간다. 날이 사시를 이루고 일자를 이루고 연한을 이루는 그 속에서 말이다. 어떻게 말일까? 우리는 그 이해를 다음 두 번째로 창 1:26-30에서 할 수 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히 만족스러워하시고 흡족해 하시는 기쁨을 가지신 것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상태에 계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과 다른 피조물이 각각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는 말씀을 하신 위치에 있으면서 본성을 발휘해 나가는데 있다. 모든 피조물이 안식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표한 존재요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행사하는 대리자로서 만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리는 것에서, 그리고 모든 자연 만물은 그의 다스림을 받아 각각의 위치에서 제 기능과 역할을 다하는 것에서 안식한다. 사람에게서 이는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는 것을 금지하는 말씀에 의해서 나타났다. 사람은 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지키는 한에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관계성이 성립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한에는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도 정상적으로 성립된 상태에 있었고 이런 세상은 행복이 극치에 이르는 세계였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존재하는 데서, 곧 하나님이 주신 복에 따라 각각 그 존재 목적대로 본성을 발휘하면서 살아가는데서 하나님께서 심히 만족스러워하시며 흡족해 하시는 안식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평안이 조성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과 자연 만물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선포되어 온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이 선양됩니다. 그 세상은 평화로 충만한 세계이다. 하나님은 이 평화를 기뻐하시고 또한 충분히 즐기십니다. 그러한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며 기뻐하고 즐거움을 갖는 사람과 자연 만물의 행복함이 있다. 이것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그 안식 안에서 함께 안식하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이렇다.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이랬다.

▶ 그런데 말이다. 특별히 사람이 안식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함께 안식을 누리는 것과 관련하여서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심으로 자신을 안식하시는 분으로 계시하시고 또한 그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사람을 하나님의 안식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사람이 안식을 하게 하신 것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본성으로 지니고 있는 종교성을 자신을 창조하신 주 하나님을 향하여 표현하며 발휘해 나갈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창조 사역을 마치신 하나님은 이제 모든 피조물들과 교통하시는 가운데서 자신의 거룩한 속성을 나타내시고 친히 영광을 받으실 일을 하시므로 영광을 받으시니 곧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경배]하는 것에서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적 개념에서 안식은 휴식이나 휴면이나 동작의 중지와 같은 정적(靜的)인 것을 의미하지 않고 동적(動的)이며 진행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이제 그 일을 행하신 목적에 따른 결과를 계속 누리시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7째 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신 데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 하나님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즐기고 하나님을 공경하여 높이며 받들어 섬기는 예배[경배]적인 삶을 사는 것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셨으며 그 하나님께서 그 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그래서 사람이 날을 안식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함께 안식한다는 것은 이런 질적인 것이다.

(2) 십계명의 제4계명으로 제도화된 안식일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인해서 안식이 제공해 주는 축복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고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로 있는 한에는 그들에게 안식을 충분히 맛볼 수 있도록 일련의 조치를 취해주셨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것이었다. 십계명에서 안식일 규정을 말씀하셔서 제도적으로 이러한 안식일을 가져나가게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안식일 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차지하게 하시는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나가는 삶의 내용으로 있게 하신 것이었다.

이 안식일 규정은 시내산에서 언약식을 체결하고 율법을 주시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에 준행하여서 살 것을 명령하실 때 십계명을 선포하신 것에서(출 20:1-17), 그리고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가운데 가나안을 차지할 새로운 이스라엘 세대와 언약의 재확인을 시켜 주시며 십계명을 선포하게 하실 때(신 5:1-21),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서 십계명을 선포하실 때 다루어졌다. 그런데 안식일 규정에 있어서 이런 저런 금지의 규정을 두어서 규제하는 말씀을 두신 것은 사실 그런 어떤 것으로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일에 훼방을 받을 수 없다는 하나님의 뜻의 강한 의지가 들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식일 규정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앎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께 악을 행하여 죄를 짓는 일로 나가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 백성을 그 악으로부터 지켜 가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성실함으로 지키는 모습을 통하여서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그러한 신실한 자들이 있지만,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 규정에 의해서 제도적으로 하나님의 배려를 받아 나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렸다. 어떻게인 줄 아는가?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것에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안식일 규정을 제도적으로 어기는 일은 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그들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매주 지키는 국가와 민족적인 절기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만이 아니라 이와 연관되어 있는 각종 절기를 철저하게 지켜나갔다. 안식월, 안식년, 희년을 지켰으며, 삼대 명절로 불리는 큰 절기를 지켰으며, 대속죄일을 지켰다. 그 외 이스라엘은 1년 전체가 절기와 관련되어 있다. 한마디로 절기 생활이 이스라엘의 생활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제도적으로 지키지 않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 규정을 주신 하나님의 배려를 저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왜인가?

선지자 이사야는 이사야 1장 1-20절을 읽어보시라.

