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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 대한 증거

작성자열려라 하늘문|작성시간24.04.27|조회수198 목록 댓글 0

요한복음 530~47/예수님에 대한 증거

 

오랫동안 제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영적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예수님 당시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심지어 신성 모독죄로 십자가에 죽인 것입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걱정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오신다면, 나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까? 예수님이 정규 신학교를 다니시지도 않으셨고, 죄인들의 친구라는 소문도 들리고, "내가 하나님이다.“ 하고 말씀하실 때, 나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당시에 누구보다 성경을 많이 알았고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슨 증거로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적어도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이 짧은 본문에 증거라는 단어가 동사와 명사 형태로 12번이나 나옵니다(헬라어로는 11). 오늘 본문은 우리 주님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를 다루고 있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1. 무슨 증거로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기본적으로는 인식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해서 알고, 공부해서 알고, 천부적으로 안다고 말할 수도 있고……이처럼 안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아느냐 하는 문제를 수반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영생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3).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때도 어떻게 아느냐고 하면 그냥 안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말입니다.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17~29절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의 요지는 아들인 나를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들인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아들이신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순수한 방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가령, 제가 목사 됨을 증명하기 위해서 교단 총회로부터 목사확인 증명서를 받아야합니다. 그러면 목사확인 증명서를 통해서 제가 목사임을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사확인 증명서가 조 병열이란 사람이 목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순수한 방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거기 찍힌 도장들을 보라고 할 것입니다. 총회의 직인이 있고, 총회장의 도장이 있고 총회에서 목사확인 증명서를 보냈으니 진짜라고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와 유사합니다. 어떻게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지, 당신의 존재가 하나님을 아는 확실하고 분명한 방편임을 증명해 주십시오. 라고 할 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본문 30-32절에서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 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결국 이 논쟁은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신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가? 하는 싸움으로 이제 비약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논쟁으로 인하여 결국은 나중에 예수께서 신성 모독죄라는 죄명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됩니다. 참람죄, 즉 인간으로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 되게 여겼다는 죄를 범한 것으로 십자가의 형을 선언하였습니다. 지금 당장의 싸움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30) 그런데 뒤에 가서 보면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25~26) 오늘 요한복음 530-32절을 읽어보면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더 많이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자제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것 때문에 '네가 정말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라면 감히 어떻게 안식일을 범할 수 있느냐?' 하고 힐문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느닷없이 이런 대답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17~18)라고. 말씀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고유 성함이 여호와라고 밝혀진 것은 요즈음에 와서입니다. 사실은 여호와라는 이름도 정확한지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성경에 하나님이란 단어를 기록할 때마다 모음만 쓰고 자음은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뜻은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성경을 기록하다가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말씀을 쓰던 서기관들이 쓰던 붓을 물에 빨아서 다시 썼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기만 하면 꼭 그렇게 해야만 했고 성경을 읽다가도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면 여호와라고 읽지 않고 아도나이라고 읽었습니다. 아도나이라는 말은 '나의 하나님' 또는 '나의 주'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어른들의 성함이나 부모님의 성함을 남에게 알려드려야 하거나 불러야 할 때는 ‘000'라고 쓰고 부릅니다. 만일 누굽니다라고 가볍게 함자를 댔다가는 예의가 없는 자라고 멸시를 당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별 짓는 이스라엘의 관습 아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도나이'로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고 불렀으니 유대인들은 충격은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스스로 할 수 없고 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듯대로 행하려고 한다.'(30) 말씀합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이유가 충분하지 않느냐? 하고 대답을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러한 대답 정도로 만족하시지 않고 내가 더 할 수도 있지만 참고 있는 것이다.’(30) 라는 뜻으로 비약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질문이 들어오면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위의 것으로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물으면 또 그보다 더 위의 것을 답을 하셔서 질문 공세자들이 한없이 쫓아가다가 지칩니다. 자신들의 질문보다는 대답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는 우리에게 대단히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제일 시비를 많이 거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성경은 과학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과학적으로 안 맞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과학적인 질문 자체가 우스운 것입니다. 수학적인 계산과 분석적인 차원에서 성경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입니다. 