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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설교 모음

작성자agaser|작성시간17.04.08|조회수5,452 목록 댓글 0

배혁목사 호산나! 예수님! 마21장 01절 ~ 절

오늘은 종려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했던 모습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이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앞으로 그에게 있을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있을 십자가의 죽음을 결단하고 그 성문을 통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그 길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비장하고 두렵고 떨리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보면, 죽음의 두려움 속에 떨고 계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축제와 같은 분위기입니다. 제자들의 온 무리가 나와서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 폅니다. 그리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합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소리를 높여 부르며, 소란스럽게 환영하는 모습을 보고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불평을 합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 곧 이 말씀은 지금 그들이 외치는 그 소리는 지극히 정당하고,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소리지르지 않으면, 입도 없는 돌들이 나서서 외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열렬히 환영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예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며, 예수님을 환영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은, 유대인이 꼭 지켜야 할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 동안 여러 번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지만, 이번에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특별한 준비를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나귀, 그것도 나귀의 새끼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타고서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하십니다. 누가 보더라도 아주 어색하고 우스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것은,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오시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기뻐하며,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가지 나무를 흔들면서 환영을 합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 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과거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9:9절에 "시온의 딸들아 기뻐하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하셨습니다.

시온의 딸들은 예루살렘의 사람들,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스가랴 선지자 당시에 예루살렘은 황폐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들은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암울한 시대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으로 있는 상황하고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앞으로 예루살렘 사람들이 크게 기뻐해야 하는 일이 생기는데, 그것은 그들을 구원하실 왕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왕이 어떻게 오십니까? 나귀의 작은 것 그것도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모습을 보니, 나귀새끼를 타고 그들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했던 그 말씀이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처럼, 왕되신 구원자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일제히 기뻐하며 즐거이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되심을 즉각 믿고 기뻐하며 환영했던 것입니다.

2. 그런데 안타깝게도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을 보면서 기뻐하며, 자신들을 구원하실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데, 바리새인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불쾌해 합니다. 그들은 선지자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믿지 못하기에 예루살렘에 주신 큰 기쁨을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바리새인들에게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소리지르지 않으면 이 돌들이 외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돌들까지라도 외쳐야 했던 예수님을 향한 사람들의 외침은 무엇입니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고 부르짖습니다.

호산나는 아람어로, "오, 구원해 주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예수님을 자신들을 구원하실 구원자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외칠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제지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이를 제재하는 바리새인들을 저지하시고, 그 호산나의 외침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분으로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을 향하여서 "호산나, 구원해 주십시오" 외치는 것은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이 ‘호산나,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라는 외침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드릴, 그리고 그분의 구세주 되심을 증거하는 외침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 소리를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호산나의 외침은 이 천년 전 그들만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여전히 외칠 믿음의 고백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필요한 구원이 예수님께 있음을 믿고 '호산나' 외쳐야 하는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들인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같이 다른 나라에 의해 핍박을 받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영혼들이 죄의 권세, 사탄의 권세에 사로 잡혀서 멸망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살았지만 영적으로 죽어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전쟁과 테러가 많아 졌습니다. 깨어지는 가정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학교에는 총기사고와 폭력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마약이 어린 학생들 사이에까지 퍼져 나갑니다. 경건한 자들을 유혹하여 쓰러뜨리는 악한 권세가 팽배해 있는 세대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외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우리 자녀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 사회를 구원해 주십시오, 주기도문의 한 구절과 같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더욱 간절한 기도와 외침이 필요한 때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구원한 대상으로 다른 것들을 향해서 외칩니다. 돈이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돈을 향해서 호산나 외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권력을 향해서 호산나, 좋은 직장을 향해서 호산나, 세상을 향해서 호산나 외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세상에 썩어질 것들이 나의 인생을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호산나’ 외침의 대상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도행전 4:12절 말씀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이름인 줄로 믿습니다.

호산나 외침은 우리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세상의 다른 신을 섬기지 않으며,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를 구원하시며, 나의 가정과 사회를 구원할 유일한 구세주로 믿고 의지하겠다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믿음의 고백과 외침이 돌들이라도 나서서 증거해야 할 중요한 외침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바리새인과 같이, 예수만이 구원자라는 고백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왕이요 구세주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3. 그런데,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외치며, 구원의 왕으로 고백할 때에 필요한 태도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전적으로 신뢰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사람의 시선을 끌기 위한 쇼가 아니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왕으로 오신 구원자가 겸손하여, 나귀의 새끼를 탔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겸손하시고, 그리고 그 겸손의 모습으로 세상을 구원할 것을 미리 예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할 ‘호산나’의 방법은 “겸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귀가 멍에를 매듯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지시고, 사람들에게 핍박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워주는 십자가를 멍에와 같이 지고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나귀를 타시고 오심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셨고 그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결코 백마를 탄 개선장군과 같이 자신의 말발굽아래에 모든 것을 밟아 무너뜨리는 방법이 아니셨습니다.

구원의 방법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에서 나타나는 폭력과 힘을 가지고 세상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 방법은 사탄의 방법입니다. 호산나 외치는 숱한 사람들이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답게 강력한 힘을 규합하여서 로마에 대해서 대항하고, 그래서 이스라엘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강력하게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오시면서 온 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류를 향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죽어갈 때에 다른 이들을 살릴 수 있고,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A.W.헌터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사단의 방법이다.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사람의 방법이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강력한 힘을 보여 달라고 그렇게 열렬하게 환호하고 기대했는데, 예수님은 아주 무기력하게 어떠한 저항도 없이 로마병사들에게 붙잡혔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이 잡히시는 것을 막기 위해 한 제자가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귀를 잘랐을 때에 예수님은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다.”라고 하시며 꾸중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저항없이 로마인들에게 끌려 가셔서 채찍을 맞고, 사람들 앞에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재판장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라고 할 때에 사람들은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라”빌라도는 다시 묻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질문할 때에 더욱 거세게 사람들은 외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사람들이 저럴 수 있을까? 며칠 전에는 ‘호산나’하며 구원해 달라고 열렬히 맞아들이더니,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돌변할 수 있는가? 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큰 배신감을 느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더 큰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저렇게 무기력하게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며칠 전 예수라는 청년에게 기대를 가지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환호했던 자신이 수치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의 호산나의 외침은 분노로, 배신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받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호산나 외침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하시고 계획하신 대로 호산나 외치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나의 기대와 방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기대와 예수님의 방법을 의지하며 믿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를 외치는 자들이 빠지지 말아야 할 함정이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고통과 어려움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에 홍해바다를 갈라서 그 사이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에서 내려 광야생활을 먹게 해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막고 있던 견고한 성 여리고성을 어떤 무력도 사용하지 않고 무너뜨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들을 말씀한 마디로 고쳐주셨습니다. 죽어서 냄새가 나는 사람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게 사람의 방법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구원하고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겸손한 모습으로, 맡겨주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방법이 나의 생각과 방법과, 내가 생각하는 때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반드시 우리를 하나님의 기막힌 때에 기막힌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그 어느 때 보다도 호산나의 외침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어느 때보다 죄가 많고 유혹이 많은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왠만한 죄는 죄처럼 느껴지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비롯한 많은 종교인들도 이성과 돈의 유혹속에서 무참하게 무너져 내립니다.

세상의 바쁨과 분주함, 물질숭배사상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관심하지 못하게 합니다. 물질이 풍요하고 건강하면 그것이 복이라고 여기며 영혼의 갈급함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시대로부터 우리는 구원함을 받아야 합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자연의 재해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진과 해일, 홍수, 토네이토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우리 가정과 자녀, 교회와 사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필요 없을 정도로 문제가 없습니까?

그 어느 때보다 구원이 간절한 때입니다. 돌들이라도 외치게 하겠다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도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호산나’를 외쳐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듣고자 원하시는 ‘호산나' 외침은 나만의 구원을 바라는 이기적이거나 , 미움과 증오의 마음에서 나오는 구원이 아닙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고,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는 사랑의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호산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우리의 마음을 합하는 외침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것, 육신적인 어려움과 고통에서 해결받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우리가 해결받아야 할 문제이긴 합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구원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만들어지는 많은 문제들, 이것을 위해 중보하며 호산나 해야 합니다. 이 세대를 구원해 주소서, 이 사회를 구원해 주소서.

특별히 고난주간을 우리가 지날 텐데, 이 세대 가운데 구원이 필요한 상황들을 돌아보시면서, 호산나의 간절한 외침이 있기를 바라고, 그 응답이 우리의 가정, 교회 사회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김충식목사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마21장 01절 ~ 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공생애 사역의 마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최북단 지역인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으신 후 방향을 바꾸어 남쪽인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실 때까지 계속 배척받는 여행을 하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길의 기사가 마태복음 16장-20장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여행은 유대로 가시기 전(마 16:13-18:35), 갈릴리에서 유대로(마 19:1-20:16),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노정(마 20:17-21:11)으로 이어집니다. 본문 1절을 보면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라는 말씀으로, 예수님 무리가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감람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기간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사역을 하거나 복음을 전파하거나 말씀을 가르치거나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고난 받으시고 자신을 내어 주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살펴보면서, 예루살렘 입성이 주는 영적인 교훈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신성과 주권을 가지신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능력과 권위와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모든 사실을 알고 말씀하셨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전지(全知)하신 신성과 주권을 가지신 왕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으셨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주권을 행사하는 왕임을 알기 원하셨습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는 모두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미리 나귀를 사서 준비해 놓았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주님을 흠모하는 사람이 제자들이 달라고 할 때에 기꺼이 내어놓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전지하시며, 왕의 권위로서 무엇이든 가지실 수 있는 주권을 행사하는 분임을 나타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의 순종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기 어렵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인생의 최우선순위가 되었고,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라도 믿고 받아드릴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이끌어져 왔는지도 모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수님께 칭찬 받은 서머나 교회가 있는데, 그 곳에는 위대한 순교자 폴리캅 감독이 있습니다. 폴리캅 감독은 서머나 교회의 초대 감독으로 직접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에 대해 배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기만 하면 살려주겠다는 로마 사람들의 말에 굴하지 아니하고, “주님은 나를 84년 동안 한 번도 떠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떻게 주님을 부인하겠는가?”라고 대답하며 빌라델비아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작렬하게 순교했습니다. 신앙을 위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때문에 과감하게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작은 이권 때문에, 작은 쾌락과 만족 때문에 신앙을 바꾸는 경우는 없습니까?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고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주권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알리기 원하시는데, 예수님을 확실히 알고 항상 주님 앞에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성공을 위하여 스펙(spec) 쌓기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행이 교회까지 침투하여 교회도, 목사님들도 외향적으로 드러나고,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에 많은 부분을 치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현대 교회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생명은 영성에 있고, 말씀에 있습니다. 주님의 인격과 품성에 있습니다. 내가 성공하고 축복 받으려는 것보다 먼저 주님을 알아가기를 원하며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과 모습을 가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의 생명이 있습니다.
어느 선박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님이 직원들에게 일요일에 출근해서 도착한 선박에 실린 짐을 함께 내려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한 청년이 ‘사장님, 저는 일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내일은 주일이기에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겠습니다’ 라고 하자, 사장은 회사보다 교회를 더 중시하는 직원의 말을 듣고 그를 해고시켰습니다. 얼마 후 사장은 절친한 친구로부터 새로운 은행을 열게 되었는데 믿을 만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사장의 머리의 떠오른 사람은 자신이 해고한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이라면 환경이나 여건에 따라서 믿음과 신념을 바꾸지 않고 믿고 은행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바보 같더라도 진실하고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는 사람을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이 세우시고 쓰십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만왕의 왕 되심을 나타내셨는데,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을 인정하는 순전한 믿음의 고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겸비하고 온유한 평강의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본문 4-5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내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스가랴서 9:9를 인용한 것으로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의 예루살렘 입성을 나타낸 것으로, 이 예언이 실제로 성취되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5절에 나타난 시온의 딸은 예루살렘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예언의 성취자로 오신 왕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즉흥적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철저하고 완벽한 계획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진행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늘에 속한 왕으로서 입성하시지만 자신의 온유함과 비하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이나 마차, 수레를 대기시키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 하는 것과 왜 둘을 필요로 하셨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주님은 먼저 나귀를 타셨고, 예루살렘 성 가까이 이르셨을 때 나귀 새끼로 바꿔 타신 것 같습니다.

나귀나 나귀 새끼는 온유와 겸손과 평화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신분적으로 낮다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온유와 겸손한 성품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왕은 오만한 위엄으로 오지 않으시고, 온순함과 겸손함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의 왕들의 입성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 나는 멍에 메는 짐승을 탈 것이지만 나의 온유함을 보이기 위해 나귀 새끼도 또한 함께 가야 한다. 이는 하늘에 속한 왕이 얼마나 온유한가를 사람들이 알도록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초라한 모습을 보면서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자신을 철저히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싸우거나 경쟁하기 위해 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겸비하고 온유한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하늘에 속한 위대한 왕이셨지만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거나 군림할 의도가 전혀 없으셨고, 온유의 왕, 평화의 왕으로 온 주님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를 원하셨습니다. 프랑스의 위대한 황제였던 나폴레옹(Napoléon)은 최후를 맞이하면서 “나는 무력으로써 세계를 정복해 보려고 했으나 한 치의 땅도 얻지 못하고 말았는데, 십자가에서 죽어간 예수는 벌써 세계를 다 지배하고 있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평생 전쟁을 통해 세계 정복을 꿈꾸었지만 한 치의 땅도 얻지 못했는데, 온유와 겸비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은 모든 인류를 다스리는 권세와 온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모습을 닮기 원합니다. 바보 같아도, 미련한 것 같아도,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말을 타기 보다는 나귀와 나귀 새끼를 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주님은 열렬한 환영을 받으시는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본문 7-8절을 보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겉옷을 나귀와 나귀 새끼 등에 얹어서 주님을 타시도록 했고, 무리들도 그들의 겉옷을 주님 가시는 길에 펼쳐서 겸비하신 주님을 존귀케 했습니다. 옷을 나귀 등에 얹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왕을 영접하거나 왕의 즉위를 나타낼 때 행하는 극적인 예절에 속합니다. 실제로 북이스라엘의 예후가 왕이 될 때에 이런 행위가 있었습니다.(왕하 9:13) 제자들과 무리들은 몇 벌의 옷밖에 없었을 텐데도 예수님을 존귀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최상의 것을 주님께 드리므로 예수님을 환영하였고, 주님은 그것을 통해서 영광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가진 최상의 것을 주님께 드림으로 주님을 존귀케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어느 때는 죄인이나 세리들로부터, 또 어느 때는 가련한 과부의 두 렙돈 까지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선교사이자 의사이자 탐험가인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이 탄생한지 200주년이 됩니다. 리빙스턴은 검은 대륙의 아버지, 아프리카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분으로 위대한 선교사요, 복음전도자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어려서 교회를 다닐 때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하나님께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선교사가 와서 선교 보고를 한 후 헌금을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헌금 쟁반이 돌았고 리빙스턴은 주머니를 뒤져보니 아무 것도 없자, ‘하나님, 드릴 것이 없으니 제 자신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며 자신이 쟁반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때의 그 고백이 리빙스턴의 생애가 되었습니다.
8절 하반절을 보면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합니다. 옷만 편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폈습니다. 요한복음 12:13-14을 보면 나뭇가지는 종려나무 가지를 가리킵니다. 종려나무는 보통 승리의 상징으로(계 7:9) 주로 왕이 지나는 길에 펴놓거나 그것을 들고 흔들었습니다.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편 것은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승리의 왕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환영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오랜 메시야 대망에 살던 무리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인식하고 그가 당장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을 압제와 고통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종려나무는 생명의 풍성한 산출을 누리는 만족을 의미합니다. 종려나무는 감춰진 샘물 속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하늘 높이 치솟아 자라남으로 풍성한 생명을 상징합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승리자요, 생명을 주시는 왕으로 인식하고 주님을 환영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것에 승리자가 되시고,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9절을 보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합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지금 구원하소서’(시 118:25)라는 뜻이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칭하는 말입니다. 무리들은 하늘에 속한 왕을 열렬히 환영하면서 시편 118편을 인용하여 “메시야 만세,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를 외치며 찬양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찬양 받으실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무리들은 찬양을 통해서 주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요, 자신들을 구원할 유일한 분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과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신성과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있는가?’, ‘우리는 주님을 위해 우리가 가진 무엇을 드릴 수 있는가?’, ‘우리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길에 펴면서 주님만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을 환영하고 있는가?’, ‘우리는 주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시라는 찬양을 진심으로 드리고 있는가?’입니다. 이 시대는 기독교인은 많아도 그리스도인은 적다고 합니다. 교회는 많아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적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1/4 이 기독교인이고, 전 세계 인구의 1/3 이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그중 과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에게 입성하시는 주님을 얼마나 진정으로 영접하고 있는가를 되새기면서, 예루살렘 입성 당시의 무리들처럼 순전한 믿음으로 주님을 맞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박한응목사 고난주간의 묵상(1) 마21장 01절 ~ 절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오늘은『종려주일』이고 오늘부터 시작하여 1주일간을『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은 기뻐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기도 하고 길에 펴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예수님을 앞뒤로 호위를 하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왕이여 하늘에서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라고 예수님을 환영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의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또 종려나무는 키가 약20여m나 되는데 관상수로서 참으로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구약 아가서 7:7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키와 유방을 가르쳐 종려나무 같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여리고 성은 종려나무가 많아서 종려 도시라고도 하고 카톨릭에서는 종려나무를 성별 하여 성수(聖樹)라고도 합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 보면 겟세마네 동산 건너편에 황금의 문(Golden Gate)이 있습니다. 아치형으로 된 두 개의 문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고 이 문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오실 때에 수천 명의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면서 예수님을 환영하던 그 예루살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우리들도 이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을 이 시간 우리들의 마음에 영접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10:40-41)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르르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받을 것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영접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이 달라집니다. 누구와 함께 어울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만일 도둑놈을 영접하여 도둑놈과 같이 어울려 논다면 그 사람은 분명 도둑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불량배와 같이 어울려 놀게 되면 십중팔구는 분명 불량배가 될 것입니다.
사기꾼을 영접하면 사기꾼이 됩니다.
간첩을 영접하면 간첩이 됩니다. 노름꾼을 영접하면 노름꾼이 됩니다.
사탄 마귀를 영접하면 마귀의 종이 됩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해 버린 세리와 창기들과 억눌린 사람,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식사도 같이 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비방하고 배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요1:11-12)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을 배척하는 자가 되지 않고 중심으로 뜨겁게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아 멘!>

예수님이 최후의 한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지내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에는 벌써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고 책잡으려는 무리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으나 그래도 뜨겁게 환영하는 무리가 있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부터 한 주간 동안 숨 가쁘게 전개되었던 사건들을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고난주간에 이루어지는 사건들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21장부터, 마가복음에서는 11장부터, 누가복음에서는 19장부터, 요한복음은 12장에서부터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사건들 중에 10가지를 뽑아서 저녁 시간까지 함께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고난 주간의 묵상』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이 고난주간에 일어난 사건 중에 가장 먼저 시작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사건이었습니다.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하여 나귀 새끼를 제공한 사람을 묵상해야 합니다.(마21:1-9).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는 전쟁에서는 말을 타고 전쟁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말을 타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들어오셨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의 농촌에서는 나귀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당시는 나귀가 중요한 교통수단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 BC 520년에 스가랴 예언자의 예언이 있었습니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기 위하여 제자들을 벳바게 맞은편 마을 베다니로 보내시면서 마을 어귀에 매인 나귀가 있을 것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마을로 내려가 보니 정말 나귀가 매여 있습니다. 그 매인 나귀를 풀자 주인이 왜 남의 나귀를 가져가려느냐? 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이 쓰실 것입니다” 라고 하자 이 나귀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선 듯 허락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나귀를 제공한 사람이 누군지 알 길이 없습니다.

“주님이 쓰시겠다” 는 이 말에 선 듯 내어준 것을 보면 그는 믿음이 좋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나귀의 주인은 고이 길러서 한 번도 타보지도 않고, 부려보지도 않고, 짐을 실어보지도 않은 나귀를 주님께 제공해 드렸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 할 수 있는 큰 교훈은 주님의 필요에 한 인간이 순응했다는 것입니다. 베다니 마을의 나귀 주인은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 한마디에 자기의 소유권 문제나 다른 문제는 개의치 않고 바로 나귀를 드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바치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여 자신의 아들을 바침으로 그의 신앙은 위대한 신앙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도 그를 인정하시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 3절에 보면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한 말씀 중에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이 우리들의 심령에 강하게 부딪쳐 옵니다.

벳바게 맞은편 마을의 한 무명의 사람은 예수님과 사전 약속이라도 한 듯이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 서슴치 않고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제공했습니다. 이에 무리들이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다 펴고 앞서고 뒤따르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하면서 지상 최고 승리의 입성을 장식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여러분들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드렸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주셨는데 우리들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얼마나 드리고 있습니까? 이 나귀를 드린 사람과 같이 주님을 위해서 드리고 있습니까? 진정 고마운 사람에게는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드려도 그저 늘 아쉽고 부족한 마음뿐입니다.
<찬송가 82장 1절>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뿐일세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몸으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구속의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어서 항상 하나님께 인색하기만 합니다.
오늘도 이 시간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내 마음에, 내 가정에, 그리고 우리교회에 입성하십니다. 그 주님을 이 시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신령과 진정한 마음으로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2. 주님의 장사를 위하여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을 묵상해야 합니다(막14:3-9).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이 식사하실 때 죄 많은 한 여인이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그의 장사를 준비하였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 14: 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에 주님의 사랑 받은 우리도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기념될 만한 아름다운 감사와 믿음의 행함이 있는 축복의 절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믿음의 큰일은 못해도 단 몇 끼씩만이라도 금식을 하며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 리처즈 목사님은 토인들에게 누가복음을 번역하여 하루 10절씩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누가복음 6장30절-31절 말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을 건너뛰고 가르치는데 하나님께로부터 마음에 가책이 와서 다시 그래도 가르치니까 보는 것마다 있는 것마다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요구하는 대로 다 주니까 나중에는 그곳 주민들이 크게 감동을 받아 그것을 도로 가져다가 주면서 당신은 참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그때부터 더욱 따르더라는 것입니다.


