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니
□ 본문 : 요한복음 11장 17-27절
※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카사카 씨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황 집사님 댁에서 예배를 드릴 때면, 먼저 아카사카 씨에게 예배를 드려도 괜찮은지 양해를 구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셨지만 감사하게도 한 번도 반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거실에 아카사카 씨의 침대가 있는데, 예배를 드릴 때 아카사카 씨는 침대에 누워계셨습니다. 어느 때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있기도 했는데 함께 예배를 드린 적은 없었습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아카사카 상을 제외하고 모두 한국 사람이지만, 일본어로 설교를 합니다. 아카사카 상에게 말씀을 들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카사카 상 들으라고 열심히 일본어로 설교했지만 한 번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일 년에 한두 번씩 몇 년 동안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카사카 상의 몸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날도 심방예배를 드릴 때 일본어로 설교했습니다. 그때 본문이 바로 요한복음 11장25,26절이었습니다. 설교를 하고 있는데 침대에 누워있던 아카사카 상이 갑자기 얼굴을 돌리더니 저에게 물었습니다. “거짓말이죠?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어요?”
그전까지는 말씀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던 분이었는데,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 질문을 계기로 아카사카 상에게 직접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했을 때, 다시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 마르다가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가 지금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살아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는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나사로의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요단강 건너편에 이틀이나 더 머무셨던 이유, 그래서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을 때 이곳에 오신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자신의 몸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사흘 동안 주변에 머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흘 동안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흘이 지나면 그 희망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죽은 자의 영혼이 떠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에는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기 때문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말씀하셨을 때,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지만, 사람의 생각으로는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그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은 표적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 개의 표적 가운데 가장 마지막 표적이며 가장 중요한 표적입니다. 표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증거하는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표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죄의 대가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자체가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당신의 생명으로 죄의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면 죽음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꺾으신 것을 알 수 있고,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꺾으신 것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부활의 예수님입니다. 나사로를 붙잡고 있는 사망권세를 물리치신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 바로 그 분이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예수님이실 뿐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도 죽는데, 어떻게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반드시 죽습니다. 이 죽음을 피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은 썩어 한 줌의 흙이 되어도, 우리의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갑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생의 시작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 아니라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것이 아니라 옮겨졌습니다. 그렇게 영혼으로 존재하다가 마지막 때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누가 이 놀라운 구원의 축복, 영생의 축복을 받고 누립니까? 25절, 26절 말씀을 다시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누가 죽어도 살아납니까? 누가 영원히 죽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부활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부활합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죽음과 상관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이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자신과 상관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주변에서 누가 병으로 죽었다, 사고로 죽었다,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죽었다, 등등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젊은 사람이 안됐네, 사람이 어떻게 마지막 인사도 없이 그렇게 허망하게 갈 수 있나, 인생은 정말 알 수 없어, 내일일도 모르는 것이 사람이야.’ 이렇게 말하면서 그 일이 바로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그렇게 어리석습니다.
※ 설교를 시작할 때 고 아카사카 상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러 번 찾아가서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해드렸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믿고 천국 가시라고 말씀드리면, 자기는 100살까지 살 것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100살까지 살겠다고 하신 것은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진심이었습니다. 100살까지 살 것을 원했을 뿐 아니라, 그 정도는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병이 점점 깊어지면서 마음의 문도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아카사카 상에게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어느 날인가는 자신이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죽음의 문제가 자신의 문제가 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 어쩌면 그 날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복음을 전하던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빌립보감옥에 갇힙니다. 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죄수들이 들을 정도의 기도와 찬송이었습니다. 당연히 빌립보감옥의 간수도 들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풀어졌습니다.(16:26) 졸던 간수가 깨어나 감방 문이 다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친 줄로 생각하고 자결하려고 합니다. 심문을 받고 사형당하는 것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살하려고 하던 그 짧은 순간에 간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결하려는 간수를 보고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말합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16:28) 깜짝 놀란 간수가 등불을 가지고 뛰어 들어가서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30)
