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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공동체 (교회)

작성자열려라 하늘문|작성시간25.09.24|조회수82 목록 댓글 0

요한복음 1925~27/십자가 공동체


1. 십자가 옆에 모인 최초의 제자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던 그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에 십자가 주변에 모여 있던 대다수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나 비록 몇 사람 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이 기록한 것을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누가복음은 그 이름들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 몇 사람에 대한 완전한 목록을 주려고 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의하면 십자가 옆에 있던 사람들을 보면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여인들이었습니다.

25절에, 네 여인이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이모의 존재가 기록된 것이 특이합니다. 다른 두 사람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마태, 마가, 요한복음이 공이 기록한 유일한 인물입니다. 글로바의 아내는 누구인가 하면, 글로바가 알패오와 동일한 사람으로 보아, 예수님의 제자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의 어머니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태와 마가복음에서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쓴 것과도 일치합니다. 여기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차치하고 우리가 요한복음을 통해서 알게 되는 사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십자가까지 따라와 그 옆에 있었다는 것인데, 이 사실은 오직 요한복음만이 이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요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거기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십자가 앞에 선 최초에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 자리에는 당연히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인물들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죽는 데까지라도 따라가겠다고 늘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나 도마와 같은 인물들은 없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도 다 사라져 버렸고 오직 요한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뒷전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여인들, 그러면서도 한결같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소유로 섬겼던 여인들 몇 사람뿐이었습니다(8:3). 언제나 신앙이란 이런 예외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자기의 의지와 육신의 힘으로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만만함이 무너지기 전에는 참으로 주님의 제자로 주님을 따를 수 없는 법입니다.

2.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우리는 마리아가 인간적으로 겪었을 참혹한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성전에 결례를 행하려 할 때, 경건한 시므온이 한 말의 일부를 우리는 여기서 기억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34~35절에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시므온의 이 말이 십자가 사건에서 그대로 응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있어서 이 시간은 아들 예수와 맺고 살아온 지상적인 관계의 모든 것을 끊어야 할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로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할 시간이 된 것입니다. 처음에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처녀 마리아에게 주어졌던 계시(1:26~38), 또 마리아가 침례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을 입어서 그녀에게 한 말(1:39~45), 그리고 조금 전에 우리가 본 시므온의 예언, 또 예수님께서 어머니 슬하에 계실 때 보이셨던 행동이나 말씀들, 그리고 공생애를 이루시기 위해 사역하실 때 보고 들었던 모든 일들을 통해서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았던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이런 모든 것을 우리가 감안한다고 할지라도 마리아에게 지금, 이 순간은 한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비통함의 순간이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마리아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 고통 속에서라도 자신을 향해서 무엇인가 한마디라도 해 주기를 바랬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지만, 어찌 그 처참한 순간에 그런 것을 바랄 수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너무나 놀랍게도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서 입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6절에 보는 대로, 주님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어가시면서도 십계명에 이르신 말씀대로 부모를 공경하심으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알리는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2;4)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건방진 태도가 아니라 부인이라고 부르는 높임말이고 이렇게 부름으로써 주님은 사실상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가지는 관계보다 우선적인 관계가 있음을 공생애 초기에 이미 천명하셨던 것입니다. 그 우선적 관계란 하나님 아버지와 가지는 본질적인 관계입니다. 다시 예수님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19;26)라고 부르심으로써 이렇게 말씀하신 셈입니다. 크룸마허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나의 어머니여, 당신은 이 시간부터 내 딸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주님입니다. 당신은 나를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당신에게 복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나를 찬미해야 합니다. 내 깃발에 충성을 맹세하는 모든 사람들은 내 어머니와 내 형제요, 내 자매입니다. 육체를 따른 모든 관계들과 세상의 관습은 끝이 났습니다. 이제 그 자리보다 더 영적이고 천상적인 것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이제 이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감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시간을 맞은 것입니다.