하나님의 이러한 탄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를 지키지 않은데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하는데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들은 각종 절기를 성회로 모여 지켰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를 받지 않고 물리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기름지고 살진 가축들!, 다 필요 없다고 손을 내저으신다. 아무리 많은 제물을 가지고 나와서 하나님께 이런 것 저런 것을 구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귀를 막고 듣지 않겠다고 하신다. 왜일까? 그런 그들에게 정작 있어야 할 것들, 그러니까 성회로 모이는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일을 외면하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악을 멈추고 의를 행하며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 의와 인과 신을 행하라고 말이다. 이것 없이 기름지고 살진 가축들을 매번 성회로 모일 때마다 가져온다 한들 그들의 검은 속내만 뻔히 드러낼 뿐이다. 자기 욕심에 이끌려 탐욕으로 가득 찬 그들의 속내에 하나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신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함이 없이 나간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외면하신다. 기름지고 풍요한 복!, 전혀 기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에게 원수를 붙이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이 산당 제사에서나 취급되는 그런 분으로 인식되고 있는 한에는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계시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으로 맺어지는 관계성 속에 있는 것인데 그 확인을 율법 준수를 통해서 해 나가자.

(3) 안식일 제도와 예수 그리스도

▶ 그런 까닭에 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탐욕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제도를 다른 절기와 함께 그대로 두신다. 그리고 절기가 있는 한에는 제사 또한 존재하며 성전도 유효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그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 안식을 모형으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예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체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형으로 하고 있고 예표하고 있는 내용을 성취하실 때까지 한시적으로 주신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과 절기의 주인으로 계시며 자신의 몸으로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하신 후에는 더 이상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제도와 관련한 율법은 폐지가 된다. 그런 까닭에 성전을 무너뜨리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시오 그 성전 안에 모든 자신의 백성들이 성전의 각 일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 3:16 / 여러분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영이 당신의 성전인 바로 여러분 속에 계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까?

엡 2:20-22 / 여러분은 바로 사도들과 예언자들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그리고 이 건물의 머릿돌은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21)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 아름답게 점점 커가며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습니다. 22) 여러분도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또 서로가 연합하여 하나님께서 사시는 이 집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 불러 모은 자들로 성전을 이루게 하고, 이제는 더 이상 천막이나 돌로 지은 성전에 있지 않게 하신다. 그러면 어디에 있게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게 하여서 그 몸의 한 부분으로 있게 하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되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몸의 머리로 계신다. 곧 주이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관계성에 의해서 이제는 ‘교회’란 용어로 말씀하신다.

엡 1:22-23 /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고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만드시고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 그렇다면 말이다. 성전 제도가 없어진 것은 이것을 필요로 하게 하였던 절기가 없어졌기 때문이며, 절기의 폐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드려 하나님에게 화목제물이 되게 하심으로써 더 이상의 제물이 필요하지 않게 하신 데 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로 계시며 그분의 몸으로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섬김에서 직접 제사와 절기와 성전이 갖는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누린다. 그에 따라서 안식일 제도는 더 이상 날의 의미를 갖지 않으며 따라서 안식일을 성수한다는 개념은 더 이상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일을 안식일 성수의 개념에서 주일성수한다고 하는 것은 주일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며, 주일을 아직도 안식일로 여긴데 따른 잘못된 것이다.

3. 구약 시대의 안식일 율법이 신약 시대의 주일이라는 견해에 대한 반론

이제 구약 시대의 안식일이 주일이라고 알고서 이 안식일 개념에서 지키고 있는 주일에 관하여 보겠다. 그러므로 우리네 교회가 강조하는 주일성수 개념이 맞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오늘날 교회는 ‘주의 날’인 주일(主日)을 지킨다. 그런데 그러한 까닭으로서 구약 시대의 안식일 율법을 근거로 내세운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은 십계명에서 네 번째 계명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이다. 그리고 안식일 준수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신 데 따라서 한다. 구약 시대에서 안식일 준수는 분명히 그러한데, 신약 시대에서 주일을 구약 시대에서의 안식일 준수에 맞추어서 그대로 지켜 나가려고 하는 것은 왜 일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① 그것은 교회는 기독교의 안식일인 주일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주일이 기독교의 안식일인 사실은 틀림없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에는 구약 시대에서의 안식일을 준수하는 규정까지도 그대로 주일 준수법으로 받고 있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성수, 곧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데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 나가는데 필요했던 규정에 의해서 주일 또한 거룩히 지켜나가고자 한다. 그러기에 주일을 제도적으로 지켜나가는데 힘쓴다.

② 주일을 엿새가 되는 6일 다음의 날인 ‘제 칠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말이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안식일 율법이 주어졌을 때 안식일은 유대력에 의해서 제도적으로 ‘제 칠일’에 지켜졌다만, 신약의 교회에서 주일은 그 ‘제 칠일’ 다음 날인 안식 후 첫날로서 더 이상 ‘제 칠일’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오늘날에 엿새 날인 토요일 다음 날 ‘제 칠일’을 기독교의 안식일인 주일로 삼고 안식일 규정에 의해서 주일로 지킨다는 것은 개념상 맞지 않다.

▶ 기독교에서 주일이 ‘제 칠일’이라는 개념을 갖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곧 새벽 미명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을 하시고, 그 부활의 생명이 누리는 안식에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두심으로써 더 이상 안식일 제도에 얽매이지 않게 하셨다. 사도 시대의 초대 교회가 주의 날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하는 모임을 가져 나간 것은 그들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혜를 기념하는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을 띠어 갔다만, 이때의 ‘주의 날’은 안식일 제도에 의한 ‘제 칠일’의 개념에서가 아니었다. 초대교회가 주의 날을 가진 초기 모습은 날마다, 곧 모든 날이 그들에게서는 ‘주의 날’이었다.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모여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며 기도하고 떡을 떼는 날은 그 날이 어떤 날이든지간에 ‘주의 날’이었다(행 2:46).