3. 고난주간에 처음으로 성만찬 예식이 시작된 것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마 26:17-29)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에 이르자 제자 중에 두 명을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막14:13-16)

성내에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던 한 여인은 예수님을 위하여 다락방을 제공하고 또 만찬을 예비하였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탄식하신 예수님께 큰 다락방을 제공하여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지상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면서 그의 몸과 언약의 피를 기념하는 예식을 행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다락방은 그 후 120명의 문도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곳이 되기도 하였고, 베드로가 잡혀갔을 때 성도들이 모여 열심히 기도하여 베드로가 하나님의 기적으로 살아나올 수 있게 하였던 곳이기도 합니다.(행12:12)

그 후부터 예수님의 부탁대로 고난주간에는 교회마다 이 성만찬 예식을 행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성만찬 예식을 행할 때마다 속죄와 은혜와 치료가 넘치는 은사가 충만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그러면서 다락방을 제공해 드린 아름다운 모습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이 고난주간에 예수님께 무엇을 드릴까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드림으로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한 여인의 회생처럼은 못하더라도, 집을 팔아 주님께 다락방을 제공해 드리지는 못하더라도, 땅을 사서 예수님의 무덤을 만들어 드리지 못해도, 우리의 빈 마음을 열어드리므로 내 속에 주님을 모시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4.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성지 예루살렘에 가면 감람산 남쪽에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데 거기에는 아주 오랜 감람나무 여러 그루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그루는 "애통의 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 나무 옆에는 예배당이 있고 그 안에는 큰 바위가 있습니다.
지난 2007년 성지순례 때에 그곳에 가서 주님이 기도하셨다는 그 바위를 붙잡고 기도하는데 물음이 복받쳐 통곡을 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바로 거기서 기도하셨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겟세마네의 이름의 뜻은 "기름 짜는 틀"이란 뜻이 있는데 주님께서는 여기서 자기 몸의 진액을 짜시며 기도하심으로 우리들은 이 겟세마네 동산을 기억할 때마다 새로운 은혜를 입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마치시고 감람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중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명의 제자들을 끝까지 데리고 가셔서 죽음을 앞둔 최후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몇 시간 후면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가실 주님! 그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심혈을 기울인 최후의 기도였습니다.
눅22:44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피와 땀을 흘리시며 하신 기도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다 같이 오늘 찬양대가 부른 복음성가를 부르겠습니다.
G. S 겟세마네 동산에서(120)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주님의 얼굴은 피로 젖었네.
하나님을 거역한 나를 위하여
순종의 속죄 피를 흘려주셨네
아 아 아 아 주의 사랑 깊고 크셔라
내 영혼에 파도처럼 메아리쳐 온다

이토록 주님이 피 흘리시며 기도하신 것이 자신의 소망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바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기도였기에 오늘의 우리들은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상 그 어떤 성현들이, 또 위인들이, 종교가들이, 이와 같은 기도를 한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이 동산을 자주 찾으셨습니다.(눅22:39-46), 그러므로 가룟 유다도 이곳을 알고 있었습니다(요18:1-2).
우리는 오늘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다시 생각하고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되는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1)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마 26:36-38)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이는 진실로 주님께서 최대의 비통함을 고백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 후 십자가에 달리신 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라고 부르짖으신 바 이 비통의 부르짖음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이 고백과 같은 비통을 하나님 아버지께 고백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통을 묘사할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5:7) 라고 기록했습니다.

(2)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42-44)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엎드려 기도하신 사실에 대하여는 공관 복음이 다 취급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그가 엎드려 기도하였다고 하였고(막14:35) 누가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고 기록하였고(눅22:41) 오늘 본문에서는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다 정성을 드려 간절히 그리고 겸손히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만왕의 왕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를 부르면서 환영하던 사람들은 불과 일주일이 못 가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며 배신한 사람들이었지만 오늘의 우리들은 절대로 주님을 환영하는 마음이 변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주님은 나와 여러분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의 고난의 쓴잔을 받으셨고 참혹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가슴에, 우리교회에, 여러분의 가정에, 이 예수님을 영접하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내 가슴으로 뜨겁게 믿어야 합니다. ‘그럴 것이다’라고 추상적으로 관념적으로 그렇게 생각지 말고 이 사실이 믿어져서 십자가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쏟아져야 합니다.
다 같이 찬송을 부르겠습니다.

<찬송가303장 1절>
나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 죄에서
구속함을 얻은 우리 어찌 찬양 안 할까

성도 여러분!!
베다니 마을의 나귀를 드린 사람과 같이, 그리고 겉옷을 벗어서 주님 앞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는 마음으로 이 시간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그리고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흘리신 보혈의 의미가 내게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마음속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흘리신 보혈은 바로 나와 여러분의 죗값으로 흘리신 것입니다. 이 보혈로 인하여 죽어야 할 몸이 살았고, 내가 죽어야 할 것을 주님이 대신해 주신, 그 은혜를 받고도 무감각 상태로 있어서야 어찌 하겠습니까?

오늘 고난주간을 통하여 이 주님의 은혜에 만 분의 1이라도 보답하는 의미에서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당하신 것을 추상적으로 또는 관념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실지로 내게 체험되어지는 이번 고난주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과 같이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 고 한 것과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내게 체험되어지는 이번 주간이 되어 더욱 은혜로 충만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문기태목사 나귀를 타신 왕 마21장 01절 ~ 절

오늘은 무슨 날입니까? 고난주일입니까? 정확하게 말해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 무슨 날입니까? 우리는 종려 주일을 어떻게 보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날이 오늘입니다. 온 백성들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려고 길가에 나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고 환호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은 주님께서 아주 특별한 왕이심을 온 천하에 알리신 의미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종려주일은 "예수님! 당신은 우리의 왕이십니다."하고 외쳐야 합니다. 종려주일은 왕에 대한 찬사와 감격과 환희가 있는 특별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주일로만 알고 무겁게 우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속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물론 이번 주간은 수난 주간 또는 고난 주간입니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고 은혜를 음미하며 보내야합니다. 그렇지만 종려주일까지도 그렇게 가라앉을 필요는 없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환영하며 기쁨의 찬양을 드리며 보내야 할 것입니다.
종려주일에 대하여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본문에 기록된 사건을 깊이 관찰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을 하시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는 벳바게라는 동리에 이르자 갑자기 이상한 명령을 하십니다. "맞은 편 마을로 가서 어미 나귀와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볼 터인데 나귀를 끌고 오너라." "누가 뭐라고 하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돈을 주면서 시키신 것도 아니고 남의 나귀를 무조건 끌고 오라고 하니 황당하기 이르데 없는 명령입니다. 게다가 '새끼 나귀를 뭐에 쓰시려고 끌어 오라고 하시나' '이제 2킬로만 더가면 되는데 이제까지 잘 걸어오시다가 얼마 남지 않은 길을 왜 나귀를 타고서 가시려는 것일까?' 등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순종했습니다.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민망하였는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안장처럼 깔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에 올라 타셨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생각났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그러자 비로소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천년동안 기다리던 하나님이 보내신 특별한 왕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남루한 옷차림으로 낮은 곳을 골라 낡은 샌달을 신고 발바닥에 굳은 살이 박이도록 걸어다니는 초라한 청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 만왕의 왕 예수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그러자 수많은 무리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어떤 이는 겉옷을 벗어 예수께서 타신 나귀새끼가 지나는 길에 깔았습니다. 어떤 이는 종려나무가지를 꺽어 길에 깔았습니다. 어떤 이는 앞장을 서며 외쳤습니다. "왕이 나가신다. 길을 열어라." 어떤 이는 뒤에서 따르며 외쳤습니다. " 호산나 찬송을 받으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위대한 왕이시여!"
그렇게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시자 온 성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소란한 소리에 놀라 튀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행렬을 보며 서로 물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냐?" "도대체 나귀를 타신 저분은 누구냐?" 종려나무를 흔들며 예수님을 따르며 지나는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랍니다." "그런데 왜 나귀를 타고 갑니까?" 당신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예언을 모르시오? 저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오래전부터 약속하신 우리가 기다리던 다윗의 뒤를 이은 왕이랍니다. 그래서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는 함께 왕이신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함께 환호하며 왕되신 주님을 향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아이들까지 성전에까지 따라와 계속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분을 내며 예수님께 '왜 저들의 외침을 자제시키지 않느냐?'고 원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셨을까요?
1. 예언의 성취를 위해서입니다. (5)
예수님은 항상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일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언을 성취하시려 하셨습니다. 또한 예언의 성취를 통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당신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이심을 믿을 수 있도록 입증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갖고 계신 능력을 사용하신다면 수 많은 사람들을 쉽게 굴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굉장한 기적을 행하시므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법은 그런 쉽고 간단한 강제적인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예언이 정확하게 성취되는 것을 확인하고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깨달아 스스로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기대하십니다.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지적으로 깨닫고 이해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정서적으로 느끼며 의지적으로 결단하여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 위엄을 느낄 백마를 타고 입성하시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코끼리를 타고 입성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화려하게 느낄 금수레를 타시지도 않았습니다.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구약의 예언들을 알고 기다리는 사람의 눈에만 띄게 다른 짐승을 택하지 않고 작고 초라한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환영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이라 할지라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향하여 분을 낸 이도 있습니다.그것은 성경의 지식은 있었으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대로 살펴보니 초라했습니다. 본능대로 판단하니 전혀 하나님이 보내신 왕같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기는 커녕 미워했습니다. 오히려 거절하고 죽여 없애려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믿어지십니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말씀의 성취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까? 오늘도 성경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믿는 사람만이 우리 주변에 가까이 찾아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환영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께 찬양하고 경배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이 성경말씀을 온전히 성취하신 구세주이심을 의심없이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성령의 방법으로 찾아 오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 오셨을까요?
2. 우리의 멍에를 메기 위해 오심을 암시하기 위함입니다.(5)
나귀는 멍에를 매고 일을 하는 짐승입니다. 나귀는 본래 타고 다니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멍에를 메고 일을 하는 짐승으로 알려졌습니다. 본문에서도 나귀를 설명하며 멍에를 메는 짐승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약 이사야 53장4절이하에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요한도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예수님을 소개 하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우리의 죄와 그로인해 따라 붙는 우리의 무거운 형벌이 실려 있습니다. 주님은 자원하여 그런 멍에를 지신 분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담대히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누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내게 네 인생의 무거운 짐을 다 대신 짊어지마, 나의 멍에에 연결된 수레에 네 짐을 실어라' 라고 말한 이가 예수님말고 또 있습니까?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나귀처럼 무거운 짐을 지시러 예루살렘에 올라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처럼 저와 여러분의 죄악을 짊어지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질고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고통도 친히 짊어지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슬픔도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이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신하여 다 감당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마다 어깨를 누루는 무거운 짐이 벗겨지고 날아갈듯한 가벼움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혹 여러분의 어깨에 아직도 벗겨지지 않은 무거운 짐이 여러분을 누루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이 용서받지 못한 죄입니까? 고통과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질병입니까? 인생의 복잡하고 괴로운 문제입니까? 멍에메는 짐승을 타신 예수님께 맡겨 버리십시오. 주님께서는 기꺼이 여러분의 짐을 감당해 주십니다.
옛날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에 초 나라의 장왕이 커다란 잔치를 베풀고 장수들을 초대했습니다 각 장수들에게는 아름다운 궁녀들이 한 사람씩 배정이 되었습니다 잔치의 흥이 고조될 무렵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방안의 불이 모두 꺼졌습니다. 술도 거나하게 취하고 불도 꺼진 참이라 장웅이라는 장수가 어둠 속에서 옆의 궁녀를 희롱하였습니다. 화가 치민 궁녀는 그 무뢰한을 잡기 위해 그 장수의 투구에 달려 있는 금 술을 잡아떼어 왕에게 고해 바쳤습니다. 왕의 궁녀를 희롱했으니 장수는 목베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불켜는 것을 잠시 중지시키고 초대된 모든 장수들에게 투구에 달린 금술을 떼어 왕에게 바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시 명하여 불을 켰으나 모든 장수들의 투구에는 금술이 없었기에 궁녀를 희롱한 장본인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후 몇 년이 지났습니다. 진나라의 공격을 받은 장왕이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한 용감한 장수가 장왕을 구해 냈습니다. 바로 지난날
궁녀를 희롱하여 목베임을 당할뻔 하였던 그 장수가 용서해 준 왕의 은덕을 갚을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신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생명을 구원해 주신 주님께 어떻게 보답하고 있는지요?


예수님께서 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 오셨을까요?
3. 왕중의 왕이심을 만방에 알리기 위함입니다.(5)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종려주일의 가장 큰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어떤 작은 나라를 다스리시는 왕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세상을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계를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어떤 위대한 왕과도 비교가 안 되는 왕중의 왕이십니다.
그분에게는 강력한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높은 지위과 보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큰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왕이십니다. 위대한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말입니다. 왜 하필 나귀를 택하셨을까요?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어떤 이는 겸손을 자기 비하나 비굴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겸손은 무조건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비천하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겸손한 것을 무조건 실력을 갖추어서는 안되는 줄 압니다. 높은 지위와 실력을 다 버리는 것이 겸손은 아닙니다. 겸손의 첫째 조건은 높아지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낮은 사람은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거지가 부자앞에서 동냥을 하며 굽실거리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비굴한 것입니다. 말단 사원이 사장앞에서 허리를 굽히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힘이 없는 사람이 주먹이 센 조폭앞에서 납작 엎드려 있는 것은 절대 겸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자가 거지에게 거들먹거리지 않고 불쌍히 여겨 손을 잡아 주는 것은 겸손입니다. 사장이 말단 사원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 주며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힘이 센 사람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깔보지 않고 한 대 맞고도 참아 주는 것이 겸손입니다.
예수님이 군병들에게 체포된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열 두 영도 더 되는 천군을 당장 불러올 수 있지만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힘이 없는 것 처럼 잡혀 주셨습니다. 당장이라도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었으나 그대로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달린 것은 우리의 고통을 담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수님의 왕되심이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겸손하시지만 여전히 왕이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예수의 이름을 더욱 높이사 모든 무릎으로 예수님의 이름앞에 무릎꿇게 하셨습니다.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주님은 종려주일에 사람들에게 당신께서 왕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왕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당신께서 왕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위대한 왕이신 예수께서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진정한 왕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서 겸손하게 낮추시더라도 이 종려 주일에 왕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높여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왕되게 하여야 합니다. 왕의 대접을 해 드려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왕되기 보다 믿는 너희들의 왕되시기를 원한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뿐아니라 세상에서도 예수님을 왕대접하며 사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요 그분의 신하입니다. 따라서 그분께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분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왕의 유익을 나의 유익보다 앞세워야하며 왕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않으면 배신입니다. 명성황후에 보면 고종은 왕인데 아무 힘이 없습니다. 신하들도 왕보다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백성들도 왕보다는 대원군을 더 신뢰하고 따릅니다. 나라가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결국 힘이 없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일단 왕으로 세워졌으면 충성을 해야 합니다. 얼마전 왕건에서 왕건이 위기에 몰리자 대신 왕복을 입고 싸우며 왕이 피할 길을 열어주고 자신은 죽은신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며 그 정도는 충성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덕 볼려고 하지만 말고 충성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여러분의 왕이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천국을 소유하고 사십니까?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안에 이루어졌습니까? 천국의 평안이 여러분안에 있습니까? 천국의 질서가 여러분안에 이루어졌습니까? 천국의 충성이 여러분을 통해 증명이 되고 있습니까? 천국의 승리가 여러분안에서 확산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안에는 진정한 천국이 있습니까?
여러분, 종려 주일의 주인공인 겸손하신 예수님께 진심으로 왕이 되어 주실 것을 간청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권오서목사 이는 누구뇨 마21장 01절 ~ 11절

들어가는 말
지난 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세계적인 선교 전문가 루이스 부시 목사는 “예수를 구출하라!”는 말을 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어디 갇혀 있다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위급한 상황에 놓였단 말인가?”-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구출하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변방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출하여 우리의 삶의 중심에 모셔 들여야 한다”-이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주님을 외면합니다. 주위를 둘러보세요. 예수 없는 세상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잖아요. 예수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잖아요.
지난 2월 22일 탤런트 이은주 양이 자살을 했습니다. ‘이은주 신드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회적인 큰 이슈가 되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많이 안타까웠겠지만, 저 역시 꽃다운 나이에, 자신의 꿈을 펼쳐야 할 나이에 삶의 무게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녀를 볼 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또 한 가지 정말 안타까웠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장례식 장면이었습니다. 영구차에는 십자가가 장식되어 있었고, 화장한 그녀의 유골을 담은 도자기에 역시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는 그녀가 예수 믿는 사람이었음을 뜻합니다. 아니면 적어도 그녀의 부모가 예수 믿는 사람이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 거예요. “도대체 이은주 씨에게 예수라는 분은 어떤 분이셨을까?”, “그녀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더라면”, “예수님께 자신의 어려움을 아뢰고 힘을 얻었더라면” - 이런 아쉬움이 남습니다.
고인이 된 분을 놓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귀에 거슬릴지 모르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은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본 론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신학자들은 이 사건을 가리켜서 “승리의 입성(The Triumphal Entry)”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 첫째,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것을 결정하시고 벳바게라는 마을로 들어오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두 명의 제자에게 한 가지 명을 내렸습니다.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가서 보면,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고, 그 곁에 새끼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나에게로 끌고 오너라.” 제자들은 그 즉시 맞은 편 마을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끌고 온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왜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을까요? 신학자들의 말처럼 이 사건이 “승리의 입성”이라면, 백마를 타고 입성해야 합니다. 더욱이 길바닥에는 사람들의 옷과 종려나무 가지가 놓여졌습니다. “승리의 입성”이라면 비단이나 양탄자가 깔려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나귀를 타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은 “6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라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5절에서도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의 이러한 겸손은 사실 그에게 십자가의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겸손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늘 겸손하라고 해서 겸손하게 생활했지만, 그럴 때마다 손해를 보지 않느냐?”라며 “겸손 무용론”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일상생활에서 겸손 때문에 손해 보는 경우 많습니다. 누군가에게 겸손한 모습으로 다가서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꼭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겸손하게 살기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럴 때마다 주님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들어가면 사람들이 자신을 우습게 여기고, 심지어는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가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백마를 타고 군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입성했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기에 나귀를 타고 가셨습니다.
이미 읽었듯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은 예언된 말씀이었습니다. 본문 2절 말씀은 스가랴 9장 9절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예언된 말씀을 그대로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하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이 겸손의 출발점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에 기독교 잡지 중에 “크리스챤 센츄리(Chrisian Century)”라고 하는 유명한 잡지가 있습니다. 거기에 로널드 고에츠 박사님께서 “‘A period of anti-modesty’ - ‘반 겸손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분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시대가 겸손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겸손을 거부하게 되었느냐? 그 이유에 대해서 로널드 고에츠(Ronald Goetz) 박사님은 그 사상적 뿌리가 칼 막스(Karl Marx), 프로이드(Sigmund Freud), 철학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라고 말합니다. 막스의 이론이 뭡니까? 프로이드가 뭘 생각하고 있습니까? 니체의 초인간 철학(그리스도교가 삶을 파괴하는 타락의 원인, 자기 긍정)은 뭘 말하고 있는 겁니까? 하나같이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겸손을 버릴 것을 주장합니다. 이들은 겸손을 가리켜서 착취하는 자가 착취받는 자를 순종케 하기 위한 착취의 수단으로 겸손을 강요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배하는 자가 지배받는 자로 하여금 꼼짝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겸손이라는 덕목을 가르쳐 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사람들 중에 여기에 미혹되어 겸손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자랑을 합니다. 자기 PR을 하게 됩니다. 소위 인권을 찾겠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여러분,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높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간성이 상실되었습니다. 사회성도 무너졌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자리는 전쟁터로 바뀌었습니다. 부부간에도 생존경쟁을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해하고 자녀들이 부모를 해합니다. 아들과 엄마가 계획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셨습니다. 이 한 주간 겸손하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2. 둘째,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려고 하자,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나귀에 얹기도 하고 길에 펴기도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였음을 뜻합니다. 그러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며 찬양합니다. 이는 또한 그들이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비로써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정치적인 자유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자, 이전과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어떻게 했다고요? 소동했습니다. 성안에 있던 사람들-당시 예루살렘에는 25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거주했었는데, 이들은 왜 사람들이 나귀를 타고 오는 예수라는 인물을 보면서 저토록 환호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이는 누구뇨?” 영어로는 “Who is this?”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대답합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오늘 이 시간, “이는 누구뇨?(Who is this?)”라는 이 질문을 여러분을 향해서 던지고 싶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질문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까?”

⑴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얼마든지 군사로 무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로마에 저항하여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자고 했으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독립 운동에 나섰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께 그런 바램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그리고 서기관들에게 붙잡히게 되자, 그들의 태도가 완전히 뒤바뀐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물리적인 힘을 이용해서 정치적인 독립을 가져오기를 원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심으로써, 평화의 왕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시련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평화는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넉넉함 속에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 평화는 의(義, eirene)를 근거로 한 평안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의 말씀대로 나 자신은 의롭게 살고 이웃에 대해서는 긍휼을 베풀 때에 오는 것이 평화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시는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혹시 부모와 자식 사이가 껄끄러운 관계이지는 않습니까? 얼굴을 대할 때마다 괜히 화부터 나는 사람들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과 먼저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화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는 삶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⑵ 예수님은 교회를 깨끗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는 돈 바꿔주는 사람들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이 장사꾼들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전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나옵니다. 시간이 되어 나오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오늘도 내 삶에 간여해주실 것을 믿지 않습니다. 수많은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함이 없습니다. 그냥 자리만 채우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런 영적 나태함 때문에 오늘날 많은 교회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2000년 전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께 들었던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전을 더럽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거룩한 교회, 깨끗한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는데, 오히려 우리가 더럽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룩한 교회, 깨끗한 교회는 외형적인 깨끗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아무리 깨끗하면 무엇 합니까? 영적으로 깨끗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른 믿음 위에 교회가 세워져야 합니다. 현대 교회는 믿음 위에 세워지고 있지 못합니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믿음이 아닌 이해관계 위에 세워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가 아닌 인간의 지혜와 경험을 바탕으로 교회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믿음의 원리가 아닌, 경영 원리가 앞서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깨끗해야 합니다. 교회는 믿음의 원리가 앞설 때 거룩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맞은 편 마을로 가서 나귀를 가지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혹시 어찌 된 일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맞은 편 마을로 갔습니다. 제자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나귀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나귀를 가지러 갔을 때, 주인이 그 모습을 보았을까요? 못 보았을까요? 보았을 겁니다. 어찌된 영문이냐고 물었을 겁니다. 분명 그렇게 했을 거예요. 또 제자들 역시 예수님께서 일러준 대로 말했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원리입니다. 제자들은 터무니없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나귀 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귀 주인도 제자들이 나귀를 가지고 가려고 할 때, “주가 쓰시겠다”라는 말에 ‘무슨 말이냐? 도대체 누가 주인이란 말이냐?’라고 토를 달지 않고 즉시 나귀를 내줍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의 원리는 곧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교회는 거룩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교회는 깨끗해집니다. 믿음의 원리를 붙잡고 사는 사람이 고귀한 사람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값진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모두 믿음의 원리를 붙잡고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원리를 붙잡고 사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그와 같은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8장 8절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오늘 이 시대에 믿음의 원리를 붙잡고 사는 사람을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서 찾으시는 믿음의 원리를 붙잡고 사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성도가 이 믿음을 회복할 때, 우리 제단은 거룩한 제단, 깨끗한 제단이 될 줄로 믿습니다.