3. ‘사랑하시는 제자요한
또 한 인물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요한입니다. 본문 26절에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쓰면서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았고, 사랑하시는 제자라고만 썼습니다(13:23; 20:2; 21:7,20,24). 사실, 이렇게 자신을 표현한 요한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 속에는 그의 교만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위로와 소망과 힘이 바로 자기를 사랑하시는 분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고백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 그래서 이 십자가의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이신 분,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목숨을 내려놓으신그분에 대한 고백이 절절히 들어있는 표현인 것입니다.

이 사랑은 요한이 주님을 사랑한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주님께서 요한을 향해서 품으신 사랑입니다. 요한의 삶의 모든 원천이 자기를 사랑하신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복되고 즐거운 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의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인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이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26). 그리고 먼저 어머니께 말씀하셨고, 이어서 이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7절에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이 말씀의 의미, 이 당부의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상,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짐을 맡기신 셈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주님을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이것이 무거운 짐이었겠습니까? 왜 열두 제자 중에 자기가 이 짐을 맡게 되었는지를 불만스럽게 여기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부탁은 주님께서 요한을 얼마나 신뢰하며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적어도 요한 자신에게는 주님께서 자기에게 육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셨다는 것은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신뢰와 사랑의 증거였을 것입니다.

본문 27절에서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정황으로 볼 때, 요한은 주님의 이 말씀을 자기의 가장 큰 명예로, 이 땅에서 부여받을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으로 여겼을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은 아마 주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 자기의 온 영혼을 다해서 이렇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 이분이 저의 어머니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이미 죽었다고 많은 학자들이 가정하는 것은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시는 이 말씀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성경은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한 명도 아니고 네 명인데, 성경은 그들의 이름도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13:55)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주님을 믿지 않았던 혈육들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족이 된 요한에게 믿음의 어머니를 부탁하신 것입니다. 이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주님은 당신께서 여전히 아들임을 인정하시면서 어머니가 의탁할 한 아들을 어머니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동정하시는 대제사장으로서 이 일을 하셨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4:15).

4. 예언의 성취(69:8; 3:15)
신약 성경이 그것을 지적하여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많은 성경학자들은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도 역시 구약 예언의 성취라고 생각합니다. 시편 698절에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형제에게 객이 되었다.’ 함은 형제인 유대인들에게 버림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다.’ 함은 예수님에 혈육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남처럼 취급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 상황이 십자가에 달려서 믿음의 어머니를 믿음의 제자에게 부탁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그대로 성취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와 요한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의도하신 것일까요? 단순히 부모를 공경함을 드러내시는 것, 단순히 육신의 어머니를 염려하신 것이 전부이겠습니까? 그저 시편 예언의 성취만입니까? 아닙니다.

레이먼드 브라운은 바로 이 부분이 예수님에 사역의 절정이라고 말했습니다. 28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어머니와 요한에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제야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레이먼드 브라운이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창세기 315절의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하신 약속에 근거하여 하와가 가인을 낳은 후에 했던 말, 창세기 41절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하고 소리칠 수 있는 진정한 하와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구주를 낳은 어머니로서 창세기 315절의 약속을 성취한 여인이 된 것입니다. 이런 연관 속에서 주님은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아셨다는 것입니다.

5. 새로운 가족, 십자가 공동체의 탄생
마리아와 요한에게 하신 이 말씀은 그저 개인적인 부탁의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구속사의 중요한 절정이었을 뿐 아니라, 이 순간 십자가 앞에서 태어난 한 새로운 관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구속을 완전히 이루시면서, 새로운 가족을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세우시는 완전히 새로운 관계, 새로운 가족, 새로운 공동체의 출발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예수님과의 지상적 관계를 정리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요한을 새로운 아들로 맞이하는 것이 바로 그 새로운 관계입니다. 이 새로운 관계로 맺어진 새로운 가족을 십자가 공동체 혹은 십자가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공동체의 원리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이 가족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로부터 공동체 모두에게 흘러넘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당신 자신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사랑으로 새로운 가족, 십자가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이 새 가족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십자가에서 부어진 구주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구주를 사랑합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은혜를 잊을 수 없고,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이 새로운 가족, 영적 공동체가 가지는 형제 사랑의 본질적인 특징과 비밀은 십자가에 못 박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의 중심에는 오직 십자가, 십자가만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입은 하나님에 자녀들의 고백이고 경험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이런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인간적인 사랑으로 둔갑시키고, 십자가가 없이도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따뜻하고 좋은 분위기로 대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특권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마태복음 1250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두 사람, 마리아와 요한을 지목하신 것입니다. 정직하게 반응합시다.