신령한 차원의 세계를 육신적 차원으로 낮추어 이해하겠다는 시도 자체부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발 앞에 빛을 비추신다는 느낌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 빛은 우리가 디디고 있는 발밑을 비추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면 또 다음 한 걸음, 그 앞을, 이렇게 비추어주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31~32)31절에서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니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겸손의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하나님이시며, 진리이시기에 주님이 주님 자신에 대해서 증거 하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합당하며 참된 것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요한복음 813절에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14절에서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을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말씀합니다. 주님은 스스로 증거 하셔도 그 증거가 참되지만, 31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버지를 떠나서 주님이 스스로 독자적인 증거를 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들로서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시고, 한 순간이라도 아버지와 떠나서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않으시는데, 이는 당신 자신을 증거 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816절에서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은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하고 말씀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증거 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데, 그분은 바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증거해 주고 계시며 그 증거가 참되다는 것입니다(32). 증거의 내용은 예수님의 신성이 아니라, 육신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하나님의 보냄을 받으신 분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무엇을 증명하려고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증명하고자 하시는 것은 주님 자신이 하나님이시다. 라는 주님의 신성이 아닙니다. 주님이 증명하려고 하시는 것은 주님이 하나님의 보냄을 받으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드러내셔야 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를 보내셨으며 하실 사명이 있으시고 그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 것은, 주님은 당신의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증명하는데 힘을 쓰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려고 했다면 공생애 초기에 금식하셨을 때 마귀의 요구대로 돌로 떡을 만드셨을 것이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핵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기적을 보여주어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종 우리의 자존심과 신앙이 섞여서 내가 무엇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기억할 것은 신앙은 우리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이렇게 잘 됐다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내게 살게 하신 삶을 삶으로써 나를 보내신 분이 계시며, 내 인생의 주인이 계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보다 중요한 핵심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를 증명하고 들어내기 위해서 신앙을 이용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지신 관심은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셨다는 것이며, 보냄을 받아 할 일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증거가 무엇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을 증거 하십니다. 그 증거의 방편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침례 요한, 둘째는 주님이 하시는 일, 셋째는 성경입니다. 이 세 가지가 다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지 못한 것에 대한 핑계를 댈 수 없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1)침례 요한의 증거(33~35)지금 예수님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유대인들은 침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내서 네가 누구냐고 물었던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1:19). 그때 요한은 진리에 대해서 증거 했습니다. 그 진리는 바로 주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침례 요한의 증거를 붙잡거나 의지하지는 않으셨습니다(34).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이렇게 침례 요한을 통해서 증거 하시는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 증거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34). 믿음은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를 들음으로써 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요한의 증거를 통하여 요한의 제자 중 요한과 안드레는 그렇게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을 우리가 이미 보았습니다.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었습니다(35). 그는 빛 자체는 아니었지만, 그 빛을 받아서 비추는 등불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잠시 그 빛에 거하기를 원했습니다. 즉 요한이 메시야를 증거 했을 때 사람들은 메시야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기들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습니다. 35절에 한때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본질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특별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구원하는 믿음, 참 믿음은 결코 일시적으로 교회에 나오거나, 일시적으로 헌신을 하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인내하는 믿음임을 성경은 일관성 있게 가르치고 있고 여기서도 그런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메시야이신 주님께서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자, 그들은 곧 다 떠나간 것입니다.오늘날에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기독교 복음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교회에 들어옵니다. 그때 나름대로의 기대가 있습니다. 교회가 그들의 기대에 미치는 메시지를 전하고 가르칠 때 그들은 일시적으로 즐겁게 교회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복음이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짐에 그 중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그들은 더 이상 교회에 머물기를 원치 않거나 아니면 자기의 기분을 좋게 해줄 수 있는 메시지를 찾아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이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여기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원하는 메시지를 찾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듣기를 원하십니까? 이것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의 증거가 아버지께로 온 증거임을 말씀하시지만, 이보다 더 큰 증거를 두 번째로 이야기하십니다.2)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사 하게 하신 일/표적(36)보다 큰 증거로 두 번째 증거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36). 