▶ '주의 날', 곧 주일이 한 날로서 공적인 날로 자리 잡아 나간 것은 이방지역에 교회가 세워지면서이다. 이와 관련한 성경 구절을 세 곳에서 볼 수 있다.

행 20:7 / 주일에 우리는 성만찬을 나누려고 한자리에 모였다. 우리는 그 다음날 떠날 예정이었으므로 바울은 밤중까지 설교를 계속하였다.

② 고전 16:2 / 여러분도 한 주간동안 얻은 수입의 얼마를 별도로 떼어서 매주일 첫날마다 헌금을 해주십시오. 그래서 내가 그곳에 닿은 뒤에야 한꺼번에 헌금을 모으느라 애쓰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그 액수는 주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셔서 얻은 수입에 따라 정하십시오.

여기에서 ‘안식 후 첫날’과 ‘매주일 첫날’에 공적 예배의 모임을 가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방 교회에서 안식 후 첫날은 공중 예배일이었다. 그러나 행 20:7과 달리 고전 16: 2은 안식 후 첫날이라는 설명이 없이 ‘매주일 첫날’로만 언급되고 있어서 이 날이 매 안식 후 첫날로서의 매주일 첫날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그러니까 ‘매주일’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인 제 칠일 후 첫날에 부활하신 ‘그 날’이라는데 대한 확증을 갖지 못한다. 매주간에 어느 한 날을 ‘주의 날’로 가졌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매주일 첫날’이 안식 후 첫날이라고 분명하게 여긴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우선 예수님의 사도들은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되었으며(요 20:19), 그 기억에서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안식 후 첫날을 ‘주의 날’로 삼고 공중 예배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신앙적인 모습을 가져 나갔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서 안식 후 첫날은 이제 유대인들이 지키고 있는 안식일과는 전혀 다른 날의 의미를 갖다. 그러니까 유대인이 지키는 안식일 개념으로서의 주일이 아닌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인에게서 안식일 다음 날은 전혀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날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기에 ‘매주일 첫날’이란 의식을 가졌다. 그리스도인은 그 매주일 첫날에 규칙적인 공중예배를 드렸다.

③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 계 1:10의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에서도 ‘주의 날’이 언급되고 있는데, 다분히 의도적인 묘사이다. 그는 요한계시록 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받고 있음을 그려내고 있다. 그는 밧모섬에 유배됨으로 해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을 함께 가져나가고 있지는 못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특별한 은혜를 주의 날에 받았다.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가 있는 시점이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매주일 첫날을 규칙적인 공중예배를 드려간 때 이 후이기에 그가 ‘주의 날’에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계시를 받은 그 ‘주의 날’은 단지 그가 한 주간의 어느 한 날을 주의 날로 삼고서 주님을 묵상하는 중에 있었다고 보기보다는 ‘매주일 첫날’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모두에서 언급되고 있는 ‘주의 날’[주일]은 그때의 그 날이 오늘날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듯이 구약 시대의 안식일을 주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사도들이 안식일 제도를 주일로 그대로 옮겨 놓았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며, 단지 토요일이 일요일로 전환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일요일은 기독교의 안식일이 아니다.

기독교의 안식일이라고 말하는 주일은, 이 날이 구약 시대에서의 안식일과 같은 개념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일요일을 주일로 삼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토요일이니 일요일이니 하는 요일의 의미가 없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경험하며 그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기에 ‘날’에 의하여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실체이시오 모든 날의 주인이십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모든 날에서 안식한다.

▶ 해서, 신약 시대에서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을 지키는 의무를 지우지 않았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의무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어떤 명령도 내려져 있지 않고 따라서 명시되어 있지도 않다. 사실 새 언약 안에서는 어떤 법에 의해서와 어떤 방법으로 고정시켜 놓은 날이 없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주로 모시고 섬기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생을 살아간다. 그러니까 일생을 주의 날로 가져나가는 것이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매주일 첫날을 주일로 삼고 규칙적으로 공중예배를 드리는 것은 전적으로 자의적인 것이요 자원과 자발적이다. 구약 시대의 안식일 율법에 의한 강제적인 의무가 아니다.

▶ 오늘날의 교회는 태양력을 따르고 있으며, 일요일을 공휴일로 가지고 있는데 이 날을 매주일로 삼는 첫날로 택하여 지키는 것은 전적으로 자의적이다. 이 날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고 이 날을 주일로 삼으라는 명령이 주어져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에 그분의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이 새로운 삶을 가져나가기 위해서인데 이 일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연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은 이 날이 구약의 안식일이어서가 아니라 주의 날의 공중예배를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이기에 공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되는 연합을 하여서 예배를 드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으며, 교회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일을 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느 한 날을 주의 날로 정하여 가질 필요가 있다. 여기에 모범이 되는 표준문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옛언약의 율법이다. 안식일 제도는 그런 면에서 주일의 모형과 그림자 역할을 한다. 어떤 원리 속에서 주일을 지켜야 할지를 알게 해 준다.

