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말씀을 주님의 음성으로 듣는 양들
요 10:1-27
1971년 8월 20일 로이터 통신은 어이없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휴가를 받아 홍콩을 여행 중이던 스위스 사람 부부가 저녁 식사를 위해 중국 요리 집에 들렀습니다.
스위스 사람 부부는 독일어 외에는 할 줄 몰랐고, 그 중국집 웨이터는 중국어만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문한 음식이 마침 나와서, 그 스위스 사람 부부는 데리고 다니는 강아지를 가리키며 ‘밥을 좀 먹여 달라’고 손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밥 먹여 달라’는 시늉을 했습니다.
웨이터는 금방 알아듣겠다고 OK를 연발한 후, 스위스 사람이 데리고 다니는 강아지, 후들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스위스 사람 부부가 식사를 끝마치고 후식까지 끝마쳤을 때, 웨이터가 데리고 갔던 강아지 후들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접시 한 개 위에 요리가 되어서 말입니다.
동양에서는 ‘밥을 먹으라.’는 시늉으로 밥을 입에 넣는 동작을 합니다. 그렇지만 서양 사람들은 ‘밥 먹는다.’는 표현을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 들고 고기를 써는 시늉을 합니다.
중국말을 할 줄 몰랐던 스위스 사람 부부는 몸에 밴 대로, ‘그 강아지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포크와 나이프로 써는 흉내를 내며, 손가락으로 강아지를 가리켰는데, 중국집 웨이터는 ‘그 강아지를 칼로 썰어서 가지고 오라’, 곧 ‘요리를 해서 가져오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빗어졌던 마음 아픈 오해였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이렇듯 오해가 생깁니다.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이와 같이 웃지도 못할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특별히 자신을 선한 목자로 밝히시고 계십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당신이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 합니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하시오.”(24절)라고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강압적인 자세로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11절)고 단호하게 선포하십니다.
한편 종교 지도자요,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는 “너희들이 절도요, 강도며, 삯군 목자라”고 우회적으로 질책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을 알아듣지를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절도, 강도, 삯군 목자라’고 비방하고, 자신만 '선한 목자'라고 하는 예수님에 대한 반감이 더 깊어져서, 예수님을 “귀신들려 미쳤다”(20절)고 몰아세웠습니다.
이런 중에 예루살렘에 겨울철이 되었고, 수전절이 되었습니다.(22절)
수전절은 성경에 기록된 절기는 아닙니다만, 유대인들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날입니다. 마치 3.1절같이 귀중하게 여기는 날이 수전절입니다.
기원전 168년에 시리아 총독인 안티오크스 에피파네스는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귀중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을 마구 더럽혔습니다.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돼지고기를 성전 제단에 올려놓았고, 율법 책을 태웠고, 유대인들을 죽여 성전을 피로 얼룩지게 만들었습니다.
평소에 광신적으로 헬라문화에 도취되었던 안티오크스는 유대를 헬라 화하기 위하여 유대교 말살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율법 책을 가졌거나, 할례를 하는 자들은 사형시켰습니다.
심지어 자식에게 할례를 받게 한 어머니는 아들을 목에 매달고 십자가에서 처형했습니다.
이런 안티오크스의 만행에 유다 마카비우스와 그의 아들들이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기원전 164년의 일입니다.
안티오크스를 죽이고, 시리아 군을 격파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정화하고, 새 제단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유다 마카비우스에 의하여 봉헌된 그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된 날이 수전절입니다.
그래서 수전절은 영어로 'the Feast of Dedication'이라고 불립니다.
곧 '봉헌의 축제'라는 뜻입니다.
요사이에는 '하누카 Hanukkah'라는 말로 더 많이 불립니다.
대체로 이 수전절 축제는 12월 중순부터 8일 동안 계속됩니다.
각 가정마다 작은 병에 깨끗한 기름을 담아 불을 밝혔습니다.
