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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중심의 삶이 축복의 통로입니다.(시84:1-12)

작성자최우식 목사|작성시간12.02.03|조회수861 목록 댓글 2

교회 중심의 삶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시 84:1-12


 교제한 지 2년이 넘도록 남자가 ‘결혼하자’는 말을 하지 않아서 초조해진 여자가 결혼 이야기를 꺼냈더니, 남자는 못들은 척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외면만 했습니다.

여자‘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남자에게 따졌습니다.

‘도대체 결혼하자는 말만 나오면, 왜 피하는 거예요?’

남자도 버럭 소리를 지르며 대답을 했습니다.

‘집안에서 반대가 너무 심해서 결혼 말을 꺼내지도 못해.’

 그러자 여자‘누가 그렇게 반대를 하세요? 아버님이세요? 어머님이세요?’ 물으니, 남자‘두 분 다 아니야.’라고 부인했습니다.

 여자는 더 짜증이 나서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으시면, 도대체 누가 반대를 해요?’ 다그쳐 물었더니, 남자는 마지못해 대답을 했습니다.

‘으~음, 내~에 마누라가.’


 이 짧은 이야기는 우스개로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만, 실제 우리 가정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중적 삶으로 인해서 상처를 받는 사람들과 무너지는 가정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은 더 이상 사람이 마음을 두고 살 집이 못 될 것입니다.


 사람이 일생동안 가장 많이 머물러 사는 곳이 집입니다. 사람은 일생을 집에서 머무르고, 집에서 살다가 그 인생을 마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 은 가장 중요한 영역이며, 특히 내가 사는 집은 내게 있어 너무도 중요한 삶의 자리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집에서 사는 것이 너무 익숙해져 있고, 또 집에서 사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며 살고 있어서 이런 집의 신비한 비밀을 잊어버리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1절에서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노래하여, ‘주의 장막이 너무 사랑스럽다’고 감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 장막”이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말하며, “사랑스럽다”‘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시편 가자가“주의 장막이 사랑스럽다”고 한 것은 ‘성전의 외적인 모습이 아름답다’는 말이 아니라,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므로 영적으로 보아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아직도 대부분의 성도들이 예배당을 성전(거룩한 집)이라고 오해하여 ‘교회 건물 자체가 성전이므로 거룩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교회를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건물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 개개인에게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 개개인과 그 모인 무리들이요, 그들이 살고 있는 모든 곳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집을 건물로 생각하고 살지만, 사실은 건물은 집이 아닙니다. 그 건물 안에 살고 있는 주인이 실제 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건물 안에 있어야 할 주인 된 존재가 없으면, 그 건물은 아무 의미도 없고, 공허한 장소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을 관리하고 돌보아야 할 주인이 그 집에 살고 있지 아니 하면, 그 집은 폐허가 됩니다.


 이런 집의 신비한 비밀을 우리가 알고 살게 될 때,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비로소 내게 삶의 의미가 되고, 생명, 다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 주인이 되며, 동시에 생명이 되는 삶의 본질적인 집은 무엇일까요?


결혼 전에는 부모님의 품이 나의 집이 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집이 됩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며, '엄마!'하고 불렀을 때 '오~냐! 내 새끼, 이제 오냐? 나 여기 있다'어머니께서 대답해 주시고, 아버지는 그냥 빙그레 웃으시며 마당에 계시기만 해도 왠지 마음이 푹 놓이게 됩니다.

 반면에 어머니가 안 계시면 집이 텅 빈 것 같아 마음이 안절부절 해지고, 아버지가 안 계시면 집에 있는 것이 불안해지면서 집에 있기가 싫어지고, 끝내는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품이 우리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점점 들어가고, 철이 들면서 우리는 집의 변화를 체험합니다. 우리 자신이 집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한 후에는 부부 서로가 서로의 집이 됩니다.


 남편은 아내의 집이 되고, 아내는 남편이 집이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자기 아내를 ‘집사람’이라고 부르고, 아내가 남편을 ‘집주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내는 남편의 집이 되어주고, 남편은 아내의 집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내가 살고 있는 건물을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아내의 품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내가 남편을 포근하고, 아늑하게 품어주는 집이 될 때, 그 남편은 자기 삶의 의미가 되는 아내 곁에서 안식을 얻고, 평화를 누리며, 그 곁을 떠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아내가 집에서 고생스럽게 살림을 하며, 바깥출입을 잘 안 하면서까지 집을 알뜰살뜰 지키는 것은 남편을 집 주인으로 인정하고 섬기며, 남편 안에서 믿고 안심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부모가 집이든, 남편이 집이든, 아내가 집이든 그 집은 결코 영원한 집이 아니요, 불변하는 집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말미암은 모든 집은 반드시 언젠가는 없어지고, 또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40:6-8) 인생의 의미가 그 자체로는 덧없음을 말했고, 솔로몬“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정의했습니다.