'주일', 곧 '주의 날'을 그리스도인은 가졌다. 이것이 날마다 모임을 가졌던 초기 때와 그 후인 점차 어느 한 날을 택하여 정기적인 모임을 가져 나간 때와는 모임의 성격에서 변화가 있었겠다만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날을 가졌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주일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였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기념을 가졌다. 당시 이들에게서 주의 날을 갖는 것은 의무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관계된 문제였다. 그러기에 주일을 기억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였다.

4. 오늘날 '주일성수'의 폐단을 가져온 큰 원인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7-8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 안식일과 그날을 지키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7절 / 보통 시간의 일부분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자연의 법칙에 합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적극적이고 도덕적이고 항구적인 명령으로써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명령하여 이레(7일)중 특히 하루를 안식일로 택하여 하나님께 거룩한 날로 지키게 했다. 이 날은 창세 때부터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까지는 일주간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부터는 일주간의 첫날로 변경되었다. 성경에서는 이날을 주일이라고 부른다. 이날은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교도의 안식일로 지켜질 것이다.

8절 / 이 날을 신자는 마음으로 잘 준비하고 미리 모든 일을 정돈해서 주님께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이 날에는 하루 종일 모든 일이나 말이나 생각에서 떠나서 거룩하게 쉬며 이 세상의 고용주나 오락에서도 떠나 쉬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쓰며 필요한 의무에나 자비를 베푸는 일에 바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교회의 유일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교리적 면에서 역사적 개혁주의요, 교회사적 면에서 전통적 정통주의이며 보수주의이다. 우리는 성경 원리 면에서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근본주의이며, 세대주의에 비하여 개혁주의 입장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러한 장로교회가 신앙고백의 기준으로 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크게 의존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안식일과 지키는 방법’에서는 이 제목 자체부터 수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목이 이러하기에 내용 또한 구약 시대에서 이스라엘에게 적용하였던 안식일 제도법을 그대로 신약 시대의 주일에서도 적용하는 우(遇)를 범하고 있다. 그러니까 주일은 일주간에 마지막 날에서 단지 첫날로 변경되었을 뿐이지 구약의 안식일 율법 그대로 준수하는 것이었다.

▶ 우선 안식일에 대하여 보자.

① 여기서는 안식일 준수는 적극적이고 도덕적이고 항구적인 명령으로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한다고 규정한다.

② 안식일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까지는 일주일의 마지막 날이었으나 그리스도의 부활부터는 일주간의 첫날로 변경되었는데 그 날을 주일이라고 부르며 이 날은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교도의 안식일로 지켜질 것이라고 말한다.

▶ 안식일을 준수하는 방법에 대하여 보자.

① 이날을 그리스도인은 마음으로 잘 준비하고 미리 모든 일을 정돈해서 주님께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② 이날에는 하루 종일 모든 일이나 말이나 생각에서 거룩하게 쉬며 이 세상의 고용주[노동]나 오락에서 떠나 쉬어야 한다고 말한다.

③ 모든 시간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쓰며 필요한 의무에서나 자비를 베푸는 일에 바쳐야 한다고 말한다.

▶ 이러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안식일과 지키는 방법'은 돌트 회의(1619년)에서 채택한 돌트 신조에서 안식일에 대한 진술과 같다.

1. 하나님의 율법의 제4계명 안에 의식적이고 도덕적인 요소가 있다.

2. 창조 후에 일곱째 날에 안식과 유대 백성들이 특별하게 지킨 그 날에 대한 엄격한 준수는 의식적이었다.

3. 그 명확하고 지정된 날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구별되었고,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그리고 거룩한 묵상을 위하여 필요한 만큼 안식이 요구되어지고 이 요소는 도덕적이다.

4.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구별되었고, 기독교인들은 진지하게 주일을 거룩하게 하도록 의무로 정하였다.

5. 이 날은 사대 시대 이래로 초대교회에서 항상 지켜졌다.

6. 이 날은 사람들이 자비에 의해서 요구되어지는 것과 현재적 필요들을 제외한 모든 노예적인 일로부터, 또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오락으로부터 안식하는 근거 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바쳐져야만 한다.

“주일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할 때 그 모범을 안식일 율법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주일을 의식적이며 의무적인 안식일 개념에서 그대로 지키게 하고 더욱이 항구적으로 지키게 할 때 이는 분명 유전(遺傳)에 의한 형식주의에 집착하게 됩니다. 십계명의 제 4계명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은 분명 항구적이다. 십계명이 언약의 율법인 한에는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준칙(準則)을 제시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관계성을 지속해 나갈 수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십계명에서 다른 계명이 그 효력을 발휘하는데 4계명인 안식일 계명만이 무효할 수는 없다. 따라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다른 계명이 그러하듯이 항구적이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법 정신이요 사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본의(本意)를 알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를 계시해 주고 있는 것이 십계명이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곧 하나님 나라의 법치주의(法治主義)를 보여주고 있다.