이 간수는 죽음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았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권력이 있고 돈이 있으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기분 나쁘게 죽음 같은 것을 왜 생각합니까? 그럴 시간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즐기지 말입니다. 죽음은 말 그대로 죽을 때에나 생각해 볼 일이지, 잘 나가고 있는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먼 훗날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죽음이 한 순간에 자기 앞에 다가왔습니다. 죽을 때가 되어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죽음이 눈앞에 왔는데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습니다. 오직 두려움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죽음 뒤에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만약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잘 사느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어떻게 잘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길어야 100년이지만, 죽음 후의 삶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죽음 후의 영원한 삶에 대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간수는 죽음 앞에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죽음 후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30)
바울과 실라는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31)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똑같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지금 여러분이 듣고 있는 설교는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 말씀을 자신과 상관없는 말씀으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하는 말씀을 나이가 많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분들이나, 심각한 병에 걸려 오늘내일 하는 분들이나 들어야 말씀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부자라고 죽음이 피해가고, 권세가 있다고 죽음이 피해가고,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바쁘다고 죽음이 피해갑니까?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오늘밤이라도 가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은 젊은이건 노인이건, 건강한 사람이건 병든 사람이건, 모두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이 질문은 빌립보감옥의 간수 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대답이 되어야 합니다. 그 대답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여러분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오늘 이 설교는 바로 그 한 사람을 위한 설교입니다. 간수와 같이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찾아올 죽음 앞에 두려워 떨지 마시고, 지금 이 시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내 마음대로 내 욕심대로 살았던 것이 죄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어도 죄인입니다. 마음속으로 지은 죄도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있는 사람은 ‘내가 왜 죄인이냐?’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병든 자가 의사를 찾는 것처럼,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회개하십시오. 회개는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은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온갖 죄를 저지르며 살았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십시오. ‘예수님, 나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내 마음에 들어와 주세요. 내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구원해 주세요. 나는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옵소서. 이제부터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나의 인생을 예수님께 맡깁니다. 지금부터 나를 인도하시고, 영원토록 나와 함께 하소서.’
예수님을 믿는 분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분들은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어떤 마음이 드십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말씀인데 … ’ 라고 생각하십니까? 맞습니다. 아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또 다시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다 아는 것 같지만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이심을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이라는 말씀보다 더 중요한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보다 더 축복의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 어느 목사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한 열흘 전에 노환으로 누워 계신 어머님께서 저와 제 처를 부르셨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매우 두려운 표정으로 간밤에 꾸신 꿈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갑자기 어머님께서 죽음의 어둠 속으로 떨어지셨습니다. 심히 무서운 공포의 어둠이었습니다. 그 어둠 속을 한참 헤매시던 어머님 앞에 커다란 성이 나타났습니다. 누군가가 그 성이 천국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국으로 들어가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입구에서 험상궂은 사람들이 나타나더니, 너 같은 죄인은 이 문을 통과할 수 없다며 어머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어머님께서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지 물으셨더니 오직 통행증을 소지한 사람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험상궂은 사람들이 사정하는 어머님을 소리소리 지르며 내어 쫓아 버렸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쫓겨나신 어머님께서는 공포에 질려 벌벌 떨다가 잠을 깨신 것이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비록 꿈 속이긴 하지만 천국에서 쫓겨났다 데 대해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어머님께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18절 말씀을 읽어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그리고 어머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님께서 아무리 한평생 의롭게 살아오셨다 해도, 어머님의 공로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의를 요구하시는 반면, 인간에겐 죄의 허물이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투성이인 인간은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가 치러야 할 죄 값을 십자가 위에서 대신 치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로 믿어 주님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 바로 그 분이 천국의 통행증입니다. 어머님께서는 어리실 적부터 80년 동안 주님을 믿어오셨습니다. 어머님께는 이미 천국의 통행증이 주어졌습니다. 아니, 어머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천국과 영생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이 다음 어머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 누구도 어머님께 천국의 통행증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님께서 평생 믿어오신 주님, 지금 어머님과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당신의 품으로 어머님을 꼭 품으시고 친히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얘기를 들으시는 동안 어머님의 얼굴에는 평안과 기쁨의 기색이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얘기가 끝나자 어머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맞다.”
그와 동시에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오른손을 들어 제 손을 달라는 시늉을 하셨습니다. 제가 손을 내밀자 어머님께서 제 손을 꼭 잡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고맙다.”
나는 어머님께서 그처럼 온 영혼을 다해 진심으로 고맙다 하시는 말씀을, 그 이전에는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 손을 계속 잡고 계시던 어머님께서 잠시 후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방금 내게 한 얘기를 너희 교회 교인들에게도 해 드렸느냐?”
“네”라는 저의 대답을 들이신 어머님께서는 다시 제 손에 힘을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틈이 나는 대로 자꾸자꾸 말씀을 해 드려라.”