주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은 되는대로 하신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드러내시는 의도된 행동들이었고, 그 자체가 행위로서의 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하시는 일은 곧 행동화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적은 그 자체가 하나의 상징입니다. 무엇인가 실재를 가리키는 표시입니다. 그 실재란 바로 주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보여주고 증명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표적입니다. 주님은 첫 표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으로 참된 기쁨을 가져다주시는 것이 메시야의 사역의 본질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심으로써 주님은 죄와 질병을 고쳐주시는 분이심을 보이셨습니다. 베데스다 못의 38년 된 소망 없는 병자를 고침으로써 우리가 영적으로 완전히 무능한 상태에 있을 때 우리를 주권적으로 찾아와서 구원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일은 당신 자신을 주심으로써 우리 영혼의 굶주림을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알게 해주신 사건입니다. 소경으로 난자를 고쳐 보게 해주신 사건은 세상의 빛으로 오사 영적으로 눈먼 자들의 눈을 열어 주님을 보고 구원을 얻게 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써 부활이신 주님께서 결국 죄의 결과인 죽음을 이기실 것을 보여주십니다. 이 모든 표적은 하나같이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싸인(sign)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표적들을 보고 나를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표적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인 것입니다.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 하나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기적 자체는 그 일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께로 왔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단도 이런 일을 행할 수 있고 또 행합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에서 기적과 표적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표적은 주님이 누구신지 그 본질에 대해서 가르쳐줍니다. 기적이 반드시 믿음을 자동적으로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표적을 주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표적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분별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믿음은 강화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를 아버지의 증거로 제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최상적이고 가장 확실한 증거를 남겨두고 있습니다.3)기록된 말씀: 성경(37~39)최종적이고 가장 확실하고 결정적인 하나님의 증거는 바로 성경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성경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부분은 37절부터 마지막 47절까지입니다. 성경을 가리켜 주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신 것’(37)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 듣던 유대인들은 물론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 당연합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저자를 위하여 친히 증언하셨다는 말인가? 우리 중에 누가 그 소리를 들었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십니다(37).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셨고 또 형상을 들어내 보여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이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신 선지서입니다. 문제는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38). 그분이 보내신 자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것은 동일한 것이며, 구분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왜 중요합니까? 오늘날 예수님을 믿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증거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친히 하신 증거입니다. 성령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오류가 없게 쓰게 하셨다는 것이 바로 친히 하신 증거라고 하시는 근거입니다. 주님은 39절에서 성경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성경은, 특히 여기서 가리키는 구약성경은 일관성 있게 그리스도 자신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가리키는 목적을 수행합니다. 이것을 간파한 마르틴 루터는 모든 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성경을 헛되게 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편도, 잠언도, 구약 역사서도, 선지서도 다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키기 위해서 쓰여진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여러분이 주님을 더 알기를 원하신다면 기적을 구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 여러분이 존경하는 사람이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설명해주는 것만으로도 결코 여러분의 인생을 걸만한 증거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게 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분의 확신은 점점 더 견고하게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구약성경이 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 졌다면 신약성경은 말할 것도 없이 이미 오신 그리스도와 구속사역의 모든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성경을 떠나서 그리스도를 알 수 없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으며, 물론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벤허의 작가인 루 월리스(Lew Wallace)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교회에 다니는 맹목적인 사람들을 깨우치고, 예수라는 인물의 허구성을 파헤치기 위하여, 또 예수에 대한 믿음을 반대하고 성경이 말하는 바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검증하기 위하여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2년 간 성경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2년간의 성경 연구와 검증을 마친 끝에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승리를 찬송하는 벤허라는 작품을 저술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알아 영생을 얻고, 여러분의 믿음이 견고하게 성장해가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열고 거기서 그리스도를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증거인 성경을 열고,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눈을 열어주실 때, 여러분은 말할 수 없이 견고한 믿음으로 성장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3. 핑계는 없다.(1:20)오늘 주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서 제시하신 하나님의 세 가지 증거를 주신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창조주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여러분은 그때 이렇게 말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증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고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더욱 알아 가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영생을 얻고 영생을 누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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