안식일에 관한 규례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띠고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어두는 역할을 한다. 안식일에 온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한다. 이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기 위해서, 그러니까 안식일을 제대로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해 여러 규례는 필연적이다. 제도는 그래서 존재한다. 유대 종교지도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한 큰 원칙 속에서 이런 저런 규례를 세칙으로 만들어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규례를 지키는 전통을 좇을 때, 곧 유전을 좇아서 안식일 계명을 지킬 때는, 가령 안식일에 노동이나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저 옛날 유대인들이 일정한 거리 이상은 걸을 수 없었으며 일정한 무게의 짐 이상은 들고 갈 수 없었듯이, 일정한 거리 안에는 차를 타서는 안 되고 걸어야 한다든지 하는 논리가 팽배하게 되며 이를 신앙 양심 문제로 끌고 나가게 됩니다. 그럴 때 여기에는 편법이 횡행하게 됩니다. 저 옛날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일정한 거리 이상이 넘게 되면 잠시 쉬었다 다시 걷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 안식일에 성전을 향하여 여행하는 동안에는 음식을 가지고 가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이는 아무리 배고픔을 겪을지라도 금지를 하였다. 이는 사람에게서만이 아니라 가축에게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안식일에는 먹이도 주지 않으며, 암탉이 알을 낳으면 먹지 않는다든지 하였다. 참으로 지나친 규제이며, 심히 부정적인 규제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안식일 규례는 전시대적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전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해 나간 폐단을 우리 한국 교회는 지금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우선 율법은 유대인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에게는 율법을 주시지 않았다. 구약 시대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타국의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고 있는 특혜를 동일하게 받으려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언약 안에 들어와야 했다. 그 중요한 표식이 할례였다. 할례를 받은 이방인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안식일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은 설사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좋게 여겨서 그 모습을 본 따 자기들 나름대로 안식일을 지키며 살지라도 그들이 언약의 백성이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복을 누릴 수가 없다.

▶ 그런데 말이다. 신약 시대에서는 율법을 이방인들에게 멍에로 씌우지 못하게 하였다. 교회에서 아직도 유대주의적 사상 속에 있는 자들이 이방인을 교회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각종 율법의 규례로 이방인들을 묶어두려고 했으나 사도는 이를 금하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신 후에는 율법은 더 이상 정죄의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네 귀퉁이에 매여 있는 보자기에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먹지 못하도록 금지한 뱀과 새 등 온갖 종류의 짐승이 들어있는 것을 보여주며 “내가 깨끗하게 하였으니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잡아먹으라.”고 하시는 환상을 보여 주신 것에서(행 10:9-16)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은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선물로 받는데 있음을 알게 해 나갔다. 그러기에 정결법을 폐기하셨다. 이제 유대인에게서는 여러 율법의 규례를 지키는 것에서 그들의 의로움이 있지 않기에 이방인에게 여러 율법의 멍에를 씌우지 않게 하셨다. 그러므로 안디옥에 있은 교회의 첫 번째 회의(바리새파에 속해 있다가 신자가 된 사람들 몇 몇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된 이상 모세의 가르침대로 할례를 받고 유대인의 관습과 의식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일로 인해서 이 문제를 결정하기 위하여 회의를 열었다)에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인 우리와 이방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시지 않았고 우리들에게 하셨던 것과 똑같이 그들도 믿음으로 깨끗함을 받게 하셨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어째서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질 수 없었던 무거운 짐을 그들에게 지게 하여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제 멋대로 뜯어고치려 합니까?”(행 15:9-10)라고 하였으며, 야고보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 사람들에게 유대인의 율법에 복종해야 한다고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먹지 말고, 음행을 하지 말고,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행 15:19-20)는 결의를 이끌어 냈다. 야고보는 유대인의 율법을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을 아무 소용이 없는 형식에 얽어매는 것은 단지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에 복종할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런 야고보가 그럼에도 4가지의 금지 규정을 둔 것은 율법 준수의 차원이 아닌 다만 약한 양심을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거나 음행의 악행에 미혹되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시험의 요소를 안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마시는 것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을 자극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 그렇다면 말이다. 이는 안식일 규례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이런 저런 안식일 규례로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는 율법의 모든 규제에서 해방되어 자유한 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율법이 멍에가 될 수 없듯이 이는 유대인에게서도 율법이 멍에로 작용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의 의식법에 관해서는 분명 그렇다.

그런 까닭에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 38주일 103문답에서는 제 4계명과 관련하여 가르치기를 “제 4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에 “첫째로, 복음의 사역과 가르치는 일이 지속되고 특별히 내가 안식일 곧 안식의 날에 하나님의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례에 참여하고 공적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구제를 실천하는 일이다. 두 번째로, 나의 일생 동안에 악한 행위를 중지하고 주께서 성령을 통하여 내 안에 역사하시도록 하여 이 세상의 생애에서 영원한 안식을 시작하게 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4계명과 관련하여 주일에 대하여 갖는 이해는 형식에 집착하는 안식일 준수의 잘못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신중하게 보호하고 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구약에서의 안식일 규례에 의하여 지키는 안식일 준수란 뉘앙스를 갖지 않도록 ‘안식일 곧 안식의 날’이라고 하여 이 안식의 날 준수를 의식적이고도 의무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언급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여기서 ‘안식일 곧 안식의 날’이라고 표현한 것은 물론 주일의 의미에서였다. 그리고 또한 ‘나의 일생 동안에, 이 세상의 생애에서 영원한 안식을 시작하게 하는 일’이라고 말하여서 구별된 안식의 날이 갖는 개념을 구약 시대의 안식일과 달리 하고 있음을 표현하였다. 그래서 이 날에 그리스도인들이 안식하면서 특별히 행하는 일은 지극히 교회 중심적이니 하나님의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례에 참여하고 공적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구제를 실천하는 일이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일생 동안에 악한 일을 중지하고 주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역사하시도록 하여 이 세상의 생애에서 영원한 안식을 시작하게 하는 가치와 유익을 갖고 있는 날이 우리가 한 날을 구별하여서 안식의 날로 삼는 주일이라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5. 제 칠일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차이에 대한 칼뱅의 견해