정 리
교회는 다니지만, 예수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셔야 낙심 가운데 일어설 수 있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뚫고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상관있는 인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셨습니다. 승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정도로 겸손하셨습니다. 겸손은 영원한 미덕입니다. 반 겸손의 시대라 할지라도 우리 성도들만은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겸손을 포기하면 개인이 망가집니다. 가정이 무너집니다. 사회가 병들어 갑니다. 교회가 타락합니다. 겸손한 가운데 회복의 역사가 있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화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평화가 힘의 논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참된 평화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적대시했던 사람이 있다면 화해하고 평화를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거룩해지기를 원하십니다. 병든 교회가 건강해져야 합니다. 더러워진 교회가 깨끗해져야 합니다.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교회가 교회의 본래적인 모습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는 믿음의 원리가 앞장설 때 가능합니다. 교회는 세상적인 원리에 의해서 아닌, 믿음의 원리, 즉 순종의 원리로 세워져야 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이 한 주간은 고난주간으로 지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품고 지내시면서, 죽음 저 편에 있는 부활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승리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창훈목사 주님이 쓰시는 사람 마21장 01절 ~ 11절

인생에서 최대의 저주가 있다면 "너는 더 이상 필요 없다. 너는 쓸모 없는 존재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최대 축복의 언어가 있다면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쓸모있고 가치있는 사람입니다"하는 고백일 것입니다.

오늘은 이천년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소중히 쓰임 받았던 인물들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쓰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에게 쓰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 성경의 비밀을 찾아 하나님 앞에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1.하나님 계획의 성취가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일입니다.
쉬는 시간 아이들고 함께 운동장에서 눈을 맞으며 신나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창훈아"하고 나를 불러 사택에 가서 뭘 좀 가져오도록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그때 얼마나 신이 났던지요. 교장선생님이 내 이름을 알고 계신다. 내 이름을 불렀다. 그 많은 아이들 가운데 나한테 심부름을 시켰다. 선생님 사택으로 달려가며 얼마나 흥분이 되었던지.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흥분이 되살아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길에 쓰임 받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감람산 기슭에 있는 벳바게 마을까지 왔을 때에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냈습니다.
이 건너 마을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본문에 의하면 베다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감람산 기슭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웃동네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베다니 마을에 들어가면 큰 나귀와 작은 나귀 한 마리가 묶여 있을텐데 풀어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보내며 예수께서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나귀를 풀어 끌고 가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본문을 대할 때 우리는 몇 가지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첫째, 예수께서 거기 나귀가 매인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하는 것이고
둘째, 당시 나귀 한 마리는 우리네 농촌 소 한 마리처럼 농사 살림 밑천이었을텐데 어떻게 그토록 쉽게 선뜻 내어 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복음에 모두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오늘 본문은 제자들에게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 스가랴가 490년전 이미 예언했다는 이 내용은 공관복음서 중 마태복음에만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왕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왕의 왕국 입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귀 새끼가 이날 이렇게 영광스럽게 쓰임받을 것이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에 의해 계획이 되고 예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귀 새끼 한 마리를 향하여 이토록 섬세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은 어떤 계획을, 어떻게 세워 놓으셨을까요? 여러분 가슴이 설레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생을 지으셨습니다.
당신을 이 땅에 보내시기로 만세전에 작정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에 빠진 우리를 살리시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버리고 우리를 피 값으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예수님하고 맞바꾼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실까요?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도록 내버려 두실까요?
시시하게 아무런 의미없이 살도록 우리를 만드셨을까요?
아닙니다.
본문은 예수를 위해 쓰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런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위해, 예수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영광스럽고 황홀한 사역자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딤후2:20절 이하에 보면 이 땅에서 몇 번 쓰임 받다 깨어지는 그릇 하나까지도 쓰임이 있고, 쓰임의 목적이 있다고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큰 집에는 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나무와 질그릇도 있습니다.
여기 큰집은 하나님의 집이요, 그릇은 우리 인생을 비유합니다.
그리고 귀한 그릇은 무엇으로 만들었느냐? 얼마를 가졌느냐? 어떤 위치에 있느냐? 얼마나 아느냐? 의 문제가 아닙니다.
과연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그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쓰실 때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쓰실 때만 행복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쓰실 때만 형통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순간 순간, 자리 자리마다 우리는 감격하며 "하나님의 예언의 응답이 나다! 하나님 계획의 성취가 바로 나다!"라고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2.주님의 주권입니다.
주님은 마을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거기 나귀가 매여 있다는 것을 아셨을까요?
그리고 왜 남의 나귀를 풀어 끌고 가느냐? 라며 주인이 화를 낼 때 "주님이 쓰신다"고만 하면 나귀를 내어줄 것이란 걸 어떻게 아셨을까요?
그뿐이 아닙니다.
어떻게 "주가 쓰신다"는 말 한마디로 괭이나 삽 한 자루가 아닌 나귀를 순순히 내어 줄 수 있었을까요?
대부분 주경가들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그런 것쯤 쉽게 아셨을 것이며. 또 헌신되고 준비된 무명의 제자가 있었음을 알고 계셨다고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런 것까지 당신의 신성을 사용하셨을까요?
분명히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신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그렇게 밖에 안보입니다.
그러나 목장의 관점, 관계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문을 보면 전체 그림이 아주 쉽게 보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여러 차례 방문하셨지만 한번도 예루살렘에서 주무신 적이 없습니다.
그때마다 베다니에 오셔서 주무셨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말씀도 나누었습니다.
베다니는 늘 예수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던 마르다가 있고, 발 밑에 앉아 말씀을 즐겨 듣던 마리아가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며 그를 살려주시기도 했습니다.

베다니는 슬픔의 집, 가난한 사람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픔과 슬픔, 질병과 고통을 삼키며 살아가던 베다니 사람들의 친구였고 희망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마을 나병 환자를 고치셨습니다.
죄 많은 여인의 아픔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어 소망과 생명의 주님이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나중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을 때 베다니 마을 앞까지 나가셔서 저희들을 축복하신 후 하늘로 올리우셨다고 눅24:50-53절은 기록합니다.
그때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 기도하고 찬송하다가 성령의 충만을 체험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때문에 그 마을 사람들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막14:1-3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 베다니 사람이 있었고, 베다니 사람 안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관계성 속에서 "주여, 여기 있습니다. 마음대로 쓰십시요" 진정한 그리스도의 주권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기 무명의 헌신자 나귀 주인이 나귀를 내어 준 것은 단순히 나귀라는 짐승을 내어 준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준 것인데 이것을 그리스도의 주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권의식이란 단순한 헌신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안에 예수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 내 삶의 목적이 그분에게 온전히 연결되어지는 영광의 단계를 말합니다.
내 것과 예수님 것의 구별이 없습니다.
바로 그때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게 되는 신비의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마을 사람들과 한 가족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디에 누구의 나귀가 매여 있고 어디에 어떤 나귀가 있는지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쓰시겠다"라고 말하면 억지로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흔쾌히 내어놓을 것도 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가족입니다.
예수님과 베다니 사람들은 이미 천국가족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며 이것이 헌신이며, 이것이 사랑입니다.


3.가슴마다 예수의 피가 묻어야 합니다.
3절을 보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직접 "주" 다시 말해서 "큐리오스"라고 표현한 곳은 이곳 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이 본문은 커다란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참된 헌신과 봉사와 섬김은 예수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헌신, 사랑이 없는 봉사, 감사가 없는 섬김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마다 베다니 사람들을 방문하고 만나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따라 마을을 찾아오시지 않고 나귀만 요구하십니다.
그들은 이번 여행이 어떤 길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지시러 가는 길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나귀를 드리는 것은 예수의 죽음을 준비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헌신의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할 때마다, 우리가 주를 위해 뭔가를 드릴 때마다 우리의 가슴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묻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넘쳐흘러야 합니다.

예배시간 찬양시간마다 찬양대가 찬양을 드릴 때 그 가슴속엔 예수의 보혈이 흘러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시간마다 선생님의 가슴엔 예수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
목장 식구들을 가슴에 안고 기도할 때마다, 내게 상처를 준 원수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내 가슴엔 예수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주님의 주권이 나타나 "주님이 쓰시겠다"하면 어제든지 "예. 언제든지 저를 쓰십시요. 저는 주께서 피로 사신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4.풀어 끌고 오너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슴마다 예수 사랑으로 끓고 있는 사람들, 예수님과 맺은 그 사랑, 그 관계가 벅차 주를 위해 자신을 드리기를 원하는 그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 주님 오늘도 "풀어 끌고 오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매인 나귀를 풀어 끌고 와야 주님이 쓰실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사업과 물질에 묶여 있는 분이 계십니까?
묶인 것들이 풀어지고 주를 위해 바로 쓰임 받길 축복합니다.
질병에 묶여 있는 가정이 있습니까?
묶인 질병이 풀어지고 건강이 주를 위해 올바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쓰셔야 할 것들이 엉뚱한 곳에 쓰일 땐 풀렸던 것들도 묶여질 수 있습니다.
기회도, 명예도, 건강도, 물질도 주께서 묶으시면 능히 풀 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이 쓰지 않으시면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결국 마귀가 나를 쓰게 됩니다.
내 시간 하나님이 쓰지 않으면 마귀가 빼앗아 갑니다.
내 재능 하나님이 쓰지 않으면 사탄이 침략합니다.
내 물질 주를 위해 쓰지 않으면 세상이 빼앗아가 갑니다.
내 육체 하나님 영광 위해 쓰지 않으면 사탄의 노예 됩니다.

지난 주 목장을 심방했을 때 어떤 성도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에 "내가 여러 교회에서 이사 다니며 신앙생활했고, 긴 인생 살지 않았지만 이런 일도 해 봤고 저런 일도 해 봤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온갖 몸부림을 다 해보았는데, 돌이켜 보면 미쳐서 교회 생활 할 때에, 지치도록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일 할 때, 신앙생활 가장 열심히 할 때, 그때가 가장 행복했노라"하는 고백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성도만의 고백이고, 이 한 분만의 간증이겠습니까?
나의 고백이요 너의 고백이요 우리 모두의 고백 아닙니까?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기름을 부어 주시고, 축복하십니다.


조상호목사 진짜 왕이 여기 계십니다 마21장 01절 ~ 11절

미국교회 역사상 아마도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은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이라는 사람이 선교사로 파송된 사건일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가 인도 선교사로 파송된 후, 조금 있다가 짧은 기독교 역사를 지닌 미 대륙에서 처음으로 아도니람 저드슨을 선교사로 파송한 것입니다. 그는 미국을 떠나 인도에 잠시 들렸다가 버마로 갔습니다. 버마에 가서 평생 선교사로 자신의 생애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며 열심히 주님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가 미국을 떠난 지 30년 후에 미국에 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그가 보스톤에서 선교보고회를 하던 날, 교회당은 입추의 여지없이 수많은 사람들로 채워졌습니다. 미국을 대표하여 파송된 최초의 선교사가 인도와 버마 복음화를 위해 생애를 바치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돌아왔을 때, 그의 메시지를 잔뜩 기대한 많은 사람들은 모여 들었습니다. 그는 모인 청중들에게 이렇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습니다. 그의 피 흘리심은 우리의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동일한 복음이 선교지에 소망이 되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짧게 설교를 마쳤습니다. 그러자 청중들은 실망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여러분,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합니까? 선교지에서 일어난 기적이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와 같은, 드라마틱한 사건들에 대해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아도니람 저드슨의 설교가 너무나 평범하지 않느냐?”고 수군거렸습니다. 그 때 그 얘기를 들은 아도니람 저드슨이 청중들에게 돌아서서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십자가 사건보다 더 비범한 사건이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보다 더 위대한 메시지가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보다도 더 놀라운 복음이 어디 있습니까? 나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가 없습니다.”

저는 이 말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Fun이나 Enjoy를 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또 건강유지를 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재테크나 인간관계방법이나 자녀교육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들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들보다도 더 중요한 이야기를 우리는 들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우리에게 있는 저주와 질병을 청산시키려고, 그리고 우리 자녀와 우리 가정과 우리 사회, 온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이야기를 들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떠한 것보다도 십자가의 복음을 들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보다 더 위대한 사건은 세상에 더 이상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빼놓고서는 우리 기독교를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죄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낼 능력이 전혀 없는 인간들을 위해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3년 동안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셔서 훈련시키시고, 수많은 무리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시고, 가는 곳곳마다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수많은 이적과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한다는 것은 고난과 죽음을 맞으러 간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20장 18절과 1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목적도 없이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베다니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벳바게라는 곳에 도착하셨을 때, 두 제자를 선택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2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미 52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 보아도 성경의 정확성에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한 말씀을 스스로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예언의 말씀대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전 인류의 메시아요, 왕임을 선포하는 입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겸손의 왕
첫째로 본문에서는 겸손한 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왕이 어디에 가려고 하면 미리 선발대를 앞서 보내어 “여봐라! 임금님이 행차하신다. 길을 비켜라!”고 하며 왕의 행차를 준비하도록 하게 합니다. 그리고 왕은 말을 타고 수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행차합니다. 왕이 지나갈 때에는 모든 백성들은 머리를 숙이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게 합니다. 만약 왕이 행차할 때 고개를 들고 왕을 쳐다보면 왕에게 불경하게 대했다는 죄목을 씌워 잡아다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권세 있고 위풍당당하게 말을 타지 않으시고 나귀,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 소꿉장난하는 것 같은 유치하고 초라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모습에 영적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4절과 5절에서 영적인 의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어린 나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비록 아무도 준비해 주지 않았지만, 스스로 나귀를 준비하여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나귀를 타셨다고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한 왕의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일거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고생 끝에 얻은 직장은 동물원이었는데, 죽은 반달곰 대신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새로운 곰이 들어올 때까지 곰 노릇하는 것이었습니다. 월급이 꽤 많았지만 하필이면 더위가 한창일 때라 그 고충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은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엉금엉금 기어 다니거나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다가 몰려오는 사람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어느 날, 한참 늘어지게 자고 부스스 일어나려는데 호랑이가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사람은 지금 자기가 곰인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나 두 발로 줄행랑을 치며 “사람 살려!”를 외치며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어슬렁거리며 따라오던 호랑이가 벌떡 두 발로 일어서며 “야 임마. 나도 사람이야!” 하더라는 것입니다.

누가 웃으라고 지어낸 유머 같은데, 저는 이 유머를 읽으면서 한참을 웃다가 새롭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먹고 살기 위해 짐승의 가죽을 쓴 두 사람처럼, 자신의 참모습은 뒤로 한 채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의 눈만을 의식하고 ‘안 그런 척’, ‘괜찮은 척’, ‘많이 알고 있는 척’, ‘신실한 척’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용물보다 겉만 그럴듯하게 하는 포장문화의 영향을 받아 자신을 포장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됩니까? 현재 소유하고 있는 자동차도 괜찮은데 괜히 빚을 내서라도 고급승용차를 타려고 합니다. 아파트 살 돈이 없으면 전세를 얻어서라도 강남의 고급 아파트에서 살려고 합니다. 모든 신용카드를 다 긁어서라도 명품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포장문화에 속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면을 벗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입니다. 남에게 보여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입니다. 내가 가면을 쓰는 것은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발가벗겨진 간난 아이처럼 드러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겉만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5절에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잠언 16장 18절에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만하다는 것은 망하겠다고 작정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교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만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교만을 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심에도 불구하고 나귀 새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의 겸손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2) 구원의 왕
둘째로 본문에서는 구원의 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제자들이 끌고 온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나귀에 타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7절과 8절을 보겠습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지금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에 타시려고 하는데, 안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의 등위에 깔고 그 위에 예수님이 타도록 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헌신이요, 봉사라고 생각합니다. 봉사와 헌신은 없는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 주어진 것을 가지고 드리는 것이 봉사요 헌신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걸치고 있던 겉옷을 주님께 내어 드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제자들의 그 모습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도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소리를 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9절) 여기 ‘호산나’라는 말은 “비옵나니 우리를 구원하옵소서.”라는 뜻입니다. 군중들은 구원을 노래하며 구원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대하고 있던 구원은 정치적인 의미의 구원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게 주권을 빼앗긴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치적인 자유와 독립을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들을 로마로부터 구원해 줄 단순히 정치적인 지도자로 생각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단순히 로마에서 자기들을 구원해 줄 정치적인 지도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다면 나귀를 타지 않으시고 수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말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력으로 로마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연약한 나귀 새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정치적인 지도자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죽은 영혼을 구원하고 새롭게 하는 영적인 메시아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장 20절에서 마리아의 몸에 예수께서 잉태되었을 때, 하나님의 사자, 즉 천사가 요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님이 무엇을 하신다고 합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메리카 어느 인디언 부족의 성년식 이야기입니다. 한 부족에서는 성년이 된 소년, 소녀에게 바구니를 들고 옥수수 밭을 걷게 합니다. 긴 밭고랑을 걸으며 가장 크고 탐스러운 옥수수 딱 하나만을 골라 바구니에 담아 오게 합니다. 그런데 이때 이미 지나온 길로는 절대로 되돌아갈 수 없으며, 이미 딴 옥수수를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정말 가장 크고 탐스러운 옥수수 딱 하나만을 골라야 하는 것입니다. 성년식에 참석한 소년, 소녀들이 어떤 옥수수를 골랐을까요? 소년, 소녀들의 바구니는 비어있거나, 맨 마지막에 급하게 딴 초라한 옥수수 하나가 담겨 있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좋은 것을 다른 것과 끊임없이 비교하다가 결국 놓치고만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여러분들도 가장 좋은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날마다 세상의 것과 예수님을 비교하다가 예수님을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놓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존귀한 분이신 예수님을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기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3) 침묵의 왕
셋째로 본문에서는 침묵의 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평화의 왕으로서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우리 주님을 향하여 수많은 사람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열광적으로 “호산나 호산나”를 외치며 열광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광을 하는 무리들을 지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0절을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반응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주 새벽기도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타고 가시던 나귀 새끼에서 내려 군중들과 악수도 하고,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나귀에서 내려 환호하는 군중들과 함께 환호하지 않으시고, 환호하는 군중들 속에서 예수님은 여전히 침묵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군중들과 함께 기뻐하지 않고 왜 침묵하셨을까요? 환호하는 군중들이 얼마 있지 않아 자기를 배반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대단한 환영을 받고 있지만, 얼마 있지 않아 무서운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침묵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침묵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침묵 속에는 언어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토머스 칼라일은 “침묵은 말 이상으로 웅변적이다. 연설은 위대하다. 그러나 침묵은 더욱 더 위대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침묵하신 주님의 행동은 많은 의미를 지닌 말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주님의 침묵은 현실을 수용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의 구속하기 위하여 주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대속의 제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계셨고, 또 이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나아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구속의 역사를 감당하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하여 침묵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주님의 침묵은 이렇듯 매우 값진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위해 침묵기도를 하시고 침묵 기도를 통하여 힘을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는 침묵의 힘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통하여 침묵에 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말을 잘해서 존경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침묵을 잘해서 존경을 받습니다.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템플턴 상을 받은 적이 있고, 한국 기독교계에서 탁월한 인품으로 존경받았던 고 한경직목사님의 특징은 별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며 침묵을 합니다. 그러다가 좋을 때는 “예, 그렇군요.”라는 식으로 말씀을 하시고, 반대로 동의하지 않을 때는 “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이런 식으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모르면 아예 아무 말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맞으면 끄덕끄덕 하고 모르면 갸우뚱만 하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신비감을 느낄 것입니다. ‘저 사람에게 뭔가 대단한 게 있나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실수하기 마련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하든지, 사실보다 더 과장해서 부풀리든지 실수하기 마련입니다. 스위스인들은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제논이라는 철학자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귀는 두 개, 입은 한 개를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갑절이나 하라는 뜻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 할 때는 할 수만 있으면 많이 전해야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말수를 줄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의 침묵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많은 말로 설득하는 대신 침묵의 힘으로 설득하시기 바랍니다. 달변보다 침묵이 더 힘이 있습니다.


