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우리가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출애굽기 5장 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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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120년을 살면서 40년씩 3등분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처음 40년은 이집트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지냈고, 두 번째 40년은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으로 40년을 보냈고, 마지막 40년은 이스라엘을 이끄는 지도자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모세의 일생을 보면 하나님이 한 인간을 어떻게 선택하시고, 세우시고, 다루어 가시는지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 형인 아론과 함께 이집트 바로왕을 만나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말씀을 전해주는 장면입니다. 말씀을 들으 실 때,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예배의 회복, 그리고 고난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회복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절에,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라는 말씀을 짧은 시간으로 보면, ①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후에, ②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 내라는 사명을 주신 후에, ③ 할례 문제로 모세의 두 아들을 죽이려고 한 사건 후에, ④ 하나님이 아론을 보내셔서 호렙(시내산)산에서 모세와 아론이 만난 후에,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있은 후에 라는 뜻이 됩니다.(출 3~5장)
“그 후에”라는 말씀을 아주 긴 시간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지낸 지 430년이 흘러, 노예가 되어 모진 탄압과 고된 노동에 시달릴 때,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은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 후에(출 2:23) 라는 뜻이 됩니다.
짧은 시간으로 보든, 긴 시간으로 보든 “그 후에” 라는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이르라엘 백성의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으셨다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고 사명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 후에”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있은 “그 후에” 라야, 하나님ㅇ의 말씀 하심이 있은 “그 후에”라야,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은 “그 후에” 라야, 모든 상황에 변화가 일어 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그 후에”라야 비로소 은혜와 평안을 누리며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전에 내 자신의 의지와 결단을 앞세우려고 합니다. 지금 당장 이것을 하지 않으면 큰 일 날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이것을 취하지 않으면 큰 손해 볼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이것을 결정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것 같습니다. “그 후에” 가 아니라, “그 전에” 무언가 하려는 조급함이 모든 일을 망치게 됩니다.
좋아 보이는 열매나 꽃에 독이 묻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심을 가리우고, 인간의 이성이나, 의지를 앞세워 잘 못 선택하게 만드는 달콤한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하와가 사탄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보았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창 3:6)처럼 보였습니다. 성령으로 분별하고, 기도 응답으로 결정하는 습관이 되지 않으면, 누구라도 선악과를 덜컥 따 먹을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라는 말씀 안에는, 무언가 선택하고, 실행하고, 결과를 만들어 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더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과의 원활한 소통을 이루는 관계의 개선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은 참이며 진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계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도 않고, 영광 받으시지도 않고, 기억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그냥 자기 만족, 자기 자랑, 자기 교만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는 모든 신앙 생활 가운데 “그 후에” 움직인다는 기준을 정해놓고 실천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존재 하심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인생에 가장 큰 변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일생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능력(지팡이)을 받았습니다. 함께 할 동역자(형 아론)도 얻었습니다. 그리고 난 “그 후에”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부르심, 일하심의 과정이 우리에게도 일관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소한 일을 하더라도 “그 후에” 진행 하겠다는 기준을 철저하게 지켜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시기 이전에 “청종(듣고 순종하는)” 하는 자녀를 가장 사랑하시고 복과 은혜를 주신다고 성경 전체에서 무한 반복하여 들려 주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 분들에게 이 말씀을 권면하기 전에 “그 후에”라는 말씀은 가장 먼저 목사인 내 자신에게 먼저 적용되어야 함을 고백합니다. 저는 성격이 급한 편입니다. MBTI도 ‘INFJ’유형(예언자형-창의력, 통찰력, 독창성과 내적 독립심이 강하며, 확고한 신념과 열정으로 자신의 영감을 구현시켜 나가는 정신적 지도자들이 많다. 사람중심의 가치를 중시하는 성직, 심리학, 문학분야) 이라, 매사에 계획적이고 논리적으로 풀어가려고 합니다.