 흙에서 왔다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그 육신만의 삶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몸은 사망의 몸이요(롬7:25), 우리 인간의 삶은 죽은 행실에 지나지 않습니다.(히9:14)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만들고, 지키고 살아가는 삶의 결과에 대해 “사람의 손으로 지은, 땅에 있는 육신의 장막 집은 무너진다.”(고후5:1-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영원불변하는 집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세상을 중심으로 하여 사는 삶은 결코 축복을 가져다주는 통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불변하는 집은 어떤 분이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영원불변하는 집이 될 수 있는 조건은 그 집의 주인이 영원불변하신 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집의 주인을 중심으로 하여 그 분 안에서 살 때 축복을 받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켜 주시는 분이어야만 영원불변하는 집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두 가지를 충족시켜 우리에게 집이 되어 주실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우리의 집이 되십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집이 되어주고, 살아가면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집이 되어준다 하지만 남편이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날 수도 있고, 또 중간에 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의 집이 되어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84편 저자는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로다.”(4절),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5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12절)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영원한 집이 되고, 나의 거할 영원한 처소가 되고, 나의 영원한 평강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에 받는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무엇을 하라고, 우리에게 영원불변한 집으로 주셨을까요?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축복을 누리는 존재로 창조하시고, 피조물인 우리 인간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살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통로가 바로 예배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전 중심의 삶이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 84편 표제에 보면, “고라 자손의 시”라고 했습니다.

고라와 그 자손들레위 족속으로, 성전에서 성막이나 성소의 문지기로 봉사하거나, 성전에서 평생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하며 섬기도록정해 진 사람들입니다.


 또 표제“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영장”은 성전 예배의 찬양을 관장하는 성가대장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깃딧”은 당시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때에 사용된 악기를 가리킵니다만, 그 속에는 ‘기쁜 곡조로’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표제로 해석하면, 시 84편‘하나님께 고라자손들처럼 찬양대로 평생 기쁜 마음으로 찬양을 드리고, 성막이나 성소의 문지기로 하나님을 항상 기쁨으로 섬겨야 한다.’는 귀한 찬양입니다.


 왜 고라자손들이 하나님을 평생 마음과 힘을 다하여 섬기고, 항상 기쁨으로 찬양하였을까요?

 왜 고라자손들“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증언하였을 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거처할 영원불변하는 성전이 되시고,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사는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고라자손들이 부른 시 84편 찬양의 주제'성전을 떠나 있는 순례자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내용'입니다.

고라 자손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살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여겼고, 또한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시온을 찾아가는 자를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는 가능하면 성전에서 더 가까운 곳에서 살려고 했고, 아예 성전 안에 들어가서 성전중심의 삶을 살아 하나님에게서 축복을 받아 누리며 살고, 그 축복을 전하며 사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마음과 육체가 쇠약하기까지 하면서, 이런 성전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매주 혹은 매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기도를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더 중히 여기고, 더 사모하며, 교회중심의 삶을 살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며 나누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영원한 사랑이 없고, 참된 위로가 없고, 온전한 기쁨이 없는 이 세상에서 언제나 우리를 당신의 날개 아래 품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 예배와 기도와 찬양과 헌신으로 교제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고 축복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중심,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 축복의 통로가 되기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시편은 '고라 자손의 시'라고 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다윗의 시’라 하는 견해에 일치합니다.

학자들은 이 시가 ‘다윗의 시’라고 할 때,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찬이슬을 맞으며, 고달픈 나날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궁정을 마음과 몸이 쇠약하기까지 사모하여 고백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살 수 없게 된 다윗이 뭐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3절)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살면서 항상 주를 찬송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존재를, 그것도 도저히 부러워할 수 없는 미물에 불과한 참새와 제비조차 부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공중의 참새도 제단 곁에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는데, 자기는 장막을 떠나 사는 처량한 신세임을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처럼 쫓겨 다니는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공경하였고, 신뢰하였으며, 성전중심의 삶을 살아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슬픔이 저미도록 사모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현실로 보면 다윗은 처량한 자요, 그야말로 비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것도 없습니다.