4) 눈물의 왕
넷째로 본문에서는 눈물의 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벳바게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이르게 되자, 주님께서 이해하기 힘든 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본문과 달리, 누가복음 19장 41절을 보면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향해 “호산나, 호산나”하며 소리를 지르며 환영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주님이 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슨 이유로 주님이 우셨을까요? 다가오는 십자가의 고통이 두려워서 우셨을까요? 아니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이 억울하셔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이 우신 이유를 알려면 41절 뒤에 나오는 구절을 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9장 42절에서 44절까지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이것은 대단히 비극적인 예언의 말씀입니다. 열렬하게 환영하는 군중들이 나중에는 주님을 배반하여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예언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 모두 무너졌고, 모든 것은 다 불에 타버렸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미리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예루살렘 성과 사람들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 자신을 위해 울지 않으셨습니다. 멸망해 가는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우셨습니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을 보시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의 눈에 눈물이 마르지는 않았습니까? 내 남편이, 내 자녀가, 내 형제와 친구가 구원받지 못해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한 방울의 눈물도 흘려보지 못한 채 여러분들이 구원받은 것에만 감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영혼 구원보다도 먹고 사는 것에만 신경 쓰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우리가 울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두고 온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울어야 할 때입니다. 이 땅을 위해 울어야 할 때입니다. 아직까지 믿지 않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울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울면 사랑하는 가족들이, 친구들이 살아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눈물에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금요집회에서 제가 “땀과 눈물 어느 쪽이 더 짤까?“하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KBS 2TV '확 베일을 벗겨라'에서 땀과 눈물을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제작진은 염분 농도를 측정하는데 필요한 땀과 눈물을 채취하기 위해 각가지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먼저 땀을 얻기 위해 용인 유리공장의 노동자, 서울 재즈 아카데미 무용가, 가정용 사우나통 속에 들어간 유도선수를 동원했습니다. 눈물은 2인 1조로 구성된 연기학원생 4개조가 만들었습니다. 서로 치고 받아서 얻은 고통의 눈물, 양파를 썰면서 받아낸 자극에 의한 눈물, 슬픈 분위기를 조성해서 얻은 눈물, 웃겨서 만든 눈물을 시험관에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샘플들을 연세대 의과대 생리학 교실의 <플레임 포터메터>라는 기기로 분석했는데, ’눈물이 땀보다 더 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유리 공장 노동자의 땀의 영분 농도는 30~150mM(밀리몰= 농도의 단위), 댄서의 땀은 72mM, 사우나 땀은 117mM로 나타났습니다. 이에 비해 슬픔의 눈물의 염분 농도는 180mM, 양파의 눈물은 161mM, 웃음의 눈물은 200mM로 측정되었습니다. 이 실험을 한 연세대 연동수 교수는 ”눈물은 피나 호르몬처럼 몸속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물질이서서 땀보다 염분이나 기타 성분의 농도도 진하다.“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이 실험에서 땀보다 눈물이 더 진하다는 것은 땀보다 눈물이 더 귀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땀을 흘려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눈물 흘리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물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시편 126편 5절과 6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면 우리의 아내가, 우리의 남편이, 우리의 자녀가, 우리의 가정이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울면 좌절하고 낙심하며 주저앉아 있는 심령들이 살아나고, 우리 교회가 살아나며, 이 땅이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눈물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웃을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태일목사 고난과 영광의 행렬 마21장 01절 ~ 11절

오늘은 2004년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이며 고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종려주일((悰櫚週日), Palm Sunday)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했던 것을 근거로 종려주일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요12:13).
성경에서 종려나무(the Palm)는 의, 아름다움, 승리 등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고난 주간의 첫날이 종려 주일로 불리는 것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메시야로 개선하는 왕처럼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뜻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데서 유래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때는 이 주일을 호산나 주일(Dominica Hosanna)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것도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시 그의 입성을 환영하는 무리가 '호산나'라고 외친 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종려 주일은 그 옛날 서로마 교회에서는 이날 그리스도의 수난사(受難史)를 낭독했기 때문에 '고난의 주일'(Dominica Passionis)이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종려주일에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은 주께서 자신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메사야로 오셨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한 일주일 후에 있을 부활의 승리를 예견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에 나타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한 번 헤아리면서 우리는 어떤 모습, 어떤 행렬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며 은혜 나누기 바람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벳바게까지 무리들과 함께 도착하는데 거기서부터 하나의 퍼레이드(행렬)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입성 행렬을 보고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했습니다.(10절)


1. 먼저는 대표적인 사람들로서 주님을 환영하는 무리들입니다.
9절을 보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가로되” 그랬습니다.
몇 명인지 정확하게 언급은 하지를 않았지만 역사적인 자료에 의하면 250만명 정도 모였을 것으로 봅니다. 당시 유월절 기간에 사용된 희생양은 약 25만마리였다고 하니 1마리에 10명을 기준으로 한다면 250만명 정도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많은 숫자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갈 때 같이 행렬에 참여한 다양한 군중이 있었습니다. 무리중에는 예수님은 정치적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민족을 해방할 메시아가 될 줄로 알고 그들은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주님을! 평화의 왕으로, 겸손한 왕으로,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환영하며 맞이하는 사람들입니다.
나귀에 자신들의 겉옷을 얹고, 자기 겉옷을 깔고 종려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흔들면서 호산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찬양하며 영접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은 곧 왕의 자리에 오를 것으로 기대하고 나름대로 꿈을 지니고 참여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막연히 행렬에 참여한 무리도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진심으로 주님을 맞이하며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군중심리에 휘말려 일시적 감정으로 외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니면 자기들의 속셈을 따라 정치적인 왕으로 알고 그를 향하여 외치기도 했습니다.
그 무리 가운데에는 거기에 일시적으로 참여했다가 지금은 예수님을 호산나 하며 환호하지만 머지않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돌변할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다 아시면서도 그들을 그대로 받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며칠 후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다만 그들 죄인의 죄값을 대신 치루사 구원을 주시려는 뜨거운 사랑으로 백성들의 환호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주님의 심정을 다시금 헤아려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를 위해 주가 당하신 고난이 그 얼마나 크고 감사한 것이었는지를 다시금 새로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사실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행렬은 개선장군의 행렬이 아니었습니다. 기쁨의 행진도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구원이라는 대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기 위한 고난과 가시밭길을 시작하는 행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종려주일, 이 날은 고난주간의 시작이요, 슬픔과 탄식의 시작입니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을 가지고 엄숙하게 보내는 절기입니다.
더욱이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요, 메시야이시면서도 초라한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속주요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에 대해서 묵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면서 우리의 외침은 감정적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뜨거웠다가 식어지는 그런 열심히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착각을 하고 따르는 행렬이 되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사랑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도 지고 그 주님을 따라 가야 합니다.


2. 종려주일!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입니다.
종려주일에 나타나는 또 다른 하나의 행렬은 눈에는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시기하고 모함하고 죽이려는 무리들,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당시에 전통과 관습에 젖어 사는 관념, 관습적인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미움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돈벌이 하는 자들의 상을 뒤집어 엎고 그들을 내어 쫓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신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 할 때 당시에 대제사장이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고정 관념과 전통에 도전한다고,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의 도움으로 쉽게 예수를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체포한 예수를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는데 앞장을 섰던 대제사장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목회자들이 큰 일들을 하고 교회를 성장시켰다해서 은퇴하기 싫어도 의무적으로 은퇴를 합니다. 왜냐하면 젊은 사람들에게 목회할 기회도 주어야 하고, 나이가 많으면 활동하거나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은퇴하는 것이 좋아 나이를 정한 것입니다. 갈수록 어렵겠지만 현재 70이면 70, 어떤 사람들은 65세에 싫던 좋던 은퇴를 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 율법에 따르면 대제사장은 한번 부름을 받으면 죽을 때까지 봉직했습니다(민29:23-29, 27:12-23). 그러나 로마가 이스라엘 민족을 지배하면서 대제사장직을 임명직으로 바꿨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제사장직을 로마에서 임명하기로 한 후에 로마 당국은 자신들의 정책에 동의하는 사람만, 자기들의 뜻을 잘 따르는 사람들만 골라서 대제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자신의 종교적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보다는 로마에 충성했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보다는 로마에 비위를 맞추며 충성했던 것입니다.
이런 교권에 사로잡힌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예수님이 성전에서 돈을 바꾸고 이권을 챙기려는 상인들의 상을 뒤집어 엎고 내쫓으니까 거기서 이득을 보고 기생하여 살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너무 못마땅했겠습니까? 거기다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너무 못마땅한 나머지 예수님을 죽이려는 생각으로 죽일 거짓 증거를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요11:47-54).
마태복음 26:59절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마음먹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려고 했는데 누가 모여 모의를 합니까? 당시 휼륭하다는 교사인 "서기관들"과 유대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인 "장로들"이 모였습니다. 성경을 가장 잘 알고, 교회를 가장 잘 알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서 가장 잘 알아야 하는 사람들이 모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싸우고 입을 삐죽거리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 교회를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남보다 좀 더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부덕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잘 아는 사촌 같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이름으로 모여서 어떤 일들을 합니까? 무슨 이야기를 나눕니까? 낙심한 자에게 용기를 주며, 절망한 자들에게 소망을 불어 넣어 주며, 힘이 없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모입니까?
아니면 모여서 남에게 상처를 주고 다른 사람을 헐뜯고 비난하는 일을 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무리에 속합니까?
당시에는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이, 성경을 많이 보고, 봉사를 많이 하고, 목회자를 잘 아는 사람들이… 마치 예수님을 죽이려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처럼 교회와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2000여년 전에도 예수님을 죽이려는 종교지도자들은 잠자리도 거부한 채 밤중에 모여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밤에 모여 기도하기 보다는 잠도 안자고 모여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던 것입니다. 사실 몰래 모이는 모임치고 건전한 모임이 없습니다. 모든 불의와 음모는 어둠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둠은 죄를 가리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입니다.


3.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종려주일을 맞이해야 합니까?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주님을! 평화의 왕으로, 겸손한 왕으로,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환영하며 맞이하는 사람들, 나귀에 자신들의 겉옷을 얹고, 자기 겉옷을 깔고 종려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흔들면서 호산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찬양하며 기쁨으로 영접하는 사람들의 행렬을 봅니다.
또 다른 하나의 행렬은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시기하고 모함하고 죽이려는 무리들, 종교 지도자들의 행렬입니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이 행렬을 따라야 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1) 우리는 이 행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3-5, 9-10절)
10절을 보면 사람들이 '이는 누구뇨'했습니다. 이 말은 입성하는 무리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려는 것입니다. 환호하는 무리들은 소동하며 말하기를 '이는 누구뇨'했습니다.
종려주일에 환영하는 행렬 맨 앞에 선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나귀 새끼를 타시고 겸손히 입성하시는 주님은 과연 누구십니까? 우리는 먼저 이 행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과연 누구인시지를 바로 아는데서부터 참신앙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변화가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1,2절에서 제자들을 시켜서 나귀를 끌고 오게 하심은 먼저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메시야 되심을 믿게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3절에서는 나귀를 끌고 올 때 주인이 묻거든 주님은 “주가 쓰시겠다 하라” 제자들에게 말씀하심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주가 되심을, 그리스도, 메시야가 되심을 말씀하심니다.
4-5절을 보면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했습니다. 즉 자신이 구약의 선지자들의 말씀하신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심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62:11의 있는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님 자신이 이미 구약에서 말씀하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나타내고 평화와 겸손의 상징인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심으로서 정치적 메시야가 아닌 평화와 겸손의 왕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
6-8절에서는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무리들은 나뭇가지와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승리의 왕'으로 영접하였습니다. 9절에서는 '호산나'라는 찬송을 부름으로 즉 '지금 구원하소서' 주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감격의 호칭이었습니다.
10, 11절에서는 도대체 그렇게 열렬한 환영을 받고 예루살렘에 들어온 사람이 누구냐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군중들이 소동하면서 제기한 질문은 '이는 누구뇨', 즉 예수가 누구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였다고 했습니다. 원문에는 '선지자'란 말 앞에 관사 ‘호’가 있어서 이 대답은 예수님을 종말론적인 선지자, 즉 모세가 예언한 바로 '그 선지자'(신18:15;요1:22)로 고백한 것임을 밝혀 줍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는 누구뇨'라는 질문을 예수님의 이름 앞에서 제기합니다. 다만 바라기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혹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따라서 '호산나'라고 하지를 말고 구세주로서의 호산나를 고백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왕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범죄한 인류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원수되었던 인류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엡2:4).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고난의 사역을 완성하신 주님은 희생의 왕이십니다. 그 분은 끝까지 겸손한 자세로 사역을 감당하시고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철저히 희생하심으로써 온 인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분만이 유일한 생명의 수여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주되심을 바로 알 때 진정 하나님의 구원의 행렬의 동참자가 될 수 있습니다.

2) 헌신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8절)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셨습니다. 그 나귀 새끼를 타실수 있도록 제공한 익명자가 있습니다. 이름은 없지만 만왕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주님 위해 중요한 헌신을 한 사람입니다. 짐승도 그 주인의 헌신으로 귀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행렬에 참여한 무리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영광의 왕께서 가시는 길에 폈습니다. 이는 왕에 대한 충성과 헌신의 고백입니다.
종려나무가지를 길에 펴가며 '호산나' 찬송하며 환영하며 외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께 봉헌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께 봉사와 헌신을 해야 마땅합니다. 만왕의 왕되신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충성과 헌신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께서 쓰시고자 하시면, 말씀하시면 아멘으로 헌신하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 바람니다.

3) 끝까지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9절)
무리들이 주님을 환영하는 데에는 여러 종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이 왕이 될 때 자신들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욕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자로 생각하고 따르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꿈을 가지고 따름니다. 막연히 따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시적인 사람들도 많습니다. 감정적으로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도에 포기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보좌가 아닌 죽음의 골고다를 향해 가시자 곧 주님을 버렸습니다. 오히려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오늘 2004년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과연 어떠한 자세로 이 행렬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주님이 축복의 구주가 되실 때에는 헌신과 충성을 다하지만, 고난과 시련이 있을 때에는 쉽게 그 분을 저 버리지 않습니까?
그런가하면 끝까지 예수님을 따른 무리가 있습니다. 피땀 흘린 기도의 겟세마네 동산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오르신 골고다 언덕까지, 구레네 시몬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자리까지, 아리마대 요셉과 같이 니고데모와 같이 주님 시신을 장사하기 위해 무덤까지,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새벽에 주님 장사지낸 무덤까지, 부활의 자리 그 아침까지, 다시 만날 주님앞에 서는 그 날, 내 생명 다하는 날까지 주님을 따르시기 바람니다. 그의 부활을 증거하는 일까지 주님을 따른 자들을 본받을 수 있기 바람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사람이나 환경이나 사건 바라보지 말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따르시는 귀한 믿음의 행렬이 있으시기 바람니다.
(찬송가 360장, 예수 나를 오라하네 예수 나를 오라하네 어디든지를 주를 따라 주와 함께 함께 가려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아 이제 우리는 예루살렘성이 아닌 내 마음에 주님이 입성하시도록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주님 영접하시기 바람니다. 영광의 길을 걷기 전에 먼저 고난의 길, 십자가의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주님은 고난의 주님만이 아닌 부활과 영광의 주님이심을 믿고 그 승리의 주님만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람니다.
이제 우리의 귀한 삶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종려나무 가지만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요제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람니다. 그 앞에 우리들의 옷이라도 깔아드리고, 나귀 새끼라도 드릴 수 있는 헌신과 섬김의 생활을 사시기 바람니다. 골고다와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가면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중간에 포기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끝까지 주님께 헌신하고, 순종하여 부활 승리하는 귀한 삶을 사는 영광스런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박지온목사 주가 쓰시겠다 마21장 01절 ~ 11절

지난주에 월요일 날 일찍부터 일본 들어간다고 들어가서 치유 전도학교 사역을 마치고 수요일 날 나왔다가, 또 대전에 갔다가 목요일 날, 그 다음에 어제까지 지나오는 중에서 여러분 아마 봄철에 감기가 걸리는 게 나한테도 왔어요. 그래서 감기 몸살이 되어 가지고 오늘 1부 예배를 제가 못 섰습니다. 2부 예배도 '되겠나!' 싶었는데, 또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이렇게 강단에 서게된 것을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늘 뭘 느끼느냐 하면, '되겠나...' 싶어서 늘어져 있으면 안되고, 그래도 '하겠다!' 싶으면 서게 되더라 구요. 받아합시다. "하나님은 당신을 쓰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 믿음 회복이 여러분과 저의 싸움입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과 우리 싸움이다! 싸움이라 그러면 이상한데, 그런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 중에 나귀를 선택을 하시는데, 우리 예수께서 그 나귀를 선택해서 제자들에게 가져오게 하시는 그런 과정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어요. 그러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예수께서 나귀를, 그것도 사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뭔가 창조해 내는 것도 아니고, 잠깐 빌려서 쓰셨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우리 주님의 손에 잠깐, 어떻게 해요? 빌려서 쓰시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뭐 엄청나게 뭐 될만하고, 그런 게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잠깐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내가 쓰겠다!' 빌린 겁니다. 우리 하나님의 계획이!

그래서 나귀는 멋모르고, 빌려 가지고 예수님을 등에 업었는데 엄청난 역사가 나와요. 아마 그 다음에는 생전처음으로 봤을 겁니다. 모든 사람이 막 옷을 갖다가 펴놓고, 종려가지를 꺾어놓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나귀가 놀랐을 겁니다. '도대체 생애에 이런 일이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이 쓰시면 역사가 나옵니다. 문제는 '우리 주님이 쓰시겠다!' 오늘도 여러분과 제게 이 축복의 말씀, 메시지로 한 주간도 주님께서 여러 장소에서, 혹시 문제나 사건이 생길 때마다, 받아합시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쓰려고 안 그랬나!' 그 말입니다. 주님이 쓰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놓고, '내가 너를 쓰겠다!'는 이 일이 모세에게 확인이 안 와서, 계속해서 모세가 고통 당하는 것이거든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불림을 받았습니다 만은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겠다는 사실에 확인이 안 나올 때에, 그 믿음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더라 구요. 출애굽기 3장 10절에 보면,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이렇게 하니까 11절에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바로 앞에서 범죄하고 쫓겨 나온 주제에...' 더군다나 이 미디안 광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80세난 노인이 뭘 합니까!' 그런 내용이죠.

그럴 때에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아주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받아합시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것이 하나님이 쓰시는 내용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불림을 받았습니다 만은, 현재 미디안 광야에 그 애굽에서 바로의 눈을 피해서 숨어있는 주제에, 그리고 연세도 벌써 80이 다 되었습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 모세에게 '애굽 땅에서 고통 당하는 너희 백성을 인도하여 내라!' 이러니까! 모세가 '못합니다!' 그랬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쓰겠다!' 그랬습니다. 쓸 수 있는 이유가 뭐냐?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랬습니다.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리고 간단하게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재앙을 내리고, 애굽에 10가지 재앙 내릴 것을 말씀하셨죠. 그리고 애굽에서 나오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은혜를 입혀서 빈손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금은 보화를 많이 가지고 나올 것을 이미 약속을 했습니다. 20절에 보면,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20절에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출 3:22) 여인마다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우거하는 자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 자녀를 꾸미라 너희가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리라" 나올 때에 빈손으로 안 나오고, 많은 은 금 패물을 가지고 나올 것을 약속을 했습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예요.

왜? 쫓겨나가는 주제에 뭘 가지고 나온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올 때에 애굽 사람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에게 은혜를 입게 해 주셔서 그들에게 은 금 패물을 한없이 줘 버렸습니다. 아마 그 동안 급료도 못 받고, 노예로 살았으니까! 죽으라고 고생만 했는데, 한꺼번에 급료를 다 받았어요. 그래서 은 금 패물을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그 여러분도 알다시피 모세가 40일 금식하러 들어가고 난 후에, 아론이 너무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역한 중에서, '뭔가 우리들을 이곳에 인도한 신을 만들자!' 이렇게 해서, '그러면 너희가 가지고 있는 은 금 패물을 내어놓아라!' 이러니까 잠깐 내어놓았는데, 큰 금송아지가 하나 나와 버렸어요. 이 정도로 풍성한 금은을 가지고 나왔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뭐냐하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쓰시겠다고 하셨지 만은, 모세가 하나님이 과연 '나를 쓰시겠다!' 라는 확신과 믿음이 안 서기 때문에 계속해서 방황하게 되고, 계속해서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4장에는 뭐라 그랬느냐 하면, 계속해서 하나님이 모세를 쓰시겠다는 사실이 안 믿어지니까, 하나님께서 또 모세에게 '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라!' 처음에는 '막대기를 던져라!' 그러니까 막대기를 던지는 순간에 뱀이 되어서 모세에게 덤벼들었습니다. 뒤를 잡으니까, 다시 지팡이로 변했죠. 다시 '네 손을 품속에 넣었다가 빼라 그랬습니다. 품속에 넣었다가 빼니까 문둥병이 발했습니다. 다시 넣었다가 빼라!' 그러니까, 다시 깨끗한 손으로 화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모세가 못 믿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싸움이 이 싸움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이 쓰시겠다!'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하마! 약속했습니다. 이것을 못 믿어요. 현실적으로 못 믿어요. 문제는 이걸 믿는 순간부터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역사 하시는데, 이 사실을 지금 믿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바로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4장 10절에 뭐라 그랬느냐 하면,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으로 함께 하실 때에 얼마나 놀라운 역사가 나오는 것인가를 보여줘도 또 말합니다. '나는 말못합니다!'

이러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11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나는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냐! 벙어리가 되게도 할 수 있고, 말하게 할 수도 있는 분이 아니냐!' 이렇게까지 말해도 모세가 '하나님이 나를 쓰시겠다!' 이 확신이 안되니까, 또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13절에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그랬습니다. 이 정도 되면 하나님이 성 내실만 하죠. 비로소 하나님께서 화를 발하십니다.

어떤 면에서 꼭 우리는 화를 돋구어 가지고 이 모세보다도 더한 사람들이니까 꼭 하나님의 화를 돋구어 가지고 한 대 얻어터지고 쓰여지는 주여 내가 이제야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쓰실 것을 믿습니다. 진작 그러지! 이게 거의 우리 믿음의 싸움이 이 싸움이에요. 이때에 하나님이 노를 발하시면서, '내가 쓰겠다는데, 왜, 네가 안 된다 그러느냐! 창조주 하나님인 내가 쓰겠다는데...' 그러니까 이 모세가 '안되겠다!'는 말이 이건 이상하거든요. '하나님이 쓰시겠다는데, 지가 뭐...' 우리가 걸핏하면, 무슨 문제나 사건을 당할 때에, '안됩니다! 나는 못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하나님이 나를 쓰겠다!' 그러는데, '내가 뭐냐?' 한번 질문을 해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에 꼭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해서, '내가 너를 가나안 땅에 보내서 이방족속들을 다 가나안 땅에서 몰아내고, 메시아 올 땅을 준비하겠다!' 약속을 했는데도,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못 믿으니까! '안되겠다!' 이겁니다. 그것이 광야의 싸움이에요. 광야에서 이 일을 회복하기까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수 있구나!' 이 믿음 회복하기까지, 이 믿음 회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 쓰러졌습니다. 다 모래땅에 파묻혔어요. 그 다음에 후대들이 이 믿음회복하고, 이 사실을 보게 되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로 통과하게 하시고,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게 하셨던 사실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이 거의 이 싸움입니다.

갈릴리에 있는 어부들을 불러놓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께서 세계 복음화 하시기 위해서, 무식한 베드로를 비롯해서 갈릴리 어부들을 훈련시키면서, '내가 너를 쓰겠다!'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기까지는, 그 훈련을... 그래서 언제까지 안 되느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올라가시고 난 후에 제자들이, 베드로를 비롯해서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우리 주님 앞에 쓰임 받겠다고 믿음이 회복된 것처럼 보여졌는데,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에 또 낙심해 가지고 어디로 갔습니까? '우리 고기 잡으러 가자!' 옛날로 또 돌아가 버렸어요.