첫 날에는 한 개의 등을 달았고, 둘째 날에는 두개, 이런 식으로 마지막 여덟 번째 날에는 여덟 개의 등을 달아서 어둔 밤을 밝혔기에, 이 절기를 '빛의 축제', 즉 'the Feast of Lights'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 빛의 축제, 곧 수전절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은 안타까운 심정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는 예수님을 에워싸고 또 물었습니다.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확실하게 말해 주시오?"(24절)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아직도 의구심이 많았던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정말 안타까운 심정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이제까지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었는데도 믿지 아니 하는구나. 이제까지 내가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일들이 바로 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증거하는 것인데도, 그것을 보고도 믿지 못하느냐?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은 내 일이 미심쩍어서도 아니요, 내 말에 확신이 없어서도 아니다. 한 가지 이유, 그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에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25-26절)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에게 한 말씀을 더 하셨습니다.
‘누가 내 양들인가? 다음 특징을 가지고 있는 양들이 바로 내 양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이 부족해서도 아니며, 오직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인 것으로 말씀하시며, ‘어떤 양이 예수님의 양인가’를 오늘 본문 27절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의 양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내 양은 자기들의 주인인 내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나는 내 양들을 안다.’고 말씀하셨고,
세 번째로, 예수님은 ‘내 양들은 주인인 나를 따르는 양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말씀을 주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예수님의 양들에 대한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주님의 음성으로 듣는 양떼들입니다.
예수님의 양들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특징은 '예수님의 말씀을 주님의 음성으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곧 ‘예수님을 믿는 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기억하여 주인이신 예수님을 찾아 따라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놀라운 기적을 많이 베풀었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그토록 확실하게 알려주었음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속한 양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주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 놓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나에게 속한 양떼들의 첫 번째 특징은 나의 음성을 듣고, 기억하고,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듣고, 기억하고, 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주님의 음성으로 선별해서 들을 수 있으며, 의심 없이 예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도 있습니다.
시리아를 방문했던 한 미국인 여행자의 경험담입니다.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양떼를 거느린 목자를 쉽게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 미국인 여행자도 우연히 많은 양들을 치고 있는 목자를 만났습니다.
그 목자는 앞에서 양떼들을 거느리고 갔습니다.
시냇물을 만나자, 그 목자는 양떼들이 놀고 있는 곳을 향하여 ‘메나! 메나!’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라비아 말로 ‘메나, 메나’는 ‘나를 따라 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자 한가롭게 풀을 뜯어먹고 있던 양들이 주인의 그 소리를 듣고, 주인이 있는 물가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호기심으로 쳐다보던 미국인 여행자가 그 목자에게 돈을 쥐어주며, 다음과 같이 제안했습니다.
‘당신처럼 변장해서 양들을 불러도 양들이 내 음성을 듣고 따라 오는지 알아보고 싶어 그러니, 당신의 두건과 지팡이를 제게 빌려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그 미국인 여행자는 주인 목자의 옷과 두건을 쓰고, 지팡이를 잡은 다음, 멀찌감치 떨어져서 양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메나, 메나!’ 몇 번을 불러봤지만, 단 한 마리의 양도 그 미국인 여행자를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그 양들은 모두 주인의 음성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외형만 바뀐 사람의 소리를 듣고는 따라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성도들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야 세상을 주인으로 삼았으니, 세상 말 듣고 세상 뜻대로 살아갈 수 있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양들이니, 너무도 당연히 목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따라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음성으로 알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주님이 되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주님의 음성으로 지금도 우리에게 계속, 계속 들려오고 있습니다.
기록된 언어로 말입니다.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우리 주님 예수님의 살아 계신 말씀입니다.