오늘 이, 말씀들이 여러분에게 다소 부담이 된다고 느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자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누구든지 모두가 다 새로운 가족이고 식구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보여주신 대로, 혈육보다 강합니다. 이 새로운 가족 관계 안에서의 사랑은 진실로 가족이 된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알지 못한다면, 교회는 그저 세상의 어떤 조직들 속에서 맺는 관계 이상이 절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말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주와 주님으로 만나셨다면, 여러분이 진실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다면 여러분은 이미 새로운 가족 관계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 가족 관계에 들어오신 분들은 이 새로운 가족 관계, 십자가 공동체 속에서 그 사랑을 배워가야 합니다. 이것은 실로 신비롭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혈육이 부인할 수 없는 실재이듯이,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이 새로운 가족, 십자가 공동체도 부인할 수 없는 실재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경험하십니까? 물론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아직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신이 없으시다면, 여러분은 이제 그 축복과 그 은혜를 제발 제게서 떠나게 하지 마시기를 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주님의 변함없고 신실한 약속을 믿으십시오. 요한복음 637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이 새로운 관계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그 피의 대가로 만들고 세워진 것이고, 그것이 바로 지금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제 생애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상입니다. 이 엄청난 은혜와 영광을 안 후에, 저는 제 평생에 교회를 향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성령님께서 그런 동일한 은혜를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이 포기할 수 없는 꿈을 가지고 십자가 공동체, 새로운 가족의 축복과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며,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공동체에서 우리 구주께서 십자가에서 쏟으신 사랑을 경험하고 주님께 무릎 꿇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6. 현실적 과제와 적용(요일 3:16~17, 14; 25:40,45)
이것은 그냥 하자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까 부른 찬송 가사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주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라고 한 것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만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으로 새로운 가족을 사랑할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까? 십자가에 달려 자기 목숨을 나를 위하여 주심으로 그 사랑을 알게 하신 은혜를 경험한 자들만이 이 사랑을 알고 이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이 사랑의 이야기는 그저 듣기 좋은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이 새로운 가족 안에서의 형제 사랑은 나이스한(nice) 사람이 돼서 좋은 분위기를 만들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이스한 것이지,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주신 사랑과 동일한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3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도 형제를 위해서 주님이 그러셨듯이 목숨을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새로운 가족, 십자가 공동체 안에서의 형제 사랑의 정의입니다. 이것을 우리 마음대로, 편의대로 희석시키지 맙시다. 신자라면,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구체적 예가 요한일서 317절에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사랑은 구체적인 것이고, 목숨을 준다는 것은 재물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맺기 전에 요한일서의 한 구절을 함께 주목하고 싶습니다. 요한일서 314절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정말 특이하고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갔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완료형 시제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을 믿을 때 믿는 사람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라고 할 때는 현재형 시제가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현재적으로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이미 일어난 위대한 구원의 사건을 현재적으로 경험한다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러분 가운데,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확신을 가진 분들에게 도전합니다.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듯이 사랑하는 일에 여러분 자신을 드리십시오. 이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힘없고 확신 없는 삶에서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알고 경험하고 받은 구원의 감격을 더욱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시작은 십자가 사랑을 여러분이 알고 경험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이 사랑을 아는 만큼, 여러분은 점점 더 형제를 깊이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마지막 심판 날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540, 45절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요한이 자기 온 영혼을 다해서 마음으로 주님께 대답했듯이, 여러분도 , 주님께서 사랑하신 이들이 저의 어머니이고 저의 형제이며 저의 자매입니다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그런 자들에게 어찌 무한한 복을 부어주시지 않으시겠으며, 그런 자들의 교회를 어찌 영광스럽게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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