우리가 옛날에 모습이 걸핏하면 이런 모습 아닙니까! 자꾸 돌아갑니다. 좀 쓰일라 그러면 옛날로 돌아가 버리고, 이제는 되었다 싶으면 또 옛날로 돌아가 버리고, 그래도 우리 주님께서 받아합시다. "그래도 주님은 베드로를 쓰셨다!" 책망한번 안 했어요. 찾아와서 베드로에게 또 한번 사명을 주시고 베드로를, 고향으로 돌아가 있는 베드로를 또 불러내어서 그를 오순절 성령으로 충만하게 임하시고, 그때부터 베드로는 인생을 주께 맡기고 전 생애를 주를 위해서 쓰임 받았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 사실이 구체적으로 베드로를 통해서, 또 베드로가 열두 제자를 통해서, 갈릴리 사람이 세계 살리는 귀한 일꾼으로 쓰임 받은 과정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처음 이 다락방에 와 가지고 다락방에서 이제 장로회를 조직을 하더라 구요. 거의 뭐 전부 개척 교회고, 우리 교회가 거의 장로님들이 많으니까, 우리교회 장로님들을 통해서 장로회 조직에 주축이 되었어요. 장로회 조직을 했었습니다. 했는데 아마 그때 회비를 얼마나 냈느냐 하면, 회비를 만원씩 정했다! 그래요. 회비를, 장로님들은 회비를 만원씩 정하고, 그런 중에 저는 뭐 만원 정했는지 어떻게 정했는지 모르는데, 서울에 올라가니까 어떤 목사님이, '아이고, 송현 교회 장로님들 쩨쩨하게 해 가지고 만원이 뭐냐! 그래서 무슨 세계 복음화 하겠냐!' 그러더라 구요. 그러더니만 이제 우리 교회가 건축해야 된다! 이래가지고 교회 건축하는 돈이 엄청나게 많은 돈인데, 그러니까 '아, 그때는 쩨쩨하게 보이더니만 그래도 송현 교회 장로는 뭐가 있네!' 요즘에는 이러더라 구요.

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돈이 '많다, 적다!'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누가 합니까? 주가 쓰시겠다고 그러시는데,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그러시는데, 여기 서 있을 때에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이루시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교회를 이렇게 보면서 늘 느끼는 것이 뭐냐하면, 교회 돈 있다고 뭘 하고, 돈 없다고 뭘 못 하는 게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이 믿음으로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믿음 없는 곳에는 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아요.

또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요. 돈 많은 사람, 잘난 사람, 위대한 사람 불러 가지고 쓰면, 무슨 생각하느냐? '아, 내 잘났기 때문에, 내가 잘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다!' 응당히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전혀 할 수 없는 형편에서, 하나님이 큰 일을 이루셔 놓으면, 생각이라도 이럽니다. 그 과정 속에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됩니다!' 말이라도 이렇게 해요. 나중에 교만이 생겨 가지고, '내가 다 했다!' 이럴 값이라도, 말이라도 '하나님이 하십시오!' 이러더라 구요. 나중에 일을 성취하고 난 후에 솔직하게 무슨 생각을 하느냐? '주여, 정말 이 일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뭐가 없습니까! 뭐가 못났습니까!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신 후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영광을 뺐지 않기를 위해서 여러분과 저를 선택했는데, 못난 사람 선택해야 되고, 부족한 사람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할 수 없는 것을 아시면 서도 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믿음이 회복되는 순간, 순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구체적으로 이루어갈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저는 이 교회 건축을 하면서 뭘 마음에 느끼느냐 하면, 누가 들어도, 누가 봐도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누가 하십니까? 하나님이 하십니다. 사람이 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누구에게 의지합니까?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이 믿음 회복하는 것이 바로 여러분과 저의 축복의 바탕이요, 이 믿음 회복하는 것이 흑암 세력과의 싸움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 믿음을 갖고, 어떤 사람이 그러면 쓰임을 받느냐? 조금 전에 출애굽기 3장에 읽었습니다.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쓰실 때에 대 전제로 하신 말씀이,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해라! 뭐 하라!' 상관없어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마! 내가 하겠다!' 이 말씀도 안 했어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마!' 여기에 답을 주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를 세계 복음화라는 엄청난 사역에 하나님이 내어 몰면서 하신 말씀이, '볼찌어다,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뭐라 그랬어요? '함께 하마!' 약속했습니다.

조금 전에 언급을 했습니다 만은, 베드로에게 이 사실이 실현되는 순간 그의 인생은 세계 복음화에 쓰여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그를 통한 제자들이 여기에 다 쓰임 받았습니다. 그게 뭡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구체적인 역사가 뭡니까?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영접하는 순간에 누가 옵니까? 성령께서 내게 실제로 임재 하십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이 이루어지게 되는 그때부터 뭐가 나옵니까? 기도라는 것이 나오죠.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어려운 문제나 사건이 생길 때마다 기도라는 것이 나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이해되기 때문에, 모든 문제, 모든 사건 하나님께 의논하는 구체적인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이 기도가 나오게 되는 이 사실이 벌써 여러분과 저에게 함께 하나님이 같이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나의 증거니라!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저는 그 시편 23편에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고자 선택해서 불렀습니다. 절대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붙잡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이름을 여러분 때문에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분 때문에 실패하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확실하게 붙잡으십시오.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이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할지 모릅니다. '박 목사님은 세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물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직접 들었어요. 또, 맨 날 큰소리 치니까 모르는 줄 아는가 봐요. 그래도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 세대를 알고, 물가 안다고 삽니까? 그러면 부자들 다 잘 살아라 고요! 일본 들어가 보니까, 영적 문제가 '있다, 없다!' 정도가 아니더라 구요. 돈 가진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돈 가지고 있으면 뭐 합니까! 여러분 하룻밤만 잠 못 자봐요. 수백 만금이 다 소용없어요. 하룻밤만 잠 못 자고, 시계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리면 돈이고 뭐고 다 귀찮습니다. '내가 정녕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여기서 모든 문제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할 수 없었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실적 생명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만은, 누가? 성령께서 그와 함께 임하시는 순간에, 성령하나님이 내주 하는 순간에, 그의 인도를 받게 될 때에 베드로의 인생 전체가 승리하게 하셨던 놀라운 사실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13절에 보면,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막 3:14)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막 3:15)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여기에 중요한 기적의 포인트가 뭡니까?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이 축복이 어마어마한 축복 아닙니까!

저는 스펄젼이 말한 이 말이 너무 좋더라 구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함께 한다는 이 사실은 우주를 조각배에 담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능합니까? 우주를 조각배에 담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속에,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이보다 더 큰 기적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구원받았다! 감격한다!' 바로 여기에서 해결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 이 자리가 위대한 자리요, 축복의 자리요, 왜, 은혜의 자리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기 찾아오신 분이, 오늘 여기에 예배드리면서 이것이 이해가 안 된다 그러면, 이번 한 주간 계속해서, '하나님,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옵소서! 함께 하실 때에 어떤 기적이 오는지 깨닫게 해 주옵소서!' 이것만 기도하세요. 하나님이 이 사실을 회복하게 될 때에 모든 것이 여기에 나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너무 잘 안 믿어요. '창조주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맨 날 듣는 말이다! 싶은지, 잘 못 믿는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성경이 말씀합니다. 출애굽기 4장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한번 받아합시다. "하나님이 하시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 할렐루야! 진짜 믿습니까!

이제는 여러분 한 주간 다른 소리하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그래놓고 또 다른 소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열 받혀 가지고... 출애굽기 4장 12절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약속하시고, 오늘 여러분과 제게 분명하게 약속하신 것이,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1장 2절에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마 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미 나귀가 어디에 있고, 또 나귀를 몰고 올 때에 무슨 말하고 다 아십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 그래도 함께 하신다!"

진짜 여러분 다 아십니다. 부족한 것도 알고, 못난 것도 알고, 연약한 것도 압니다. 혹시 어떤 때에, '하나님, 이건 내가 못합니다!' 말하기 전에 벌써 압니다. 최선을 다해서가 아니고, 여러분 분명히 이 믿음이 회복되는 순간, '안됩니다! 못합니다! 연약합니다!' 이 말이 들어갈 겁니다. 왜? 그때부터 뭐냐?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주여 나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쓰십니다! 나도 쓰여질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뭐 할 일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게 안되면 아무리 할 일을 앞에 갔다 놔도 눈에 보이지를 않아요. 그 길에 기적이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시겠다! 쓰임 받는 사실이 믿음으로 회복되고, 이 일이 눈에 보이는 순간 여러분에게는 비로소 기적의 역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사실이 오늘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해 주시죠.


하나님은 못 하실 것이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바로 그 분이 여러분과 저와 함께 하신다고 확실하게 약속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을 하나님은 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약속은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으로 이 일을 이루어나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4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할렐루야! 예루살렘 입성할 때에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실 것을 이미 벌써 예언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원 사에 중요한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죄악을 해결하시고, 저주와 재앙을 해결하시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걸 가지고 구원사라 그럽니다. 이것을 가지고 구원이라 그럽니다. 성경은 여기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것이 초점입니다. 따라서 구원사를 구체적으로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여러분과 제게 표현되는 단적인 확실한 단어가 뭡니까? 전도와 선교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 중에 계획이 구원사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세우신 계획 중에 계획이 세계 복음화입니다. 전도와 선교라는 것으로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실 때에 '뭐, 축복한다! 뭐, 복 받는다!' 그런 배경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목표와 이 계획을 붙잡고 나가게 될 때에,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고 그랬습니다. 뭘 '복 준다, 뭘 준다!' 그 말이 아닙니다. 교회를 건축하고, 세계 복음화를 이루어 나가야 되겠다! 세계 복음화에 교회 건축이 있습니다! 그렇다 그러면 하나님은 뭘 채웁니까! 교회 건축에 필요를 채울 겁니다. 하나님은 세계 복음화에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성경에서 계획이라는 엄청난 축복 속에 세우신, 여러분과 저에게 하나님이 주실 은혜입니다.

전도와 선교라는 것 이것은 축복 속에 축복이요,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계획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계획을 붙잡고 나가는 여러분들에게 사실적인 하나님의 역사와 필요가 채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들이 아실 것은 뭘 내어놓아라 할게 없어요. 이때부터 이제 우리에게 일어나게 될 것이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성령에 인도를 받고 지금 이 순간 하나님 앞에 성령으로 구체적인 인도를 받고 있느냐 이걸 확인하면 돼요.

그래서 계속해서 요즘 메시지 중에 개인 예배! 이 개인 예배가 이루어지게 되면 영적 문제가 없어진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개인 예배가 나오게 되면, 그걸 하루에 10분이라도 좋습니다. 만약에 이것을 구체적으로 하게 되면, 내 개인에게 와 있는 영적 문제가 없어진다! 그건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왜?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나가지 않아서 그렇지, 정말 하나님 앞에 나가서 예배드리면, 나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 이 사실을 구체화 시켜 나가면, 이것을 10분만한다 그래도 영적 문제가 없어진다!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어떤 문제가 없어지느냐? 이때부터 24시간 생각에서 기도로, 모든 생각을 기도로 바꾸는 겁니다. 저는 처음에 무시기도라는 것이 참 어렵더라 구요. 그래서 처음 그 다락방에 와서 훈련받은 것이 호흡기도! 호흡기도를 했는데, 호흡기도를 하려니까 힘들어요. 들이쉬고 내쉬는데 거기에 신경 쓴다고 하다가 기도도 잃어버리고, 이 잘 안되어요. 왜냐하면, 이 심호흡을 해 가지고 내어 쉬려고 그러면 배에 힘을 줘서 하다보니까, 이 단전호흡이거든요. 좋겠다 싶긴 하지만 거기다가, 너무 호흡에다가 기도를 싫으니까, 이게 잘 안돼요. 상당히 무시기도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만은, 이 생각에서 기도로 바꾸어라! 이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걱정이 있으면 있을수록 기도가 더 되어요. 웃다가다 걱정 있으면 생각납니다. 울다가도 걱정 있으면 생각납니다. 자나깨나 걱정 있으면 생각납니다. 그래서 사실은 어떤 면에서, 여러분 대게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이 상담도 하고, 뭐 이야기하는 중에서 어렵다 그러면서, 어려운 이야기를 할 때에, '나는 왜 이렇게 어려우냐...' 그러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 그러면 저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직 덜 어려워져있구나!' 문제는 더 어려움이 나와야 일이 된다! 왜? 더 어려우면 눈물이 들어가 버려요. 그 다음에 모든 생각이 그 속에 잡혀 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헤어날 수 있는 길이 뭐냐? 그 모든 생각과 모든 일 속에,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잡혀 버리거든요. 그러면 그 생각을 뭐로? 기도로! 평안이 옵니다. 참 안식이 옵니다. 생각을, 모든 생각을 기도로! 이게 되는 거잖아요. 여러분 아마 자식 생각, 무슨 문제 있으면, 금방 자식에 대한 문제 있으면 자나깨나 생각납니다. 생각 날 때마다 어떻게 해요? 기도해요.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때마다 누구의 역사를 힘입습니까?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의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못나고 할 수 없는 줄 알고 불렀습니다. 그러니 처음 초기에 우리 하나님께서 졸다가 잘못 찍어 가지고 여러분 선택했다! 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여러분을 고르고 골라서 선택했습니다. 확실하게 선택했습니다. 이 축복의 역사가 여러분과 제게 약속했다는 이 사실 한가지! 사실로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이 순간 누가? 성령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이제 그분에게 생각과 마음을 모으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인도 받게 되는 순간, 순간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양준목사 평화의 왕 마21장 01절 ~ 11절

예수께서 한 번도 사람을 태운적이 없는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눅 19:30)

한 번도 사람을 태운 적이 없는 나귀는 특별히 성스러운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결례식에 사용되는 붉은 암송아지는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짐승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명하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 오게 하고."(민 19:2)

"그 피살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 곧 그 성읍의 장로들이 아직 부리우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고."(신 21:3)

여호와의 법궤를 태울 수레는 한 번도 사용되어 본적이 없는 수레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 보내고."(삼상 6:7)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과연 성전을 청결케 하는 성스러운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 21:12-1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때는 유월절 절기였습니다. 유월절은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과 더불어 유대인들의 의무적인 3대 명절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이 세상 끝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몰려 들었던 것입니다. 어느 곳에 살든지 간에 유대인들의 소원은 단 한 번만이라도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이 외국 땅에서 유월절을 맞이하게 되면 그들은 "금년에는 여기에서,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바로 이 유월절로 예루살렘과 더불어 주변 마을들은 모여온 순례자들로 메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 마침 인구 조사가 행하여졌는데 그것은 유월절에서 제물로 죽임당한 어린양으로 측정했던 것입니다. 기록에는 256,500마리로 되어 있습니다. 유월절 규정에 의하면 어린양 한 마리에 최소한 10명을 단위로 바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숫자대로 계산한다면 유월절에 약260만여명이 되는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30km 이내에 사는 모든 성인 남자 유대인은 필히 유월절을 지키러 와야 하는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틴에 있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민족의 가장 큰 절기를 지키기 위해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보다 더 좋은 극적인 순간은 선택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종교적인 대망으로 잔뜩 고조된 사람들이 붐비고 몰려 들어왔을 때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이 순간을 택하신 것은 예수님의 돌변적인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미리 준비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은 구약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예언자 스가랴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이 예언의 요점은 메시야가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틴에 있어서 나귀는 경멸받는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나귀는 고상한 동물이었습니다. 왕이 전쟁에 나갈 때에는 말을 타고 평화로울 때에는 나귀를 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나귀를 타시고 성에 입성하시는 행위는 예수께서 평화 가운데 오시는 것이라고 하는 증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위하여, 평화 속에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꿈꾸고 있던 용사나 웅장한 정복자가 아니라 평화의 왕이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사실을 당시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환호하면서 호산나! 호산나!를 부르짖었던 예루살렘 사람들은 참 메시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군중들은 이 세상의 악의 세력을 부수고, 부정과 불의를 박살내며 파괴하는 웅장한 정복자로서 예수를 환영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파괴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러 오셨으며,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도와 주려고 오셨으며, 무력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을 보이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여 그가 가시는 길에 자기들의 옷을 펼쳐 깔았습니다. 이것은 예후가 왕으로 선포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이 행한 것이었습니다.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왕하 9:13)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무리들은 이같이 환호합니다.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눅 19:38)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9)

본문 10절의 "호산나"라는 히브리 말은 "지금 구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시편 118편 25절에서 인용해 온 구절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시 118:25)

이 말은 다음 성구에서도 똑같이 사용되었습니다.

왕의 손에 원조와 보호를 구하는 사람에 의해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군중들이 "호산나" 라고 소리지를 때, 이는 메시야가 왔으니, 하나님이 개입하여 이 백성들을 구원해달라는 하나님께 대한 부르짖음이었던 것입니다.

유대 역사상 가장 비참한 재난 중의 하나가 B.C. 175년경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된 일입니다. 안티오커스는 유별난 왕으로 헬라의 사상과 문화에 심취된 자로서 유대주의를 박멸하고 팔레스틴에 헬라의 생활과 문화, 헬라의 사상과 종교를 어디서든지 될 수 있는대로 필요하다면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이식(移植)시키는 것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던 소위 헬레니즘 매니아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팔레스틴을 정복한 그는 고의적으로 성전을 더럽히고 모독하기 위해 올림피아의 신 제우스에 제물을 드릴 때와 같이 성전 제단에 돼지 고기를 헌물로 드리고 성전에 있는 각 방들은 공인된 매음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사본을 가지고 있거나 어린아이에게 할례를 베풀면 사형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지워버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거침없이 자행했던 것입니다.
그 때에 마카비 형제들이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B.C. 167년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게 되었고 안티오커스를 추방하고, 더럽혀진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하고, 다시 건축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다시 신성한 것으로 하나님께 봉헌하였습니다. 마카비 2서 10장 7절에서 이 큰 날의 기쁨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려나무의 작은 가지들과 곧은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주의 성전을 청결하는데 성공을 그들에게 베푸신 여호와를 찬미했다." 그 날에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들의 시편을 노래 불렀던 것입니다. 시편 118편은 아마도 위대한 정결의 날, 유다 마카비가 안티오커스를 정복하고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썼거나 지은 것 같습니다. 이 시편은 정복자의 시편입니다.

".저희가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 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같이 소멸되었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네가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셨도다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오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시118:11-26)


군중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환영했지만 그 메시야는 마치 마카비 형제같은 모습으로 환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한 그들의 이같은 환영은 이스라엘의 적을 분쇄해 버리는 정복자에 알맞는 환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나귀를 타시고 오시는 예수님은 무력, 대단한 군사력을 동원해서 오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에 대한 최고, 최후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며 겸손과 온유, 사랑을 통한 평화의 왕이심을 선포하시고자 극적인 방법으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입성 당시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는 한 예수님의 지상운명은 비참하게 끝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때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해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32-34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될 일을 알고 죽으시기 위해 입성하시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데 모든 면에서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벳바게로 나귀를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신 분도 예수님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과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도 다 아시면서 이 일을 진행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처럼 죽으러 가는 인생길을 걷고 있는데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죽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진리를 가진 사람이요 진리를 가진 사람은 진정한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을 요한복음 12장 15절에 인용하시면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살인 음모가 꾸며지고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신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말씀에 붙잡힌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려고 한다해도 뒷길 어느 은밀한 장소를 택해서 눈에 띄지 않게 숨어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현상금이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방법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평화의 왕으로서 오시는 분의 당당한 용기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용기를 보이시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그것은 최고의 사랑을 보이시는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랑의 최후의 호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흐루시쵸프와 존 에프 케네디와 골다 메이어가 천국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정상 회담을 했다는 재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 사람에게 질문 한 가지씩을 허용했습니다.
먼저 흐루시쵸프 전 소련 수상이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소련과 미국의 사이가 좋아질 날이 있을까요?" 그러자 하나님은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안 될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질문했습니다. "미국과 세계에서 흑인과 백인이 화목하게 살아갈 날이 올까요?" 그러자 그 질문 역시 "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메이어 전 이스라엘 수상이 질문했습니다. "유태인과 아랍인이 정답게 살아갈 날이 올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대답 내용이 조금 달랐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니까 유태인과 아랍인의 평화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는 농담입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무너졌지만 우리는 아직 분단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만일 미국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인종 문제로 인한 것이며, 만일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진다면 종교 전쟁일 것입니다. 북아일랜드의 오랜 싸움은 개신교와 천주교의 전쟁이고,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전쟁도 종교적 대립이며, 인도와 파키스탄 역시 그렇습니다. 또한 얼마 전의 이란과 이라크는 미국에 대해 '거룩한 전쟁(Holy War)'을 선언했습니다. 중세기 십자군 때부터 종교를 앞세운 전쟁을 거룩한 전쟁으로 말하는 나라들이 많았으나 그것은 국민을 전쟁터로 몰아내는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요즈음처럼 신께서 어지러울 때는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 부시 대통령은 종교 방송인들의 집회에서 "페르시아만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며, 하나님의 뜻에 따른 전쟁이므로 반드시 이긴다." 라고 연설하였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부시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능하신 신이 우리 편이므로 어떤 사탄의 세력에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후세인과 같은 회교도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왕 파드는 "후세인을 대적하는 전쟁이 곧 신의 뜻이다."라고 국민에게 선언하였습니다. 알라신도 어느 편을 들어주어야 할지 입장이 매우 난처할 것입니다.

부시는 중동 전쟁을 선포하던 날, 백악관에 부흥사인 빌리 그래이엄 목사를 초청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자기가 속한 교단인 성공회의 에드워드 브라우닝 신부를 초청해야 자연스럽지만 브라우닝 주교는 페르시아만 전쟁을 반대했기 때문에 침례교 목사 그레이엄을 불러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같은 기독교, 같은 하나님은 어느쪽 기도를 들어야 할 것입니까? 중동 지방은 종교를 내세우며 싸우는 전통이 있습니다. 지난 3천 년 동안 종교의 깃발 아래 군대들이 사람들을 살육한 곳이 중동 지방입니다. 모두가 다 신이 자기 편이라고 주장하고 신의 살인 결재를 받은 것처럼 큰 소리치며 싸우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거룩한 전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율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지체없이 대답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니라."

그래서 초대 교회는 예배와 친교시에 포도주와 빵으로 주의 애찬을 나누게 되었고, 그 사랑의 나눔을 아가페라고 불렀습니다. 떡을 나누는 것은 예수의 몸 곧 인류를 하나로 묶으신 그 사랑을 나누는 것이며, 잔을 나누는 것은 예수의 피 곧 인류를 구원하신 그 사랑을 이어받는 것입니다.