교리와 교회 생활에서 종교개혁을 이룬 사람으로 보는 칼뱅은 제 칠일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차이에 대하여 기독교 강요 2부 8장 3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울은 이 날(제 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를 가지고 그리스도 신자들을 심판의 기준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그것은 '장래 일의 그림자'인 때문이라고 했다(골 2:17). 이러한 이유로서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아직도 날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갈라디아인들에게 한 '수고가 헛된 것'이 될까 염려하였다(갈 4:10-11). 그리고 그는 로마인들에게 누구나 한 날과 다른 날을 낫다, 못하다고 구별을 한다면 그것은 미신이라고 언명하였다(롬 14:5).”

기독교 강요 2부 8장 34절에서는 주일을 지키는 신령적인 뜻이 무엇인지를 말하였다.

“그러나 초대 교회 사람들이 안식일을 ‘주일’이라고 부르기로 대치한 것은 신중한 검토 없이 한 것이 아니었다. 옛날 안식일에 의하여 묘사된 참 안식은 주님의 부활로서 종국하고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 그림자를 끝장낸 바로 그날(무일;無日)은 그림자인 의식에 집착되지 않도록 하라고 그리스도 교도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나는 또 ‘7’이란 수에 붙잡혀서 교회로 하여금 그것에 얽매이게 하려는 생각도 없다. 그리고 나는 만약 미신만 믿지 않는다면 축제의 날을 정한다고 해서 교회를 정죄할 마음도 없다. 그것은 그날이 단지 훈련과 잘 조성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되는 경우에 그런 것이다.”

칼뱅의 견해를 보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안식일 계명(제 4계명)에 의하여 묘사된 참 안식은 종국하고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이 폐지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더 이상 안식일은 ‘날’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의 그림자인 의식에 집착하지 않을 것을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안식의 실체이시므로 그가 계시는 곳에서는 이제 모든 상징은 사라집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안식의 본체이시기 때문에 그가 나타나신 지금은 더 이상 그림자를 좇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날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을 철저히 피해야 할 것을 말하였다. 그래서 그는 ‘제 칠일’이란 수에 교회가 붙잡히지 말라고 하였다. 비록 교회의 유익과 질서를 위해서 하루를 정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여 모일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제 칠일’에 모여야 한다는 것을 고집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날을 절기로 지키는 미신을 타파하는 것이 적당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성일들이 폐기되었다고 하면서, 주일을 가장 엄격하고 신중한 의식으로서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며 다만 교회 내의 질서 유지에 필요한 대책으로서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지어 주일을 거룩하다고 믿어 미신화 하는 사람들을 미친 사람이라고까지 서슴없이 말하였다(기독교 강요 2부 8장 33절).

6. 안식일의 단절성과 연속성에 대한 이해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율법의 의식법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늘날의 교회가 주일성수의 준수를 강조하지만, 사실 이는 율법의 의식법에 대한 성경의 이해의 부족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말이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주일성수의 준수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구약의 안식일의 단절성과 함께 연속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구약의 안식일의 단절성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이후에는 더 이상의 구약의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계명임을 내세워 안식일의 준수를 구약 시대에서만이 아니라 신약 시대에서도 온전히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에서 율법의 의식법은 한시적으로 존재하였던 것으로 그 역할을 끝내고 폐기[폐지]되었다는데 동의한다. 여기서 ‘폐기’는 국어사전의 의미로서는 오래된 서류 같은 못쓰게 된 것을 없애버리거나, 조약이나 법령 따위를 무효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율법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다. 그래서 히 8:13에서는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옛 언약을 새 언약으로 바꾸시면서 새로운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이제 옛 언약은 더 이상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또한 10장 9절에서는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하심이니라.”고 하였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훨씬 더 나은 제도를 세우시려고 첫 번째 제도를 폐지하셨다.”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변역’[바꿈]으로 말해지기도 한다. 히브리서 7장 12절에서 “제사 직분이 변역(變易)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라고 말씀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계통의 제사장을 보내실 때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하여서 하나님의 율법도 바꾸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꾸는 뜻인 변개, 변경으로 쓰이는데 제도를 바꾸는 개념에서 ‘개혁’이란 용어로 사용한다. 그렇다고 하면 ‘의식법의 폐기’란 더 나은 새로운 법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더 나은 새로운 법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옛것인 의식법 자체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어서 없애버리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다’는 참된 의미는 율법의 의식법은 그 자체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 법은 이제 더 나은 새로운 법으로 바뀌어서 주어졌기 때문에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새로운 법이다. 그러니 설사 율법의 의식법을 좇아서 안식일을 지킬지라도 이 제도의 준수가 그에게서는 폐기 처분한 종이에 불과하다. 아무런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제도에 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의 의식법의 단절성과 함께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연속성이다. 율법의 의식법은 문자적으로는 더 이상 지켜져야 할 필요가 없어졌으나 율법의 원리와 정신은 영구한 것으로 그 원리와 정신은 신약 시대에서도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 원리와 정신은 신약 시대에서도 변하지 않으면서 더욱 의미 있게 지켜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강조하여 하는 말이 있다. “구약과 신약의 원리에 따라 안식일 준수를 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렇지만 안식일 문자 그 자체에 구속(拘束)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되 율법적인 의무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날과 모든 것을 주셨으니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깨닫고 그것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심지어는 “믿음이 아직 어려서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성도에게 안식일과 헌금의 원리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주일을 온전히 성수하지 않는 사람들을 율법의 잣대를 적용해서 정죄하거나 위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구약의 안식일 원리와 그 정신에 따라서 안식일[주일]을 의무는 아니지만 해야 하며 또한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아주 이상한 괴리를 말하고 있다.