성격이 이렇다 보니, 무슨 일을 생각하면, 머리에서는 이미 그 일에 대해서 진행해야 할 스토리가 좌악 펼쳐집니다. “그 후에” 라는 말씀을 뒤로 제쳐두고, 이미 내 머리와 마음이 마구 요동을 칩니다. 이러면 안 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일처리를 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망하는 지름길이 됩니다. 저부터, 기도에 더 집중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에 열심을 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살아가시면서 하고 싶은 일, 갖고 싶은 것, 소원 하는 것들 많으시죠.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여러 가지 문제와 상황 속에 놓여있고, 잘 안 풀리고, 답답하는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해결하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겠습니까? “돈이 최고야,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어” 만에 하나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다면, 망하는 길로 직행하시는 사탄의 유혹임을 간파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힘쓰고, 애써야 할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관계 개선을 좋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잘 소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도록 이것 저것 소원을 잘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어 가는 시간을 계속 늘려가고, 시간 시간 마다 집중하는 훈련과 습관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온전이 회복 되면, “그 후에” 일어날 상상하지 못할 능력과 은혜와 역사의 시간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기 전에 430년 간이나 애굽에 있으면서 피 눈물 나도록 부르짖었다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죄송한 말씀이지만, 우리도 부르짖고, 참고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것이 없습니다. 그 기다리는 시간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개선되고, 좋아지고, 원활해 진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소원에 응답하시는 기적의 시간이 올 것임을 굳게 믿습니다. 늦는 것 같지만, 그 시간이 가장 빠른 시간이고, 정확한 시간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들은, 오늘 이 시간 이후부터, 내 일생에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목적과 기준을 재 정립 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의 개선, 즉 하나님과의 화목의 시간을 갖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로 인해, 명령하시고, 능력 주시고, 좋은 환경과 시간을 정해 주실 때까지 그 어떤 것도 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 받고 “그 후에” 일어나는 말할 수 없는 은혜와 평안의 시간을 맞이하는 믿음과 순종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찾아가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1절) 라고 말했습니다. 예상 했던 대로 바로는 들은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기에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야 한단 말이냐? 나는 여호와를 모르니 이스라엘도 보내 주지 않겠다.”(2절, 우리말성경). 보내 주기는커녕 실컷 비웃고 조롱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바로가 단호하게 거부한 것은 예상 했던 일이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고 하신 목적이 무엇이었느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나아가서 제사를 지키게 하기 위해서”,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는 명분과 목적이었습니다. 바로의 입장에서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공허한 요구로 느껴졌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우리가 보기에도 이스라엘 민족, 그들만의 제사를 지키기 위해서, 수백만명이나 되는 노예집단을 아무 조건 없이 그냥 보내 달라, 풀어달라는 요구를 했다는 것이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요구들이 얼마든지 있었을 터인데 이렇게 단순하면선서 지극히 종교적인 이유 하나만을 앞세워 그토록 엄청난 구원의 역사를 이루려 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의아 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들은 전부 다 인간적인 생각들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하지 않으면 매사가 의심스럽고, 만족함이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보다 무지하고 지극히 한계적인 인간의 짧은 생각을 앞세우면, 그 어떤 것도 안 될 것 같고, 무모한 시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렇게 말하라고 명령 하셨을까요?
3절에서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다시 말하기를,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분명하게 말씀 하셨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 합니다.
실제로 출애굽기 3장 18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사명을 주실 때에 말씀 하시기를,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 이렇게 말하라고 알려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바로에게 그대로 전해준 것 뿐입니다.
‘사흘길’이라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고대에서는 ‘하룻길’을 이라는 거리를 대략 30~50km라고 계산 합니다. 사흘길은 90~150km정도의 거리를 말하는데, 이 거리는 애굽에서 시내산 까지의 거리를 의미합니다.
‘제사를 드리러 간다’는 표현에서, ‘제사’라는 말의, 원어(히브리어)는 ‘희생(히-자바흐, 영-sacrifice)을 말합니다. 즉, 모세가 바로에게 요구한 것은, 가축을 잡아서 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사흘 길 거리 정도의 광야로 보내달라는 요구 였습니다.
희생 제사는 곧 현 시대에 드리는 예배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 진정한 예배의 삶을 회복 시켜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예배의 온전한 회복,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탈출 시키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이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진실한 마음을 읽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뜻에, 명분과 목적에, 내 마음을 정확하게 일치 시켜야 합니다. 지금 이 어려운 코로나 시기에,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외쳐야 할 가장 큰 목소리는, “우리가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라는 강력하고도, 간절한 예배의 부르짖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귀를 열고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에도 큰 소리로 명령하고 계십니다. 어떤 소리가 들리십니까? “너는 지금 당장 몸과 마음을 움직여라, 광야의 자리, 예배의 자리로 즉시 나아가라, 내가 그 곳에서 너희를 기다리고 있노라”, 이렇게 말씀 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를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천둥처럼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억압받고, 고통 받고 있는 자들이 그 고통과 속박에서 하루 속히 풀려나기를 원하시는데, 그 목적이 단순하게 몸의 자유만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온전한 예배를 드림으로, 온전한 회복의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함이십니다.