자신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극적인 상황 속에서 극적인 방법, 겸손과 온유, 그리고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므로 인류에 대한 최고, 최후의 사랑을 나타내신 고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 깊이 영접하시는 여러분과 가정, 이 땅 위에 참된 평화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이같은 극적인 행동은 그가 메시야임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행동은 일종의 영광스러운 도전 행위였으며 그 위에 더 없는 용기가 필요한 행위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때에는 예수님의 목에 현상금이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요 11:57)


안효관목사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 마21장 01절 ~ 11절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공생애를 사셨는데, 그 공생애 기간 동안 주로 활동했던 장소는 크게 두 곳이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거의 3년 내내 활동하셨던 갈릴리라는 지역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적으로는 매우 짧은 기간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인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3년 동안 활동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를 고시기도 했고, 귀신을 쫓아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3년 동안의 활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같이 자고 같이 밥 먹고 - 그렇게 함께 생활하던 12명의 제자들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고무적인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가신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다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군중들은 떼를 지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때로는 몇 백 명, 때로는 몇 천 명씩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비난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별로 좋지 않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거기에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3년 동안 갈릴리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날이 갈수록 예수님의 인기는 더 높아져만 갔고,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최고의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는 ‘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더러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누군가가 예수님의 일행을 초청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예루살렘에 가면 환영을 받을 것도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몇 번 예루살렘에 가보았지만, 정말 거기에는 예수님을 따뜻하게 맞아준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하는 적대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적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제자들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왜 예수님께서 굳이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하시는지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습니다.(막10:32)

그런데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말씀하시면 선생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자꾸만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루살렘에 가서 나의 적대자들에게 잡혀서 죽도록 매 맞고 고생고생 하다가 죽어야 한단다. 나는 죽으러 예루살렘에 가려고 하는 거야. 그렇지만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니 너희는 아무 걱정하지 마라.’(20:17-19)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3년 동안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선생님만 바라보고 떠돌이 생활도 마다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선생님이 죽으셔야 한다? 그리고 죽으시기는 죽으신데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신다?’ 그런 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렇게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을 이끄시고는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어가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면서 같이 먹고 같이 자고 함께 동고동락한 제자들의 눈에조차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9:51절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행하여 올라가시는데 굳게 결심하고 올라가셨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평소 예수님의 모습과는 달랐다는 말씀입니다. 굳은 각오로 결심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예수님의 표정에는 비정함이 엿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마만큼 예루살렘에 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은 비장하고 무거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가야만 하는 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기에 우리 주님은 그 길을 가셨습니다.

드디어 베다니란 동네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에서 둘을 먼저 보내시면서 “저 앞에 있는 마을에 가면 어린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나귀를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왜 끌고 가느냐?’고 묻거든 우리 선생님이 꼭 필요해서 쓰시려고 한다.‘고 말해라 그러면 끌고 가게 해 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그 제자들이 끌고 온 나귀 새끼의 잔등에 올라 타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나귀 새끼가 아직 한번도 안장을 져 본적이 없는 어린 나귀였기에 그 잔등에 안장대신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올려 주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나귀 새끼의 잔들에 올라타시고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던 그날은 유월절 축제 분위기로 온 예루살렘 거리가 들떠 있었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유월절 축제를 벌이는 것이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을 보내기 위해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군중들은 이 희한한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나귀나 말을 타고 그 나라의 수도에 들어온다는 것은 세 가지 경우에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전쟁에 나갔던 왕이나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입니다. 개선장군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말을 타고 들어오면 성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나라를 구한 그 장군이나 왕에게 환호성을 보내면서 맞아들였습니다. 두 번째 경우는 왕의 대관식 때입니다. 새로운 왕이 이제 왕좌에 등극하게 될 때 성문 밖에서부터 말이나 나귀를 타고 성에 들어오면 백성들은 새로운 왕을 축복하고 맞아들이면서 환호성을 질러댔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경우는 나라가 전쟁에서 패하여 적대국 왕이나 장군이 그 나를 점령하기 위해서 말을 타고 들어오는 경우입니다. 물론 그 때에는 백성들이 환호성을 질러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개선장군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왕의 대관식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헤롯 왕궁에서는 왕이 버젓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또 점령자로 예루살렘을 파괴하기 위해서 온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예수라는 사람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그것도 어떤 왕이나 장군처럼 커다란 나귀나 말이 아니라, 아주 조그마한 나귀 새끼를 타고 유월절 축제에 때를 맞춰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니,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군중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군중들은 초라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예수님의 일행을 맞이하고 싶어졌습니다. 알 수 없는 힘이 그들을 거리로 내몰았고, 예수님이 오시는 길거리에서, 마치 새로운 왕이 입성하는 것처럼, 개선장군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들어올 때처럼, 자기들의 옷을 길에 펴면서 나뭇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했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하는 표현으로 한다면 ‘만세’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오시는 모습을 보고 ‘예수 만세’를 부르며 열렬히 환영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 때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왕이나 개선장군처럼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는지, 그리고 군중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그렇게 열렬히 환호하며 맞아들였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압니다.
첫 번째로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 가신 것은 만왕의 왕으로 가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서 말이나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많은 왕들과 장군들을 보아왔습니다. 옛날에 다윗 왕도 수많은 외적을 물리치고 승리의 깃발을 앞세우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에 예루살렘에는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짓밟기 위해서 들어오는 이방군주들의 입성 때에는 예루살렘에 처절함과 피비린내 나는 참혹함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예루살렘 거민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입성하느냐에 따라서 그 성에 사는 사람들의 운명이 완전히 달라졌던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난 뒤에 평양에 소련군이 들어오자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평양과 북한의 운명은 그야말로 처절하기 그지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점령하고 파리에 들어올 때 ‘파리의 개선문’을 세웠지만, 나폴레옹 군대가 입성하는 곳마다에는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들어가신 것은 소련군이나 나폴레옹의 입성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지배하고, 짓밟고, 고통을 주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섬기시기 위해서 사랑의 왕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모습은, 이 세상의 군왕들이나 개선장군들처럼 우렁찬 군대의 행진이 아니라,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50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왕 인류의 왕 메시야가 입성하시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해 주고 있었습니다. “시온의 딸들아 기뻐하라. 예루살렘의 딸들아 즐거이 부르라. 보라 너희 왕이 임하시리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도다. 그 왕은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되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시리로다” 우리 주님은 커다란 군마를 타시지 않았습니다. 나귀를 타시되 작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겸손하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요란한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흔드는 종려가지의 환호성 속에 입성하셨습니다. 요란한 군악대의 나팔소리보다는 어린아이들의 찬양소리와 환호를 받으시며 입성하셨습니다. 그 만왕의 왕은 찬란한 왕관 대신에 가시 면류관을 쓰신 왕이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평화를 거부하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면서 “영원한 평화에 이르는 길이 네 앞에 있는데 너는 그 길에서 돌아서 버렸구나”(눅19:42) 하고 탄식하셨습니다. 참된 평화의 왕이 들어가셨는데도 왕으로 영접하지 못한 예루살렘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꿈에라도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북한의 김정일 군대가 들어오면 이 땅은 생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임하시면 거기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 입성하는 곳에, 그리고 그분을 왕으로 모셔 들이는 곳에 진정한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생에 평화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우리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정에 평화와 행복이 깃들기 위해서는 우리 가정에도 나귀 타고 겸손하게 임하시는 주님을 영접해 들여야 합니다. 주님의 영접해 들이심으로 여러분의 생애와 가정에 평화가 넘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우리 주님은 심판하실 심판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모습을 보고 ‘이제 뭔가 사건이 벌어지겠구나. 때가 왔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이 땅에 혁명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정치혁명이 일어나고 새 세상이 올 것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자’ 그러실 때 나름대로 가슴이 부풀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면 혁명을 통해서 정권이 교체될 것이고, 그러면 자기들도 다 한 자리씩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제일 먼저 찾아가신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장 먼저 로마 총독부를 찾아가실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총독을 몰아내고 해방을 선포하면서 이스라엘 땅에 정치적인 자유를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로마 총독부나 헤롯 왕궁이 아니라 성전을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보시니까, 성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엉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장년이면 누구나 성전 운영비를 위해서 매년 반 세겔씩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이 성전세는 대개 유월절 한 달 전에 전국적으로 설치된 세무서에서 거둬들였는데, 그 때 내지 못한 사람들은 유월절 때 성전에서 직접 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세는 특별히 제작된 은돈으로 바꿔서 납부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가보니까 은돈으로 바꾸어 내야 한다는 것을 이용해서 소위 ‘돈 바꾸는 자들’이 엄청난 환전료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찾아온 사람들은 대개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희생 제사에 쓰일 짐승은 아무 것이나 그냥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 측에서 합격도장을 받은 것만을 흠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 검인 도장이 찍힌 짐승은 일반 짐승보다 무려 10배 이상 비싼 가격에 성전에서 매매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당 이익은 대제사장을 비롯해서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사람과 매매하는 사람들이 나눠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순수한 마음으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려는 사람들만 고통을 당하고 있었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제사를 이용해서 엄청난 부정과 사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는 모습을 보시고는 분노하셔서 채찍을 드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다 내어 쫓으신 후 감람산에 올라가셔서 주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성전 안에까지 파고 들어온 죄악으로 인해서 얼마 있지 않으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채찍을 피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셨을 때, 온 예루살렘은 거대한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모여들었습니다. 성전 마당에까지 입추의 여지없이 붐볐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겠다고 전국 각지에서 수없이 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어 축제를 이루고 있었으니, 그 광경이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도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런 것에 결코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 가셨던 예수님이 오늘 이 시대에 이 땅에 오신다면 예수님은 제일 먼저 어디를 가실 것 같습니까?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을 방문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으면 병 고치고 사업이 잘 되고 만사형통하게 된다고 가르치면서 거짓 복음으로 수 천 수 만 명을 모으는 큰 교회에 찾아가시겠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그런 교회에 가신다면 과연 기뻐하실까’ 우리가 이 시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크든 작든 간에 겸손하게 호산나를 외치며 주님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그 곳에 가실 것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소서’ 그렇게 겸손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오셔서 평강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겸손히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기보다는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부정과 불의를 일삼는 곳에는 심판주로 임하셔서 가차 없이 채찍질로 불의를 일삼는 자들을 쫓아내시는 심판주가 되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신 주님이 우리에게 심판주가 아니라 사랑과 긍휼을 안고 다가오시는 평강의 주님으로 영접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 주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년 중 가장 크게 지키는 유월절 절기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해방을 얻던 감격적인 날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해방절-광복절과 같은 날입니다. 그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 임한 재앙을 피하여 해방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에 발라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기쁜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유월절이 되면 어린양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 유월절에 ‘유월절 희생제물’로 죽은 양이 무려 15만 마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수없이 많이 죽어간 그 어린양과 같이 피 흘려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가신 것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가신 것입니다.

일찍이 이사야는 예수님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다”(사53:7)고 예언해 주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보시고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고 외쳤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5장 7절에서 우리 주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희생되셨다”고 선포했고,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 주님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히9:12)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 타고 들어가신 것은, 정권을 잡으려고 하는 혁명군의 입성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의 입성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신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무거운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는데 - 골고다 십자가의 길을 바라보시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데, 우리는 제자들처럼 예수님 빽으로 한 자리 차지하고 싶어 안달하고 있는 모습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이것은 세상 권력을 놓고 자리 다툼을 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신 질문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보실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내가 내 십자가를 진 것처럼, 너는 네 십자가를 지고 가느냐?” 오늘 이렇게 우리 주님이 물어 오시는데, 우리는 무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2,000년 전에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신 그 초라한 행진이 비록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하는 골고다의 길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 역사를 바꾸어 놓으시고, 죽어 가는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다시 우리 주님을 평강의 왕으로, 죄악을 제거하고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심판주로, 그리고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우리 마음과 우리 가정에, 그리고 우리의 삶에 영접하셔서 우리의 남은 생애를 그 주님과 함께 가장 행복하고 축복을 누리는 삶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류영모목사 주님이 쓰시겠다 하라 마 21장 01절 ~ 11절

I. 쓰임받는 인생
요즈음 자주 하지 못합니다만 우리교회에서 부부관계를 훈련하는 「부부동산」이란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어느밤 사람들에게 종이 한 장씩을 나눠주고 「당신은 참으로 필요한 존재인가? 당신은 아직도 쓸모가 있는가? 당신이 이 땅에 좀 더 살아야 될 이유가 무엇인가?」를 써 보게 합니다. 참가자들에게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부부도 함께 써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부가 마주 앉아 서로 쓴 글을 읽게 하는데 우리는 모두 통곡을 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목장 안에서, 나는 아직도 필요한 존재구나, 쓸모가 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고 감사해서 우는 겁니다.

인생에서 최대의 저주가 있다면 "더 이상 필요 없다. 너는 쓸모 없는 존재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반면 최대 축복의 언어가 있다면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쓸모있고 가치있는 사람입니다." 하는 고백일 것입니다.
나는 어디에 필요한 존재인가? 나는 어디에 쓰임받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소명 혹은 사명이라고 합니다.

어느날 제자들이 스펄죤 목사님에게 "어떤 것이 소명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스펄죤 목사님은 세 마디로 짤막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 제일 귀하게 보이는 것이 소명이다. 의사가 제일 귀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의사의 소명이 있는 것이고, 후세를 가르치는 일이 제일 귀하다 느끼는 사람은 교사의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둘째는 제일 쉬운 일을 하는 것이 소명이다. 하나님께서 그 방향으로 일을 시키려고 하셨다면 반드시 그것을 담당할 만한 달란트를 미리 주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하면 마냥 어려운데 내가 그 일을 하면 아주 쉽다고 느끼는게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가장 즐거운 일을 하는 것이 소명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한없이 즐거워야 합니다. 피곤함이 없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사람들이 각자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감사함으로 열심히 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입니다. 그런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불안하고 사회가 어려워지면 각종 범죄가 횡횡하고 사행심이 늘어나고 사람들은 영웅적인 지도자를 기다리게 됩니다.

로또 복권인가 하는 복권 한 장을 하기 위해 복권 판매대 앞에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세상 살기가 얼마나 불안하고 힘들면 세상이 이 모양이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심지 않고 일확천금을 얻으려는 사행심은 건강한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여러분 그런 풍조에 휩쓸리지 마십시요. 당첨되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지 그 어느때 보다도 대통령 당선자에게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되나 봅니다. 저도 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우리에게 남겨준 냉정한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 이 땅에 왔다간 그 어떤 지도자도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준 영웅은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지도자는 나오지 아니할 것입니다.

인류 역사속에서 지도자에 대한 기대의 역사는 곧 실망의 역사였습니다. 지나친 기대는 금물입니다. 지도자들 또한 내가 일할 수 있는 짤막한 기간내에 파라다이스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인 양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인기가 좀 올라간다고 너무 좋아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그들은 곧 냉냉해 질 것입니다.

한 사람 지도자에게 걸었던 지나친 기대나 꿈은 언제나 실망으로 돌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을 찾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각자 자기 할 일을 아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이천년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소중히 쓰임 받았던 인물들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쓰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에게 쓰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II. 하나님 계획의 성취가 바로 나다
쓰임 받는다는 건 참 좋은 일입니다. 그것이 귀한 사람에 의해 쓰임 받을 땐 더욱 행복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일입니다. 몹시도 추은 겨울, 눈보라 치던 날이었습니다. 쉬는 시간 아이들은 눈을 맞으며 신나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영모야” 나를 불러 교장 선생님 사택에 가서 뭘 좀 가져오도록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야, 그때 얼마나 신이 났던지요. 교장선생님이 내 이름을 알고 계신다. 내 이름을 불렀다. 그 많은 아이들 가운데 나한테 심부름을 시켰다. 선생님 사택으로 달려가며 얼마나 흥분이 되었던지.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흥분이 되살아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길에 쓰임 받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여기서 가장 소중하게 쓰임 받은 존재는 사람이 아닌 한 마리 어린 나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감람산 기슭에 있는 벳바게 마을까지 왔을 때에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냈습니다. 이 건넌 마을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본문에 의하면 베다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감람산 기슭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웃동리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베다니 마을에 들어가면 큰 나귀와 작은 나귀 한 마리가 묶여 있을텐데 풀어 끌고 오너라고 했습니다.
또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본문에서는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작은 나귀 -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을 보내며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나귀를 풀어 끌고 가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이 본문을 대할 때 우리는 몇 가지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첫째, 예수께서 거기 나귀가 매인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둘째, 당시 나귀 한 마리는 우리네 농촌 황소 한 마리처럼 농사 살림 밑천이었을텐데 어떻게 그토록 쉽게 선뜻 내어 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점들과 함께 우리의 눈을 주목시키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는 다른 복음서들에 없는 한 구절 주석을 더하고 있습니다. 여기 한 마리 나귀 새끼가 쓰임받게 된 이 사실이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복음에 공히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오늘 본문은 제자들에게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 스가랴가 490년전 이미 예언했다는 이 내용은 마가나 누가에는 없는 공관복음서 중 마태복음에만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왕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왕의 왕국 입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왕이라는 거지요. 지금 나귀 한 마리가 만왕의 왕되신 예수를 모시는데 쓰임 받았다는 것이 마태의 통찰입니다. 그것도 그 나귀 새끼가 이날 이렇게 영광스럽게 쓰임받을 것이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에 의해 계획이 되고 예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귀 새끼 한 마리를 향하여 이토록 섬세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향한 어떤 계획을 어떻게 세워 놓으셨을까요? 여러분 가슴이 설레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생을 지으셨습니다. 당신을 이 땅에 보내시기로 만세전에 작정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에 빠진 우리를 살리시려 독생자 하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을 버리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하고 맞바꾼 예수짜리 인생들입니다.

이러한 저와 여러분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지 아니할까요?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도록 내버려 두실까요? 시시하게 아무런 의미없이 살도록 우리를 만드셨을까요? No. 아닙니다. 나귀가 수레를 끄는데 쓰임 받을 수 있고, 짐을 지고 나르는데도 쓰임 받을 수 있지요. 그러나 본문은 예수를 위해 쓰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런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위해, 예수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영광스럽고 황홀한 사역자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딤후 2장 20절 이하에 보면 심지어 이 땅에 몇 번 쓰임 받다 깨어지는 그릇 하나까지도 쓰임이 있고 쓰임의 목적이 있다고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큰 집에는 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나무와 질그릇도 있습니다. 여기 큰집은 하나님의 집이요 그릇은 우리 인생을 비유합니다. 귀한 그릇은 무엇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쓰임 받기에 합당하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를 가졌느냐? 어떤 위치에 있느냐? 얼마나 아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과연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그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쓰실 때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쓰실 때만 행복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쓰실 때만 형통 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순간 순간, 자리 자리 마다 우리는 감격하며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예언의 응답이 나다! 하나님 계획의 성취가 바로 나다!


III. 진정한 Lordship
자, 이제 본문을 통하여 제기되었던 의구심들을 해결해 보십시다.
주님은 마을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거기 나귀가 매여 있다는 것을 아셨을까요? 또 왜 남의 나귀를 풀어 끌고 가느냐? 주인이 화를 낼 때 "주님이 쓰신다"고만 하면 나귀를 내어줄 것이란 걸 어떻게 아셨을까요? 그뿐이 아닙니다. 어떻게 "주가 쓰신다" 말 한마디로 괭이 하나 삽 한 자루가 아니라 나귀를 순순히 내어 줄 수 있었을까요?

대부분 주경가들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니 그런 것 쯤 쉽게 아셨을 것이라고. 또 헌신되고 준비된 무명의 제자가 있었음을 알고 계셨다고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런 것까지 당신의 신성을 사용하셨을까요? 분명 그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신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그렇게 밖에 안보입니다. 그러나 셀교회의 관점, 관계성 즉 공동체 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문을 보면 전체 그림이 아주 쉽게 보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여러 차례 방문하셨지만 한번도 예루살렘에서 주무신 적이 없습니다. 그때마다 베다니에 오셔서 주무셨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말씀도 나누었습니다. 베다니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는 마을입니다. 늘 예수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던 마르다가 있고 발 밑에 앉아 말씀을 즐겨 듣던 마리아가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며 그를 살려주시기도 했습니다. 베다니는 슬픔의 집, 가난한 사람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픔과 슬픔, 질병과 고통을 삼키며 살아가던 베다니 사람들의 친구였고 희망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마을 나병 환자를 고치셨습니다. 죄 많은 여인의 아픔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어 소망과 생명의 주님이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나중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을 때 베다니 마을 앞까지 나가셔서 저희들을 축복하신 후 하늘로 올리우셨다고 누가복음 24장 50절-53절은 기록합니다. 그때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 기도하고 찬송하다가 성령의 충만을 체험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때문에 그 마을 사람들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를 향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우리를 구원하신 왕으로 입성하시는데, 그까짓 나귀 한 마리 바치지 못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 베다니 사람이 있었고 베다니 사람 안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이런 관계성 속에서 "주여, 여기 있습니다. 마음대로 쓰십시요" 진정한 Lordship 그리스도의 주권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무명의 헌신자 나귀 주인이 나귀를 내어 준 것은 단순히 나귀라는 짐승을 내어 준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준 것입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Lordship - 그리스도의 주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권의식이란 단순한 헌신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안에 예수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 내 삶의 목적이 그분에게 온전히 연결되어지는 영광의 단계를 말합니다. 내 것과 예수님 것의 구별이 없습니다. 바로 그때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게 되는 신비의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갈4:15)

또한 예수님은 그 마을 사람들의 한 가족이 되었기에 어디에 누구의 나귀가 매여 있고 어디에 어떤 나귀가 있는지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쓰시겠다" 말하면 억지로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흔쾌히 내어놓을 것도 아셨던 것이지요.

이것이 천국가족입니다. 예수님과 베다니 사람들은 이미 천국가족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입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눈으로 사랑을 그리지 말아요 입술로 사랑을 말하지 말아요
참 사랑은(Lordship) 내게 가장 귀한 것 그것을 주는 거예요.
내게 가장 귀한 것 그것을 주는 거예요.


IV. 가슴마다 예수의 피가 묻어야
진정한 Lordship -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식은 - 예수께서 나를 사셨다. 나는 예수님의 것이다. 즉 구원 감사, 구원 감격으로부터 나옵니다.