과연 율법의 원리와 정신은 영구한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 원리와 정신은 신약 시대에서도 변하지 않고 적용되어서 더욱 의미 있게 지켜져야 한다. 그런데 말이다. 그 적용과 더욱 의미 있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원리’와 ‘정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원리와 정신을 적용함에 있어서 구약의 안식일이 갖는 ‘제 칠일’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끌어다가 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율법의 의식법의 단절성에서 ‘더 이상 문자적으로 지켜져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하면서도 구약에서의 모세 율법이 규정한 제 칠일로서의 안식일로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안식일과 십일조가 지닌 기본 원리와 정신을 좇아서 하나님 앞에서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고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최소한의 도리와 의무는 제 칠일인 일요일은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안식하는 날로서 이 날을 주일로 구별하여 주셨기 때문에 엿새 동안은 우리가 땀 흘려 일하고 최소한 일곱째 날은 거룩히 지켜 ‘주일성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해진 날」에 ‘최소한’이라는 제도의 기준을 갖다. ‘최소한’이란 그야 말로 가장 적은 것을 뜻한다. 그 이하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이면 더욱 좋다는 뉘앙스도 품고 있다. 그렇다면 말이다. 이는 안식일의 원리와 정신을 잘못 적용하는 것이요 이렇게 해서는 그 원리와 정신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날 수 없다.

주일이란 말이다. 구약의 제 칠일이란 날의 안식일이 신약의 제 칠일이란 날의 안식일로 변경된 것이 아니다. ‘제 칠일’이란 날의 기준은 문자적으로 없어졌다. 그러니까 그러한 규례가 없어진 것이요 이제 그 규례에 의한 제도는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엿새 동안은 땀 흘려 일하고 일곱째 되는 날을 새로운 안식일로 삼는다는 것은 더 이상 제도화되고 적용이 되지 않다. 그러니까 다시 날을 변역[개혁]하지 않는 한에는 바뀔 수 없는 그런 ‘날’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안식일의 원리와 정신의 연속성은 신약 시대에서 어떻게 적용되는 것일까? 우선 구약의 안식일은 그 자체가 의식법이란 제도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지기 전에 그것은 하나님만을 섬기는 경배[예배]의 종교성을 띠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성격이다. 그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의 의식법으로서의 안식일 규례는 그것이 표상하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참 안식을 모형하고 예표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칼뱅은 십계명의 제 4계명에는 모형(typical)의 요소들이 있다고 하였으며, 안식일 계명을 예표(figure)라고 부른 초대 교부들에게 동의했다. 안식일에서 진정 알게 해 주려고 한 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그 분 자신이 진리이며 그 분의 임재로 모든 모형들이 사라진다. 그가 몸체이며 그의 출현으로 그림자는 뒤로 젖혀진다. 감히 말하건대, 그는 안식일의 참된 성취이시다.”고 말하였다. 제 4계명에서의 안식일이 규례에 의해서 의식법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지만 이것이 참 안식을 모형하고 있고 예표하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마침내 참 안식의 실체가 드러나고 나타났을 때 모형적 요소는 폐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의식들(ceremonies)이 예표했던 것들의 실체들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눈앞에 제시되었다.”고 말하였으며, 어떤 날들도 ‘그 자체로서 거룩한’ 것은 아니며 날들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일부’는 아니라고 말하였다.

제 4계명인 안식일이 종교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의식법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그래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과 관련하여서 ‘이렇게 지키라’는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만, 이는 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주어진 것이지 전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만고불변의 원리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의식법이라는 것은,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은 더 나은 새로운 법이 주어지면 그것을 따라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의 안식일이 갖는 의식법 자체가 신약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지는 연속성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과 연속성을 갖는 것은 의식법이 아닌 종교성이다.