430년 동안 고통에 갇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육체적 자유를 얻는 것, 그러한 물리적인 해방을 맞이하는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찬양과 기도와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을 온전하게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예배가 멈추는 것, 예배가 예배 되지 못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몸의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이유는, 곧 예배자로 살아가라는 우리 주님의 명령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나아가서 제사를 지키게 하기 위해서” 바로에게 말하라고 하셨는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영광 돌리는 것은 온 우주의 피조물들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속 되어야 할 최고의 가치입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우리가 광야로 나아가게 하소서”, 출애굽의 명령과 인도는 바로 이 두 마디 였습니다. 우리 00교회 모든 성도는, 지금 당장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이 영적인 예배의 회복임을 명심하시고, “우리가 광야로 나아가게 하소서” 큰 소리로 외치시면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바로는 역시나 모세와 아론의 말을 또 다시 듣지 않앗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전염병이나 칼로 진노하실 것이라는 경고도 무시해 버렸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동을 더욱 가혹하게 하여 버티기 힘들정도의 고된 노역을 부과했습니다. 또한, 모세와 아론이 말하는 다 거짓말이다라고 규정하고, 그 거짓말을 듣는자, 듣고 딴 마음을 품는자, 듣고 소문을 전하는 자, 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않아도 견디기 힘든 고된 노역에 오랫동안 시달려왔는데, 모세와 아론 때문에 더욱 힘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 대해 분노하며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은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광야로 나아가게 하소서” 라는 말은 더 이상 꺼내지도 말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눈 앞에서 사라져 달라는 강경한 입장이었습니다.
지난 로마서 8장 설교에서도 고난과 영광에 대해 말씀 드렸지만, 우리 모두는 당장의 고난, 현재 피부로 느끼고 있는 당장의 고난을 생각하면, 나타날 미래의 영광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장의 고난이 가중되는 현실이 너무나도 힘들고 죽을 지경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행동이었지만, 참으로 안타깝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참으로 답답한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면 어떻게 반응 했을까? 우리 가족들 이라면? 우리 교회 성도들이라면?, 우리나라 사람들 이었다면? 이렇게 넓혀셔 생각해 보면, 모든 경우에서도, 당장의 어려움 때문에, 모세와 아론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많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당장 얻어지는 이득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크고 힘센 권력자의 목소리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 쉽습니다.
민수기에서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기를,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 번 결정 하셨으면, 반드시 그 일을 실행에 옮기십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좋지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한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묵묵히 그 행하실 일들을 다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확고하게 약속을 실행하시는 이유는,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고난 받는 인생들의 시간 위에 항상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통 받는 자의 눈물, 땀, 애원, 통곡, 분노, 좌절, 처절한 부르짖음 가운데 우리 하나님은 한 시도 눈을 돌리지 아니하시고 다 보고 계시고, 한 마디도 놓치지 아니하시고 다 듣고 계십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만난 모세에게 말씀 하시기를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7,8) 하셨습니다.
내가,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듣고, 근심을 알고 있다는 말씀도 너무나 은혜가 되지만, 하나님이 직접 내려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시겠다고 하십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 서서 말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그들과 함께 하고 계셨던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세밀하게 점검 하시면서, 직접 우리의 손을 붙잡으며 위로 하시고, 평안으로 인도해 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고난에 항상 함께 하시고, 그 고난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언제 이루어 질지 모른다고 해서, 원망하거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나를 결코 떠나지 않으시고, 모든 고통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감사하고, 소망하는 마음으로 견뎌 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당장 우리에게는 과거의 평온의 일상으로 언제 돌아갈지 기약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상황을 다 지켜 보고 게시고, 우리의 힘든 생활에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붙잡으십시오. 하나님이 직접 나에게 오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가심을 굳게 믿으십시오. 반드시, 반드시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로 찾아 오실 겁니다. 이것이 말씀이 주시는 약속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은, 지금 당장 눈물 흘리며 쓰라리고 아플지라도, 점점 고통이 심해져 간다고 할 지라도, 다 보고, 다 듣고, 다 알고, 직접 나에게 오실 나의 하나님, 전능 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십시오.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고통 가운데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동행하여 주시는 은혜를 받으셔서, 끝까지 이기고, 참아내고, 결국에는 모든 면에서 승리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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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내려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고통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온전히 신뢰하며, 믿음으로, 인내로, 능력으로 이겨나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배로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