모두 예수님의 것입니다. 생명도 시간도 주님의 것입니다. 오늘 부르면 오늘 가는 겁니다. 은사도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를 위해 살도록 주신 것입니다. 물질도 기업도 주님의 것입니다. 내 것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주가 쓰시겠다」말씀하실 때 베다니 사람들은 주님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드려야지요. 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문 3절 보십시요.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즉시 보내리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 할때 즉시 순종했습니다. 제자들은 즉시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주를 따랐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직접 "주" - 큐리오스라고 표현한 곳은 이곳 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이 본문은 커다란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다." 주님이 주장하십니다. 때문에 참된 헌신과 봉사와 섬김은 예수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헌신, 사랑이 없는 봉사, 감사가 없는 섬김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베다니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 가실땐 언제나 자신들을 방문하고 만나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따라 마을을 찾아오시지 않고 나귀만 요구하십니다. 그들은 이 길이 - 이번 여행이 어떤 길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마지막 여행이요 십자가를 지시러 가는 길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나귀를 드리는 것은 예수의 죽음을 준비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헌신의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할 때마다, 우리가 주를 위해 뭔가를 드릴 때마다 우리의 가슴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묻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넘쳐흘러야 합니다.

예배시간 찬양시간마다 찬양대가 찬양을 드릴 때 그 가슴속엔 예수의 보혈이 흘러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시간마다 선생님의 가슴엔 예수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 목장 식구들을 가슴에 안고 기도할 때마다 내게 상처를 준 원수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내 가슴엔 예수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Lordship이 나옵니다.
「주님이 쓰시겠다」 예. 언제든지 저를 쓰십시요. 저는 주께서 피로 사신 주님의 것입니다.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라게를뢰프」가 쓴, 「진홍 가슴새」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옛날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과 동·식물을 지으실 때였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 깊은 생각에 잠기신 후 잿빛 털을 가진 조그만 새 한 마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이름을 진홍 가슴새라고 붙여 주셨습니다. 이 새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저는 온통 잿빛 털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진홍 가슴새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참 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될 때, 그 이름에 합당한 깃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진홍 가슴새의 둥지 근처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사람이 매달렸는데 멀리서 보던 진홍 가슴새가 그 사람이 얼마나 불쌍하게 보이는지 사람이 무섭다는 생각은 뒤로하고 그 십자가에 달린 사람에게로 날아갔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그 사람의 이마에 가시관이 씌워져 있는데, 그 가시마다에서 검붉은 피가 솟아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새는 그 가엾은 사람의 이마로 날아가서 조그만 부리로 그 사람의 이마에서 가시를 하나 하나 뽑아 내기 시작했습니다. 가시가 뽑힐 때마다 피가 솟아 나와서 이 작은 새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새는 지칠 때까지 그 가시들을 뽑다가 안타깝게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몸에 묻은 피가 도무지 깨끗이 지워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목덜미와 가슴에는 핏자국이 남게 되었고,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새가 낳는 새끼들마다 모두 목덜미와 가슴에 선명한 진홍빛을 가진 털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진홍 가슴새 이야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갈보리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온통 덧입혀져서 죄사함을 받았으며, 그의 일꾼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슴에는 예수님의 보혈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V. 풀어 끌고 오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슴마다 예수 사랑으로 끓고 있는 사람들, 예수님과 맺은 그 사랑, 그 관계가 벅차 주를 위해 자신을 드리기를 원하는 그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 주님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풀어 끌고 오너라 !」 매인 나귀를 풀어 끌고 와야 주님이 쓰실 수 있습니다.
본문 매여 있다는 말은 완료 분사로 마치 나귀가 자기를 풀어 가도록 기다리며 매여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시간 사업과 물질에 묶여 있는 분이 계십니까? 묶인 것들이 풀어지기를 빕니다. 주를 위해 바로 쓰임 받길 축복합니다. 질병에 묶여 있는 가정이 있습니까? 묶인 질병은 풀어질 찌어다. 주신 건강 주를 위해 올바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자녀들도 헛된 곳에 묶어 두지 말고 풀어 주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주께서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주께서 쓰셔야 할 것들이 엉뚱한 곳에 쓰일 땐 풀렸던 것들도 묶여질 수 있습니다. 기회도, 명예도, 건강도, 물질도 주께서 묶으시면 능히 풀 자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 주님이 쓰지 않으면 내가 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지 않으면 결국 마귀가 나를 쓰게 됩니다. 내 시간 하나님이 쓰지 않으면 마귀가 빼앗아 갑니다. 내 재능 하나님이 쓰지 않으면 사탄이 침략합니다. 내 물질 주를 위해 쓰지 않으면 세상이 빼앗아가 갑니다. 내 육체 하나님 영광 위해 쓰지 않으면 사탄의 노예 됩니다.
「주님이 쓰시겠다」 나귀 새끼 한 마리도 주님 위해 영광스럽게 쓰임 받았습니다. 큰 것 드리려 하지말고 작은 것이라도 주님 위해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일하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간밤에 목장을 방문하고 돌아온 어떤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성도들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한 성도가 "내가 여러 교회에서 이사 다니며 신앙생활했고, 긴 인생 살지 않았지만 이런 일도 해 봤고 저런 일도 해 봤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온갖 몸부림을 다 해보았는데, 돌이켜 보면 미쳐서 교회 생활 할 때에, 지치도록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일 할 때, 신앙생활 가장 열심히 할 때, 그때가 가장 행복했노라.”하는 고백입니다.
이 집사님만의 고백이고 이 한 분만의 간증이겠습니까? 나의 고백이요 너의 고백이요 우리 모두의 고백 아닙니까?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 축복하십니다. 크게 받아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일하면 크게 부어 주십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자, 묶여 있는 자를 하나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린 실화 한 토막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북미 지역의 한 산골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외딴 어느 산골에 요한이라는 남자와 그의 아내 베티와 그들의 어린 두 자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멀리 떨어진 마을에 나가 장을 보아야 하는데, 먼 길이라 일주일에 한 두 밤 정도는 꼭 마을에 나가서 자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무서운 일이 생겼습니다. 남편이 시장을 보러 간 뒤, 아내는 빵을 굽기 위해 우선 장작부터 쪼개어야 했습니다. 그녀가 뒤뜰로 나가 도끼와 큰 통나무를 하나 집어드는 순간, 통나무더미 속에서 큰 독사뱀 한 마리가 갑자기 덥쳐 그녀의 넓적다리를 물어버렸습니다. 그녀는 이제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녀는 죽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여 절망하거나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뱀의 독이 온 몸에 퍼질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했습니다. 우선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은 살아 있어야 하므로 그들이 먹을 빵을 구워야겠다는 생각이 미치자, 정신없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빵을 굽기 시작했습니다. 때는 뜨거운 여름이라 햇살은 따가웠습니다. 몸에 점점 힘이 빠지고 눈앞에 흘려졌습니다. 그녀는 큰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말하기를 "이제 곧 엄마는 아주 깊은 잠을 자게 되니 동생을 잘 돌보아 주어야 한다. 빵과 우유도 잘 먹이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최선을 다하려고 마친 듯이 여러 곳을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그녀의 온 몸은 땀에 젖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그녀의 혈관에서 독이 씻겨져 나와 생명을 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축제가 있는 교회" 중에서)

바로 여기에 사역의 신비가 있습니다. 일하면 삽니다. 주님이 쓰시겠다. 아멘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쓰소서.

주님은 여러분을 쓰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셀을 쓰기 원하십니다. 한국교회를 살리고 통일한국을 살려내고 민족을 살리고 역사를 살리고 세계 열방을 살려내기 위하여 이 교회를 쓰기 원하십니다. 주여 우리를 쓰시옵소서!


김상복목사 구원의 왕이 오신다 마21장 01절 ~ 11절

부활절이 다가오자 뉴욕의 어느 유명한 미술가가 초콜릿으로 예수님의 형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밀크 초콜릿 200파운드로 십자가에 달린 키 180cm의 예수님 모습을 생체학적으로 자세히 만들어 4월 1일 밤12시에 공개한다고 합니다. ‘나의 달콤한 주님’(My sweet Lord)이라는 제목의 이 초콜릿 형상에 대해 ‘어떻게 예수님의 모습을 초콜릿으로 만들 수 있나?’라며 언론에서 떠들고 있습니다. 세계적 주목을 받기에 좋은 예술적 발상인 것 같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누구이시기에 이렇게 관심거리가 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군가?” 물었습니다. 그날은 유월절의 첫날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국가적 명절이기 때문에 누구나 예루살렘에 와야 됩니다.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큰 명절 때마다 공생애 3년 동안 1년에 한 번씩은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이번은 세 번째 방문으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날 밤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는 늘 나사로의 집에서 머무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셨지요. 나사로에게는 마리아와 마르다 두 누이가 있었는데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몸에 발라준 것을 보면 제법 부유한 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사로는 문둥병자 시몬과 함께 잔치를 열었습니다. 당시 문둥병자는 성 안에 살지 못하고 문둥병자만 사는 동네에서 살다가 죽게 되어있었는데 이 문등병자 시몬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그는 예전에 예수님을 만나 문둥병을 치유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문둥병자 열 명이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가 인간 취급을 못 받고 이렇게 살다가 죽게 되었는데, 부디 우리를 살려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보여 주라”고 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고 뒤돌아서자 손과 발이 다 나았습니다. 너무 좋은 나머지 모두들 뛰어서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한 명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절하며 “주님, 저를 고쳐 새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하고 인사했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시몬이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와 문둥병에서 나은 시몬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만찬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주무시고 아침에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셨습니다.


유월절 명절을 시작하는 날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전국에서 오는 사람들로 꽉 찼습니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2km, 걸어서 30분 정도의 거리입니다. 언덕진 그 곳을 감람산(올리브동산)이라고 부르는데, 감람산을 거의 올라가면 건너편 오른쪽에 벳바게라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습니다. 그 마을 앞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저 동네에 가면 입구에 당나귀 두 마리가 매여 있는데 하나는 어미고, 하나는 새끼다. 새끼 당나귀는 아무도 탄 일이 없으니 그것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누가 왜 남의 당나귀를 함부로 풀어 가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쓰시려 한다고 대답하면 아무 말 없이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가보니 정말 당나귀와 새끼가 있었습니다. 참 희한합니다. 모든 것이 그 분의 말 대로였습니다. 도대체 이런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이 중요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의 결과가 드러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예지력(豫知力)이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으나 예수님은 내일 일을 아십니다. 어느 동네에 나귀 두 마리가 있는데 하나는 어미고 하나는 새끼라는 것을 아무나 알 수 없습니다. 데려오려고 하면 누군가 나타나서 “왜 가져가느냐?”고 물을 것이라 하셨고 정말 그랬습니다. 세 가지 예언이 동시에 맞을 확률은 적습니다. “주님이 쓰시려고 한다”고 하자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예견한 다섯 가지 일들이 모두 맞아떨어지기란 확률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미래를 아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예지력을 나타내신 일은 전에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세금을 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좋은 시민들인데 성전에 세금을 낸다”고 말씀하시고 베드로에게 “낚시를 던져서 첫 번째 잡은 고기의 입을 벌려보면 그 안에 동전 하나가 있을 것이다. 가져다가 너와 나를 위해서 세금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았더니 정말 동전이 들어있는 겁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이분은 사람인데 사람이 아니구나. 사람인데 하나님이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일은 자기가 누군지 제자들이 알도록 훈련시키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십자가 사건 몇 달 전부터, “내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가면 제자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 그들은 나를 잡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위대한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습니다. 그런데 정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팔았고, 예수님은 제사장들에게 잡혀갔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고, 사흘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십자가에 죽을 것과 부활할 것을 여섯 차례나 예언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미래를 알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요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실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락방에 가서 기도하며 기다리라. 그러면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실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물로 세례를 받았지만 이제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텐데,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힘을 얻어서 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증인들이 될 것이다.” 정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10일 동안 기도하며 기다리자 그대로 되었습니다. 다락방이 흔들리며 성령이 임하셨고 모두가 전 세계에 위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오후에 감람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감람산에 오르면 예루살렘이 한 눈에 보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내가 너희를 품으려고 했는데 너희가 나를 거부하고 사흘 후에는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여자들이여, 네 자녀들을 위해 울라. 이 아름다운 도시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이 때가 대략 AD 30년인데 예루살렘은 과연 AD 70년에 그대로 망합니다. 예수님은 40년 후를 예언하신 것입니다. AD 70년에 로마군을 이끌고 온 타이터스(Titus) 장군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이고 예루살렘에 불을 질러 예수님 말씀 그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 때부터 유대인들은 나라 없는 민족이 되어 2천년 동안 전 세계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녔습니다. 남미로, 아프리카로, 유럽으로, 아시아로... 한국을 빼고 안 간 곳이 없습니다. 아프리카로 간 사람들은 2천년 동안 아프리카에 살다 보니 모두 까만 흑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각국에서 돌아온 이들이 1948년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웠고 지금은 5백만 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대로 이루어져 오늘까지 생존하고 있습니다. 이제 종말이, 세상 끝이 다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앞일을 보고 아십니다. 사람은 알 수 없으나 하나님만 알 수 있습니다.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믿음은 아무에게나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은 혈과 육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에게 나타내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수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고백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다!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몰라서 불안하고 두렵고 긴장되고 초조합니다. 저도 얼마 전 휴가 중에 혼자 있으니 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내가 80살이 되면 어떻게 될까? 그 때까지 건강할까? 여기저기 고장 나면 어떻게 하지?’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감사한 것은, 여러분과 제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은 우리의 미래를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우리의 내일을 다 아시는 그분이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을 믿고 날마다 그 분을 따라갑시다.


둘째로, 예수님은 나귀를 탄 겸손한 왕으로 오셨습니다. 새끼 나귀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여행하신 분들은 지금도 덜커덩거리며 나귀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보셨을 것입니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타고 다니지요. 무섭지 않아요. 그럼 누가 무섭나요? 큰 말을 타고 칼이나 권총을 찬 사람입니다. 데모할 때 기마병들이 와서 데모대를 막 밀어 붙이면 겁이 나서 도망갑니다. 예수님은 말을 타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칼을 들고 오시지도 않았습니다.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오셔서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마호메트는 어떻게 왔습니까? 말을 타고 한 손에 칼을, 다른 손에는 코란을 들고 와서 “코란 받을래? 칼 받을래?”합니다. 코란을 받겠다고 하면 놔 주고 안 받겠다고 하면 칼로 목을 쳤습니다. 똑같은 종교지도자지만 이렇게 달랐습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하는 찬송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위협적이지 않고 편안합니다.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누구든지 다가갈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도 “호산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하고 소리쳤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친구요, 사업가들의 친구요, 평범한 사람들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만왕의 왕, 만주의 주십니다. 우주를 창조하셨고 다스리시는 그분이 말을 타고 군대를 이끌고 오지 않으시고 나귀를 타고 무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가까워지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언제나 환영하시고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인도해 주실 친구이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예수님을 환영하는 자들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하면 바로 구원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호산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여, 저 높은 곳에 호산나!”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산나, 무슨 뜻입니까? 호산나란 “지금 당장 나를 구원하여주옵소서”라는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호산나!”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오케이!" 하십니다. 당장 구원해달라는데 “아니야, 오늘은 아니야. 나 요즘 바빠”하실 분이 아닙니다. “지금 구원하여 주옵소서. 지금 당장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옵소서. 아멘!”하면 바로 “됐다! 너는 구원 받았다”하시고 구원해주십니다. 우리 “호산나” 찬양을 같이 불러볼까요?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높은 곳에서~ 주의 이름 높여~ 다 찬양하라~ 귀하신 주 나의 하나님~ 호산나 높이 외치세.”

호산나 찬송을 부른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 받았습니다. 지금이 구원 받을 때요, 은혜 받을 때입니다. 인간에게는 구원받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려우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가난한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야 했고 십자가에 매달아야 했고, 피 흘리며 몸을 찢어야 했으니까요. 그분이 우리를 위해 몸을 찢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구원이 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지금 구원하여 주옵소서. 호산나!” 이 한 마디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믿으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진심으로 호산나라 말해본 적이 없는 분이 있다면, 오늘 아침 함께 부른 호산나 찬송이 여러분의 진심이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진심이었다면 여러분은 오늘 즉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영접하는 자에게, 호산나 부르는 자에게 구원의 주가 되셨습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 분이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10-11절). 영혼의 눈이 뜨이지 않은 보통사람에게는 예수님은 그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선지자요, 좋은 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선지자 그 이상이셨습니다. 선지자는 구원의 길을 보여줄 수는 있어도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갈릴리 시골동네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로 끝나면 구원이 없습니다. 종교적 윤리나 종교학은 있을지 몰라도 구원은 없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주일 아침에 특별한 모임이 있다고 전교생을 나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서 “선생님, 저는 내일 못 옵니다”하고 말씀드렸어요. “왜 못 오느냐?” “저는 주일 그 시간에는 교회에 가야 됩니다.” “한 번 오라는 것인데 못 온다는 말이냐?” “한 번도 오지 말라고 해야 되는데 한 번 오라고 하시니까 안 된다는 겁니다.” 선생님은 저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셨어요. “상복아, 예수는 기독교의 창시자야. 나사렛에서 태어나서 목수생활을 하다가 기독교를 만드신 훌륭한 선생님일 뿐이야. 너는 어떻게 그렇게 이상하게 믿느냐? 너처럼 믿으면 안 돼.” 그 분은 똑똑한 분이셨습니다. 똑똑한 사람의 눈에 예수님이 그저 선지자일 뿐,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가 아닙니다. 오늘도 우주와 세계역사와 내 인생을 주관하는 분, 내가 따르고 의지할 그런 분이 아닙니다. 중학생인 나도 아는데 똑똑한 시인인 선생님이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 선생님이 불쌍하였습니다. 선지자, 훌륭한 사람, 위대한 종교사상가, 기독교 창설자, 그것이 끝이라면 거기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여러분의 미래를 아시고 영원히 이끌어 주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호산나”부르짖는 사람들에게 즉시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고난을 받으신 이 한 주간 동안, 새벽마다 모여 주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부활과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묵상하고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참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사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 분을 만나고 호산나를 부르며 구원의 은총이 있기를 원합니다.