신약 시대의 교회에서는 구약의 안식일에서 계시되고 있는 참 안식의 관계에 놓여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이루신 구속 사역이 가져다 준 부활의 생명에 의하여서 다시는 정죄를 받지 않고 죽음 아래 있지 않으며 영원히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참 안식의 기쁨을 누리는 자로 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주어진 더 나은 법인 새로운 법이 지닌 원리와 정신에 의해서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안식일을 구약의 방식에 의해서가 아닌 교회에서 새롭게 적용하여서 가져나갈 수 있다. 그것은 ‘제 칠일’이란 한 주간의 한 날, 그날이 한 주간의 마지막 날이든 또는 첫날이든, 그래서 매주일 마지막 날이든 매주일 첫날이든지간에 한 날[하루]을 안식의 날로 삼고서 그 날을 ‘주일’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이제 모든 날이 율법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에서 자유하여 안식의 기쁨을 누리는 날이다. 그러기에 ‘제 칠일’이니 ‘매 주일 첫날’이니 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더 나은 법인 새로운 법이 지닌 원리와 정신에 의해서 새로운 제도를 자신들에게 적용해 나갈 수가 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셔서 자신들을 만나 자신이 다시 살아나신 것과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신 주님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자 신자들이 모여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며 기도하며 성찬을 기념할 수 있도록 ‘날마다’ 모임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점차 이방 지역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면서 일정한 날에 모임을 갖고 공중예배를 드릴 필요성이 대두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 안식 후 첫날이요 이 날에 주님을 만나 뵙고 기뻐하며 평안의 은혜 속에 있는 기억을 갖고 있는 그들로서는 이 안식 후 첫날을 ‘매 주일 첫날’로 인식하고서 ‘주의 날’로 정하여 정기적인 예배 모임을 가져 나갔다. 그리고 이것은 곧 다른 이방 지역의 그리스도 교회들도 따랐으며 그리스도 교회에서 ‘주의 날’은 ‘매 주일 첫날’로 공적화 되었다.

‘주의 날’을 ‘매주일 첫날’로 삼고, 그래서 ‘주일’로 지켜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오랜 교회의 전통이다. 그리고 태양력에 의한 일요일을 주일로 삼고 매주일에 교회가 공중예배[공적예배]를 드려온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오랜 교회의 전통이다. 그러나 ‘주의 날’은 일요일을 ‘주일’로 부르며 그 주일을 지켜온 ‘그 날’[일요일]만은 아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날이든지 간에 주의 이름으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중예배의 모임을 가지면 그 날은 ‘주의 날’이다. 가령 우리네 교회는 일요일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적 모임을 갖고 있으며 그래서 이 날을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듯이 또한 교회가 수요일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적 모임을 갖는다. 그렇다면 그 수요일이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몸을 이루는 일을 위하여 모임을 갖는 날로 삼고 있다면 그 날은 주일로 지내는 일요일과 마찬가지로 ‘주일’, 그러니까 ‘주의 날’이다. 이 주의 날은 다른 요일에도 가질 수 있다.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목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에도 말이다. 모든 날을 주의 날로 가지면 좋다. 그런데 그 모든 날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할 수가 없어서 일요일과 수요일에만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면 그 날은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이 함께 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는 공적 성격을 띠게 되어서 주의 이름으로 함께 하는 ‘주의 날’[주일]이 됩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일요일에 한하여서 ‘주일’로 부르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주의 날’, 또는 ‘주일’이란 용어가 지닌 의미를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신약 성경에서 ‘주의 날’이라는 표현으로 말하고 있는 곳은 요한계시록 1장 10절인데 이 표현에서 ‘주의’라고 번역한 단어는 ‘퀴리아케’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헬라어 형용사 ‘퀴리아코스’의 여성형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요한계시록 1장 10 이외에서는 고린도전서 11장 20절의 ‘주의 만찬’이라는 표현에만 나타나는 형용사로 그 의미는 ‘주님께 속한’이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의 날’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몸으로서의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날을 뜻한다. 따라서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하여서 그분과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지 않는 한에는 ‘주의 날’이 아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공중예배를 위한 공적 모임을 갖지 않는 날은 ‘주일’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어느 날이든지 간에 교회가 공적으로 어느 날을 ‘주일’로 정하고서 그 날을 ‘주의 날’로 삼는다고 하면 그 날에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을 이루는 실질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

7. 맺는 말

이제 말을 맺겠다. 구약의 안식일인 ‘제 칠일’의 준수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가? 그렇게 생각하는가? 만일 성경의 가르침과 상관없이 그것이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이라면 그렇게 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다만 율법의 후견인의 도움을 받아서 해 나가고자 한다면 그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말이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법을 알게 되어서 ‘주의 날’을 일요일에 갖고 주께 속한 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믿음을 갖고 있는가? 그러면 그렇게 하시라. 만일 일요일만이 아니라 수요일도 ‘주의 날’로 삼고 교회의 몸을 이루고자 하는 믿음을 갖는가? 그것이 자신의 믿음이라면 그렇게 하시라. 또는 그 이상이 자신의 믿음이라면 그렇게 하시라. 그 누구도 그러한 여러분의 믿음의 자유를 억압할 수 없다. 사실 주일이 우리에게서 매일이 아니고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날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교회의 생명체로 살아간 것으로 또한 주일에 그리스도의 지체된 믿음의 형제와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생명을 소유한 자로서 그 생명으로 생명있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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