비록 기록되기는 했어도, 예수님의 말씀은 생동감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우리에게 역사하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참된 양들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거짓 목자, 삯군 목자의 음성을 듣고도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강도, 절도 같은 세상과 이단에게 우리의 생명과 축복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예수님의 양떼들,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참 목자 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공부해야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다음은, 예수님께서 잘 알고 있는 양떼들입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양들의 두 번째 특징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속한 양떼들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저희를 알며”
여기서 “알다”는 말은 ‘기노스코’인데, 이 말의 뜻은 ‘온 마음과 몸을 나누고 함께한 부부가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스치는 손끝 하나로, 품어져오는 입김의 온도로, 속삭이는 말 한 마디로, 은근한 눈빛으로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아는 것이 기노스코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이 자신에게 속한 양떼들을 그렇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의 전적인 피 값으로 사신 양떼들이기 때문입니다.
공짜로 얻은 양떼들이 아닙니다.
양들이 절벽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질 때에 예수님이 피 묻은 자신의 손으로 양들을 직접 안전한 곳으로 올려 주셨기에 양들을 기억하십니다.
때로 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주님의 음성으로 못 들은 체하며, 딴 길로 가다가 생명의 길을 잃었을 때에,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늦은 밤까지 찬바람을 맞으시며, 산 넘고 물 건너 양들을 찾으러 골짜기를 다니시면서 양들을 구해 주셨기에, 예수님은 자신에게 속한 양떼들의 이름과 특징을 모두 아십니다.
값을 치르신 것은 공짜로 얻은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로 그 양들입니다. 예수님의 양들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값으로 치르고 사신 우리 주님 예수님의 재산은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기에, 우리 모두는 주님에게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우리 모두를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은 주님의 소유 된 우리의 약함을 다 아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그 강하신 팔로 연약한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양은 방어 능력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마 10:16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자로 파송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양 같은 우리는 너무도 연약하기에 죄를 범하기도 쉽습니다.
기진하여 길에서 쓰러질 때도 많습니다.
온순하기에 이리의 꼬임에 쉽게 넘어가 사경에 빠지기도 합니다.
연약한 양인 우리에게는 선한 목자의 절대적인 보호하심이 필요합니다.
바로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만이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 10:3에서 예수님은 목자가 양떼를 우리 안에서 불러낼 때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양 된 우리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든든한 일인지 모릅니다.
제가 괴산 연풍중앙교회에 있을 때 어린이 연합 성경학교를 했습니다.
성경학교를 하기 전에 제게 속한 학생들의 명단을 받습니다.
성경학교 전날 틈을 내어서 학생들의 이름을 다 외우고, 성격과 특징 등을 제출한 신청서를 통해서 학생들에 대해서 미리 알아둡니다.
그리고 성경학교를 시작하면, 제가 제게 속한 아이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얼굴을 둘러보며, 전날 암기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성격, 특징 등을 기억해서 말해주면, 아이들이 그렇게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진아, 성진이는 자전거를 그렇게 잘 탄다면서, 동생 성민이도 잘 타니?’ 이렇게 말해주면, 성진이는 목사님이 자기의 이름과 얼굴을 알아주는 것만 해도 황송한데, 자전거 잘 타는 것과, 동생 이름까지 알기에, 그때부터 나는 신처럼 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은 자신에게 속한 양떼들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피 값으로 사신 양떼이기 때문입니다.
요 10:11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계속해서 15절에서 또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양떼 된 우리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주님이시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알아주고, 기억해주고, 그리고 끝까지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속한 양떼 모두를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이 알아주는 예수님의 양떼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삼고, 따르는 양떼들입니다.
예수님께 속한 양떼들의 세 번째 특징은 '예수님의 양떼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고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따른다.’는 것은 ‘누군가가 앞서 간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의 앞에서 인도하시고 이끄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멘토이신 주님이십니다.
요 10:4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님은 앞서가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앞서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위험이 있어도 우리의 앞장서 가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두움을 헤쳐가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갈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 앞서 가시는 인도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해 앞서 가시는 멘토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앞을 가로막는 대적들을 물리치시기 위하여 앞서 가시는 대장이십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의 말씀을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따라가는 양입니다.