최종천목사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마21장 01절 ~ 11절

이제 다음주일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부활절이란 예수그리스도의 성탄절만큼 큰 의미를 빚은 감회의 절기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탄생이 인류를 죄악과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아름다운 탄생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아마 이때쯤 되면 우리 마음의 성도라면 누구나 특별한 심정이 되어서 우리의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그 부활을 앞둔 준비의 주간으로 고난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성도들은 나름대로 주님의 고난에 각양의 모습으로 동참하게 됩니다.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지기도 하고, 금식을 하기도 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셨던 아름다운 이웃사랑에 대한 동참을 이루게도 됩니다. 특별히 금식을 하며 나름대로 가슴속에 느껴지는 주님의 고난에 대해 묻고 하며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는 것이 믿음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때마다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본들 주께서 그 가슴속에 느끼고 흐르셨던 그 고독과 좌절의 절규를 이해하기에는 인간으로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위에서 절규는 인간적 고통에 대한 절규 뿐 아니라 메시아로서의 죄악에 대한 좌절, 또는 그 죄악에 대한 절규이며 그것은 또다시 생명으로 태어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강력한 소망의 외침임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즉 죄에 대하여 죽으시고 의에 대하여 다시 살아나시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주간을 보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으셨으니 얼마나 아픈가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죄악에 대한 좌절에 대해서 이해함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러한 고난이 시작되는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그의 마지막 공생애 사역을 보내는 한 주간으로서 그 사역의 최고의 절정의 한 주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 주간의 시작으로 오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호합니다. 그들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다 깔고 나무 가지를 꺾어서 길에도 깔고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곧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려는 그들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로마로부터의 경제적 정치적 풍요와 자유를 원하였으나 그것을 주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군병들에게 잡히시게 되고 고난을 받는 것을 볼 때 그들의 꿈이 깨어지자 그들은 폭도로 변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거친 말과 혹독한 얘기를 품어냈던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폭도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원함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이전에 품었던 마음이 변하여 오히려 가해하는 인간의 죄악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내용 중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장면을 잘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예수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장면을 생각해 보며 몇 가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또 말씀 후에 고난주간을 앞두고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성찬식을 거행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서 그가 비로소 왕이요, 메시아이심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십니다. 이영광의 환호위에 주님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역사를 이루시게 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메시아로서의 공적인 선언과 그 이후에 고난을 통한 영광스런 맺음을 위한 은혜의 여정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땅위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과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정돈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우리는 먼저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의 성취자이시며 겸손과 온유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예수그리스도의 모든 행적 중 우리는 우연히 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까지도 모든 것은 정확한 성경의 예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 유숙하시다가 감람산 벳바게 지역에 이르렀을 때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두 제자를 보내어서 타고 갈 새끼 나귀를 끌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여기서 굳이 나귀를 타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 전 생애를 통해서 다니시면서 무엇인가 탈것을 타고 다니신 적이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도보로 다니셨습니다. 굳이 탈 바에는 새끼 나귀를 초라하게 타야 될 이유도 물론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입성이라는 것은 이제까지 그분의 사역을 생각해볼 때 특별한 점이 있는 것을 봅니다. 더욱이 간청하던 제자들에게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시던 주님께서 스스로 예루살렘에 가시기를 자청하셨고 이제 예루살렘 입성을 이루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새끼나귀를 끌어오라고 하신 것을 보면 특별한 행차임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것은 <스가랴 9장 9절>에 말씀하신 예수그리스도는 새끼 나귀를 타고 그 나라에 입성하신다는 말씀을 성취하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삶 자체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초라한 행색에 나귀를 탔을지언정 수많은 사람의 환호를 받고 그 말씀을 이루어 말씀의 성취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들에게 인식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를 따르는 백성이요, 제자요, 그의 자녀라면 우리도 당연히 말씀을 따르고 그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 우리 삶의 기쁨이요, 감동이요, 은혜요, 영광인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겸손과 온유의 왕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의 모습, 예수님은 수많은 권능과 권세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귀새끼를 타고 이와 같이 초라한 행색으로 입성하셨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셨죠.
예수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겸손의 이유는 또 있습니다. 세상적인 목적과 꿈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의도적인 행위의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다보니까 자연히 그 모습은 겸손한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낮아짐으로 높아지는 것, 섬김으로 높아지는 것, 죽어짐으로 사라지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전에 예루살렘을 정복했던 정복자들은 당당하게 백마를 타고 전승의 환호를 누리며 환호를 받고 입성하였습니다. 예수님도 그와 같이 환호 받으며 당당한 모습으로 입성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렇지 않고 새끼 나귀를 타고 온유와 겸손으로 입성하셨던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인데 결과가 온유와 겸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0장 20절>에 기록된 메시아의 나라가 이르렀을 때 천국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로 싸웠던 제자들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와 같은 위축된 모습이나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 비록 새끼나귀를 타고 가는 이와 같은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영광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뻐길 필요도 없었으나 위축될 필요도 없는 분입니다. 그는 외적으로는 겸손과 온유의 모습을 이루었으나 가장 당당한 자의 영광을 이루는 자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할 때 방법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 우리들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은 겸손과 온유의 모습입니다. 인간세계에 대한 파악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의 열광과 환호에도 그리고 수많은 조롱과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칭찬하면 흔들리게 돼요. 또 조롱하고 비난하면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의 길을 가셨던 것을 봅니다. 환호에 대하여 높아질 필요 없고 비난에 대하여 낙심할 필요 없으시고 끝까지 겸손과 온유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뭉클해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을 나는 새도 깃들일 둥지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독의 토로의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지닌 분으로 이렇게 고독하셨는데 하물며 우리 인간들은 어찌하겠나 생각을 합니다. 외로워 그 모든 마음을 채워 주리라고 환호도 해보고 스스로 이루지 못하는 공허의 체험에 낙심하며 격렬한 비난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들을 볼 때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본심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환호하는 이들도 무엇인가 결핍이 되어서 환호할 것이고 좌절하고 비난하는 이들도 무엇인가 그들의 어려움을 도와달라는 간절한 모습임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을 볼 때 하나님의 나라와 위로와 은혜를 바라보며 그리고 세상 사람을 볼 때 우리를 향하여 무엇인가 갈급한 심령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온유와 겸손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 번째는 육신적 욕구와 기대의 충족을 위하여 춤추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을 보고 그들은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분명한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그 기대는 그릇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란 도성은 한 마디로 말하면 정치적인 도성입니다. 수많은 권력자들이 그것을 손안에 넣으려는 갈등과 아픔이 있는 힘겨루기의 터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이전에 수많은 정복자들이 있었습니다. 300년 전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알렉산더 대재라는 유명한 정복자가 예루살렘을 정복했던 사람으로 또한 기록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그 당시 강자였던 로마가 그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들은 로마의 피지배하에 핍박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누군가 힘센 자가 나타나 로마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주는 것을 소원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빵과 세금, 모든 것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하는 이와 같은 구속자 메시아를 열망했던 것입니다. 그런 차에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가는 곳마다 병을 고치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모이고 기적의 떡을 먹였고 귀신을 쫓았고 자연을 정복했던 이와 같은 빛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회오리처럼 몰려들고 그리고 사람들의 기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깜깜한 밤중에 한 줄기 빛을 본 사람들은 그 빛을 나름대로 해석합니다. 나름대로 채색합니다. 그 가운데 옷을 입힙니다. 정치적인 메시아의 옷을 입혀 세상의 능력을 가진 메시아로 옷을 입혀 마음대로 꾸미고 마음대로 기대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들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었던 것이며 이 땅에서 죽음으로 인간을 죄에서 영원히 구속하고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실 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무리가 겉옷을 벗어서 길에다 펴고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소리 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목적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높이는 목적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의 이기적인 욕구를 이루고자 한 것이 환호의 목적이요 동기유발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환호했지만 그들의 계산은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던 그들의 욕구로 인하여 이들은 추락하게 되었고 오히려 격렬한 공격자가 되어 자신을 찌르고 맙니다. 이기적인 욕구로 기도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게 될 때 더욱 격렬한 비방자가 될 뿐입니다. 오늘도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의 모습에 열광한 백성들 나름대로의 계산을 이루지 못할 때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폭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욕심에 따라 춤추는 무리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네 번째 살펴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예루살렘 백성을 보며 우리 삶에도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음의 삶과 자세는 어떠해야 될까 입니다. 말씀의 성취자인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그의 백성으로 우리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삶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이 이 땅위에서 하신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러한 주님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역시 같은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것인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이룰 것인가?
나의 기쁨을 추구할 것인가, 하나님의 기쁨을 추구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룸이 나의 모든 기쁨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평생 동안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패되었고 우리는 온전치 못한 인간이기에 내 마음에 원하는 모든 소원을 이룰 수가 없고 이루어도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면 우리가 이룬 그만큼 까지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행복할 수가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조차 잊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쁨과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이루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우리 역시 겸손과 온유로 우리 삶의 내용을 구성하며 우리 삶을 통하여 겸손과 온유를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종려주일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고난의 주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능력이 없고 힘이 없어서 겸손하고 온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과 능력이 있어서 겸손한 것입니다. 제가 반복해서 말씀드리죠? 오늘도 한 번 따라서 합시다.
“탁월한 능력, 겸손”
우리는 두 가지에 대해서 늘 말씀드렸죠.
우리는 탁월함과 겸손함 두 가지를 동시에 양손에 잡고 있어야 돼요. 탁월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 겸손해야만 다른 사람을 도울 수가 있어요. 탁월한 사람이 겸손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탁월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탁월하기 위해서 애쓰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탁월함을 가졌으면서도 우리는 교만한 것이 아니라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며 이 나라를 이루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영광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룹니다. 주님은 영광과 권세의 자리에 계셨지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 어떤 정복자보다도 초라한 모습으로 입성하셨지만 예루살렘을 정복한 그 어떤 역사의 인물보다도 예수님은 온 세상을 사랑과 은혜와 자비로 완전히 정복하셨던 것입니다.
힘이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과 모사가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겸손이 세상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온유함이 세상을 정복합니다. 내 욕망을 위해서 주님을 해석하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길과 뜻과 사역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고 우리 삶은 그것을 이루어드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모든 세상이 나를 위주로 돌아가야만 하는 나 중심의 어리석은 자아관, 세계관, 우주관을 벗어나야 합니다.
내 마음이 기쁘고 슬프고가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가 우리의 슬픔과 기쁨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내 욕망을 이루느냐, 내 감정을 이루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를 순복시키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믿음의 축복은 내 모든 주변이 바뀌어져서 내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어져 내 모든 주변을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바뀌니 모든 삶의 해석이 달라지고 모든 삶의 관점이 달라지니 결국 그 모든 것이 새로운 의미로 와 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내 앞의 사람이 바뀌어 내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뀜으로 내 앞의 사람이 행복하고 그가 행복하니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삶의 모습입니다.
아내가 바뀌어야 남편이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남편인 내가 바뀌어 아내가 행복하니 내가 더욱 더 행복한 것이고 우리는 또 남편이 바뀌어 내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니 남편이 행복하고 그 남편이 행복한 모습을 보니 아내인 내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자식과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축복이라는 것은 환경이 바뀌기 전에 내가 바뀌어 그 환경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 따라 춤추는 군상의 무리와는 달리 우리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를 순복시키는 은혜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이루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주일입니다. 마침내 그 가운데 사람들은 각각의 계획에 따라 춤추며 예수님을 환호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소망이었고 그 소망이 깨어질 때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폭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삶에는 내가 그렇게 원했는데도 이루지 못하는 꿈이 있어요. 그러나 내가 그렇게 원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루지 못한 꿈 때문에 내가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꿈을 나의 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의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백성들의 찬송과 환성 속에 이미 비난의 고함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비난의 고함소리에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향하여 외치는 그들의 간절한 구원의 소리를 들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상에서도 “아버지여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주셨고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종려주일을 지내고 고난주간을 지내며 고난을 묵상할 때 하나님 나라와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 삶에 대한 진실한 깨달음과 우리의 삶을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실현하여 실천해드림과 이제는 이 교회는 선언하는 교회가 아니라 이 성도들은 선언하는 성도들이 아니라 실천하고 실현하는 성도요 교회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생활 속에서 내 삶에서 이루는 주의 백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종천목사 주가 쓰시겠다 하라 마21장 01절 ~ 9절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감동을 느끼며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늘날까지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축복과 은혜, 그리고 그 은총을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하기 위하여 성도들이 마음을 모으는 일을 위해 이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과 순간은 내가 무엇인가 주님께서 원하신 일과 그 장소에 있다라는 것과 내가 비록 미약하지만 주님 앞에 소중하게 쓰임을 받고 있다라고 마음에 확신하는 때입니다.

그동안 저희교회는 참 많은 축복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20년 4개월 전에 교회가 목사와 성도가정 셋이 모여 개척이 되었고 불과 1년 만에 4백여 명 정도의 성도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개척된 지 1년 정도 된 순간에 그야말로 교회 출석한지는 1년도 안 된, 불과 수개월 혹은 두어 달 정도 된 성도들이 힘을 합해서 지금의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개척한지 22개월이 되었을 때 우리 지하주차장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2주년이 지난 그 다음해 성탄절에 본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약 2년 정도 지나서 저희가 지금의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죠.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큰 은혜와 축복을 주셔서 교회의 부흥과 그리고 역사와 사회를 의식하는 교회, 또 인물을 키워 세상을 바꾸는 교회, 성도들의 영적 건강을 책임지는 교회라는 3대 비전을 가지고 이제까지 지내왔습니다. 물론 부족한 지경이었고 여러 가지 온전치 못한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3기 사역을 지내오면서 인류애실천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부여받게 되었고 교회는 구체적인 사역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한 걸음 한 걸음 한 해 한 해 은혜를 이루며 지내왔던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지난 일 년 동안은 저희들에게는 참 표현키 어려운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19년 동안 큰 어려움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체험하다가 교회 3기사역이 마쳐질 즈음인 20주년이 되는 해에, 지나서 생각해 보면 이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요 역사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지만 큰 어려움 속에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의 면모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내놓고 생각해보니 이 또한 하나님께서 주의 교회를 더욱 더 강하고 더욱 더 견고하게 하시려는 의도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도들은 어려움을 통하여 더욱더 기도하게 되었고 교회를 더욱 더 애틋하게 생각하게 되었으며 하나님나라에 더욱 더 큰 은혜와 은총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저는 1년 동안 설교를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어찌 생각하면 이 1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분명히 설교하셔서 우리 성도들의 가슴에 새겨진 말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계획하는 이는 여호와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모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일을 친히 이루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다음 우리 성도들이 또 한 가지 마음속에 확신하게 된 것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1년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이 이와 같은 마음에 이런 확신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애틋한 기도로 목사인 저는 이 강단에 다시 서게 되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목양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우리 성도들 한 분 한 분에게 기도하면 그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우리 믿음의 역사에 있어서 너무나도 소중한 체험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때에 따라 합당하게 주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진행해오면서 우리의 시간표대로 한다면 우리가 조금 더 큰 규모에서 보다 더 준비된 모습으로 우리가 인류애 실천의 사역을 진행하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 비록 적은 규모이지만 준비가 덜 된 상태이지만 이 상태에서 우리가 인류애실천을 위해서 무엇인가 중요한 일들을 진행하고 결단하고 또 해야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은 다를 수 있으나 결국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을 봅니다.

제가 이번에 돌아와서 우리 성도님들께 감격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예배에 대한 소중함을 너무나 극진히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설교할 때보면 간혹 가다 아주 간혹 가다입니다. 물론 이 간혹 가다에 속한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무시는 분이 계셨어요. 그런데 제가 돌아와서 보니까 예배시간에 주무시는 분이 한 분도 없는 거예요. 보니까 그동안 너무 시끄러워서 못 잤고 그리고 시끄러운 것이 없어지니까 그냥 조용히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감격해서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해서 아마 주무시지 않고 이렇게 예배에 집중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무한합니다. 때로는 여러 가지 기쁨과 즐거움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게 하시고 때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애틋한 사랑과 은혜를 더욱 더 체험케 하시는 것을 봅니다. 돌아와서 보니 우리 성도님들이 교회를 너무 애틋하게 사랑하시고 또 목사에 대해서도 애틋한 심정을 가지고 기도하셨고 또 성도들 서로에 대해서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 참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짧은 1년 동안 큰 믿음과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게 하셨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교회와 그 교회되는 온 성도들이 더욱 더 큰 믿음의 역사를 이루고 든든한 성도들이 되기 위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축복을 생각해 보며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교회로 더욱 더 큰 부흥과 은혜의 역사를 이루게 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2012년은 하나님께서 작년에 큰 고통과 아픔을 주셨던 것처럼 올해는 그것을 회복하게 되는 더 큰 축복과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가운데 하나님께서 2012년에는 교회회복과 부흥뿐 아니라 우리 성도 가정, 인간관계, 건강, 그리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업장, 직장, 우리의 가업에도 하나님의 축복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한 번의 아픔이 있으면 한 번의 기쁨이 있고 한 번의 슬픔이 있으면 한 번의 웃음이 있습니다. 슬픔의 눈물이 변하여 기쁨의 춤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은혜가 임하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공동의회가 예배 중에 있어서 긴 말씀을 전하지 못하지만 오늘의 본문 말씀을 잠깐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하여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가서 나귀가 한 마리 있을 텐데 그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죠.

“주님, 우리가 무슨 준비된 것도 아니고 돈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나귀새끼를 어떻게 데리고 옵니까?”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혹시 뭐라고 하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 그러면 그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이 데리고 온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이며 동시에 선지자들이 이전에 선언했던 이와 같은 성경의 말씀을 성취하는 일이시기도 합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그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백성들의 환호를 받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그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바닥에 그들의 겉옷을 깔고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환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환호를 뒤로 하며 마침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십자가사역을 이룹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것으로 인하여 인생을 구원하셨고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마침내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부분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의 의미를 잠깐 생각하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님의 역사의 모습입니다. 아무도 몰랐던 아무도 알지 못했던 이와 같은 나귀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그와 같은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명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역사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던, 누가 소유권을 주장하던 누가 어떻게 하던 “다만 주께서 쓰시겠다하라”라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때때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은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그 모든 것을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하면 주께서 우리의 것을 소중하게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용하는 것이 우리에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위해서 너무나 아름답게 소용되고 사용되어 주의 영광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주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모든 것을 이루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가지고 있던 것도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우리의 것을 사용하셔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것이 상실됨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을 활용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룸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꿈과 소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의 역사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역사는 놀라움 그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밖에 보지 못하지만 주님은 멀리 역사를 통찰하시는 이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 인간의 경주에 있어서도 가까이 보는 사람과 멀리 보는 사람은 다를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한 치 앞을 보는 것과 우리 앞에 있어서 긴 세월의 여유를 미리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인류애 실천의 역사를 위해 우리 성도들이 지난 20년 동안 정성을 모아 준비했던 작은 것을 사회에 기부하여 인류애 실천의 역사를 이루고자 합니다.

우리에게는 작은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큰 역사를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 분당중앙교회를 스쳐갔던 수만 명의 성도님들, 그 모든 성도님들의 사랑과 기도와 눈물과 애씀들이 모여져 있던 것을 우리가 주님의 손에 들려드림으로 인하여 오병이어의 역사가 나타나고 그것을 통하여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과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작년 한 해, 인생의 모든 것은 인간의 뜻하는 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기대하며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립니다.

오늘 성경에는 나귀라고 하는 미물이 나오게 됩니다. 영문도 모르고 예수님께 끌려왔던 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영광의 주님을 등에 태우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이 미물이 내가 주님의 역사에 주님의 공생애 귀한 사역에 이렇게 쓰이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주인이 끄는 대로 끌려 다니고 먹이주면 먹고 또 풀을 뜯어먹고 사는 미물이었지만 그 나귀 한 마리가 예수님이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하는 놀라운 은혜의 도구가 되었고 예수님을 그의 등에 태우고 영광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예루살렘 환호의 장면에 그의 아름다운 삶을 그의 아름다운 모든 나귀의 삶을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리둥절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이 주님 앞에 이렇게 쓰여질 줄 몰랐는데 내가 어떻게 이렇게 귀하게 소용될까? 우리도 모르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소중하게 사용될 때가 있단 말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모아 하나님의 사용하심에 그 손에 올려드리지만 우리도 알지 못했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알지 못해요.

여러분, 우리나라에 세브란스병원 있었잖아요. 지금은 연세대학병원이지만요. 그 제중원이 생겼는데 그 제중원에서 세브란스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죠. 왜 그러냐면 세브란스라는 사람이 돈을 보내서 그 병원을 보다 더 현대적으로 세우도록 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세브란스라는 사람이 자기가 죽으면서 자기 유산을 교단본부에 맡기고 교단본부는 유언에 따라서 그것을 가지고 기금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계속해서 세브란스병원에 돈을 보냈고 연이대학과 그 세브란스 병원이 합해서 연세대학이 되었고 지금도 의과대학이 있는데 지금까지도 그 세브란스의 후손들이 기금을 보내고 있어요. 물론 지금은 병원이 너무 커져서 보내는 돈이 아주 적은 미미한 분량이 되었어요. 하지만 연세대학에서 새로운 병원을 신축하고 그 후손이 와서 그 기공예배에 참석했는데 정말 감격스러운 것이죠. 그래요. 이 세브란스라는 사람이 벌써 오래전에 자기가 그와 같은 돈을 보내면서 그것이 오늘날 이 한국사회에 이와 같이 큰 역사를 이룰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후손들까지도 그 일에 마음을 합하여서 그 세월이 흘러가니까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잖아요. 그 당시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미미한 나라였습니까? 그런데 이제 세계 어느 나라든 가보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대단한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전혀 생각을 못했을 겁니다. 그 가운데에 큰 역사를 이루었지요. 우리도 오늘 이와 같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적은 것이지만 이와 같이 우리가 기부하여 사회에 귀한 역사를 이룰 때에 이것이 어떤 역사를 이루게 될지 몰라요. 캄보디아에 병원과 의과대학을 세우고, 그리고 또 저희가 제3세계 학생들, 특별히 선교지 학생들을 불러서 공부시키는 일에 사용하고 그들이 나아가서 훌륭한 인물이 되어서 정말 그 나라에 가서 훌륭한 지도자들이 될 때 우리가 그 사회에 기여하는 큰 힘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도 우리를 통하여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줄을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이 나귀는 자신이 그렇게 훌륭하게 사용될 줄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 이렇게 사용되었단 말이에요. 우리도 하나님께서 쓰시는 귀한 역사에 어떻게 사용될지 몰라요. 그러나 어느 날 우리가 그렇게 귀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을 건너서, 그리고 세월을 건너서 마침내 그 시간 속에 이와 같은 역사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정하셔서 사용하시면 나도 예상 못했던 놀라운 주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끌려갔어요. 그리고 누군가를 등에 태웠어요. 그리고 가다보니까 그것이 주님이었단 말이죠. 그러니 주님의 역사의 강에 우리를 맡겨봅시다.

제가 이 문장을 쓰면서 마음에 너무 좋았어요. 우리 한 번 따라서 해봅시다.

“주님의 역사의 강에 우리를 맡겨봅시다.”

그래요. 주님의 역사의 강물에 우리를 맡겨 흘러가 봅시다.


오늘 나귀 주인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볼까요? 이름도 기록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는 나귀를 정성껏 키워서 주님이 사용하도록 제공했던 역사 속의 헌신자입니다. 그래요. 나귀 중에는 자기가 키운 나귀새끼가 주님께 사용되리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그는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그가 키우던 나귀가 주님의 은혜에 사용되었던 겁니다. 우리도 모르게 정성껏 준비했던 겁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르게 정성껏 묵묵히 살아왔던 모든 삶이, 우리가 살아왔던 삶의 작은 결과물들이, 주님의 영광에 소용된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우리는 믿음이 없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큰 은혜와 영광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말하자면 역사서입니다. 그런데 거기 보니까 전반부는 베드로행전, 후반부는 바울행전이에요. 이 두 사람의 얘기가 주로 기록되어 있어요. 그럼 왜 베드로행전, 아니면 바울행전이라고 해야지 사도들의 행전이라고 해서 사도행전이라고 썼을까요? 거기는 이름이 기록되지 않고 또 이름이 기록되어도 잠시 기록되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애씀이 거기 모여 있기 때문에 그래요. 분당중앙교회는 담임은 최종천 목사일지 모르지만 담임 한 사람의 노력과 수고로 이루어지는 교회가 절대 아닙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눈물 흘려 기도했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소망했고 애썼고 헌신했던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 우리 공동체의 종합적인 작품임을 봅니다. 저는 이번에 목사가 목사 한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더 깊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애련한 기도로, 우리 성도들의 애틋한 기도로, 목사가 다시 와 이와 같이 말씀을 전하게 될 때 우리 성도들이 기뻐하고 마음에 감동하는 모습을 볼 때 정말 우리는 모두 함께 걸어가는 믿음의 공동체요, 한 생명, 하나님의 식구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안 날지 몰라도, 소위 말하는 분당중앙교회 성도들이라는 이름 속에 이름이 뭍혀져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나귀주인처럼 하나님 앞에 터벅터벅 우리의 삶에 한걸음 한걸음을 감으로 말미암아 주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나 자신도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지만, 주님의 역사에 쓰임받는 귀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우리는 묵묵히 오늘도 예배에 참석하고, 우리는 묵묵히 오늘도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우리는 묵묵히 기도하고, 비바람에도 눈보라에도 묵묵히 주님 앞에 그 자리에 있을 때, 주님의 은총이 우리들에게 넘치는 것입니다. 나도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는데 나도 예상치 못했는데 내 이름이 나타나지 않아도 내가 주님 앞에 귀한 역사를 이루는 것이 바로 나귀주인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쓰시겠다고 말하신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것만 해도 감사하고 내가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그 작은 것에 내 한순간의 힘이라도 보탠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사회기부를 통해서 헌신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들만의 것은 아니잖아요. 이 교회를 지난 20년 동안 흘러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수고와 애씀의 노력의 결과인 것을 봅니다.

제가 10000번이거든요. 저희 집사람이 10001번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등록을 해서 번호가 수만 번까지 나갔습니다. 적어도 분당중앙교회에 등록해서 주의 성도로서 예배드리고 헌신했고 봉사했던 사람이 수만 명이 되는 겁니다. 누구 한 사람만 수고한 것이 아니라 우리 수많았던 사람 20년의 세월동안 이루어졌던 수많은 사람의 수고로 작은 수고가 모여져 하나님께 헌신될 때 그것은 분명히 오병이어처럼 주님의 손에 들려 사용될 줄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 저는 앞으로 더욱 더 큰 역사가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더 큰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주님이 쓰시겠다라고 말하신다면 우리는 그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해주신 것만 해도 감사하고 감격하여 주님께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이 우리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나 주님께서 어떤 계획이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준비하게 하시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섭리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결정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의 제공을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우리를 맡깁시다.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 속에 우리를 맡깁시다.
역사에 흘러가는 장강을 누가 감히 막아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속에 우리가 함께 실려 주의 온전한 은혜의 역사의 흐름에 주의 은혜에 능력의 권능의 역사를 이룰 때에 우리를 실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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