저는 어머님의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제 어머님께서는 근 80년 동안 교회를 다닌 분이십니다. 권사님이 되신 지도 30년이 더 넘었습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원자시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 곧 천국을 얻을 수 있다는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들으셨겠습니까?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들으셨을 것이고, 또 수많은 사람에게 그 사실을 전하고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보며 한순간 그 사실을 잊으셨을 때, 이내 절망과 공포 속에 빠져 버리시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구원자 되심을 상기하심과 동시에 평안과 기쁨 및 감사를 다시 회복하실 수 있었습니다. 고작 70-80년 살다 흙으로 돌아갈 버릴 허망한 존재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통해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주셨다는 것보다 더 큰 기쁨과 감사의 조건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이재철, 요한과 더불어4, 홍성사, pp, 401-404)
이 목사님의 말씀에 저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원래 제가 전하려고 했던 설교는 오늘 설교와 많이 달랐습니다. 그런데 설교의 내용이 바뀌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금요일에 설교원고를 작성하려고 하는데 노트북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설교 자료가 노트북에 있기 때문에 정말 난감했습니다. 원고도 목요일에 25%정도 작성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처음에는 당황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빠듯한데 말입니다.
이 권사님께 전화를 걸어서 가이드를 받았습니다. 노트북 문제로 이래저래 2시간 가까이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트북이 안 되면 아이패드로 설교원고를 작성해야합니다. 그렇게 되면 평소처럼 설교내용 전체를 원고로 작성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 핵심 포인트만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설교내용이 간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준비한 설교내용을 내려놓고 어떤 말씀을 전할까 묵상하는데, 처음과 다른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러고 나니 노트북이 움직였습니다. 매 주마다 주님이 말씀을 주시지만, 오늘 말씀은 주님의 특별한 간섭이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만 들어야 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 우리들도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일평생 예수님을 믿었어도,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절망과 공포 속에 빠지는 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이고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미 그 안에 부활의 능력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은 죽음을 이깁니다.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인데, 이기지 못할 시험이 어디에 있고, 이기지 못할 고난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부활의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쉽게 흔들리고 얼마나 자주 넘어집니까? 왜 그럴까요?
우리 안에 영생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고, 어떤 일을 만나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나눈 목사님의 말씀처럼 ‘고작 70-80년 살다 흙으로 돌아갈 버릴 허망한 존재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통해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주셨다는 것보다 더 큰 기쁨과 감사의 조건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우리는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리고 불평과 원망과 짜증 속에서 살아갑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믿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25절과 26절에서 예수님은 동일하게 ‘나를 믿는 자는’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믿는’은 현재 분사입니다. 과거에서 시작된 행동이 현재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문법을 살려서 25절과 26절을 번역한다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계속해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계속해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것은 분명 과거의 어느 시점일 것입니다. 목사님의 모친처럼 80년 전에 예수님을 믿은 분도 있을 것이고 10년 전에 예수님을 믿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은, 과거의 믿음이 아닙니다. 지금도 계속되는 믿음입니다. 오늘도 바로 이 순간도 계속되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아니면 80년 동안 예수님을 믿었어도 죽음 앞에 절망과 공포를 느낍니다. 이런 믿음이 아니면 80년 동안 예수님을 믿었어도 시험을 만나면 넘어지고, 고난이 오면 무너집니다. 사랑하기 싫은 사람은 여전히 사랑하기 싫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여전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내 성질 내 고집 하나 내려놓지를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과거의 믿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죽은 믿음이 아닙니다. 현재의 믿음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두 주 후에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잊어버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나의 부활인 것도 잊어버리고, 부활의 예수님이 지금 내 안에 계신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다가, 부활절이 되어서야 ‘맞다, 부활의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부활의 능력이 내 안에 있지. 죽음의 권세를 이긴 부활의 능력이 내 안에 있는데 내가 왜 이렇게 믿음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지? 정신 차리자.’ 이러면 안 됩니다. 이런 부활절을 맞이하면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은 부활절 한 주만 반짝 하다가, 나머지 51주는 부활도 모르고 생명도 모르는 사람처럼 기쁨도 잃어버리고 감사도 잃어버리고, 절망과 두려움 속에 살아갈 것입니다. 정말이지 이런 성도는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그분은 부활이고 생명입니다. 부활이고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오늘을 삽시다. 그 믿음으로 오늘도 승리하며 삽시다. 그 믿음으로 날마다 천국을 누리며 삽시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