대상 14장에서 블레셋과의 일전을 앞두고, 하나님은 그의 사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리라"
하나님은 우리보다 앞서 나가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예수님은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인도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양들은 본래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양들에게는 늘 목자의 도움이 필요한데, 서양에서는 대체로 양몰이와 소몰이의 경우 개를 앞장세우고, 목동들은 뒤에서 몰아갑니다.
그렇지만, 동양에서는 그와는 반대로 ‘목자가 직접 앞에서 양과 소를 몰아간다.’고 합니다.
양들이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순종과 인내로 가능합니다.
양들은 때로는 험한 돌길을 걸을 수도 있습니다.
양들은 골짜기를 건너고, 산을 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목자이신 예수님은 ‘험한 돌길을 지나고, 골짜기를 건너고, 산을 넘으면 거기에 마음껏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푸른 초장이 있고, 마음껏 마셔 기갈을 해소시켜줄 쉴만한 물가가 있다’는 것을 다 아시고, 양들을 그리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간에 양들은 ‘목자를 믿을 수 없다’고, 혹은 ‘너무나 힘들다’고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양들은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묵묵히 따라가야 합니다.
양들은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또한 인내함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미국 뉴저지 주에서 묘석을 파는 한 회사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개발해냈습니다. 묘석에 태양전지와 컴퓨터 칩을 내장시켜, 고인의 업적을 녹음하는 기술이 개발 된 것입니다.
죽은 망자가 정치가였다면, 그의 명연설을 녹음시킵니다.
죽은 목사의 명 설교, 죽은 교수의 명 강의, 죽은 가수의 히트 곡을 녹음해서 무덤가에 찾아온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죽은 자들의 무덤에서 고함치는 정치 연설이 터져 나온다거나, 은혜로운 설교가 들려진다거나, 그리고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강의하는 음성이 여기저기서 빗발친다면 어떻겠습니까?
한 밤중 묘소에서 죽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가 요동치듯 들린다면 그 소음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소리로 말미암은 공해가 엄청납니다.
무덤에서까지 그 소리 공해에 한 몫을 더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죽은 자들의 소리는 그대로 묻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유족들에게나 간절한 음성이지, 유족 아닌 타인에게까지 공해란 이름으로 고통스럽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대를 초월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반드시 들어야 할 소리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죄인이었던 우리를 의인 삼으시기 위하여 부르시는 음성이십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 시대에조차, 예수님을 만나보고, 예수님을 통하여 기적을 두 눈으로 직접 봤던 사람조차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불신은 예수님의 말씀에 설득력이 부족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에 힘이 부족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단 한 가지 이유, 그들이 예수님께 속한 양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 소유의 양들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 영생의 주인으로 인정할 수가 없었고, 주님으로 영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불행한 사람들을 앞에 두시고, 지금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나를 믿지 아니 하는 도다."
누가 예수님의 양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분별하고 아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양이 됩니다.
예수님의 양떼들의 첫 번째 특징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떼들의 두 번째 특징은,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값으로 치르고 산 양떼들을 기억하시고,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양떼들의 특징은, ‘그렇게 사신 주님의 양떼들은 참 목자 되신 예수님 말씀만을 순종하며 따른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의 양들, 곧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에 거하지 못하는 양들의 특징이 설명됩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며, 예수님이 기억하지도 알지도 못하고,
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며 따르지 않는 양들!
이런 양들은 예수님께 속한 양떼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늘푸른교회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참된 양이 되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축복으로 주신 생명의 푸른 초장과 평안의 쉴만한 물가에서 살기 위하여 2012년 2월 첫 주부터 찬양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주님의 음성으로 들어 예수님께 속한, 예수님 소유의 양들이 되십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음성으로 기억하십시다.
온전히 예수님의 양떼만이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알아주는 양들이 되십시다.
그리고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과 겸손, 그리고 인내로 따르는 양들이 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푸른 초장의 생명의 축복과 쉴만한 물가의 평안의 축복을 하나님의 뜻대로 누리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