 더 더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성전을 중심하여 축복의 통로로 살 만한 그 무엇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4절에서 주의 집에 거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고백하였고, 5절에서는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간증하였으며, 그리고 12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하여, ‘복이 있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를 결론짓고 있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성전 곧 교회를 중심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시온을 찾아가는 대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축복의 통로를 걸어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축복을 주시는 원천으로 삼고, 교회를 하나님의 추복을 받는 통로로 삼아,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예배 중심, 기도 중심, 찬양 중심, 헌신 중심의 삶을 최고의 소망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말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한 마디로 교회중심으로 살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통로가 된 성도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된 삶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내려 눈물골짜기로 기쁨의 샘이 되게 하시며, 생명을 살리는 이른 비의 은혜를 받게 하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어떤 감사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어떤 은택을 베푸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 복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까?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이런 다윗의 신앙은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져야 할 신앙의 모법이 됩니다.


 이제 성도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가장 관심을 쏟고 소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우선하여 살아야 할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 불신자들처럼 세상적 가치관과 나 중심의 필요적 삶을 행복을 주는 통로로 여기고 살 것인지, 아니면 다윗처럼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따라 축복의 통로로 살 것인지 자기진단을 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계승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하여야 할지 몰라 두려워하는 여호수아에게 강력하게 명령하시며 동시에 확실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수1:7-8입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기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니엘은 자기를 느브갓네살 왕에게 고발하여 죽이려 하고 있는 원수들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디에 있어도,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성전을 그리워하며,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그 쪽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명절 곧 유월절과 오순절과 장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한 마디로 다니엘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사는 삶은 바로 하나님의 집에 가서 드리는 예배 중심의 삶입니다.

예배를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최고의 가치 worth’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것은 ‘예배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가치가 있는 삶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출세하고 성공하는 일이라’고 말하는데, 이 세상에서 영원불변하는 참된 가치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우리 생애에 있어 최고 절정의 시간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축복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드릴 때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천하보다 가치 있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사실을 알기에,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8절) 간구한 후에 이미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응답하여 주실 것을 믿고,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10절)고 노래합니다.

“문지기로 있다”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히스토펩인데, 그 뜻은 ‘문지방에 앉다’입니다.

 문지방은 가장 미천한 자리입니다.

 문지방은 종이나 노예들이 앉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10절 말씀‘불신자들 가운데서 최고의 자리에서 영예를 누리고, 평생을 즐기며 사는 것보다, 비록 미천할지라도 하나님의 문지기로, 성전을 중심하여 살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 하루를 사는 것을 더 기쁨으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인이신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의 자리이며, 그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받는 은혜의 통로인 이 예배를 형식적으로 의무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나와 앉았다가 가면 기쁨과 감격을 얻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세상에서 나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평가됩니다.

 직장에서는 직위로 비교되고, 학교에 가면 성적으로 비교되어지고, 사회에 나가면 가진 소유로 인격이 평가받고 대접을 받습니다.

 사는 집의 평수의 크기로 빈부가 결정되고, 사람들의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목사도요, 교인의 숫자로 평가받고, 목회의 성공 여부를 판단합니다.

 이 세상은 상대적 가치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일 대 일로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축복하십니다.

11절은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 하실 것임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의 통로로 구별된 성도에게는 반드시 천국에서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축복으로 받도록 이끄신다.’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살아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구별되어 사는 성도에게는 이 땅에서도 늘 영과 육신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셔서 성도들로 하여금 기쁨과 감사함이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는 가진 것 없고, 배우지 못하고, 제대로 된 기술 하나 없으면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축복된 삶을 살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게 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보혈로 값을 치루시고 인친 성도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합니다.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 담긴 존귀한 존재요, 온 세상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있는 생명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얼마나 존귀한 보배인가’를 알아야 하며,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살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 자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이 나에게 주신 가장 큰 은혜의 시간이요, 축복을 받는 시간이요, 가치 있는 시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사는, 하나님의 궁정에서의 이 한 날이 가장 행복한 시간임을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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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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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agaser | 작성시간 12.02.04 최목사님 감사합니다.
  • 작성자전호위 | 작성시간 12.03.14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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